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1강b 1002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1. 20:24

대전100204b마태복음1강b

2010-11-10 13:40:31    녹취 : 송재원
 

아까 쉬는 시간에 질문 하신 것 있었지요? 질문이 이러한데요. 어떤 목사님께서 예언을 하시는데 과연 이 시대에 아직도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2011년도까지 예언하시는 분을 예언1이라하고, 2012년까지 예언하는 용한 사람을 예언2라고 합시다. 그런데 2100년까지 예언하는 사람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예언가이겠지요? 그러면 역사 끝날때의 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은 그야말로 예언가중의 예언가겠지요? 그런데 그분이 누구냐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복음을 아는 목사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끝날때를 예언하셨지요? 그러면, 끝날때를 예언하셨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해도 너희들은 휴거되어서 주님이 재림 하실때에 천국간다.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해버리면, 앞에 2011년 2012년도의 예언가들은 그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죠. 마치 촛불이 태양앞에서 의미가 없듯이 말입니다.

문제는 2011, 2012년도에 예언한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하면 괜찮은 일인데요. 그 예언이 생명 차원이 아니고, 생존 차원의 예언을 해서 사람을 꼬시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예언을 가짜들이 앞에 등장해서 가려버리니 말입니다. 진짜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인간의 욕심으로 인도하니까 이것은 은사라 할수 없죠. 진짜 성령받은 예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까 이야기 했던, "죽어도 살겠고". 이것보다 더 이상의 예언은 없습니다.

또 두번째 질문이 있었지요? 두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하면됩니까?"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어렸을적부터 어른이 되실때까지 키나 지혜가 자라나셨는데, 어린아이들도 자라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자라나느냐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갓 나왔기때문에, 그 아이는 아직도 엄마의 자궁안에서의 생활이 유지가 됩니다. 다만 자궁안에서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하면, 시각적인 것과 구강적인 것이 새로운 모빌을 달듯이 딸려나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자기 나름의 정신적인 것이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직도 엄마와 한 몸체이기 때문에. 그런데 6개월이 되게 되면, 라캉은 거울단계라고 이야기 했는데요. "엄마 몸하고 내몸이 다르구나"하는 이걸 알아요.

자아,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하면, 떨어짐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자가 남자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10년뒤에 결혼한 이 남편이 살해됐다 혹은 이혼됐다고 한다면 그 여자가 결혼 전으로 돌아갈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돌아가지요. 왜냐하면 남자의 빈자리가 생기거든요. 남편을 잊지 못해서 그 남편만 생각하면 막 웁니다. 그런데 10년동안 아직 결혼을 안한 친구가 옆에서 그러는 겁니다. "거 왜우노? 남자 많은데 왜울어?". 이 친구와 남편잃은 사람과의 차이가 뭘까요? 자기는 결혼을 안 해보았기 때문에, '빈자리'가 없는 거에요.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거에요.

이것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해봅시다. 요셉하고 그 형제들 사이에 일입니다. 요셉이 애굽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가나안땅에 기근이 일어났잖아요. 그런데 형제들이 양식 사러 애굽으로 왔을때 요셉이 "형님! 오랫만입니다!"하면서 악수하며 반기면 될텐데, 왜 요셉이 자기 정체를 숨깁니까? 왜 숨길까요? 그것도 3번씩이나요. 처음에는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두번째 베냐민도 잡고요. 이렇게 왜 세번씩이나 왔다 갔다하도록 합니까?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은, 잃어버린 긴 빈자리가 있어요. 옛날에 촐랑대면서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그 요셉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요셉 되었다는 잃어버린 경험. 탕자의 경험(완전히 초죽은 당했다가 살아난 경험)이 없으면 야곱과 형제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곱과 형제들은 자기세계를 포기해야 되요. 포기하기 위해서는, 야곱과 형제들은 요셉과 같은 경험을 해야되요. 무슨 경험을 당해야하냐 하면은, 자기가 진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몽땅 다 드러냄을 당해서, 다 잃어버리는 경험을 해줘야해요. 그래야 요셉의 세계에 합류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럴때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하시는 분이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을 여기에서 알아챌 수가 있는 거에요.

