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한 목자(겔34:23-24)140702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7. 4. 20:02

2014-07-02 20:56:08 조회 : 52         
   한 목자 140702 이름 : 이근호   

한 목자(에스겔 3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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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7-02 21:40 
한 목자

2014년 7월 2일                           본문 말씀: 34:23-24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34: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뭔가 성경의 최종 목적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구절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핵심만 노골적으로 말해주시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 외에 모든 성경 구절들은 왜 기재되어 있는 것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이 구절만 남기고 다른 구절들이 없다하더라도 구원받는데 지장 없을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구절들은 왜 있는 걸까요? 이 성경구절보다 뚜렷히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을 전달해주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되고 다윗이 왕이 되는 그런 나라가 최종적인 천국인 것을 이미 이스라엘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러한 명쾌한 계획도 인간들의 본성 앞에서 그저 이론에 그치고 맙니다.

사람들은 본성상 다른데 더 신경 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가정’입니다. 가족입니다. 혈육적 관계입니다. 오늘날 사람이나 옛날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가정과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 찾고 다윗왕을 찾게 마련입니다. 자기 가족 버리고 하나님이나 목자 되시는 다윗을 찾는 이는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을 하던지 말씀을 대하던지 간에 항상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덕을 봐서 내 식구가 잘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목자의 순수성은 늘 인간 세상에서 훼손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하나의 국가가 형성되면서, 가족 중심이 아니라 ‘제사장 중심적’ 나라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가족이나 가정이 우선시될 수가 없습니다. 한 가장이 자기 가정에 충실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입장에 놓인 게 아닙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자신의 희생에 우선적인 관심사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제사장마저 자기 가족 중심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한나와 그리고 엘리제사장에게 내리신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견고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가정을 따로 만드시겠답니다. 이 예언은 바로 자기 아들의 비-율법적 언동에 대해서 제대로 제지 못한 엘리제사장 가문이 무너지는 상황에 주신 예언입니다.

이는 일반 가정 위에 다른 관계를 만들어서 얹게 되고, 그 얹어진 관계 장치의 유지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따로 만들어주는 가정은 다른 가정보다 우위에 있게 됩니다.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가문이 됩니다. 이런 약속이 하필이면 다윗 때에 주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다윗 선배들을 제치고 다윗에게만 이스라엘 왕이 되는 권한을 입혀주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오면서 그 나라는 정착하지 못하고 남의 영토 사이를 떠돌아 다닌 신세였습니다. 여기서 숱한 전쟁이 치러지는데 이 전쟁이 바로 ‘붙여주는’ 전쟁입니다.


