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강-롬 15장30-33(성령으로 섬기기)1406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5장 30절에서 33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5:30-33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아멘.”
성경을 바라보게 되면 상당히 독단적인 내용들이 많이 나와요. 성경은 마치 성경의 내용들이 전부고 성경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불자나 유교집안의 사람들은 이런 성경이 말하는 독선주의, 독단에 대해서 상당히 기분 상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지 말고 나는 성경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내 몸뚱이 하나 살려보겠다고 버텼던 그 자리로 늘 되돌아가야 돼요.
신앙생활 오래한 것이 자만이고위선이고교만일 가능성이 항상 농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 안다는 것이 신앙을 훼손하고 있고 훼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처음부터 그리고 내가 만약 불교신자라고 여겼을 때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딱 한가지에요. 왜 성경을 꼭 봐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성경이 뭔데? 성경 지가 뭔데, 불경도 있고 다른 고상한 책도 많은데 왜 꼭 성경을 봐야 하느냐, 라는 질문을 매일 본인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해야 돼요. 성경 없어도 잘 먹고 잘 살거든요. 성경 없고 성경 안 봐도 월드컵의 골은 쑥쑥 잘 들어가는 거예요. 성경 없고 성경 안 봐도 이 세상은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고 지금도 중동에서는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말이지요. 석유 쏟아져 나오는 것 하고 성경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성경 모르면 석유시추선이 막힙니까?
우리가 이런 질문을 매일같이 해야 될 이유는 우리가 건성건성으로, 그냥 해온 습관이기 때문에 성경 본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치장, 포장에만 열중한 것이 아닌가를 되돌아봐야 돼요. 성경을 봐야 될 이유는 뭐냐 하면, 살아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쓸 때는 “제발 좀 살아라.” 그 말입니다. 제발 좀 영원히 살아다오, 그러한 부탁으로 하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내가 세상에 빚을 진 사람이다, 제발 좀 죽지 말고 살아라, 그 호소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소리 듣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린 멀쩡해. 우린 잘 살고 있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대적했던 자매가 있었는데 마리아와 마르다에요. 마르다는 예수님께 대접하기 위해서 맛있는 점심을 준비합니다. 지금 오늘도 식사당번들은 여러분의 점심을 맛있게 준비하기 위해서 툭탁툭탁, 예배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잘 먹이려고, 영 육간에 잘 먹이려고. 그런데 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지금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사람이 주님께 대접 잘하고 그 대가로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시는 말씀을 스펀지 물 빨아들이는 것처럼 빨아들이는 이것이 원래부터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했던 상황이라는 겁니다.
주께 돈 들이대고 섬기고, 이것이 주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것을 쫙쫙 빨아들이는 것, 말씀을 빨아들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제발 좀 살아라, 그 말이거든요. 저주받지 말고 살아라. 재물이니 직장에서 쫓겨났느니, 그런 것은 이 세상에서나 통하는 것이고 그것이 전혀 먹히지 않는 세상이 따로 있는 겁니다. 아파트가 몇 평이고 차가 얼마짜리인지 그런 것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곳, 제발 이 양식 먹고 살라는 겁니다. 아모스에 보면 사람이 물이나 양식이 없어 갈함이 아니고 말씀이 없어서 목마르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복음에 빚진자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것을 통해서 얼마나 대단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는 지금 정신없어요. “제발 좀 퍼 먹어라, 인간들아. 나도 너희들처럼 신자가 아니었단다. 나도 너희들 심정 알고 사정도 다 알거든.”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것이 영광인줄 알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고 난 뒤에 전면적으로 그것이, 그걸 거꾸로 산다고 하는데 완전히 도립(倒立)되어 버렸어요. 사람이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도립되어 버리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꾸로 된 인간이라고 얼마나 욕을 얻어먹겠습니까?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 내용처럼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이것이 미친 짓이라는 말이지요. 그 미친 짓을 본인이 하면 안돼요. 본인이 하게 되면 그것도 하나의 교만이라니까요. 그것도 하나의 도 닦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게 되면 해야 돼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일종의 사치입니다. 신경 쓰면 안돼요.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제발 이거 먹고 좀 살아 줘. 인간들아.” 하고 던져 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번 살아볼까, 하고 성경을 보는데 보자마자 탁 막히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살고자 하면 막히게 되어 있어요.