이 이야기를 아까 질문에 적용시켜 봅시다. 아이가 자아가 생기는 것은, 무엇과의 분리입니까? 엄마 따로 나 따로가 되지요. 엄마 따로 나 따로지만, 아이에게는 여전히 빈자리가 있습니다. 그 빈자리를 프로이드라는 사람은 뭐라고 했느냐하면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하면, 엄마하고 하나되었던 사랑이죠. 그래서 어른은 아무리 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그 빈자리가 무엇이냐하면요. 엄마같이 무조건적으로(일방적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잘했다하고 칭찬하고 이뻐해주고 착하다해주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주는 엄마같은 그런 사람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바로 그때부터요. '엄마같은 사람'을요.

만약에 엄마에게 어릴때 상처를 받았다합시다. 이것을 정신적인 용어로 트라우마라고 하는데요. 이 엄마를 대신해서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 애인'이나, 예수님이라든지, 신적이미지,성부성자하나님등을 집어 넣어요. 그래서 수녀들. 대부분이 정신병자입니다. 신부들 이런 사람들. 이 사람들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자기방어가. 아주 자기에게 예민한 사람이에요. 그 빈자리가 없으니까, 자기 자아에 대해서 아주 집착을 하게 되요. 여러분 떡을 전자렌지에 구어보세요. 한 3분을 구으면 말랑말랑하지요? 그런데 한 서너번 그렇게 구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요? 완전히 숯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수녀라고 보시면되요. 누가 옆에서 간섭하고, 잔소리 해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목사야 자연스럽게 부인이 있어서 잔소리를 받는거에요. "당신은 복음은 아는데, 집에 왜 생활비는 안가져다 주나?"라고 잔소리를 해주는 분이 있기때문에 참 다행인데요. 그런데 이런 독실하게 사는 사람들 보세요. 저는 완전히 전자레인지 안에 놓여있는 딱딱한 떡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엄마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해요. 이 욕구를 가지고 교회에 오게되면 아가페 사랑이라는 소리를 듣게되요. 목사들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사랑에는 세가지가 있다는 거에요. 첫번째. 아가페사랑, 두번째. 필로아 사랑, 세번째 에로스 사랑. 이렇게 세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거짓말 입니다. 이 목사는 철학자들을 공부하지 않았어요. 에로스 사랑이라는 것이 요새 말하는 성화론을 말합니다. 필로스 사랑은 에로스 사랑에 합쳐지는 겁니다. 아가페 사랑은 신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주는 사랑'이 아니고, '빼앗는 사랑'을 말하는 거에요. 종속이지요. 폭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가페라는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지를 못합니다. 목사들이 이런용어를 사용해서, 유식한 척을 하는데요. 이런데 속아넘어가면 안됩니다.

이 빈자리. 아기가 커가면서 이 인간의 빈자리를 채울때, 이 빈자리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신앙'이 들어와요. 신앙이 들어온다고요. 그런데 이 신앙은 진짜 신앙이 아니고, 종교성입니다. 이 종교성이 그 빈자리에 들어갈때, 인간은 부모로부터 선악관을 받았기 때문에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를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로마서 7장 이야기입니다. 나는 선하고 싶은데 내안에 뭐가있다? 악한 것이 있어서, 누가 우세했습니까? 선하고 싶어하는 나를 짓밟아 버리고, 악한 것이 우세하게 나온다. 악한 것이 우세하지만, 그 악한 것을 우리는 무시해버리고 선한 것을 안다는 이유때문에, "나를 선하다고 이야기 해줘" 이말을 합니다.

"악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안다는 나 자체를 참 대견스러운 존재로 인정 해줘". 강도가 강도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강도인 그 사람은 "나는 강도짓이 나쁜 짓인줄 알기 때문에, 판사님이여 나에게 선처를 부탁합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도둑질을 했다고 합시다. "어쩔수 없었습니다.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부모가 날 버렸기에 내가 생존차원에서 살기위해 빵을 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처해주세요" 이렇게 말하지요.

