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강-에스겔 37장11절-14절(무덤을 열고)1410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7장11절-14절입니다. 구약성경 121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7:11-14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오늘 본문 11절에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되어 있고 10절에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의 나라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군대가 있는 법입니다. 보통 그렇잖아요. 그런데 군대가 먼저 조직되기 위해서 나라가 생기는 경우는 이스라엘 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실 때 분명히 언급하시기를 “나는 애굽의 신들과 싸운다.”고 했습니다. 애굽의 신들과 싸울 때 그 애굽의 신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자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지 않은 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그 무엇, 그게 바로 여호와하나님의 원수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맞은편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새롭게 없는데서 생겨난 민족,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무덤을 열고 나온다는 이 대목에 있어서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들 하고 있어요. 지난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뼈들이 있는데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더하니까 사망을 받은 자들이 생기로 말미암아 살아났다.
살아났다는 것, 그리고 오늘 본문 13절에, 무덤을 열고 나왔다. 이 대목을 들으면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들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그냥 살다가 그냥 죽는 게 낫습니까? 아니면 부활해서 또 사는 것이 낫습니까? 저는 아무리 봐도 그냥 죽는 게 낫지 싶은데요. 살만큼 살다가 아예 사라져버린다면 ‘나’라고 하는 존재도 없고 그야말로 할머니들이 하는 말처럼, 눈 꽉 감고 아무것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듣고 눈 감는 그 ‘나’마저 훅 하고 없어져버리면 그 없어진 순간 세상만사 근심걱정도 같이 없어질 것인데. 아픈 것도 없어지고 괴로운 것도 없어지고.
괴로워해야 될 주인공이 없어졌는데 괴로움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또 살아요? 환장할 일입니다, 그 산다는 것이. 주일 낮에 그런 말씀 드렸는데 사람이 안 죽어요. 이게 골치 아픈 이야기라니까요. 죽으면 좋은데 이게 안 죽으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밟아도 안 죽고 불속에 들어가도 안 죽고 물에 빠져도 안 죽고 백날 죽어봐야 다시 무덤에서 기어 나오고. 이 끈질긴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운명. “왜 안 죽습니까? 제발 좀 죽여 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칠 수밖에 없는 한, 사실 사람들의 모든 기도는 살려달라고 기도하지만 아예 죽여 없애달라는 기도가 차라리 그 속에 품고 있는 속마음이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답니다. 야, 이거! 도대체 죽은 자를 살려내서 뭐 하려고, 뭐 하려고 살려내시는 겁니까? 제가 하는 말은 이거예요. 누굴 위한 부활이냐, 이 말이에요. 누굴 위한 부활이냐? 죽어서, 살아서 영생, 행복을 보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예 ‘나’라는 존재가 훅 하고 먼지가 되어서, 누가 노래한 것처럼 그냥 먼지가 되어 그냥 없어져버리는 것, 와, 이거, 없어지면 물론 영생도 없어지고 복락도 없어지지만 아픈 것도 없어지고 지옥 가는 것도 없어지니 세상 이런 좋은 팔자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질 수만 있다면 우리 몸을 빠개서라도 없애고 싶은데 이 피조물이라는 것이 창조주를 위하여 결정된 운명이기에 스스로 없앤다고 사라질 그런 몸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대체 이 부활은 누굴 위한 부활이란 말입니까? 우리 좋으라고 하는 부활은 영생의 부활에서 탈락입니다. 목적이 따로 있는, 우리가 살고자 하는 그 목적이 아닌, 그 목적은 부활의 목적이 될 수 없고요. 뭔가 살려내시는데 살려내는 이유가 따로 있기에 살려내는 겁니다. 살기 싫어도 살아나야 돼요. 그게 부활이에요. 우리가 부활되고 싶지 않아도 부활되어야 돼요.
따라서 부활된 자는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지옥가고 싶어도 지옥 못가고, 천국으로 골인해서 가야 됩니다. 그 근거가 8, 9절에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대언하라 하니까 일단 뼈가 스스로 움직여서 이 뼈 저 뼈 결합이 돼요. 서로 연락이 되었습니다. 연락되고 힘줄 생기고 가죽이 덮였는데 뭐는 없더라? 생기는 없더라, 고 되어 있어요.