살라고 주는 말씀이라면 납득이 되고 쉽게 누구나 봐도 살 수 있도록, 성경 못 봐서 지옥가지 보기만 하면 다 천당 가도록 조치 할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막상 살라고 준 성경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턱턱 막혀서 계속 볼까말까, 볼까말까, 이것은 우쭐대게 만들고 갈등 일으키게 만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아까 예배 시작할 때 주기도문 했지요. 거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사 마리아에게 태어나게 했다고 할 때 그 앞에 뭐가 붙어요.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에게 나시고, 여기서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낯선 단어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3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 다음에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의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성령이 우리를 가로막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만약에 과일을 먹는데 여기 바나나가 있고 수박이 있고 참외가 있다. 나는 사람이고 과일은 물체고 과일을 먹고 싶을 때는 그 물체를 손으로 쥐고 입으로 가져가고 삼키면 끝. 마찬가지로 구원 받으라고 하면 구원을 받으면 되고 착하게 살라고 하면 착하게 살면 돼요. 구원받으라, 착하게 살라, 하는 그 자체는 우리가 시행하면 그게 되는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앞에 성령이라는 분이 오게 되면 행동하는 나 따로 있고 성령이라는 분이 하시는 행동이 따로 있어요.
따라서 어떤 물건을 쥘 때는 그냥 쥐면 되는데 어떤 어르신네, 할아버지, 아저씨한테 이야기할 때는 행동 주체가 둘이 등장해서 내가 저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되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결정되는 거예요. 우리는 나만 있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일체 없기를 원합니다. 나만 있고 다른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내가 하는 행동으로 내가 살면 그게 제일 편하고 납득이 되고 아주 수월해요. 교회 오라고 하면 오면 되고 십일조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예배 참석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굉장히 쉬운데 성령님이 딱 앞장 서 있으면 ‘저분을 어떻게 상대하지?’ 새롭게 상대해야 할 숙제가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겁니다.
매일 우리가 하는 행동이 성령님이 하시는 행동, 행위의 주체가 둘이라고 했지요? 나 말고 살아 있는 성령님, 그래서 행동이 일치되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만 성령께서 언급하기를 “네가 너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모든 짓거리가 성령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너를 살리는 짓이 아니고 너를 죽이는 짓거리고 너를 망하게 하는 짓거리”라고 소개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뜻을 능가하고 극복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는 거예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우리의 육신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아니라면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고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갈 자가 없다는 하나님의 하늘나라 구원의 원칙에 준해서 우리는 탈락입니다. 성경을 보라고 하는 이유는 네가 탈락자인 것을 확인하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처음 소개받기를 성경 보게 되면 영생 얻는다는 식으로 소개받고 교회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진리대로 알게 되면, 그야말로 성령이 와서 알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되고 영생 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안 되는 자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딜 넘보느냐는 말이지요. 주께서 추방시킨 자를 내가 다시 받을 성 싶으냐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추방시킬 때 추방시킨 취지가 있잖아요. 그 취지를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뭣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인간을 뭣 때문에 생명나무가 있는데서 추방시켰습니까?
그 추방된 취지를 여러분이 아십니까? 몰라도 된다고요? 그걸 왜 몰라도 돼요? 그것도 모르고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고요? 그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에요. 집나간 오빠 이제껏 뭐하다 왔는지, 이제 들어오라고 할 때 ……, CF에 보면 그런 게 나와요. 한 달에 만원씩 적립해 준다고 집 나가서 돌아온 오빠보고 들어오라는 내용인데 집 나간 오빠가 돌아올 때 그냥 받아주게 되면 처음에 나가라고 했던 취지가 있으나 마나 한 이야기, 괜히 한 소리가 되어버려요.
따라서 집 나간 오빠를 다시 집에 들이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무슨 이유로, 왜, 무엇 때문에 추방했는지에 대한 그 취지를 집나갔다 들어오는 그 오빠가 알아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어디를 들어옵니까?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도 구원 받을 자격이 안 된다. 그리고 구원받고 싶어 하는 그 조차 하나님보시기에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섬기고, 성령님의 사랑과 봉사를 할 때 성경에서 성령님의 사랑과 봉사를 언급한다는 것은 네가 현재 육신이며 하나님 섬기는 그 봉사와 뜻이 이미 네 나름대로 형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리아가 성령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태어나게 한 것은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지 그 외에는 육신이라는 뜻입니다. 또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육신적인 한계 내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거예요. 우린 방금 제가 이야기한 사도바울의 사도되기 전의 이 행동을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왜냐, 사도가 사도되기 이전에 그 사람도 육신이었고 우리도 육신이었어요.
