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양 찾으시는 목자(겔34:10-12)140618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6. 20. 08:19


2014-06-18 20:44:45조회 : 42         
   양 찾으시는 목자 140618이름 : 이근호  

양 찾으시는 목자(에스겔 3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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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4-06-18 21:36 
양을 찾아내는 목자 

2014년 6월 18일                          본문 말씀: 에스겔 34:10-12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34:1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34: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평소에 성경 말씀은 사람들에게 전혀 호응을 얻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성경에 쏠릴 정도로 그렇게 한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평온한 저 높디높은 천국에서 안식을 마음껏 누리시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한적함에 쌓여 사시는 분이 이 복잡한 세상에 신경쓸 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방치하거나 방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업의 내용도 상당한 심각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건져낸다’는 표현이나 삼킴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내용은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상당히 불의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벌리시는 일에는 심각함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특별한 위기감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평소에 늘 일상의 삶에 잘 적응되어서 살아가는 있는 중입니다. 웃을 때는 같이 웃고 즐길 때는 같이 즐깁니다. 전혀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심각성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 동기가 되기를 못합니다. 인간쪽에서 도리어 하나님에게 이렇게 묻게 됩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악한 목자가 어디있으며 그 목자에게 다 뜯기고 양식거리로 전락한 가련한 양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은 평온한 가운데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고 반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심코 모여 사는 세상이 극도로 위험한 세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 증거를 남기시는 일을 감행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인간들이 설치한 재판장에 서신 것입니다. 스스로 잃어버린 양이 되시고 그 잃어버린 양을 위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욥의 행동과 비교가 됩니다. 욥은 본인의 자리가 본인의 의가 있는 자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자기에게 저주가 떨어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의인이면서 죄인의 자리, 곧 저주받는 자리에 나서셨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언젠가는 무소부위한 권력의 자리, 곧 목자의 자리를 노리면서 살게 마련입니다. 결코 저주가 찾아들지 않는 곳, 모든 것이 빼앗기지 않는 그 자리를 기대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는 곧 스스로 양되기를 기파하려는 마음입니다. 악한 목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언젠가 자신이 목자가 되어 양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합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낮은 등급의 목회자에게 당회장까지 높아지고 노회장, 총회장을 꿈꾸게 됩니다. 여자 목회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남자가 차지하고 있는 그 목사의 자리가 목표가 됩니다. 따라서 스스로 저주의 자리에 나설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등장하는 양이란, 양을 건져내려 오시는 목자에 의해서 짝이 되도록 조성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양’이라는 위상은 양이 자진해서 다가설 자리가 아니라 목자에 의해서 조성될 상황입니다. 따라서 목자의 등장은 곧 양의 등장의 덩달아 유발합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목자가 등장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이라는 나라에게 탈출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자체가 출애굽의 완료가 아닙니다. 악한 목자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해야만 합니다. 

비록 애굽에서 나왔다하더라도 그 나왔던 그 이스라엘 단체가 작은 애굽에 불과합니다. 이 이스라엘이 형성해내는 ‘악한 목자’로부터 구원이 성사되어야 합니다. 이 두 번째 출애굽은  어린양 죽여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어린양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인간도 해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해도 해낼 수 없는 방식, 곧 하나님께서 직업 오셔서 빠져나와야 할 그 세력에 살해당하므로서 그 세력의 정체가 더불어 노출시켜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이 더 좋고 더욱 친숙하게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 이 세상 사람으로 충실하게 살고 있기에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의 문제점을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애굽을 찾아온 모세에 대해서 히브리 사람들이 도리어 원망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있어 이 세상이 자기 세계의 전부입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주란 자신이 거주하는 세상에서 버림받는 상황이다는 사실을 걱정하게 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탈출을 평소에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산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이 세상을 방문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양들이 원하는 것을 목자되시는 분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지 “너는 이 세상에서 나와더불어 빠져나와!”만 제공해주실 뿐입니다. 

