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파수꾼(겔33;1-6)이근호`305014

아빠와 함께 2014. 5. 15. 18:04

파수꾼(에스겔 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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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5-14 21:27 
파수꾼

2014년 5월 14일                              본문 말씀: 에스겔 33:1-6

(33: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3: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33:3) 그 사람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33:4)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33:5) 그가 경비를 하였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33:6) 그러나 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파수꾼이 있는 경우는 전쟁을 배경으로 했을 때 의미있게 등장하게 됩니다. 전쟁을 통해 아군과 적군이 구분됩니다. 이 아군과 적군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의 이해는 간단합니다. 자기에게 속하면 아군이요 자신의 적의 위치에 있으면 적군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파수꾼이 있다는 말은 곧 이스라엘 자신들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아군일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즉 사람은 자기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겠지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바를 하나님도 같이 동조해주리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파수꾼을 세우신다는 말은 곧 우리가 스스로 사랑하는 이 이스라엘 나라를 도와주려고 파수꾼을 세웠다고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점을 감안합시다. 그리고 그 의도적으로 멸망시킨 분은 하나님 자신임도 아울러 고려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워셨다는 파수꾼은 누구를 위한 파수꾼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제공하셔서 세워진 그 파수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파수꾼으로 인하여 결코 이스라엘이 승리하지 못하는 현실을 통해서 인간들의 근본적 오해가 무엇인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이 각자 자신을 최우선 순위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하나님께서 동조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파수꾼이 있다고 해서 멸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바가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세우신 취지에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서 그 이유를 파수꾼의 존재를 통해서 제공하시려는 겁니다.

파수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말은, 외부 적에게 문제가 찾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적이요 원수임을 이스라엘이 자각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나라, 자기 것, 자기 생명을 지켜보겠다는 시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는 짓임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원래 이스라엘에 나팔을 부는 것은 이스라엘의 적에 대해서 하나님의 호출용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민수기 10:9에 보면,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민수기에게 있어 하나님의 적이 누군지에 대해서 이스라엘도 충분히 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과 신상을 공격하는 세력이 곧 자신의 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세력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해결사처럼 하나님이 나서서 이스라엘 적, 곧 하나님의 적을 쳐부숴준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이 민수기 대목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그 어떤 의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파수꾼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공격받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이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 때, 정신 차리면 우리는 멸망당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점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파수꾼이 나팔을 부는 차원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뜻 전달에 대해서 사람들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수꾼이 아무리 성의를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서 사람들은 다른 소리를 듣고 있어서 외면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외면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파수꾼이 보고 있는 그 상황이 인간으로서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미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에는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대에 같이 존재하는 적들의 공격에 대비해서 나서게 되지만 이스라엘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된 이 시점에서는 파수꾼은 인간들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미래의 사실을 미리 알게 됩니다.

같은 시간대의 내용으로 공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될 그 사항은 파수꾼은 미리 알아서 전달하니 어느 누구나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파수꾼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 사수가 우선적인 관심사였습니다. 자기네들 살리기 위해 파수꾼을 주었다고 여깁니다. 파수꾼으로 인해 자신이 평소에 잘못된 관심사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즉 마지막 때에는 파수꾼이 필요로 하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귀하게 여기는 본인들을 지켜주기 위해 파수꾼이 미리 와야 한다고 여기는 그들이 곧 오신 파수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하나님의 적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자기 아집에 빠지는 그 점을 옳은 것으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기생 라합을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자기의 조국만 민족을 배신했습니다.

