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강-에스겔 36장8절-11절(여호와 알기)1408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6장8절-11절입니다. 구약성경 1207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6:8-11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과실을 맺으리니 그들의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니라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로 성읍들에 거하게 하며 빈 땅에 건축하게 하리라 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으로 많게 하되 생육이 중다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접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의 산 이것은 사람이 아니고 산봉우리니까 토지지요. 땅이 되겠습니다. 땅이 되는데, 그 땅에 대해서 마치 사람한테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도 아닌 땅에 대해서 사람같이 이야기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사람이 중요하냐 아니면 하나님이 친히 조성한 땅이 중요하냐를 다시 한 번 우리한테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이 에덴동산이란 곳에서 만들어졌다,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에덴동산에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만 나는 사람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니 옆에를 봐라. 에덴동산이냐?”이렇게 되묻는 거예요. “저, 사람인데요.” “그래, 니가 살고 있는 게 에덴동산 맞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하여 살도록 한 그 토지가 맞나?” 라고 물을 때, “우리 곁에는 에덴동산이 아니고 완전히 지옥입니다.” “그러면 너는 에덴동산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께서 조성했던 그 사람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아니니까 간단히 말해서 사람 아닌 겁니다.
우리는 사람이라고 할 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던지 거울 보면서 자기 몸 둥아리 하나만 있어도 사람이라고 우기고 또는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비교해서 너는 동물, 나는 사람, 그걸로 사람 규정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난 뒤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름대로 되어간다. 그러니 너는 애초부터 흙이었다는 거예요. 흙.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그것이 단순히 에덴동산에서만 추방하는 것이 아니고 흙으로 환원되는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상실할 때, 결국 그것은 흙덩어리였지 인간 덩어리는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님 관점에서 분명히 해두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인에 있어서 에덴동산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게 희망이나 즐거움이 아니고 오히려 상당한 질책이라는 것을 알아 들으셔야 돼요.
에덴동산을 어떻게 했느냐 말이지요. 거기서 살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살고 있느냐, 라고 인간 자체를 질책할 수 있는 근거가 에덴동산이 되는 겁니다. 에덴동산을 잃게 된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래서 하나님께서 금령, 금지하는 명령, 금령을 하나 두셨는데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하는 선악과 과실을 따먹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하나가 당시 명령 하나를 위반한 것이 아니고 에덴동산과 인간을 격리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추방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평소에 우리가 TV를 보고 신문을 보면서 나는 인간이라고 자꾸 억지를 부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에덴동산과 함께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 관점을 자꾸 관철하려고 무리수를 두면 안돼요. 사람을 즐겁게 해주려고 아부하려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관점으로 봐야 돼요. 하나님 관점이라면 성경관점이고, 성경이라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되지 않았을 때만 인간이에요. 제가 지금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같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이기 때문에 쉿! 쉿! 누구든지 에덴동산 거론하지 말기! 이게 하나의 인간들끼리 관습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의 묵인된 관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에덴동산을 언급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가치가 뭔가 이상이 있다는 것을 들추어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요. 이만해도 나는 괜찮은 인간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만하다는 그 인간을 족집게로 집어가지고 지금이라도 에덴동산에 집어넣어보세요. 에덴동산이 그 인간을 받아주는가. 받아주기는커녕 출입구부터 이미 거부당합니다.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설교 여기까지 했는데 한 마디 하겠습니다. 현재 지금 인간은 하늘나라에 거절당합니다. 이렇게 거절당할 때, 우리는 세상 모든 일이 내 구원이라는 모든 일이 이게 내 뜻대로 내 기대대로 되지 않는 그러한 상황이 곧 확실한 참다운 현실이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 11절 끝에 보면,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여호와인줄 알리라, 가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쉽게 제가 말씀드리면, 모든 매사를 하나님 홀로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홀로 하셨거든요. 진짜로 홀로 하셨는데, 그 홀로 하신 그 모든 성과나 과정과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인간은 무엇으로 전환시키는가 하면, “내가 했습니다.”로 전환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뭐냐 하면, 여호와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면 “그래, 그래, 이제부터는 교회 다녔으니까 여호와를 알고 힘써 알자. 됐지요. 하나님?” 그걸로 여호와를 안다고 생각하는데 여호와를 안다는 게 그게 아니고 모든 일은 하나님 홀로 해내시고 그 공로와 그 성과를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그런 사실을 우리가 알면 되잖아.” 우리 인간이 알 수가 없어요. 왜 알 수가 없는가 하면, 인간은 자기가 한 것만 기억하고 자기가 한 것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한 것만.