이 빠져나감의 방식은 이사야 61:1-2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 말씀도 세상으로부터 인기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제시한 그 하나님에 의해서 이 말씀은 성취가 됩니다. 즉 찾아오시는 목자에 의해서 양은 상한 자, 눌린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미련을 끊게 하고 오로지 목자의 구원함이 더 귀중하다는 사실에 눈 뜨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해당될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천국이란 예수님과 함께가 아니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시선을 세상 쪽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4-06-19 16:56 
96강-에스겔 34장 10절-12절(양 찾으시는 목자)1406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4장 10절-12절입니다. 구약성경 120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4:10-12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찌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우리가 방금 보았던 이 성경내용은, 이 부분 뿐만이 아니고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의 호응을 그렇게 얻어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성경을 볼 정도로 그렇게 한가롭지를 않습니다. 여기에 매일 정도로 그렇게 관심들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몇가지 용어들, 단어들이 우리에게 뭔가 시급한 일이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 12절에 보면 건져낸다는 말이 나옵니다. 10절 끝에도 건져낸다는 말이 있어요.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서 뒷방차지 하고 있듯이 고요히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유유자적하게 자기가 만든 창조에 대해서 무심히 지켜보기만 하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데 본문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구체적으로 이 지상에서 활동을 벌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벌이시는 활동이 “너희들 가만있어.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줄게.” 이런 식으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고 “건져내겠다. 악한 목자에게서 너희를 건져내겠다. 특히 삼킴을 당하지 않도록 건져내겠다.”라고 심각하게 나오시는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지켜만 보시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특정 활동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특정 활동의 내용이 그냥 일상적인 내용이 아니고 심각한 내용을 가지고 활동을 하시는 거예요. 건져내겠다, 삼킴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조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이 맘에 들지 않고 수상하다는 겁니다. 뭔가 범죄가 있고 뒤틀림이 있고 불의가 있고 악의가 설치가 있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방관하거나 방치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내용을 듣게 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 세상이 어째서? 아무 문제없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나?’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 이 세상이 그렇게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사람들이 심각하게 거기에 대해서 생각할 텐데 각자 자기 일에 매진하다가 오후 되면 집으로 퇴근하고 아침 되면 자기 업무에 종사하고, 극히 정상적이잖아요. 어디서 전쟁 났습니까? 태풍이 불었습니까? 화산이 터졌습니까? 



너무나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늘 읽었던 본문 같은 것은 하나님 쪽에서나 심각하지요. 우리 쪽에서는 전혀 심각하지 않아요.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찾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이 계획에 근거해서 일을 하시는데 우리는 전혀 호응할 맘이 없어요. 우리는 너무나 이 세상이 평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 하나님께서 노아한테 홍수 난다고 알려주고 방주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노아홍수 이야기를 가지고 노아홍수의 그 일이 홍수로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요. 옛날에는 물로서 세상이 멸망당했는데 지금 너희들에게 평온해 보이고 정상적이고 일상적이고 아무 하자 없어 보이는 이 세상은 사실은 불쏘시개라는 겁니다. 옛날에는 물에 덮이기 위해서 세상이 있었다면 지금 너희들이 정상적으로 보고 있고, 하자 없어 보이고,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이 세상이 불로써 태워지기 위해서 지금 그 시기를 접근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은 옛날 그대로 있었다.”그야말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성철스님의 말처럼 세상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인하여 세상이 있었고 그 세상을 있게 한 그 말씀에 의하여 세상이 거두어지고 불태워진다는 겁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무슨 근거로, 어떻게, 왜 우리가 지금 어엿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불바다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이 세상이 불바다 되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나쁜 짓을 했습니까?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거예요? 사람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자에게라도 너무 심하다 할 만한 형벌인데, 착한 사람도 많은데, 의인이 최소 열명은 넘게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단체로 불 심판 받아야 할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나쁘고 우리가 지금 하는 월드컵이 그렇게도 나쁜 겁니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지요. 삼척시의 어떤 주지스님이 절을 홀랑 불태웠어요.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월드컵 보다가 다 태웠습니다. 월드컵 보다가 불 태웠다고 하기 보다는 원래부터 그 절간은 불태워지게 되어 있었어요. 월드컵 안 해도 불타게 되어 있어요. 그 주지스님도 불타게 되어 있고. 지옥 불에.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호응이 안 되는 이유가 우리가 느긋하기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전혀 현실이 아니에요. 이것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하지요. “하나님이 말만 이렇게 해서 겁만 주지 말고 실제로 이 세상이 그렇게 되어간다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우리는 그렇게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있습니다. 그걸 제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목자로부터 양들을 끄집어낸다는 다급한 일을 하시는데 우리는 전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다급하지 않고 전혀 거기에 호응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혼자 작업해요. 우리는 전혀 안 다급한데. 하나님이 직접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증거를 대 달라는 겁니다. 



