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지자
2014년 6월 4일 본문 말씀: 에스겔 33: 30-33
(33:30)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33: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33:32)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종교나 구원이나 모두 우리 자신에게 속한 ‘나의 일’로 간주하고 시작하는 법입니다. 남 잘되기 위해 본인이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시작은 나로부터 이루어지고 상대는 하나님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나가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계시면 그것으로 신앙생활의 조건을 갖추어졌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는 제 3자입니다. 제 3자가 나의 신앙생활에 개입할 때에 단순히 참고정도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부담스럽고 거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내가 내 자율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개입된 제 3자에게 자신의 신앙을 전적으로 맡기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아이디어 정도는 참고고 들어줄 용의는 있겠지만 전적으로 제 3자에게 자신의 신앙 전부, 곧 운명 전부를 내던져버리고 그 분이 시키는대로 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라는 이름의 제 3자의 등장을 언급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 위주의 신앙생활이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 앞에서 선지자를 보내어도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기 때문에 말을 안 듣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헌신이나 봉사나 기도 등등의 모든 것들도 어디까지나 기존의 자신들의 견지하던 것을 진리라고 우길 가능성이 큽니다. 새롭게 등장한 낯선 사람의 의견을 반영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점을 이미 하나님께서 아시고 에스겔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실은 그들 주장을 옹호해주는 가짜이고 참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제대로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런 식의 참된 선지자를 보내게 되니 비로소 그들은 속셈이 노출됩니다.
그것이 31절에 나와 있습니다. “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즉 자신이 이익을 먼저 고려한 그런 하나님을 사람들은 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언급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실은, 사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사랑일 뿐입니다. 따라서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짓된 하나님의 뜻을 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보니 인간들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과 인간 사이에 제3자의 개입이라는 것은 혹독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지적질 당하는 겁니다. 이게 진정 복이요 은혜입니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 내용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상’입니다. 스바냐 1:2-3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의 이런 설교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진리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서 얼마나 부정적인 언사로 느껴지겠습니까!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들고자 합니다. 자신이 이익이 우선이니까요. 결코 진리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을까가 오선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이와같은 세상에 대해서 전면 부정으로 나오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대해서 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2:2에 보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다음의 사항을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분노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분노하지 않으신다. 어느 쪽일까요? 만약에 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다면 이 분노 앞에서 인간들은 그 어떤 요구조건도 소용없습니다.
만약에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실은 제 3의 개입이 구태어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인간들이 신에 대한 인상과 견해와 이와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3자 격으로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기존의 인간들의 견해가 결코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가 3:11에 보면,
“그들의 두령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이러한 외침에 대해서 당연히 사람들은 선지자를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급에 있는 자들이나 백성들이 모두 돈을 얻는 이익으로 한 통속으로 관계가 단단히 묶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들 은혜받았다느니, 혹은 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 기대에 부응했기 때문인데 그 기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의’, ‘자기 가치’가 계속 유지되거나 확대되는 바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은혜받았습니다”는 말은, “내가 기대한 그 만족도 수준에 합치되었습니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의’가 계속 유지됨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기 긍정적인 고백은 하나님의 분노하심에 부합되지 못하는 고백합니다. 진정한 은혜는 이런 고백으로 나옵니다.
“주님, 제가 이토록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군요.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 고백의 진정성은 그 다음에 그 어떤 혹독한 조치가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마저 도리어 감사하는 겁니다. “주님, 저는 죄인이오니 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신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수용하겠습니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떠한 조치에 대해서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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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05 12:24 |
94강-에스겔 33장 30절-33절(한 선지자)1406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3장 30절-33절입니다. 구약성경 120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3:30-33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만의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내 구원이기에 내가 나서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 신앙생활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제 삼자가 개입해 있습니다. 그 제 삼자를 오늘 본문 33절에 선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제 삼자가 개입되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구원의 길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어떤 길로 가야하고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면서 단지 우리는 어떤 욕망 같은 게 있습니다. 어떤 욕망이냐 하면, 이 땅에서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너무 살기 힘드니까 나중에 하나님하고 살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희망 같은 게 있어요.
