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88강-주의 소식(롬15:19-29)이근호140608

아빠와 함께 2014. 6. 8. 17:49

2014-06-08 12:45:03 조회 : 36         
   주의 소식 140608 이름 : 이근호   

주의 소식(로마서 15: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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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6-08 13:27 

주의 소식

2014년 6월 8일                          본문 말씀: 로마서 15:18-29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5: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15: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15: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15: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사도 바울이 벌린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우리들은 사도 개인의 일에 국한 된다고 여깁니다. 즉 당신은 당신일 따로 있고 우리는 우리 일 때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을 사적인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일로 간주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사도 자신의 전도 일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친히 벌리시는 ‘복음의 구체화’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현실을 따로 있습니다. 상호간에 의견 조율이 되고 소통이 되면 그것으로 행복 챙기는데 지장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여기에 갑자가 제3의 인물에 관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분의 모든 사상을 기존의 인간들 사회에서 포용이 안되니 여기서 위기가 발생됩니다.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끼어들 수 없다면 내치는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가 전하는 바는 바로 이 ‘제 3의 인물’인 주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받아들이든지 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기가 곤란한 문제가 유발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인간 사회는 제각기 자기 영역들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놓여진 바둑판 위를 개미들이 왕래하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일루이곤, 그리고 나중에 서바나(지금의 스페인)까지 골고루 흩어져서 각자 자기만의 삶의 현장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짓는 것을 인정하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이 양상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보편과 무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소식은 이 세상 밖에서 개입하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소식에 의하면 이 세상은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도 이 지상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계 6:13) 이는 땅에 있는 인간들이나 하늘에 매달린 별들이 모두 동일한 원인에 의해서 그 자리를 오랫동안 배치받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리잡의 근원이 이제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 ‘하늘나라’라는 곳으로 떠나버리고 이 세상은 이제 빈 껍데기로 전락하여 오그라들 뿐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지리적 환경에 의해서 행복과 생존의 이유를 누리던 시절이 마감날을 마지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영역을 사수하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자기에게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삶은 하늘나라 갈 만큼은 질적 변화를 낳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부분은 어디까지나 부분입니다. 전체적으로 일어난 변화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부분으로서 망합니다.

마치 바둑판을 수직으로 곧추세우게 되면 그동안 편하게 왕래하던 모든 것들이 제일 밑바닥으로 우루루 쏟아져 집결하게 됩니다. 그 집결된 자리를 선점하여 미리 대기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도는 이 마음을 배워한다고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사도 바울에게 있어 전도란 바로 바둑판 자체가 곧추세워졌음을 알리는 겁니다. 즉 메가폰을 쥐고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의롭지 못합니다. 계속 살 권리없습니다.”고 말입니다. 즉 너, 나 라는 비교 자체가 의미없게 만드는 제 3의 인물에 의한 침노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이는 질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질적 변화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으로부터 침노를 당해야 합니다. 일식 현상을 가지고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달이 해를 점차 그려서 결국 먹어버립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주체의 잠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말은 평소의 인간들의 자아상은 안정한 자연질서에 맞추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니고 계신 그 이질성은 세상에 쳐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주체까지 잠식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자기 소유를 근거로 해서 존재를 내세웁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소유도 인정하지 않고 존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약속만 인정하십니다.

인간의 소유성 속에는 자기 의로움이 필히 담겨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고넬료를 찾아오게 되고 그 천사가 말하기를 욥바라는 동네에 가서 베드로라는 자를 초청해오라는 겁니다. 그 시각에 하나님의 천사는 베드로를 먼저 찾아갑니다. 그리고 난데없는 보따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은 율법에 의해서 절대로 먹어서는 아니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보고 그것을 먹으라고 세 번씩이 이야기하고 베드로는 그때마다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자체적인 자기 의를 훼손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보따리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로서 선교나 전도는 결코 사람이 하는 게 아님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선교할 자격이 없음을 먼저 밝혀놓으시는 일 자체가 이미 베드로의 선교는 개시가 되어버렸습니다. “결코 제가 선교나 전도하는게 아닙니다”라는 내용이 모든 선교지에서 펼쳐지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은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소유나 존재를 사수하는 식으로 버팁니다.

하지만 이사야 52:15에 보면,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놀랄 소식이 되느냐 하는 바는 그 전의 나와 있는  말씀 때문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사 53:13-14) 왜 이사야 이 예언이 이스라엘 안에서 예수님의 수난으로 달성되어야 할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전 민족들을 대표하는 돌출성 대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실패가 전 세계로 번지게 됩니다. 그 누구도 당연히 구원받을 자 없다는 소식이 주의 소식이라는 이름으로 확산됩니다. 이게 바로 전도입니다. 기도합시다.

