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강-롬 15장14-18(제사장직무)1406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5장 14절에서 18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5:14-18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의 일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일만 했다.”는 겁니다. 사람의 일을 안 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묻지요?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는 금방 묻고 싶어요.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면 사람의 일이고 너희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일치되면 참 좋겠는데 이게 일치되지를 않고 서로 반대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 했거든요.
서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반대가 된다는 그 대목은 마태복음 16장에서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스승이 죽도록 우리가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사탄이 물러가라” 했습니다. 스승한테 사탄소리 한 번 들어보렵니까? “사탄이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가 남입니까?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으로 베드로가 남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던 분인데 그분마저 예수님한테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우리가 예수님한테 사탄소리 듣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이점을 몰랐던 거예요. 베드로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점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 차이점이 있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꾸역꾸역 기대하는 바가 하나님께 도달되지 않고 중간에 단절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인간 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일이 계단을 밟아서 꾸역꾸역 올라가 봐야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된다, 그런 뜻입니다. 계단이야기가 나오면 늘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천로역정입니다. 천로역정이라 하면 교회 깨나 다닌 사람들은 많이 추천받은 책이에요. 좋은 책이라고, 청교도들의 책이라고.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천로역정은 절대로 복음적인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이지 복음적인 것이 아니에요. 끊어져 있고 단절되어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그 단절되고 끊어지는 것을 무슨 수로 우리 쪽에서 메워 나갑니까? 그것은 없는 거거든요. 사람의 특징은 자꾸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오늘 본문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 이야기하는 그걸 응축하게 되면 딱 한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만 생각했고 하나님의 일만 했습니다.” 그 이야기에요. 성령의 일만 했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이 다르다는 단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소개하는 그 하나님의 일의 핵심부분이 뭐냐, 그 핵심부분이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요,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제물이라는 말이 나와요. 성경에 멀쩡한 제물 없습니다. 제물은 생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고 제사행위를 통해서 거기에 참여되게 되어 있거든요. 제물이 된다는 말은 제사 속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전 굽고 밤 깎고 대추 깎아서 바치는 것이 아니고 직접 그 제사행위에 우리가 참여한다는 거예요. 제사행위에서 보일 수 있는 모습은 달랑 하나입니다. 죽어라, 죽음입니다. 사람의 일은 자기를 높이려고 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일과 같지 않은 이유는 그 가는 방향이 지향성이 반대가 되어 있거든요. 사람은 높아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낮추려고 하는 겁니다. 그 낮춤의 극한이 어디냐, 낮춤의 극한에서 순수가 나옵니다. 이 순수가 없으면 천국에 못가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식으로는 천국에 못갑니다. 극한 순수, 순수의 극한이 뭐냐,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이 다 거부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사도바울은 사람,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맘이 일체 없거든요. 자기는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 구원받고 싶어?” “구원받고 싶어요.” “죽자 그만. 죽어라. 제물이 되어서 죽어라. 하나님이 너희를 죽음 속에 집어넣는 제물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순수의 극한이다.” 