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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5-25 13: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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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강-롬 15장 8-13(할례의 수종자)1405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5장 8절에서 13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5:6-13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이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방금 읽었던 이 문장이 법학이나 일반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도 무슨 말인지 논리가 수월하지를 않습니다. 참기름 바른 것 같이 논리가 수월하게 넘어가지를 않아요. 사람들이 뭔가 이해하도록 쉽게쉽게 해야 믿든지 말든지 할 것인데 사도바울이 성경의 논리를 이렇게 어렵게 끌어가 버리면 도무지 누가 이 말을 믿겠습니까? 믿는 것은 둘째 치고 이렇게 난해한 말들이 담겨 있으면 누가 이 성경을 보려고 하겠습니까?
쉬운 글들이 많고 재미있는 소설도 많은데 이 난해한 성경책을 찾으려고 하지를 않겠지요. 그러면 말을 어렵게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요? 사도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면서 본인이 말하는 그 내용으로 인하여 구원이 수월하게 진행 못하게 한다면 그 책임을 사도바울이 질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하여튼 오늘 읽은 내용들은 제가 어렵다고 하지 않더라도 어려운 겁니다.
저는 이렇게 어려운데 일반 평신도는 이 어려운 것을 모르는가? 아예 관심이 없어서 그래요. 성경에서 뭐라고 했던지 신경 뚝 끊어버리는 거예요. 성경에서 뭐라 했든지 간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몰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거예요. 만약에 알고자 한다면 할례가 뭔지 알아야 되고, 수종자, 약속, 이방인, 열방, 이사야, 이새의 뿌리, 성령, 이걸 하나하나 따져서 다 캐내야 된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래야 얼추 내용이 통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 하나하나가 다 짜증나고 귀찮으니까 아예 몰라도 돼, 하고 그냥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특히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할례의 수종자”라고 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여기서 이 할례라는 단어는 현대국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거든요. 현대국가에서는 이런 제도를 시행하지 않습니다. 유대인, 그것도 골통 유대인이나 하지 보통 유대인은 하지도 않아요. 이런 할례라는 내용이 현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왜 중요하지, 왜 이런 게 나오지, 이거 몰라도 되잖아, 이걸 왜 알아야 되지, 하고 딱 보니까 할례의 수종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들이 그냥 실행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할례를 수종 들고, 할례를 행하라는 그 법을 스스로 자기에게 도입시키고 적용시킴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던 구원에 그들도 함께 참여 되어서 영생 얻을 수 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진다, 라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 그대로라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예수님도 어릴 때 할례를 받았어요, 예수님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할례라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그것은 나와 상관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이잖아요. 단군의 자손이잖아요. 이방인이 구원을 받겠다고 할 때는 그냥 주시옵소서, 가 아니라 할례라고 하는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할례가 나올 수 있는 그 쪽 노선에 서야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았다면 할례를 안 받은 쪽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할례 안 받은 쪽이 따로 있고 할례 받은 쪽이 따로 있는데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할례 받은 쪽에 섰기 때문에 할례 없는 너희들도 구원을 받았다, 지금 논조가 그런 논조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할례 받았다는 그런 취지, 그런 정보, 그런 내용을 빼먹고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할 때 그 예수님은 껍데기 예수에 불과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되었든 부처가 되었든 문제없어. 나만 구원하면 나는 투자할거야.”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뭘 하셨기에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도 천국의 혜택이 주어졌다, 라는 것이 우리에게 장착되어야 되고 그 내용에 대해서 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그 다음에 9절에서,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 11절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라고 되어 있고 12절에도 마찬가지로,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뭔가 확확 퍼져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은 그 순간부터 뭔가 부채 살처럼 확 퍼져버린 거예요. 