이 말이 뭐나하면, 내가 나쁘다는 것을 안 그것이 선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내가 나쁜 죄인인 것을 안다는 그 선한 이미지를 보셔서 구원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진짜 어려운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하시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머리가 돌아가느냐 하면은, "맞습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손들께요. 손을 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손 안든 인간보다도 나를 먼저 구원해주세요" 이런 계략을 끄집어 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 계략을 끄집어 내든 안 내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건져버려요. 그래서 진짜 택한 백성의 특징이 뭐냐하면은, 내속의 그런 계략. 하여튼 성경대로 모방하고, 성경에 일치되기위해서 그럴싸하게 행동하는, 촐랑대는 그런 모습을 하는 것. 촐랑댄다는 말을 할때 제가 생각하는 모습이 뭐냐하면요. 가게가 신장개업을 하면 커다란 키다리 풍선을 가게 앞에 놓잖아요. 그 풍선이 얼마나 까부는지 몰라요. 이리저리 흔들고 그러잖아요. 뒤에 스위치 한번 뽑아보세요. 무슨일 일어나는가요. 그 풍선인형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몸 건강하니까, 술먹고 담 타넘으면서 까불고 하잖아요. 그러나 나이 한 팔십 되어보세요. 담 타넘는가요? 밑의 플러그 뽑아버리면, 요양원 보내져서 누워만 있어야되요.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 기가 살아있으니까 촐랑대는 거지요.

근데 그 촐랑되는 것과 관계없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하지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요. 난 촐랑대지 않는다는게 아니고요. 나는 남들처럼 착하다는게 아니고요. 어찌됐든 구원은 내 행함과는 관계 있다 없다?. 없다 이말입니다. 내가 "죄인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손든 그것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 안든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니 마음대로 하라니까요. 손 들고 안들고 하는 그것하고 구원은 관계없다는 말이지요. 아~ 정말 이것은 성령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요. 정말 무엇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에요.

하루는 집에 감이 한박스가 와 있어요. 그래서 "여보, 감 누가 보낸다고 말했던가?"."몰라","나도 모르겠는데". 그전에 우리가 감 오라고 촐랑대지 않았습니다. 전에 우리 부부가 앉아서, "주여 저희에게 감을 주시옵소서" 철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오후에 보니까 우리가 없는 사이에 택배회사에서 감을 배달해놓고 갔더라 이말이지요. 그럼 감이 여기 존재함과, 우리의 행함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없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큰일났다. 오늘 마태복음 진도 다 못나겠네요.

여러분 밀수범이 '밀수' 할때를 생각해 봅시다. 전화번호부 같은 데에 홈을 파서 권총이라든지 야쿠자칼 같은 것을 숨겨오지요. 근데 그 전화번호부가 두껍지요. 두꺼운 거기에 밀수범들이 공간이 생기도록 홈을 파서 밀수품을 넣어서 가져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세관원들이 보면, 그것을 책으로 보지요? 그런데 통과하면 밀수품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요? "책이 아니지롱~책이 아니지롱~"하면서 말입니다. 밀수범 자신은 그 안에 권총과 칼이 들어있는 것을 아는 거에요.

바로 성도가 이런 것입니다. 성도라는 우리 안에 누가 들어있느냐하면요. 예수님이 공짜로 주신 '어떤 인간이 되도, 교도소에 열번 갔다와도 구원할 수 있는 십자가 은혜'가 파인 홈안에 중앙지점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두께는 무엇에 비유하냐하면은, 아까 촐랑대는 키다리 풍선인형이에요. 그러니 다른 교인들이 보기에, "너희들 그렇게 까불어대가지고 구원받을수 있겠냐? 그렇게 봉사 안하고 헌금 안해서 축복받겠느냐?" 이렇게 말하지요.

하지만 본인은 알지요. 자기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이것하고 행함하고 관계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십자가 행위가 내안의 중심에 홈을 파서 들어 앉아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홈이 파여 있으니까, 내 행함과 상관없이 이 곳이 예수님의 자리가 되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내 중앙에 대신 죽으신 그분이 살아있다는 거에요.