이근호 14-06-09 17:50 
87강-롬 15장19-29(주의 소식)1406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5장 19절에서 29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5:19-2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줄을 아노라.”



사도바울이 하는 이 이야기가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쓸데없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나는 이렇게 했고 저렇게 했고, 나는 여기에 갔고 저기에 갔고. 이것은 사업하는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내가 물건 팔러 이태리 가고 독일가고 브라질에 가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네 사업이고 자기 영업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개인 사업이지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잖아요. 그것이 보편화될 수는 없는 겁니다. 사도가 이렇게 전도했다, 그것은 너의 일이지. 선교사고 전도자니까 하는 일이지 그걸 구태여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레포트 작성하듯이 보고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런데 사도가 이렇게 전도했습니다, 선고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21절에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주의 소식에서 주님이 사도바울 본인만의 주님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보편적인 주님이라는 말이지요. 심지어 주를 믿지 않은 사람까지 결국은 죽고 난 뒤에 무덤에서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음성, 주의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나만의 할 일이 아니고 또 네가 할 일도 아니고 사실은 주님 자신의 프로젝트에요. 이것은 하세요, 한다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만하라고 한다고 해서 멈출 일도 아닙니다. 사태를 파악하라는 겁니다. 현실을 똑바로 보라는 겁니다. 우리주님의 일은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떤 차원에서 덮치는가를 보라는 이야기죠. 는 각자 자기 일을 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일이고 사적인 일이 아니라면 지금 사도가 하는 일은 개인적 일이 아니지요. 개인적 일이 아닌 것이 성경으로 전달되는 것은 지금도 성경말씀대로 지금도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행복하게 사느냐,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 얼마나 착한가, 그런 것은 주의 복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 일이에요.



이것이 주의 일에, 주의 복음에 해당이 된다면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돼요. 왜 이 세상은 인간들만 있어야 되는데 인간 외의 다른 인물이 활동하는가, 우리가 그것을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그것이 굉장히 낯설어야 되고 이상스러워야 되고, 이 세상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라면 우리끼리 서로 통하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 포함되지 않는, 소속되지 않는 다른 낯선 인물이 등장해서 일을 따로 진행시킨다면 그것은 일종의 위기가 되는 겁니다.



“당신 뭐요? 대체 당신 뭐하는 분이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일을 모른다고 치면 개인적으로 아무리 행복하고 아무리 착하고 착실하게 살아도 그 분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멸망하는 수가 생깁니다. 왜, 서로 다 알고 서로 소통이 되는 그런 사람들만 모였으면 애초부터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각자 자기 자리에서 살면 되는데, 우리에게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도 안 되고 우리한테 섞이지 않는 제 삼의 인물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또 그분이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그 분이 복음 전한답시고 온 천지를 다 휩쓸고 다니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는 셈이 되는 겁니다. 낯선 현실에 직면하게 되지요.



자, 지금까지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뭐지요?” 우리가 새삼스럽게 또 알아야 될 책임 비슷한 것이 우리에게 발생이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되어 있어요. 꼭 알아야 됩니까, 이거?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상식에 의하면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별은 자기 자리에 있고 이쪽으로 안 떨어지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들끼리 다 수긍을 해서 과학적 진리로 확증이 되어 있어요.



별이 떨어진다면 우주선 타고 갈 필요가 없잖아요. 떨어질 날만 기다리면 되니까. 그래서 별은 별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각자 자기 자리에서 살아가면 그 만이에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별이 떨어진다는 말이에요. 어느 쪽으로? 우리 쪽으로 별이 합류가 된다는 말이에요. 왜 와요? 별은 자기 자리에 박혀 있어야지 왜 떨어집니까? 이것은 몰라도 되겠지,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몰라도 될 것 같으면 요한계시록 6장에 박혀 있지도 않았습니다.



별이 떨어진다는 이 내용을 대구 강의에서 했던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바둑판이 있다면 그 위를 개미들이 기어 다닙니다. 마음껏 기어 다닙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지금 이쪽저쪽을 언급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바둑판이라면 예루살렘이라는 어느 지점에서 같은 평면을 유지하고 있는 일루리곤까지 옮긴다고 되어 있어요. 일루리곤이 어디냐 하면 주보 뒷면에 나와 있습니다. 이태리 하고 그리스반도 사이를 아드리아 해라고 하는데 그리스북쪽, 현재 알바니아 쪽을 일루리곤이라 하는 거예요.



