수요설교

뼈골짜기(겔37;1-3)141015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0. 24. 09:56

뼈 골짜기(에스겔 37:1-3)

음성               동영상 

 이근호 14-10-15 21:15 
뼈 골짜기


2014년 10월 15일                   본문 말씀: 에스겔 37:1-3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구원의 외곽 상황, 그곳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상황이 머무는 곳입니다. 또한 그곳은 창조의 원리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광경이 나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며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무슨 목적으로 천지를 창조했는지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약에 오면 그 내막이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습니다. 골로새서 1:15-17에 보면, “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창조란 창조물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목적과 의미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서 드러나지 않는 내용이 신약에 와서 비로소 확연히 드러나는 그 중간 과정이 되는 오늘 본문에서도 창조의 내막이 내비치게 되어 있습니다.

창조란 단순히 없는데서 있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자’라고 호칭되는 선지자를 데리고 어떤 지역으로 이동시키십니다. 여기에 에스겔 알아서 찾아가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신의 능력으로 몰고 가십니다. 그렇게 해서 도달된 어느 골짜기에는 하나님과 인자와 성신이 다같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신약적으로 말씀드려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협의하고 있는 광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호칭하는 ‘인자’는 장차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며 사용하시는 호칭이 됩니다. 이는 곧 에스겔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창조 내역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분 외에 그 현장에 또 있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뼈들’입니다. 이 뼈들은 나중에 살아서 ‘하나님의 군대’ 곧 이스라엘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는 ‘이스라엘의 창조’에 관한 대목입니다. 이 이스라엘 창조에 인자되시는 분이 관여됩니다. 왜 관여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창조의 원래 이유와 목적이 결코 인간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곧 인자로 부리는 분의 주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하고 난 뒤,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신은 마땅히 자신이 창조한 인간 구원에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창조의 존재 이유는, 인자되시는 분이 주님으로 등극하시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즉 주님은 죽음 속에서만 나오십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의 신들은 죽지 않는 신들이며 도리어 죽음을 관장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참된 주님께서는 죽음 속에서 나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군대가 죽음 속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장차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될 기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란 창세기처럼 없는데서 있게 하는데 주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죽음 속에서 나타나신 바로 그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아담이 선악과 따먹는 범죄로 인하여 저주 속에서 죽어가니 부랴부랴 하나님께서 대책을 내놓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메시야께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 나무를 심어놓지 말든지, 행여 놓여 있더라도 죽음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완화해서 앞으로도 그 동산에서 계속 생활하도록 해주시는 것이 사랑의 영속성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런 발상이 죄악된 발상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구원을 위한 하나님인양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예수님의 주되심을 목적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입니다.

출애굽기 4:22-23에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의도적으로 요셉을 잊은 바로왕 지배하에 두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들이란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올 수 없는 권세 속에서 ‘어린양의 죽음과 피흘리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성립하는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작업이야말로 진정 창조 행위의 마무리요 완성작업입니다. 이 아들의 주되심에서 인간은 빠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찾아간 곳은 절대 정적, 절대 고요가 보장되는 곳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군대가 될 자들은 그 현장에서 빠짝 마른 뼈들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점차 창조의 내막이 알려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창조란 단순히 없는데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자를 주로 등극하기 위한 창조며 그분의 형상을 보여주는 과정을 통해서 창조의 실체가 펼쳐집니다. 그 과정은 곧 ‘피 흘려 죽으시는 죽음’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신을 높은 하늘에서 찾지만, 참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죽음이 널부러진 곳으로 데려갑니다.

이스라엘이 탄생되는 그곳이 곧 신이 출현하는 같은 곳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음 속에서 나오는 방식으로 주님이 되십니다. 인간의 존재보다 장차 오실 주님의 죽음이 먼저입니다. 인간의 타락을 무효화하시기 위해 허겁지겁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획 잡힌 바에 의하면 주님은 십자가 못박혀 돌아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 주되심의 절대 요건을 위한 피흘리심입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들은 그저 뼈들입니다.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뼈들이 관여할 바가 못됩니다. 지옥을 가던, 천국을 가던 그 모든 결정은 십자가의 실린 상반된 두 가지 속성만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미워할 자는 미워하시는 권한은 오직 주님에게만 합당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창조의 원리 따라 우리가 만들어졌음을 성령님을 통해 늘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10-16 12:42 
109강-에스겔 37장1절-3절(뼈 골짜기)1410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7장11절-14절입니다. 구약성경 120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7:1-3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뼈가 있다는 이것은 참 너무나도 고요한 지경이죠. 뼈들만 있으니 시끄러울 일이 없습니다. 그 고요한 곳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거기에 가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거기에 데려가셨는가? 그것은 에스겔을 호칭할 때 그 호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실 때 3절에, “인자야”라고 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루는 것은 에스겔만 상대로 해서 그 개인에게만 어떤 정보를 주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뜻이 에스겔뿐만 아니고 ‘인자’라는 그 핵심 자체로서 나중에 모든 택한 백성들이 결속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 에스겔이 왔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고요.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서 여기에 장차오실 ‘인자’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권능으로 부르실 때 내비게이션이나 GPS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신이란 장차 올 성령이시죠. 성부, 인자, 곧 성자, 성신, 여기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모이신 셈이 되지요.