도대체 할례가 뭐기에, 그 안에 뭐가 담겨 있기에 율법 없이도 하나님의 의로움을 받고 천국을 가느냐는 그 말이지요. 율법 없이도! 율법 없이도, 라는 말을 제가 강하게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주일성수 안하고 십일조 안하고도, 그 말이에요. 율법 없이도, 그 말은 예배 참석 안 해도,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일 년에 전도 한 번도 안하고 전도상 받은 적 없어도, 그런 뜻이에요. 새벽기도 안 나와도,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율법 없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말이에요. 천국은 어떤 곳인가? 율법 없어도 갈 수 있는 곳이다. 말을 다시 해야 해요. 율법 없이 가는 곳이다. 율법 없이 가는 곳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 그리고 그 율법 중에 하나가 할례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할례를 행하신 것은 할례 자체적으로 할례를 없애버리는 할례가 자기 한계를 벗어나는 그러한 작업에 나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으신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가 있어야 거룩한 백성이고 거룩한, 완벽하게 거룩한 백성만이 거룩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기에. 하나님은 어떠하다? 거룩하다. 그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우리도 거룩해야 된다. 우리가 거룩하는 방법은 뭐다? 할례다. 따라서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거룩한 민족이고 할례 없는 저들은 더러운 민족이기에 지옥 간다. 이게 구약에 나열되어 있거든요. 이게 예레미야, 에스겔, 그 이전부터도 죽 나열되어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할례를 받으사,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그 할례를 받으사 이제는 할례 없이도 거룩해 질수 있다는 그 진짜 할례의 본 내용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터뜨려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심으로서 할례가 스스로 할례의 한계를 끊어버리고 깨버리고 벗어나서 할례 없이도 할례 받아야만 누렸던 모든 거룩을 같이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할례 속에 뭐가 담겨 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 그러니까 이방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지혜로서 발견하려 하는 거예요. 신이 있다면 신은 어떤 존재인가? 이 말은 뭐냐 하면, 신을, 하나님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이 있다는 흔적이 뭐냐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흔적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의 흔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은 없는 거지요. 애초부터 하나님이 없다면 흔적을 찾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흔적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돈과 자기의 건강에서 찾습니다. ‘기도하니 부자가 되더라. 아, 하나님은 계시는구나.’ 또는 몸이 아픈데 기도하니 병이 낫더라, ‘아, 계시는구나.’ 교회가 열 명 모이는데 열심히 했더니 나중에 백 명 되더라, ‘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나님의 흔적을 자기가 속해있는 그 영역이 확장되고 커질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복이라고 하고 자기가 줄어드는 것을 저주라고 보는 겁니다. 팽창하면 복이고 줄어들면 저주고.
애를 많이 낳으면 복이고 애가 하나도 없으면 저주고, 그렇게 보는 거예요. 양으로 보는 거예요. 단원고등학교 학생들 숫자 줄었으니 저주받은 것이고 신입생 많이 들어오면 복 받은 것이고. 어떤 회사의 수입이 많으면 그것은 복 받은 것이고 그 회사 옆에 있는 중소기업이 망하든 말든 자기만 잘되면 복 받은 거예요. 자기만 잘 되면. 복과 저주가 내가 못되면 저주고 내가 잘되면 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그래요.
그런데 처음에 교회 나올 때 기도 좀 하더니만 병도 낫고 장사도 잘 되다가 교회 한 20년 다니는데 기도해도 별 효과도 없고 뭘 했나,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면 그 때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애초부터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이 시간 빌어서 이제는 말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애초부터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괜히 있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헌금 강요하고 부흥사 불러다가 교회 세워놓고, 목사가 자기생계대책 세워놓고, 그래서 종교전문가나 만든 그것은 유병언이에요, 유병언. 거기에 교인들이 말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파리에 가서 월 세 천만 원 씩 주면서 잘 살고 우리는 어리석게 그런 것에 놀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어요? 이것은 구원 파뿐 아니고 모든 한국교회 전부한테, 교인들이 한국교회 모든 목사한테 놀아났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까?
