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내 백성(겔34:20-31)140716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7. 18. 18:17

2014-07-16 21:25:51 조회 : 54         
   내 백성 140716 이름 : 이근호   

내 백성(에스겔 34: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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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7-16 21:48 
내 백성


2014년 7월 16일                    본문 말씀: 에스겔 34:29-31

(34:29)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34:30)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

(34:31)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이 동화처럼 아릅답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릴 적 동화같은 세상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은 계속 품게 됩니다. 이 비-현실적 세상관은 참된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과는 일치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인간들의 조작된 세상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봐야 하는 바를 제대로 알려주십니다.

누가복음 9:61-62에 보면, "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께서 자기 가족과 작별 인사하는 정도는 최소한 허락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족에게 작별인사하는 것조차 '뒤돌아보는 일'로 간주합니다. 즉 다른 노선에 속한 속성의 발로라고 규정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세상 보기는 '땅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 간의 살별한 투쟁의 연속입니다. '노선 갈아타기'가 성사되지 아니하는 자는 멸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들 현대인들의 '신앙갖기'란 자신의 결심 여하에 달렸다고 여깁니다. 즉 신자의 반대말이 불신자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근본적으로 이방인과 이스라엘로 나뉩니다. 즉 개인의 결심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신앙의 나라가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본인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조치와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찾아오심의 대상을 '양'라고 묘사합니다. 양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목자됨을 위해 부속적으로 등장하는 존재입니다. 즉 양을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목자의 일하심이 우선입니다. 양이 목자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생산해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목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들의 인생은 자립적으로 존립하는 것을 이상적인 모양새로 알고 있습니다. 양이 목자의 능력이 이용하려듭니다. 양이 목자를 고르고 선택하려 듭니다. 자신들이 먼저 있고 그 다음을 자신을 살릴만한 목자를 양들이 판단하려 합니다.

