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이스라엘 산에 대한 예언(겔36:1-4)140730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7. 30. 21:29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에스겔 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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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7-30 21:11 
이스라엘 산에 대한 예언

2014년 7월 30일              본문 말씀: 에스겔 36:1-4

(36:1)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6:2) 주 여호와의 말씀에 대적이 네게 대하여 말하기를 하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 하였느니라

(36:3)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이 너희를 황무케 하고 너희 사방을 삼켜서 너희로 남은 이방인의 기업이 되게 하여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36:4) 그러므로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과 황무한 사막들과 사면에 남아 있는 이방인의 노략거리와 조롱거리가 된 버린 성읍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흔한 보통 나라가 아닙니다. 이방나라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쉽게 인정해주고 싶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은 고만고만하고, 그 인간들의 집결된 것이 국가라면, 특별한 국가라는 개념이 구태어 필요치 않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런 이방나라들의 질투를 일축합니다.

오직 이스라엘만이 하나님과 함께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마치 광할한 벌판 위로 외로이 하얀 연기를 내뿜으면서 단선 철로 위를 달리는 기관차를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만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한 나라입니다. 인류의 긴 역사 속을 홀로 달리는 영적 기차가 곧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에 그 나라를 힘으로 당할 나라는 없습니다. 이 정도만 생각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참 부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하면 경악스러울 일입니다. 즉 거룩하고 거룩한 하나님께서 친히 더럽고 더러운 인간과 동행하십니다.

따라서 그 동행을 하게 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를 지속적으로 지적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지적만 받는 정도가 아니라 죄에 합치되는 징벌을 쉬지 않고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의 온전함과 거룩성을 우선하신 것입니다.

망해야 한다면 필히 망해야 하는 것이 거룩의 합당한 조치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언입니다. 보통 인간 세상에서의 점장이들의 예언은 액운를 미리 알아서 떼내기 위한 조치도 아울러 겸비되어 갖추어져 있습니다. 점치거나 예언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과 번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그런 성격이 아닙니다. 예언을 듣고 그 예언을 피해보려고 애쓰는 그 애씀 자체로 인하여 예언은 보다 확실한 성취에 도달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망해야 한다면 그 예언을 존중해서 기꺼이 망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인간들이 예언만을 위하여 자진해서 자기 망하기를 고대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점에 있어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함'을 자기네들의 신수가 훤하게 펴지는 계기로 여겼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위력을 누가 감히 막겠습니까? 하지만 그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근원은 이스라엘의 잘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은 그 거룩한 전지전능함을 노골적으로 외부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그들은 벌을 제대로 받아야 될 대상으로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에 보면,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자기 상상에 준해서 믿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많은 분량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과 법을 주어도 인간은 상상 속으로 변개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간들의 상상에 의하면, 신은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상호 필요한 처지에 있어 그 어떤 지적도 최종적 의미를 대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적을 위한 지적이 아니라 앞으로 잘하라는 차원에서 주시는 경고 정도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에 의한 하나님을 사람들은 종교적 상징물이나 상징적 기호 안으로 묶어버리게 됩니다. 문자나 기호는 반복적으로 동일한 효과를 기대하면서 시행하는 겁니다.

즉 상징 안에서 신도 인간도 상호 만족차원에 놓여 있다고 인간들은 자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바로 이런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들이 소유했다고 여긴 이스라엘의 산지는 실은 하나님의 예언을 가르치기 위한 산지요 땅이었습니다. 신명기 31:13에 보면,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최후로 받은 계시에 의하면 이들 이스라엘은 그 약속의 땅에 필히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어 있고 그 죄악으로 결국 그 이스라엘 산지는 황무하게 되고 이방민족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신명기 31:18-21)
 