우리가 육신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육신이 아니라고 여러분들이 주장을 하려면 사도바울이 겪었던 자신의 위치를 우리도 공유해야 돼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했다면 우리도 우리 속에 같이 그것을 고백을 해줘야 성령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 한마디 주문처럼 내뱉었다고 해서 봐주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우리로 알도록, 성령께서 죄인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경험케 하시는 겁니다.
이제 정리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뭐냐 하면, 육신인 자를 영생을 주시기는 주시는데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네 육신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혹독하게 체험하고 절감하도록 하는 그 작업을 성령 쪽에서 개시를 하는 거예요. 성령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 그냥 낚싯대 하나 들고 와서 사람을 낚싯대로 구원했습니까? 아니지요.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님께서 갔던 그 길은 원래 예수님의 길이 아니고 누구 길이냐 하면, 죄인이 가야 될 그 길이었습니다. 죄인이 가야 될 그 길을 예수님이, 죄없으신 분이 일부러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그 길을 가는 겁니다.
그 길의 마지막 막장이 뭐냐,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자리에요. 왜 그 자리를 가셔야 되는 겁니까? 예수님이 하는 그 모든 체험과 경험이 바로 구원받아야 될 우리가 같이 경험하고 같이 체험해야 될 그 자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죄인인가, 그 문제가 생기지요. 우리가 육신인데 육신자체가 왜 죄인이 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야 되겠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서 공생애를 죽 가다 보니까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하나님 잘 섬기고, 경배하고, 하나님밖에 모르고, 말씀밖에 모르는,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한, 최고의 거룩한 사람들이 포진되어 있는 거리, 바리새인의 거리 속에 주님께서 뛰어들어 걸으시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겼던 그들이 악마의 앞잡이로 돌변하는 현상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 없었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현상이에요. 예수님이 일부러 갔으니까 그들이 본색이 그야말로 감출길이 없어서 발작을 일으키면서 예수님께 달려들었습니다. 이걸 우리가 몰라야 됩니까? 방금 그 이야기를 하니까 이것은 우리 구원과 관계없는 이야기고 이것은 남의 이야기인데 왜 남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가, 지금 이렇게 나오실 거예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고난을 우리가 지금 당해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우리는 그 고난을 당할 자격도 안돼요. 우리는 애초부터 육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당하는 고난을 겪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공격하는 그 편에 서서 합세하면서 주님을 대적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시는 동안 나타난 현상은 그겁니다.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평가할 때 자기들이 재판관이 되어서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다. 유죄하다.” 예수님은 죄가 있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온 천하에 공표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 부활의 의미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죄 있다고 여겼던 그 판사들을 죄 있다고 여긴 그 죄수가 도리어 판사가 되어서 자기에게 죄 있다고 판결한 그 판사들을 향하여 도리어 그들을 피고로 삼고 예수님이 판사가 되어서 판정을 내리는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도는 그 십자가 사건 안에서만 구원돼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여기서 경험해야 됩니까? 예수님이 당했고 지금 우리가 겪을 수 없는 일을 겪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직장생활을 어떻게 하고 농사를 어떻게 짓고 애를 어떻게 잘 가르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낯선, 경험할 필요도 없는 경험을 우리가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판결을 한다면 판결하는 그 대상 속에 누가 섞여 있느냐 하면, 내가 섞여 있어요, 내가. 우리 자신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했거든요.
전에 내가 나를 반성하는 것은 잘하려고 반성을 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나를 재판하는 것은 너 같은 죄인이 또 있을까, 라고 판결하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반복되는 행동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죄인 중에 괴수가 바로 나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그 말씀이 어디 있느냐, 디모데전서 1장에 나와요. 그러면 이렇게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복잡한 것 다 치우고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달려가는데 성도의 희망이 뭐냐? “그 달려가는 거기에 저도 같이 끼워주세요. 저 자신도 모든 말씀이 십자가 사건으로 다 이루었다, 완성되는 그 사건에 쫓아갈 때 같이 섞여서 그 쪽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돼야 되는 거예요.