이단은 누가 이단입니까? 다 이단이면서 누가 누구보고 이단이에요. 누굴 욕해요? 수법이 다 그 수법인데 누굴 욕해요? 이미 천주교가 다 써먹었던 것들인데. 저임금, 이것도 수녀들이 지금 하고 있잖아요. 왜 사람들이 이게 사기라는 것도 모르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 있음의 흔적을 애써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맞다고 자꾸 확인하고 싶은 것인데 이 확인 작업이 전처럼 잘 안되게 되면 많이 당황하게 되는 겁니다.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성경을 살펴보세요. 진짜 하나님을 만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흔적을 어디서 찾았는지? 할례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예 자기 몸에다 문신을 새겨버렸어요. 자기 몸에다 사인을,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거예요. 남성 성기 끝의 표피를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됨이 이 표피제거를 통해서 몸의 문신처럼 빨아도 사라지지 않아요. 한번 거룩은 영원한 거룩이라는 확실한 표적이 바로 할례입니다. “하나님의 흔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를 말라. 내 몸에 있다.” 하는 말이지요. 내 몸이 하나님의 흔적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할례를 행한 것이 창세기 17장인데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 역사는 할례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해서 할례 없는 사람과 할례 있는 사람을 구분해서 할례 없는 사람을 짐승취급 하는 역사로 하나님께서 친히 전개했다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7장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할 때 다윗이 키가 한 3미터 10센티가 되는 거인을 상대해서 싸우면서 다윗의 마음가짐이 나와요. 나는 덩치가 크냐 작으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인데 하나님의 전쟁에는 기준이 있다는 겁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할례 있느냐, 할례 없느냐, 하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할례 없는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짐승으로 보는 거예요. 할례 있는 자만 사람,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잡을 때 평소에 자기가 짐승 잡던 방식이면 충분해요. 짐승으로 보이는 거예요. 짐승으로 보인다는 말은 골리앗뿐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빼놓고 모든 민족, 필리핀, 알라스카, 중국, 모든 민족을 사람취급 하지 않습니다. 짐승으로 간주하고 그 짐승 잡는 방식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와서 “결국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었었어.”라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을 전개한다는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확정적으로 나와 있는 겁니다.
에스겔 32장에 보게 되면, 지금 에스겔을 수요예배 때 설교하고 있는데요, 거기에 할례 받지 않은 자와 같이 멸망한다는 그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와요. “할례 없는 자는 할례 없음에 대한 마땅한 조치를 내가 하고야 말리라.” 왜, 이 하나님은 할례 하라, 할 때 그 할례에 담긴 내용이 뭐냐, 할례 없는 자는 저주뿐이라는 그 내용이 같이 담겨서 할례를 행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할례 행해라.” “예, 저만 할례 합니까?” “그래, 너 빼놓고는 전부 다 나(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유월절에 어린양 잡았다 하지요. 그 전에 먼저 한 조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유월절 양 잡아서 집 앞에 피로 페인트칠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먼저 할례를 행해야 돼요. 할례를 행한 입장에서 어린양을 잡아서 피 발라야 주님의 사자가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에 대해서 왜 이렇게 복잡합니까? 그냥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하나님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우리가 원하는 확인방법이 뭐냐 하면, 내가 잘되는 거잖아요. 내가 몸이 건강하고 부자 되는 것, 가정화목한 것, 왜 그 방법을 피해가시는 거지요?
그것은 뭐냐, 여기서 유대인들도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 하니까 할례를 행한 우리는 구원받았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극히 잘못된 겁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그런 오해들이 굉장히 평소에도 많이 일어나거든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오랜만에 동창회로 모였다 칩시다. 모였는데 그 동창 중에서 돈을 너무 잘 쓰는 재벌 아들 동창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남자가 자기 동창 자랑을 평소에 한 거예요. “우리 동창 가운데 재벌 아들이 있는데 돈을 너무 잘 쓰는 거야. 이번에 그 동창이 오게 되어 있어. 아마 한 턱 낼 거야. 우리 학교 출신중에 그런 인간도 있다고. 너는 그런 동창 없지? 그 친구가 우리 자랑거리야.”
