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90강-교회의 일군(롬16:1-2)이근호140622

아빠와 함께 2014. 6. 24. 19:59

2014-06-22 12:46:24 조회 : 336         
   교회의 일군 140622 이름 : 이근호   

교회의 일군(로마서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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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6-22 13:35 
교회의 일군

2014년 6월 22일                             본문 말씀: 로마서 16:1-2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16: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항구 도시입니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서 승선했으며(행 18:18),, 또 제3차 전도 때에도 여기서 승선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동족 유대인들의 살인 음모 때문에 육로로 바꾸어 마케도냐를 통과한 적이 있었습니다.(행 20:3)

따라서 제 2차 전도 때 이 교회가 세워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바울은 제 2차 전도 때 고린도에 도착하여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더불어 거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는데(행 18:1-18) 바로 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복음이 그 주변 여러 도시로 전파되었고 그 결과 세워진 교회 가운데 하나가 겐그레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여자 집사인 뵈뵈를 본 편지의 전달로 삼은 것은 그녀가 마침 겐그레아에서 로마로 가는 도중 그 당시 바울이 머물면서 본 서신을 기록한 고린도 들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교회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 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교회는 없다’를 정답으로 해야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성령님이 오시기 되어 있는데 이 때 생겨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매사를 ‘마지막’으로 몰고 가야될 이유는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마지막’이라고 하면 그냥 마냥 기다리면 되는 것으로 아는데, 하나님께서 ‘마지막’이라고 쓰시는 이유는, 문제거리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는 단체들이 많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왜 ‘마지막’이 되도록 제촉하는 이유들이 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소용없고 가짜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 교회에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이후 인간들은 저주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고생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천국 염원으로 이어집니다. 살아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낙을 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꿈이 되고 힘든 세상생활을 견뎌내는 동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개입으로 그런 시도가 거짓됨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

예수님은 자신을 향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 길과 생명과 진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개입이 곧 ‘마지막’ 때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 곧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원인에 대해서 인간은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성도는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닙니다. 그동안, 즉 ‘마지막’ 때가 아닌 시절에서는 인간들이 세상 만사의 원인을 자신들이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확보해서 뭘하게요? 자신들이 원한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원인만 확보하면 결과는 마음대로 조절이나 조정이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즉 예수님의 개입 없이 그들은 자신만의 완전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개입으로 생겨난 변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차이는, 뚜렷한 경계선으로 영원한 구분지어집니다. 인간 나라에서는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는데 별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만 개입하면 세상나라와는 다른 성질을 보여줍니다. 그 성질이 곧 ‘이미 결과물’로서 작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라면 끓일 때 사용하는 냄비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냄비 뚜껑에 꼭지가 달려 있습니다. 이 꼭지가 닳아버리면 헐거워져 떨어져나갑니다.

그러면 밑에 끓고 있는 수증기는 그대로 공중에 노출되고 김 다 샙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저주가 들끓는 세상에서 이 저주를 덮을 뚜껑 꼭지같은 지점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존재케 하십니다. 그 꼭지가 달린 그 지점 밑에서 이 땅을 덮치고도 남는 저주성이 들끓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거해야 하기 위해 나타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저주성은 성도 본인 밑에서 사라지지 않고 날마다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됩니다. 즉 스스로가 풍선처럼 온갖 세상 일을 감당하면서 괜찮은 존재로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는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저주성과 심판성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세상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주어지는 것을 자기라는 이름의 풍선을 불고서는 그 안에서 저장해두지만 언젠가는 폭발하고 맙니다. 풍선조차 갈기갈기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모릅니다. 지켜보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공을 기우려도 마지막 때를, 마지막 때 답게 규명하려는 하나님의 작업 앞에서 그 봉합선이 다 터져버립니다.