‘붙여주는 전쟁’이란 전쟁의 이유나 목표나 방식에서 인간들이 완전 손을 떼는 방식입니다. 적은 인간들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되어 친히 하나님에 의해서 패배 당하게 됩니다. 적들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진하지만 실은 적들은 있지도 않는 절벽에 스스로 부딪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진행되는 전쟁이 ‘붙여주는 전쟁’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친히 용사요 승리자가 되게끔 결과가 일어나는 전쟁이 붙여주는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은 마치 썰물처럼 왔다가 밀물처럼 적들을 쓸려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그런 전쟁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이 가나안 땅에 도달되어 비로소 정착하게 된 것도 다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신 덕분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고정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고정된 자리’는 특정 가문으로 지정해버립니다. 즉 건축물로서 고정적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고, 다윗 가문이 친히 아들이 되는 그런 고정적 혈통을 친히 만들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13-16)
그런데 이 다윗 가문이 단순히 혈통적 가문이 아닙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주는 물 세례를 요한이 얼마든지 줄 수가 있지만 성령 세례에 대해서 요한은 개입할 수 없고 단지 증거할 뿐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집이 되는 가문에 만들어나가시는 그 와중에서 진정 떨어져 나갈 혈통은 바로 다윗 혈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유다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 주신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예언을 가지고 이익을 보려고 하는 바탕이 아예 남아있지 않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혈통을 유지하는 것도 인간의 생식능력이 가담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일체 인간들의 요소가 삭제된 채 하나님의 순수한 가족 만들기가 등장하려면, 인간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혈육적 요소가 다윗 혈통 속에 등장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통치는 다니엘 7:13에 그 내막이 나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육과 영의 총돌로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 죽음 당함만이 실내용으로 해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아무도 천국을 모릅니다.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죽임을 당한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에 의해 초청받은 사람만 그곳에 들어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이 사람들의 잘남의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 죽음만이 인정되는 곳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7-03 16:48 
98강-에스겔 34장 23절-24절(한 목자)14070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4장 23절-24절입니다. 구약성경 120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4:23-24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누가 봐도 상당히 오늘 읽었던 이 본문이 중요한 본문이라는 짐작은 하게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을 목자로 세우셔서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는 집단이 발생되는데 그 집단만이 천국에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핵심이 있고 따라서 우리 생각에는 성경의 나머지 모든 말씀은 다 지워버리고 에스겔 34장 23절과 24절만 달랑 남겨도 무방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봐도, 누가 봐도 중요한 그 말씀은 수풀속의 보물처럼 감춰놓게 되고 그 외에 다른 골치 아픈 말씀. 제사 드리라는 것을 포함해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 계명들이 있으니까, 사람들 생각에는 이 성경 전체 다를 지켜야 되는 줄로 아니까 성경 한 구절도 못 지키는 판에 다 지켜야 한다면 이것저것 지키다가 정작 중요한 오늘 본문인 에스겔 34장 23,24절을 허투루 지나가 버리면 실내용도 없는 채로 말씀을 지켰느니 못 지켰느니 그렇게 하다가 우리 왕 되시는 다윗도 놓치는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왜 성경에서는 이 중요한 말씀만 달랑 남기고, 심지어 창세기 1장도 필요 없는 거 같아요, 이 말씀만 달랑 남기고 백지로 지워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은 이 귀한 말씀을 왜 다른 말씀의 수풀 속에 숨겨놓은 것처럼 배치를 해놓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만 딱 뽑아 놓게 되면 외우기도 좋고 신앙생활하기도 좋아요. 이것만 생각하면 되니까요.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 성경은 그 한귀절만 있으면 될 것 같은 다른 구절이 왜 있느냐는 말이지요.



다른 구절이 있다 보니 다른 구절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니까 중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숙제가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에스겔 34장의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면 그들 위에 한 목자, 다윗이라는 종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수용을 하고 수긍을 하고 인정을 할 것같은 느낌을 받지요. 목자가 다윗이라면 그분만 믿으면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다윗이 목자가 된다는 그 말씀을 과연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본인들은 몰라요.



왜 그런가,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목자중심, 다윗중심,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중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메시아를 처음으로 언급할 때 그 대목이 한 가정이 파탄 났을 때 파탄 난 사건과 더불어서 한 메시아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게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엘리 가정이 나오지요. 엘리가정이 파탄 납니다. 엘리제사장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아들들이 망나니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이 귀하고 좋아서 어떻게 살든 별 간섭도 하지 않다가 한 날 한 시에 자식 둘 다 죽잖아요. 홉니와 비느하스지요. 한 가정 전체가 날라 갑니다. 그 당시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특수하게 그 나라를 지배하는 체계가 제사장을 통해서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견고해야 되고 제사장만은 신앙대로 살아야 된다는 그것에 이스라엘의 운명이 걸린 거예요. 이렇게 되면 기존의 가족들, 우리 가정은 충실하게 잘 살련다, 라고 자기가정에 충실 한다고 해서 결과가 좋은 게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각자 자기가정 치고 자기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가정에 충실하게 가장으로서 모범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를 않는다는 말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각자각자 자기 가정에 충실하면 되는 가정이 아니고 그 가정 위에 제사장이 있어서 제사장이 제대로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느냐 안 사느냐에 따라서 그 밑에 있는 가정이 저주받느냐 구원받느냐가 달려 있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이스라엘은 가족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든 고대든 모든 민족들은 전부 다 가장 가까운 내 피붙이, 내 가족중심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어요. 가족 단위가 커지면 이게 국가 단위가 되는 겁니다. 국가를 왜 좋아하는가, 내 가족 내 가정을 책임질 것 같아서 국가를 좋아하는 겁니다.