자기는 그 동창을 친구라고 여기고 그 친구 덕분에 한 몫 보겠다고, 그 동창이 돈을 너무 잘 쓰니까 덕 좀 보겠다고 자기가 아는 친구들, 동창도 아닌 친구들 불러서 얼마나 그 동창 친구가 나에게 잘해주는가를 보여주고 싶어 했는데 사실로 그 친구는 돈을 잘 써요. 정말 동창인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어이, 오랜만이다.” 하니까 “누구?” 이렇게 된 거예요. 자랑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데리고 온 친구들이 갑자기 머쓱해져 버린 거예요. “친구 진짜 맞나?” “맞는데……?” 돈 잘 쓰는 것은 맞는데 자기 빼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잘 썼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 할 때 유대인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할례를 행했다. 봐라, 내 몸을, 내 몸에 할례를 행했잖아. 우린 거룩한 거야.”라고 자부심을 잔뜩 갖고 있었어요. 할례 없는 자는 멸망한다고 성경에 나오니까 분명히 자기는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할례를 행하신 분이 왔을 때, “우리가 친구 아이가?” 하고 좋아했는데 친구 아니었거든요. 할례 행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이 들통 난 겁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으로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보고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은 너희들만이 특별히 거룩한 민족이고 너희 빼놓고는 다 저주받는다고 이야기를 해서 우리도 그런 줄을 알았는데 막상 주님께서 할례를 받으시고 할례의 본 내용대로 작업을 해버리니까 “할례 받은 너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구약성경부터 나와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 6장10절의 경우에는 이렇게 해요. “너희들의 마음과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기에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누구보고? 이스라엘 백성보고 하는 소리에요.
그들은 육체에 할례를 행했지만 막상 진짜 할례를 행하게 하신 분이 오니까 마음과 귀가 할례가 안 되어서 선지자가 하는 주님의 말을 못 알아듣더라, 그렇게 되었어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할례 행해도 거룩하지 않다. 그리고 할례 안 해도 원래부터 거룩하지 않고 저주 받는다. 그렇다면 우리 좋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주셨을 것인데 우리보고 할례를 행하라고 했으면 우리한테 돌아오는 혜택이 있어야 하는데 할례를 행하라고 해놓고 거룩하지 않다고 한다면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근본적인 오해인 거예요. 너 좋으라고 말씀 준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 잘되라고, 네가 원하는 복 받으라고 말씀 준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한국교회, 한국교회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의 교회가 근본적으로 문제에요. 교회 나오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 주려고 교회 나오게 하셨다. 그런 오해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복 주려고 교회 나오라고 한 게 아닙니다. 말씀은 말씀 주신 분에 의해서 스스로 성취를 해 나가요.
돈 많은 재벌이 동창이라고 해서 무조건 돈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맘에 드는 사람에게만 돈을 쓰지. 주님이 아는 사람에게만 할례의 혜택을 주지 할례 행했다고 거룩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무인도가 왜 있습니까? 김 추자가 노래하려고 있는 거예요? 무인도가 왜 있는 겁니까? 사람 살지 않는 섬이 왜 있어야 돼요? 이건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사람이 가꾸는 텃밭도 없는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는가, 그 질문이거든요. 무인도가 왜 있어야 돼요? 사람 살지도 못할 곳이 왜 있어야 됩니까?