어째서 이스라엘은 이토록 처참하게 망해야만 했던 것일까요? 하나님에 의한 자기 백성 다루기는, 인간을 거꾸로 쥐고 이 세상에서 자신을 꾸몄던 모든 요소들을 탈탈 털게 만드십니다. 욥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가 처음 받은 재산과 가족과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에 의해서 다 털리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건강까지 밑바닥까지 주저앉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예언과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들도 공히 그러하듯이, 죄를 더욱 죄되게 해서 저주아래 두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당연히 이 땅에서 행복해야만 하고 생존되어야 한다고 내세울 처지에 있지 않음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다 털릴 때,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삶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동행하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거나 자신이 상상한 자아상을 고수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다 털려야 하고 항상 전부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의 선물로 제공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 현상이 구원의 현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거꾸로 들림을 당하여 소위 ‘나의 것’이라고 여긴 모든 것이 다 밑으로 쏟아지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2강-에스겔 36장 1절-4절(이스라엘에 대한 예언)1407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6장 1절-4절입니다. 구약성경 1207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6:1-4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대적이 네게 대하여 말하기를 하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이 너희를 황무케 하고 너희 사방을 삼켜서 너희로 남은 이방인의 기업이 되게 하여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과 황무한 사막들과 사면에 남아 있는 이방인의 노략거리와 조롱거리가 된 버린 성읍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등장하는데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흔하디흔한 그 많은 국가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그런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그들 진영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피어올랐습니다. 그들이 모닥불 피웠습니까? 그들이 뭉게구름을 만들어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표시거든요. 이 세상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그 나라를 하나님이 인정하는 나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오직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는 그 이스라엘만 하나님께서 의미있게 보시는 나라에요. 다른 나라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나왔다고 해서 필리핀, 아프리카, 대한민국이나 일본같은 흔히디흔한 나라라고 생각하시면 처음부터 성경에 대해서 크게 오산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넓은 들판에 증기기관차가 외롭게 구불구불한 선을 따라 가면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장면이 영화같은데서나 혹은 실제로도 산 위에서 멀리 보이잖아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외로이 가는 거예요. 이 땅이라는 넓은 들판에서. 유독 이스라엘 가는 곳에만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말이지요.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름기둥과 불기둥, 뭔가 이질적인 표징을 내고 사인을 내는 인생으로 가게 했겠어요? 그것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이미 왕림해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섞여서 행동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그래서 구약에서는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에요. 구약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의 후반기에 가서 주의 이름이 되고 그 주의 이름이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구체적인 어떤 특정인물을 지목하게 됩니다. 나사렛예수라는 분이에요. 



그래서 그냥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안 되고 구약에서부터 구약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 했던 그 분을 믿으세요, 라고 해야 돼요. 구약 때부터 이미 그들과 동행하신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는 나사렛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제가 방금 이렇게 소개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참 좋겠다, 다른 민족에게는 찾아오지 않은 하나님이 친히 구원하시겠다고 이스라엘 나라에 찾아왔으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미래가 보장이 되니 안정감 있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싶으면 참 부럽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면 그 부러운 이스라엘 땅이 황무케 되고 이방나라 차지가 되고 비방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신 겁니다. 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는 민족으로부터 놀림감이 되는 나라로 전락시키고야 말겠다고 하신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보면서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어째서, 왜 그랬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있으면 그 자체가 복이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인데 하나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황무하게 되고 나라꼴이 망했고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그 사태가 어째서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이스라엘 망했다는 예언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망했다고 예언하는 것은 네가 정신만 차리면 안 망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토종비결 본 것이나 대나무조각 꽂힌 점집에 갔을 때나 하시기 바랍니다. 점 볼 때 미리 알아챘으니까 굿하고 부적붙이고 정신 똑바로 차리면 오던 재앙도 비켜 갑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 점쟁이들입니다. 협박하고 돈 뜯어내는 방식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은 그 예언을 듣고 그 예언을 피해보려는 노력 자체가 도리어 예언을 확실하게 성취시키는 지름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 이래서 망할 수밖에 없어, 누가 나보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 소리 듣고 난 뒤부터 내 쪽에서 안 망하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합니다. 성경 더 깊이 읽고 기도도 더 오래하고 헌금도 더 많이 내고 충성도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구제도 하고 그동안 미루고 있던 선교헌금도 내고, 이렇게 해서 망한다는 하나님의 예언을 모든 착함과 수단을 다 동원시켜서 그 망하는 것을 피해서 망할 뻔 했다는 쪽으로 노선을 돌이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퍼붓는다면 그 수단으로 인하여 그 사람은 진짜 망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예언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누가 나보고 안 좋은 소리를 하게 되면 ‘그래, 나는 당해도 싸.’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잘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이에요. 남이야 어쨌든 나만 안 다치고 내가 편안하고 내가 복 받고 살면 아주 좋은 세상이고 아주 좋은 하나님이에요. 이미 기본 심성이 무조건 나만 잘되는 된다는 심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예언을 줘도 우리는 그 예언이 나한테 부합되지 않는 쪽으로, 설마 내가 그 정도로 벌 받을 사람은 아니라는 식으로 피해버리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그 방식을 통해서 본인은 같이 동행하시는 주님의 취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순간이기도 한 겁니다. 