이러한 양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체가 곧 양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양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의 '양'이란 기존의 자칭 양이라고 우긴 그 사례의 실패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양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수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애굽과 분리되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은 여전히 내부적으로 애굽적 속성이 연이어 폭발하게 됩니다. 자기네들이 기대하는 이스라엘상을 따로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마치 언약의 충족인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은 언약을 받는 자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언약을 주신 분에게 부합되도록 구체화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혹독한 거룩함이 내뿜는 징벌을 받게 됩니다. 즉 스스로는 양이라고 우기지만 실은 목자의 뜻에 부합되는 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시는 공간에 이웃하는 이방민족의 다른 신을 끌어다가 섬겼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라는 죄목으로 하나님에게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방신과 참 하나님의 차이는 언약의 유무에 있습니다. 언약이 없는 신이 곧 이방신입니다. 반면에 언약을 주시되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부합되지 않으면 가차없이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언약은 언약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에스겔 1:15-16에 보면, “ 내가 그 생물들을 보니 그 생물들 곁에 있는 땅 위에는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그 바퀴의 모양과 그 구조는 황옥 같이 보이는데 그 넷은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모양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퀴 안의 바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땅에서의 천사의 활동성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 형상은 모두 땅의 짐승 형상을 말합니다. 에스겔 1:10에 보면,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천사의 형상은 땅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을 감안해서 표현되는 형상입니다. 이는 천사들이 앞으로 활동하는 영역이 하늘이 아니라 지상임을 말하는 것이고, 이 지상의 모습을 반사해서 그대로 천사의 기능적 형상으로 덧입혀지는 것입니다. 특히 ‘바퀴 안의 바퀴’라는 것은 천사의 활동 가운데서 가장 궁극적이고 은밀한 핵심적 내용이 따로 마련되어 있음을 말씀하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스라엘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치 천사들의 움직임의 그 내부에는 천사를 움직이게 하는 움직임이 따로 구비되어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참된 이스라엘이 품고 있는 그 속성에서 발휘되는 작업과 연관있다는 말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껍데기 같은 거짓 이스라엘이 떨어져 나가야 하는 작업과 더불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 혹은 하나님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상의 죄악된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곡해한 언약으로 인하여 자꾸만 잘못된 양과 백성으로 행세하지만, 하늘의 작업은 바로 이런 상황을 감안하고 애초부터 진행해 왔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의 이해력으로는 스스로 힘으로 양과 백성이 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일관된 배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파괴되고 멸망당하는 그 수치스러운 역사 안에서 비로소 본 백성과 본 양들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도 ‘자신의 죽음’을 십자가로 인하여 늘 확인되는 가운데 주님이 동행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죽어 마땅함에도 살려내신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자기에 대해서 좌절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희생에 의한 살려주심이 이해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7-17 22:38 
100강-에스겔 34장 29절-31절(내 백성)14071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4장 29절-31절입니다. 구약성경 120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4:29-31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찌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찌라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증명해야 될 백성이 따로 있고 또 그들만 있으면 안돼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라고 외부에서 확인해 줘야 될 멸망 받을 백성들이 있어야 됩니다. 보통 신자의 반대말을 우리가 불신자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신자의 반대를 불신자라 하지 않고 신자의 반대말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믿는 자의 반대를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믿으렵니다. 믿겠습니다.”하는 결심에 의해서 자기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구약적 방식에 의해서 백성과 백성 아님이 구분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백성 됨은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자신의 솜씨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 생각에는 신자냐 신자 아니냐 하는 것이 본인이 “나 이제 믿으렵니다. 지금부터 믿겠습니다.” 하는 자기결심, 신념이라 할 수 있는데요, 어느 시점의 자기 결단으로서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그 믿음을 쪼개보면 자기 결심이나 자기 행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관여했다는 것이 없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관여하게 되면 하나님의 관여와 인간의 관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결심을 인정받기 위해서 내가 결심으로 인정받았다는 쪽을 되게 좋아합니다. 그게 바로 이방인들이 하는 잘못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부르신 모세에게 양 팔에 돌 판을 쥐게 하셨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시작도 하나님이요 마무리도 하나님이 하신다. 그냥 마무리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에서도 함께 동행 하신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현대인들의 생각과는 너무 판이하게 다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31절에 보면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왜 처음부터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앞에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이라는 표현을 꼭 하셔야 하는가? 그 이유는, 양이라는 것은 자존, 스스로 자립해서 사는 형편이 되지를 못합니다. 양은 필연적으로 목자에 의해서 인도받아야 생명이 부지가 돼요. 그래서 양은 그 양 자체로서 모든 의미가 충족되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있어야 됩니다. 목자를 유발하는 양이에요.



그래서 불쌍한 양은 뭐냐 하면, 다친 양이 불쌍한 양이 아니고 길 잃은 양이 불쌍한 양이 아니고 목자 없는 양이 정말 불쌍한 양이에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목자 자체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서울에 아들과 며느리 둘만 사는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문 열고 들어와 보세요. 대단히 부담스럽지요. “우리끼리 살 수 있는데 왜 어머니는 여기 오셨습니까?” 속으로는 그 말 하고 싶은데 그 말은 못하고 “집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전화도 없이 갑자기 오시면…….” 그렇게 되지요. 그러면 어른들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싫지?”



어른들은 벌써 시비조로 들이닥쳐요. “왜? 내가오니 싫으냐? 내 아들 보고 싶어서 왔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나?” “그게 아니고요 어머니.” “그게 아니면 뭐냐? 온 김에 한 달만 있겠다.” 현대인들은 누가 간섭하게 되면 자기가 바보인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불쌍한 존재입니다. 양이라고 하는 것은 목자 없는 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양이 살기 위해서 목자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목자의 목자 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자는 반드시 양을 기르게 되어 있어요.