나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있는 것을 옮기는 운반체가 되지요. 하나의 매게물이 됩니다. 그것을 로마서 9장에서는 그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그릇. 안 믿는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죠. 저주의 그릇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그릇이고요. 그리고 디모데 후서에 보면, 우리는 가정에 있는 부엌 그릇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이렇게 그릇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릇이 되었으니, 그러면 이 사람은 자기 자랑하겠어요? 아니면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쾌재를 부르지요. 무엇때문에? 자기가 선한 일을 해서 쾌재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 이렇게 못나도, 내안에 누구 있지롱?" 이라며, 쾌재를 부르지요. 이것을 두고 자기를 증거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를 증거한다?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홈이 파여져야 하는데요.

이제 본격적으로 합니다. 아이가 크면서 자아의식이 생기면서, 그 인간 속에 엄마의 사랑의 흔적이 있지요. 엄마의 사랑. 이 엄마는 어떤 엄마냐 하면요. 나에게 무조건 잘해주는 엄마죠. 그렇다면 나의 선한 이미지와 맞는 엄마가 되겠지요. 그럼 여기에 오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그런 예수님을 원하죠. "너는 뭘해도 죄인이야"라고 말하시는 예수가 아니고요. 뭘해도 잘했다고 말해주는 예수. "헌금했습니다" "아이구 잘했구나" "기도했습니다" "아이구 이 추운데 새볔 기도도 나오고". 아무튼 뭐든지 잘해 주는 예수지요. 그러니까 이 예수는 가짜 예수고, 우상 예수입니다. 그런데 목사나 교인들은 무슨 예수를 원합니까? 내 마음에 맞는 예수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인들 백명이 오면, 그 백명마다 자신이 믿는 예수 이야기가 다 다릅니다. 각자 다 자아용 예수를 내어놓아요. 자아용 예수말입니다. 그 모든 예수들 앞에 보면, 전부 자기 이름이 붙어있어요. 차 번호판 붙이듯이. 그러니 이런 예수라는 것은 구약으로 말하면, 우상이 되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뭡니까? 바리새인들이 왜 자꾸 착한 일을 그렇게 많이하나요? 새해에 두번씩 금식하고, 힘들고 하는 그런게 모두 뭡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신을 진짜 신으로 보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굴까요? 사도바울이지요? 사도바울이 옛날에 예수님 만나기 전에, 사울때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경유했느냐 하면요. 바로 자기가 알고있는 자기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경유했어요. 그러고 보니 나온 결론이 뭐였냐 하면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여라'라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누굴 죽여야 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닥치는데로 잡아다가 죽이는 것. 이것을 옳다고 본거에요.

그런데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다메섹에서 사울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예수를 만났죠. 그런데 그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한 질문이 있어요. 근데 그 질문이 아주 재밌어요. 그 질문을 한번 적어볼게요. 이것이 모순인데요. 적어보면.

"주여"

그 다음에,

"누구십니까?".

이게 말이 안되지요?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은요. 이미 주여라는 말은 "당신이 하나님인줄 아는데, 지금 전에 있던 하나님과는 다른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묻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 질문이 나오기를 노리고 기다리다가, 대답하시지요. 뭐냐하면은, 그냥 난 예수다가 아니에요. 이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이말이지요.

니가 평소에 가져왔던 신적 이미지는 오히려 참 하나님을 구박하는 마귀가 지어놓은 가짜 이미지의 신이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인간의 신은 다 가짜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알고 난 뒤, 그때부터 바리새인 적으로 알았던 구약해석을 다 뒤집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님께서 이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에 모두 관여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구약 전체가 누구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깔아놓은 빨간 카펫트를 걸으신거에요. 영화제할때 뭐 밟지요? 레드카펫 밟잖아요? 구약 전체가 예수님이 밟아온 발자취라는 거에요. 그때 밟아오면서 주께서 먼저 던져 준 선지자들의 여러가지 공통점이 뭐냐하면요. '고난 받았다는 것'이에요. 고난이요.