여리고성을 공격하려는 적을 도리어 아군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기 나라의 미래를 미리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령받은 성도들도 다 이 기생라합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하여 개인적인 자질이나 위치 같은 것은 문제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개인적인 신상도 문제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육신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쓰여지게 됩니다. 돈 있으면 놀고 싶고, 놀다가 지루하면 다른 놀이거리를 찾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 육신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런 현재 자신의 육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귀한 분임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4에서 “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파수꾼은 이처럼 하나님 위주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지시만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5-15 17:05 
91강-에스겔 33장 1절-6절(파수꾼)14051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2장 1절-6절입니다. 구약성경 120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2: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숫군을 삼은 그 사람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그가 경비를 하였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보통 파수꾼이라 하면 여호와의 증인 책자 이름으로 유명한데 보통 파수꾼이라 할 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파수꾼이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파수꾼이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파수꾼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파수꾼 그 자체의 중요성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하나 세웠는데 그 세운 사람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은 세워져야 된다, 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갑이고 파수꾼은 우리가 부리는 하나의 을, 종에 불과하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한 파수꾼은 그것이 아니고 파수꾼이 갑이 되고 파수꾼의 말을 못 알아듣고 만일에 그것을 예비치 아니하면 가만있지 않겠다, 라는 조치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 집단을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 게 돼요.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하는 것 보고.”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하는 것 보고.” 한다면 뭘 하라는 말입니까? 파수꾼을 세워놓고 파수꾼이 외치는 것을 너희가 보고 정신 차리면 살고 정신 못 차리면 너라고 할지라도 그냥 가만 두지 않고 다 멸망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도대체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의도와 우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도와 차이가 나지요.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파수꾼 하는 것 보고 하겠다고 나왔을 때는 결국은 파수꾼이 외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기에 우리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내 가치보다 훨씬 더 크냐는 말이지요. 도대체 파수꾼이 외치는 것이 뭐 길래 “현재 내가 여기 살아 있습니다. 지켜 주옵소서.”라는 이러한 요구, 나의 가치보다 더 쳐주는 가치를 파수꾼에 담은 겁니다. 파수꾼에 말씀을 담아 둔 거예요.



이러한 파수꾼에 대한 위치는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이라는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뭘 부르느냐 하면, 나팔을 불어요. 파수꾼이 나팔을 부는데 파수꾼이 나팔을 불 때……망대 위에 파수꾼이 있잖아요. 망대 밑에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적군들이 오는 것이 안 보인다는 말이지요. 못 보지요. 파수꾼이 나팔을 불 때는 어떤 뜻으로 부느냐 하면, “당신들이 지금 보지 않고 있는 걸 나는 미리 봤습니다.”하는 뜻이에요. “당신들이 보지 않고 있는 것, 당신들이 성 안에 갇혀서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전혀 모르고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에 나는 그것을 미리 봤습니다.”라고 해서 나팔을 부는 거예요.



트럼펫 잘 부네, 그런 나팔 부는 솜씨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이 어려워요. 나팔을 불 때 팜파라밤~, 할 때 이 나팔 음 속에서 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나팔을 불 때 무슨 음으로 부는 것인지를 알아채야 되거든요. 그러면 나팔을 불었고 성안에 있는 사람이 나팔의 뜻을 안다면 멸망이라는 것은 사실은 없습니다. 멸망이 있을 리가 없지요. 나팔 불면 대비를 하니까 멸망이 없지요. 그런데 우리가 압니다. 모든 인류 역사는 멸망으로 끝났어요. 끝났다는 말은 나팔수가 나팔을 불어도 나팔 부는 의미를 결국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몰랐기에 망하거든요.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는데 그 나팔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야 되는데 나팔을 불더라도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네가 언제 나팔을 불었어? 분 적이 없잖아?” 이것은 사전에 나팔 분다는 그 뜻과 밑에 있는 백성들 사이에 나팔의 의미가 전혀 교감이 안 되어 있고 서로 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 때 뭘 봤는데 뭘 봤는가, 뭘 봤기에 나팔을 불었는가? 이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끄집어내는 논리가 굉장히 난해하고 너무 복잡해요. 그래서 미리 결론부터 먼저 합니다.



파수꾼은 예수님이십니다. 파수꾼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의 말씀, 나팔소리를 아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왜 예수님께서 파수꾼이 되셔서 나팔을 불었을 때 예수님이 본 것은 뭘 봤는가 하면, 심판, 이 세상 심판을 본 겁니다. 예수님이 파수꾼이라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은 나팔이 되고 그 나팔을 부는 취지가 뭐냐 하면, “마지막 때가 되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는 거예요. 회개하라고 들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나팔소리, 음성을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고 있는 그 심판차원에서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기껏 알고 있는 반성차원에서 날마다 회개를 해 봤자 파수꾼이 원하는 회개와 자기가 원하는 회개가 격이 맞지를 않아요.



왜 안 맞는가 하면, 본인들이 생각하는 그 심판, 벌 받는다는 것이 어떤 차원이냐 하면, ‘매 맞는 거겠지. 매 맞게 되면 매 맞을 때 회개하고 다시 정신 차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겠지’라고 뭔가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는 여전히 나는 잘 되는 쪽으로 뭔가 남아있다는 쪽으로 회개와 반성을 생각하는 반면에 예수님이 파수꾼이 되시는, 예수님이 외치는 심판이라는 것은 그걸로 끝내버리는 거예요. 모든 것을 마감하는 겁니다.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나팔을 분 거예요. 이쪽에서는 ‘기회가 또 있겠지, 또 있을 거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하나님은 우릴 버릴 리가 없어.’