그 길러진 양이 본문에 있는 양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방인들은 ‘내가 신을 믿겠다.’ 하고 결심하는 순간 자기가 신자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고, 그것은 지옥가려고 환장하는 이야기고 정말 하나님의 계획된 백성은 하나님이 먼저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양을 낳고 인도하고 그래서 백성이 된다고 했습니다. 목자가 먼저 있다는 그 말은 양이 목자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일방적으로 양을 양답게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한 이야기 그것만 하면 되는데 오늘 본문에 29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찌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찌라.”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 것이라, 하는 이 별로 느낌이 좋지 않은 단어가 등장하지요. 하나님의 계획이 간단치 않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는 내 양이다. 나는 목자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 끝.” 이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양으로 생각해서 인도했는데 그 양이라는 양들이 이방나라하고 짝꿍이 된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백성의 땅이 아니에요. 이게 하나님 땅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처소 만들기 위해서 이끌어낸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만 사는 게 아닙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인간들 종족만 살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종족만 있는 게 아니고 거기에 반드시 이스라엘 되게 하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신 하나님이 거기 상주할 때만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공간이 하나님이 주신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구미에 맞는, 자기에 맞는 남자를 주님의 공간에 끌어당긴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구원하지도 않는 신을 섬긴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참된 하나님과 거짓된 하나님, 다 같은 신인데 신과 만나는 차이가 이방나라하고 이스라엘나라하고는 다르다는 이야기에요?”라고 물으신다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에이, 신은 다 신이고 그냥 신을 섬기면 되지 뭐가 달라?” 다르거든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사귈 때 반드시 하나님 쪽에서 내민 언약을 통해서 교제하게 되어 있고 이방나라는 언약이 없어요.



신이라고 해 봐야 그게 신이 아니에요. 언약이 없으면 신이 아닙니다. 인간이 상상한 거예요. 언약을 모르면 그것은 가짜 신, 자기가 지어낸 신을 지금 신이라고 엉터리로 믿고 있는 겁니다. 교회에서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서 다 나가버려요. 다 나가는 이유가 내가 믿던 신하고 차이가 나기 때문에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의 본 내용이 뭐냐? 그냥 언약이라고 했다면 안 떨어져 나왔을 거예요. ‘아, 내가 믿던 하나님에다가 추가해서 언약의 지식을 더 알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플러스해서 내가 몰랐던 언약을 얹으면 그게 온전한 하나님관계가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언약 내용이 뭐냐 하면, 바로 죽음의 내용, 십자가이야기거든요.



그때부터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살려고 교회 왔는데 죽어도 괜찮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나오면 그 다음부터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죽여도 여러분들은 대들지 마세요.”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그 이야기를 해 버리면 이미 교회에 발걸음을 들여놓을 때의 근본취지가 다 틀어지는 겁니다. 이 땅에서 복 받아서 잘 먹고 잘 살려고 왔는데 갑자기 언약을 이야기할 때까지는 좋았지요. 언약의 내용이 십자가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이 있으니 그것까지는 괜찮다는 말이지요.



그 십자가 내용을 탁 깨보니까 거기에는 “죽어도 좋습니까?” 이렇게 나올 때는, “망해도 좋습니까?” 이렇게 나올 때는 드디어 심기가 뒤틀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방인다운 그 속내를 완전히 폭로당하고, 말씀 앞에서 나의 꿍꿍이가 신하고 좋은 사이 만들어서 복이나 따내겠다는 존재밖에 안 된다는 것을 폭로당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세요. 세상은 동화처럼 아름답지를 않습니다. 어릴 때 동화 보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요. 신비롭고. 백설 공주를 봐도 그렇고. 어디 말 탄 왕자가 나타날 것 같고 볼록 소매를 한 예쁜 공주도 나올 것 같고.