너 망해야 해, 라고 하면 아멘, 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너 망해야 해, 하면 “안 망하는 방법은요?” 할 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집 나간 일곱 귀신 다 들어옵니다. “너 망해야 해.”라고 하면 “맞습니다. 망해야 되지요. 말씀대로 하게 되면 나는 말씀을 지킨 것이 없는데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즉 더 많은 욕심을 내지 말라는 식으로 성경에 나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되잖아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나와 있으면 그것을 지켜야 된다는 말이지요. “마지막 때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이렇게 나오면 우리가 죄인이구나, 하고 발각되는 거예요. 이렇게 죄인으로 발각되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죄인은 죄인이고 벌은 안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항상 우리한테 들도록, 나도 미처 몰랐던 나 방어적인, 나를 사수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 믿기를 시작했던 속성을 우리는 간파당한 겁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관심 없어요. 하나님 힘입어서 내가 얼마나 넉넉하고 편하게 살아가는가, 그게 주된 관심이었어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오늘도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설교 다시해 보겠습니다. 외로이 들판을 달리는 증기기관차처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주와 함께 동행 하는 그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에서 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망하는가? 그 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야기를 예언 속에 담아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예언대로 되는 거예요. 예언대로 되는데 이스라엘이 예언대로 되었다고 해도 남의 이야기가 아닌가?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랜만에 연극공연 하는데 가서 객석에 앉아 있는데 연극이 시작되고 가만 보니 그 연극의 내용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저 각본 누가 썼지? 내 이야기를 남에게 알려준 적이 없는데? 완전히 저건 내 이야기네.’ 오랜만에 연극을 보는데 그 내용이 대구시 서구 부산동 144번지 대성초등학교 주변 이야기가 나오고 거기 아주머니(제 어머니)가 장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어, 내 이야기가 왜 나오지?’하고 화들짝 놀라잖아요. 



성경이 바로 그거예요.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그게 내 이야기로 안 들리네요.”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가짜, 내가 아니고 남들을 상상한 가짜, 우리가 상상한 껍데기를 나에게 덕지덕지 입혀 놓으니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아니고 남의 이야기로 들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 껍데기를 벗겨버리면 이것은 곧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와서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냐, 하는 것을 섭섭한 마음으로 물으면 안돼요. 아주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물으시기 바랍니다. 활짝 웃으면서. 