어쨌든 지리적 환경인데 바둑판이라고 보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는 지금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쪽에서 이쪽으로 옮긴다는 것은 누구나 여행해 보면 다 알아요. 납득이 되고 다 돼요. 그런데 제 삼의 인물이 등장해서 하는 말이 이쪽에서 이쪽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간다는 거예요. 이 지상에서 하늘로. 지상에서 하늘로 가려면 바둑판 위에 있는 개미는 바둑판을 뛰어 오를 수가 없습니다. 기껏 바둑판 위만 돌아다니지요. 그걸 도약해서 바둑판 위로 솟아오른다? 안되잖아요.



그런데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기껏 아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지?” 그 다음에 22절에 보면,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는데 못갔다고 하고 26절에 보면 마게도냐와 아가야가 나오는데 그리스 남쪽으로 마게도냐라고 하고 위쪽을 아가야라고 합니다. 고린도, 아테네 그 쪽이 마게도냐고 위쪽이 아가야인데 그 동네 사람들, 그리스, 마게도냐, 예루살렘, 일루리곤, 다 바둑판의 같은 평면에 위치해 있어요. 그런데 그런 평면을 가면서 사도바울이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우리가 가는 것은 이쪽이 아니고 저쪽,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무슨 수로 도약됩니까? 무슨 수로 가요?



이 교회 다니다가 저 교회로 다닐 수 있어요. 그것은 수평적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 있다가 필리핀에 가서 선교할 수 있어요. 배타고 비행기 타고 갑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선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세상 모든 선교는 다 거짓이라는 말이지요. 수평적인 이동은 선교가 아니에요. 여러분, 속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선교비를 잘못 낸 거예요. 그것은 목회지 이동이지 선교가 아니에요. 성경에서 나온 선교는 그 선교가 아닙니다. 사람을 위로 보내줘야 선교지 이 동네 살다가 저 동네로 가서 사는 그것이 선교입니까? 저쪽 동네로 집 얻어가는 그것이 선교입니까?



지금까지 알던 선교는 다 잊어버리세요. 그것은 다 접어 넣으세요. 위로 갈 수 있어야, 하나님 계시는 하늘나라 갈 수 있어야 선교 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위로 가려면 위에 있는 분이 당겨줘야 되거든요. 낚싯대처럼 당겨줘야 되는데 그런 선교 인간이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마이크 들고 “작목반, 작목반!” 이런 식으로 “여러분, 못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기껏 선교한 참여한 사도바울이 했던 겁니다. “여러분, 안됩니다. 못합니다. 어디 가서 어떻게 살아도 그것은 구원이 안 됩니다.” 하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서도 안 되면 안 되는대로 가만있지 왜 그 소리를 하느냐? 어차피 이 세상은 끝장난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바둑판위에 개미가 있다면 이 개미는 백날 가봐야 수평입니다. 그런데 이 바둑판을 곧추세워버려요. 그렇게 되면 갑자기 바둑판을 기어 다니던 개미들이 떨어져요. 제가 성경의 선교란 바둑판 위로 도약하는 거라 했지요.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바둑판 아래쪽으로 떨어지게 하는 방식을 채택합니다. 떨어지게 해 놓고 떨어진 것을 주워서 위로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해요.



좀 복잡해요. 바로 위로 올라가면 되는데, 펩시콜라(펄씨 콜레)목사가 말한것처럼 바로 위로 올라가는 계시가 아니고, 바로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게 해서 이 땅에서 다 죽도록 만들어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계 2:10) 죽도로 고생하는 일 없이는 구원도 없는 겁니다. 이것은 고생한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든 절에 가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는 고생하라고 만든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남자는 남자대로 고생하고 여자는 그 고생하는 남자 만나서 고생하고, 혼자 살면 혼자 사는 대로 고생하고, 이래 고생하고 저래 고생하고. 이 땅에서 고생 덜 하는 방법을 찾는다고요? 그것은 창세기 3장을 아예 찢어버리세요. 그런 현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가룟유다까지 어느 누구도 귀신까지도 이 땅은 전부가 고생하게 되어 있는 세상이에요. 불타는 용광로처럼 고생하게 되어 있어요.



고생을 왜 하십니까, 이렇게 물어야지 고생 안하는 길이 있습니까, 하면 물음 자체가 잘못이에요. 저만 쏙 빼서 고생 안하는 방법, 다른 사람들 다 전방으로 빠지고 나는 후방으로 빠진다, 이렇게 빽 써도 안돼요. 왕궁에 있던 에스더도 마음고생 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했습니다. 사촌 오빠가 이야기했지요. “네가 지금 왕궁에 있다고 해서 유대인의 해악이 너에게 도착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도 똑같아.” 이스라엘이 멸망했거든요. 그 멸망되는 그 원칙이 이제는 주의 복음에 실려서 전 세계로 확대됩니다.