지금은 비록 어렵고 힘들고 고생되지만 아마 하늘나라가면 이 모든 고생을 보상받고도 남는, 한 번 그곳에 가면 영원히 살 수 있기에 이왕 인생의 최종 목표를 좋은 데로 잡자는 겁니다. 지옥을 목표로 잡는 바보는 없을 거예요. 천국 갈 수 있다는 그 희망이 있다면 비록 이 땅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그 희망이 있기에 견디고 참아낼 수가 있는 자생력이 우리 속에서 생겨날 수 있는 생각이 들 수가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을 믿으면 하늘나라에 하나님 계시고 그 하늘나라가 탐이 나는데 어쨌든 하나님 믿으면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겠지.” 보통 사람들은 달랑 그것만 생각해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내가 사랑한다고 했으니 설마 하나님이 나를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지 마. 너는 못가.” 이런 결과는 없을 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항상 옳은 진리라면 제 삼자가 개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하나님만 있고 사람이 있고, 그러면 교회가 굉장히 수월할 것 같아요. 교회가 자기 믿고 싶으면 믿으면 되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펼치면 되니까.
그런데 성경을 펼치기 전에는 하나님 계시고 나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만사 깨끗하게 정리가 되고 정상적인 것으로 느껴지는데 성경을 펼치니까 거기에 선지자도 나오고 제사장도 나오고 왕도 나오고 그 다음에 결정적인 것이 예수님이 나오시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하늘나라 가라면 성경을 깡그리 무시하고, “나는 성경 모르는 채 하늘나라 가고 싶어요.” 이렇게 무시하기에는 성경이 너무 두껍고 내용이 많거든요.
그러면 성경의 내용을 “그래, 성경 내용을 참고로 하지.” 하고 성경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뭐가 문제냐 하면, 우리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겠다는 이것이 이방나라의 모든 종교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나만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치고, 심지어 나쁜 짓을 한다 할지라도 인간치고 “죽어서 지옥갈래, 천국갈래.” 하면 “난 지옥갈래.” 하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뭔가 내가 하나님 믿으면 하나님 계시는 곳에 갈 수 있다는 이것이 분명 상식은 맞는데 그게 진리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점검 받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곧 진리요, 나는 곧 길이요, 나는 곧 생명이다.”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야기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그 이야기를 우리가 못 들었다 치고 그 예수님을 제켜 버립니다. 그 예수님을 빼놓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을 제켜버리고, 나는 모른다, 못 들었다, 하고 제켜버리면 남는 것은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고 내가 생명이 돼버려요. 내가 하는 식으로 내가 구원된다는 내 스스로가 하나의 교주가 돼버리고 내가 하는 것이 정답이 돼버리고 이것이 진리로 확정이 돼버려요.
누가 이 점에 대해서 “당신은 틀렸어. 당신은 잘못된 거야.” 누가 지적 질이라도 한다 치면 우리는 발작하듯이, 할퀴듯이 왈칵 달려들어서 “나한테 잔소리 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렇게 돼버린다는 말이지요. 그런 사람이 만약 백 명이 있다면 구원받는 길이 백가지가 되어버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백가지 종류의 하나님이 있고, 그래서 이방나라의 신은 그렇게 많은 겁니다. 이방나라 신, 우상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우상문제는 용어문제가 아닙니다. 용어를 부처에서 여호와로 바꾼다고 우상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조상제사 안 드리고 교회 나온다고 해서 우상숭배자 아닌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결론부터 말해서 이런 겁니다. 지적을 해줘야 돼요. 나는 이게 정상이라고 할 때 누가 지적 질을 해 줘야 된다고요. 오늘 본문 33절의 말씀을 다시 할게요.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있었던” 과거로 되어 있거든요. “아하, 진짜 선지자가 다녀갔구나. 그런데 우리는 왜 못 알아봤지?”
