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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6-11 2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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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강-에스겔 34장 1절-6절(이스라엘 목자)1406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4장 1절-6절입니다. 구약성경 120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4: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하나님의 목자에 관한 이 말씀은 미래에서 바라보면서 그 당시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이해력에 의하면 이 말씀에 대해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기에 목자가 나오고 또 양이 나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목자가 있고 양이 있고, 둘 다 있을 때에 목자와 양의 관계가 성립이 된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스승만 있는 법은 없지요. 스승이 있는 현장에는 반드시 학생이 있기 마련이고 학생만 있는 법은 없습니다. 학생이라 하는 것은 스승을 전제로 해서 학생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을 전제로 했을 때 가르침을 받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를 설명하고 해석을 하려면 여기에 목자도 없고 양도 없는 형편에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목자도 없고 양도 없다는 말은 요새 말로 한다면 아예 교회 자체가 없다는 말을 전제로 하고 주께서 교회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과 같은 취지라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양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잃어버렸기 때문에. 양은 잃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자기를 양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잃어버린 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여전히 괜찮은 양으로 간주하기 마련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은 양들을 잃어버렸거든요. 잃어버린 양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생겨나느냐 하면, 참된 목자가 거짓된 목자에게 잔소리를 할 때, “네가 양 관리도 못하느냐?” 하고 잔소리를 할 때 그 때 그 양은 잃어버린 양으로 부각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냥 목자가 있고 그냥 목자 말대로 지키면 그것은 자기가 괜찮은 양이라고 자부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스런 면이 있는데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교회 목사가 문제 있잖아.” 이렇게 한다면 자기 교회 목사를 비난하게 되면 교인들이 동의를 안 합니다. 아무리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동의를 안 하는 이유가 이 목사 문제가 아니고 그 목사를 아직도 목사라고 인정하는 자기 교인들의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야, 너희 아버지 문제 있더라. 너희 아버지는 술 먹고 행패부리더라.”라고 하면 분명히 우리 아버지가 행패를 부렸더라도 “우리 아버지가 잠깐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변호하고 변명하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아버지를 변호해줘야 그 아버지 밑에 있는 자식이 괜찮은 자식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은 없어요. 다시 할게요.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은 참된 목자가 와서 기존의 잘못된 목자를 지적할 그 순간에 발생되는 것이 잃어버린 양이에요. 여기 선지자가 목자 이야기를 한다고 양된 사람이 “그래, 목자는 다 엉터리야. 선지자님이 잘 봤습니다.” 이렇게 동의할 줄 압니까? 턱도 없는 소리에요. 절대 동의하지 않아요. 목자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양이 없는 것도 문제가 된다니까요?
한국교회 목자가 썩었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한국교회 교인들이 썩었기 때문에 그 썩은 데서 썩은 목자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본문해석은 한국교회에 해석하기가 곤란해요. 이것은 어떤 입장에서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 입장에서만 해석이 돼야 돼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참된 목자가 와서 참 좋지요?” 이런 이야기는 어느 교회든 다 해요. 교인들이 자기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엉터리 목사를 모셔놓고 우리는 참된 양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엉터리 목사를 엉터리라고 인정하는 그 자체가 그 양은 양이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자기들끼리 잘 놀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교회 만들어서 잘 놀고 있는데 거기에 뭘 엉터리 목사라고 지적을 해요. 지적을 하면 목사가 아니라 그 교회 교인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유병언이 뭘 어떻다고요? 그 밑에 있는 교인들이 가만있지를 않아요. 엉터리 목사라고 이야기할 때 자, 예를 들어봅시다. “당신 목사는 엉터리 목사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 그 듣고 있던 상대방 양들은 말합니다. “너희 교회 목사도 못지않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 우리 교회 목사가 상당히 문제점이 있구나.’ 이렇게 보지 않고 “어디서 누구한테 지적 질이야?”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어느 누구도 어떤 목사보고 당신 목사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그 목사를 돌로 칠 수 있는 괜찮은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목사들이 문제 있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교인들이 자기 교회 목사가 욕 얻어먹도록 교인들이 가만있지를 않습니다. 나서서 변호하지요.
