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강-에스겔 35장 1절-3절(세일산에 대한 예언)14072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5장 1절-3절입니다. 구약성경 120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5:1-3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산으로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세일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로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할찌라.”
세일산이라 하는 것은 에돔자손들이 살고 있던 동네입니다. 에돔이란 야곱과 쌍둥이 형제간으로 태어난 그 에서를 말합니다. 그 에서의 후손이 에돔이고 그 후손이 세웠던 나라 에돔인데 그 에돔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그 운명이 있어요. 그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가 없지요. 각자 하나님이 부여한 운명대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 두 개의 운명이 서로 충돌하고 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같은 경우는 에돔은 영원한 저주를 받고 이스라엘은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하지요.
로마서 9장에 보면 에서는 미움 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야곱은 사랑받기 위해서 이땅에 태어나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미운 짓을 했다는 말이 아니고 미움이 먼저 있고 그 미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서가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거지요. 그리고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착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재료로서 야곱이라는 인간,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에 출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한이지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기권한에 속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이스라엘한테는 굉장히 좋게 들립니다. 고맙게 들리고 반갑지요. 사실은 그 반가운 게 문제가 되는데요.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에돔 자손들은 상당히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그 이론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는가, 아니면 하나님 믿는다고 우기는 이스라엘에게서 나왔는가를 그들은 따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게 너희들 나라의 교리이냐,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중한 뜻이냐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간단하게 하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 맞는가? 아니면 사람의 뜻이냐 하는 갈등이 생기겠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에서와 야곱의 구분이 사람의 뜻이라면 내가 네가 아닌 것처럼 너도 내가 될 수 없다는 원칙에 의해서 깡그리 무시해도 아무 지장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흔한 말이 “누가 봤어? 천국 가 봤나?” 이렇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을 만나 봤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너나 나나 같은 입장에 있는데 너는 알고 나는 모른다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냐고 그쪽에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 속에 들어갈 때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시작하면 안 되고요 반발하는 쪽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반발하는 쪽에서 시작을 해서 얼마든지 반발하고 싶은데 반발이 안 될 때, 바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돼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해서 반발하고 싶은 그 쪽에 합세를 하세요. 제가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쪽에 합세를 해서 그들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너희들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교리에 불과하다.”고 그들을 마구 반대를 해보세요. 반대를 하면서 그 반대하는 배경이나 근거, 우리는 어떤 근거 하에 저 사람들을 반대하는지를 스스로 되새겨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라고 오늘 본문에 세일 산에 대해서 언급을 한 겁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간결하게 내용이 들어갈 것 같은데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언급하면서 애굽을 같이 언급을 합니다. 할 때 소위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지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데 애굽 이야기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하시는가, 라고 하는데 출발을 애굽에서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뭐 문제 간단하잖아요. 제가 월요일 날 시골에 계신 목사님하고 잠간 이야기했지만 저도 그 목사님과 함께 동감한 게 뭐냐 하면 여름철에 예배시간에 많이들 주무십니다.
목사는 마음이 두근두근 하면서 주일에만 만나니까 귀한 이 말씀 먹고 천국 가세요, 라는 심정으로 온 준비를 다 하고 세 번 네 번 설교문을 되새기고 익혀서 온 몸으로 설교하려고 하는데 이미 설교 시작 전부터 주무셔요. 장로님 기도할 때부터 슬슬 주무시다가 찬양할 때 약간 깨었다가 끝나면 주무시고 잠이 완전히 다 깨는 시간은 광고시간입니다. 그 때 잠 깨서 집에 갈 준비해서 축도 받고 가는 입장이거든요. 그 분들에게 한 번 물어보자는 말이지요.
애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렇게 할 거예요. 애굽까지 생각할 것 없고 나는 그냥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다, 어디서 이스라엘은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잘 섬겨서 복 받았다는 그것만 기억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처럼 살면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간다, 그것만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분들에게 “애굽이 뭡니까?” 하면 “애굽을 내가 왜 알아야 되는데?” “그럼 바리새인은?” “바리새인을 내가 왜 일아야 돼요? 예수님만 알면 되지. ‘예수님이 날 구원하는 구세주다.’ 이것만 알면 되지 바리새인이야기, 사두개인 이야기를 왜 알아야 되지요?”라고 반문할 겁니다.