왜 못 알아봤을까요? 그들에게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왜 뒤늦게 알았고 뒤늦게 안 그 시점은 언제이며 왜 미리 못 알아봤을까요? 하나님이 복 준다고 여기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겼던 그 나라가 이방신을 믿는 나라한테 홀라당 망해버리고 성전도 다 불타버리고 나중에는 나라도 없어서 가족도 뿔뿔이 다 흩어지고 형제간도 다 헤어지고 애굽때처럼 남의 나라 노예생활로 들어갔을 때 ‘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알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거로 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옛날에 있었었다는 겁니다. 지금 대구 경북 지방에 종교 아닌 종교가 있어요. 물론 경상도 다 마찬가지지만. 골목 어른들이나 노인정 어른들 하는 소리 들어보세요.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살렸다. 박정희만한 대통령은 우리나라에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박정희가 대통령이었었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에. 더 심한 경우는 전두환 때가 차라리 나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지금은 그 때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선지자가 등장해서 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그들은 분명히 “너희들이 하나님 믿어?” “믿습니다.” “꼴좋다. 하나님 믿으면서 하나님한테 된통 당했구나. 너희가 믿고 존경하고 사랑한다던 하나님한테 너희가 저주받는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나?”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뭔가 하나님에 대해서 곡해했지. 복 준다고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너를 저주할 줄 네가 상상이나 했어?”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수정하라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을 수정하라고 선지자 보냈는데 보내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보내봤자 “그런 분이 있었어?”라고 그들은 곡해해버렸다는 말이지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선지자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지자가 왜 왔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이 시간에 반드시 알아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이 성경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이기에.
31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에스겔아, 네가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되면 백성들이 너에게 말씀을 듣겠다고 몰려올 것이다. 가서 이야기해라.” “이야기하면 잘 듣겠습니까?” “잘 듣기는 뭘 잘 들어? 그들은 들어봤자 안들을 거야” 보세요. 하나님께서 제 삼자를 보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가서 이야기해 봤자 듣는다, 안 듣는다? 안 들을 줄 아시고 선지자를 보내는 겁니다. 오늘날 선지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성도가 오늘날 선지자에요.
성도가 안 믿는 집안이나 안 믿는 친구들 모인 동창회에 가서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니 이제 복음을 전해야지, 해서 그 자리에서 복음 전해봤자 먹혀들어가겠습니까? 안 먹혀 들어가요. 왜, 안 먹혀 들어가는지를 아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그 현장에서 입을 열어서 복음 전하게 하시는 거예요. 보험회사 영업사원 아닙니다. 입만 벌리면 한 구좌, 그거 아니에요. 가만 있을 때는 사이가 좋았는데 입을 열어서 복음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 그 다음부터는 원수가 되고 적이 돼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 가신 길이 바로 그 노선이기에 그렇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길보다도 내가 길이고 싶어 하거든요. 내가 길이 돼버리면 나는 편한 길, 아주 칭찬받는 길, 환영받는 길, 대우받는 그 쪽을 길이라고 보는 반면 예수님의 “길이요” 하는 이것은 아무도 그 말씀을 못 알아듣고 누구도 못 알아듣고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따돌림 당하는 그 길이 좁은 길이요 그 길이 천국으로 유일하게 통하는 길입니다.