그렇다면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창조이전에 구원이 어떤 식으로 출발하느냐, 구원의 외곽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구원 받았다, 그것만 좋아할게 아니라 이 구원이라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상황 속에서, 그 분들이 어떤 의논을 해서 구원을 우리 죄인에게 주셨는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 에스겔은 미리 앞당겨서 그 당시에 알려줬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 계시고 성신 계시고 그 다음에 인자라고 불리는 선지자가 있다면 여기에 또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뼈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화하고 있는 분들은 바로 하나님, 인자, 그리고 성령이 거기 계시니까 대화하고 계시는 분은 삼위일체라고 본다면 여기 대화하지 못하고 조용히 잠들고 있는 상태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뼈들입니다. 이 말은 홍해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올 때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죠. “가만히 있어라.”(출 14:13,14)



제가 미국 맨해튼 마지막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빠져라.” 부활의 세계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이렇게 제가 물었고 답변하기를 “부활에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 주님안의 그 신천지, 새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라고 해 놓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빠져라.” 그것은 구원이 시작되는 그 지점, 구원이 주어지는 그 지점을 에워싸고 있는 구원의 외곽상황이 어떤 상황이냐를 언급하면서 구원될 사람들은 잠잠히 있어라, 너는 빠져라, 또는 고요한 절대 정적, 절대 고요함, 그런 곳에서 이제 구원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 보면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성령, 그리고 인자, 이 분들의 의논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후의 상황은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느냐? 그 이후의 상황도 인간은 개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 하나님이 살아서 일한다는 것은 바로 이 원초적인 상황의 반복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성도들, 교인들은 진리를 듣기를 원하지요. 진리를 이야기할 때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서 진리가 뭐냐? “목사님, 헌금은 어떻게 합니까? 전도는 어떻게 합니까? 예배는 어떻게 합니까?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라는 여러 가지의 질문에 대해서 정말 진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요? 정말 진리를 듣고 싶습니까? 그러면 말씀드릴게요.



진리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이미 다 끝나버렸어요. 헌금이요? 주님이 이미 헌금을 다 했어요. 전도? 주께서 이미 다 치러서 주께서 친히 전도하고 계십니다. 예배요? 주께서 만들어준 상황이 예배에요. 인간이 할 게 없어요. “목사님, 헌금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헌금이에요. 주님이 예물이고 주님이 제물이 되시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데 뭘 우리가 해요. 그래서 이 여섯 자로 줄이면 뭐냐? “인간은 빠져라.”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인간은 빠져야 된다. 왜? 우리는 계속해서 ‘뼈’ 이어야 되니까.



가만히 있어. 절대정적. 절대 고요함. 인간은 빠져라.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구원의 근거는 이미 예수님께서 값을 다 치렀다.” 이미 주님께서 다 한 거예요. 헌금도 주께서 다 하셨고 십일조도 주께서 다 하시고 감사헌금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지 않습니까? 전도요? 전도는 주께서 해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주님의 전도는 완벽해요. 우리의 전도는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의 전도는 완벽합니다. 기도요? 주님의 기도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주님의 자신의 기도로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는 겁니다. 예배요? 주께서 성령 보내셔서 주께서 성령 보낸 그 현장, 주께서 임재하시면 주께서 임재하신 그곳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비로소 성사되는 겁니다. 주께서 임재하지 않으면 인간이 모여서 백날 고함쳐봐야 그것은 절대 시끄러움입니다. 절대고요가 아니고 시끄럽기 짝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의 임재를 느끼신다면 이미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예배의 완성입니다. 이게 진리에요.