즉 제발 마지막 때임을 보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때임을 유도하고 부축이신 분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알고자 하는 원인을 일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약속 자체가 원인임을 보여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뵈뵈를 흉내내서나 모방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원인에 의해서 그녀로 하여금 그런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는 원인 찾기가 소용없어지는 때입니다. 소나기를 품은 먹구름을 우리가 피할 수 없듯이 저주를 품고 실시되는 ‘마지막’ 때의 현상을 우리 인간들이 지연시키거나 보류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의-죄’의 관계로 맺어집니다. 결코 실적과 실적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교조차도 타락이요 예배 자체도 타락입니다. 전적으로 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의 관계망으로 조사받는 세상에서의 구원이란 곧 ‘하나님의 의’의 등장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의 한 의’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율법 행위로 찾아가거나 접속이 가능한 그런 의가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그 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기 위한 결과적 현상들입니다. 따라서 뵈뵈를 흉내내거나 모방하지 마세요. 성도는 각자 나름대로 그 자리가 곧 하늘의 선교가 진행중인 현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풍선 속에 세상적인 퇴적물이나 쓰레기들이 적채되지 않기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6-23 22:42 
90강-롬 16장1-2(교회의 일군)1406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6장 1절에서 2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6:1-2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요. 겐그레아 교회. 교회라는 것은 마지막 때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야 나타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야 나타나는 것이 교회라는 말은 사람들이 만든 역사 속에는 교회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못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야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든요.



마지막 때가 되기 이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무리가 있어요. 사람들의 사회가 있고.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의 무리, 그 모임, 거기서는 교회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돈 내서 간판 걸고 대한예수교 장로교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교회라 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되어서 하나님 쪽에서 뭔가 추가적인 요소를 가미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인데요.



그래서 교회를 성령의 공동체라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서 성령이 와야 돼요.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을 보세요. 마지막 때가 안 오면 성령이 안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우리가 마지막 때라고 우리가 자부하고 믿어야 되는가? 그것도 인간들의 하나의 책략에 불과하기에 인정하지 않아요. 교회라는 것을 세우고 싶어서, 만들고 싶어서, “그래, 우리끼리 마지막 때라고 하자.” 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마지막 때에는 성령이 와요.



요엘서에 나옵니다. “마지막 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올 것이고 그들은 성령이 임해야 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시나리오거든요. 사람이 작성한 게 아닙니다. 사람이 소설 쓰듯이 할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사람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제가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사람으로는.



마지막 때라는 것은 성령이 왔을 때 같이 수행해서 알려주는 정보가 마지막 때라는 정보입니다. 마지막 때 되면 성령이 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는 그 동시에 벌써 마지막 때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마지막 때가 되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되돌아 봐야 돼요. 도대체 이 세상은 인간들이 어떤 작당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만들어서 작살을 내려고 하는가? 그것을 아셔야 되고 두 번째, 그 마지막 때까지 인간들은 무슨 짓을 했는가? 그것도 알아야 돼요. 합쳐버리면, 무슨 짓을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규명해야 돼요.



방금 이야기한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게 되면,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나라와 인간이 있는 이 세상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는 겁니다. 그 차이점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는데요, 이 말은 예수님이 관여하지 않으면 차이점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차이점이 없다는 말이고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 상황속에도 인간은 얼마든지 천국과 극락을 조작해 낼 수가 있다는 그 말입니다.



조작해 낼 수가 있다는 말은 사람들의 종교라 하는 것이 예수님이 와서야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이전에 이미 인간은 종교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는 게 괴로워요. 괴로운 것은 이 인생으로 끝장내고 죽어서는 편히 살고 싶다는 이 희망, 이 소망은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강렬해지기 마련입니다.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맨션아파트로 간다, 하나님께서 마련한 아파트가 있을 것이고 그 아파트에 들어간다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만든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개입함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그걸 만들고 있어요. 불교든 뭐든 이 세상의 민족종교가 다 그래요.



제천의식이라는 것이 뭡니까? 신을 달래고 신에게 뇌물을 줘서 나의 소망을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그것이 종교라는 것이잖아요. 마지막 때 이전에 이미 종교라는 것이 있었고 그 종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 한 나라가 단합을 했습니다. 그런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계시, 율법이라 하지요,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가지고 종교를 만들어서 자기들만은 특별한 민족으로 취급당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백성이 된다고 했던 민족이 유대민족이에요.



제가 지금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 개입 이전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개입하기 이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들은 단결했던 겁니다. 특히 유대인 가운데 바리새인이 있는데 바리새인의 구호, 모토가 있는데 그것은 말씀의 생활화입니다. 말씀은 지식이 아니고 실천해야 되고 생활화하자는 겁니다.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그걸 바리새인들이 한 거예요.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성전, 곧 교회 중심으로 살자는 것이 사두개인입니다. 다시 한 번 해 드리겠습니다. 사나 죽으나 성도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된다, 사두개인. 사람은 교회 중심이라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말씀은 지키라고 줬기 때문에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바리새인.