예를 들면 예수님 잡혔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 예수님을 비난했습니까? 아니면 일반대중들도 예수님을 싫어했습니까? 일반 대중들도 예수님을 싫어한 거예요. 그들이 무슨 잃어버린 양입니까? 한통속인데 뭐가 잃어버린 양이에요. 그들이 예수님 말씀을 안 들었습니까? 소문을 안 들었습니까? 다 들었거든요.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는지를 다 알아들었다는 말이지요. 심지어 예수님 제자들마저 배반한 형국에서 자진해서 목숨바쳐 예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미쳤습니까? 자기 빼놓고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참된 목자가 나타나면 내가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것은 거짓목사에게 시달릴 때는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진짜 참된 목사가 등장해버리면 그 때는 “농담도 못합니까?” 하고 주춤하게 되어 있어요. 농담 삼아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퇴직하고 난 뒤에 이사를 해서 우리교회 근처로 오고 싶다고. 실제로 그런 목사님도 있었어요. 와 보세요. 뭐합니까? 바둑 둡니까? 할 일이 있어야지.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이 교회가 멀어서 안 나옵니까?
아까 기도할 때 했잖아요. 핑계, 그 모든 인간의 핑계의 내부에는 자기 의로움이 자리 잡고 있어요. 나는 옳은 판단을 했다, 나는 옳은 결정을 했다,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 나는 지금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입장이 유지 된다면 이 본문설교에 대해서는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금 읽은 이 본문을 해석하려면 이것을 해야 돼요.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는 저주 받겠습니다.”하는 것이 전제가 돼야 돼요. “저를 저주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기꺼이 저주받겠습니다. 왜, 주님 보시기에 저주받을 만 하다고 주님 쪽에서 확실하게 판단을 했기에 제가 그 판단을 존중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 본문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할 때 이 이야기는 예수님 입장에서만 이야기 될 수가 있는 거예요.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그래서 너희들은 엉터리목자라고 하는데 양치고 병든 양이 어디 있고 상한 양이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교인들 자체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무슨 고쳐줄 것이 있어요. 다 잘났는데.
기존교회 와서 십일조로 빼앗기고 목돈 빼앗기고 와서 “목사가 돈만 밝히더라. 이 교회는 목사가 돈 안 밝히니까 오겠습니다. 기존 교회는 엉터리입니다.”라고 상담요청하고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 찾아올 때 온전히 자기 의를 포기하고 찾아왔습니까? 기존교회에서 너무 심하게 당해서 화가 나서 올 수는 있어도 기존교회를 부정한다고 해서 자기가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기존교회, 한국교회 썩었다고 욕한다고 해서 본인이 참된 양이라는 보장은 없어요. 참된 양이라는 보장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양도 참된 양은 없음을 본인이 수긍하고 인정을 해줘야 돼요.
이 세상에 목자가 참된 목자가 없듯이 양도 참된 양이 없습니다. 둘 다 죽이 잘 맞아요. 참 죽이 잘 맞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메시아가 오실 때 왜 목자를 겨냥했는가를 살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똑바로 살아라.” 전체적으로, 메시아가 이야기하고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 전체가 문제가 있다는 이것은 흔히 듣던 이야기인데 오늘 본문같은 경우에는 그 이스라엘 자체를 공격하면서 목자에 방향을 맞춰서 공격합니다.
목자라 하는 것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그 전부를 말합니다. 목자라고 해서 그 당시에 목사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인 그 지도자급을 이야기하거든요. 왜 그들에 집중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공격을 하시는가 그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파악하려면 목자들이 선지자의 공격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반발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을 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신은 나쁜 목사입니다. 당신은 지옥 갑니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할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뭐라고 변명하고 뭐라고 자기정당화의 논리를 펼치는지를 들어봐야 된다는 거지요.