증거를 대려면 악한 목자가 있어야 되고 그 악한 목자에게 양들이 양식이 되어서 잡혀 먹어야 되고, 어떤 목자가 나타나서 양들을 치고 양들을 끄집어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양들을 배불리 먹여야 되고, 이런 일들이 눈앞에 펼쳐져야 ‘아, 에스겔 34장의 그 말씀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이렇게 믿을 수가 있는데 전혀 그것이 안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어떤 해명이나 설명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양들이 악한 목자를 악한 목자로 의식할 수 있는 안목이 없어요. 지금 둘이 짝짝궁이 되어서 잘 돌아갑니다. 아줌마들이 저녁에 해지는 것도 모르고 콜라텍에서 춤추면서 잘 돌아가는 것처럼 지금 바깥의 상황은 모르고 이쪽은 아주 잘 돌아가거든요. 아주 정상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악한 목자에게서 양을 빼내야 한다는 것을 본인이 먼저 이 땅에 오셔서 양이 되시고 목자가 되셔서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이 악한 목자들에 의해서 빼앗기는 사건을 유발시켰습니다.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사건이에요. 



성경이 실제 이야기면 증거를 대세요, 라고 닦달 내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항상 이게 증거라고 내미는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말씀은 십자가로 질주하고 달려가고 있어요. 십자가를 경유해야 이 모든 말씀은 해석이 되는 겁니다. 목자 자체가 잃어버린 양이 되고 또 목자가 또 선한 목자가 되셔서 이 세상에서 멀쩡한 목자도 악한 목자로 유발시켜 버린 거예요. 이 세상에 선한 목자는 없고 악한 목자밖에 없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들춰낸 겁니다. 예수님이 왔을 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 봤잖아요. 



지도자가 못 알아봤다는 말은 뭐냐, 그 밑의 백성들도 역시 목자를 못 알아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을 지금 건져낸다고 백날 이야기해 봐야 본인이 양입니다, 라고 하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본인이 양으로 나선다면 그동안 좋게 지내던 그 목자는 악한 목자가 되잖아요. 이 말씀대로 되려면 짝이 맞아야 돼요. 양이 되려면 악한 목자가 있어야 되고 악한 목자가 나를 잡아먹어야 되고, 그래야 이 말씀의 연극무대의 역할이 담당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에서 일부러 이 성경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뛰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의 내용을 미리 당겨서 성급하게 이야기했지만 이 결론이 나오기까지 도달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것인가?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 보고 하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애굽에서 나왔던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탈출을 했던 이스라엘에요. 탈출 했으면 뭐합니까? 탈출한 그들이 악한 목자가 되어 있는데요. 그 지도자들이.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출애굽을 두 번 해야 된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한 번 탈출해야 되고 그렇게 탈출했다고 자부하는, 그 ‘자부하는’에 밑줄 쳐야 돼요,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확신하는, 그 확신에서부터 “그것은 구원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뛰쳐나오는 두 번째 출애굽이 또 요구되는 거예요. 