가만 따져보니 이것이 질문거리가 되지요? 왜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나 좋기 위해서 모든 것이 있어야 된다고 평소에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세월 호 사건이 되었던 모든 것이 나 좋은 쪽으로 있어야 그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도 의미 없어. 너도 무인도야. 너도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야.” 왜,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니까. 사람은 자기가 있으나 없으나 그만이라는 생각을 왜 못할까요? 우리 존재자체가 있으나 없으나 그만이고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존재가 기도해봐야 그 기도도 하나 마나 한 기도에요. 헌금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하나마나 한 존재입니다. 이걸 좀 진작 좀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주님의 방법은 이거예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을 데려다가 이쪽에 집어넣습니다. 미나리 그냥 먹으라 하면 맛없어요. 젊은 사람들 못 먹습니다. 그런데 미나리하고 삼겹살의 조화. 미나리 먹으러 가는지 삼겹살 먹으로 가는지 분간이 안돼요. 쓸모없어 보이는 미나리도 삼겹살과 조합이 되니까 아, 맛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 쓸모도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할례작업에 참여케 될 때 비로소 거룩한 분을 거룩한 분이라고 소개하는 거룩한 업무, 직무를 할당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이게 진짜 이스라엘이고 진짜 성도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할례를 행하신 것은 할례 받은 자도 거룩하지 않고 할례 안 받은 자는 당연히 거룩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 하라는 지시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할례는 거룩케 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할례 받았다는 당사자는 전혀 거룩하지 않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참된 할례라 하는 것은 누가 마지막 때 홀로 보여주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할례 받으심으로써 할례의 모든 정답은 그 분 홀로 보유하고 소유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할례를 예수님께서 혼자 받으셔서 혼자 할례에 합당하게 거룩하다면 그 거룩이 거룩하지 않은 자들에게 어떻게 전달이 가능한가, 이 전달의 가능 문제가 발생되는 겁니다. 주님 잘나서 혼자 거룩해서 혼자 하늘나라 가면 천국은 주님 혼자 사는 것이 되잖아요. 이스라엘이 백성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주님만 거룩하고 나머지가 거룩하지 않다면 그것은 함께 살수도 없고. 그래서 나온 대책이 뭐냐 하면, 주님이 거룩한 즉 자기 백성도 거룩한데 주님과 자기 백성의 거룩의 이음새, 그걸 이어주는 이음새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할례라는 것으로 정리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를 설명해 드리겠는데요, 어쨌든 전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거룩하다. 우리는 거룩하지 않고 저주 받는다. 하지만 이 할례라는 것을 연결고리로 해서 거룩하신 분으로 인하여 어떻게 우리가 같이 거룩해지는가, 그런 문제인겁니다. 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다짐을 받아 놔야 돼요. 거룩하신 분과 거룩하지 않은 분의 그 이음새는 구약표현에서 그게 하나님의 할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할례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가능한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만 말씀드리면 12절에 보면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제가 설교 처음 할 때 오늘 문장 자체가 다 어렵다고 했지요. 특히 여기 이새라는 말, 우리 이 씨 집안에 이새라는 사람은 듣도 보도 못했어요. 그런데 이새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새라는 사람이 왜 등장해가지고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거룩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구원받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새라는 게 누구냐 하면, 다윗의 아버지에요. 논리는 복잡하기에 생략하고 결론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새는 아들이 총 여덟 명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새는 막내아들 다윗은 아들 취급을 안했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장차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왕을 간택하는 그 현장에 막내아들은 빼버렸어요. 그래서 아들 일곱을 세워놓고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사무엘 본인도 몰라요.
그래서 자꾸 하나님께 묻는 거예요. “이 사람입니까? 아니라고요? 그러면 이 사람입니까? 아니라고요. 그러면 누구……?” 그렇게 해서 일곱 명 중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여기 있는 아들이 다 입니까?” “하나 있기는 있는데 그 애는 막내고 별 볼일 없습니다.” “데려오세요.” 데려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애다.” 그래서 다윗이 바로 왕입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없던 자에요, 없는 자. 사람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줬고 율법을 주니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있는 사람들인 우리들이 거룩하는 방법은 이 할례를 행하는 것이다, 할례로 거룩이 확정된다, 거룩 행하자, 할례 행하자,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진짜 할례의 주인공은 인간들이 율법을 가지고, 할례를 가지고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확정하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천국에 넣어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줌으로써 인간들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고 율법을 받은 우리만이 구원받는다는 자기의 본색, 평소의 구원욕구, 구원욕망, 이것을 마음껏 발휘하게 해서 “우리는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기에 우리끼리만 구원받았다.” 이게 완전히 구원 파죠, 우리끼리만 구원받았다, 하게 의도적으로 유도해놓고 글쎄, 그 가운데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해 주는 거예요.