자기가 이만큼 커온 것도 지가 알아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그런 거고, 내가 이만큼 키가 큰 것도 자식 잘 키운 것도 내가 열심히 해서 그렇다. 인간은 자기가 한 것, 자기가 노동한 것, 애쓴 것, 그것을 되돌아와서 자기 것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아주 마음을 넓게 열어서 이것은 저와 하나님이 함께 했습니다. 이 정도까지는 봐줄 수 있지만 나는 전혀 한 게 없고 오직 하나님 홀로 하셨습니다. 라는 생각이 들어찰 자리가 없어요. 우리 마음에는. 우리 마음에는 그런 주님이 홀로 하셨다는 게 들어올 자리가 없다니까요.
조금이라도 내가 보탰다 던지 기여했다 던지 하나님 일에 협조했다 던지 그런 식으로 한 다리 끼려고 한다 말이죠. 그럼에도 생각합니다. ‘하나님, 그 살기 좋다는 에덴동산, 제가 협조해드릴 테니까 언제 살게 하십니까? 그 천국이 에덴동산보다 더 살기 좋다는데 천국은 언제 살게 해주시렵니까?’ 자꾸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건전했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가는 길을 큰 문은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조그만 문을 열어놨을 거예요. 그러나 에덴동산은 가는 길이 전부 다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에덴동산에 살만한 어떤 조그마한 것도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에게 조그마한 장점이나 의로움이나 거룩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흙으로 돌아가면 안돼요. 왜냐 하면, 98%가 더러운 것이고 2%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98%만 흙으로 돌리고 2%는 금덩어리 건지듯이 따로 건져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일 때 그렇게 건집니까? 어떻게 불교에서 사리 찾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찾아요? 100% 완전하게 흙입니다. 완전하게 흙이에요. 그 말은 전부 다 흙 될 만한 그 정도밖에 가치, 무가치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에 어떤 0.001%라도 완전 제로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3장 8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했거든요. 육속에 영이 섞여있다는 말이 아니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했습니다. 육60%, 영40% 이렇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육10%, 영90% 이렇게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영으로 난 것만 영이에요. 100%영만이 100%영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육과 영은 섞이거나 이렇게 동화되거나 흡수 통합되거나 그런 게 없습니다. 지옥과 천국이 같이 섞일 리가 있습니까? 섞이지 않지요.
오늘 본문에서 10절에 보면, “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로 성읍들에 거하게 하며 빈 땅에 건축하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옛날에 이스라엘은 이게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이런 것까지 하나, 하나 제가 다시 말씀 드려야겠어요. 원래 이스라엘 땅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누구 땅이냐, 하나님 땅이에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저한테 묻고 싶은 게 있을 거예요. “목사님, 에덴동산에 못 들어가는데 에덴동산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가 지난 대전수련회 때 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다시 말씀드릴게요. 에덴동산은 어떤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에덴동산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약속이 움직일 때, 에덴동산도 같이 움직이고, 약속이 이 땅에 구현되면 그 구현된 것 속에 에덴동산이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등장했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만든 나라입니다.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느냐, 에덴동산은 이스라엘 안에 들어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덴동산에 살았겠네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에덴동산에 산 게 아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에덴동산이 등장하지요.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지금 이스라엘이 갔던 나라가 약속의 땅이거든요. 가나안땅입니다. 가나안땅에 누가 계신가 하면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다시 언급합니다. 에덴동산에 살지 못하면 사람 아닙니다. 이미 그것은 흙이에요. 이건 100%되어야 되고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다시 에덴동산에 살지 못하면 그건 사람 아닙니다. 추방돼도 사람 아니고 다시 들어가서 못 살아도 사람 아니거든요. 땅과 에덴동산은 토지와 우리의 존재를 연결시켜야 된다 말이지요. 연결시켜야 돼요.
그런데 “에덴동산은 어디입니까?” 라고 묻는 그 취지자체가 잘못된 게 뭐냐 하면, 우리는 인간이고 에덴동산에 있기만 하면 이 인간 그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아담의 부부가 에덴동산에서 왜 쫓겨났습니까? 죄 있어서 쫓겨났지요. 그렇지요? 죄 있어서 쫓겨났으면 죄 있는 자가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가겠다. 또는 천국에 들어가겠다. 라고 기대하고 시도하는 자체도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 위상을 모르는 거예요.
