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강-에스겔 33장 12절-6절(의인과 악인)14052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3장 12절-16절입니다. 구약성경 120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3:12-16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찌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경향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뽑아내느냐 하면,자기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자기 조상한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조상 잘 만나서 조상의 복을 후손이 누리게 되면 후손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 후손이 비록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조상에게 주신 약속을 하나님이 스스로 철회하지 않기에 죄를 지어도 살 수 있다, 라는 것을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유포를 시켜놓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내 뜻이 아니고 잘못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33장 12절부터 16절까지 읽어봤습니다만 그 내용이 약간은 복잡한데 제가 정리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악인이 있고 의인이 있습니다. 악인과 의인이 있는데 우리가 아는 상식은 의인은 의로운 사람을 의인이라 합니다. 악인은 악한 사람을 악인이라 합니다. 당연한 말을 제가 강조했습니다만 헷갈리기에 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의인은 의를 행하는자가 의인이고 악인은 악을 행하는 자가 악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의인이 악을 행하게 되면 그 동안 자기가 의인이라고 한 그 자격이 박탈당한다는 거예요. “의를 많이 행했기에 어지간히 나쁜 짓을 해도 내가 지어놓은 의가 많기에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아. 그것은 네가 착각이다. 의인이라도 악을 행하게 되면 지금까지 지었던 모든 의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악인은 악을 행해왔던 사람입니다. 의인은 의를 행해왔던 사람인데 어느 날 악을 행할 때에 지금까지 행했던 모든 의가 소용없이 되어버렸다는 말이거든요.
그 다음에 반대로 악인은 지금까지 악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악을 행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어느 날 의를 행하게 되면 지금까지 악을 행했던 것을 일체 묻거나 따지지를 않고 그 사람을 살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굉장히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되는데 지금 어떤 점에서 이 말이 우리한테 듣는 순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느냐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마일리지가 있는데 그 의로운 마일리지가 소용이 없다면 과연 ‘당신은 의인입니다’ 혹은 ‘당신은 악인입니다.’라는 규정자체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항공사에 가서 “저는 출장을 많이 다녀서 항공마일리지가 많이 있습니다.”라고 하니까 항공사직원이 하는 말이 “그런 마일리지를 우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하면 내가 마일리지 쌓은 것을 항공사에서 거부하겠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남자들이 결혼생활 하면서 마일리지가 소용없다는 것을 많이 느껴요. 15년 동안 아내에게 충성을 하고 헌신을 했건만 15년째 되는 어느 날 말실수 한 번 하니 15년 충성 봉사한 것이 한꺼번에 다 날라 가 버렸어요. 그동안 공들인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비싼 보석에 해외여행에 옷 도 사줬는데 말 한 마디 잘못한 것 가지고, 그것도 15년 만에 최초로…….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친정에서…….” 이 말 한마디로 15년 공들인 것이 다 날라 가버려요. 그럴 때 들어가는 마음은 “대체 내가 남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늘 긴장상태여야 되는 거예요. 15년, 20년, 30년을 살아도 아내 앞에서는 늘 긴장해야 되고 말조심을 해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대목이 그거예요. 오늘 본문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쉬운 부부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하는 말이 “그래서 나는 당신 앞에서는 말조심 해야겠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또 밉상을 받네.
“그러면 당신은 내 앞에서 상당히 행정적으로 차갑게 말조심을 할 뿐이지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그 말이지? 그냥 말조심이나 하는 거지 진정으로 날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이렇게 나오면 남자는 “그럼 어쩌라고? 말조심을 할까, 말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어려운 이유가 지금까지 쌓아온 마일리지, 의로운 것도 한 순간에 다 날라 가고 지금까지 아무리 악한 일을 해도 어느 순간에 의롭게 되면 졸지에 그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딱 주셨을 때 우리의 대책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실컷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실컷 나쁜 짓을 하다가 이제 죽을 즈음에 단 한 번만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악한 자여 네가 아무리 죄악을 행해도 의로운 행위 하나만 해버리면,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게 되면 산다고 되어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야기를 더 진행해 봅시다. 어떤 악인이 악을 행하면서도 ‘언젠가 주님이 부르실 때 그 때 착한 일 하게 되면 옛날에 과거에 악한 것은 보지 않고 착한 일 행한 그것만 본다고 하니 난 영생 얻는다. 그러면 난 실컷 악을 행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 사람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곧 악인에 해당되거든요.
