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강-에스겔 34장 17절-20절(양과 양 사이)1406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4장 17절-20절입니다. 구약성경 120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4:17-20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냥 푹 쉬시면 돼요. 연세많은 시아버지는 뒷방 차지하고 노인정이나 다니면서 푹 쉬면 자식들이 오죽 잘 알아서 하겠습니까? 밑반찬 해 드리면서 잘 할 텐데 제일 밉상인 노인네가 뭐냐 하면, 얻어먹는 주제에 옛날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가지고 젊은이들이 하는 일에 콩 놔라 팥 놔라, 간섭하고 손자 교육시킨다고 하면서 지나간 교육방식을 가지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 며느리와 의견차이가 나고, 그런 것이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영광과 찬양만 받으시고 우리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냥 인간들에게 맡겨 줬으면 좋겠어요. 왜 맡겨줬으면 좋겠느냐 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관여를 하고 간섭을 하게 되면……, 이것은 우리의 상식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이 땅이 거룩해서는 살 수가 없어요. 생존경쟁이니까, 뒤 떨어지면 도태되고 굶어죽으니까. 그래서 인간들끼리 될 놈은 되고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거룩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눈 한 번 질끈 감아주시고 ‘철없는 인간들이 저렇게 사는구나.’ 하고 넘어가 주시면 되겠는데 무소부재하시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 인간 속에 관여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인간은 무소부재하지도 않고 인간은 장래일도 모릅니다. 전능하지도 않습니다. 전능하지 않은 고만고만한 재주가지고 그래도 빌어먹겠다고 이 땅에서 애를 쓰는 그 작업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 천사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 장악할 것 같으면 우리가 마음 푹 놓고 바른 일을 하겠는데 이것은 코앞의 일도 모르지요, 그냥 어영부영 하다가는 자기 것 다 빼앗기지요.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되는 입장에서 생존이 우선이지 거룩과 도덕과 윤리가 우선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그걸 뻔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해, 바르게 살아, 라고 하면 어쩌라고요? 그러면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 한번 살아보세요, 이 땅에서. 그냥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은 쉬운데 하나님이 한 번 이 땅에서 살아보세요. 어떻게 사는지.” 살아봤거든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살아봤어요. 사십도 안 되어서 댕강 사형 당했습니다. 하나님도 사십을 못 넘긴다고요. 그냥 남이야 어찌되었든 자기만 먹고 살면 되는데 주님께서 온갖 것 다 쑤시고 “이게 성전이냐? 헐어버려라.” 하니까 성전에서 밥 빌어먹고 사는 그 성직자들이 가만 둡니까? 죽여 버리지요. 결국 사형당할 때 아주 약하게 사형 당했지요. 도와줄 천사도 나타나지도 않고.
그래서 오늘 본문을 쓰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뭔가 관여한다 할 때에 우리는 이 성경말씀의 모든 관여가 잔소리로 들립니다. 안 그래도 옛날 어른들은 70넘으면 다 돌아가셨어요. 요새는 왜 그리 오래들 사는지, 우리 할아버지도 70넘어서 돌아가셨거든요. 몸은 건강하지 시간은 남아돌지 할 일이 뭐냐, 젊은 사람들 간섭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하나님의 잔소리, 간섭으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아예 성경 자체를 덮어버립니다.
우리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악한지는 아는데 이론으로 아는 거예요. 막상 알기는 알지만 세상에서 살려면 그것이 먹히느냐는 말이지요. 혼자 바르게 말씀대로 살면 쪼다 되는 겁니다. 준비된 사기꾼들이 노리고 있어요. 바보 같은 짓이지요. 마치 옛날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안식일에는 전쟁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적들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시리아적들이 안식일에 공격을 했습니다. 그냥 지지요. 하나님이 도울 것이라? 옛날에는 그랬지요. 옛날 아사 왕 때는 그랬던 적이 있지요.