굉장히 간단한 문제지요. 이걸 다시 한 번 간추린다면 진리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그 상황이, 주님의 임재 한 순간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고, 되풀이 되고, 되풀이되고,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뼈의 입장에 늘 서 있고 그 뼈에 대해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뼈를 살리시는, 창조해 내시는 작업은 지금도 매일같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한다 하는데 사실은 발견이 아니고 사실은 발명이에요. “NOT DISCOVERY BUT INVENTION.” 발견이 아니고 발명입니다. 발명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만들어놓은 것을 소급해서 차후에 성령을 통해서 발견하는 겁니다.



“주여, 오늘도 나를 발명하셨군요.” 내일 되면 내일 또 나를 발명하시는데 그 발명의 원천재료가 뭐냐, 우리는 절대고요, 뼈에 불과한 겁니다. 뼈에 불과한 존재를 성령의 반복적인 창조행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날마다 발명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진리에 의해서 발명되거든요. 자, 여기서 진도를 더 나가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데 왜 뼈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가의 그 문제가 대두됩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 라고 창세기를 통해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없는데서 창조했다는 것이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틀린 말입니다. 없는데서 내가 있다, “하나님, 없는데서 제가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창조에 관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듣고 싶은 고백이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그 목적이 뭐냐? “예수님을 위해서 살려고 만들었습니다.”하는 그 고백과 한 번 비교해보세요. 내가 없는데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는 이 고백 속에는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창조의 목적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없는데서 있게 해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이 말 속에는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제가 알아서 스스로 잘 살겠습니다.” 하는 자기 생각이 백 프로 들어 있어요.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모습으로, 주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할 때는 반드시 그 토대가 무엇에서 출발해야 되느냐 하면, 없는 데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고 죽음에서부터 출발해야 되는 거예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창조는 예수님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를 방금 제가 해 드린 겁니다. 우리의 시간 관념상 생각하기는, 죽음이라는 것은 일단 만들어놓고 난 뒤에 죄 때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지금 제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았는데 아담이 범죄 해서 아담의 죽음이 왔다. 하나님께서 허겁지겁 그 죽음을 생명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죽음에 참여해서 죽지 않아야 될 분이 죽음을 통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그 죽음 속에 참여된 예수님의 생명을 근거로 해서 죽은 우리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산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는가? 애초부터 선악과를 심지 않아서 인간을 안 죽게 할 수는 없었는가, 하는 그 문제가 발생이 되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아이고, 내가 인간을 관리를 잘 못했구나. 내가 한 눈 파는 사이에 인간이 범죄 하게 해서 죽였구나. 허겁지겁 내가 인간을 사랑하니까 살려내야지.” 이렇게 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고 따먹게 해서 죽게 하신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간의 창조보다 먼저 계획된 일이라는 것이 될 때에 그야말로 아담은 예수님의 모형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인간이 죄짓고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 장차오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비로소 주가 된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서 십자가 죽음을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과를 심어놓았고, 인간은 그것을 따먹어야 했고, 그래서 죄를 지어야 했고, 그래서 죽어야 했고, 그 죽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죽음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님의 형상을 입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의 취지를 드러낼 수가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논리가 되어버리면 성경전체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니고, 그것은 구원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구원파뿐이 아니고 오늘날 교회에서 다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 주,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책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초점으로 세상을 꾸리기를 애초부터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예수 안에서 창조된 거예요. 예수 안에서 선택되었고 예수 안에서 창조된 겁니다.



이것은 창조이전에 이미 ‘예수 안’이라는 목적을 먼저 깔아놓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창세기 1장에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구원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구원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게 된다면 어떤 문제가 아주 손쉽게 해결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 사람은 왜 지옥 보냅니까?” 하는 문제가 아주 간단하게 해결돼요.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미워해서, 에서를 미워해서 지옥 보내고 야곱을 사랑해서 천국 보내는 이것은 인간이 보기에 불합리하고 공평하지 못하게 보이지만 예수님이 갖고 있는 두 속성, 미워하고 사랑하고, 일방적으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할 권리가 주님에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필히 지옥이라는 것이 꼭 필요하고 천국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천주교가 시도하는 연옥설이라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고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환장하신 분이 아니에요. 인간 구원위주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인간 구원위주는 누구 아이디어인가 하면, 신도 하나님도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 된다는 악마적인 발상에서나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에요. “하나님이 만들어놓았잖아요. 책임지세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게 따지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미 범죄 한 이후에 신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할 때 세상 모든 종교가 다 그렇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 소리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죽음을 보라는 거예요. 죽음을 봐라. 죽음 속에서 하나님이 나오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 하나님이 나오기 이전에 먼저 이스라엘부터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모형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출애굽기 4장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라고 했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린 바로 왕을 앞장세워서 히브리인들을 의도적으로 바로왕의 그 권세 속에 갇히게 했습니다. 그렇게 갇히게 하고 난 뒤에 모세를 보내서 하는 말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있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라 아들은 어떻게 발현되고 구체화되느냐 하면, 갇혀 있는 상황을 먼저 전제로 하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상황을 통해서 아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이 세상에 나타나는가를 구체화시키는 겁니다.