그게 바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사도의 발언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무도 호응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사도가 믿는 것은 사람들의 호응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본인이 보여줄 십자가의 면면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성경책을 펴고 성경을 같이 보자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성경책을 펴고 설교할 때마다 마음속에 염려되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돌아서면 무슨 말인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돌아서지 말지, 돌아서기는 왜 돌아서는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설교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은 자기가 시작하지 않은 일은 돌아서면 다 잊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시작하지 않은 일, 자기가 기대하지 않은 일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시작한 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장로님 지금 농사짓는데 멧돼지가 지금 내려왔다고 하면 예배 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멧돼지가 지금 포도밭에 내려왔다면?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로 출발하지 않는 일이 외부에서 주어지니까 돌아서면 내가 보이고 따라서 내 일로 다시 귀환되니까 그것은 잠시 에프킬라 뿌린 것처럼 뭔가 냄새는 나는데 돌아서면 말끔하게 다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돌아서도 안 잊게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돌아서면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어떻게 하느냐? 이 본문 말씀이 내가 생각하는 상황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날라 가버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 상황을 내가 시작한 내 상황이 아니고, 지금 내게 일어난 모든 상황이 주님의 절차나 계획, 시나리오에 의해서 제공된 상황을 나의 한평생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줘야 돼요. 말은 길었습니다만 간단히 말하면 “지금 이것은 내 상황입니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마저 주께서 의도해서 유발시킨 상황입니다, 라고 이해를 하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화가 나서 삐지죠. “무슨 상황이 이런 상황이, 이 따위 상황이 다 있느냐? 주님이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어서 이런 어려운 상황을 주시는가?” 할 때 그 상황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만 알고 있던 구원을 이방인 너희에게도 제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고 모르는 것이 있어요. ‘유대인들은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구원 받았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유대인들은 좋겠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못 만났는데 그들은 만났다. 모세가 하나님을 독대해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받아서 챙겨서 구원이 주어졌으니 그들은 좋겠다.’ 이렇게 하지만 여러분, 유대인들이 말씀 받아서 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하고 다른 종족입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우리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유대인들이 전쟁을 했지만 그 전쟁은 자기나라 자기가 스스로 지키겠다는 전쟁이고 오늘날 이방인인 우리들의 전쟁은 뭐냐 하면, 내가 스스로 나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을 벌이는 상태라면 전쟁 벌이는 상태에서 반드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복수에요. 유치원 어린애부터 당회장까지 모든 인간은 복수 없는, 복수하지 않는 하루하루 일과를 보낸 적이 없습니다.
왜 나를 힘들게 하느냐에 대한 복수지요. 이건 남의 이야기할 것도 없이 제 이야기를 하면 적절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엄위하신 할아버지하고 13세 식구가 한 집에 살았는데 우리 어머니는 시집와서 하녀처럼 부림받고 살았지요. 그런데 자기 아들보다 삼촌이나 고모 챙기기 바빴고 원래 시집의 시스템이 그렇게 돌아간 거예요. 그게 시월드 아닙니까? 할아버지가 매일같이 저에게 잔소리를 안 한 날이 없었어요. 매일같이, 이건 너무 큰 욕심이다. 매 30분 간격으로 잔소리를 해대는 거예요.
저는 나한테 무슨 잘못이 있어서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제가 어딜 봐서 잔소리를 들을 사람인지……, 말실수 했다. 그렇게도 잔소리를 해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할아버지가 심심해서 잔소리를 해요. 그 잔소리 할 것을 찾는데 나중에는 못 찾으니까 본인이 화를 내면서 잔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신발을 나란히 놓으라고 해서 나란히 놓았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나란히는 했지만 신발의 앞뒤가 안 맞다는 거예요. 아, 여러분이라면 그거 견디겠습니까?
거기서 나온 나의 반응은 뭐냐 하면, 오직 복수심 밖에 없었어요. 이것은 가족이고 할아버지고 손자고 관계가 없어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다 큰 기차에 받혀 죽어라, 늙어죽지 말고 기차에 받혀 죽어라! 지금 생각하니 이게 나만의 복수가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매일같이 복수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매일 같이 복수하는 사람. 유 병언은 길 건너다가 죽어라, 이런 식으로. 김정은은 물에 빠져 죽어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하는 것은 자기를 건사하고 자기를 사수하고 지키는데 있어서 주변의 모든 상황은 바로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나는 절대로 가만있지를 않고 매일 매일 나를 힘들게 하는 것에 대해서 단 하루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힘들게 한 그 이상으로, 힘들게 한 그 만큼도 아니고 힘들게 한 그 이상으로 참혹한 복수의 칼날을 쏘아대면서, 마음속으로 복수하고 상상으로 복수하면서 그런 식으로 하지 아니하면 하루라도 내 몸을 유지하거나 부지할 수 있는 다른 방책이 없어요.