이 이종세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합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룩은 다 끄집어냈어요.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거룩은 다 끄집어 냈습니다. 거룩입니다. 방금 제가 거룩이라는 말을 썼고 경건도 같은 말로 취급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오셔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늘나라는 너희들의 하늘나라와 다르다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와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나름대로 구성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만나는 그 순간 산 밑에서는 꾸물대거나 조용히 모세를 기다린 것이 아니에요. 기다리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여호와 중심으로 단합대회를 했습니다. 여호와 중심으로 단합대회를 해서 거기서 나름대로의 종교를 만들었는데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이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요새 말로 하면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만들었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회를 만들었는데 그게 우상일 줄이야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못했지요. 예수님이 개입한 장소가 빈 공간이 아니고 어떤 진공상태에 오신 것이 아니에요. 뭔가 오시기 전에 인간세상은 꼭 장터 같아요. 나름대로 굉장히 분주하고 합리적이고 종교적으로 철저합니다. 그냥 빈공간이 아니에요.



이미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모든 건전한 방도와 방책은 전부다 구사하고 그것을 체계화 시킨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할 도리를 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선교가 타락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선교하는 것이 타락이에요. 유대인들이 실시를 한 겁니다. 바다 건너 한 사람까지 건지겠다는 선교시스템이 그들에게서 나왔던 거예요. 전도가 타락행위라는 것을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교회서 자금 모으는 것이 타락이고 그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몰랐을 거예요. 헌금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성경공부도 마찬가지고.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성령은 마지막 때에 옵니다. 마지막 때에 성령이 온다 할 때는 그 전에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살펴야 돼요.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본인들이 스스로 마지막 때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본인도 마지막 때에 휩쓸린다는 사실, 본인도 마지막에 집어넣어서 마지막에 당해야 될 존재라는 것을 수용을 못한 그러한 역사가 있었던 겁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면 우리 빼놓고 나머지는 멸망 받는다, 우리만 구원된다는 거잖아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택한 민족이고 다른 민족은 개 같은 민족이라고 한 겁니다.



저 개 같은 인간들, 하나님이 내놓은 자식들을 거두어들일 줄은 상상도 못한 거지요.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사도바울과 열두 사도가 만났을 때 의견충돌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베드로가 오해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베드로사도를 면책준 거예요. 구박을 한 겁니다. “형님, 생각 똑바로 하세요.” 이렇게 면박 준거예요.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역사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관성이 있다는 거예요. 들어보면 맞는 이야기에요.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이방인들을 구원할리는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생각하기를, 율법을 줬으니까,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율법을 줬으니까 율법에 의해서 남겨진 효과, 이스라엘 나라의 창조, 이스라엘나라가 만들어 진 겁니다. 따라서 율법이 선하고 율법이 선하기에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스라엘도 선하다고 본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제키고, 이스라엘이 구원 안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이스라엘 먼저 구원받고 여분의 자리가 있으면 이방인 구원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어디서 문제가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원인은 따로 감추어놓고 결과를 가지고 이 땅에 현실화시키고 구체화시킨 겁니다. 이미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은 지금 결과입니다. 이 결과에 대해서 원인을 찾는데 결과는 원인을 찾아갈 능력이 없어요. 아까 장로님 기도 가운데 알지 못한다는 말을 했거든요.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우리는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한 거예요. 길이 없다는 말이에요. 길이 없고 생명이 없고 진리가 없어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길이요, 생명이고, 내가 진리라고 하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확보 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는 말이 “너희는 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진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는 겁니다. 길을 만들지 못하고 생명을 만들지 못하고 진리를 만들지 못하면 “아 그게 없네.”라고 하지 말고 그 원인을 자기 쪽에서 찾아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없으면 주세요. 알려주세요.”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자기 자신에게 어떤 문제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길이 없어요? 알려주시면 되겠네요. 우리가 생명이 없어요? 주시면 되겠네요. 진리가 없어요? 가져다주시면 되겠네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없는 이유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게 마땅히 없어야 되는데 우리는 마땅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은 죽어도 나는 마땅히 천국 가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생각 자체가 오류고 이게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것 때문에 종교가 만들어졌거든요. 기독교가 만들어지고 교회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스스로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 그런 생각이 우리한테는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섯 살 먹은 애가 태권도 도장에서 관장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애가 집에서 선행학습을 한 모양이에요. 코끼리 수명, 거북이 수명, 이렇게 수명이야기를 죽 하다가 그 애가 자기 문제에 도달했습니다. “관장님, 사람의 수명이 얼마인가요?”라고 물으니까 관장님은 딴에 길게 잡은 거예요. “백년쯤 된다.” 한 겁니다. 관장님이 잘못한 것은 없지요. 그 소리를 듣고는 애가 왕, 하고 울어버린 거예요. 백년 살고 그 뒤에는 죽잖아요. 내가 왜 죽어야 되느냐는 거지요. 지금 다섯 살 애의 이야기입니다. 다섯 살 밖에 안 된 애인데 왜 내가 죽어야 되느냐하는 겁니다.