악인에 해당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지금 언제 죽어도 멸망당해야 될 대상자로 분류가 되어버려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성과를 쌓아서 지금 주께서 부르시면 천국 간다고 장담했던 그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해서 악한 일을 해버렸을 때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공로가 한 순간에 홀라당 다 날라 가버리고 악인으로 멸망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이 말씀을 간단하게 한 마디로 하면 이 말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선택권이 주어지지 아니했다는 말씀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학교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숙제 했나?” “했습니다.” “너는?”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음에 잘 해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생님이 숙제 했느냐고 물을 때는 숙제를 했습니다, 또는 숙제를 안 해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잘 할게요, 이것이 성립이 돼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선생님은 숙제를 내줬고 아이는 숙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권이 아이들에게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애한테 “야, 너희들 하늘의 별 따왔어?” 이렇게 되면 “죄송합니다. 제가 하늘의 별을 못 땄는데 내일 따올게요.”라고 이야기할 학생이 있겠습니까? 할 수가 없지요.
숙제를 해오라고 할 때는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안드로메다의 어느 별을 따오라고 할 때는 아이들은 당황스러운 거예요.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의 선택권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을 다 박탈당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나는 의인이다, 혹은 나는 악인이다, 라는 것을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을 다시 쉽게 하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에요.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에 관해서,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의를 행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그 의로 살리라.” 이러면 돼요. “저는 하나님에 의해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그 악으로 인하여 너는 지옥가거라.” 그건 돼요.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에 의해서 악을 저지르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 의를 행했습니다.” 그건 돼요. “하나님이여, 저는 그동안 하나님의 의를 행하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면 지옥가거라.” 그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대로 하게 되면 어떤 인간도 나는 천국갈래, 아니 나는 지옥갈래,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먼저 있고 난 뒤에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죄와 의에 대한 말씀이 먼저 있고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인지 구분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이 의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위력이 있느냐 하면, 평생 동안 의를 행하다가 한번 삐걱해서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하여 지옥 보낼 정도로 하나님의 의는 양보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어느 정도로 대단하냐 하면, 평생 동안 나쁜 짓만 하다가 한 번 의를 행하면 그 의로 인하여 모든 죄가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해주는 그 의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 제 말이 별로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요.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들어보니 우리 자신에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이야기를 지금 계속 했지요. 아무리 들어도 우리가 어떻게 관리가 안 되지요.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데, 성경도 제 설교도 틀린 말이 아닌데 들어봤자 소용없는 말이 되어버렸지요.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말합니다. 그 말을 제가 한 적이 없어요. “그 말 듣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설교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가 그 말을 한 적이 없다니까요? 우리는 그냥 멍청하기만 해요. 당하면 그냥 당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 지켜서 영생 얻어야지, 라는 자기 구원위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에스겔 이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무장해제, 그동안 공들였던 모든 것은 손을 다 놔버려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구원용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구원받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에요. 구원 받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면 당신 주장은 뭐냐,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죄와 의 두 가지를 가지고 인간을 활용하시는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죄와 의가 우선이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뒤차로 인간들이 만들어진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은 손을 떼세요. 인간은 죄와 의를 다룰 수 있는 선택권이나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있는 것이 의와 죄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그걸 몰랐지요. 하나님이 선조에게 주신 약속을 가지고 그렇게 하면 살고 구원되겠다, 민족과 단체로 구원받아보자, 이런 식으로 계산을 했는데 그것이 오늘 에스겔 본문에서 들통 나고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을 통해서 이 말씀을 주시는 그 취지가 뭐냐? 그 취지를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내용이 이렇게 뚫리는구나, 이해하실 거예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아파트에 네 식구가 살고 있다 합시다. 아빠, 엄마, 그리고 첫째 딸, 둘째 아들, 이렇게 네 식구가 산다 합시다. 아빠는 퇴근해 들어와서 스마트 폰 가지고 주식 값이 올랐는지 그거 보고 있습니다. 엄마는 드라마 보고 있다 합시다. 남동생이 숙제를 하다가 “아빠, 청일전쟁이 먼저야, 노일전쟁이 먼저야?” 하고 아빠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딸은 엑소의 새로운 앨범을 듣고 있다 합시다.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가정입니다. 에스겔 33장의 오늘 본문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 보여요. 네 사람이 살고 있는데 네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 각자 다 달라요.