부부가 같이 살아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가족이 혼자 안 살고 같이 살아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상대방에게 서로 복수 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싸우더라도 같이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것도 없으면 강아지라도 키우든지.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른다고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거든요. 내 중심이 아니라고 해서 순하게 받아줄 그런 마음도 없어요. 나 하나 그나마 유지하기 위해서 내 주변에 대해서 전부 다 총을 쏘든지 화살을 쏘든지 대포를 쏘든지 상상복수를 감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말씀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상황, 그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서게 되면 그 다음에 복수해야 될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복수하는 그 계략을 끄집어내는데 소비하다 보니까 이 성경말씀, 거룩한 제물로 바친다는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전혀 나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진면목이에요. 구원 요? 천국? 천국은 함정입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일종의 덫이고 함정인데 천국, 타인에 대한 복수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나는 천국 간다.”는 자기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으로서 나를 커버해줄 때 그것은 제일 든든한 것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너 천국 간다.”가 아니라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제물로 너를 바쳐라.” 합니다. 천국 간다는 것은 우리 일이지만,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자 평소에 내가 만든 상황 속에서 쉽게 유발될 수 있는 “나는 나만 지키면 그만이고 영원히 지키면 그만이고 불멸의 존재가 되면 그것으로 나는 이 복수에 대한 나의 승리다.”라고 간주하는 이 끄트머리에 천국 간다는 그것이 달려 있는데 막상 하나님의 일은 그것이 아니고 “너는 나에게 죽음으로 바쳐야 될 제물이다.” 이렇게 나왔을 때에 그야말로 돌아서면 잊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전혀 이것은 나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구상이 되는 겁니다.
제물이 되기는 싫고 제물이 되고 죽는다는 이것은 나의 상황에서는 실패거든요. 어쨌든 살아남는 게 성공이지 이러다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 손해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하고 현재 우리가 속한 상황하고 이게 맞지가 않는 겁니다. 특히 16절 초반에 보면 우리를 약을 올리고 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은혜라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라는 것은 나를 확대시키는 것이 은혜고 나에게 복주는 게 은혜라고 생각했는데 이 은혜가 뭐냐 하면, 너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존재다, 라고 그런 쪽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그것이, 한발자국, 한발자국 은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한테는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우리가 설교를 듣더라도 우리는 뽑아내요. 우리는 채택합니다. 우리는 다 받아들이지 않고.
내 소망과 내 욕구에 부합되는 것만 골라서 은혜 받았다고 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일방적인, 내가 뽑는 그것을 중단시키고 이 몸 전체를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어보라는 거예요. 뽑아서 뭔가 부케 만들고 꽃다발 만들어봐야 여전히 내가 또 빛나잖아요. 빛나면 평소에 나만 생각해서 내 외부는 모두 복수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평소의 우리 상황에서 조금도 달라진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결코 순수한 사랑, 극한의 순수가 아니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이지 극한의 순수, 순수의 극한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천국 가겠다는 것도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의 필름이라면 이 필름이 망가져서 오류가 생긴 거예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특히 여기 하나님 앞에 제물로 제사 드린다는 말은 이방종교의 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제사 드리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사 드리라는 그 제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라고 할 때 우리는 제사 그 이후를 성급하게 미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통과했다 치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하나의 관람자가 되기를 원하거든요. 제사장이 제사 드리고 우리는 박수나 치면 되는 겁니까?