이 에스겔 본문 말씀은 이방민족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던 민족이고 하나님이 친히 만든 민족이에요. 제가 부산강의에서 존 웨슬러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존 웨슬러 신학이 감리교신학이에요. 감리교신학, 알미니안 주의, 이 웨슬러 신학의 초반부터의 문제점이 뭐냐? 예수 믿는 사람은 거룩해야 된다. 그런데 그 거룩함의 기준이 뭐냐? 세상 사람과 달라야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이라고 규정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웨슬러가 젊을 때 열 두 명의 친구와 더불어 ‘성경 그대로 살기’를 시작합니다. 그 클럽이 홀리클럽, 거룩한 그룹을 조직해서 성경 고 토론하고 경건 서적을 읽고 토론하고, 토론만 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성경말씀대로 사회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자 어려운 사람들, 교도소 같은 곳 방문해 가면서 착한 일 목록 만들어서 착한일은 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홀리클럽, 거룩한 단체라고 지칭했습니다. 



저는 묻고 싶어요. 그 홀리클럽에서 탈출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 홀리 클럽에서. 탈출할 의향이 생길 리가 없지요. 세상에서 나왔으면 그것이 곧 거룩이고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두 번째 출애굽이 성사될 리가 없고 그런 것은 생각조차 안하고 있지요.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나로부터의 구원, 나로부터의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어렵게 할 것 없이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욥하고 예수님하고 비교를 해 봅시다. 예수님부터 먼저 할게요. 예수님은 스스로 심판대에 섰습니다. 욥은 자기가 심판대에 섰다고 하는 순간 발악을 해요. “내가 이렇게 죄인의 자리에 설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의롭고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그동안 하나님과 나 사이가 좋았던 관계였잖아요. 그런데 죄인이 받는 고난을 저한테 주시다니요. 제 자리 자체, 하나님께서 뭔가 저를 잘못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내 자리는 복 받을 자리지 저주받을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고난 받을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죄 받을 이유도 없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저주받는 자리로 삼아버렸어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수십 년 교회 다녀도 복음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거든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 세상에 자진해서 저주받을 인간 손들고 나와 보라고 해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게 중요해요. 두 번째 출애굽을 성사시킨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걸 짧게 이야기하면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사람은 자기 앞가림도 지금 힘들어요. 희생, 그것은 일단 자기 배부터 불러놓고 하는 소리입니다. 팔자 좋은 사람이나 하는 이야기에요.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올 때는 진짜 울면서 파김치가 되어서 들어옵니다. 짜증 제대로지요. 집에 들어오면 식구들 보고 화풀이할 대상이 없는가, 그것만 생각하면서 기어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사는 게 본성인데. 피곤한 몸 가지고 하루 쉬는 날 교회 가면 기도하는 내용이란 게 뻔하잖아요. 힘들어 못살겠으니 좀 편하게 해 달라, 그 기도 말고 무슨 다른 기도가 필요합니까? 



버스나 무궁화 타고 가다가 아줌마들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것 들어보면, 들을 맘도 없는데 시끄럽게 하니까 다 들리는데, 이런 이야기를 해요. 18세에 시집와서 시아버지 모시다가 시아버지가 70대 되자 세상 떴다, 그 이야기입니다. 18세에 시집와서 시부모 섬겼다는 것, 시부모 섬기면 복 받는다 하는데. 그 이야기가 지금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시집 이야기에요. 그 할머니는 평생 동안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이미 기존에 있는 그 상황에 자기가 그냥 끼어든 거예요. 그냥 들어가서 마이 웨이가 아니라 남의 웨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그냥 끼어든 것이라서 자기 인생이란 게 없어요. 