“목사님, 이스라엘 왜 망했지요?” 아주 기쁘게 질문해야 돼요. 그 이유가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 고기 잡는 칼 아주 예리하죠. 어떤 칼보다 예리하다는 말이지요. 덕지덕지 우리가 세상 모방하고 남들 따라가고 남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모든 껍질, 우리에게 가짜로 입혀진 모든 껍질을 예리하고 도려내고 벌거벗은 채로 드러내는 것이 말씀인 예언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그 예언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 껍질을 벗기는데 당장 우리보고 벗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모습으로 그 껍데기가 완전히 벗겨진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피어오르는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했던, 더럽기 짝이 없던 육신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했던 결과를 우리에게 몽땅 보여주는 그 기관차 역할,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망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없이 살면 멋있어 보이지요.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우리가 바로 이스라엘이고 우리가 바로 백번 망해도 쌉니다. 당연한 거예요.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안하고 목사와 장로와 집사, 같은 교인끼리 동행하면서 신앙생활 잘 한다고 자부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과 동행하게 되면 너 잘났다, 나 잘났다, 그렇게 되지만 정말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게 되면 잘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생활,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날마다 주님이 피어오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여러분 몸을 통해서 피어오르시기 바랍니다. 들판을 달리는 외로운 하나의 기관차가 되시기 바랍니다. 꽥꽥, 기적을 울리면서 외롭게 들판을 가로지르며 내달리는 기관차! 주님과 함께 있어서 날마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오히려 내 벌거벗음으로 인한 맨 살이 노출되는 것을 기쁨과 행복으로 여겨줘야 돼요. 그래야 신앙생활이에요. 내가 위장하는 이거 들키면 안 되는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돼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묻고 싶은게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이스라엘은 어떤 단계로 어떻게 해서 그들의 모든 껍질이 완전히 벗겨져서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이스라엘이 살던 그 땅은 황무한 땅이 되었습니까? 대체 껍질을 어떻게 벗겼기에 그렇습니까?” 라는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부분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벗겨내느냐 하는 거지요. 저는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겠는데 애를 낳을 때 애가 울지 않을 때는 애를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치니까 숨통이 열리면서 앵, 하고 우는 장면이 나와요. 산파들이 그렇게 한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인생을 거꾸로 듭니다. 이스라엘의 발목을 잡고 머리를 밑으로 가게 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탈탈 털게 만들어요. 오늘 주제는 탈탈입니다. 모든 것들, 호주머니에 든 동전과 쿠폰 같은 것을 탈탈 털게 하는 거예요. 탈탈 털게 할 때 그 떨어지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들이 떨어지는가? 그게 뭐냐 하면, 처음에는 인간은 신을 상상합니다. 상상계라고 이걸 부르고 싶어요. 상상하니까. 종교를 상상할 때는 어떤 식으로 상상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이것이 시작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을 볼 때 이스라엘의 시작부분을 이스라엘의 전부라고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전부는 이 끝에, 이스라엘이 망할 때 이스라엘의 본색이 다 드러난 것이고 이스라엘을 시작할 때는 아주 휘파람 불면서 잘나갔습니다. 이방민족들은 전부 다 패배했고 이스라엘만이 그 약속의 땅을 점령할 때 그들은 그게 시작인지 모르고 그게 끝인 줄 알았어요. 그게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교회 처음 나와서 복음 들을 때 사람들은 아주 희희낙락하고 열심히 교회 나오지요. 저도 그런 분들 많이 봤습니다. 



5년 뒤에, 또는 10년 뒤에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처음에 복음 듣고 기쁠 때 그게 끝이 아니에요. 그게 시작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는 바른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알았으니, 거기에 복음까지 알았으니 이제는 소나무처럼 우뚝 말씀가운데 믿음가운데 성장하는 그것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지면 …….” 마태복음 13장의 비유 같은 성경구절들 대면서 멋진 미래상을 그리는 겁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이 긍정적 미래상이. 



이스라엘이 그랬던 거예요.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어려우니까 쉬운 예로 욥을 봅시다. 욥이 하나님 믿고 자식 열 명 낳았습니다. 요새 자식 많이 낳으면 애국자입니다. 자식 열 명 낳았고 자식들 다 부자였어요. 대균이고 부자지 혁기도 부자지 전부 다 부자거든요. 프랑스에 있는 큰 딸도 부자거든요. 유 병언 동영상 보면 60년대 우리나라 어려운 시절에도 비싼 캠코더를 애들한테 사주고, 얼마나 잘했습니까? 