일방적으로 당신은 나쁜 목사니까 죽어라, 하지 말고 나는 왜 이런 식으로 양들을 길렀는가,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변명이나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반드시 들어줘야 돼요. 그게 암시된 힌트가 나와요.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선지자를 통해서 “당신은 나쁜 목자(지도자)입니다.”라고 공격받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들이 살찐 양, 그것도 돈 없는 사람이 아니고 돈 있는 사람,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과…….”
양을 잡으면 기름도 나오고 털도 나오잖아요. 목자가 양을 볼 때 돈을 빼낼 수 있는, 재물을 빼낼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2절에서는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목자들에 대해서 선지자가 나서지 않고 양들이 알아서 “우리 지도자 잘못됐네.”라고 혁명이나 반란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가 없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양이나 선지자나 지금 의견 일치가 된 거예요. 일치된 의견이 뭐냐, 여기에 힌트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는 거잖아요.
그러니 그 당시 양들이 목자, 지도자를 뽑고 왕과 제사장을 뽑을 때 지도자에게 요구한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를 잘 먹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죽이 맞는 상대목자가 하는 말이 “여러분들을 살지게 해 줄 테니 우선 나부터 잘 먹고 잘 입게 해 주시면 여러분도 내 덕분에 잘 먹고 잘 입을 수가 있습니다.”라는 식의 죽이 맞고 생각이 일치되는 겁니다. 그러니 양이나 목자나 어떻게 넉넉한 소유를 가지는가, 이게 관심사가 된 거예요. 에스겔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선지자 전체를 봐야 그것이 파악되는데 아모스 8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약간은 유명한 말씀인데,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양식이 없다, 물이 없다는 말은 그 당시 그 백성들, 양들이 관심사가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농사가 잘되고 양식이 잘 주어져서 생존이 유리하겠는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하는 말이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라고 했어요.
그러면 그 전에 하나님께서 참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준 적이 없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를 안 보냈던가요? 그리고 참된 선지자가 주로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요? 주로가 아니라 백퍼센트 주의 말씀을 이야기했잖아요. 주의 말씀. 주의 말씀을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참된 주의 말씀을 전하는 목자를 그들은 필요치 않다고 여긴 마음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에게 그런 말씀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우리는 지금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 그게 관심사인데 당신은 왜 자꾸 말씀 가지고 이야기 합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 백성 전부가.
지금 시간 관계상 한 대목 찾았지만 선지자 전체 대목이 그거예요. 호세아 같은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신을 이유가 잘 먹고 잘 살고 숫자는 늘어나고 그들이 번성하니까 그 번성을 축복으로 본 거예요. 유명한 하박국 보세요.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고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께서 준비해놓은 그날, 구원의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의 이야기거든요. 하박국, 아모스, 호세아, 미가 선지자의 이야기고 그것은 극히 일부입니다. 극히 일부.
선지자의 말이 유행 같으면 선지자의 말을 듣지요. 그럴 것 같으면 선지자가 왜 고난 받습니까? 왜 핍박받습니까? 너 해라, 그런 말이에요. 네가 무슨 소리를 해도 우리는 안 듣겠다는 뜻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에스겔 선지자에요. 에스겔 선지자가 하는 말이 “너희들이 거짓목자여”라고 나오면서 너희들은 양을 대할 때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를 챙기는 겁니다. 그게 우선순위니까. 배가 침몰했으면 선장 자기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자기는 죽고 다른 사람, 손님을 빼낸다? 배 표 살 때 선장에게 자기 목숨까지 겁니까? 그냥 제주도까지 태워다 주면 그만이지요. 목숨까지 바치는 선장이라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선장 욕할 것이 아니고 입장 바꿔서 네가 선장이 되어봐라. 너는 그 상황에서 남 구하겠느냐는 말이지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자기만 먹인다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만 먹이고 살지 한평생 살기가 자기가 먹이기도 급한데 남까지 챙길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 남까지 챙길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일단 자기가 배부르고 등 따숩고 난 뒤에 남도 돌아볼까 하는 경우는 있지만 자기가 지금 배고픈데 남까지 걱정할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입장에 있는 것을 두고 선지자는 너무 심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렇게 닦달을 내니까 겁나서 어디 목자 하겠습니까? 겁나서 지도자 하겠습니까?