그 위상과 입장을 모르는 예가 이렇습니다. 요새 왜 이리 번잡스러운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어떻게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났을까, 사람이 그렇게 “아이고, 요새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못 살겠다.” 라고 불평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불평, 불만 하는 권한이 없어요. 아이고, 왜 이리 일이 터지는지 모르겠다. 라고 불평, 불만 하는 것은 어떤 자세인 경우에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나한테는 내 인생은 고요해야 되고 만족스러워야 된다는 것이 나한테는 당연하다는 그런 일방적인 자기주장이 있을 때나 그런 불평을 하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갔을 때, 이스라엘이 그런 식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우당당탕 땅이에요. 다른 민족은 자기 땅에서 고요하게 살았어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전쟁은 있었지만,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땅에서 전쟁한 기간만 90%입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그냥 묵인했다. 다른 민족한테는 묵인했다는 거예요. 죄를 짓던, 우상을 섬기던 다른 민족한테는 아무 묵인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땅, 가나안 땅에서는 그냥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대번에 주변나라가 쳐들어와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땅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에덴동산의 완성체로 구현해야 될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니 주제파악 하라는 겁니다. 약속 위반하고 언약 위반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애초부터 하나님이 원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라는 거예요.
여기 본문에 나오는 땅을 갈고 하는 이 산은 어떤 거냐 하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기 위해서 조성된 하나님의 환경이에요. 이런 경우는 아닙니다.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기대했다. “하나님, 고생 많이 했습니다. 기도합니다. 도와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래, 고생 많이 했지? 너한테 복을 주마.”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건 아니에요. 왜 이건 아니냐 하면, 하나님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할 때 무엇이 틀어지고 무엇이 잘못됐는가 하면, 마땅히 자기는 잘 살아야 되고 말썽 없어야 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한 왜곡된 잘못된 자아상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생존만 보존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 이 말은 이것은 전혀 여호와를 아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여호와를 아는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땅에서 살아온 모든 행색이 뭐냐 하면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이여, 우리를 살려줬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적들의 외침이 많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오니 도와주소서.” 도와주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살다보니 또 죄를 지어가지고 “하나님 도와주소서.” 또 도와주니까 또 감사합니다. 이런 식의 반복이에요. 그런 식의 반복에서는 절대로 여호와를 아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편이구나! 그거 우리 편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그 누구의 편을 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편이지 사람편이 아니거든요. 사람 편 같으면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지도 않았어요. “아이고, 미안하다. 내가 다시 문 열어놓을게.” 이렇게 되지 인간을 추방해 놓고 사람 편 없습니다. 인간 편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오늘 본문의 내용이 뭐냐,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신앙의 사망, 신앙의 멸망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신앙은 멸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너희 신앙이 멸망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전혀 니 주제파악이 안 된다는 겁니다.
자, 설교를 다시 해봅시다. 여호와를 안다는 게 뭘 아느냐,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홀로 하셨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우리가 부탁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시더라 이리 되는 거예요. 그것은 여호와를 아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를 이용하는 겁니다.
신앙은 없어져야 돼요. 우리의 신앙은 사라져야 됩니다. 그놈의 신앙이 문제에요.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고 자부함으로 말미암아 그 신앙으로 하나님의 일에 협조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협조했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협조한 동업자한테 하나님이 우리 아쉬울 때 도와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자꾸 이러한 기대를 갖게 되는 겁니다.
기대를 갖게 되면 그것은 때려죽여도 여호와를 몰라요. 그 기대마저 무너져 내려야 됩니다. 그게 복이에요. 무화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다 무너져야 돼요. 우리가 하는 모든 산업과 모든 시도가 다 허망한 것으로 애초부터 우리의 분수를 알지 못해서 시도한 우리의 몸부림인 것을 자인해야 되는 겁니다. 자식 낳고 잘 키우고 이런 모든 기대가 무너져야 돼요. 자꾸 그런 기대가 안 무너지니까 여호와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여호와를 몰라요. 주의 일에 협조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할게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 사람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추방된 주제에 자기가 사람이라고 우기면서 자꾸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게 잘못이라고 제가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게 잘못이에요. 살기 힘드니까 구원받아야겠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생로병사 너무 괴로우니까 죽어서는 좋은데 가야겠다.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 도와주소서. 안 도와줍니다. 분수를 모르는데 어떻게 도와줘요. 분수를 모르는데.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생깁니까?” “니가 뭔데?” “니가 뭔데?”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땡잡았어요.