처음에 이스라엘은 너무 풍족했어요. 오늘 본문처럼 멧부리, 온 산과 들과 옥토가 다 이스라엘 소유가 된 겁니다. 잘 나갔지요? 욥도 마찬가지였어요. 애들 열 명 다 잘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교만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은 주께 왔으니 주께로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주신 축복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게 욥의 전부가 아니에요. 욥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욥을 거꾸로 듭니다. 탈탈 치는 거예요. 욥은 자식 열 명 다 죽고 바람 불어와서 집 다 내려앉고 키우던 가축 떼 재산 다 날라 가고 부인은 자기를 저주해버리고 친구들도 다 가버리고. 천하의 욥도 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징벌을 주십니까?” 이것은 욥이 이론적으로 알았던 말이 있잖아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 이론은 알았는데 그 이론이 실제가 될 때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론인줄 알았지요. 말씀이 실제로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주신 것 감사하는 것은 어느 바보라도 다 할 수 있어요. 다 감사합니다. 진짜 구원파가 성령 받았다면 구원은 이제부터 구원이에요. 모든 것을 탈탈 다 털려서 없을 때, 교단 재산 하나도 없을 때, 정말 그 가운데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면 진작 다 털린 기쁨, 아까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 그 말씀이 예언입니다. 



그 예언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어요.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서 너로 하여금 벌거벗은 채로 들어나게 할 것이다. 모든 껍질, 위장된 것, 세상적인 것, 멋있어 보이고 믿음 좋아 보이는 모든 껍질들, 먼지 나는 것들을 칼질해서 다 벗겨내 버리면 결국 나머지 남는 것이 뭐냐? 그런 상상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남는 것이 뭐냐? 상징의 세계, 상징계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상상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내가 필요할 것이고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니 서로 필요하니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것이 인간의 상상. 



그 단계가 지나면 그 다음에는 상징,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헌금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참석했고 기도해 드립니다.” 어떤 형식이 있어서 그 형식에 맞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만족하고 나도 만족하는 그 만족의 중립지대를 만드는 겁니다. 이게 종교거든요. 매주 와서 이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걸 넙죽 받으시고 내게 복을 주시고 지키신다. 윈윈이라 하지요, 서로가 승리자가 되어서 양쪽 다 만족하는 절차와 형식에 갖추어진, 그 형식만 반복하면 그게 훌륭한 신앙이 되는 것처럼 교회에서 양육 받고 교육받는 것, 제자훈련 받는 것, 봉사하는 그것을 상징계라고 해요. 



욥한테는 상상계도 있었고 상징계도 있었지만 욥이 마지막으로 맞이한 것은 상상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었습니다. 실재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럴 때 자신은 하나님의 원수였어요. 로마서 5장 10절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이 피할 수 있다, 없다? 피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예언은 로마서 5장 10절, 너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 이 규정은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헌금하고 노력해도 원수 된 자는 그냥 원수 된 자에요. 우리는 원수 아니기를 바라서 그동안 너무나 많은 종교로서 위장과 덧대기를 시도한 거예요. 계속 덧대기를 시도한 거예요, 원수인데. 



“그러면 목사님, 원수 되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저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원수 되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됩니다. 이게 복음에 담긴 비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원수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자체가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수 된 자를 향하여 대신 피 흘려주는 용서만이 우리보다 더 중요하고 더 부합되어야 하고 죄인마저 용서했다는 그 자비를 돋보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거기에 개입되어야 하거든요. 우리 자신이 뭐로? 죄인으로 개입되는 이 법칙이 복음의 법칙이고 언약이 법칙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꾸로 잡고 탈탈 털면서 때립니다. 이게 신명기 31장에 보면 나와 있는 말이에요. 신명기 31장 32장에 많이 나옵니다만 이 시간에 이걸 다 못하니까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의 예언을 받습니다. 오늘 설교 중에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예언은 우리가 수정할 수 있다, 없다? 수정이 아닙니다. 그 예언이 뭐냐 하면, 너희는 반드시 나를 버리게 되어 있다는 이것이 예언이에요. 너희는 반드시 내가 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 살면서 너희는 나를 배반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로마서 3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준 것은 너로 하여금 죄를 더 짓게 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을 까발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외로운 벌판을 달리는 기관차 이스라엘과 주가 함께 있다는 표시를 하얀 연기로 뿜어내면서 달리는 그것, 다른 민족한테는 그런 혜택이 없어요. 이스라엘민족에게만 주님이 덮쳐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을 죄인 되게 드러내서 하나님의 원수이고 원래부터 인간은 우상숭배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폭로하는 그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낸 겁니다. 