만약 내 가족 내 가정을 힘들게 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이민 갈 용의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내 가족 내 식구 살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게 우리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인간들이 가족중심으로 산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가족중심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가족만 챙기는 것을 아는데 가족만 챙겨봤자 그것은 하나님께 기쁨도 영광도 되지 못하고 하나님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금요철야 할 때 그 철야하는 기도제목들이 우선적으로 가족중심이에요. 그리고 실내용도 다 자기 가족 잘 되기에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 말은 가족 잘되면 고민거리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고민거리가 생겼다는 말은 내 가족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 우리가 예수님 걱정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예수님 걱정해요? 우리 평소의 버릇이 어떤 버릇인가 생각해 봅시다.



매일같이 술 먹고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와 매일같이 기도하시는 아버지가 공통점이 뭐냐? 둘 다 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서 한다는 거예요. 술 먹으면서 술 먹어도 되느냐고 묻지 않지요. 너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인지를 물어보기가 힘들어요. 왜 힘든가 하면, 다른 식구들이 아버지의 그런 행동에 동의를 하려면 그냥 하세요, 라고 동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도 하고 싶은데 못하니까 아버지가 대신 하세요, 라고 할 경우에만 동의가 되거든요. 권한을 일임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광신도가 되어서 교회에 매일 간다고 해보세요. 가족들은 “아빠, 아빠가 하나님하고 깊이 사귀는 것은 좋지만 우리 가족들도 오순도순 살고 싶어.”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나 술을 매일 먹고 오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족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겁니다. 비록 종교적인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가족은 우선 종교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안 합니까? 그런데 종교가 하나 되어 봐야 그 가족은 편안한데 문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구체적이에요. 가족 외에 다른 노선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가족중심이 아니고 가족을 제키고 가족보다 더 높은 단위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유일하게 연결이 되고 소통이 되는 다른 장치를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놓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제사장 제도입니다.



그 제사장제도를 이스라엘에게 실시할 때 특징,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왕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왕이 있고 없고가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르지요. 현대인은 가족중심이니까. 16세기 이후에 근대국가가 발전하면서 국가가 귀족중심으로 돌아가다가 근대 민주주의국가가 되면서 국가를 위한 가족은 없어요. 전부 다 내 가정을 위해서 국가가 뭘 해주게 되면 비로소 그 국가에 대해서 세금을 낸다든지 안 그러면 병역과 노동의 의무를 할 용의가 되어 있다고 되어 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제도입니다.



국가위주가 아니고 가족 위주입니다. 제가 언급 다시 하지 않더라도 뻔한 이야기를 여러 번 하고 있는 거예요. 글쎄 그게 뻔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것은 지금 긴장도가 떨어졌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해도.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목자를 주신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느낌이 뭐냐 하면, “목자를 위해서 살라는 말이구나.”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아, 우리가 목자를 잘 사귀어놓으면 내 가정이 잘 되겠다.” 이렇게 생각들을 하는 거예요.