그러고 난 뒤에 9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라고 부르시면서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고 할 때에 그 생기가 사방에서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했다. 그러면 이 산다는 의미가 반드시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 절차가 뭐냐 하면, 너를 죽였던 그 사망에서의 탈출입니다. 너를 죽였던, 너를 죽였던 그 힘에서부터의 탈출이지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사람의 뼈들이 사람 되었다는 것이 부활이 아니고 이스라엘사람을 죽게 한 그 배후의 어떤 세력이 있어요.
그냥 연탄가스에 죽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의미를 무산시키고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한 사명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공격해서 죽여 버렸던,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의도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드는 숨겨진 어둠의 힘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사망했던 그 사망에서부터 그들이 다시 생기를 얻은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기를 얻는 조건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죽게 해서 이스라엘이 해야 될 그 사명마저 무산시키는 그 힘보다 더 센 힘을 가진 분이 생기를 줘야 비로소 그 사람은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서의 그 사명을 연속시키고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살기 싫은데, 몸 아픈데 죽었다가 다시 살면 좋겠다. 여기서 힘든데 천국 가서 또 살면 좋겠다.” 단순히 개인적인, 죽었다가 다시 영생 얻어서 편안하게 낙을 누리는 그런 식의 천국, 그런 식의 부활의 세계는, 그런 하늘나라는 없어요. 이 세상 온 천지에 그런 천국, 그런 부활은 없습니다. 진짜 단도직입적으로 해서, 이게 너무 과격한 발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서 말하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요새 교회에서 말하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화엄경에서 나왔지요. 화엄경.
불교의 화엄경에서 화엄(華嚴)이라는 뜻은 뭐냐? 들판 천지에 온 꽃들이 만개하는 상태, 그게 화엄의 세계에요. 수많은 꽃들, 채송화면 채송화, 코스모스면 코스모스, 들국화는 들국화, 각기 자기 개성을 살려서 온 천지에 각양 종류의 꽃들이 누가 지배하지 않는 상태에서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그 세계가 화엄의 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화엄의 세계를 언급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너는 곧 신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너는 이 세상에 너 밖에 없다.”는 것을 긍정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 중심이고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완성되는 그 계통에서 언급되는 그 세계가 불교에서 극락의 세계에요. 그 반대로 내가 힘든 세계가 바로 지옥의 세계지요. 고통 받는 세계. 염라대왕한테 홍두깨로 얻어맞는 세계, 곤장 맞는 세계.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이 천국과 지옥, 부활의 세계와 지옥의 세계는 나로부터 출발한 게 아닙니다. 내가 편한 나의 행복, 나의 가치, 이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동원된 군대들입니다. 싸움을 해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싸움.
그 약속의 내용이 궁금하지요. 그 약속의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냐, 아니면 실패자냐.”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에요. 서른세 살 먹은 나사렛 청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게 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세른 세 살 먹은 그 청년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 청년, 처자가 아니고, 아가씨가 아니고 서른세 살 먹은 청년, 목수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 그 분이 과연 주님이냐, 아니냐. 천지창조 할 때 관여했던 그 성자냐, 아니면 그냥 보통 사람인 목수의 아들이냐, 그 싸움에 우리가 동원된 거예요.
신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냐에 관한 싸움이에요.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교회 와서 몸 아프면 낫게 해주세요, 사업 안 되면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가정에 우환이 있는데 해결해 달라, 고 할 때 그 기도는 환경을 위한 기도에요. 제가 주일날에 했잖아요. 다 불교신자 되시라고. 불교에서 비는 기도에요, 그게. 하늘나라 간다고요? 하나님은 하늘을 철회하고 땅에 내려왔는데요? 예수님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에요.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가 아니라 곧 예수님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땅에 있는 하늘나라를 찾아야 돼요. 하늘 자체가 없어요. 하늘 자체가 땅의 일부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은 땅의 일부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은 대자연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늘나라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없어요. 없는데 생겼어요. 누가 와서? 예수님 오시면서. “보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다.” 세례요한이 그 때 한 것처럼 처음 왔습니다. 옛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 흔적은 있었지요. 홍해가 갈라진다든지 하는 흔적은 있었지요.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방주에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인간자체에 어떤 변화가 없어도 괜찮아요. 문 열고 방주라는 잣나무로 만든 곳에 문 열고 들어가면 돼요. 잣나무의 냄새가 풍기는 빈 공간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에스겔에 와서는 그게 아니고 뼈가 되었다가 하나님의 군대로 다시 태어나야 돼요. 이것은 어떤 공간, 어떤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의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따라서 에스겔 37장에서 뼈들이 인자의 말을 듣고 생기가 돌아서 큰 군대가 되었다는 이 이야기로 인하여 소위 부활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절망을 줘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간증할 때 기도해서 병 나았다, 기도하니까 교회 부흥되었다, 그런 간증은 많이 들어봤지만 “내가 전에 뼈였지만 예수님 와서 이야기하니까 지금 내가 사람 되었다.” 이런 간증은 못 들어봤어요.