그런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사는 주인이 뛰어 올라왔습니다. 주인양반 계시냐고 시비조로 이야기합니다. 층간소음 조치하라고 쳐들어 왔어요. 그 순간 각자 하던 일 다 놓아버리고 하나의 새로운 사건에 묶여버린 거예요. 노일전쟁이니 청일전쟁이니 그런 것 안 중요해요. 드라마도 안 중요하고 엑소고 빅뱅이고 다 안중요하고 중요한 것은 층간소음에 온 식구가 달려들어서 싸워야 할 판이 된 겁니다. 이게 뭐냐, 이게 사건이에요. 사건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외부에서 나를 갇히게 만드는, 나를 꼼짝 마라, 할 정도로 어떤 사태가 덮치는 것을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뭐가 반복이 되느냐 하면, 출애굽 사건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 출애굽 사건이 15절에 나옵니다.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찌라.”라고 되어 있어요. “목사님, 이건 출애굽이 아닌데요?”라고 하겠지요. 율법은 계속 주어지는데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율법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십계명 아시지요? 오늘 보니 부부십계명도 나오는데 그 부부십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계명 바닥이 출애굽 사건이에요.
층간소음문제를 가지고 밑에 사는 사람과 싸움을 해야 될 그 사건, 일상적인 피아노 치는 것 말고, 사놓은 주식의 주가가 오르니 마니 하는 나의 사적인 것 말고 외부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덮쳐버린 사건이라니까요? 우리가 원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요구한 사건이 아니에요. 그냥 주님께서 덮쳐버린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 출애굽 사건이 뭐냐, 애굽에 있던 노예 된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은혜 주겠다고 해서 약속의 땅, 쉽게 말해서 천국입니다, 그들에게만 약속의 나라, 약속의 세상, 천국, 영생을 보장했다는 소식과 함께 출애굽사건이 그들에게 덮친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속으로 답해 보세요. “노일전쟁과 청일전쟁 중 어느 것이 더 앞섭니까?” 물론 청일전쟁이 더 앞서죠. 앞서는데, 애가 숙제를 해야 되니까 청일전쟁이 먼저냐, 노일전쟁이 먼저냐를 두고 아빠에게 물으러 온 그 애가 그 숙제를 했다고 해서 영생을 얻습니까? 아니잖아요. 주식 값이 오른다고, 드라마 본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잖아요. 이게 뭐냐,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이스라엘은 십계명 중에서 내가 어느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가, 그것은 일상적인 취미활동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지킬 수가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 내용은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이것저것 지켜서 나는 의인이다. 이것저것 못 지켜서 나는 악인이네.’라고 자기 쪽에서 자기구원을 위해서 율법을 가지고 온 사람 같으면 그것은 자기 율법만 가져왔을 뿐이지 출애굽 사건마저 자기가 소유할 수는 없는 거예요. 출애굽 사건을 왜 소유할 수 없느냐 하면, 출애굽 사건은 항상 외부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덮치게 되어 있지 내가 그 사건을 쥐고 가지고 다니는게 아니에요.