성경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제사장이 제사드릴 때 제사장은 대표가 되고 너는 그 대표 안에 정렬해서 같이 합류된 입장이거든요. 우리가 자꾸 우리를 빼돌리려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 제사에 합류해야 됩니다. 어쨌거나 여기서 제물제사라는 것은 이방인들이 말하는 종교행사가 아니고 현재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줬던 그 제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제사의 의미가 뭐냐 하면, 제사라 하는 것은 결국 인간세상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겁니다. 제사는 마지막 최후의 어두움이에요.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이 받은 말씀 안에 종말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심판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만이 최후로 처단할 수 있는 마지막 심판이 이미 제사 드리라는 그 말씀 안에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볼펜 제일 끝에 구멍이 있지요. 그 구멍을 통해서 종이에 글씨가 쓰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볼펜 구멍 같은 위치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는 제사 위치입니다. 제사를 옆에서 구경하지 마시고 제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빨려 들어가게 되면 평소에 우리가 나만을 위해서, 오직 나 개인의 가치를 위해서, 사수하게 위해서 복수하고 또 복수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내 가치를 유지했던 잉크 같은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사법, 그 컨베이어시스템처럼 움직이는 선반 따라 죽 같이 내려가게 되면 마지막에 도달되는 것이 뭐냐 하면, 최후의 심판에 도달됩니다. 거기서 나의 상황, 나밖에 모르는 상황은 죽이 되고 묵이 되고 액체가 되지요. 그것을 액체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체주체가 아니고 액체주체. 멀건 묵처럼 되는 겁니다. 콩죽이 되는 거지요.
여러분, 콩국수 할 때 콩을 어떻게 합니까? 갈아버리지요. 주께서 제사하면서 우리를 갈아버립니다. 우리를 분해하고 해체시켜 버려요. 해체시키면 뭣도 해체되느냐 하면, 내 꿈과 내 희망, 내 소망도 같이 해체되고 분해되어 버리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지킬 나가 없어지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과 만났던 이스라엘이 이런 상황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우리는 굉장히 부러워했지요. “좋겠다. 저들만 진짜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는 가짜신만 있었는데 진짜 신은 이스라엘에게만 먼저 나타났구나. 참 좋겠네.” 하잖아요.
그 진짜 하나님 만나서 받은 말씀 가운데 제사가 있는데 그 제사는 결국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이 최후에 때려주시는 그 심판과 그 저주를 먼저 맛보게 하는 그런 민족으로 이 땅에서 그들과 함께 동행 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그 취지의 연장선에서 그 다음 스케줄이 뭐냐 하면, “내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서 이방인들을 옛날 이스라엘이 드렸던 그 제사제물의 합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저를 사도로 보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저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만 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18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스라엘이 안 망한 노선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망해버린 노선, 이미 망했던 이스라엘 노선, 이스라엘이 캡슐이거든요. 캡슐이 깨지면 그 안에 제사가 들어 있고 그 제사를 이스라엘 민족이 감당하지 못할 때에 껍데기 이스라엘이 감당 못하더라도 그 알맹이, 순수, 극한의 순수는 유지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이라는 캡슐이 캐지면서 내용물이 흘러들어서 이제는 이방인까지 흘러들어온 거예요.
이방인이 옛날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극한의 순수, 극한의 제사, 극한의 종말, 극한의 심판과 저주를 맞닥뜨리는 그 작업을 이제는 이방인들이, 구원받아야 될 이방인들이 참여하는 일을 내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와서 기도해서 복 받는다고요? 무슨 그런 되도 않는 소리를 합니까? 그것은 평소의 나는 살고 너는 죽으라는 복수의 상황일 뿐이에요. 그 상황은 인간에서 출발한 상황이기에 하나님께 도달되지 않습니다. 진짜 상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내려준 그 상황, 그 상황 속에 우리가 잠입되어 들어가야 돼요.
나, 라는 것은 생겨먹은 것이 여기에 내가 있다 하는 그 순간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뭐냐? “누구야?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이.” 이런 복수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니까요. 이 나라는 것이. 그러면 내가 없어지면 되겠네요, 하는데 누구 맘대로 없어져요? 누구 맘대로 없어집니까?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고 우리는 나중이거든요. 하나님의 제사법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캡슐 안에 들어 있던 그 진짜 순수함이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이방인 중에서 뽑아서 사용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거기서 내 맘대로 삐져나와서 “난 안할래.” 안할래, 가 어디 있어요. 성령이 뽑아 세우면 극한의 순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져야 되고 이 땅에서 사용되어야 하는데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지금 우리가 돌아서면 말씀을 잊어버린다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여기 있고 말씀 가지고 나 잘되는 쪽으로 이용하려고 말씀을 듣기 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처해있는 이 모든 상황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주님의 다른 계획, 원대한 계획의 실행에 의해서 찾아왔다는 생각을 해보자는 말이지요. 내가 만든 상황이 아니고 주님이 의도한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바쳐서 제물 되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선교사 할래, 선교사 말만 들어도 짜증나는데 단기선교니 장기선교니 그런 것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사는 집안 살림 하시고 설거지 하시면 그것이 선교지에요.