예수님 이야기 하려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으로부터 출발해줘야 돼요 오늘 본문도 세일산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 이야기하면서 세일산, 멸망 받을 나라 이야기를 왜 하는가, 쓸데없이 분량만 채우고 이런 것까지 들어가니까 에스겔서가 이렇게 두꺼워져서 읽기도 짜증난다는 생각마저 들 겁니다. 세일산에 사는 에돔사람들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세상에 저주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돔사람이라고 칩시다. 왜냐하면 에돔은 날 때부터 저주받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서 9장에 의해서.
그러면 저주받기로 되어 있는 에돔사람이 서울이나 부산이나 대구나 이 복잡한 도시 속에 많이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지옥가기 전에 살아가는 그것이 그렇게 편한 생활일까요?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합니까? 수원이나 아니면 용인이나 양지, 그런 데서 서울 강남의 직정에 다니기 위해서 입석버스타고 드나들던 그 사람들, 지금 입석버스 금지되니까 출근시간에 30분이상씩 버스타려고 서서 기다려요. 보세요. 하루하루 삶이라는 것이 악착같고 자기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고달프게 사는 겁니다. 그 직장 들어가려고 각종 스펙, 영어 배우고 중국어 배우고 얼마나 고생하면서 그 직장에 들어갔습니까? 직장생활 중에도 쫓겨나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그야말로 눈물이 날 정도로 수고의 연속이 그들의 하루 일과입니다. 뭐가 잘못됐어요? 살아보려고 애쓰는 게 그게 뭐가 죄가 되는 겁니까? 도대체 그게 왜 지옥 갈 죄란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 저 사람 지옥 간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종교문제만 거론하는데 그 사람의 일상에 같이 기거하면서 생활한다고 한다면 그들이 하루하루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에 충분하게 동감하고 동의하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방송에서 하는 그 <인간시대> 같은 것 보면 감동 받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분들이 세일산에 거하던 에돔 민족이라면 우리가 과연 이 선지자의 말씀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처럼 마구잡이로 그들을 싸잡아서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 저주할 수 있는 근거를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고 바르게 살려고 발버둥 치면서 부지런히 사는 그 속에서 신의 무서운 저주를 받을 이유거리를 우리 힘으로 찾아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그들이 열심히 사는 그것마저 죄라고 규정을 한다면 천국 가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일상생활이 안보입니까? 좀 다르게 사는 겁니까?
천국 가는 사람은 이슬만 먹고 살고 지옥 가는 사람은 참이슬, 소주만 먹고 사는 거예요? 오늘 성경본문 에스겔 35장 1-3절을 읽었지만 이 본문이 35장 전체 15절까지 다 이어집니다. 내용은 이겁니다. 세일산에 거하는 에돔 자손은 반드시 멸망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대적하고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에 대해서 조롱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내용이거든요.
설교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한쪽은 천국 갈사람, 한쪽은 지옥 갈 사람이라고 할 때 그들은 지옥 간다고 해버릴 것이 아니라 그들 편에 같이 합류하자고 제안했지요? 우리가 만약 에돔의 족속이고 에돔의 한 가족이라면 이스라엘을 이유도 없이 미워했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있음으로서 에돔사람들의 생활이 불편하게 되고 위험요소가 되고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뭔가 우리 영토를 침범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협이 되기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안 믿고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니 너희를 존경한다, 이럴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은 나한테 잘해줄 경우에만 존경이라는 심정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에돔아, 이스라엘에게 잘해줘라. 이스라엘 때문에 너희는 복을 받잖아.” 이럴 경우에는 에돔이 이스라엘을 형제로 여기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스라엘을 존경할 용의가 되어 있어요. 왜, 결국은 덩달아 자기들이 잘되니까. 그런데 창세기 27장이나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역사를 죽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에돔에게 혜택을 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미워하지 않을수 없는 사태가 자꾸 일어나요. 이 에돔민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곱게 보이지 않는 경우들이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에돔이라 합시다. 우리 에돔에게 압박을 가하고 우리 에돔나라를 공격하고 침범하고 빼앗아가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연이어서 역사 속에 계속 번지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예언된 그대로 되어 지거든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든지 예수님을 믿든지 우리는 “하나님 편, 예수님 편, 나는 삼위일체 편이다.” 이렇게 간주하지 말고 반대쪽에 서라고 했지요. 반대쪽에 설 때 “그래, 너희 이스라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어. 우리가 복 받고 있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지금 제가 드리고 있는 겁니다. 사이좋게 지낼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아!” “예” “저 예수님이 사실은 메시아거든.” “우리가 몰랐습니다. 몰라서 우리가 우리의 율법해석을 정당하다고 우겼는데.” “우겼지? 이제부터 예수 알아 모시고 잘 믿어라.” “예 그렇게 하지요.” 이런 바리새인은 없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스데반 죽을 때 옷을 맡길 정도로 거기에 동의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어 마땅하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아, 좀 미안하네. 스데반집사가 죽을 사람이 아닌데 내가 회개해야지.’ 이렇게 자기 스스로 자기 잘못을 깨달은 사람이 아니에요.