길은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길, 그 외의 다른 길. 예수님 길 있고 내 길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길 빼놓고는 모든 길이 다 길이 아닙니다. 손 양원, 주 기철, 길이 아니에요. 예수님 자리에 자꾸 사람 들이대지 마세요. 봉사 많이 하고 순교 했다고 해서 그 길이 길 아닙니다.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어느 위대한 목회자도 주의 길을 대신 할 수 없어요. 괜히 현혹되지 마세요. 우리가 봐야 할 길은 오직 십자가 길이지, 주님 가신 길이지 어떤 믿음 좋은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길은 예수님 길, 그 외의 모든 길,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그리고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길에 들어서려면 예수님이 작용을 해줘야 됩니다. 자기 결심, 야무지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좁은 길로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이제부터 내가 야무지게 예수 잘 믿어야지, 하게 되면 어느새 그 길은 자기 신앙을 우상시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길로 이미 돌변해버렸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오류에 빠져버렸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만 높이면 될 문제를 가지고 예수 잘 믿으니까 날 따르라는 새로운 제 삼의 길을 자기가 주인공 되어서 만들어내는 수가 있어요. 아주 위험한 일이에요.
누구 말대로 교주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교주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따라가면 안돼요. 31절에 보면 “네 말을 들으나” 듣기는 들어요. 듣기는 듣는데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이유가 나와 있어요.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마음으로는 이익을 챙긴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주님 사랑합니다.”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 우선적으로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더 사랑하면 나에게 이익으로 되돌아올까 하는 것을 통박 굴리고 계산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 겁니다.
“기도하세요.” 하면 기도를 며칠 동안, 금식기도를 얼마나 하면 최종적으로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것인가, 그걸 챙긴다면 그것은 주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의 말씀이 그렇게 지적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하지 않고 그야말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되겠네요.” 하는데 여러분, 인간은 순수한 사랑을 내놓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애초부터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순수한 사랑이란 게 없습니다. 인간에게 순수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 잘남, 자기 의로움, 나는 나를 사수하겠다는 것, 남은 망해도 나는 망하지 않겠다는 이기주의 본능, 그것만은 순수합니다. 마귀가 심어준, 진짜 100퍼센트 마귀적인 순수함이에요.
에스겔의 이 말씀이 그 당시 사람을 지적할 때 우리는 그 당시 사람보고 욕하지 마세요. “그 당시 사람들은 정말 욕 얻어먹어도 싸다. 우리는 다른데 그 사람들은 왜 그렇지?” 하지 마세요. 이 말씀은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선배들 보고 하는 이야기지만 그것은 반복해서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겁니다. 32절에 보면 그들은 말하기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했다는 그 레벨, 그 수준이 어느 정도 돼야 준행한 수준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켰다고 자부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 돼야 그게 하나님 수준에 부합되는 수준이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람의 육신의 본능은 뭐냐 하면, 자기 의로움이에요. 질문과 답변을 해 보겠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될 때 나는 말씀을 지켰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하면, “역시 나는 잘났어.”라는 것을 확정지을 수 있는 행동이 나왔을 때 우리는 말씀을 지켰다고, 말씀대로 산다고 결정해 버려요. 우리가 스스로.
제 말이 좀 어려워서 미안합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로 자기만족에 강하냐 하면, ‘역시 내가 잘났을 거야. 아마 나는 훌륭할 거야. 나는 신자 맞을 거야. 신자 맞을 거야. 아, 내가 신자 맞구나.’ 스스로 기대했던, 신자 맞다, 훌륭하다, 거룩하다, 그것에 부합된다고 스스로 단정 지을 때 그 순간을 찰칵 찍어서 그 순간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령에 의해서 움직였다고, 그러니까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 그 순간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확정짓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보통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에요. 아주 난해한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들리는 많은 이야기중의 하나가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은혜 받았습니다.” 똑같은 법칙이에요. 은혜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이정도로 잘났다는 것이 자체적으로 대만족을 느끼는 그 순간을 찰칵, 찍어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저 은혜 받았습니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방금 제가 한 이 말을 비켜갈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설교 다시 합시다. 31절 끝에 보면 하나님 말씀이 “그들이 사랑을 이야기해도”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이야기하고 복을 이야기해도 이욕을 좆음이라, 자기 마음이 원하는 이익을 이미 제대로 챙겼다는 자기만족의 표현에 불과한 거예요. 자기이익이 만족되지 않으면 은혜고 뭐고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설교자 당신의 은혜 받은 상태란 무엇이며 당신이 말하는 성령 받은 상태가 뭔지를 이야기해보시오, 라고 한다면 이겁니다.