왜, 설거지 하는 순수제물이니까. 때로는 고스톱 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오늘도 고스톱 치고 오늘의 행운을 맞춰보는 그런 식으로 제물로 드리면 그것이 극한의 순수다 그 말이지요. 극한의 순수라는 말을 제가 쓰는 이유가 있어요. 이것이 제가 쓴 것이 아니고, 제가 일부러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15장 9절에 사도바울이 구약을 인용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 인용한 대목이 신명기 32장인데 신명기 32장을 인용했다는 자체가 너무너무 어려운 이야기에요. 신명기 32장 같이 봅시다, 해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인데 제가 32장 전체 내용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바라보면서 예언을 합니다. 여러분, 예언이란 것은 우리가 짜 맞춰서 내는 것이 아니에요. 예언이라는 것은 먼저 예언 이전에 사건이 터져야 되고 그 사건을 유발시킨 분에 의해서 예언이 제공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우리가 기대했던 사건 같으면 우리가 그 예언을 알아맞출 기미가 보이는데 그 사건이 도저히 예측 못할 사건을 유발시켰다면 후차적으로 나오는 예언도 우리가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목사님, 예언도 모르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예언을 알아차려서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예언은 내가 지레짐작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이 내 주체에서 내 욕구가 섞여서 나오기 때문에, 내 오염된 욕망이 섞여서 나오기 때문에 이 예언은 다 엉터리입니다. 진짜 예언이 예언답게 나오는 경우는 “미처 몰랐습니다. 이것은 예상도 못했는데요. 주님이 내 인생을 이렇게 꼬이게 할 줄을 나는 예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이러면 나는 어떻게 살지요?” 꼭 예언이라는 것이 우리를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어요. 내 인생이 이렇게 갈 줄을 내가 예상 못했어요. 뭔가 말려든 느낌, 주님의 계획에 말려든 느낌이 들어요.
신명기 32장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백성들은 그냥 들었겠지요. “그 길이 어디 입니까? 그 길이 보고 싶습니다.” “너희들은 필히 여호와를 배반할 것이다.” 그겁니다. 그게 신명기 32장의 내용입니다. “너희들은 아무리 여호와를 믿고자 해도 너희들은 필히 배반하게 되어 있다.” “왜 우리가 배반해야 됩니까?” “배반해야 하나님의 준비된 저주와 심판을 너희 민족만이 맛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렇게 나오지요. “왜 우리 민족만이 저주를 받아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됩니까?” “그것은 너희들이 온 인류의 대표자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표자의 원리가 나옵니다. 그걸 읽어드리겠습니다.
신명기 32장 8절,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세상의 모든 인종을 분류할 때 수천 개가 되었든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받을 숫자와 비례해서 민족들을 확대, 확산시켜 놓았다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요지,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중요하지 나머지 이방민족들은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보조적으로 나타난 민족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잠수함이 물 위에 뜰 때 제일 먼저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이 잠망경이죠. 잠망경의 뾰족한 부분이 먼저 올라오지요.
그 대목을 이스라엘로 보세요. 그리고 물 위로 올라오다 보면 나오는 머리와 꼬리 부분, 길쭉한 소시지 같은 것, 그게 바로 이방민족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주도권을 갖고 있고 다른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의 존재가치와 의미가 뭐냐, 위상이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덩달아 같이 보조적인역할로 나오는 겁니다. 원뿌리는 이스라엘이고 곁뿌리는 이방민족, 그런 거예요. 다른 이방민족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사실은 이방인, 그 말 자체도 이방인이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쁜 겁니다.