우리 힘으로 안 되지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구원될 자격도 없고 구원도 안 되는 너를 예수님의 말씀 성취의 혜택으로서, 그 효과로서 너는 지금 구원이 된 상태이다. 너 같은 인간을 구원되게 하는 그 원래 중심을 보도록 하는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작용하시는 겁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 될 수 없는 우리를 구원시켜주는 그 힘이 나오는 원천 쪽으로 다가서도록, 그쪽으로 쏠리도록 날마다 우리를 그쪽으로 가는 경험들을 우리 인생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죄인으로 당해야 될 것을 미리 다 당하고 겪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내가 망한다는 것, 내가 진짜 망한다는 것을 내 힘으로 조성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진짜 내가 홀딱 망한다는 것이 어떤 지경에 놓인다는 것을 내 힘이 아니고 사랑의 힘, 성령의 사랑의 힘으로 나를 홀딱 망하게 하는 거예요. 지금까지의 모든 설교가 30절에 나오는 성령의 사랑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사랑입니다. 나를 망하게 하는 것, 내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후로 가졌던 그것마저 나중에 보니까 날라 가버렸어요. 더 이상 내가 잘났다고 할 수 있는 일체의 모든 것도 다 빨간딱지 붙여서 홀라당 다 가져가 버렸어요. 나 잘났다고 할 만한 것은 다 가져가 버렸어요.
내가 잘났다고 할 수 있는 그 바탕과 근거자체가 다 날라 가버렸어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대로 “너는 육신이야.” 하는 그 육신의 의미를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체험하는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육신의 힘으로 성경을 나에게 일치시키려고 애를 써봤자 성경과 일치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성경 지킨 잘난 사람이 되어버려요. 이것은 죄인이 아니고 점점 더 거룩한 사람 돼버립니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는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말씀만 해도 괜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뭐하려고 십자가는 지십니까? 소용없는 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죄, 우리 힘으로 어떤 고난을 주고 어떤 학대를 해도 그것조차도 내가 잘난 재료가 되고 근거가 되거든요. 진짜 이 이야기는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아무리 밥 굶어가며 금식하고 모든 돈을 교회에 다 털어서 바치고 거지로 살아도 그 자체가 잊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자체가 나의 새로운 쾌감, 나의 새로운 방식의 영적쾌락이 되고 그것은 나의 오만을 유발해서 나는 잘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나 이런 존재야.’ 이렇게 된다니까요? “굶어봤어? 금식해 봤어?” 이렇게 돼요. “모든 재산을 예배당 짓는데 다 바쳐봤어?” 이렇게 된다니까요.
우리의 희망은 이겁니다. 볼 수 없는 십자가, 갈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인데 현재 모든 말씀이 그쪽으로 돌진하고 있으니까 그 돌진하는데 끼워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모든 행동이,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모든 죄에 해당됨을 내가 알고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아주 기쁨으로 고백하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성령의 봉사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그 성령의 봉사에 사도가 왜 필요한가?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라고 해서 사도가 성령과 우리 사이에 끼어듭니다. 사도가 왜 끼어드는가? 원래 모든 영생, 구원은 이스라엘이 독점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그렇게 했어요. “이 거룩한 백성인 너희들만 구원받고 나머지 이방나라는 저주받는다.” 축복과 저주는 언약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결정되거든요. 아까 장로님기도한대로 방주라는 언약이 있으면 구원이고 방주가 없으면 잘난체 해도 다 저주받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체에 있던 영생을 이방인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생을 이방인에게 나누어주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참 신기해요. 통통 튀는 거예요. 이쪽에서 튀는데 이쪽에서 튕겨 나온 그것이 이쪽으로 가는 겁니다. 아들에게 준 떡이 아들이 먹다가 흘려서 부스러기가 주르륵 흘려 내리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 있던 개가 와서 아들이 먹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을 때 그 떡이 영생으로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게 개가 어디서?” 하면, “저 개 맞거든요.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주워 먹으면 삽니다.”라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고백했습니다. “세상에 이만한 믿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정말 대단한 믿음이다.” “아 엠 어 개” 나 자신이 개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존재를 전제로 할 때만 비로소 나타나는 거예요. 우린 이스라엘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왜 받은 구원을 놓쳤는가, 왜 감당 못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혈육중심이었고 혈통중심, 가족중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식을 낳고 키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동물적이라고 본 거예요. 영적이 아니라고 본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이스라엘은 자식 키우고 말씀 가르치고 말씀으로 키워서 그들은 혈통적 뭉치, 혈통적 집단으로서 그들은 구원을 받는 집단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 낳고 키우는 것, 개나 소나 다 합니다. 이 말은 개 같은 이방인들도 그렇게 한다는 말이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치고 동물 아닌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고 예수고 성령이고 간에 자기새끼밖에 모른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 그것은 치장이고 인테리어에요, 그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 자식은 배에 빠지면 안돼요. 내 자식은 살려내야 돼요. 여기서 자식을 이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내 자식밖에 모르는 그 가족중심의 세계가 영생을 감당 못한다는 겁니다. 그게 육신의 표를 팍팍 낸다는 거예요. 따라서 사도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서 무관한, 전혀 상관없는, 모르는 사람끼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운 거예요.