예레미야 고난받고, 이사야 고난받고요. 왜 고난받는가? 사람들이 기존에 생각하는 어릴때부터 자라왔던 엄마의 빈자리. 무조건 나보고 "잘했다, 훌륭하다, 너 이러면 천국갈수 있어" 라고 무조건 나를 긍정해주고, 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협조적이였던 그 착한 하나님의 이미지. 저는 그걸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이미지라고 하는데요. 물론 산타크로스는 "울면 안돼"라고 하는 조건이 있지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같이 그냥 공짜로 주는 그 산타클로스가 뭐로 바뀌게 됩니까? "얼마나 내가 나쁜 인간인가, 이런 못난자였는가."하면서, 날때 부터 죄 중에서 태어난 이 인간때문에 내가 저주받아야 될 것을 대신 저주받는 그런 희생자가 있었는데. 이 피흘리는 나사렛 예수로 바뀌게 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오신 영이기 성령이시기 때문에요. 그 전까지는 성령이 어디 가 계시지요? 예수님한테 가있지요.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갑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지요? 예수님한테 성령이 가 계시다가, 성령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히브리서에 나와요. 벌하는 것도 성령께서 벌하게 하십니다라고 나와요. 또 고린도 후서 13장에 이게 나옵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한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아까 전화번호부 안에 팠던 홈처럼, 그 홈에 다가 예수님을 직접 성령을 통해서 담아버린다는 이야기가요.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그릇으로 변하게 됩니다. 누구를 모시는 그릇이 되지요? 예수님을 모시는 그릇. 그러면 그 예수님은 의인이지만, 우리가 덩달아 의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가요? 우리는 날때부터 죄인이지요. 그러니 이 홈의 바깥 책은 죄인되고, 안에는 뭐가 됩니까? 의인되니까요. 하나님보시기에 우리의 안쪽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를 의인이라 해주는 거에요. 그 관계때문에 의인이라는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죄인인 걸 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죄가 없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나옵니다. "화목제물이 너희 안에 있으면, 하나님은 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너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의 화목제물을 보고 너희를 하나님의 의로 간주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로마서 5장같은 경우를 보면, 너희가 나에 대해 경건치 않은 자고, 나에게 원수된자고, 죄있는 자이지만, 너희 속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그 피로 말미암아, 너로 하여금 의인 되게 했다. 이런 같은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있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행한 것이 없이 의로움을 받는 의의 조상이 되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하는 겁니다.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냥 그릇에 의인되시는 분이 들어있다는 그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데요. "믿는 것도 행위 맞잖아요"라고 하시는데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선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무엇이 행함이며, 무엇이 믿음인가가 거기서 일단 케이스가 확정이 되요. 믿음이라는 개념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순종하셨잖아요. '순종'하면 많이 보던 사람 있죠.사이트 '순종이'. 아무튼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순종이 순종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홈이 파여져서 들어옵니다. 나는 죄에 순종해야 될 사람이죠. 그런데 우리 홈 안에 있는 예수님이 주인 노릇을 하세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죄인 맞습니다"라고 주님이 하신 십자가에 순종함으로써 의의 순종함으로써 그 다음부터 의의종이 되는 겁니다. '자기 의'의 종이 아니고요.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점에서, 그 의에 종속되는 의의 종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뭐라고 나옵니까? "너희가 예수님과 함께". 그러니까 권총하고 전화번호부하고 함께 있는 것을 세례라고 하지요. 연합되는 것이에요. 떨어질 수 없어요. 세례가 되었으니, 너는 전에 '너 자신의 선악적인 것을 증거하는 죄의 종'이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의를 증거하기때문에, 너는 의의 종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의 '선한이미지, 악한 이미지'를 가지고, 전에는 악한 이미지로 살았지만, 이제는 선한 이미지로 산다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이것은 선악과 논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잖아요. 오늘 강의 처음에 한 것처럼, 그 선악과 논리에 머물러 있는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그런 조건에 그 사람은 머물러 있는 거에요.