내가 이처럼 죄인인줄 몰랐습니다, 그런 고백이 나와야 돼요. 내가 이렇게 못돼먹은 인간인줄 새삼 알았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게 복이에요. 말로 하니 어려운데 쉽게 갑시다. 주께서 진짜 성령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니까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주여, 저는 망하는 사람입니다. 주여, 제가 망하는 사람인줄 티내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라고 하니까 그 다음에 주님의 말씀이 뭐냐 하면, “그렇다면 내가 네 재산 불내서 다 가져가버린다.”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 “홀라당 다 가져가세요.”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지요.
이걸 제가 미리 이야기했기 때문에 겁나서 이런 고백 못할 거예요. 진짜 그대로 흉내 내다가 진짜 홀라당 다 가져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제가 말씀하는 그 복 받았다, 은혜 받았다, 성령 받았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냐 하면 “지금 당장 목 따도 저는 당해도 쌉니다.” 하는 그러한 즐거움이 나와야 된다 이 말이지요. 주께서 지금 제 모가지를 따셔도 이것도 주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목 따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돼야 된다는 말이지요. 죄인인 입장에서 목을 따든 안 따든 죄인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는 권리나 자격이 없어요.
지금 저보고 너무 심하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심하게 이야기한다 생각하지 마세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 있고 나 있으면 신앙생활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 삼자가 개입되지요. 그 삼자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선지자지요. 여러분, 선지자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선지자가 얼마나 곤욕스럽게 살았는지 몰라요. 선지자를 환영해준 시대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은 물론이고 그들이 자기 생업이 없었어요.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 뭔가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추구하는 것, 이것은 일체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지자가 막상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저리 가세요. 너무 부담됩니다.” 하고 밀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자로 우리 에 등장하는 거예요. 우리는 다가오는 선지자, 다가오는 예수님을 빼버리고 내가 원하는, 나 잘났다고 칭찬해주는 그런 예수, 그런 선지자, 그런 목사를 우리 앞에 두기를 원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장담하는 이유가 선지자치고 고난 안 받은 선지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지요. 고난 왜 받았겠습니까? 그들이 일부러 고난을 자처했습니까? 아니면 그 세대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고난을 줬습니까? 그 세대 사람들이 고난을 준 거예요.
그 세대 사람들이 그렇게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나보면 다 안 믿는 사람들도 다 착한 사람들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에요. 선지자가 복음만 안전했으면, 사도바울이 복음만 안전하면 사람들 사도바울과 친하게 지낼 여건이 돼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 말을 못해요. 사람 기쁜 말을 못해요. 예수님 기뻐하는 말만 전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미워했던 그 힘이, 그 악마적 힘이 그 뒤에 예수 믿는 사람까지 핍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선지자는 고난의 운명에, 그 고난의 급류에 같이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입장이고 그런 팔자에요.
제가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선지자가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겁니다. 우리 앞에 신이 있다. 신과 나 사이에 나는 신을 믿음으로써 신이 계신 나라에 간다고 그냥 편하게 생각했는데 거기에 제 삼자가 난데없이 개입해서 치고 들어왔다는 말이지요. 제 삼자가 치고 들어왔는데 그 제 삼자가 내가 원래 갖고 있던 희망, 이런 것을 부응해주는 분이 아니고 그 분은 십자가사건, 십자가내용을 가지고 우리를 지적하시는 분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 거예요.