요새는 볼록 소매 한 예쁜 공주는 없고 전부 다 반바지 입고 성형한 공주, 뜯어고친 공주죠. 세상이 동화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것을 누가복음 9장 61, 62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어떻습니까? 세상이 동화처럼 아름답습니까? 가족하고 작별 인사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데 이걸 보고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따라가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인사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할 때에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가족을 뒤돌아보지 말아야 할, 떨어져야 할, 우주 모선과 캡슐이 떨어지는 것처럼 영원히 떨어져야 될 관계로 주께서 몰아세우는데 이게 아름답습니까? 주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투쟁의 세상이에요. 하나님나라냐, 그냥 세상이냐? 그냥 인간들의 세상에 남을 거냐, 아니면 하나님나라의 배, 그 우주선에 올라 탈거냐? 아주 시급한 문제고 제일 우선되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안일해도 너무 안일해요. 주님이 보는 세상관이 아니고 너무너무 안일스러워요. 자기 편하면 좋은 세상이고 힘들면 어려운 세상이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악마같이 변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악마같이 변한 세상이 왜 그렇게 친숙하고 친밀한지. 안 믿는 사람하고 서로 사귀는데 그렇게 웃으면서 친절한 거예요. 믿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교회에서는 왜 그리 서먹서먹한지 할 이야기가 없어요. 언젠가는 주일 저녁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자외선 A와 자외선 B하고 구분해서 아토피 기계 선전하는데 30분 내내 이야기를 해도 지칠 줄 모르더라고.



그런데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는 아무 할 이야기가 없어요. 왜냐하면 복음 이야기를 하려면 말씀 때문에 싸움을 했던 경험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경험들은 없고 우리는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하려는 투쟁의 경험들은 많은데 그게 백 프로라서 그건 할 이야기가 많거든요. 이 땅에서 성공하고자 노력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그렇게 손가락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구구절절 험난한 고난들, 드라마를 찍어도 될 만한 우여곡절, 반전에 반전, 모든 인생의 굽이굽이 사연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미 구원 받았음을 확인하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어데예?” 그렇게 되는 거예요. 방금 제가 읽은 누가복음의 이 분은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내가 예수님 따라다닐 때 가족하고 작별인사 하려 하니 주께서 마지막 인사정도는 하라고 허락할 줄 알았는데 주께서는 아주 오버하는 심한 말씀을 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는 그 말씀. 아직도 그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이런 게 뭔가 말씀이 문자에 머무르지 않고 실생활 속에 치고 들어왔던 그 혹독한 경험을 해야 됩니다.



그 경험의 와중에 뭐가 있어야 되는가? 수치를 당해야 돼요. 다른 말로 해서 초죽음, 죽음을 당하는, 죽음과 관련된 일이 우리에게 덮쳐야 됩니다. 제가 오늘 메일로 질문을 하나 받았는데 그 질문이 이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고 할 때 왜 저녁과 아침이 나눠집니까, 라는 어떤 목사님의 질문을 받았어요. 질문은 세 가지였는데 두 번째 질문은, 왜 성경에서 동쪽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세 번째는, 성경의 중심사상과 내용이 너무 함축되어 있는데 그것을 자세히 단락단락 설명해놓은 것은 없습니까? 이 세 가지를 질문해 왔어요.



저녁과 아침을 왜 구분하는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잠을 자게 되어 있다는 말, 잠속에서는 의식이 날라 가요. 따라서 밤에는 인간만 잠을 자는 것이 아니고 동물도 잠을 자요. 올빼미 빼놓고. 동물도 다 잠을 자게 되면 그 다음날은 의식적으로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단절이에요. 그날 염려는 그날 족하다는 이 말,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루하루를 다음 날은 주께서 친히 날마다 우리를 창조해 내시는 거예요. 늘 살려주시는데 그 살려주시는 그 은혜를 하루치씩 끊어서 우리가 느껴야 됩니다. 내가 나를 살리는 게 아니고 다른 분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그것도 은혜로 살린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두 번째 질문에서 왜 성경에서 동쪽이 중요한가? 이스라엘 진영에서 유다지파가 동쪽에 있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생명나무 있는 메시아가 올 때 이스라엘이라는 관, 파이프, 하수관 같은 파이프, 이스라엘 자체가 파이프가 되어서 관통하면서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진영의 동쪽에 있는 겁니다. 에덴동산이 이스라엘 속에서 동쪽을 강조하면서 사건으로 반복되는 거예요. 결국 성전의 동쪽에서 왕이 입성하는 겁니다.