그게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이새가 나오는 그 뿌리, 다시 말해서 숨겨진 어떤 출구가 나오면요, 숨겨진 파이프가 출구로 인하여 새롭게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땅 속에는 하수도가 묻혀 있거든요. 평소에는 안 보여요. 하수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마을 저 끝에 있는 축대 아래 도랑으로 이어지는 거기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온갖 오물이 흘러나오는 거기에 출구가 있는 거예요. 그 출구가 막혀 버리면 집안에서 흘러가는 출구도 막혀서 역류하잖아요. 그 출구가 뭐냐 하면, 이새가 되는 겁니다.
이새라는 그 출구를 통해서 이새라는 그 족보자체가 구원 못 받는다고 확정된 자들이 그 노선, 파이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게 룻이에요. 룻은 모압여성이에요.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하려 하니 죄송스러운 것이 있어요. 교회 와서 은혜 받으려 하면 멋진 성경구절들 있잖아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이런 것 뽑아서 복이나 받으면 되는데 성경을 통째로 뚫으려고 하니까 잠은 오지, 피곤도 하지……, 이걸 설명해야 되기에 미안하지만 밀어붙이겠습니다. 할 수 없어요. 이해 안 되면 또 들으면 되니까.
이새 안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섞이는데 그냥 섞이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확정된 그 자가 주도권, 갑이 되고 소위 구원받는다는 사람들이 을이 되는 방식으로 주께서 이끌어 오신 거예요. 모압 여인이 나오미 가정을 살려요. 자칭 백성이라고, 하나님이 율법을 줬으니까 그 율법 받은 우리만 백성이고 나머지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저주받은 짐승이라고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놓고 그들이 무시하고 천대하고 박해했던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도로 자칭 구원받았다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식으로 구원을 해내는 그 노선, 파이프가 군데군데 박혀서 이스라엘 역사속에 흘러 들어온 겁니다.
그 비어져 나온 출구 하나가 이새가 되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마태복음 1장 6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에 “이새는 다윗 왕을 나으니라.” 그 앞에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룻 자체가 이방여인입니다. 1장 5절에 나오는 라합도 이방여인이고요,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다말도 이방여인이에요. 이새는 하수구같은 출구죠. 그 출구에서 다윗이 나왔으면 이 다윗 왕이 나왔다는 그 안에는, 다윗 왕의 위상이 뭐냐 하면, 인간이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게 진리가 아니라고 거부하는 요소가 다윗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다윗, 하면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 이렇게 하는데 결국 이스라엘의 혈통에 이방인이 섞여서 마지막에 나왔다는 이 말은 뭐냐, 할례를 받더라도 할례를 받은 이것이 오히려 구원이 아니고 할례를 받음으로써 할례 받지 않은 쪽에서 오히려 할례 받은 쪽을 구원하는 식으로 모든 것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이 말이 뭐냐, 예수님이 이방인이라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외계인이라는 뜻이에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유대인들은 할례 받았는데 거룩하지 못하다. 이방인들은 아예 짐승 같은 존재다. 골리앗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감당하지 못할 인물이다. 왜냐, 거룩은 외부에서 투입되어야 비로소 거룩이 발생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부에서 투입되어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존재적인 할례 같으면 “할례를 받았다. 나는 거룩하다.” 이것도 잘못이에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걸 듣고 이렇게 오해합니다. “우리는 할례 안 받아도 구원받지.” 하거든요. 그것도 오해입니다. 할례라 하는 것은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안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에요. 십일조 한다고 복 받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은 또 십일조를 안 해서 복 받는다는 데 그런 얌체가 어디 있어요. 돈 안내고 복은 챙기고. 십일조를 안 해도 복은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존재론적인 할례가 아니고 사건적인, 할례라는 사건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건은 존재가 어떤 모양새냐, 어떤 내용이냐를 묻거나 따지지를 않겠다는 사건이 터져버리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내가 다 할게, 그런 뜻이에요. 내가 다 할게. 내가 다할게, 라는 말씀 배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너는 뭘 해도 안 돼.”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50년 다니고 목사 되고 장로 되어도 구원 못 받아요. 십 수 년을 장로를 해도 구원이 안 생겨요. 그것으로는 믿음이 안 생겨요. 성경공부 50년, 60년을 해도 믿음이 안 생겨요. 치매 시부모 30년 섬겨도 믿음이 안 생겨요.