6월에 브라질에서 월드컵 축구 하는데,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지만 지어내서 해 보면) “이번 축구경기는 브라질과 브라질 외의 다른 민족과의 경기입니다.” 하면 다른 민족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외 다른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외 다른 민족을 뭉치면 이방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을 썼다는 말은 “너희들은 중요하지 않아.” 그런 뉘앙스가 담겨 있어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중요하고 이스라엘이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에 내려진 그 하나님의 약속은 일관되게 반드시 필히 완성되고야 말 약속만 줬다는 겁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절차가운데 하나가 저주요 심판이고 단절인 거예요. 천국? 천국은 잘못된 우리 심상에 위해서 조작된 환상이고 극한의 순수는 천국이 아닙니다. 극한의 순수는 바로 죽음이에요. 그냥 죽음이 아니고 제사라는 죽음입니다. “목사님, 죽음 뒤에 뭐가 있겠지요.” 죽음 뒤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볼펜에서 나올 때 그 볼펜 잉크가 쓴 글씨는 볼펜에 묻혔던 그 잉크만 쓰게 되어 있거든요. 사랑은 연필로 쓰라는 게 있는데 사랑은 볼펜으로 써야 돼요. 볼펜으로 쓸 때 거기서 나오는 잉크 모든 천국은 예수님의 피로 나온 글씨로 써야 그게 천국이라는 말이지요.
천국의 모든 모습은 예수님의 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만 완전히 가득 찬 세계가 천국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 피, 이스라엘 제사 외에는 다른 피는 용서가 되지 않아요. 이스라엘이 대표자입니다. 이스라엘이 대표자라는 말은 그 대표자가 숫자로 대표자가 아니라는 이유가 있어요. 말이 어려워졌는데 “자,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대표자로서 구원받는다.” 그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대표라는 말은 이스라엘 속성을 유지할 경우에만 대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속성을 유지하면 되는데 신명기 32장에서 모세가 예언하기를, 사실은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이 예언했지요, 예언하기를 “너희는 절대로 내 말을 지키지 못한다. 너희는 반드시 이방민족이 믿는 다른 신을 믿게 되어 있다.”라고 한 거예요.
신명기 32장을 지금 다 못합니다. 설교 시간이 길어져서 끊어졌다고 LA에서 항의 들어오고, 그래서 설교시간 조정하려고 하는데. 신명기 32장에서 죽 보면 “너희들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대신 이방민족이 믿는 신을 믿게 되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간단히 이런 거예요. 유대인은 이방인으로 전환되면서 하나님이 자기가 택한 이스라엘을 자기가 버리면서 비로소 캡슐 안에 들어 있는 진짜 천국 가는 그 요인, 진짜 그 알맹이가 이스라엘이 깨지면서 비로소 보여 진다는 겁니다.
사람이 실패를 해야 진리를 접할 수 있어요. 죄를 지어야 용서를 알듯이. 지금 우리교회 교인들이 문제에요. 죄를 짓지를 않아. 사람이 뭔가 와장창 실패를 해야 진리가 나오는 겁니다. 세상 모든 공장이라든지 법도 그 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요? 우리는 과거에 이 법을 안 세웠기에 이런 오류와 하자가 있었다는 경험들이 가득 들어 있는 법령과 기계들이에요. 모든 기계장치 하나하나가 그 부속품 하나가 없었으면 반드시 실패할 수 없는 요인을 거울삼고 경험삼아서 계속해서 보완하고 개선해서 오늘날 이런 모양의 기계가 된 겁니다.