에돔의 특징을 말하라면, 에돔의 특징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자기 깨닫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이스라엘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추호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보통 정상인들이에요. 오늘 본문의 내용과 다음에 나올 내용 그리고 그 전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목자가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쉬운 대목에 우리가 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은 목자가 있어요. 이스라엘은 목자 의존적입니다.
그런데 애굽은 목자가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 몸이 태어났으면 자력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알아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겁니다. 바보같이, 의지력 없는 저 멍청이 같은 이스라엘, 만날 여호와, 여호와만 찾는 나약한 이스라엘이 안 되는 것에 에돔사람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인생은 우리 힘으로 사는 거지 여호와의 뜻이 어떻고, 여호와의 말씀이, 어떻고 율법이 어떻고, 왜 자꾸 신경 거슬리게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런 것은 없애버리고 내 인생은 내 힘으로 내가 열심히 살면 열심히 산만큼 복을 주는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야말로 자력으로 사는 거예요. 그게 에돔이었습니다. 뭐가 이상합니까? 에돔의 사고방식이 뭐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친숙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인생관이잖아요.
세일산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고요? 세일산 이야기, 에돔 이야기가 우리 일상 매일의 삶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나 여호와 실컷 믿어라. 우리는 내 힘으로 살겠다.” 그래서 에돔은 항상 정치적으로 강대국에 의지해서 외교적으로 줄다리기를 하면서 내실적으로는 단합했던 겁니다. 물론 그들에게 우상이 있지요.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조절하고 다루기 위한 신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힘만 있으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침범하면서 살아왔던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창세기 27장 28절, 29절에 하나님이 축복한 내용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늘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런데 에서는 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늘을 쳐다봐야 하는 민족이고 에서는 땅의 것만 쳐다봐도 되는 민족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렇다면 서, 에돔이라는 민족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과 경쟁해서 그들이 승리하는 그 순간을 그들은 고대했던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저 민족이 잘 되는지 아니면 여호와 없이 자력갱신하는 우리가 잘되는지를 늘 호시탐탐 대조했고 비교하면서 노렸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을 의지하고 그들과 결탁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에돔나라는 전지전능한 땅의 세력을 숭배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역시 힘 있는 것과 결탁하는 것이 최고의 정책이고 전략이라는 겁니다. 비리비리한 것 상대 안하고 힘 있는 것에 붙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철두철미 느꼈던 거예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약성경 보게 되면 신약성경에서의 사탄의 위력이 일반사람들에게 어떻게 느껴지는가? 물론 사람들은 사탄이라고 하지 않지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뭐냐 하면, 전지전능한 어떤 신을 의도적으로 그리워하는 겁니다. 에돔이 그리워하는 신은 전지전능한 신이에요. 여기서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평소에 그들이 전지전능함을 원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여호와, 여호와, 하지만 그들도 역시 에돔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그들이 버틸 수 있는 힘을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땅과 너무 대조되는 하늘의 원리를 알려줬는데 그게 뭐냐, 아무것도 아닌 것의 위대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짜 최종적으로 천국 가는, 구원받는 백성을 만들 때 어떻게 합니까? 진짜 대단한 존재이기를 원하는 사람을 뭐로 바꾸는가 하면, 이 땅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환시켜서 전환된 그들만 참된 야곱의 축복 노선에 해당되는 참 이스라엘로 하나님께서는 건져가는 시나리오를 지금 보여주시는 거지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에서가 이겼습니까, 이스라엘이 이겼습니까? 제가 묻는 겁니다. 누가 이겼는가? 에돔이 이겼어요.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은 망하고 있고 에돔은 잘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에돔이 망하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못됐다고 놀리고 조롱하고 그 이스라엘이 미약한 틈을 타서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학대했고 바벨론과 결탁해서 바벨론의 공격에서 쫓겨난 이스라엘 난민들을 죽이고 살해하고 팔아먹고 했거든요. 에돔에 관한 다른 성경구절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누가 승리자냐 그 말입니다. 힘이 있는 곳이 승리자가 되잖아요. 에돔이 승리자가 이스라엘은 패배자인 거예요.