생긴 것과 안 생긴 것을 어떻게 아는가? 믿음이 만약에 생겼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자백할 뿐입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항상 설교 끝날 쯤 되면 저한테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어요. “목사님,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런 이야기 다 때려치우고,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논리고 뭐고 다 치우고, 할례고 뭐고 결국 우리보고 어쩌란 이야기인지 그것만 듣겠어요.” 항상 그 질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바로 그 시간이 왔어요.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하는 그 이야기.
다른 교회는 잘도 이야기해 주거든요. “선교헌금 내세요.” 반드시 설교 끝에는 그게 나와요. “설교 헌금 내세요.”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돈이 있어야 한다고. 돈 없으면 하늘나라 확장이 안 된다고. 반드시 그게 나와요. 돈 문제로 반드시 끝난다고요. 오늘 본문 내용이 그겁니다. 이미 하수도의 출구가 예수님으로 확정되었어요. 그러면 그 질문을 저한테 할 것이 아니고 룻에게나, 다말에게나, 기생 라합에게나, 그런 사람들한테 물어봐야 돼요. “기생라합!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기생 라합은 말합니다. “집에 술손님 받고 있는데 정탐꾼 찾아와서 숨겨줬다.”
결국 자기 기생직업을 버린 것이 아니에요. 기생직업 버리고 고상한 타이프 치는 비서직으로 일을 바꾼 게 아니고 그냥 자기직업 고수하는가운데 정탐꾼이 찾아든 겁니다. 룻은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자기는 그냥 시집가서 구원받은 거예요. 시어머니가 홀딱 망할 때 ‘아, 여호와 잘 믿는 우리 가정을 폭삭 망하게 하나님이 얼마나 그게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좋으신 하나님인가.’ 하고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뭔가 챙겼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챙기려고 하다가 챙기는 것 때문에 망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룻은 받아들인 겁니다.
왜,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구나.”그걸 알게 된 거예요. 할례 받으나 안 받으나 똑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만 구원받았다는 집단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굉장히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돼요. 특히 구원 파는 철저하게 십일조,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단이 다 그렇지만, 십일조를 강조해요. 가장 십일조를 잘 내는 사람들로 주위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모든 교회가 마찬가지예요. 십일조 안하면 집사가 장립집사 될 수가 없어요. 모든 게 돈 문제였습니다.
그런 집단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기고 다행스럽게 여겨야 됩니다. 왜, 우리는 거기에 해당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기에. 그게 정답이에요. “우리는 저주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사람만이 “예수님만이 거룩하셨습니다.”를 고백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이미 자기역할을 할당받은 사람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그냥 하던 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사람은 ‘하던 대로’라는 것이 참 어려운데 사람이 하던 대로 살면서 하던 대로 했기에 그걸 자기 의로서 자랑할 수가 있어요. 그때는 이제 망가져야 됩니다.