예수님은 다 버린다는 거예요. 내가 말한 것을 듣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대로 저주로 마감시켜 버리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지금 망대를 보고 있는 파수꾼인 예수님과 밑에 있는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은 일단 나를 사랑하겠지.’ 두 번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에 위험한 일 있을 때는 나팔을 불어 주시겠지.’ 세 번째, ‘나팔을 불 때 그 때가서 정신 차리면, 그 때 가서 회개하게 되며’ 네 번째, ‘나는 아무 일 없이 다시 원상회복되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보호받고 살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출발과 시작을 일단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겁니다.



이러한 출발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부터 왜 예수님이 파수꾼인지 그 결론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지금부터 논리가 시작되는 겁니다. 민수기 10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찌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전혀 회개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봅시다. “적들이 보이거든 제사장이 나팔을 불어라. 그러면 하나님이 나서서 너희의 대적을 친히 처리해 줄 것이다. 그리고 승리케 해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0장 9절, 이 말씀대로 하게 되면 하나님이 일단 누구편인가 하면 이스라엘 편이에요. 이스라엘이 기분 좋을 수밖에 없지요. 이스라엘은 적들이 와도 겁나지 않아요. 왜, 나팔을 불면되니까. 나팔 불면 쫓아와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그 정도로 하나님은 내 편이니까. 그런데 그것은 아까 제가 말한 결론하고 다르지요? 그러면 민수기 10장에서 신약시대로 가면서 바뀌어야 할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일단 내 편이라는 그 사고방식이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이거 안 바뀌면 구원 못 받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내편이라는 이것이 안 바뀌면 우리는 천국은 어림도 없습니다. 천국은 자기 나라라고 아예 생각하고 예수님 보고 데려가라는 식으로 건방을 떨면 그것은 엉뚱한 곳에 가요. 지옥 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일단 내 편이다. 나에게는 내가 제일 중요하고 나보다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중요한 것을 하나님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귀하게 여길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우리 선배격인 이스라엘이 이미 했던 거예요. 이미 그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들도 아담의 자손이니까, 다 같은 인간이니까, 같은 인간이니 생각하는 것이 똑같지요.



“하나님이 왜 나팔을 불라고 했을까? 나팔을 불면 적들을 이긴다. 야, 신난다. 역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나팔 불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경우가 지금도 교회에서는 많이 있지요. 목사님들이 하는 말이 “어려울 때 기도하세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이 응답해 줍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무조건 하나님은 당신 편이니까 나팔 부는 것과 똑같은 차원에서 기도하면 응답해 준다는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 믿는 것이 기분 좋고 수월합니까? 어렵다? 기도하면 되거든요.



그랬었던 자들이 우리 선배들인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미 에스겔에 와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알지요? 그 사람들이 기도할 줄 몰라서, 금식할 줄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하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했지요. 그게 소용없는 거라 그 말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옛날 너희 선배격인 이스라엘이 했던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말미암아 뭔가 달라져야 되는데 하나님이 무조건 내 편 아니구나,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다, 하나님이 날 도와주겠지, 이런 사고방식을 유지하고서는 그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예수님 핍박하기는 마찬가지가 되어버려요.



진짜 예수님을 안 믿고 엉터리 예수님을 만들어내서 조작해서 믿는 게 돼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겠지, 사랑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죽었습니까? 피를 왜 흘려요? 그렇게 끔찍스럽게 일하지 말고 “너 사랑한다.” 하면 끝나는 문제인데 십자가 피를 왜 흘렸겠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 논리를 전개해 봅시다. 전쟁할 때 나팔 불면 승리하게 해 준다, 할 때 이 말이 민수기 10장 9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게 맞잖아, 그렇게 되잖아요. 오늘 본문에도 파수꾼은 전쟁에 관한 것이거든요.



민수기 10장 9절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팔을 불면 무조건 도와준다, 이렇게 되는데 오늘 본문 에스겔 33장의 경우는 전쟁이 있을 때 나팔을 불 테니까 그 때 정신 차리고 만약에 나팔을 불어도 대비치 아니하면 멸망시킨다는 조항이 첨부되어 있는 거예요. 민수기 9장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팔을 불면 무조건 도와주는 거예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나팔을 불어도 대비치 않으면 적들이 와서 다 망하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 에스겔 33장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지요.