왜냐 하면, 멸망 자체를 스스로는 절대로 인간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 힘으로 멸망할 수 없는 그 멸망을 하나님이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멸망의 자리가 바로 신앙의 조건이 요건이 된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예상 못한 겁니다. 잘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지키겠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게 신앙의 요건인 줄 알아요. 이런 게. 이런 게 신앙의 요건인 줄 알았지, 그것마저도 완전히 죄고 주께서는 그런 가식적인 것을 안 받는다는 사실, 그런 상황이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홀로 주시는 믿음의 요건인 것을 나중에 멸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그걸 알게 되지요.
손에 있는 것을 놓고 난 뒤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 잡아 죽인 사람을 실컷 잡아 죽이고 다 옥에 가두고 난 뒤에 나는 주님을 핍박했던 사람으로서 핍박했던 죄인의 괴수로서 그 죄인의 괴수 자체가 바로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이 만드신 택지개발인 것을 기반을 그렇게 다지는 것을 비로소 사도바울은 오호라, 감사합니다. 곤고한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도리어 주께 감사하는 거예요. 그게 신앙입니다.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나를 망하게 하신 그분께서 만드신 신앙이에요.
망해야 되는데 자꾸 망한다고 불평하게 되면 그럼 지옥 가서 소원풀이 하시렵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심으로서 에덴동산이 얼마나 살기 좋으냐가 문제되지를 않아요. 문제는 에덴동산에서 살만한, 인간은 죄를 지은 인간이거든요. 죄를 지은 인간이 자기 죄를 해결 못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기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장 기본과 근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죄인은 자기 죄 문제를 해결 못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언급합니다. 그런데 왜 기도, 헌금, 전도, 이게 왜 강조되어야 되지요? 교회 출석 이게 왜 강조되어야 되지요? 그 심보가 정말, 사장님 나빠요. 그 심보가 너무 나빠요. 우리가 기도하고 어려울 때 기도하고 애써 헌금하는 거, 우리의 본색이니까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게 하셔서 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음흉한 사람이며 뭔가 나는 하나님의 일에 기여했다는 그걸 공로로 하늘나라에서도 내 의를 한 1%, 2%라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세운 채 유지한 채 천국에 골인하려고 하는 나의 가장 죄 악 된 면모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시고 예배 참석하게 하시고 기분 좋아요. 주여, 다른 사람은 예수도 안 믿는데 나는 예수 믿고 기분 좋다 말이죠. 그렇게 하시는 그것은 그렇게 기분 좋은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전혀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정작 내 자신이 나의 생각만 온종일 24시간 생각하는 그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 성질을 또다시 알게 되는 계기로 생각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은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가지고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제 우리가 그 가나안 땅에 농사 다 지었다. 이리 낙담하고 있을 때 오늘 에스겔을 통해서 이 계시 줍니다. 너희들이 제대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 때 너희들이 못 지은 농사짓게 해줄게. 그 때 사람 없다고 사람 포로 잡혀가 다 죽고 사람이 희박하다고 하던 너희들에게 내가 다시 찾아오게 되면 그 때 너희들은 왜 이리 사람이 많아. 갑자기 이스라엘이 사람이 많아졌지? 이렇게 할 때, 이것은 누가 홀로 했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홀로 해주셨습니다. 라는 것을 비로소 자기가 멸망한 그 터전에서 그 자리에서 여호와를 온전히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이에요. “여호와께서 홀로 하셨습니다.”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에요.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에요. 그럼 그 에덴동산 지금 이스라엘 땅이냐, 전쟁하는 이스라엘 땅이 에덴동산이냐? 아닙니다. 그럼 또 왜 아니냐? 이 이스라엘도 망하게 하십니다. 그럼 이 땅에서 이스라엘 망하게 했다면 모든 나라 다 망했다는데 그럼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에덴동산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 안에.
에덴동산 안에는 예수님이 계신 게 아니고 예수님 안에 에덴동산이 들어있어요. 그 에덴동산을 에덴동산하지 않습니다. 그걸 ‘아들의 나라’ 그걸 ‘천국’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그 하늘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죄를 지어서 쫓겨났지요. 그러면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조건은 죄 없는 조건해서 들어가야 되는데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죄인은 자기 죄를 아무리 해도 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본인의 죄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알지를 못해요. 그래서 외부에서 죽게 하거나 망하게 할 때, 비로소 망하게 하고 심판하는 그 분만이 우리가 심판받아야 될 이유를 가지고 죄까지 더불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아, 내가 이 땅에 사는 고 생활방식, 생활원리하고 그 천국의 원리하고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구나!’ 그 차이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성도가 되고 차이를 모르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나온 것은 영이라 할 때, 육과 영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고 육과 영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은 전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겁니다.