"아니! 착하면 되잖아요! 착하면 되잖아요!" 하시는데요. 그게 문제에요. 착하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로마서 7장에 의하면, 착할 수가 없어요! 그게 위선자가 되는 거지요. 착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요. 이미 주께서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착한일을 시작하신분이 끝까지 우리 안에서 이루십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지요. "내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그 본문을 가지고, 세상에! 자기가 착해질려고 하니까요! 점점 더 자기는 생존단계에서, 전자레인지에 들어있는 딱딱한 수녀처럼, 떡처럼 쌔까만 숯이 되지요. 누가 자기를 건드리면, 벌컥 화를 내지요. "내가 얼마나 착한데 나를 건드려!". 이것에서 나오는 것이 내신 성적입니다. 목사는 80점이고 장로 너는 70점이고, 너가 나를 따라오려면 멀었다는 것. 이게 내신성적입니다. 물론 최고 정점은 예수이고요. 예수를 따라 붙어야 구원받는다 이런 내신성적이 있어요. 이건 단계설이라고 불교에 나와요. 불교에는 무려 41단계가 있습니다. 아직 기독교가 불교 따라 갈려면 멀었어요. 41단계나 있어요. 기독교는 기껏해야 5단계, 6단계잖아요. 아무튼 불교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시간이 나면, 나중에 알려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사람 다 똑같아요. 불교나 유교나 단계가 다 있습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어린아이가 어른될 때, 자아의식에 빈자리가 생깁니다. 근데 그 빈자리는 뭐다? 선악적인 것이 들어있어서,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핑계대면서 자기를 악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선한인간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 의'라고 하지요.

로마서 10장 2절에 나오지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쌓기 위해서, 누구한테 열심이 있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경유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이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어릴부터때 가지고 왔던 '엄마사랑'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해서 거기에다가 바로 예수고 하나님이고 성령이고 바로 집어 넣는겁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것이 드러나지 않고, 내가 예수 믿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교회는 이런 사람을 확보해서 고객 삼아서 이용하려고 할수 밖에 없죠.
 
결론적으로 말해서 뭐냐하면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해주신 거에요! 하이카가 알해서 다 해주듯이 말입니다. 차 사고가 나면 하이카라는 보험회사가 와서 알아서 다 해주는 거에요. 처음부터 알아서 다 해준거에요. 창세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나야 될 이후까지 알아서 다 해주는 거에요. 이후에 있어서 예수님 세계 안에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그릇이라고 알아서 정해 놓으시고, 어느 시기에 깨닳게 하시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런 걱정을 해요. "목사님 만약에 그렇게 살다가, 또 내 육체가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아까 전화번호부 안에 홀도 있지만, 바깥에 두꺼운 종이도 있잖아요. 그것처럼 까부는 풍선인형이라는 자기 잘난 체가 또 발동을 해서, 안에 있는 예수님을 다 잊어버리면 어떡케 합니까?"이렇게 걱정합니다.

여러분, 신랑은요. 신부가 설사 집을 가출한다 할지라도요. 신랑은 값을 주고, 그 신부를 놓치지 않습니다.

구약에 어디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호세아'에 나오지요. 그 사랑을 아세요? 사랑은 내쪽에서 신랑을 붙들었으면, 내가 힘빠지면 놓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가서에 보면, 신랑이 자기 좋아하는 여자를 붙잡기 위해서 팔을 뻗어요. 그런데 이 여자가 수줍음이 어찌나 많은지 문을 콱 닫아 버린거에요. 문을 닫으니까 어떻게 되요? 신랑의 팔이 신부 집의 문에 끼어버려요. 팔이 문에 끼어서, 이 여자가 "어머나~어쩌나" 이렇게 막 당황하지요. 그런데 신랑 되는 솔로몬 왕이 하는 말이, 손만 넣고 "걱정하지 말고 이거나 받으세요"라고 하면서 몰약을 줘요. 동방 박사가 줬던 게 몰약이잖아요. 몰약, 생명의 약을 놓으니까, 그것이 이 여자의 온몸에 적시더라..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은, 사랑은 뭐보다 세냐는겁니다. '죽음보다 세다'입니다. 이것이 아가서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사랑은 너가 죽어도, 그 사랑은 너를 건져낸다 이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고린도 후서 10장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조각품이에요. 남자가 그렇게 자기것을 다 빼주고, 자기 노력한 것을 다 퍼붓는 그것이 뭐 때문에 그런가요? 여자라는 동상하나 세우기 위해서! 그런 남편이 있다는 것을 지급 성급하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다는 거에요.