이방인의 사도는 아무 연고도 없고 아는 사이도 아니에요. 장로님하고 나하고 무슨 사이에요? 돈거래가 있습니까? 우리 사이 아무 사이 아닙니다. 유 집사님과 그 옆에 계신 어머니하고 붙어 있어도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다른 교회와 달리 우리교회 특징이 있어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가도 별 신경 쓰는 사람 없고 와도 그저 그렇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십 육년 다녀도 우정, 안 생겨요. 사랑 없다고 소문났습니다. 이 소문 어떻게 하려고요? 사랑 있는 줄 알고 기대 잔뜩 하고 왔는데.
아무 사이도 아닌데. 차라리 내가 죽지 자식은 살리겠다는 이 끊어질 수 없는 사이보다 더 단단한 관계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겁니다. 미치겠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요? 진짜 대책이 없어요. 진짜 내 새끼보다 남의 새끼가 더 좋다는 이것은 말을 꺼낸 제가 잘못이에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거든요. 이 작업은 사람이 못합니다. 교회가 감당 못하고요.
그래서 성령의 공동체라는 것은 속임수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관계를 이어주기 위해서 지금도 미사 드리는 중에 살과 떡 하면서 성만찬 하지요. 그것으로 해서 맺어질 사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공동체를 위장한 속임수에요. 인간의 정치적 집단입니다. 그것은 구원파에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평화, 사랑이나 구원, 그 모든 개념 속에 뭐가 밑에 깔려 있느냐 하면 내 새끼, 내 식구, 내 가족만 살겠다는 것이 깔려 있어요. 이게 육신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 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너희들이 말하는 추상적인 사랑, 구원, 그것을 주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온 것은 화평이 아니고 검을 주로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 추상적인 보편성은 사랑이에요. 그러나 그 추상적인 보편성이 구체화 될 때는 검입니다. 그 검이 뭐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을 감당을 못하는 이유가 혈통중심, 혈족중심, 내 자식중심이고 식구 중심이고 그게 나 중심이에요. 이게 육신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이것은 감출수가 없어요. 모든 행동이 그런 쪽으로 나가게 되어 있어요. 응축 알지요? 단단해 지는 것, 뭐든지 자기한테 응축이 되어 있어요. 일본하고 코트디부아르하고 축구 하는데 일본 편드는 사람 없을 거예요. 일본 져라, 일본 져라. 왜, 우리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그런데 한국사람 쪼개보면 경상도는 경상도 사람끼리, 전라도는 전라도 사람끼리, 충청도는 충청도 사람끼리. 그럼 경상도 사람끼리는 한패인가요? 아니요. 대구 사람 중심, 그러면 거기서 그만인가요? 아니에요. 거기서 결국은 우리 동네. 우리 동네는 다 한편입니까? 내 식구, 내 몸에서 태어난 우리 자식, 그것뿐입니다. 자식이 애먹인다? 자식도 귀찮다? 결국 뭐냐, 남는 것은 내 몸뚱이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수정될 수 없는, 개선의 여지가 없는 죄인 중에 괴수의 본색을 말씀과 일치되도록 “똑바로 성경 봐. 네 이야기야.”라고 지적해 줍니다.