이런 간증집도 없어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수영장에 갔는데 왠지 걷고 싶은 맘이 생겨서 걸었더니 물 위를 걷게 되었습니다.” 이런 간증도 못 들어봤어요. 그래서 한 번 되니까 집에 가서 다시 해 본다고 세숫대야에 물 받아놓고 세숫대야에 올라서니 물 위에 붕붕 뜨더라, 이런 간증 못 들어봤습니다. 또 이런 간증도 못 봤어요. “내가 가야산에 등산 갔는데 너무 심심해서 소나무가 있기에 ‘소나무 너 뽑혀라.’ 했더니 소나무가 뽑혀서 날라 갔는데 동해바다에 빠집디다.” 하는 그런 간증도 못 들어봤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왜 그걸 못해요?
문둥병에서 나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 해서 베드로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병이어 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직접 뼈가 되어야 되고 직접 뼈에서 주님의 음성, 그 인자의 음성을 들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그래서 주님의 원수와 싸우는 군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 정도 될 때 비로소 “이것은 부활이다.”라고 낙점될 수가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 부활이야기가 나왔다는 자체는 그야 말로 천국을 기다리고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히려 절망감을 안겨줄 뿐이에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세상이 멸망한다. 사람들은 이걸 다 긍정해요. “망해야 돼. 이 땅은 망해버려야 돼.” 그런데 망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망해야 된다고는 하는데 그 망하는 이유는? 망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적인 사명을 감당 못했기에 망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안 망하려면 본인이 이스라엘 군대가 되어서 주의 원수와 싸워야 되는데 그것은 또 자기 몸에 일어나지 않으니까 이것은 망해야 된다는 그 망함 속에 본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리밖에 안돼요. 성경전체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만 따오면 안돼요.
성경 전체가 하나로 엮여야 돼요. 엮이는 그게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로서 사명을 줬더니만 이스라엘을 패배케 한 막강한 다른 힘이 있는데 그것은 악마의 힘, 하나님의 원수에게 이기지 못해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하나님의 적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해서 뼈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뼈가 된 이스라엘에 찾아오셔서 인자를 보내서 생기를 주니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군대로 살아났다.
그들이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동안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하나님의 원수들이 이스라엘에게는 손을 쓸 수가 없다. 이런 절차가 장착되어야 돼요. 그래야 이것이 부활이 된다고요. 그런 절차를 다 빼놓고 죽어서 좋은데 간다? 그것은 화엄의 세계에요. 누구 좋으라고요? 누구 좋으라고 가는데? 나를 위한 부활은 없습니다. 나를 위한 천국도 없고. 나를 위한 영생도 없어요. 자기가 언제 봤다고 영생, 부활, 천국, 하는지 모르겠어요? 본문 14절에 보면,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부활된다고 끝이 아닙니다. 부활 되었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 이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친히 너희 속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지난 주 수요일 말씀처럼 하나님의 신이 인자에게 찾아왔거든요. 그러면 한 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이 신이 인자라고 하는 에스겔에게 찾아왔는데 그 하나님의 신이 이제는 개인 에스겔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뼈가 뭉쳐진 하나님의 군대가 된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는 말이지요. 임한다면 그 하나님의 신은 먼저 누구에게 임해야 되는가? 인자라고 불린 에스겔에게 먼저 임해야 되는 겁니다.