육에서 나오는 모든 시도는 항상 나를 힘들게 하지를 말아야 돼요. 괴롭다. 내가 이래서 못 살겠다. 자기 생각이 항상 우선적이에요. 그게 시급한 문제에요. 그런데 영을 받은 사람은 나라는 것은, 에덴동산을 위해서 말을 바꿔야 되겠지요. 옛날의 에덴동산이고.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하면 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육의 사람입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한 게 아니고 감사케 하기 위해서 살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될 때, 그게 영의 사람이에요. 제가 말장난하는 것 같아서 좀 신뢰가 떨어지는 것 같은데. 말장난 아니니까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아직까지 평소에 얼마나 살고 싶어 환장했나, 자기의 본색을 까놓고 공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살려주면 감사를 하겠다? 안 하겠다? 안 살려주면 감사를 때려죽여도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살려주니까 감사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관심사는 뭐냐, 내 생존이 우선이에요. 생존은 생명이 아닙니다. 왜냐, 에덴동산의 그 생명나무를 못 따먹은 이상은 생존은 죄일 뿐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여,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아직도 저를 살려주시는군요.” 이렇게 되게 되면 감사가 우선이고 나는 그 후발자가 되는 겁니다. 감사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주어진 상황을 감사하기 위해서 감사하는 조건을 한 번 찾아보세요. 감사할 조건이 있던가요? 물에 빠졌을 때, 감사가 되던가요? 머리카락 빠질 때 감사가 되던가요?
자, 마지막 중요한 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질 때, 그게 감사가 되던가요? 감사 안 되지요. 감사가 안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머리카락이 안 빠져야 될 그런 존재인 것을 주께서 알아주시오. 라는 강압을 하나님께 넣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머리카락이 빠지는 현상이 나를 몽땅 죽이고 망하는 다시 말해서 내가 만들 수 없는 신앙의 기반을 주께서 머리 빠짐으로서 나의 신앙마저 사망시키는 나의 불평모든 것이 나의기도 모든 것을 다 무효로 돌리는 그 작업의 일환이라면 지금 하늘나라 불도저가 나한테 찾아와서 머리카락을 훌러덩 밀어가지고 빡빡 깎아가지고 하늘나라 그 불도저가 밀 때, 내가 미처 밀지 못하는 그 머리카락을 주께서 홀라당 밀 때, 그 자리가 뭡니까? 여호와께서 홀로 지금 작업한 결과가 지금 내 이 모습이지요.
그럼 주체는 내가 아니고 주체는 주님이고, 주님께서 지금 나를 몰아넣지요. 그러면 뭐도 빠지는 겁니까? 내가 믿는 내 신앙도 없애버리는 기회를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거예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머리카락이 빠질까 신경 쓴다면 “주여, 기도하오니 머리카락이 빠지게 하옵소서.” 이 기도제목 속에 내 머리카락 빠지지 말라는 게 포함이 되어있어요.
그걸 강제로 밀어버리니까 이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런 기도를 한다는 자체가 이것은 죄인 것을 알게 하는 그 요건과 조건이 그것마저도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빠져도 감사합니다. 발걸음 세시는 것도 하나님, 머리카락 세시는 것도 하나님, 참새가 죽는 것도 하나님, 하나님 있음으로서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조건이 온다 할지라도 감사 안 할 게 없습니다, 라고 생각하게 만드시는 그 여호와의 위대한 작업. 절대로 우리의 솜씨 아닙니다.
우리가 애쓴다고 독하게 마음먹는다고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이 찾아오셔서 니가 지금 니 된 것은 몽땅 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감사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몸이 아파도 감사할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늘나라까지, 에덴동산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감사만 나오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어떤 행동도 책임지고 용서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행동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는다는 이것이 가장 최종적인 감사의 요건으로 날마다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 성도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 먹고 잘 살아서 감사하는 그런 육적인 사망해야 될 신앙인 말고, 감사 자체를 위해서 오늘도 하루, 하루 주께서 살려주셨다는 그런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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