자기를 먹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목자 한다면 목자 할 이유가 없는데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목사도 다른 목사 문제 있다고 돌을 들고 칠 자격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본문 말씀에 의하면 이런 목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되는데, 그러면 이 본문 말씀은 없는 이야기인데 하라, 하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성경 예언에서 하라, 하는 것은 바로 장차 오실 목자가 인간의 목자는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것을 하는 거예요. 주님 목자가 이런 것을 합니다, 라고 하는 것도 되지만 그것을 하면서 왜 인간들 목자는 못하는지에 대한 것까지 먼저 다 끄집어내서 바로 인간들에게 이런 한계가 있으니 인간목자 믿지 말라, 하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서 참된 양들을 지켜주는 것은 장차오실 메시아가 그렇게 한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참된 목자가 없다면 그것으로 끝인가? 여기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어떤 목자가 있는데 그 목자가 생존이나 자기 양식이나 배부른 것 생각하지 않고 오직 말씀에만 갈급한 목자가 있다 칩시다. 말씀에만 갈급한 목자가 있을 때 그 목자는 참된 목자냐, 아니냐의 문제가 생깁니다. 말씀에만 갈급한 그런 목자가 있다면 자기가 말씀에 갈급하기에 양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처럼 말씀에만 관심이 있고 어떻게 하면 주의 말씀의 뜻이 뭐냐, 주께서 하시는 그 말씀의 취지가 뭐냐, 그것에만 관심 있는 양을 양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양이 자기도 말씀을 갈급한데 이상하게 자기뿐만 아니고 진짜 어떤 양이 있는데 그 교인들도 말씀에 갈급하더라, 그럴 경우에 그 목자가 참된 목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그래도 그 목자는 참된 목자 아닙니다. 말씀에 갈급 한다고 해서 참된 목자가 아니에요. 참된 목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왜 그 사람이 참된 목자가 아니냐 하면, 자기가 말씀에 갈급한데 자기의 능력과 수완과 말솜씨 어떤 것을 총동원해도 양들이 정말 원하는 그 진짜 말씀의 참뜻, 하나님의 참 의미를 원하는 진짜 양의 욕구를 목자가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목자가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해놓고 참 미안스러운 것이 있어요. 양들도 참된 말씀의 뜻만 밝히는 양, 목사도 목회는 때려치워도 괜찮아도, 지리산에 들어가서 죽는다 치고 들어갔다 쳐도 거기서도 말씀만 생각하는 목사, 그런 목사가 있다는 것은 정말 이 시대에 신기한 현상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신기하다는 말을 왜 사용하느냐 하면,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들은 참 많이 있어요. 지금도 목사님들 중에 그런 사람은 많아요. 진짜 말씀만 생각하겠다. 말씀만 갈급하고 말씀만 생각하는 목사가 되겠다, 라는 희망을 가진 목사는 많은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목사하고는 우리가 차이를 둬야 됩니다.