바이러스 병균 같아요. 온 천지에 바이러스가 다 퍼져서 이스라엘 멸망만이 아니고 전체적인 멸망으로 다 확산되는 겁니다. 심지어 하늘에 멀쩡하게 있는 별까지 멸망에 합세를 하게 되어 있어요. 평범하게 놓여 있던 바둑판이 거꾸로 수직으로 설 줄이야 아무도 몰랐지요. 그야말로 바둑판이 뒤집어졌어요.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 진겁니다. 일부만 그랬다면 피할 곳이 있지요. 지금 마지막 때 핵폭탄이 터진다고 하니까 자기만 살려고 지하벙커 만들고 난리가 났는데 그것은 일부만 망할 때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숨을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종이든 왕이든 자유인이든 무역하는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자 누구 있을까, 했거든요. 이 땅 전체가 피할 곳이 없어요. 왜냐하면 누워있던 바둑판이 거꾸로, 수직으로 세워지니까 다 죽 흘러내리는 거지요. 암벽타기 해도 소용없어요. 인간과 인간끼리 잘 지내면 이상적인 공동체다, 여겼는데 문제는 제 삼의 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지구멸망, 세상멸망을 언급할 때는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묻기 전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당신은 뭐야?” 이렇게 물어야 돼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이 뭐 길래 너나없이 다 멸망하는 겁니까?” 그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뭐냐고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너 나 차이가 없어져요. 주의 법칙을 모르면 다 망하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둘이 아웅다웅 해도 주님이 등장해보니 둘 다 같은 신세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행복이에요. 이게 우리가 몰랐던 행복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불행했던 것은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같은 도토리 키재기 하면서 같은 인간끼리 누가 뛰어난가, 하는 되도 않는 그 이야기할 동안에 어떤 제 삼의 인물이 등장해서 둘 다 꿀 밤 주는 거예요.



“아저씨가 누군데 꿀밤 줘요?” 둘이 같은 마음으로 같이 쳐다보게 될 때 그 동안 내가 저 사람을 이겨야 되겠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참 방법도 희한한 방법입니다. 인간들이 보통 대통령, 대표자라 할 때 그것을 평균적 대표자라 합니다. 고만고만한 인간 가운데 평균 쳐서 대표자 뽑는 것인데 주님은 돌출적 대표에요. 이것은 예상도 못한 돌출자가 등장한 겁니다. 상상도 못한 거예요. “목사님, 선교해야 복 받습니까? 선교비 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라고 하는 것, 그것은 선교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이 모든 이야기는 예루살렘, 일루리곤, 서바나, 이러한 지리적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아, 그 지리적 환경이 결코 너희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질적 변화는 지리적 환경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서울에서 살 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대구에 와서 사니 이렇게 힘들다, 그런 핑계대지 마세요. 지리적 환경은 우리에게 질적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대구 살 때 새던 바가지 서울 가도 새고 미국 가도 새고, 그 바가지는 새는 바가지에요. 대전서 문제 있는 인간 진주가도 문제 있고 물에 빠져 죽어도 문제 있어요. 물에 빠져 죽는다고 착한 사람 되는 것 아닙니다. 왜, 같은 바둑판 위기 때문에.



설마 죽으면 인간 되겠지. 죽어도 인간 안 됩니다. 죽을 뻔해도 인간 안 되고 죽어도 인간 안돼요. 멀쩡한 별들도 같이 망하자, 해서 지구로 떨어지는 판인데, 해와 달도 다 떨어지고 있는데 그 떨어진 자리에서 무슨 문제가 있어요? 왜 별이 떨어지겠습니까? 별이 원래 하늘에 있던 이유는 땅의 어떤 원인 때문에 하늘에 버티고 있었는데 그 원인이 지워지고 삭제되니까 별이 삭제된 원인을 지목하고 알려주고 소개하기 위해서 떨어진 거예요.



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 막대기로 맞아본 적은 있지만 별한테 맞아 볼래요? 별한테 뒤통수 한 번 맞아 보렵니까? 존재의 가치? 존재의 가치를 찾는 자체가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지리적 환경이 나를 생산했기 때문에 나의 가치는 단독으로 찾아서는 안 되고 내가 속해 있는 환경, 그 자리, 그 자리가 준 가치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와서 이 가치, 저 가치, 다 가치를 몰살시켜 버리면 새삼스럽게 나의 가치를 따로 어디서 정립할 수 있겠습니까? 정립할 수가 없습니다. 선교가 뭔지 궁금하시지요? 선교가 뭔지 이제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던 고넬료, 중대장쯤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하루는 기도하고 있다가 누굴 봤느냐 하면, 천사를 만났어요.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욥바라는 곳에 베드로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을 초대하라고 한 거예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 이야기의 마감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서 고넬료가 예수 믿고 영생 얻었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여러분이 이걸 선교나 전도의 모델로 삼읍시다. 이걸 모델로 삼으면 어떤 공식, 방정식을 뽑아낼 수 있어요.