오늘 본문이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는 놀려대는 겁니다. “야, 선지자양반,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양반,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기뻐하는 것, 신의 축복을 이야기해봐.” 그러니까 하는 말이 “나는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당신 말과 서로 틀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틀어질 것 같으면 당신이 당해야지. 당신은 저리 비켜. 안 비키면 내가 당신을 내칠 거야.” 그러한 관계 속에 제 삼자를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선지자가 어떤 말을 했기에 그렇게 되는가? 에스겔 본문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간단하게 들겠습니다. 스바냐 1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게 스바냐 선지자가 이야기한 겁니다. 이게 사람보고 할 소리입니까“? 선지자가 하는 말이 짐승이나 새나 바다의 고기나 사람까지 다 지면에 있는 것을 쓸어버린다, 라고 했어요. 이런 소리 하면서 그 스바냐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모으겠냐는 그 말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이것은 부정적, 부정적 해도 이처럼 부정적 사고방식은 첨 봤어요. 하나님께서 모든 지면의 사람을 쓸어버린다고. 그러니 이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바냐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분노하신다는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선지자가 어떤 말을 할 때는 전제가 뭐냐,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유행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분노하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돈 밖에 모르는 여기에 대해서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분노하심 앞에서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있느냐, 아무도 없어요.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 분노하심을 이야기해놓고 그 분노와 진노가 평소에 내가 살아가는 내 모습에 아주 적절한, 하나님이 정말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나는 진노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로서 그 사람을 값없이 영생을 주는 방식을 채택한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로 나타난 거예요.
어딜 하나님을 이용해요? 뭘 자기가 잘한 게 있다고 하나님을 이용해요? 미가를 봅시다. 미가를 보게 되면, 미가 3장 10절을 보게 되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여기에 지도자급이 나오거든요. 두령 나오고 제사장이 나오고 선지자가 나오는데 두령은 뇌물, 재판장은 삯, 선지자는 돈, 그걸 합쳐보면 공통점은 돈, 돈.
그런데 이 돈을 위하여, 종교계든, 법조계든, 정치, 경제, 모든 것이 돈으로 하는데 왜 돈으로 하는 지도자가 있어도 사람들은 왜 거부하지 않고 좋아하느냐 하면, 본인들이 돈 벌어주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떵떵거리면서 돈이 풍부해서 마음껏 원 없이 대 만족 누리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해줄 때 나는 그 하나님을 축복주시는 하나님으로 섬길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줄 거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것, 십일조 드리고 백배나 받겠다는 거예요.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에요. 완전히 장사하는 거예요, 장사하는 것.
이걸 선지자가 언급을 한다고요. 선지자가 지도자를 하게 되면 백성들로부터 환영받을 줄 안다고요? 천만의 말씀. 백성하고 지도자가 한 통속이 되어 있어요. 돈이라는 것으로 한통속이 되어 있는 판국에 미가 선지자가 이런 소리 할 때 미가선지자는 축출당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 못 받아요. 여러분, 성경 왜 있습니까?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점잖은 하나님 계시고 점잖은 나 있고, 뭐가 더 필요해? 그런데 막상 성경을 펼쳤다. 성경 어디를 펼쳤는가? 선지서를 펼쳤다. 선지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선지자의 맥락을 따라서 예수님 오셔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현실 속에 놓여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입니까? 진노하는 하나님입니까? 진노하시는 하나님, 시편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매일같이 진노하시는 하나님. 따라서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주여, 용서해 주옵소서.” 주기도문에 나와요. 주기도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너희들은 이렇게 기도하라.” 뭘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주여, 오늘도 나의 하루 산 모든 것에 대해서 용서해 주옵소서.” 그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 영광 되는 관계가 이미 영생 얻은 사람의 관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 삼자가 개입할 때 그 분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할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분노하고 미워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바로 예수님의 영으로 오신 것을 우리가 알고 반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할 입장이 못 되고 그저 살아온 것도 은혜고 공짜로 주신 삶이니 그 가운데서 그것을 내 것으로 쥐고 있는 이 죄를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