만약에 그 목사에게 돈이 생긴다, 여유가 생긴다 하면 자기에게 들어온 그 돈 관리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제가 아는 정보에 의하면요, 어떤 화물차 운전사들이 졸음운전 할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써요.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른다, 어떤 사람은 껌을 씹는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제일 되도 않는 방법,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방법 중 하나가 창문을 열고 만 원짜리를 손가락으로 집고 밖으로 내놓으면 절대로 잠이 안 온다는 거예요. 아,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싶어 그것은 방법도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얼마 전에 제가 운전하면서 진짜 잠이 왔어요. 껌도 씹어보고 노래를 해도 안 되고, 그래서 이건 말도 안 되는데 진짜 해봐? 만 원짜리 꺼내서 고속도로 달리면서 문을 열어보니까 세상에 잠이 확 달아나요. 왜, 이거 지금 돈 만원, 오만 원짜리로 하다가 진짜 날라 가버리면 안 되니까 만 원짜리로, 아 이 만 원짜리, 그것을 설교를 통해서 전 세계에 전하고 싶습니다. 졸음운전 할 때는 창문 열고 만 원짜리 내 놓으면 절대로 잠이 안 와요. 그게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가 뭘까요?
저는 우리 교인들이 설교할 때 잠이 온다면 이 방법을 썼으면 좋겠어요. 잠잘 때마다 돈이 떨어져 나가는 그 방법을 쓰면 잠이 오지를 않을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평소에 숙달된 것이 정신 차려서 말씀만 생각해야지, 하는 그 혓바닥, 그 몸 자체가 돈에 의해서 살아진 그 것이 온몸에 숙달되어 있고 온 몸이 돈을 찾아가게 되어 있는 몸으로 우리는 헛된 소망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문경에 갈 일이 있어서 갔는데 이게 있어요. 면사무소에 가니까 출산장려금이라고 해놓았어요. 첫째 아이 낳으면 130만원, 둘째 아이를 낳으면 250만원, 셋째 아이 낳으면 600만원, 넷째 아이를 낳으면 천만 원, 괄호 열고 입양자도 가능함. 아, 어딜 가도 돈 천지에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앉은뱅이도 일어나 걷게 하는 방법은 쇼핑이다, 라는 말이 있어요. 몸살 앓는 여자도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자하면 몸살 언제 앓았냐는 식으로 일어서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두 시간 세 시간 돌아다녀도 전혀 다리 아프지 않아요. 예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쇼핑 이름으로 일어난 겁니다.
이게 우리가 지금도 계속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마음이야 말씀만 사랑하고 싶지요. 교회 가까이 이사 와서 진짜 말씀만 듣고 싶지요. 그게 며칠이나 가고 몇 달이나, 몇 달 가면 대단한 사람이고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우리 몸이, 이 몸이 돈을 따라가게 되어 있는데.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짜 메시아가 오늘 본문의 자리에 오신다면 참된 목자가 되어라, 가 아니라 진짜 참된 목자 앞에 너희들은 전부 다 잃어버린 양이 되어라.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은 이겁니다. 잃어버린 양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목자 앞에 우리가 늘 서서 자기 자신을 되비쳐 봐야 된다는 겁니다. 돈이 없이 잃어버린 양이 아니고 건강이 없어서 잃어버린 양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그 말씀의 기갈, 십자가복음이 기갈 되어서 진짜 양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주시는 것은 무화과나무 열매를 주는 것이 아니고 외양간의 소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그 구원의 날, 심판의 날, 구원의 날, 그 날을 어떤 자기 생일보다도, 어떤 생일보다도 그 날을 더 귀하게 고대하는 그 마음, 그 마음 가졌다고 훌륭한 양, 훌륭한 목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주여, 제가 바로 잃어버린 양입니다.” 이 사실을 이제야 성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알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세상을 말씀 중심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가 바로 목자에요. 우리가 바로 잃어버린 양이고 잃어버린 목자가 되는 겁니다. 거짓 목자가 내가 거짓목자고 그런 거예요. 오직 그리스도 주님의 용서가 아니면 우리는 이 죄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런 자세가 신약 때 잃어버린 양이라고 말씀 앞에서 놀랍게 자기 분수를 아는, 주제를 파악을 하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에스겔 34장을 통해서 예언되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 세대 속에서 우리도 그 한 죄인이고 한 부분인 것을 자인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게 되니 그것이 바로 죄며 말씀만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으니 늘 말씀주시는 주님 십자가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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