목자를 주든 메시아를 주든 항상 마지막 최종 도달점은 내 중심, 가족중심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달랑 이 말씀만 있으면 좋겠는데 이 말씀 외에 전혀 다른 구절들이 이렇게 많이 있느냐고 저한테 질문하시면 제가 답변을 이렇게 합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지만 그 중요한 말씀을 처음부터 주셨건만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들은풍월도 있고 이론적으로는 알았지만 이 몸은 자기 가족중심이고 자기들 중심이기 때문에 백날 하나님이 이야기해 봐야 그들에게는 별로 안 중요했던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 또다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을 다시 하는 것은 그동안 그들이 건성으로 들었던 거예요. 왜 건성인가? 내 가족중심이고 내 육체 내 몸 중심이기 때문에 주께서 주시면 “참 좋은 말씀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그것은 되었고 내 가정은 어떻게 할 거요?” 본론에서는 자기가족중심 자기중심으로 되돌아서기에 이 에스겔 34장까지 올 때까지 그 모든 가족중심을 척결하고 그것을 파괴시키는 작업의 긴긴 역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중요한 말씀 하나만 달랑 남기면 되는데 왜 그 주변에 전혀 무관한 것 같은 말씀은 왜 그렇게도 많은가? 그것이 무관한 것이 아니고 이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간들은 중요하지 않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줄기차게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씀 중요하다, 하고 집으로 돌아가 봤자 우리는 중요하다고 한 그 순간만 중요하지 집에 가면 다 잊어버리고 다시 내 가족중심 내 중심으로 휘딱 180도 돌아설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갖고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왜 이렇게 여러 차례 했는지, 오늘 에스겔 34장 본문에서는 어떤 차원, 어떤 자리에게서 이 말씀을 하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을 멸망하고 난 뒤에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이 말씀을 주실 때 “야, 목자를 주신단다. 저 목자 잘 사귀어서 내 가족과 내가 잘 먹고 잘 살아야지.”라고 목자를 내 편의 위주로 이용할 수 있는 어떤 건더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그 전능하신 힘을 이용해서 어떤 노림수가 있는 어떤 바탕도 이미 제거된 상태에서 이 말씀을 또 다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참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결혼 안했냐? 혼자 살아라. 결혼해서 고생하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것이 훨씬 낫다. 혼자 살면서 주님 잘 섬겨야 되는데 결혼해서 주님 섬기는 대신 배우자를 섬겨서야 되겠느냐?”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어요. 이 이야기를 주례사로 한 번 해 볼까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메시아가 처음 등장하는 경우가 사무엘상 2장인데 어떤 때에 등장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엘리 자신의 사적인 가정을 두둔하고 그 가정을 살찌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과 제사제도를 적용했던 그 엘리가문이 작살났을 때 두 번 다시 그런 짓거리가 나타나지 않도록 완벽한 하나님의 택한 제사장을 하나님이 준비해놓았다는 그 말씀이 한나를 통해서 그 계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목자, 참 좋은 말이지요. 그것을 어디에 갖다 붙여요? 내 가정 잘되는데다 붙이고 내 신상 잘 되는데다 붙여요? 그렇게 붙였다가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다시 이 말씀 주십니다. “목자 보내 줄 테니 그 목자가 왕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친히 네 하나님이 되어서 천국을 이룰 것이다.” 인간적이고 육적인 것은 여기에 결부시킬 어떤 것도 허용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목자를 주시는데, 다윗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하필이면 사울도 아니고 사무엘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고 하필이면, “아브라함의 너희의 왕이 되리라.” 혹은 “야곱이 너희 왕이 되리라.” 이게 우리 같으면 무방할 것 같아요. 모세가 왕이 되리라, 모세가 삼세판 한 번 해야지요. 실패했는데 한 번 더 해서 성공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윗이 목자가 된다고 했느냐는 말이지요. 선배들도 많은데. 왜 선배를 제치고 하필이면 다윗이냐는 말이지요. 다윗에게 무슨 숨겨진 하나님의 정보가 있기에. 어떤 숨겨진 계시가 있기에 “내 종 다윗을 목자로 세운다.”고 했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이 쉬워 보이지만 쉬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죽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윗이 다시 부활하느냐 하는 그 문제가 이슈가 된 겁니다. 다윗이 부활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다윗이 부활할 것인가? 다윗이 부활한다면 예수님은 사이비가 되어버려요. 왜, 예수님은 다윗이 아니니까. 성경대로, 에스겔 34장의 성경대로. 분명히 다윗이 온다는데 예수님은 다윗이 아니잖아요. 이름이 다르잖아요. 다윗이 왜 오지 않고 예수가 왔습니까?