구체화되면서 히브리인들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뭐냐? 죽음 사건이지요. 누가 죽습니까? 바로 어린양이 죽거든요. 어린양이 죽어서 문설주에 피를 바릅니다. 바로 그 분이 아들이에요. 그 어린양을 믿을 때 그 믿는 자들이 아들에게 예속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아들이 되는 겁니다. “내 장자라”고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을 장자라고 하지만 로마서 8장에 보면 맏아들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님밖에 없어요. 성령께서 기도하시는 이유는 맏아들을 본 받아서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거기에 분명히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롬 8:29)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맏아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이 세상의 주가 되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주의 형상대로 주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세상 모든 피조세계를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러면 이미 죄지은 입장에서, 죄지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성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 인자되시는 분을 어디서 찾아야 되는가? 다른 말로 하면 대체 하나님은 이미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세계에서 어디서 나오는가? 죽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죽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뼈가 있는 곳으로 데려간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라는 것은 없는데서, 아무것도 없는데서 빛이 있으라고 하니 빛이 있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겁니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에 오면 그 말씀이 예수님 오실 때가 가깝기에 보다 구체화되고 명료하게 그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말씀이 그냥 없는데서 하는 말씀이 아니고 뼈가 있는데서 말합니다. 전에 말씀은 “빛이 있으라.” 하고 끝나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먼저 전제로 깔고 “이 죽은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묻습니다.



이게 바로 창조행위이며 그리고 그 창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시는 인자라는 분이 창조주가 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흔히 아는 상식으로 말하지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그거 정답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가 정답이 아니고 정답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지금도 주께서 임재 하니 제가 뼈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이 뼈라는 사실, 죽은 존재로 저를 보시고 그 죽은 존재가 희망이 있다는 것은 죽은 존재되게 하신 그 분이 다시 우리와 함께해서 날마다 우리를 새로운 이스라엘로 발명해 내는 겁니다. 창조해내는 겁니다. 무엇으로? “인간아, 빠져라.” 그 말이지요.



너 자신은 빠져야 돼요. 우리 자신은 빠지고 늘 뼈에 있어서 주의 말씀만 임한다면 그 말씀의 내용은 뭐냐 하면, 예수님만이 주가 되신다는 그 내용이 백 프로 그대로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으로서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백 퍼센트 오늘도 주님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주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있게 하셨습니다.” 하는 그 고백, 그것이 바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하는 그 문장의 합치되는 상황인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그 다음 어려운 것이 남아 있는데 쉬운 것 먼저 하겠습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자를 부릅니다. 천지창조의 창조가 아닌 보다 발전된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자에, 성신에, 하나님께서 오시고 그리고 그 세분 말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게 뼈입니다. 뼈는 그냥 죽은 상태에요. 죽은 상태지만 나중에 보면 나오지만 말씀이 임하니 그들이 살아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인자라는 분이 이 땅에 오게 되면 인자라는 분이 하시는 일이 오늘 본문의 일과 동일한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뼈에게 말씀을 줘서 살리되 그 살려내는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오직 이 세상에 주님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는 그 고백을 하는 목적으로만 살려내는 거예요. “휴, 죽었다가 살았네.” 그게 목적이 아니고, 자신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누가 살려줬으며 어떤 분이 오셔서 살려냈는가?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일단 살아났으니 이젠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살아 있다는 그 개념자체가 숨 쉬니 살았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려주느냐의 그 관계를 유지해야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겁니다.