지금 그 애는 몇 살을 살 수 있는가, 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몇 살 뒤를 보는 거예요. 그 다섯 살 먹은 아이의 치명적인 잘못된 점은 결과를 통해서 원인을 끄집어내려고 시도하는 그 점이 잘못됐습니다. 물론 제가 방금 한 그 이야기를 그 애한테 이야기해봐야 그 애는 못 알아듣겠지만요. 우리는 결과물인데 기어이 원인을 규명해야 결과를 내 소유로 해서 다룰 수 있는 결과로 삼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주시는 결과는 원인 없이 주어지는 결과라는 것, 그것을 성경에 나오는 용어대로 하면 “값없이 주시는 생명” 요한계시록 22장에 값없이 주시는 영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구원받은 그 원인을 내가 왜 소유할 수가 없느냐 하면, 우리가 애초부터 문제성이 있는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성이 있는 존재가 어떤 원인을 알게 되면 그 원인을 이제부터 자기가 조절하고 조정하려고 시도합니다. 값없이 구원받고 복 받았으면 되었는데 내가 원인을 알아버리면……, 교인들이 목사한테 원인을 원해요. “어떤 사람이 복 받았는데 어떻게 복 받았어요?” 하면 “철야하고 금식해서 복 받았어요.” 하면 자기도 그걸 흉내 내는 겁니다. 나도 복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 사전에 내가 금식을 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지막 때가 오기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잘못된 지식이거든요. 마지막 때가 오기 이 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인으로 삼고 그 원인을 실천에 옮김으로서 주께서 주시는 복을 따 낼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심방 갈 때에 많이 나오는 본문이 있지요. 네가 이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그 복에 구미가 당기잖아요. 그래서 그 복을 받는 원인을 찾아보니까 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고 하니까 “까짓 거 그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겠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지금 노림수는 원인의 노림수가 아니고 그 원인이 있게 된 결과에 바짝 독이 올라 있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내 손으로 따내겠는가, 거기에 관심사가 있기 때문에 그 복만 내게 들어온다면 내가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은 본인이 상상도 못한 겁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 전도하라면 전도하고 선교하라면 선교하고 다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타락인 것을 그들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게 바로 타락인 것을. 그런데 여러분은 이 시점에 알아야 돼요. 우리가 타락한 그것도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내가 타락해야만 하기에 타락했다고 그냥 수긍하세요. 따지지 마시고. 문제 끝났어요. 모든 문제 끝나버렸습니다. 타락해서 영광 못 돌리는 나 자신을 수정해 보려고 원인까지 규명해 들어가지 마세요. 원인만 알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 될 것이라는 소설을 본인이 쓰지 마세요.