‘하나님도 참 걱정도 팔자다. 나팔을 불면 다 대비를 하지요.’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그럴 것 같았으면 이스라엘이 멸망을 하지 않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나팔을 불면 다 대비를 할 건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팔을 불었다.” 그 말이에요. 에스겔을 통해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나팔을 불었잖아요. 대비는커녕 아예 외면하고 핍박을 해버렸습니다. 나팔을 안 분 것이 아니에요. 나팔을 불었어요. 나팔을 불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 이유가 있어요. 보통 적들이 왔을 때 요새가 있고 경비병을 세웠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미국 개척시대에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오는데 기병대 보초가 그걸 보면서 “온다!” 하면 나팔을 빰빠밤~, 하고 불면 알아요. 인디언이 오는구나, 하고 아니까 대비하면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민수기에서 적들은 이스라엘 빼놓고 외부가 적이에요.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만 하나님편이고 나머지는 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적이냐 하면, 이스라엘 그들이 하나님의 적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치고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고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아먹는 사람이 없습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이 누구하고 싸우느냐면 이스라엘 빼놓고 이스라엘을 치려고 달려드는 이방나라하고 싸워요. 그런데 오늘 본문 33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그들과 싸우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편은 누구냐? 하나님의 편은 오직 파수꾼 한 사람밖에 없어요. 마치 신약시대에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 오직 예수님 하나밖에 없어요. 아, 또 있구나. 닭.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할 때 닭이 울잖아요. 또 있네. 나귀. 예수님이 탔던 나귀. 또 있었네. 어린아이. 누가 더 높으냐, 할 때 데리고 나왔던 어린 아이.



보세요. 사람들이 이걸 납득하겠습니까? 이해하겠습니까? 지금도 복음 외쳐도 사람들은 이해 못합니다. 이제 따져 봅시다. 왜 이해를 못했을까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라는 것은 현재 내가 살아 있고 지금 들이닥친, 우리를 지금 힘들게 하는 그 적에 관해서, 그 사건에 관해서, 우리가 잘만 견디면 다시 우리는 지금 상태로 유지되어서 다시 정상적으로 생활 할 수 있다, 라는 쪽으로……,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정상적인데 그 정상적인 것이 질투 나서 적들이 쳐들어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파수꾼을 세워가지고 지금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그 기간만 지나면, 이 전쟁만 끝나면 다시 지금 정상인 것처럼 다시 정상이 된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파수꾼이 뭘 봐야 되느냐, 적들이 오나 안 오나 그 적들을 보고 있습니다. 적들을 보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볼 필요 없어요. 왜, 정상이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본문에 있는 이 파수꾼은 두 개 다를 봐야 돼요. 적들을 보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봐야 되는데 이것도 적이거든요. 그런데 파수꾼이 본 게 뭐냐 하면, 적이라고 여긴 적이 실상 적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심판하는 천사들이 되고……마태복음 13장에 보게 되면 마지막에 천사가 와서 심판하게 되어 있어요.



천사가 쳐들어오고 누가 적이냐 하면,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속으로 한 번 물어 봅니다. 파수꾼이 본 게 뭡니까? 이게 어려워요. 파수꾼이 본 것은 최종 심판이었습니다. 마지막 심판이었습니다. 마지막 심판은 저쪽에서 오는 게 적이 아니고 이쪽에 있는, 자기 성의 옹기종기 사는 자기백성들이 적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파수꾼은 놀라운 혜안, 안목을 갖고 있어요. 미래에 일어날 것을 앞당겨 본 게 돼요. 민수기 10장에서의 파수꾼은 같은 시간대의, “저기 저 먼지가 일어나는 저거, 어, 저 말발굽 소리구나.” 이렇게 같은 시대의, 같은 지평선에 있는 같은 공간과 같은 시대에 놓여 있는 적들이 왔을 때 같은 시대의 이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보고 “대비하라. 알지?” 할 때 “알지. 적들이 오면 나팔 불라 했지? 알았어. 무기준비 할 테니.”