그런데 에돔이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패배케 해서 자신들이 스스로 자력갱생할 수 있는 힘을 몽땅 잃어버리는 그 절차와 그 코스가 바로 천국으로 입성하는 코스인 것을 에돔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세일산에 거하는 사람은 모르고 있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에돔은 누굴 의지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계시, 그런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이 이렇다고 하면 “그것은 네 교리”라는 거예요. 그러니 기독교교리니 천주교교리니 교리라 하는 것은 그 교리를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성하고 커지고 잘되고 번창하고 부흥되고, 이럴 때 제대로 된 하나님의 진리를 확보한 증거로서 에돔 사람들의 머리에는 그게 꽉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비리비리하면 저주받은 것이고 잘 되면 복 받은 것이라는 이사고방식이 바로 세일산에 거하는 그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한때는 강대국 바벨론, 앗수르의 힘을 의지해서 그들이 믿던 신을 수입해서 임금부터 아예 그쪽 종교를 이스라엘의 정통종교로 삼고 겉으로만 여호와지 안의 내용은 전부 다 인간이 원하는 강한 힘을 주는 식으로 다 바꿨어요. 선지자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네가 우상숭배를 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말하는 죄목이 하나밖에 없어요. 우상숭배에요. 바깥은 여호와인데 안의 내용은 완전히 우상이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따져봐야 돼요. 왜 우상을 섬깁니까? 인간은 누구나 에돔족속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상을 섬기지요. 통장 이름만 바꾸는 데도 한 시간이상 걸려요. 보세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데 현재 우리는 내 이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잖아요. 주께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이름이 망가져야 되지요. 내 이름이 무너져야 되지요. 그래야 내가 살 보람과 희망, 목적, 삶, 이것이 없어져야 되지요. 그래야 주의 이름만 찾을 것이 아닙니까?
누가 처음부터 예수편이라고 자부합니까? 예수 편이라고 자부할 사람이 이 세상에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 편이라고요? 우리는 우리 이름 바꾸는데 평생 걸립니다. 처음부터 주의 이름인데 그게 내용물까지 바뀌는 데는 평생 걸려요. 우리는, 나는 무조건 내 편이고 하나님도 내 편이고 나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적이라고 간주하는데 에돔은 그래서 망했고 이스라엘도 그래서 망했습니다. 우리는 망해야 되는 그 부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혀 신자 아닙니다. 신자 아닌 자를 주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약속이 있기에 주님이 신자 되게 하십니다.
되게 할 때 어떻게 하는가? 신자인체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우리 눈앞에 보게 합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고 무엇 때문에 보람을 느끼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지 우리 앞에 다 보게 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동감하고 부러워하고 그렇게 되기를 동의합니다. 정작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는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만치 물러가고 없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아픔이라는 것, 우리가 언제 아파해 본적이 있습니까? 내 것 건드리는 아파하는 그런 아픔만 남아 있어요.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쪽에 서서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옛날 진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메시아의 희생적인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는지, 그래서 그 용서를 받아 구원되었는지를 날마다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시는 겁니다. 세일산은 망해야 됩니다. 이 말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우리도 망해야 됩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랑이 뭔가를, 진짜 사랑이 뭔가를, 사랑이라 하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이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냥 공짜로 주는 것이 사랑임을,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니고 알게 되어지는 그 사람만이 오직 주님의 사랑만 자랑할 겁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까지 우리가 믿는척 해야만 할까요?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고 속일 자신도 없습니다. 그저 주의 사랑으로만 구원받았는데 껍데기만 그런지 안의 내용까지 십자가 사랑 그것만 감사한지, 아니면 은근히 노리는 것이 따로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해주시고 세상은 우리 힘으로 자력갱생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믿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