예수님이 따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따로 준비한 것이 있거든 우리가 준비한 것은 우리 눈앞에서 좀 치울 줄 아는 낮아짐이 있어야 돼요. 마음을 낮추어라, 하는 빌립보서의 말씀, 그리스도처럼 마음을 낮추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네 것을 좀 치워버리고 주님 것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 주님이 원인이고 우리가 결과인 겁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이 온 것, 오늘 뵈뵈라는 이방인이 나오는데요, 이방인에게 구원이 오고 영생이 온 것은 예수님이 원인이었고 그 뵈뵈라는 구원받은 사람은 그 원인에 대한 결과였습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이렇게 하게 되면 교회의 모든 여자 분들이 어떻게 하면 뵈뵈처럼 돼 보겠는가, 이런 시도를 하게 돼요. 뵈뵈라는 메일 이름을 갖고 계신 분 또 계시죠. 그런 이름을 왜 붙이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 뵈뵈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뵈뵈라는 사람이 없는 이유가 처음부터 뵈뵈라는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러면 뵈뵈가 뭐냐, 이 대목을 논리로 설명하면 어려우니까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라면 끓일 때 냄비의 뚜껑이 있습니다. 냄비 뚜껑 보게 되면 까만 꼭지가 달려 있어요. 오래된 냄비는 꼭지가 헐겁다가 결국 빠져버려요. 빠져버리면 뚜껑에 구멍이 생겨서 새거든요.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어요. 죄가 올라옵니다. 저주와 심판이 올라와요. 창세기 3장에 보면 모든 세상은 죄와 저주 판입니다. 이 올라오는 것을 주님께서는 뚜껑을 만들어서 그 저주가 그 뚜껑이 있는 지점에서 저주와 심판이 올라오지 않도록 꼭지를 만들어서 조아버리지요. 그게 뵈뵈에요. 그게 브리스굴라와 아굴라입니다. 그게 저와 여러분이에요.



무존재가 먼저고 존재는 나중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모든 성경을 보면서 나 여기 있음부터 해서 나 여기 있는 나가 어떻게 천국 가는가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종교거든요. 종교는 출발점이 나부터 생각하는 거예요. 꼭지를 달아서 붙여버리면 밑에서 올라오는 그것, 마태복음에서는 그것을 음부의 권세, 지옥의 권세라 하는데 그 지옥의 권세가 그 꼭지 있는 부분만큼은 김이 아무리 끓어 올라와도 그 부분만큼은 올라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계속해서 저주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그 지점이 되지요. 그러면 뵈뵈라는 것은 누구냐, 뵈뵈라는 것은 예수님의 역할을 부여받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뵈뵈라는 사람이 왜 없다고 이야기했는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부여받은 그 역할이 하나의 사건, 사건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이 역할을 내가 소유하게 되면 소유한 내가 나의 우상이 돼버려요. 그러면 처음에는 주의 봉사 하다가 이제 봉사 잘했니, 하고 봉사 잘하는 내가 예수를 대신해서 신봉하는 교주가 돼버려요. 내가 교주고 내가 그 교주의 교인이 돼버려요.



겐그레아 교회가 있는데 겐그레아라는 것은 고린도에서 12킬로 떨어진 남부 해안의 항구로 배가 들락거리던 곳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1, 2, 3차 전도할 때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간 이유가 사실은 겐그레아 항구가 아니고 고린도 항구라는 겁니다. 2차전도, AD 51년에서 58년까지 전도하면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있으면서 그 동네에서 활동했거든요. 사도바울의 전도경로가 복잡한데 이렇게 보면 돼요. 1차 전도는 터키 왔다 갔다 했고 두 번째는 터키 옆에 있는 그리스에 갔는데, 3차 전도는 2차전도 때 갔던 곳을 돌아보러 간 것이 3차입니다. 3차 끝나고 나서는 바로 죽으러 갔지요.



3차전도 때 고린도에서 브리스굴라 아굴라부부를 만났어요. 겐그레아 교회는 고린도에서 12킬로니까 삽십 리밖에 안되잖아요. 그 근처를 전도하러 갔는데 겐그레아에 있던 사람이 로마로 가기 위해서 잠시 고린도에 왔을 때 복음 들었어요. 그래서 그 뵈뵈라는 아줌마한테 “어디로 가십니까” “로마로 갑니다.” 하니까 “잘됐네요.” 하고 로마로 편지를 써서 뵈뵈 편에 보내는 거예요. 옛날에는 사람 편에 편지를 보낼 때 위임장을 써서 보냅니다. “이것은 뵈뵈의 사견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것을 편지로 써서 보내니 로마 사람들이여, 이 편지를 뵈뵈의 편지로 보지 말고 내 편지로도 보지 말고 주님의 편지로 보세요.” 해서 이 추천서와 함께 편지를 준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것을 다 해주라는 부탁도 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하게 되면 문제는 이것을 흉내를 낸다는 거예요. 마지막 때의 특징은 흉내가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흉내를 낼 수가 없어요. 흉내를 내려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한 원인을 찾아가서 그 동일한 원인이 있으면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는 그 법칙을 자기한테 적용시키려고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에요. 역사라 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봤으면 그 효과를 본 원인을 찾아내서 똑같은 원인을 집어넣으면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물리적인 법칙을 인간이 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6장에 이런 선교나 전도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겁이 나요. 흉내를 또 낼까봐.