그 순간 우리는 성령으로 봉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까 들었던 이야기 또 잊었을까 다시 합니다. 성령의 봉사란 뭐냐 하면, 자기를 더 이상 생각 못하고 오직 말씀에 싸여서 말씀이 집중되는 그 자리에 저도 끼어서 같이 집중되게 해 달라는 그 작업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기능이에요. 전도요? 선교요? 헌금이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행위를 하게 하셔서, 전도와 헌금을 하게 하셔서 그 속에서 나를 돌아보지 않고 나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나는 죄인이니 나의 가치가 없음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기회로서 헌금과 전도가 있는 것이지 그 속에서 정작 우리가 내 힘대로 발견하지 못하는데 진짜 발견하는 것, ‘나는 이미 구원받았구나.’ 하는 사실, ‘성령에 의해서 나는 이미 거듭났구나.’ 하는 사실을 내가 망가지면서 확인하게 하시는 그 작업은 성령이 하시는 작업이에요. 다른 사람은 하지를 못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검, 불화라는 겁니다. 불화인데 그런데 가족끼리의 불화가 끝이 아니에요. 결국은 나와 나의 불화로 마감돼야 돼요. 내가 싫고 내가 미워져야 돼요. 내가 싫고 내가 미워지는 순간만 나의 의와 나의 가치를 챙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어느새 어디 갔지, 없다는 말이지요.
어떤 의사가 환자보고 이야기합니다. “환자분! 슬픈 소식이 있고 기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말씀드릴까요?” 환자 내심 끝이 기뻐야 하니까 슬픈 소식 먼저 듣고 그 다음에 기쁜 소식 전해 달라고 했거든요. 의사가 슬픈 얼굴로 “죄송합니다만 치매입니다.” 환자가 ‘드디어 내가 치매로 죽는구나.’ “그러면 기쁜 소식은 뭐요?” 하니까 “치매이기 때문에 치매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공동체에 주신 것은 뭐냐 하면, 날마다 그 잊어버린 것을, “이제 우리는 성령의 공동체, 우린 이제 거듭났단다. 목사님 말씀 들어보니 구원 받았대.” 하는 이 기쁜 소식 안에 우리가 잊어버리기를 원했던 그 십자가 이야기를 날마다 되새겨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가져올 수 있는 나의 본분을 따로 만들지 마세요. 만들어버리면 구원받은 내가 나의 우상이 되어버리고 나는 충분히 주님을 이용해 먹는데 성공한 대단한 사람 되고 예수님보다 위대한 사람 돼버려요. 십자가까지 이용했으니 얼마나 난 놈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육체인 것을 아시고 그 본분을 날마다 허물어뜨리는 사태와 사건을 유발시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존재로 우리를 다시 한 번 늘 세우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시편 144편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사람이,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십니까, 라고 했어요. 이 대목만 읽어버리면 ‘아,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했구나.’라고 오해하기 딱 맞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5절까지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구약에서의 강림이 두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합쳐서 강림이라 해요.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하소서 번개를 번득이사 대적을 흩으시며 주의 살을 발하사 저희를 파하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사람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십니까?” 할 때는 마치 나 하나 구원하려고 주께서 희생한 것처럼 느껴졌지요. 하지만 그 뒤에 말씀 보니까 너는 전리품이고 진짜 내가 노리는 것은 주님의 대적,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주님의 대적을 주님이 치시는 그 여파와 효과를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 채로 누리고 공짜로 값없이 그 승리의 열매에 참여하는 식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주여, 제가 무엇이관대, 제가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다가 내가 지금 뭐라고 구시렁거리지?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주님께서는 나에게 신경 뚝, 지금 다른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의 싸움은 나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습니다. 주는 마귀와 싸우십니다. 그 마귀와 싸워서 승리한 그 효과를 보는데 그 여파가 우리한테 도달된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이걸(판)로 예를 들겠습니다. 이 판 위의 A라는 지점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 가족밖에 모르기 때문에 제일 1순위가 내가족의 생존이에요. 돈이 있어야 사니까, 밥먹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러면 내 행동이 여기서부터 파급이 돼요. 여기서부터 진동이 된다 이 말이지요. 진동이 되어서 어떻게 유력한 사람 만나서 어떻게 잘해서 살아보겠다고 나오는 겁니다.