전두환 법이 왜 생겼습니까? 전두환 생기지 않았으면 전두환 법이 없어요. 좀 있으면 유병언 법이 나올 거예요. 세월호 빠져야 뭔가 거기에 대한 대책이 나온다니까요.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를 대표하는 이스라엘이 보여준 것은 뭐냐, “이러면 못가요. 이러면 천국에 못가요.”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이스라엘은 이방인 되어버리고 그 이스라엘이 이방인 되면서 와르르 쏟아진 진짜 순수, 진짜 이스라엘의 순수함은 하나님의 제사,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누가 대신 죽어야 된다는 그 순수함, 그 순수함이 쏟아져 나왔고 그 순수함이 쏟아져 나온 것이 가만있는 이방인에게 그대로 덮쳐버리면 이제는 이방인이 구원 받은 사람의 대표자가 되어버려요.
왜, 그게 처음부터 이야기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형성법칙이기에. 원리가 그래요. 지금까지 설교한 게 뭐냐 하면, 개인적인 구원은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한 겁니다. 국가단위로 이루어져요, 국가단위로. 출애굽이 개개인을 뽑아낸 것이 아니고 국가 단위로 뽑아낸 겁니다. 왜 국가 단위로 뽑아내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자기가 잘났고 똑똑하다고 해 봐야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람이 상황 속에 있으면 참 견딜 수가 없어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이러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화낼지 모르겠습니다만, 참 심리적으로 많이 시달렸습니다. 분풀이를 저보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오죽했으면 “야, 근호야! 니 나하고 같이 죽자.” 했어요.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런데 거기에 대한 저나 우리 할머니의 대책은 뭐냐, 그냥 마음적으로 복수하는 거지요. 그러니 그 복수라는 것이 진리입니까? 이게 순수한 겁니까?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형성된 거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 상황을 스스로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 상황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상황이 있는 이상은 나는 잘난 존재가 되고 나는 그 상황을 어쩔 수 없이 계속 안고 가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기가 천국이에요. 자기가 진짜 순수한 사람 돼버려요.
이것은 자기를 위한 싸움이고 자기를 위한 복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언급한 신명기 대목이 이런 대목입니다. 로마서 15장 9절에 보면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이 대목이 신명기 32장 42절, 43절에 있는데 43절을 보게 되면,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제가 이야기를 좀 어렵게 하는 것 같은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속죄라는 것이 없으면 구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속죄가 어디서 생겼느냐, “속죄할게. 속죄할게.” 이렇게 생기는 것이 아니고 뭔가 앞서서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하고 전쟁을 벌이는가? 하나님이 자기 복수를 하는 거예요. 우리 복수 말고, 사적인 우리 복수 말고 하나님 나름대로의 복수를 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적이 있는데 그 적에……, 잘 들으셔야 돼요, 하나님의 그 적에 누가 몽땅 빠졌느냐(포함되었느냐) 하면, 소위 하나님 믿는다는 이스라엘이 함께 합류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절대성밖에 몰라요. 자기 지키는 것, 평생 동안 매일같이 착하고 이 중요한 나를 누가 힘들게 해, 라는 식으로 살다보니 우리는 주님이 복수하려는 원수와 같은 한 패가 되어 있고 한 짝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관람자가 아니고 관찰자가 아니에요. 류현진이 야구하는데 관람석에서 “잘 던진다. 6승해라.”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빼내줄 때 구경만 했구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빼줄게.” 그게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수 없는 그 하나님이 싫어하는 그 저주와 심판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 줘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지옥으로 만들어놓고 그 지옥을 지옥 되게 한 그 원인제공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에요. 우리는 사적인 복수, 하루 종일 그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한 놈 다 죽어라, 이것만 생각하거든요. “하나님, 도와주소서.” 이게 뭐냐 하면, 내 복수가 내 힘으로 안 되니까 주께서 나서서 내 복수를 대신 해달라는 그 이야기거든요. 지옥을 만드는데 우리가 지금 한통속이 되어 있어요. 같은 가마솥에 있는 겁니다.