그래서 선교도 타락이란 말입니다. 왜 타락인가, 인간들이 이상적인 생각을 하니까 타락인 거예요. 뭐든지 현실이 아니고 이상적인 것. 겐그레아교회, 일군, 뵈뵈, 이런 용어들은……, 어렵지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나라가 차이점이 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세상 나라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다 소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월드컵은 공 하나만 있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할 수가 있어요. 이해 안되는 것이 없어요. 그러나 하늘나라는 이 땅과 다른 나라거든요. 그 다르다는 것을 이 땅에 심어주는 것이 하나님쪽에서 하는 선교, 하나님쪽에서 하는 전도입니다.



전도의 특징은 인간이 못한다는 거예요. 이 뵈뵈라는 사람이 하는 일의 특징은 본인이 도저히 생각지도 못하고 자기들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을 지금 부여받은 겁니다. 흉내내지 마세요. 이것은 뵈뵈 외에는 못하는 거예요. 할 수가 없어요. 왜, 경계선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경계선,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를 보여주는 그 경계선, 그 차이성으로 이 땅에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해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 권사님이 식사당번이신데 식사하는 중에 옆의 집사님이 “권사님, 음식을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하십니까?” 할 때 “집사님도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해 버리면 이것은 땅의 일이 되는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지 나도 두 번 다시 하라면 못합니다.” 이럴 때는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려니 너무 기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지만.



매 순간 세 시간 전에 했던 일을 세 시간 뒤에 똑같이 해 낼 수 없는 이유는 성도는 성도 자신의 행동을 그야말로 토막 내듯이 잘라버려요. 그 잘라진 모든 것이 사건의 연속으로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토막으로 내 버리는 거예요. 토막살인 사건, 알지요? 전부 다 항상 토막을 내버려요. 토막을 내서 이 토막에서 저 토막으로 건너가는데 우리가 아는 어떤 원인으로 같은 결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면서 그 일에 종사케 할 때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차이성 때문에, 그 경계성 때문에.



“집사님, 참 기도 잘하시네요.”라고 할 때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참 답답하지요. 두 번 다시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알거든요. 본인이 안다고요. 두 번 다시 그런 기도가 안돼요. 문장 그대로 해도 안돼요. 제가 지난 여름수련회 대전에서 창세기 강의할 때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읽는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어제 읽은 그 느낌, 오늘 읽은 그 느낌, 내일 읽을 때의 그 느낌이 다 다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작용해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했다는 소리가 입에서 나올 수가 없도록 “하게 하셨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했다?” 안 됩니다. 틀린 이야기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계속 살게 하는 거예요. 뚜껑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이 땅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선교와 전도에 있어서는 항상 실적을 따지거든요. 어떻게 하면 이런 실적이 나왔는지, “20명을 전도했는데 너는 어떻게 했어? 고구마 전도를 했나? 여리고성 전도를 했나? 어떻게 해서 20명이 나왔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선교와 전도에 있어서는 그것이 어떻게 이렇게 했는가가 성립이 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 죽음이 올라오기 때문에…… 쉽게 합시다. 몇 명 했는가, 이건 실적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관여할 때는,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죄와 의의 차이로 관여하십니다. 죄와 의의 차이로 관여할 때 관여하는 그것을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약속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가 빵을 먹으면 살과 피가 되지요? 마귀가 예수님보고 하기를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떡을 먹으면 살과 피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살과 피가 최종 목적이에요. 살과 피가 붙어 있어야 사니까. 떡을 먹고 양식을 먹는 이유가 살과 피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살과 피를 없애겠다는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생존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고 약속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 태어날 때 전부 다 자기 살기 위해서 태어나거든요. 생존이 우선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약속이 우선이에요. 약속은 뭐냐 할 때 생존하는 것으로 방해받는 것이 약속이에요.



너 나 없이 이 몸뚱이, 죽어서 천당 가서 살겠다고, 그저 살려고, 살려고, 산다는 것은 죽기 싫다는 거예요. 죽음에 쫓기면서 살려고 하는 이 모든 것에 의해서 훼방당하고 감추어지고 무시당하고 모독당하는 그 현장에 약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들춰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걷어내는 작업을 해야 되잖아요. 이 걷어내는 작업이 뭐냐 하면, 바로 율법을 통해서 죄라는 것을 집어넣습니다.