이처럼 주님의 현실은 항상 이 세상 악마가 지배하는 현실인가, 아니면 새로 거기에 개입된 하늘나라로 올라탈 것인가, 갈아탈 것인가? 그게 관건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우리는 매일 죽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의미에요. 잠을 자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깨어나고 안 깨어나고는 주님 손에 달렸지 우리 능력에 달린 게 아니에요. 하루치 생명, 하루살이에요. 야고보서 4장에도 있잖아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하루살이라는 뜻이에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주의 뜻으로 죽기도 하고 주의 뜻으로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냥 내가 살았다 하지 말고 주께서 오늘도 나를 살려주시겠다는 뜻이 먼저 있었기에 지금도 내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저녁까지 만이고 내일은 몰라요.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네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는가?” 태어날 때는 나이순으로 태어났지만 돌아가시는 것은 나이순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양과 백성, 그걸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면, 그들로 하여금 수치 당하게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초죽음 당하게 해서 죽음 속에서 양답게 백성을 백성답게 새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죽는다는 것은 자살한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약대로 실시하게 되면 그 언약에 뭐가 있느냐 하면,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저주가 나오거든요. 그 저주를 누가 받는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자기 남편, 자기 하나님한테 오히려 저주받는 백성이 됩니다. 징벌을 받을 만 해서 받는 거예요.



말로만 죄인, 죄인, 하지 마시고요. 이 땅에서 사는 그 징벌을 감수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여, 죄인입니다.” 이 말을 잘못하게 되면 “죄인인줄 미리 아니까 때리지 마소서.” 이렇게 안 맞겠다는 노림수로 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정말 죄인이라면 이 땅에서 받는 모든 고초, 주님이 받은 고초에 대해서 우리가 감수하겠다는 것도 아울러 품어줘야 그게 진정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혹 문짝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것이 있어야 하루하루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느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수치 속에서, 죽음 속에서 새롭게 나와야 돼요. 그렇게 기어 나올 때 주님께서 그 구멍보고 하는 말이 “너희는 내 양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고 나는 너의 백성이다.”라고 외치는 거예요. 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라는 껍질을 벗기고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야 됩니다. 그 대목의 원천은 에스겔 1장 16절에 보면 나옵니다.



에스겔 1장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전구조가 보이는데 거기에 네 생물들이 있고 네 생물 속에 바퀴가 있는데 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바퀴 안에 바퀴가 있다. 그리고 네 생물은 에스겔 10장에 보면, 독수리, 소, 사람, 사자, 그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이 그룹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천사입니다. 바퀴 속에 바퀴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천사의 모양새에 대해서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얼굴이라는 말이지요.



이 땅의 세상을 거울로 본다면 천사의 얼굴이 땅을 거울로 비춰서 보는 것처럼 세상이 보인다는 거지요. 땅을 비춰서 보면 독수리, 사람, 소, 사자, 이게 다 땅의 짐승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땅 자체가 거울이고 땅에서 활동할 하늘의 천사들은 땅에 있는 특이한 짐승들의 독특한 기능을 표상하듯이 고유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퀴속의 바퀴라는 것도 땅에서 일어날 하나님의 일속에, 하나님의 성전 안에 성전이 들어 있는 거예요. 성전 안에 성전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성전 안에 가려면 밖에 있는 성전이 부서지고 깨져야 된다 그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늘나라의 모습은 항상 땅이라는 이름의 거울을 갖고 있는데 하늘의 모든 모습들은 땅을 되비쳐서 하늘의 모습처럼 땅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자세한 것은 이번 수련회 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걸 자세히 설명하려면 복잡한데요. 사람은 하늘을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자체의 시각이 이미 죄악 된 시각이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 문제 있는 시각자체를 거울로 보고 하늘에서는 그 문제 있는 모습을 하늘의 천사와 하나님의 아들이 그대로 그 모습을 가져가는 거예요.



가져가시고 활동을 어디서 하는가? 하늘에 계신분이 하늘이 아닌 땅에서 활동을 해버리면 우리가 보기에 천하에 죄인처럼 보이는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에 보면 물통 안에 물 먹는 본인이 들어가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요. 작가의 상상이니 뭔들 못하겠어요? 또 거울을 양쪽에 서로 놓게 되면, 이걸 연경현상이라 하는데 거울 속에 무한대로 비취잖아요. 그런 장난 어릴 때 해 봤지요? 비친 것 되 비취고 또 되 비취고 양쪽 다 무한대로 보이잖아요.