왜 ‘하던 대로’ 라는 말을 제가 왜 강조하느냐 하면, 그동안 ‘하던 대로’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었고 주께서 ‘하게 하신 대로’ 우리는 살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그대로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우리는 지금 내 맘대로 산다 하지만 우리가 내 맘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허용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 맘대로 산 적이 없어요. 이걸 발견하는 겁니다.
출구가 나오기 전에 하수구 속에 있었던 많은 이방인들은 각자의 직업에서 자기 하던 대로그냥 살았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출구가 말해줍니다. “개 같은 너희들도 바로 나 때문에, 바로 이 예수님 때문에 구원이 되었느니라.”라고 되는 거예요. 이게 이새의 아들에게서 확정이 된 겁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에 보게 되면,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했잖아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그렇다면 솔로몬을 낳게 한 그 다윗의 아내, 밧세바인데요, 다윗의 부인 밧세바의 남편은 누구냐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다윗은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이러면 ‘아,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 맞구나.’ 되겠는데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근호는 김 영자에게서 딸을 낳았다? 이러면 본 아내, 우리 사모님은 어떻게 돼요? 어디 갔어요? 할례란 인간의 혈통을 부정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오해하기를 할례를 받았던 그 혈통을 붙잡으려고 한 거예요. 할례라는 것이 혈통을 부정하는데 그들은 부정한 게 아니고 그 부정의 증거를 긍정해 버린 겁니다. “우리의 혈통만이 구원받은 혈통이다. 왜,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라고 유대인들은 주장을 했고 “저들은 할례 없는 혈통기이 때문에 저주받는 것이 마땅하고 우리는 할례 받은 혈통이기에 구원받는다.”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혈통은 거룩하지 않다, 라는 사실이 들통이 나고 드러나게 된 겁니다. 그러면 모든 혈통은 어떻게 구원 받는가? 너희들의 혈통과 다르다고 한 혈통, 우리야도 이방인이에요, 그 다른 혈통에서 개입된 그것이 그 개입되면서 거룩도 함께 포함시켜서, 할례의 완성을 포함시켜서 너희들을 구원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할례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은 외계인으로서 할례를 받은 거예요. 이 지상에 있는 어떤 인간과도 다른 인간으로서 할례를 받아버린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상의 자기존재로서는 할례를 붙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할례는 존재론적 할례가 아니고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사건이. 존재로서는 유지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계속 소지할 수 없는 사건이라니까요, 사건. 사람이 뭘 행하게 되면 그것이 자기의 추억이 되고 기억이 됩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성도의 삶은 뭐냐?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어떤 사건이든, 나로 말미암아, 날 위해서 일으키지 않은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내가 늘 기억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뭐냐 하면, 나는 나로부터 시작된 나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쪽에서 시작된 그 존재가 나 되는 거예요. 그것이 매일 같이 우리에게 사건이 터지고 또 터지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건적으로 보지 아니하면, 사람은 어제 잘난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어제 은혜 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은헤 받은 사람이라고 유지할 생각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사건이 늘 나와 버리면 그 사건 속에서 뭐가 들통 나는가? 나는 나의 존재만 꼭 쥐고 살아가는, 이러한 내 혈통, 내 몸, 내 육신만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백케 하는 사건을 매일같이 일으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래서 우리가 그냥 살아가면 돼요. 그냥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일을 만들어주시면서 내 잘난 맛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내가 계속해서 고백하도록 할 때 이것이 바로 거룩한 분에 의해서 우리는 더럽다는 것이 매일 같이 고백되어지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살아 있다는 증거고 흔적이에요. 할례? 십일조? 율법 지키고 목사? 장로?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거룩하지 않는 내가 오늘도 다른 분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거룩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것, 이것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증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부모 없는 고아처럼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고 죽음으로서 쫓아 보냈습니다. 쫓겨나신 주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다 예수님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우리마저 주님의 거룩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쉬지 말고 기억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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