그런 것은 몰라도 되고 무조건 예수만 믿으면 되는 겁니까? 예수님 안의 내용이 우리가 몰라도 돼, 라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다윗인가 하면,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을 다윗이 어떻게 생각을 했느냐 하면, 성전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성전을 짓겠다고 제안한 취지가 뭐냐, 아예 한 지점에 고정된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예 이스라엘을 박아놓으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깨지거나 이동하거나 하지 않고 영원한 그 지점에서 번성을 해버립니다. 하나님이 그 장소에 계시면.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한 것은 다윗이 생각하기에 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오기까지, 애굽에서 가나안에 오기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올 수 없는 곳에 왔다는 것을 본인이 알았어요.



그렇다면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과 함께 있음을 감 잡은 겁니다. 이게 다윗 생각입니다. 다윗 생각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옛날 애굽에 있을 때는 남의 종살이 했는데 거기서 나올 때는 도망자가 되어서 떠돌이 생활을 한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는 땅을 부여받고 거기에 정착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영원무궁한 나라가 되면, 제사장 나라가 되고 왕적 나라가 되면 전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윗의 욕심도 아니고 다윗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다윗은 하나님의 계획에 그냥 말려든 것뿐이에요.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다는 겁니다. 다윗이 그것을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니까 이스라엘을 나라 위의 나라에 왕같은 나라로 세워서 전 민족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나라가 다윗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실현된 현상을 다윗은 지금 맛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전쟁할 때 그 모든 전쟁승리가 결코 다윗의 개인 능력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아요. 그야말로 어떤 전쟁이냐? 그걸 ‘붙이시매’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을 붙여주시매 알아서 거꾸러지도록 주께서 조치한 겁니다.



나는 가만있는데 저쪽에서 때린 주먹으로 도로 그들이 당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도전하면서 힘자랑하고 쳐들어옵니다. “유단자인가?” 이런 식으로 쳐들어와서 재주를 부린다고 하다가 자기재주에 자기가 넘어가서 퍽, 끝, 제풀에 쓰러져요. 다윗은 가만 있는데 붙여준 전쟁에 의해서 다 이겨요. 여리고 전쟁도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적은 우리에게 부딪힌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는 하나님에게 부딪힌 거예요. 하나님이 용사고 하나님이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정착하고 고정된 자리, 우리의 영원한 영토를 마련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이스라엘 뜻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어드리고 하나님께 영원히 제사드리면서 고정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제안을 했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았어요. 고정된 자리를 만든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의 생각이 상당히 기특한 생각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이 고정된 자리를 만드는 것은 좋은데 다윗이 혹은 솔로몬이 성전 짓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가? 성전 짓는 것은 인간이 지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포인트입니다. 사람으로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점, 굉장히 쉬운 문제이면서도 어려운 문제지만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해 봅시다. 물세례는 세례요한이 물에 잠그면 되고 요새 목사의 물세례는 목사가 잔에다 물가지고 뿌리면 돼요. 물속에 잠기게 하는 것, 뿌리는 것,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물세례고 인간이 못하는 것이 인간이 못하는 것이 성령세례에요.



인간이 할 수 있어서 구원 받는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될 수 있어도 복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원의 능력이 아니에요. 복음이 구원해주지 기독교는 구원의 능력이 못돼는 이유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도, 교회법, 예배당은 신축할 수 있고 주차장 넓히고 목사 안 수 줄 수 있고 다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양유하고 교육하과 세례주고 전도하고 헌금내고,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 거예요. 할 수 있기에,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면 할수록 그 다음에는 더 잘할 생각을 하면서 반성을 하고 회개하면서 점점 더 질적으로 완전, 완벽하게 되려고 시도합니다.