전도와 선교의 방정식이 뭐냐,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겁니다. 베드로부터, 사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전도와 선교를 시작한다는 말은 이 세상에 믿을 놈은 없다는 이야기에요. 이 세상에 선교나 전도를 맡길 위인이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된 선교사나 전도자는 반드시 방금 이야기한 이 내용을 포함해서 언급을 하게 되어 있어요. 저는 선교할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를 분명히 언급을 해야 돼요.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천사가 왔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선교의 특징은 천사가 오는 거예요. 이것은 고넬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욥바에 있던 베드로에게도 천사가 주어진 겁니다. 천사가 올 때 베드로는 극구 반대했지요.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보자기에 보니, 먹을 것이 있나 싶어 보니 먹으면 율법에 어긋나는 것들만 들어 있었어요. 그럴 일이 실제로는 없지만 예를 들면 제가 초대를 받아 갔는데 “목사님, 맛있게 드세요.” 하고 내놓은 것을 보니 곱창, 순대, 개고기, 제가 먹을 게 없네요.



베드로는 먹고 안 먹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법에 어긋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술, 담배, 이런 것들, 율법에 어긋나는 것, 레위기에 먹지 말라고 금한 것들을 두고 먹으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시험 치는 줄 알고, ‘이것은 평소에 내가 얼마나 율법을 실천하는가 보시나 보다. 주의해야지. 잘못하면 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게 된다.’ 하고 “못 먹습니다.”(내심 잘했지요) “먹어라.” “못 먹습니다.”(잘했지요?) “먹어라.” “못 먹습니다. 법에 어긋납니다.” 결국은 베드로는 선교할 자격 박탈입니다.



베드로는 뭘 몰랐는가? 아무도 선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본인이 말씀 지키면 선교할 수 있는 자격, 라이센스가 주어지는 줄 알았어요. 아무도 선교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선교할 자격이 없는데 왜 나한테 “너는 선교할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찾아왔느냐? 그게 바로 선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게 바로 선교의 시작이고 개시에요. 안하려고 했는데 하라고 하니, 하라고 하니 하는 거예요. 모세가 애굽에 안 가려고 했는데, 자기는 평생 양이나 치면서 그냥 목부로 가려고 했는데……치매 걸려서 요양병원에 갔는데 요양병원에 찾아온 거나 똑같아요.



하라고 하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항상 선교나 전도하면서 여차하면 안 해도 되지요,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도 선교나 전도가 자기 임무가 아니에요. 자기가 노리는 것은 따로 있어요.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해요. 그렇다면 왜 베드로에게 율법에 위반되는 것을 하라고 했는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취지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문제를 내 놓고 맞추면 살려준다는 말을 하는 것이 기분 나쁩니까, 아니면 틀리면 죽인다는 말이 기분 나쁩니까?



제가 문제 너무 어렵게 내서 죄송합니다. 맞추면 살려줄게, 하면 긍정적 희망이라도 주잖아요. 틀리면 죽는다는 말은 한 문제 맞췄다고 해서 끝이 아니에요. 틀릴 때까지, 그래서 할 말 없을 때까지 계속 새로운 문제가 주어진다면 이것은 애초부터 사람을 죽이겠다는 거예요. 사람 잡겠다는 겁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율법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되고 율법을 준 것은 온 입을 막고 저주 아래 두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이 주어질 때마다 자기가 살아보겠다는 자신의 눌린 본성이 튀어나와 버린 거예요.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 말씀을 지켰으니 이만하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 맞지요?”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여기 본문 20절에 보면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라고 했지요. 이 세상, 평평한 바둑판에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유입니다. 이것은 너의 터고 이것은 남의 터고 각자의 영역을 따로 확보하고 있어요. 소유가 있는 곳에서 반드시 존재가 등장해요. 나는 이런 인간이다, 할 때 나라는 존재는 껍데기고요, 그 박하사탕 껍질이고 그 안에 보면 박하사탕이 들어 있어요. 사람이 소유가 있는 곳에만 존재감을 느껴요.