그 후에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 마카비 시대, BC 2세기경에 하나님이 돕기는 뭘 도와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안식일에도 칼 들고 설쳐야 된다고. 그래서 안식일에도 전쟁을 하는 거예요. 스코틀랜드 골키퍼는 월드컵대회에서 안식일에 경기한다고 골 막 먹었어요. 안식일에 안식일 지키라고 했는데 그 날 경기를 하니 시합에 나가기는 나갔는데 별로 시답지 않게 해서 그 팀이 져버렸어요. 그랬어도 자기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정신에 의해서 져버렸지요.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경기에서 지고 말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잔소리가 전혀 비현실적이고 전혀 먹히지를 않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 지키면 뭔가 복 받아서 세상에서 출세하고 남보다 잘 된다는 소리는 사기 치는 목사들이 하는, 돈이나 빼내려는 부흥사들의 사기고요. 실제로 목사들도 그렇게 안 살아요. 평신도들도 그렇게 안 살아요. 결국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관여, 간섭이라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완전하고 너무나 완벽한 분이 너무나 허술하고 너무나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고 너무나 세속적인 우리에게 무턱대고 간섭해버리면 우리는 나자빠지고 감당 못합니다.’라는 식의 거룩관, 세상관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 성경 해석 못합니다.
주님의 잔소리가 연세 많은 어른들이 하는 그런 잔소리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말씀으로 관여하는 그 숨어 있는 의미가 뭐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17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한 문장만 해도 굉장히 오랜 시간 걸려서 설명을 해도 충족되지 않지만 시간관계상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양과 양 사이를, 그리고 수양과 수염소 사이를 심판한다고 했거든요. 우선 심판이라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심판하겠다는 그 취지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단절이라는 것은 수도파이프가 가다가 끊어지게 되면 물이 흐르지 않지요. 원래 수도파이프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물이 흘러가는데 누가 와서 수도파이프를 톱으로 잘라버리면 그 잘라진 곳까지는 물이 오지만 그 끊어진 데서부터 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지요.
하나님은 인간세상의 모든 사고방식, 어려운 말로 의식이라 하는데, 의식이나 또는 사고방식 또는 행동 동기나 사람이 실천에 옮길 때의 마음가짐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관행과 관습입니다. 이걸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은 기억력이 있어요. 다른 동물과 달리 대뇌피질이 발달해서 여기서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이 해마라는 곳에 저장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억을 하는 거예요. 그 기억이라 하는 것은 연속성을 갖고 있어요.
지난번에는 목자에 대해서 심판한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내에 계급이 생겨버리지요. 목자 층, 목자계급이 있어요. 제일 높은 단계의 계급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면 목자 외에는 다 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지도자들, 목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 가운데 양 따로 있고 염소 따로 있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무슨 근거에 의해서? 그들은 무슨 기준에 의해서 양이 따로 있고 염소가 따로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거든요. 이스라엘백성은 그 내용이 어떠하든, 그 실제가 어떠하든 형식상으로서는 율법의 나라입니다.
율법에서 율, 그 한 글자 빼버린다면 법의 나리에요. 그 법이 신의 법, 거룩하다는 하나님의 법이 지배해요. 인간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면 지도자, 율법사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간계층들, 그걸 중보자 혹은 메시아, 기름 부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그 계급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 이스라엘의 율법의 기름 부은 자가 완성되어서 신약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에스겔 34장 설교할 때 그 양들, 살찐 양들, 돈 되는 양들을 후려쳐서 돈을 빼먹으면서 자기는 놀면서 부자 된 자들의 세금을 받아 챙기고 각종 뇌물을 받으면서 그들의 배를 불린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잔소리를 하고 심판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일단 제일 높은 단계에 대해서는 심판의 언급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 한 것을 다시 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 다음 단계가 뭐냐, 위에 있는 목자들, 나쁜 목자들이지요.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니까.
나쁜 목자들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교육을 받느냐 하면, 이렇게 교육 받았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잘 지킵니까?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킵니까? 아,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는 양입니다.” “당신은 말씀을 위배하고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지옥 가는 염소입니다.”라고 한 거예요. 양과 염소의 분류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했느냐 하면, 썩어빠진 목자들이 썩어빠진 기준을 적용시켜서 자기한테 잘해주면 좋은 양이고 못해주면 염소가 되는 거예요.
이 전통은 유대인들한테 죽 내려와서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있다고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기존의 염소와 양을 나누는 것을 의식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하신 말씀이 “누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게 되면 그게 양이고 내가 옥에 갇히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벗었을 때 도와주지 않으면 그것은 염소고 지옥 간다.”고 했습니다. 이미 기존에 있는 구조를 그대로 차용해서 자기중심으로 천국에 대해서 소개한 겁니다.
어쨌든 간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권위, 그러니까 아주 거룩한 하나님과 무식한 백성사이에 아주 유식하고 착한 그들이 끼어들어서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법을 통치하는 시스템을 갖춘 거예요.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교회가 그러니까. 하나님 계시고 주의 사자, 또는 주의 종이 있어요. 주의 사자란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말인데 거기서는 천사를 두고 하는 말인데 목사들이 주의 사자라는 말을 자기한테 따와서 주의 사자라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기름부은 자라는 겁니다.