바로 그런 노선, 그런 시도자체가 점점 더 구원과 관계없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성령을 주시는 분이 인간이 아니고 따로 계십니다.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주님,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과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내가 세례주는 그분이 장차 사람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한 거예요. 세례요한이 물 세례주는 현장에서 성령세례 받으시고 성령세례 주실 분이 가담이 된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물과 성령이 같이 있게 된 거지요.



사람들이 물세례 주는 그 현장에 갑자기 비둘기같이 성령세례가 온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었다 그 말이지요. 그것은 신약 때 이야기거든요. 구약 때는 고정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지은 성전은 영원히 고정된 거예요. 사무엘하 7장 10절에 보면 나옵니다. 한곳을 정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왜 이스라엘이 망한 상태에서 이 본문을 다시 주느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가정 중심, 나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 중심이 아니고 내가 속해 있는 내 가족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가인도 자기가족 살리려고 했거든요. 자기식구밖에 모르는 거예요.



자기 가족중심이면 이 세상에 자기가족만 영원하게 돼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장중심이거든요. 성전이란 이름으로 지정된 장소를 만들어줍니다. 한곳이 성전이라는 지정된 장소임을 알기 때문에 다윗은 요청을 했고 하나님은 허락을 하되 그 지정된 한 장소를 사람 손으로 지을 수 있는 건물이 아니고 다윗이라는 그 가문을 지정된 장소로 정해버린 겁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을 좀 알아야 알아듣는 이야기에요. 성령까지 받아야 알아듣지만.



성전이라는 건물에서 인물로 바뀌는 거예요. 고정된 건물에서 지정된 한 인물로 바뀌어요. 그런데 그 인물은 육에서, 사람의 생식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식능력에서 메시아가 나오는 것은 차단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생식능력도 물세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목사님은 전도한다고 애 열두 명 낳은 사람이 있습니다. 애 많이 낳으면 전도한 거래요. 애 낳아서, 생식능력으로 한 전도는 물세례지 성령세례가 아닙니다. 목사 가정에 애가 넷이다. 셋도 많은데 왜 셋을 많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 십자가 마을에 애 셋 둔 가정이 너무 많아서 상처받을까 싶어 넷으로 합니다. 네 명 가진 목사가정이 있다면 그것도 상처받을까 싶어서 다섯 명으로 옮겨야 되죠.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오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 다윗혈통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어야 하고 밝혀져야 돼요.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네가 성전을 지정된 장소로 보는데 나는 하나님의 진짜 성전은 네가 만든 건물이 아니라 너의 가문을 지정된 장소로 삼아서 네 가문 안에서 하나님과 나의 백성이 유일하게 통하게 하고 만나주겠다.”고 한 겁니다. 그 말을 다윗의 가문이 영원하겠네, 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또 아니에요. 다윗의 가문인 유대나라가 망해야 됩니다.



조금 전까지는 다윗의 가문에서 진짜 메시아가 온다면서요? 다윗의 가문은 연속되어야 하고 끊어지면 안 되잖아요, 라고 하잖아요. 다니엘 7장 27절에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바 되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다니엘계시에 의하면 7장에서 인자 같은 분이 하늘나라 보좌에 있다가 내려와요. 인자 같은 분이 하늘나라에 대기해 있다가 뜻이 있으매, 하나님의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구름타고 내려온다는 거예요.



오게 되면 그 하늘에서 오신 인자 같은 분의 나라의 권세는 세상 모든 권세를 다 엎어버리고 통치하고 지배하는 진정한 이스라엘, 영원한 제국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지상에 있는 다윗의 혈통이 있잖아요. 유다족속. 유다족속의 혈통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고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을 해 놓았고 유대인들이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단 말이에요. 믿었는데 그 믿었던 유대나라가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제국에 의해서 도리어 심판받고 멸망 받을 나라로 신약 때에 돌변해 버립니다. 유대나라가 짐승의 나라가 돼요.