이야기하는 나도 참 답답해요.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서울 가락교회 가서 예배도 드리고 강의도 하는데 그 가락교회가 식품 회사에요. 그냥 사무실에서 모이거든요. 지금 같이 성경공부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장님은 자금난 때문에 고민이 된다. 그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과 그 사무실이 유지가 어떻게 된다는 이것은 상관이 없는 문제거든요. 상관이 없는 문제. 그래서 성경공부 하면서 ‘아, 내가 요새 자금난 때문에 어려운데 막상 성경공부를 하고 말씀을 보니 그게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구나.’ 이러면 그 분은 사건 속에서 주님의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내가 성경공부 할 정도로 의로운 사람인데 왜 내 회사가 자꾸 어려워지지?’ 이러면 그 분은 악인이 되는 거예요. 전부 다 이해하고 있는데 나 혼자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무슨 뜻인지 다 아시겠지요? 지금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고 나서 율법을 이만큼 지켰다. 너는 얼마나 지켰는데?” “나는 이만큼 지켰다. 내가 너보다 의인이야.” “나는 악인이 되었구나. 어떡하지?” 이런 식으로, 개인 구원용도로 하는데 율법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출애굽 사건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가지거나 소유할 대상이 아니에요. 사건은 터지고 늘 덮쳐야 돼요. 그 덮치는 사건이 뭐냐 하면, “전당 물을 도로 주며 억탈 물을 돌려”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여, 우리가 공짜로 아무 대가 없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사오니 나한테 이런 것이 날라 가고 남에게 줘버린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노일전쟁이 먼저인지 청일전쟁이 먼저인지’ 그거 한 문제 틀려도 괜찮고, 드라마 내 뜻대로 안되어도 괜찮고, 주식 값 내려가도 괜찮고, 다만 주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로 이렇게 영생을 얻었으면 우리는 행복한 가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다 의로운 가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말은 뭐냐 하면, 일상 속에서도 십자가사건이 반복될 때만 그 사람은 의인으로 살아간다, 그 말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15절에 있습니다.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찌라.”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며.
설교를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내가 날 구원하기 위해서 어느 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이것은 나의 자율권, 나의 자유의지, 나의 선택권을 사용하는 게 돼요. 인간이 자기선택권, 자기영생을 얻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권한을 사용해 버리면 15년, 20년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그 다음날 이것을 제대로 사용 못하면 지금까지 쌓은 마일리지는 다 날라 가버리고 소용없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해도 20년 동안 지켰어도 한 번 어기면 다 어긴 거예요.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며” 이 조항에 걸려서 다 소용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의 입이 근질근질해요. 그 다음 이 질문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할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사람은 죄 안 지을 수가 없는데 ‘다시는 죄 짓지 말라?’ 그러면 한 번 의롭게 된 다음 다시는 죄 안지어서 구원 받을 위인이 이 세상에 없다면 아무도 구원 못 받지 않습니까?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없네요.” 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하지요. 제가 설교하면서 우리 육신은 죄밖에 짓지 않는다, 해 놓고 오늘 본문에서는 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면 살리라.” 왜 이렇게 강조하느냐 하면, 내가 날 구원하기 위해서 뭘 지키겠다고 내 자유를 사용해버리면 이것은 언젠가는 실패로 끝납니다.
자전거는 늘 달려야 되는데 힘 빠지면 결국 자전거는 넘어지잖아요. 계속해서 달리지 않으면 자전거는 넘어지기 때문에 계속 달려야 하는데 무슨 수로 달립니까? 그러니까 이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게 되면 그 사건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사건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요한 1서에 보면 그 내용이 있습니다. 요한 1서 5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 우리가 아노니”라고 해요.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정리해 봅시다. 죄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뭐냐, 내가 선택해서 행동을 해서 하는 죄가 있는 반면에 죄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져야 될 죄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내 구원보다 우선하는 것이 죄가 무엇이냐, 의가 무엇이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에게 율법을 준 것은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성도의 역할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을 하든 그게 죄가 되게 하셔요. 죄가 되게 하심으로서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든 자기 행동으로는 아무리 착하게 살고 율법대로 살고 십계명을 지켜도 그게 죄가 된다고 아예 우리를 규정해 버려요.