에스겔의 호칭이 인자에요. 결국 에스겔은 예수님 오시기전의 모형이 되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부활이니, 이스라엘을 만든다,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함께 살겠다, 하는 모든 것은 결국 인자가 해야 될 기능을 다 완수하실 분이 메시아로 오셔야 되는 겁니다. 그 분이 오셔서 그 분이 일방적으로 뼈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군대를 살려내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광의 부활이 되어야 되고, 천국가야 되고, 영생 얻을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주께서 이렇게 나를 만들었습니다.” 하는 고백이지요.
그 말은 “내가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라는 말은 일체 없어야 되는 거예요. 왜? 뼈니까. 뼈가 무슨 생각을 합니까? 뼈가 무슨 소설을 써요? 뼈가 무슨 희망을 갖습니까? 뼈인데. 제가 아까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부활보다 더 좋은 것은 아예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는데요. 없애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없어지느냐 하면,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상상력, 모든 기억하는 것, 모든 꿈꾸는 것, 이거 하나님 보시기에 없어져도 될 만한 세계 속에 갇혀 사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꿈꾸는 모든 것은 그야말로 다 쓰잘데기 없는 겁니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몇 가지만 예를 들면 김무성의 개헌논의, 쓰잘데기 없는 거예요. 세월호 보상문제, 쓰잘 데기 없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 부흥문제, 쓰잘데기 없는 겁니다. 그리고 아들 딸 시집가는 것, 쓰잘데기 없는 거예요. 그리고 야구 준 플레이 오프, 쓰잘데기 없는 거예요. 북한의 핵문제, 쓰잘데기 없는 문제에요. 세상에 우리가, 인간이 꿈꾸는 모든 것은 해골이 꿈꾸는, 해골이 해골을 모델로 삼아서 “나도 저런 해골이 되게 하옵소서.” 이거 하고 있어요. 나도 김 태희처럼 얼굴이 예쁘게 해달라는 이것은 해골이 해골을 부러워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 살아나봤자 또 죽어요. 또 죽는다고. 왜냐 하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악마기 때문에. 이건 보이지 않은 세상 신이거든요. 보이지 않는 세상 신이 “입 다물어! 입 다물어!” 전부 몽둥이가지고 내리치는 겁니다. 일체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부활의 역사, 천국을 못 보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자꾸 화엄의 세계, 내가 스스로 멋지게 되는 그 세계만 희망하도록, 꿈꾸도록, 교회 와서 새벽기도 열심히 하도록 만드는 것, 마귀가 그렇게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새벽기도 하도록 마귀가 그 짓한다는 이야기는 제가 처음 하네요. 새벽기도 하는 그 내용이 뭡니까?
“주여, 마귀와 싸우게 하옵소서.” 그런 내용은 좋지요. 그런데 그 마귀가 누군지 아세요? 쓰잘데기 없는 내가 바로마귀노릇 하고 있는데? 내가! 세상에 있는 재리의 유혹과 육신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의 자랑거리, 거기에 신경이 쓰여서 정신이 없는데요. 그게 사명입니까? 이게 부활에 참여된 성도의 사명이 그런 것들입니까? 부활의 성도의 사명은 하나밖에 없어요. 뭡니까? “주여, 제가 가는 인생길은 절대로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제가 손댄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손댔습니다.”라는 고백, 그리고 감사, 그것뿐입니다.
하루하루 인생에 주어지는 모든 변화, 모든 사태는 내가 인위로 기대했던 그 사태가 아니고 내가 원했던 그 상황이 아닙니다. 몸이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일이 잘 되든지 아니면 꼬이든지 이것은 내가 그런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덮친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부활했기 때문에 이미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원수가 누구며 주님의 원수가 이 땅에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로 목격하게 하는데 그 목격의 정답은 바로 성경 말씀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성경말씀대로.