이게 역사와 전통이고 관행입니다. 제가 아까 설교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뭐라고 했습니까? 단절이라고 했지요, 단절. 목자들이 어쨌거나 너무 잘 사니까 그 목자한테 기어 붙어서 목자와 더불어서 권력을 나누어가지는 부유한 장사차들, 무식하지만 돈은 많은 장사치들, 마르크스에 의하면 부르주아들, 그런 사람들이 살찐 양이 되고 양은 양이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서 살려고 하는 그들이로되……, 그러니까 지난번에는 목자를 쳤고 이번시간에는 양 사이에서 지도자와 결탁해서 잘 먹고 잘 사는, 부자 되어서 교회에서 장로 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장로도 못돼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살찐 양이라고 하고 그것도 안 되는, 그냥 순해 빠진 양은 그냥 약한 양이라고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이 규정을 해놓은 겁니다.
그래서 심판하기를 “내가 살찐 양을 심판해서 그 살찐 양에게 뜯어 먹힌 그 어린양들을 내가 반드시 목자가 되어서 살려내리라.” 하는 그 말씀을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양과 양 사이에, 그 다음에 수양과 수염소 사이에 심판한다. 양과 양 사이는 그렇게 해결되었고 수양과 수염소는 뭔가?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권력자들이 자기 마음에 들면 천국가고 복 받는다고 하고 자기 마음에 안들면 염소새끼라고 해서 저주를 한 거예요. 그 기준도 주님은 철폐시키겠다는 겁니다.
결국 이 기준을 철폐하겠다는 말은 지금까지 줄곧 내려왔던 이 전통과 역사를 주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걸 어렵게 해서 뭐냐 하면, 인간들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과거에 있었던 모든 노하우가 축적이 되면서 진리에 가깝게 간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진리란 과거가 누적된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와서 누적되어 가는 과거를 절단시키고 잘라버리고 부정해버리고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 접촉점에서 진리가 피어난다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 낯선 것.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똑똑이가, 어느 신앙인이 십자가를 알아먹느냐? 십자가 모르면 역사와 전통, 신앙생활 50년 60년, 성화 되었니 안 되었니,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처음도 십자가, 20년 뒤에도 십자가, 70되어도 십자가, 90되어서 곧 돌아가셔도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고 그 외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게 율법 외, 라는 거예요. “율법 외.”
제가 어디 가서 설교를 하는데 이렇게 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한 평생 살아가는데 야곱은 어떤 경우라도 야곱이고 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에서에요. 요즘 철 따라 나오는 과일이 참외입니다. 여러분이 참외를 좀 드셔 보셨어요? 저는 먹어 봤습니다. 참외는 어디를 끊어도 참외에요. 끄트머리가 참외인데 중간쯤이 수박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수박은 어디를 잘라도 수박이거든요. 하나님이 한 번 사랑하게 되면 그게 열 살이든 스무 살이든 삽십 이든 사십이든 오십이든 육십이 되어도 그것은 야곱은 야곱이고 참외는 창세전부터 참외 같으면 열 살 때도 참외, 스무 살 때도 참외, 그래서 인간은 변하지 않아요.