생각해 봤어요. 왜 옛날 할머니 시대에는 유관순이 드물었을까요? 국가와 민족은 생각도 못하고 열여덟에 시집와서, 그 나이에 시집와서 뭐 압니까? 독한 시집살이 당하면서 매일 같이 나오는 것은 ‘그저 이집에서 사랑받고 살아야지. 며느리다운 행동해야지.’ 그리고 애를 낳았으니 그 낳아놓은 내 새끼 동물적 본능으로 키우고, 그렇게 섬기던 시부모는 나이 70넘어 암 걸려서 죽어버리고 내 청춘, 단물 쓴 물 다 빼앗아가고 지는 죽어버리고, 뒤돌아보며 거울 보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청춘을 돌려달라고 외출수도 없는 거예요. 내 청춘이 어디로 갔나? 구원? 양? 에스겔 34장? 그게 귀에 안 들어옵니다, 지금. 에스겔 성경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가까운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사랑받고 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것이 급선무에요. 시집왔으니 좋은 며느리다, 그 소리 하나에 매달려서 평생을 그 집 귀신으로 살아온 거예요. 목표를 잡았는데 그 목표가 먼저 늙어 죽어버리니까 평소에는 그 목표를 뒤 따라 가다가 평소에 자기는 뭐했느냐 말이지요. 남이 깔아놓은 인생을 흉내만 내다가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출애굽이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애굽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애굽이 늘어진 거지요. 엿가락처럼. 밀가루 팽창된 것처럼. 큰 애굽에서 새끼 애굽이 따로 떨어져 나와서 이스라엘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낼 때 그 이스라엘은 가짜 이스라엘이었어요. 진짜 이스라엘은 가짜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범죄 하는 가운데서 핍박받고 설움 받는 가운데서 하나의 꽃봉오리처럼 피어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양한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양이 원하는 것을 목자가 전혀 주지를 않습니다. 선한 목자가 와서 양에게 하는 것은 “거기서 나오라.” 이 한마디 밖에 없어요. 



“열여덟 살 때 시집왔다고?” “예” “거기서 나와” 이 한 마디 밖에 없어요. “너는 시집의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패밀리, 하나님이 가족이 되어라.”라는 것이 성령의 역사거든요. 만약에 열여덟에 시집와서 어떻게 하다 보니 성령 받았다, 그러면 그 여인은 남편이나 원망하면서 평생을 지내지는 않아요. 내게 주어진 이 시집살이에서 복음을 전해야지, 새로운 선교사로 탈바꿈 되는 겁니다. 나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여기에 나를 파견했다는 그런 느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그것은 나중에 열여덟에 시집와서 작년에 우리 시아버지가 70넘어 세상 버렸다, 자기 인생이 아니고 주변에 깔아놓은 인생으로서 자기 인생을 대치하지는 않는다 그 말이지요. 이스라엘이 되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되려면 우리가 떠나기 싫어하는 이 세상이 애굽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 뽑아낼 곳이고 내가 의지할 곳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의지할 곳에 예수님께서 난데없이 뛰어들어서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이 세상, 이 세상없으면 죽는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는 매몰차게 배척받아 튕겨 나와서 스스로 심판대에 서서 죄수가 되어서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하늘나라 가는 코스가 그것으로 확정되고 말았어요.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다.” 오늘 본문 같으면 “내가 곧 목자다.” 내가 목자라는 말이 사람들의 귀에 안 들어옵니다. 왜, 자기를 양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요, 양 되기 싫어해요. 전부 다 목자 되고 싶어 합니다. 자진해서 양 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나도 남한테 이용당하는 양 보다는 목자 되고 싶다. 지금은 남한테 이용당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양에서 벗어나서 내가 남을 부리고 남을 빼먹고 이용해먹는 위치에 서서 이 세상의 지도자, 목자의 자리에 서고 말리라.’ 