안산의 유족들 있잖아요. 거기에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와서 대성통곡을 하는 거예요. 유족들 중에 한 사람이 와서 “혹시 세월호 유족이십니까?” 하니까 “아닙니다.” “아닌데 왜 여기 와서 이렇게 웁니까?” “당신들이 술 먹고 있으니까 내가 당신들 대신 내가 울잖아.”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이 우울증 걸린 사람이었답니다. 우울증 걸린 선지자?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르니까 자기행동에서 출발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이 밑바닥 저 밑에서 예수님께서 파장을 일으켰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파장을 일으켜서 그 파장의 진동이 우리한테 임해서 도달되는 것을 모르고 우리는 내 행동이 나를 결정한다고 자꾸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경을 왜 주는가 하면, 네 행동으로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네 행동이 어떤 행동이든 그것은 죄일 뿐이고 사실은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 행위로 말미암아 이런 행위를 하는 너를 살려냈다는 그 전체를 보게 하는 눈을 열게 하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안목이에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것을 늘 되새기게 하고 내 행동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는 그 열매로서, 참새가 키움을 받듯이 내가 밥 먹고 살게 된 거예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주어진 것이 우리를 주님께서 말씀 속에 집어넣기 위한 하나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파급이 된 거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범사에 있어서 주님께 감사하게 하는 이것이 성령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자기 행동으로 세상을 만들어버렸을 때는 욥이 했던 그 태도를 보일 수가 있어요. 욥이 자기 행동 중심으로 했던 그 세상 관에서 갑자기 고난이 왔을 때 욥은 굉장히 당황했어요. “나는 착하고 지금 내가 받은 복은 착해서 받은 복인데 내가 왜 고난 받아야 됩니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중심이 아니고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내 맘대로 고난 준다는데 대해서 네가 왜 말이 많나?” 이게 성경의 욥기입니다. 여러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지요? 하지만 잊어버릴 이야기를 또 해야 되겠어요.
이사야 11장 6절에서 7절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자와 이리 그리고 양들이 함께 있는 평화, 이 얼마나 좋은 평화입니다.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이 천국의 모습, 이런 평화의 모습을 보게 되면 내가 거기에 들어갈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우리가 없습니다.
이걸 아셔야 돼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평화에 우리가 거기에 없어요. 그 자리에 누가 가시는가? 그 자리에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리와 양은 사이좋게 노는 거예요. 우리를 매개로 해서 이리와 양이 사이가 좋은 게 아니고 예수님이 중간에 계셔서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이리와 양은 사이좋게 있는 겁니다. 우리가 들어갈 수가 없어요. 들어갈 자격도 안 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들어갈 수 없는, 예수님만 있는 그 평화의 자리에 우리를 집어넣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우리가 사는 그 길 따라 왔고 그 길을 쪼갰고 그 속에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악마를 느끼고, 우리의 죄를 느끼고, 그 죄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우리는 육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고, 우리는 말씀대로 육신임을 느끼고, 그런데 말씀대로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사람만 의인이 되고 영생 얻는다는 것을 느끼고, 그래서 우리전체가 성경전체임을 느끼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숨 쉬는 것이 내가 내 자식 벌어 먹인다고 애써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을 느끼고, 느낌 아니까! 이게 성령이에요.
사도바울은 지금 이방인의 사도로 일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지금 사도 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사도 일을 도와주라고 성령으로부터 부추김을 받았고 사도 당신 좋으라고 준 돈이 아니고 주께서 사도 당신 도와주라고 했기 때문에 줬는데, 나는 낼 맘이 없었는데 성령께서 내게 하셨고 나는 내는 매개체에 불과하고, 그걸 내면서 아깝고, 아까우면서 우리는 죄인인 것을 깨달으면서 느끼고,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랑할 데가 뭐가 있겠습니까? 십자가 앞에서도 행운을 요구하고 기도하는 한심스런 우리 육신의 죄악 된 모습, 그러면서도 주님을 향하여 자신의 행운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 반복되는 우리의 미련함을 다시 말씀을 통해서 그런 인간조차 용서 받고 영생 얻을 수 있다는 십자가의 능력만 저희들에게 총괄적으로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