“어디 죄인이 얼쩡거리나? 어디 죄인주제에 자기주장을 해? 죄인 주제에 뭘 달라고 하느냐? 죄인 주제는 꺼지고 치워버려라.” 하고 치워버린다고요. 죄인이라고 꾸중 실컷 듣고 치워버리니까 그 현장에 비로소 나의 죄로 말미암아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눈 앞에 확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처음부터 이 세상은 저주와 죽음이 올라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창세기 3장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저주가 올라오는데 인간은 저주가 올라오는 것을 생각 안하고 자기는 그 저주의 바다 속에서 먹고 살겠다, 무조건 나는 살아야 되겠다, 나만 살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현실과 본인의 기도가 부합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안 맞으니 이게 뭔가?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은 세상을 감당 못한다. 여러분 인생을 보세요. 감당되던가요? 자식이 애먹일 때 부모가 감당되던가요? 자식에게 아토피 생길 때 여러분은 감당되던가요?



서울 버리고 촌으로 이사 가면 아토피가 낫습니까? 물론 나은 사람도 있습니다만 다 낫던가요? 김정은이 핵 만들 때 남한이 감당이 되던가요? 전방에서 총질을 할 때 국방부장관이 감당이 되던가요? 이것은 내가 원했던 사건도 아니에요. 내가 원한 사태가 아닙니다. 세상은 인간이 감당 못해요. 감당 못하니까 주어진 사태만 자꾸 내 속에 넣어놓기 바빠요. 넣어두면 사람은 풍선이 돼요. 점점 더 풍선이 되는데 이 풍선이 늘어나는 것은 암세포가 내 속에서 크게 늘어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풍선이 늘어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그걸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감당 안 되니까 자꾸 축적만 시키는 거예요. 축적만 시키면서 그 풍선이 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풍선을 두껍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게 뭐냐 하면, 교회 나오기, 선교헌금내기, 기도 열심히 하기, 금식계속 하기……, 백날 교회 목사가 시키는 대로 봉사와 헌금과 충성을 다 해봐야 점점 더 주어지는 이 스트레스와 세상은 감당 안 됩니다. 어떻게 되느냐? 폭발해버려요. 그게 터질 때, 그래서 풍선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와르르 부끄러움을 가지고 쏟아져 나올 때 산다는 게 얼마나 수치스럽습니까, 산다는 게.



남들 보기에는 이 두께를 가지고 집사입니다, 장로입니다, 목사입니다, 하지만 집구석 한 번 가 보세요. 어떤 집구속인지. 라면 먹고 술 먹고 토해서 그 토사물이 쏟아지면 얼마나 부끄러워요? 그걸 대충 얼기설기 해서 풍선으로 가지고 있다가 그 풍선이 터져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폭발해버리지요. 현실도 모르면서 내가 따로 만들어놓은 현실로 감당을 해보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원인 알면 대처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한테는 원인을 이야기해 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터져도 그 터진 것도 결과물이에요.