그 말씀대로 드러나는데 있어서 포인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주님, 인자되시는 인자의 영이 이미 우리 속에 작용했기에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가치라는 것을 따로 뽑을 필요가 없어요. 사도바울이 그런 삶이거든요.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바로 주의 말씀과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하늘나라고 그곳이 천국이에요. 이 땅에 있는데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성령 받은 사람만이 보이는 하늘나라, 땅에 와 있는 하늘나라, 그 하늘나라가 땅과 더불어 있으면서 땅과 분리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셨던 그 나라가 십자가를 통해서 간 나라입니다.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십자가를 통해서 간 나라라면 그 나라는 지금쯤 어디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돼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그걸 삼층천이라 하는데 그 삼층천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는 그 지점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왜? ‘땅에 있다.’ 이것을 ‘천국에 있다.’로 같이 적용을 시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천국에서 자꾸 일을 시작해서 그 일을 이 땅에 자꾸 퍼부어요. 그게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자꾸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슨 일을 일으킵니다. 그 일을 일으킨 열매가 뭐냐 하면, 바로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를 설명할 때……, 참 교회를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전에는 제가 발생론이라 했습니다만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상당히 철학적 개념 같고.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걸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부적이라는 것이 어디에 소용되는 겁니까? 부적이 필요한때가 언제냐 하면, 액운이 있을 경우에 파스 붙이듯이 부적을 붙이잖아요. 땜질 하듯이.
그러면 부적 붙여서 해결 안되는 게 뭐냐?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부적이라는 것이 뭐냐? 지금 여기 있는데 그 있는 것을 안 다치고 잘 해보기 위해서 돈 십만 원 들이고 이십만 원 들여서 부적을 붙이는데 교회라는 것은 이 땅에 없어요. 없는데 있어요. 나타났기 때문에. 그걸 제가 골치 아프게 신경 쓰면서 ‘어떻게 설명할까, 어떻게 설명할까?’ 하다가 기껏 제가 설교준비하면서 생각한 게 뭐냐 하면, 번개입니다. 번개는 칠 때뿐이지 번개 치고 나면 번개는 없거든요. 그러면 번개는 없는 겁니까?
있잖아요. “번쩍!” 그러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분명히 있는데 이 땅에 접촉될 때는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어떤 흔적만 남기고, 나무가 부러졌다든지 그런 어떤 흔적만 남기고 다시 교회는 우리 손에 잡히지를 않는 겁니다. 이게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부활, 오늘 본문에 무덤을 열고 다시 나와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하나님의 신이 활동하는 이 모든 것을 신학적용어로 하게 되면, “그리스도 몸 되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 되기인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이 몸에 익숙해져 있고 이 몸이 좋아요. 왜? 평생 살아온 것이 내 몸 가꾸는 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데 이 몸 말고 다른 몸 되는 것이 기분 좋은 일입니까, 기분 이상한 일입니까? 이 몸 말로 다른 몸 되는 것이 우리는 싫어요. 하지만 성령께서 교인들에게, 성도에게만 강제로 이 몸이 그리스도 몸 되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기가 힘들어요. 내가 살던 이 몸 가지고 할 것 같으면 ……,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 보고 그 다음에 조깅하고, 이렇게 하루 스케줄대로 하면 참 편한데 주님께서 번개 치듯이 일해서 돌발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머리되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될 주님 몸의 노릇을 또 해야 돼요.
이것은 원치 않는데, 원치 않는데 주께서 그렇게 시켜요. “아이고, 사장님! 훌륭하십니다.” 이러고 싶은데 “네가 사장이야?” 이런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 이런 게 일부러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사태가 원치 않게 올수가 있어요. “네가 당회장이야?” 이런 거요. 장로, 집사들이야 “네가 당회장이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부목사는 당회장 보고 그 소리 못합니다. 왜? 다른데 자리를 안 알아주니까. 그 소문이 돌아버리면. 제가 옛날에 당회장한테 대들었다가 유명한 부목사라 해서 찍힌 적이 있어요. 대구노회에서. 대덕교회에 있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는 ○○교회,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싫어요. 이야기 대놓고 다 해요.
내 몸에 익숙해져 있는데 내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이 돼야 돼요. 물론 우리한테 혜택이 있어요. 이 몸이 죽으면 그리스도 몸같이 하늘에 속한 천사와 같은 몸이 됩니다만 그것은 그 때고 이 땅에 살면서 내 식대로 내 몸을 주장 못한다는 것,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몸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변합니다. 그리스도 몸으로. 지금 변하는 중에 있습니다. 완전히 뱀 허물 벗듯이 우리 몸이 이상해져요, 이제는. 이제는 머리 되시는 몸을 닮아가는 몸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차라리 없어지면 좋겠는데 주의 뜻이 십자가 피로 용서해주신 것부터 시작해서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런 몸을 주신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감사하게 해주시고 점점 더 우리 몸의 습관을 잊을 수 있는 은혜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