제가 아침마다 수변공원에 운동 가는데 오십견 때문에 기구로 돌리는 것 하거든요. 제가 어릴 때 그 기구 보고는 “세상에 노인들은 죽어야 해. 저것도 운동기구라고 설치해 놨는데 누가 저걸 하겠나?” 했는데 세상에 제가 지금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시원하다, 하면서 돌리고 있는데 돌리면서 제가 생각했어요. 이게 돌아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손을 잡고 기계를 돌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계가 돌아감과 동시에 그 돌아가는데 내 아픈 팔도 같이 참여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구경만 하고 싶어해요.
왜? 나는 중요하니까. 내 몸, 내 인생이 중요하니까. 구경만 하려고 하는데 주께서는 구경만 하지 말고 너는 산 제물이 되어서 들어오라고 하는 거예요. “들어와! 이리 들어와.” 그렇게 불려 들어와서 주님의 심판에, 주님의 전쟁에 내가 나를 적으로 간주해서 하는 전쟁에 우리가 참전해서 내가 나를 치는 전쟁에 같이 참여하는 그것으로 제사 드리는 행위에 동참시킵니다. “내가 너 싫거든.” 그런 뜻입니다. “내가 너 꼴 보기 싫거든. 너 죽이 될래. 묵이 될래.”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한테는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에게는 없어요. 이 근호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 근호에게 없습니다. 없는데 우리는 평생을 통해서 내가 먼저고 그 다음이 남이에요. 도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이고 이걸 누가 가르쳤어요? 이게 주의 원수, 마귀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감사할 것은 뭐냐, 그것을 알게 하는 상황을 유발시켰다는 겁니다. 유발시킨 거예요. 내 복수가 아니고 주님의 복수가 따로 있다는 사실, 주의 복수가 따로 있고 우리는 거기에 참여한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같이 팔이 돌아가듯이 주께서 같이 돌게 하지 아니하면 따로 내 계획을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일에 참여시키니까 내 상황, 내가 생각하는 내 상황, 내 계획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준 겁니다. 요 앞 삼거리에 가게 되면 아침 일곱 시부터 옷 벌겋게 입고 하얀 글자로 1자 새기고 대구 동구 구청장 선거운동원들이 있어요. 아줌마 세분 나와 있는데 다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말이지요.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빨간 옷에 숫자 1자만 보였다는 말이지요.
그 아줌마 전체가 기호 1번이에요. 제가 꼭 선거 운동하는 거 같네요. 바로 주께서 원하는 것은 그거예요. 네가 이방인이냐 그런 것 하지 말고 전체가 기호 1번, 너 자체가 예수의 증인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일어나느냐, 그것은 따로 내 상황이라는 그 앞의 ‘나’를 빼야 돼요. 주님이 주신 상황이 기호 1번, 이제는 내가 할 일은 기호 1번, 그냥 살아가는 자체로서 예수를 증거 하는 것밖에 없어요. 주님의 준비된 그 제사, 피 흘리는 제사, 피 없이는 구원이 없고 그 순수가 없이는 하늘나라에 못가거든요.
그 순수함에 이미 파묻혀 있는 모습, 기호 1번이라는 그 순수함, 예수님의 피, 제사법이 완성된 그 자체, 하나의 결과물로, 내 인생이라는 것은 결과물로 액기스로 차후로 펼쳐지면서 전개되는 그러한 시간이 바로 나의 인생이고 우리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미 거룩한 제물이기에 새삼스럽게 착하고, 그런 짓 하지 말고……, 착하고 고귀하게 살지 마세요. 그냥 있는 그 자체가 “딱이다!” 홍보물에 나오잖아요. 몸 전체를 주께서 이용하시는 겁니다. 선거운동원으로서. 이게 다른 상황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 상황이 딱입니다.
지금 이 상황이 주님 보시기에 천국 가는 진짜 순수가 작용하는 그 상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대표적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대표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원칙이고 원리였는데 그 원리가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도달되어서 참여하게 해 주시니 사나 죽으나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임을 실감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