이렇게 서로가 같은 지평과 같은 시간대속에서 서로 알아요. 적은 우리 바깥에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파수꾼이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은 과거만 알지 미래는 모르잖아요. 미래를 앞당겨서 본 그 파수꾼이 마지막 심판의 미래를 이야기한 것을 자기가 미리 보고 나팔을 불면서 그걸 자기 백성에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같은 시간적인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쪽은 현재에 살고 있고 파수꾼은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말을 알아먹지를 못해요. 이 파수꾼이 신약 때에 외쳐야 할 것은 언약입니다. 새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은 쉽게 말해서 타임머신이라고 보면 돼요.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타임머신이라. 미래로부터 거꾸로 현재에 온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고 성령 받은 사람이고 오늘날 성도입니다. 기름을 미리 준비하는 거예요. 신랑이 왔을 때 필요한 기름을 신랑오기 전에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성도한테는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현재가 현재를 조종하고 현재를 장악하는 것은 현재의 자기의 생각이 아니고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니까 현재의 삶은 미래에 부합되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게 뭐냐, 바로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의 삶을 사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주 안, 예수 안에, 주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는 죽었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만 산다, 이것이 지금 이 시점이 아니고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을, 그렇게 될 상황을 미리 성경을 통해서 부여받은 겁니다. 그러면 파수꾼의 역할은 뭐냐, 이 파수꾼의 역할은 그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전쟁이 일어나요. 전쟁이 없는 파수꾼은 없습니다.



그 전쟁, 미래의 전쟁은 이스라엘 대 이방나라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대 인간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전쟁에서 성도는 누구 편을 드느냐 하면, 사람 편을 들면 안 되고 누구 편을 드느냐, 하나님 편을 들어야 돼요. 그런 경우가 기생 라합의 경우입니다. 기생 라합은 분명히 여리고성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조국을 배신하지요. 조국을 배신 한 정도가 아니고 자기 나라를 팔아먹었어요. 여자 하나가 나라를 팔아먹었어요. 왜, 대비 못하도록. 여리고성 사람이 절대로 대비 못하도록.



이스라엘 사람이 여리고성을 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친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미래에 하나님나라 천군천사가 인간의 사는 이 모든 것을 친다는 것을 여리고성 전쟁을 통해서 미리 앞당겨서 보여줬고 그걸 기생 라합이 파악을 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그 하나님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기생 라합이. 따라서 기생 라합이 구원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선택돼야 된다는 말이거든요. 선택된 파수꾼이 되게 되면 그 사람의 직업이나, 인격이나, 품위나, 가정환경이나, 월 소득이나, 수입이나, 그 사람의 권력이나, 그 사람의 학력이나, 키, 몸무게, 혈당량, 간수치, 여러 가지 몸 상태 같은 것도 전혀 상관없어요.



전혀 상관없습니다. 혈당량 높거나 암 걸리거나 당뇨에 걸려도 성령이 와버리면 선택된 자 맞고요, 그 사람은 이 시대의 파수꾼입니다. 주의 증인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받은 이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해서 안 외치고 그런게 없어요. 로마서 1장 14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게 뭐냐 하면, “너희들 무서워서 내가 이 말 못한다.” 그런 게 일체 없다 이 말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지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인다고 협박할지라도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신약시대 이전에, 성령 오기 이전에, 많은 이스라엘 파수꾼들은 사람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사람한테 잘 보이면 돈이 들어오니까, 노후가 보장되니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할 말을 자기가 조작해서 내는 거예요. 그들이 납득되고 이해되는 쪽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다가 다 망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 때문에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나 자신을 하나님도 나와 뜻을 같이 하여 하나님도 나를 귀하게 여긴다는 이 사고방식이 신약시대에는 바뀌어야 한다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내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성령을 통해서 부여받은 하나님의 지시사항이 더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에스겔이 미리 예언합니다. “네가 받은 지시사항이 중요하냐, 네가 중요하냐?”라고 이것을 다그치는 거예요. “파수꾼아! 사람들이 무섭다고,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만약 네가 외치지 않으면 심판 값을 너한테 찾을 거야.”라고 언급을 한 거예요. 과연 찾았습니다. 찾고 그들은, 이스라엘은 다 망했습니다. 그들이 망했다는 것은 우리도 망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구약대로 하면, 에스겔대로 하면, 민수기대로 하면 우리는 주의 말씀을 감당 못합니다. 편하고 남에게 대우 받을 때는 얼씨구나, 하고 말씀 전하지만 만약에 남들이 시시하게 보고 무시하고 모독하면, ‘미쳤나? 내가 하나님 때문에 고생할 이유가 없지.’ 하고 주님 주신 사명보다도 자기 몸 사리는 것이 우선이 되어버렸어요.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은 죽이라고 할 때에 그 말씀을 남에게 적용시킬 때는 쉽게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일번타자로 돌을 던져서 내가 얼마나 안식일 계명을 존중하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돌멩이 들고 던지려고 보니 자기가 사랑하는 딸이라. 그것도 얼마 전에 시집간 딸. 때릴 수 있습니까? 못 때리지요. 저는 빠지겠습니다, 하지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 정도로, 남의 딸 같으면 때릴 거지만 내 딸……, 인간은 육신 자체가 자기 육신 우선이에요. 분명히 합시다. 딱 깨놓고 말해서 인간이 사는 목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목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사는가? 그저 놀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노는데 돈이 필요하니 돈 모아서 잘 놀고 돈 떨어지면 또 놀기 위해서 돈 모으는 거예요. 시집간 여자들은 자식하고 놀고 남자들은 친구하고 놀고, 가만 따져 보세요. 일하는 것이 좋아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직장생활 좋아서 하는 사람 없고 전부 다 월급 모아서 ‘이번에 유럽 갈까, 스페인 갈까? 미국으로 갈까? 아니면 골프를 칠까? 자동차를 바꿔 봐?’ 남자들 같으면 자동차, 튜닝해서 번쩍번쩍 하게 만들고. 여자들 같으면 수다 떨고, 찜질 방 가고, 맛있는 것 먹고, 시간 나면 골프치고 춤 추러 다니고, 왜 사는가? 그냥 놀려고 사는 거예요.