구원은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구원의 자리가 네가 꾸미고 화장하는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가 아니에요. 말씀으로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 다녀서 자기를 곱게 치장한 그 자리가 구원의자리가 아니에요. 그것 필요 없어요. 그것 무용지물입니다. 주께서 발목잡고 우리를 거꾸로 해서 피가 아래로 쏠리면 우리는 현기증 납니다. 그렇습니다. 현기증 나는 인생이에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은 친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그 점으로 끝난 거예요. 그 한 가지만으로도 다른 민족과는 상대가 안 되는 민족입니다. 



지금 가자지구가 있는 블레셋, 영어로 하면 팔레스타인,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우고 있는데 블레셋은 아무리 고생해도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과 동행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러나 옛날 구약 이스라엘은 지금의 블레셋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은 승리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초반이었고 중반으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결국은 블레셋한테도 조롱받고 멸시받는 민족으로 전락합니다. 탈탈, 다 털어낸 거예요. 완전히 껍데기를 벗겨버린 겁니다.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진짜 이스라엘은 거꾸로, 욥처럼 거꾸로 뒤집어진 행복이 진짜 주께서 마련해주신 구원의 순간인 것을 기뻐하고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첫째는 상상했다. 상상이 뭐냐? “하나님은 나 없이는 안 되겠지요? 저도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이게 상상한, 허상이요 우상숭배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 복 받을 것을 생각하면 뭔가 드려야 되잖아요. 정기적으로 예배드리고 뭔가 따로 마련하고 경건한 선물을 드리고 봉사도 해가면서 “하나님, 이러면 서로 만족하지요?” 이게 상징계입니다. 규칙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만나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걸 저는 실재계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거꾸로 피가 솟구쳐 올라가라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운동할 때는 그런 경우가 있어요. 머리를 아래로 하는 운동기구를 사용하면 돼요. 일부러 운동하는 경우는 있지만 인생자체가 거꾸로 뒤집혀서 발목 잡혀서 사는 사람이라니, 본인이 그렇게 자진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발목 잡혔습니다. 현기증 납니다. 내가 예상하고 내가 기대하고 내가 소원했던 것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그 즐거움을 성도에게 주께서는 혜택으로 주시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됨으로 말미암아 갈수록 주님만 의지하게 하는, 이러한 방식, 그 방식 속에서 우리의 중심무게는 제로가 되는 겁니다. 제로킬로그램, 너무나 가벼운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에스더가 왕국에 있을 때 그 왕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 옷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런데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하는 말이 “네가 지금 왕궁에 있어서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그게 마지막일까, 처음일까? 처음에는 네가 미스 바사 진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게 계속 갈까? 네가 왕국에 있다고 해서 화가 너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라고 할 때 에스더가 한 유명한 말이 있지요. “죽으면 죽으리라.” 



그 순간에 에스더의 화려한 옷, 미모, 그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주께서 거꾸로 쥐고 죽으라고 하는데. 그 죽는 상황을 앞당길 때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은혜로운 삶이고 주께서 살려내시는 삶을 우리는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도 이렇게 살려주시는군요.” 이 원수 된 자, 주의 말씀 하나 못 지키고 맨 날 내 욕심만 챙기는 이 죄밖에 없는 인간을 오늘도 용서하시고 어제도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면서 용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준비되어 있고 영생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날마다 용서해주시면서 날마다 주님만 의지하고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삶, 그 자리가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기관차, 열차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폼 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주께서 감동받는 것이 아니고 참된 신앙생활은 주님이 오셔서 매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도 그 가운데 주님의 참된 개입과 지혜의 손길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음이 믿어지게 되는 이 은혜를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알고 기뻐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을 탈탈 털어도 상관없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