규정해 버리고 그 다음에 우리 행동 말고 다른 행동이 있어요. 그것은 로마서 5장에 보면 예수님이 한 행동은 그게 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행동과 예수님의 행동이 같이 들어 있는 사람은 영원히 죄를 짓지를 않습니다. 왜, 우리는 계속 죄를 짓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죄를 짓고 주님은 계속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의를 발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 지으면서도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덮쳐지는 겁니다. 그게 신약성경에 나오는 로마서 5장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의가 우리에게 왕 노릇 하거든요. 왕 노릇 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 통치를 받는다는 뜻이에요.
그냥 나는 왕이다,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왕은 왕답게 꼼짝 마라, 할 정도로 통치를 해요. 그러면 의가 왕노릇 한다는 말은 의가 있는 곳에는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의가 덮친 사건이 없고 그 의가 덮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의가 덮치지 않기 때문에 기껏해야 내놓은 의가 뭐냐, 자신의 행동으로 의를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왜, 의가 안왔기 때문에, 성령으로 선물을 안 받았기 때문에, 주신 선물 받은 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만든 의가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만든 의가 되면 어떤 낭패에 빠지는가 하면, 오늘 본문 33장 13절에 보면,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여기에 걸려버리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죄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동안 구약때 사람들은 자기가 이걸 다뤄서 자기가 의인되어서 구원받고자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몽땅 실패로 끝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인간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사건으로 선물을 주게 되면 우리는 ‘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평생을 통해서 우리가 온 몸으로 감지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실시해서 의롭다 하는 이것은 의가 될 수 없겠구나. 왜, 에스겔 33장 13절에 근거해서 아무리 착하게 해도 어느 순간에 죄 지어버리면 주께서는 몽땅 죄인으로 간주하는 그 법칙에 걸려서 우리는 절대로 우리 행함으로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평생 동안 느끼고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행동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고 주님의 행위가 있는데 그 주님의 행위가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는 죄가 되고 주님의 행위는 의가됨을 우리 입을 통해서 증거케 하고 고백케 하는 거예요. 제가 월요일 성경공부 마치고 권사님하고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권사님은 시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보내지 않고 그렇게 잘 섬긴다는 거예요. 벌써 40년? 30년째입니까? 만일 30년째 그렇게 했는데 30년 6개월 24일째 짜증한 번 내 버리면 그 모든 것은 안 섬긴 것이 돼요.
결국 그 권사님이 구원 받으려면 선물을 받아야 돼요. 뭡니까? 율법이 더한 것은 죄만 더할 뿐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놀라운 기적을 받아야 돼요. 내가 하는 것, 청일전쟁이 먼저인지 노일전쟁이 먼저인지, 이런 숙제가 나를 결코 나를 살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주식 값 오르는 것이 결국 나를 살릴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지 내가 행동을 어떻게 반듯하게 ……, “숙제 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주식 사는 것이 뭐가 나빠요?” 이렇게 묻지 마세요. 왜, 그것은 죄와 의를 묻는 차원이 아니에요.
그 자체가 죄에요. 우리가 어디에 관심 두고 살아갑니까? 우리는 강도처럼 늘 십자가 바라보면서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이 이렇게 무서울 줄 몰랐습니다. 그냥 장난삼아, 취미 삼아, 오락 삼아 하나님 말씀 지키면 복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복이 아니고 우리가 죄인 됨을 아는 것이 복인 줄 저희가 알게 되었사오니 한 의, 십자가 의만, 하나님 의만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