이런 야심만만한 양은 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비 지도자고 예비 악한 목자에요. 이 세상은 예비 악한 목자들만 있지 양은 없어요. 양은 어떻게 생겼는가? 목자와 와서 “너 나와.”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 목자 되기를 포기하고 양이 되는 거예요. 목자의 그 음성이 들려야 됩니다. 그 음성이 어디서 나오는가? 제 2의 출애굽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산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았어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 제 2의 출애굽 때는 그냥 양이 아니고 사람 되시는 분이 양 같은 역할을 해서 십자기 피로 말미암아 “너 거기서 나와.”라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가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하나님 쪽에서 친히 실천에 옮기는 그 과정 속에, 그 과정이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과물로 우리가 새롭게 탄생되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의 결과물, 주님이 일하신 결과물이 우리입니다. 이 에스겔 34장의 말씀은 우리가 못 지킵니다. 우리보고 지키라는 말이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해 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목자가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애굽,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것을 전혀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주시는 것은 뭐냐? 이사야 6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이 내용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사야의 이 말씀도 오늘 본문 에스겔 34장의 말씀처럼 전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우리는 애초부터 이 가난한 자나 상한자의 근처에도 안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방향이 이 세상에서 전혀 마음 안상하고 전혀 아프지도 않고 전혀 포로 되지도 않는, 오히려 당당하게 자립할 수 있는 자립자의 입장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스스로 절대자가 되어서 누리고 싶은 이 세상의 속성과 꼭 닮아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전혀 호응이 없습니다. 호응이 없다는 이 말을 제가 여러 번 하는 이유가이사야 61장의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주신 당사자가 와서 이 말씀이 진짜 현실인 것을 우리를 잡고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구체화 시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음 상하지도 않았는데 마음 상한자로 우리를 변모시켜 버립니다.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상처받아서 실망스럽고 정말 이 세상에 미련이 뚝 떨어질 정도로 그런 사태가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십니다. 



세 번 공사했는데 그 밑에 또 물이 샙니다. 네 번째 공사해야 돼요. 만약에 네 번째 공사해서 물이 또 새면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상한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축복이라는 것, 산상설교의 팔복이 있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복을 받으려면 우선 뭐가 되어야 되느냐, 심령이 가난해야 되거든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현상부터 일어나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선한목자가 주시는 진정한 복이 우리에게 인지가 돼요.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살던 사람들이라서 애굽에서 빼내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고 이 땅에서 오래오래 죽치고 사는데 필요한 것만 달라고, 우리는 철야해가면서 달라고 해요. 이 땅에서 오래 버티고 자기 영광 휘날리고 자기 영광 빛내는데 필요한 것들을. 그런데 두 번째 출애굽이 필요하거든요. 이미 첫 번째 출애굽은 실패했으니까. 출애굽 했는데 애굽이 늘어진 거예요. 이쪽으로 떨어져 나온 애굽이 더 지독한 애굽이에요. 메시아를 죽였으니까. 욥도 마찬가지였고. 뭔가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올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욥으로 하여금 상한 심령 되는 노선에, 그 단계에 접어들어서 선한 목자가 왜 선한 목자인지를 알게 하는 기회를 부여해 줬습니다. 



욥은 세상에서 미련정도가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미련과 애착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부로 이근호가 유명해져 버렸어요. 이제 문제는 그겁니다. 그 이 근호라는 축구선수가 골치 아프게 생겼어요. 이제 유명해져서 떠나려면 힘들게 되었어요. 내가 보니 교회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잘은 모르겠어요. 한 골 넣은 인간이 상한 심령이 돼야 되거든요. 그래야 이 세상보다도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계신 그 나라를 더 사모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한 골 넣고 그 넣은 것 때문에 더욱 자기를 낮출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상한 심령이고 그 마음 상한 자에게 비로소 선한 목자의 음성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돈 벌었다는 그 소리보다 더 엄청난 은혜요 축복입니다. 비로소 목자를 만난 거예요. 



문을 두드리면 열고 같이 먹고 마시는, 언젠가 영원히 살, 한 순간만 사는, 팔십이나 구십 평생만 사는 이 세상이 아니고 영원히 같이 살 그분은 바로 상한 심령, 애통하는 것, 포로 되는 것, 그런 사태와 더불어서 우리를 방문합니다. “너 때문에 네가 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자진해서 심판대에 올랐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단다.” 우리에게 속삭여 줄 때 우리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 나왔다고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 교회 나와도 세상이 늘어진 것뿐인데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 고개를 세상 쪽으로 향하고 있는 이 몰골을 주여, 끊어버리고 주님의 용서가 얼마나 고귀하고 주님의 피가 얼마나 귀한지를 날마다 더욱더 새롭게 기뻐하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