저 사람은 내 자식이고 저 사람은 내 남편이고, 나는 그 사람의 아내다, 이 말은 남편과 자식이 있는 그 존재가 내 존재라는 겁니다. 존재라는 것은 반드시 소유가 있어야 돼요. 내가 취직해서 월급 받으면 살만하고 아무도 나를 호명하지 않고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소유가 날라 가기에 자살할 수밖에 없어요. 왜, 내 것이 없으니까. 그게 지금 바둑판이 누워 있는 이 상태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베드로도 마찬가지인데 “베드로야, 이거 먹어라.” “못 먹습니다.” “먹어라” “못 먹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그동안 나는 율법을 어기지 않고 지켜 왔습니다. 따라서 율법 지킨 그 의는 내 소유가 되고 따라서 율법 지킨 자로서의 존재가 바로 나라는 존재다.”라는 것이 베드로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선교 못합니다. 전도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소유도 가위표, 존재도 가위표, 소유가 있는 곳에 존재가 있기 때문에 존재 없애고 소유 없애고 있는 것은 뭐냐? 약속입니다.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내가 베드로 너에게 찾아가는 것은 베드로 너의 인간 됨됨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출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너는 구원되어야 되고 너는 이 땅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되기 때문에, 그게 약속이기에 내가 너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소유와 존재, 그 관계밖에 없어요. 약속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생뚱맞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모든 약속은 전부 다 내 존재를 전제로 한 약속들이에요. 결혼식 할 때 남자들이 큰 소리 치는 것이 있어요. 이런 소리들 해요. “장인어른, 장모님! 하늘이 두 쪽 나도 이 여자 내가 지킵니다.” 그럼 제가 속으로(만) 이야기해요. ‘하늘이 두 쪽이 나는데.’ 하늘이 두 조각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러면 그 결심도 두 조각나는 거예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이 여자는 내가 지킵니다.” 저는 “너도 너 하나 못 지키게 되어 있어.” 너도 자기 주제를 파악을 못해요. 왜, 약속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약속을 모르는 자는 저주받습니다. 약속을 아는 자는 영생 얻습니다. 그게 바로 주의 복음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전부 다 제각기, 경상도말로는 지줌지줌, 자기 소유를 따로 챙겨요. 이것은 우리 교회, 이것은 네 교회, 이것은 내 가정, 내 아파트, 네 아파트, 내 직장, 네 직장, 내 가게, 네 가게, 제각기이기 때문에 약속은 멀리 차버려요. 소유가 증강되는지 안 되는지, 나를 크게 키워주지 않는다면 저리 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켜준다고요? 뭘 지켜줘요? 주님의 침공, 하늘나라는 침공하는 겁니다. 외계의 침공이에요. 지상에서는 도약이 안 됩니다. 도약이 안 되면서도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하늘을 쳐다보면서 저 하늘나라가 내 나라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바라보는 나라가 이 지상에 합류해서 같이 망한다면 결국 우리는 망했던 나라를 천국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그게 종교요 그게 교회에요. 교회 다니면 지옥 가는 거예요. 자기 소유를 지키기 위한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혼인잔치 해놓고 누굴 불러냅니까? 혼인잔치 해놓고 임금은 소위 가진 자들 다 초청하지요? 그런데 가진 자들이 가진 것 때문에 스케줄이 겹쳐서 못 옵니다. 장가가야 되지요, 밭 사야 되지요, 장사해야 되지요, 기껏 억지로 끌려온 사람들은 자기 소유가 없는 자들이에요. 길거리에서 노는 자들, 아무 할 일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 끌어 모아서 예복 입혀서 자기 아들 혼인잔치를 축하하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야기들을 했을까요? 포도원 비유에서 아침에 일찍 온 사람과 늦게 온 사람이 있는데 아침에 일찍 온 사람은 삐졌고 늦게 온 사람은 감사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찍 온 만큼 노동을 했고 노동한 만큼 그것이 자기의 존재를 가득 채우는 소유가 된 거예요. 주님께서는 네 소유와 존재의 가치가 유지되는 그런 나라는 애초부터 망해야 될 지옥이지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는 거예요. 바둑판을 세워버리면 우르르 다 쏟아지듯이 전부 다 내려가야 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거예요. 어떻게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가? 지금 그 문제에요.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 일어나는 일식을 보면 돼요. 일식이라는 것은 달이 해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는 천문적 현상을 말합니다. 태양이 있는데 달이 중간에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들어서 해 없다, 하는 식으로 해를 가려버릴 때, 일식, 해를 먹는다는 뜻이니까, 차츰 해를 삼키면서 잠식을 하지요. 잠식해서 나중에는 다 덮어버리지요.



주님의 선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옛날 사람들은 일식을 할 때 달이 해를 가리는 것을 보는 순간 자기의 주체의 일식을 같이 경험했습니다. 섬뜩 했습니다. 저것은 달과 해, 하늘의 문제가 아니고 ‘아, 조만간에 이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수 있다. 배타고 가다가 애들이 죽는 수가 있겠다.’ 이렇게 섬뜩하면서 뭔가 불길함을 느끼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대자연현상과 변화에 맞추어서 같이 보조를 맞췄다는 뜻이 되거든요. 뭔가 해와 달이 잠식되니 나라는 것도 갑자기 위기를 느끼는 거예요.