인간의 주께서 정하신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령을 받아서 아는 사람이고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역사와 전통 그것만 자꾸 붙잡고 있는 거예요. 우리 어른들은 안 그랬다고, 우리 어른들은 안 그랬다고. 과거 아닙니까? 권력이란 것은 세습하게 되어 있고 세습하는 것은 돈만 세습하는 것이 아니에요. 역사와 전통 거기에 법률도 같이 세습하게 되어 있어요. 권력 한 번 쥐고 부자가 되면 계속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부자 되려면 이미 부자 되고 이미 권력자가 된 사람에게 기어 붙어서 거기서 나온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한 번 권력은 계속 권력이 되는 겁니다. 권력 심은데 권력 나고 돈 심으면 돈 나게 되어 있어요. 세상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빽을 써서 갑자기 졸부 되고, 그런 것은 별로 없습니다. 한 번 부자는 절에 가도 부자 되고 교회 가도 부자 되고 이 세상이라는 것은 한번 살찐 양 살찐 목자는 계속 자식 대대로 살찌게 되어 있습니다. 5대부자, 6대부자, 막 나옵니다. 앞으로 점점 더 그것은 심화될 거예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들이 미래를 압니까? 내일일도 모르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일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 준 일은 오늘 하라는 겁니다. 제가 주일 낮에 한 이야기인데, 뵈뵈는 없고 맨 날 토막낸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하루치만 준 거예요. 내일도 뵈뵈되고 내일도 봉사해야지, 그것은 누구도 장담 못합니다. 오늘 준 사명을 그냥 감당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하신 이 귀하신 생명의 말씀, 잔소리가 아니죠, 이 귀하신 생명의 말씀이 어떻게 해서 그들에게 거룩이라는 위상을 가지고 바르게 이야기하겠는가?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제부터 쉽게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십니까?” “예, 심판합니다.” “심판의 기준이 뭡니까? 기준 주시면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문제인거예요. 기준 주시면 지키겠다는 그 자체가 거짓 목자와 거짓 살찐 양들이 그것가지고 똑똑하다고 역사와 전통을 세운 겁니다.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칙과 원리는, 심판과 구원의 원리원칙은 우리가 지킬 수 있어서 심판을 피해가고 구원받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주께서 말씀만, 법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법 따라 상황을 조성해 나가십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뭐냐,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분됩니다. 오늘본문에 보면 살찐 양은 가해자가 되고 살찐 양에게 맑은 물도 발로 밝히고 양식도 발로 밟힌 이들을 피해자로 등장시키는 그 상황을 하나님이 일부러 조성하면서 이것을 가지고 심판을 진행 중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창세기 4장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말씀을 지킨다고요? 가인은 제사 안 드렸습니까? 제사 드렸거든요. 자기 딴엔 말씀 지킨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제사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제사 안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관여하는 것이 곧 말씀의 실천입니다. 정말 제가 방금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매일같이 관여합니다.
어렵기 때문에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뭐 할까를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주님 말씀이 뭐냐 하면, 오늘 염려는 오늘 해질 때까지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 잔소리 들을 인간 없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주님 뜻이고요, 우리는 그렇게 못삽니다.” 우리는 버티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고집스럽게 버틸 때 어떤 가해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물론 남에 대한 가해자도 가해자가 돼요. 오늘 본문처럼.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이 몸, 주님의 몸을 누가 이렇게 미워하고 누가 이렇게 짜증내고 누가 이렇게 괴롭게 합니까?
내 정신 내 마음을 누가 괴롭게 합니까? 바로 내가 괴롭게 하는 거예요. 내가 바로 가해자가 되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피해자가 되는 방식으로 하루의 저녁 해를 바라보고 삽니다. 오늘 하루도 주의 말씀은 전혀 생각한 적도 없고 그저 내 몸만 편하면 최고고 돈만 벌면 최고라고 했던 그것이 저녁에 기도하면서 ‘오늘도 사는 이것이 어떻게 사도가 간 길이고 예수님 가신 십자가 길인가. 이것은 세속적인 삶에 불과하다.’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거예요.
분명히 사나 죽으나 주의 몸인데 우리는 평소에 주의 몸을 내 몸처럼 여겨서 강아지 목에 줄 매단 것처럼 해서 내 육체를 내 욕심대로 질질 하루 종일 끌고 다니는 거예요. 아침 열시에도 끌고 다니고 오후 10시에도 끌고 다니고, 애 교육시키면서도 내 말 안 듣는다고 패버리고, 이렇게 주님 애를 내 애처럼 다루면서 모든 것이 내 것일 때 만족하는 모습을 보일 때 내가 안다는 이것이 이 세상을 흉내 내고 모방하면서 그저 남 따라 가면서 살아갔던 그 후유증을 내가 매일 같이 겪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뭐냐?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본인이 피해자 될까요? 그러지 마세요. 그것은 말씀을 자기가 지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그야말로 막 세사요, 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빼놓고 막 살라는 말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동반해서 우리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그 원칙이 뭐냐, 구약에는 십계명이고 신약에는 십자가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따져요. “둘 중에 하나만 하세요. 십계명으로 한다는 말입니까, 십자가로 한다는 말입니까? 왜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딱 하나만 이야기하라고요.” 이렇게 한다면 십자가가 십계명의 완성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로마서 13장에 나오거든요.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어떤 누구도 인간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 사랑해서 사랑하는 나를 더욱더 사랑하기 위해서 말씀을 이용할 뿐이지 우리가 내미는 사랑은 주님 앞에 도달되지 않습니다. 도달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 의한 피해자가 되고 우리는 주님이 만든 세상의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가해자가 되는 그 절차가 주님의 사랑이 보이게 하는 필수 절차로 가입이 된다는 사실이 감사하지요. 우리가 못났고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이며 우리가 나밖에 모른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그렇게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는 십자가가 우리 눈앞에 등장합니다.