이런 설교를 일반교회에서 해버리면 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려요. 뭐냐 하면, 내 나라 어떻게 되고 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키고 내 가족을 어떻게 지키고, 이렇게 생각하다가 성경에서 나오는 인자의 나라는 전혀 대한민국하고 관계가 없거든요. 성경은 월드컵 16강 탈락하는 것 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내 가족하고 관계가 없어요. 오직 우리가 기도할 것은 그 나라 의를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지 내 식구 내 가족 나 잘되라고 기도하는 것은 용납이 안되거든요.



그러면 밑에 있는 역사의 가문과 위에 있는 가문이 어디서 만나서 어디서 헤어지는가? 여러분이 공중에어쇼 하는 것 보셨지요? 비행기 두 대가 충돌할 듯이 날라 가다가 살짝 비켜 가잖아요. 서로 마주치는 거예요. 유대나라와 하나님나라가 마주치면서 하나님나라는 인간세계 속에 죽음을 품고 내려가요. 이 말은 뭐냐, 인간나라에 죽음을 품지 않은 천국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가고자 하는 천국은 엉뚱하게 상상한 거고요, 실제로 계시는 천국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새로 만든 나라에요.



그러니까 2천년 기독교신앙생활 한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 거예요. 내가 죽으면 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한 사람만 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그 천국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인간들의 손에 죽었다, 그게 천국을 만드는 내용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영광이 되고. 우리도 예수님 죽이는데 한 몫 했습니다, 거기에 동의하는 자만 합류가 되는 거예요. 기독교 2천년 동안 생각했던 그 모든 천국은 인간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소설이고 가상세계이고 있지도 않은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어떤 인간도 내가 이 나라에 들어갈 줄 알았어,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그 나라는 예수님의 죽음인데 그 죽음에 열두 제자도 참여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참여했어요. 그래서 지정된 자리에요. 어린양이 죽는 지정된 자리, 그 지정된 자리를 통해서 교체가 되면서 사람은 죽었다고 버렸는데 그 버림받은 쓰레기더미에서 비로소 천국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무도 찾아올 수도 없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입장 될 수 없는 그 천국에 주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뽑아서 여기에 집어넣는 겁니다.



엘리야나 모세는 이미 그걸 알았고 신약 성도는 성령 받고 난 뒤에 죽었던 분이 자기를 죽인 자를 도로 찾아와서 너는 내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청해주십니다. 그게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주님의 전적 행하심으로만 그 나라에 도달될 수 있습니다.



교회 좀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 이야기해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감을 못 잡아요. 얼른 들으면 은혜로운 것 같기는 한데 내 가족 내 중심하고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주님 잘 믿어서 그 덕을 보겠다는데 그렇게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천하에 못된 놈 되어버리니까 뭘 요구한다는 게, 그 죽은 분 앞에서 뭘 요구한다는 게 머쓱해지는 거예요. 내가 떠민 분 앞에서 뭘 요구합니까? 이거 해달라고 요구할게 뭐가 있어요?



그 목자는 다윗가문출신의 많은 목자들이 나타났지만 다 거부하고 다윗혈통에 의해서 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소위 목자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당한 그분이 진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요 진짜 이 땅에 오신 참된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의 혈통이지만 혈통한테 버림받고 오히려 버림받은 혈통을 도로 찾아가서 건져주실 때 인간의 진짜 혈통이라는 것은 영적을 새로운 혈통으로 이어져야 그게 다윗의 혈통이지 육적인 혈통, 인간의 행함의 혈통은 이러나저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이 그런 분임을 예상하면서, 하나님이 바로 그 작업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전부 다 멸망시킨 겁니다. 네가 이용할 수 있는 목자가 아니고 이제 일방적으로 목자가 너희를 건져낼 것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오신 목자가 십자가 지는 것으로 마지막 모습을 보였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흘 만에 나타나겠지, 그것만 생각했지 그 죽음이 천국을 만드는 실내용인 것을 우리가 몰랐습니다. 우리가 싫어버린바 되고 미운바 된 그 미움과 싫음이 진정 천국의 참된 유일한 내용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