이런 방법을 요한계시록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해의 삼분의 일, 달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는다(계 8:12), 그 말은 뭐냐? 너 이제 죽었어, 그런 뜻이거든요. 해나 달의 문제가 아니고 네 문제라는 거지요. 주체가 잠식이 되는 거예요. 먹히는 겁니다. 뭔가 불길해요. 설교 처음부터 이야기했던 것, 이걸 우리가 안 들은 것으로 깡그리 무시합시다. ‘없는 거야. 아무것도 안 들은 거야.’ 하고 깡그리 없애버려도 남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누군가 오셔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어떤 분이 존재하는 겁니다. 아주 이상하고 돌출적인 어떤 분이 존재한다는 것,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 우리는 메시아를 우리 속에 품어주면 되는데 내 존재에 주님의 존재가 품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식을 해버려요. 예수님은 달이고 우리는 해인데 그 달이 옴으로서 우리는 삼킴을 당하는 겁니다. 당할 때 고마운 줄 아세요. 그게 구원받은 겁니다. 구원은 그렇게 받는 거예요. 나의 존재가치가 다 날라 가버리는 거예요. 지금까지 평생 고만고만한 인간끼리 맨날 그 싸움하다가 뭔가 제 삼의 존재가 와서 나를 삼켜버리는 겁니다.



삼켜버리는데 그 분이 먼저는 어디서 왔는가? 먼저는 이스라엘에 왔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분이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이 받아야 될 인상, 느낌, 어떤 감상은 이사야 52장에 보면 미리 예언되어 있습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하시고 이사야 53장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렇게 이어지는 겁니다.



이 지구상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따로, 그리고 우리 같은 한 민족 따로 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을 대표하는 대표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 제치고 먼저 누구에게 자신의 낯선 존재를 드러냈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에게 낯선 존재를 드러낸 겁니다. 드러내니까 이스라엘이 자기는 율법 지켰다고, 구원받았다고, 베드로처럼 “말씀 지킵니다. 율법 지킵니다. 우리는 의로워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우기다가 우리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소식과 낯선 인물의 등장에 그들은 입이 봉해졌다고 했어요.



입이 봉해진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분을 채찍으로 때려서 이 땅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으로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의 대표자로 만들었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그 자리에 가도 똑같은 짓을 하게 되고 지금도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쫒아버립니다. “쓸데없이 잔소리만 해대고 있네. 내 일이 좀 정리되면 만납시다. 지금은 바쁘고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쫓아버립니다.



선교와 전도는 이겁니다. 사람이 내 소유, 이 평평한 바둑판에 내 소유와 내 소유에 근거한 내 존재감으로서는 질적 변화를 이룰 수가 없어요. 그러면 질적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일식이 일어나야 됩니다. 뭔가 와서 화들짝 놀래야 되고 나를 잠식해 버려야 돼요. 그런데 그 놀란다는 말은 우리가 미리 예상한 것은 아니에요. 놀랄 수밖에 없고, 그런데 그것이 우리 예상보다 뛰어나다, 영광스럽다, 찬란하다, 인물 잘났다, 가 아니라 이사야 52장에 보면 왜 보통 사람보다 얼굴이 더 망가졌느냐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제일 기피하는, 처참하게 망가진 몰골로 온 거예요. 누가 믿었으리오, 누가 알았으리오, 그는 우리가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흠모할 만한 게 없는 것을 내밀어서 전도를 한다? 이게 전도가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될 리가 없지요. 사람들을 꾀어야 하는데 교회 나오면 봉투에 돈 오 만원 넣어서 준다고 꾀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 나오시고 착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래야 되거든요.