따라서 인간들은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나라를 보면서 그것을 하늘나라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관점을 하나님께서는 활용하시면서 이 땅에 등장하시는 겁니다. 에스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양이고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트려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너희들이 의지하고 믿었던 그 모든 세상의 구조들이 사실은 가짜였다는 것, 죄악된 것인데 그 죄악된 것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냈습니다. 건져냄을 당한 이스라엘은 자기가 특별한 민족이고 택한 민족이고 그야말로 제사장 나라라고 좋아들 했는데 그게 바로 죄인이 거룩한 백성이라고 여겼던 안목이 기껏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백성과 동행을 하시는 거예요. 동행을 하니까 자기는 룰루랄라 하면서 자기들이 특별한 백성이니 하나님께서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고 우기면서 점점 더 어디로 가느냐 하면, 점점 더 세상 나라로 돌아가고 세상나라를 닮아가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나라에서 나왔지만 본 모습은 여전히 세상 나라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세상나라 본 모습을 애굽이 아니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짜 세상 죄를 까발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 위주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위주로 사는 사람들이 그냥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살짝 이용하고 빌리려고 하는, 자기만 챙기려는 사고방식으로 그냥 이스라엘로 자부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기독교하고 전부 다 똑같은 겁니다. 남의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심보에서 본인이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본인은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본인이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를 않았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힘으로 자립하고 싶어 하지 내가 하나님의 똘마니 되기는 싫은 거예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적도 언젠가는 하나님 없이 살 그 날을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돈이 없는데 돈 좀 보내주시면 이제부터는 제가 힘 있게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내가 힘 있게 하나님 섬기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안 도와줘도 스스로 자립해서 하나님 섬길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선악과 따먹은 그 심보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께 다루어지고 복속이 되고 내 가정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주인이 되어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따로 생각해 놓은 내 계획대로 되게 되면 그 때부터 내 쪽에서 알아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모시겠다는 쪽으로 자신의 자존심과 자립심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하나님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언약대로 살겠습니다. 율법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죽음이 들어 있거든요. 그들은 죽음을 피해가려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듯이 하나님이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존재들끼리 잘 해봅시다.” 이래 나온다는 말이지요. 네가 죽음 속에서 살아나야 진정 내 백성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그럼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내가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그 생각이 죽어야 돼요. 내가 내 계획한 대로 되어야 된다는 그 생각이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족하고 이별의 인사하지 말라는 거예요. 다시 가족과 헤어지면서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하면 그 가족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그 인상, 내가 이 가족의 자식이었다는 그 생각이 계속 이어지면서 하늘나라에 승선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면 돼요. 늘 우리는 확인해야 돼요. 지금 내가 가는 인생길이 제대로 된 노선인가? 노선인지 아닌지는 풍경을 보면 됩니다. 내가 바깥 풍경을 봐서 전라도 가는 코스 같으면 자다 일어나서 ‘여기가 전주?’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여기는 경상도가 아니고 전라도지요. 그런데 서울 쪽으로 향한 김천, 구미가 나온다면 이것은 경부선인겁니다. 우리가 가는 노선이 진짜 하늘나라 가는 노선이라면 나한테 낯선 풍경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 아니고 내가 생각도 못한 다른 길로 인도함을 받음이 오히려 고맙고 감사함을 느껴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왔던 31절,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이것은 그들이 실패가운데서 정말 죽음과 멸망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인생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보세요. 바로 이러한 혜택이 없는 사람이 이방인들이에요. 이방인들. 우리가 이방인들을 파악해야 될 이유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자립하고자 하나님 믿고 자립하고자, 내 뜻대로 되고자 교회 나왔던 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기에 그런 사람이 나왔을 때 우린 그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파악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는 노선이 정상인지 다시 돌아보게 하옵소서.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 우리가 저런 사람이었어. 하지만 십자가 주님의 죽음과 함께 죽고 다시 살면서 저것이 우리의 과거생활이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풍경이 주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