죽음에서 올라오는 이 것, 이걸 철학적으로 무 존재라 하는데, 무의 존재, 죽음의 세력, 주주의 세력, 심판의 세력, 이 세력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이걸 냄비 뚜껑 꼭지를 달아버림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결과물로 꼭지를 만들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이렇게 정리됩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이 세상은 죄악 된 세상입니다. 그래서 저주가 있는 겁니다. 이 문제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이 땅을 저주케 하시는 그 쪽에서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주신 쪽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의를 주셔야 돼요. 그게 뭐냐, 율법외의 한 의라는 겁니다. 이게 마지막 때에 와요. 마지막 때에 오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포함시킵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기에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죄고 선교하고자 하는 것도 죄에요. 따라서 우리 자신이 어떤 의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의를 호출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믿음이요? 그것도 행함이에요. 믿음으로 복 받는 게 아닙니다. 믿음 자체가 결과로 와야 믿음이지 내가 믿음을 만들어내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신념이고 각오고 결심인 거예요. 주께서 믿음조차도 마지막 때에 성령의 선물로 주시게 되면 그 때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차이를 느끼는 겁니다. 왜 저에게는 주의 의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셨습니까, 결과지요. 왜 저를 구원시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없습니다. 그러한 고백만 나열할 뿐 거기서 답변을 얻어 챙기는 게 아니에요. 왜냐, 답변을 얻어버리면 우리가 예수님을 다루려고 할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구원했다.” “그래요?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사이는 같은 친구사이니까 제가 주님하고 막 먹어도 되지요?”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우리 존재의 풍선을 불게 돼요. 예수 믿은 지 20년 되었다고 풍선을 또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시를 가지고 우리풍선을 톡, 톡, 터트리는데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의가 주어지는 그 계통이 있습니다. 그 계통이 뭐냐, 장자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문제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나라라는 것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본 반면에 원래 이스라엘은 복음의 비밀을 전달해야 될 임무가 있어요. 복음의 비밀, 이 복음의 비밀을 전수해야 될 임무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의 비밀을 전수해야 될 장자입니다. 이스라엘 다음에 장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장자고 그 다음에 장자가 바로 교회가 장자거든요. 오늘 본문에 겐그레아 교회 나오잖아요. 장자라는 것은 약속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장자라 할 때는 네 속에 나의 약속에 담겨서 너는 약속의 결과물로 이 땅에 살아야 돼, 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뵈뵈라는 이 사람을 다른 사람이 흉내를 못 냅니다.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흉내를 못 내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에 본인이 흉내를 못 내고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졌기에 주님이 시키는 뵈뵈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은 옆의 사람들이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마지막 때에, 마지막 때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장자 됨을 연관해서 우리에게 교회를 예수님의 몸으로 삼아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의 몸이 장자가 되는 겁니다. 그 교회 안에 예수님의 요소가 계속해서 사건화 되어서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차이나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그 이야기에요. 늘 차이성을 우리가 계속해서 유지를 해 줘야 돼요. 그렇다면 선교를 언제 하느냐, 전도를 언제 하느냐?



지금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매일같이 전도하고 선교하고 계십니다. 어떤 차이점을 발견해야 돼요. 어떤 차이점인가? 풍선이 되려는 나와 그것은 터져버려야 되고 깨져버려야 된다는 약속, 약속 대 나의 존재, 내 존재가 우선인가 아니면 주님의 약속이 우선인가? 그렇다면 원인이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 원인이 되었고 우리는 그 결과물로서 이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라는 여인이 로마서를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마지막 때에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개 같은 이방인들도 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끝으로 말씀 드릴 것은, “그렇다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장자의 특징은 뭐냐, 복음의 비밀을 전수하는 것이고 표현하는 거지요. 복음의 비밀을. 이 복음의 비밀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이 땅에서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떻게 힘들게 살아도 그 자체가 약속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에게 약속 증거 하라고 주신 우리의 팔자고 우리의 운명입니다.



따라서 그 약속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약속 말고 따로 나만의 인생을 따로 구성하려고 한다면 그 살아계신 약속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고 항상 풍선을 터트려 버려요. 그래서 뵈뵈라는 이 여자는 딱 한 구절 나와요. 그다지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겐그레아 교회는 간판도 없습니다. 그냥 가정집이에요. 따라서 여러분이 사시는 그 곳이 여러분들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나한테 교회 있다고 말하면 안돼요. 교회라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지 교회가 있어버리면 그것은 진정한 약속과 세상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너와 나의 차이점이지 약속의 하늘나라와 이 땅의 차이점이 없는 거예요.



말이 좀 어려웠습니다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늘나라와 이 땅은 이런 점에서 차이 난다, 이 땅은 우리가 원인이었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천국 간다는 이것이 이 세상의 속성이라면 하늘나라에서는 일체 원인이 없고 매일 같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약속이 약속되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주어지는 결과물로 이 땅에 살 뿐이다. 나중에 죽어서 주님 만나면 “주님이 다 하셨지요?” 이렇게, 면류관 반납하면서 “지금까지 나의 나 된 것은 다 주님의 은혜 맞지요? 주님, 그 때 그럴 줄 알았어요. 위에서 다 조종한 것 알았어요. 그 때 사기당한 것도 주께서 뒤에서 다 조종해서 사기당한 줄로 알았어요.”



모든 일거수일투족, 발걸음 세시는 것, 모든 일이 주님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그 차이성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바로 선교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벌어지는 희한한 현상, 우리는 모방도 안되고 흉내도 안되고 각자 주께 받은 약속대로 결과물로 살아갈 뿐인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 그 자체에 있음을 우리가 눈여겨 생각해서 다른데 마음 두지 않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