세상 원리는 이거예요. 사람이 착한 게 아니고 사실은 돈이 착하지요. 돈이 있으면 누구나 착해지고 돈 없으면 누구나 악해지게 되어 있어요. 제가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는데 아멘 소리도 안 나오고. 착해지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돈 없으면 착해도 악해져요. 사람이 쪼다 안 되기 위해서. 소유가 없으면 존재도 없는 법인데 소유는 돈으로 채워야 되고 돈이 없다는 것은 내 존재가 자살 외에는 대안이 없어요. 그런데 소유도 없는 게, 존재감도 없는 게 와가지고 하늘나라가 어떠니 이 세상이 죄악이네 하니까 우리는 그 인물을 배척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베드로 보세요.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타났잖아요. 그래서 선교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천사가 와야 되고 또 하나는 천사가 일을 다 하지 않고 인간을 지목 한다는 겁니다. 고넬료에게 찾아왔던 그 천사가 복음이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이사야 52장이 어떻고,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만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참 희한하지요? 천사 자기가 이야기하면 될 텐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진 자만이 구원의 모든 것을 몸소 보일수가 있어요. 고난 받은 분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지식을 알라는 말이 아니고 약속인데 약속은 실제 예수님과 더불어서 체험을 해야 돼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돼요. 천사는 고난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지요. 그 고난이 바로 바둑판을 바로 세우는 거예요. 우르르 쏟아지는 거예요. 내가 붙들고 싶었던 모든 내 자리, 내가 희망하고 평생 사활을 걸었던 그 자리가 중력에 의해서 바둑판 밑으로 다 떨어지고 개미처럼 힘없이 우르르 떨어질 때 막상 떨어지고 보니까 거기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합류해서 “잘 왔다. 웰컴, 환영! 이제 오는구나.” 환영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영생의 자리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마음을 네가 본 받아라. 저 높은 곳에서 떨어져라. 뚝 떨어져야 돼요. 그런데 여기서 팁 하나 들어갑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요. 떨어진다고 해서 떨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백 프로 이단입니다.



그것은 도 닦는 거고요, “부족하다, 부족하다” 이게 바리새인이 행사처럼 했던 거예요. 그냥 사세요. 자연 떨어집니다. 어깨 아프지요.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지요. 염색도 포기해야 될 정도로 머리 세지요. 가만있어도 여러분 홀라당 벗깁니다. 나중에 연세 들면 사진도 찍기 싫어요. 만나면 사람 괜찮은데 찍어놓으면 시체 되어 있어요. 정말 외면하고 싶어요. 주께서 지금 여러분들 상대로 전도하십니다. 선교하십니다. “너는 아무것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 애초부터 소유한 적이 없었는데 마귀의 시험을 받아서 고만고만한 인간들 때문에 ‘너는 이만큼이냐. 나는 이만큼 있다.’ 까불다가 이제 내가 너를 사랑해서 선교하니까 너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빈손으로 오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짐 놔두고 그냥 와도, 세리와 창녀와 강도도 지금 편안하게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질적인 변화, 위로 가는 것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무시해야 됩니다. 철저하게 무시해야 되는데 “목사님, 무시해야 됩니까?” 꼭 무시 안 해도 돼요. 살면 무시하게 마련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예수여, 날 도와 주소서, 이렇게 나오니까. 그것 때문에 기도하잖아요. 중요한 나를 당신이 도와줘야 내가 당신과 동업자 맞잖아, 라고 나오니까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사도바울이 어느 위치에 있다가 서바나까지 간 것은 지리적 환경이 어떨지라도 그것으로 영생 얻는 그 시대는 이미 끝난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실패했던 그 실패가 이제는 잉크로 번져서, 책상에 잉크 엎으면 다 쏟잖아요, 잉크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땅 끝까지, 그 당시 서바나가 땅 끝이니까 땅 끝까지 잉크가 다 퍼졌습니다. 이 세상은 작살났다.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있으면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갇혀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복음이 오니까 누구도 질적 변화, 지리적 환경에서는 질적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로 질적 변화가 없느냐 하면 메시아마저 배격할 정도로 우리는 골수분자 마귀자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소식이 왔을 때 그게 바로 베드로도 전도하고 고넬료도 전도하고 둘 다 하나님에 의해서 전도 받은 인간끼리 모여서 주님만 감사하고 찬양할 때 그것이 주님의 전도의 효과입니다.



끝으로 마태복음 23장 15절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선교할 때 꼭 이점을 감안해야 돼요. 바다, 그 어디 땅 끝까지 가도 더 지옥백성 되는 선교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주셔야 됩니다. 왜 지옥백성 되는가? 선교의 주체자가 예수님이 아니고 본인, 본인의 단체, 교회나 본인의 공동체인 단체가 선교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만큼은 건전하고 의롭다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선교는 선교하면서 나라는 인간은 아무것도 없어도 마땅합니다,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할지라도 주께서 참 잘한 조치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그 순간순간이 지금 선교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행위와 동일한 행위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 선교한다고 나는 못하니까 미안해서 돈 푼이나 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대신 잘해달라고 선교비로 동참하겠다는 인식 자체가 배나 지옥백성 만드는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선교한답시고 선교비를 받은 자들이 돈만 밝히는 자본주의 화된 이러한 세상에서 왜 별이 합류하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가를 깨닫는 그것이 주님의 선교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전도를 천사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에게 맡겨서, 죄 가운데서 용서로 인한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임을 알린 것을 저희들은 늘 감안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