십자가에서 용서했는데 너는 왜 우느냐, 그 말입니다. 너는 왜 짜증내느냐, 그 말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것은 내 것입니다. 주님도 손대지 마소서. 주님께서 손대면 나는 짜증납니다.”라는 식의 울분이 울음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말씀은 율법의 완성이라니까 십계명부터 봅시다. 십계명은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어떤 분이 말하기를 십계명에도 계급이 있다고 하는데 ……, 어떤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도둑질 하지 말라는 그것이 여덟 번째 계명이고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 일곱 번째 계명인데 나는 도둑질을 했지만 언니는 간음을 했으니 언니가 더 나쁘다고 나와요. 그거야 순진하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이렇게 보시면 정답입니다. 1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5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보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거든요.
여기서 약간 어렵지만 들어보세요. 십계명이 있다. 십계명을 실천하라, 이것은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인데 왜 십계명 주고 또 복잡한 계명을 따로 줍니까? 그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십계명을 주실 때 십계명의 정신은 인간이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이 안 되고 십계명 자체가 날 지키라고 버티는 것이 아니고 십계명 자체에서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십계명대로 실제로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이스라엘을 십계명 시스템으로 전환시키는 활약을 굽이굽이 다니면서 해요.
점점 더 율법의 십계명 정신이 확산이 되는 겁니다. 마치 댐이 있을 때 댐 바깥에 물이 바짝 마르고 댐 안에 물이 있지만 만약 댐이 폭파되어 보세요. 그 댐 안에 있던 물이 아래쪽 낮은 곳으로 다 내려가잖아요. 십계명이 댐이라면 역사가 점점 더 진행되면서 다 스며드는 거예요. 스며들면서 십계명의 정신은 뭐냐 하면, “네 가운데 어렵고 고아와 과부와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를 아는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십계명에서 드디어 서서히 사랑이 나오게 됩니다.
그 사랑은 대가 없이 그리고 이유 없이 그냥 주는 것, 이유 없이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에베소서 같은 곳에서 “창세전에 예정되었다.” 디모데전서 1장에도 “창세전에 예정되었다.” 특히 로마서 9장에서는 “너희가 태어나서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나는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했다.” 한번 수박은 수박이고 한 번 참외는 참외라는 겁니다. 수박은 천국가고 참외는 지옥 간다면 성주 사람들은 좀 기분 나쁘겠지요. 어쨌든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루하루 어디서 살아도 나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 이 죄도 이렇게 빨갛게 피로 다 용서해주시네, 라고 용서해주신 기쁨이 나오도록 하는 조치,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친히 피해자가 되어서, 십자가가 영원한 피해자가 돼요, 모든 인간이 달려들어 죽였으니까, 그 죽임을 당한 분이 마지막 피해자로서 피해 입은 자지만 이 피해 입은 것을 도리어 너희에게 심판으로 갚지 아니하고 이 피해 입은 그 피를 오히려 대신 너희 죄를 용서하는 용도로 너희에게 적용시키겠다는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고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오직 주님만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정신이 오게 되면 유명한 말씀, 5.16 5.17 5.18, 데살로니가전서 5.16 5.17 5.18 잘 아시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은 하나의 교양일까요? 예의범절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법대를 갈까요? 의대를 갈까요? 어느 것이 주의 뜻입니까?” 이것은 주의 뜻 아닙니다. “삼성 그룹에 갈까요, 엘지 그룹에 원서를 낼까요?” 이것은 뜻이 아니에요. 어디를 가든지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죄밖에 내놓을 것이 없어요. 왜, 나는 항상 내 중심이니까. 나만 잘되면 땡이니까.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를 폭로시키는 그 작업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내가 바로 못된 목자고 못된 살찐 양이고 내가 착한 양이라고 우기는, 사실은 못된 양임을 고백하게 해서 주님만이 참된 목자임을 감사하는 것,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도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항상 모든 ㄷ것을 주님 앞에 털어버리는 거예요.
평생 살면서 탈탈 털리는 거예요. 주님 앞에. “이런 것 없어도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성령께서 너희를 그렇게 만들어 낼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내린 기준이 아니라 주께서 실시하시는 말씀 실천이 곧 심판인 것을, 단절인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단절이 있어야 양과 염소가 갈려진다는 이 작업에 우리가 시비 걸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