그게 육신이에요. 그 정도로, 노는 것도 이제는 아주 자극적인 것, 놀다 시시하면 새로운 놀 거리를 찾아서 가는 거예요. 끝이에요. 이게 인간사는 겁니다. 돈 많으면 재미있게 놀고 돈 없으면 못 노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해요. 자기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재미있는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 파수꾼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아이고 파수꾼이고 뭐고 놀고 살만큼 살다가 죽을게.” 이런다니까요.



파수꾼이야기, 적들이 온다는 이야기, “적 오면 내가 내 목숨 바치지요. 살만큼 살았는데 적들이 와서 죽으나 그냥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 지금 주님께서 하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고, “적들이 오니까 파수꾼들의 말을 듣고 너를 지키라.” 너를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파수꾼이 하는 말을 제대로 네가 알아먹느냐,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보다 파수꾼에 담겨진 그 예언의 말씀, 언약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를 지켜주기 때문에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안 지켜줘도 예수가 너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 먹느냐 그 말입니다.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보통 목사들이 그런 설교들 하지요. “여러분들이 파수꾼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제가(목사) 파수꾼이니까 제 말을 잘 들어야 여러분들은 복을 받고 가정이 잘되고 애들 공부도 잘하고 화목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벌 받습니다.” 하면 교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벌 받을게요. 한두 번 속나. 차리라 벌 받을게. 그런 소리 듣기도 싫어. 벌 받을게.” 제가 하는 이야기는 이게 벌 받는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사람이 죽겠다고 한다면 파수꾼은 필요 없어요. 본인이 죽겠다는데, 본인이 지금 자살하겠다는데……, “파수꾼 말을 안 들으면 당신은 아플 거예요.” 해도, “내가 지금 아파서 죽을 요량을 하고 있어. 그런 소리 하지 마.”



파수꾼이 안 중요한 이유가, 살만큼 살다가 물에 빠져 죽든지 죽겠다는 그런 사람한테는 파수꾼이 먹히지를 않아요. 본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지금 죽든 살든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파수꾼이 하는 말이 파수꾼은 미래의 최종적인 죽음, 영원한 심판을 미리 봤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살다 죽지.” 그 자체를 회개하라는 말이지요. 살아도 내가 중요하고 죽어도 내가 중요하고, 사나 죽으나 자기만 중요하다는 그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파수꾼이 살고 죽고, 고생하고 안 하고 상관없이 선택했다는 것, 주께서 선택했다는 것은 결국은 민수기로부터 시작해서 에스겔을 통해서 신약시대로 달라짐 속에서 누가 나를 이렇게 주님만을 위해서 살도록 달라지게 했던가, 그것은 바로 주님 자신임을 증거 할 때 그 사람이 이 시대의 파수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뜻이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아도취의 즐거움에 빠져서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달라져야 구원받는다는 이 명확한 현실, 실제 앞에 저희들이 성령을 통해서 나 위주의 삶에서 주님이 우선됨을 깨닫는 사람으로 바뀌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