예수님 모르고 숨 쉬는 사람 많아요. 주님께서는 그걸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왜, 그 사람의 호흡 속에서 예수님의 주 되심이 안 나타난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지옥 갈사람, 지옥 갈 사람을 죽은 자로 보거든요, 그래서 지옥 갈 사람이기에 은혜를 안 주시고 영생 얻을 사람에게는 “내가 사는 것이 주의 은혜로 사는 것이고 날마다 창조행위로 주께서 날마다 발명해주시니 사는 겁니다.”라는 고백을 이 땅에 살아가면서 계속 토해내고 있으니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 문제가 뭐냐? 왜 예수님이 죽고 인간은 왜 죽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주가 되시는 작업을 개시했느냐 하는 문제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12장 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기 여성이 나오고 아이가 나오지요. 그리고 또 누가 나오느냐 하면,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는 어떤 주체가 나옵니다. 그 주체는 3절에 보면,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대목, 지금 악마 나왔지요. 그 다음에 여자 나왔지요. 그 다음에 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출생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여자의 짝이 없어요. 남자가 없어요. 그래서 이 여자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쪽을 표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아기를 낳았다, 그렇게 보면 돼요. 짝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반드시 남자와 여자라는 짝을 통해서 임신이 되어서 태어나거든요. 그래서 태어나고 난 뒤에 태어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우리를 살려 달라.”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누락시키고 무엇을 놓치는가 하면, 우리가 여기 있게 된 그 내막, 무엇 때문에 있는지, 어떤 것이 먼저 앞서 있기에 우리가 태어났는지를 완전히 상실해버려요. 그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막연하게 눈에 보이는 생존만 급급할 뿐이지 정말 하나님의 창조에 합당한 백성으로서의 그 내용은 빠져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왜 주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냥 생존해서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는 어째서 이 땅에서 살게 되었으며 주께서 살려주십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피 흘려 돌아가셨으며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왜 죽음 속에서 나와야 됩니까?”라는 문제, 정보를 안고 있어야 우리가 주의 백성이 된다는 그 말입니다.



이 점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남자기 때문에 여자들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가 없어요. 혼자서 상상해 봅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점이 뭘까? 남자는 여자하고 결혼을 할 때는 남자 생각이 이래요. 그냥 1+1입니다. 마트에서 세일할 때 원+원 있잖아요. 나는 여기 있고 플러스 옆에 누가 붙어서 식구가 둘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남자들은 결혼식 할 때 약간 흥분하고 결혼 전이나 후나 아무 변동이 없어요. 결혼 전에도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고 직장도 그렇고. 그냥 추가적으로 여자 하나 더 생겼다, 국밥 추가 하듯이 그냥 추가한 거예요.



그런데 그에 비해서 여자는 어떤가 하면, 여자는 그 결혼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에요. 굉장히 들떠 있고 하던 일도 때려치워버리고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그렇게 하더라는 말이지요. 제가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는 결혼을 그렇게 간편하게 생각하는데, 1+1인데 왜 여자들은 결혼에 그렇게 몸 달아하고 거기에 올 인하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기는가?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남자는 여자가 추가밥처럼 그냥 붙어 있는 것이지만 여자는 그렇게 그냥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남자의 심장과 두뇌에 토굴을 파서 그 안에 들어가 버려요.



만화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큰 로봇이 있으면 그 로봇을 움직이는 사람은 심장 부위나 머리 부위에 들어가서 창문을 통해서 내다보면서 다른 외계인과 싸우는 장면이 있잖아요. 여자는 남자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속으로 들어가서 이제는, 여자라 하는 것은 결혼하고부터는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자기 남편의 창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돼요. 좋게 하면 남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고 좀 섭섭하게 보게 되면 여자가 남자의 골수를 다 빼먹는다는 뜻이에요. 여자 본인의 인생은 버리고 이제는 껍데기 같은 남자를 앞장세워서 여자 본인이 생각했던 것을 자기와 결혼한 남편을 통해서 남편을 부려가면서 세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개척하기 때문에 여자는 남편 속에 들어가서 올 인해 버리는 겁니다. 남자입장은 여자가 옆에 붙어 있는 것이고.



제가 그 말을 하는 것은 지금 부부싸움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신부로서 우리가, 교회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주님의 여자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신부로서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땅에서 신부로서 하나님께서 택해줬다는 것, 그 신랑이 날마다 신부된 우리를 날마다 매일 같이 살려내고 있다는 것. 어떻게? 뼈 같은 우리를,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 될, “너는 빠져.” 그 빠져도 되는 우리를 날마다 주께서 살려서 그 살린 우리 안에 백 프로,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주가 예수님이시고 이 세상은 오직 주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하나님께서 오늘도 그렇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도록 작용하는 것을 우리가 느끼려면 날마다 내 인생에서 인간은 빠져야 되는 겁니다. “인간은 빠져라.”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창조가 옛날에만 있었는지 알았는데 한 번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날마다 자기백성 속에서 주의 고백이 나오도록 창조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가 임재하고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오늘도 살았습니다.’ 하는 그 고백이 터져 나오는 현상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