남편이 되었으면, 여자 하나 반듯하게 행복하다면, 그게 남편이 죽음을 다해도 그것으로 남자의 면류관이 되는 겁니다. 남자분들 잘 들어 놓으세요. 여자 하나와 결혼할 때요. 그냥 거래하듯이 하지마세요. "니가 나에게 잘해주면 잘해줄께" 그러지 말고요. '니만 잘되면 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렇게 해야 결혼이라는 걸 할 수 있어요. 여자들은 지금 그런 환상속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하하하). 물론 시댁 쪽에서는 남자의 간을 빼먹으려고 한다고 하면서 달려들겠지만, 그것은 시댁쪽 이야기고요.

어쨋든간에, 성경적으로 보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남자가 정성을 들이는 그 초점이, 여자한테 모여집니다. 이것은 바로, 남자는 예수님이고, 신랑은 예수님이고, 누가 신부입니까? 교회가 신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 몸 바쳐서 정성 받쳐서 사랑해주는 것은, 자기의 교회가 지옥가는 것을 그냥 방치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게 성령이 오면 말씀대로 그대로 믿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진짜 교회. 진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은요. 맨날 누구 자랑하느냐 하면요, 맨날 지 신랑 자랑해요. 우리 송선생님하고 똑같애~. 맨날 자기 신랑 자랑 한다고요.(모두들 큭큭큭) "우리 신랑같은 사람 없다" 이거에요. 늘 말씀나누고요. 결혼 안한 사람 약 올라할만하죠.

"세상에 우리 신랑같은 사람없다!". 그게 우리 신부된 사람들이 하는 자랑이에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늘에서 예루살렘에 신부가 내려오지요. 그 신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게 도대체 신부가 누구 솜씨인가?"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되요. 신랑이 아름답기 때문에 신부가 아름답다. 그러니 신부가 아름답게 단장한 것은 누구덕분이다? 신랑되신 주님이 하늘에서 영광스럽기때문에, 그 영광을 힘입고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에요. 이 땅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요. 하늘에서 이미 내려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것 하나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화번호부'하고 '밀수범'!

밀수범이 전화번호부에 홈을 파요. 그러니 전화번호부 없어지면 안됩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여러분들은 예수믿었지요. 이제부터는 성화되세요. 여러분은 죄인 아닙니다" 이런 소리하면, 큰일납니다! 이거는 말도 안되요. 우리는 전화번호부에 그냥 홈이 파인 거에요. 근데 모든 주도권은 누가 쥐었습니까? 전화번호부가 아니죠. 중앙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예수님이 그 영역에 발생되어서, 바깥에 있는 죄를 날마다, 안에 있는 주님의 피가 날마다 씻어내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은 뭘해도 주님 영광이고, 뭘해도 주님 고맙습니다. 이걸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이지요. 범사에 모든지 감사해라. 로마서 8장.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오지요.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는자를 영광스럽게! 영화라고 하면 또 오해하니까요. 그렇게 이미 "하였느니라"라고 하셔요. 이게 부동사이거든요. 부동사라는 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미래가 되더라도 그 미래가 이미 지금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관계없는 TO부정사에요. 시제와 관계없는겁니다. 미래가 아니고, 이미 여기 확정된 것이 지금 그대로 유지된 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럼 이렇게 보면, 어린아이때에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하는가요? 어린아이때는 바로 '선악'을 갖고 있기때문에, 애들은 이것밖에 몰라요. "엄마! 어떤 것을 하면 내가 매 안맞어?". 무엇이든, 사랑하는 엄마가 싫어하면 나쁜것이고,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좋아하면 좋은 거에요. 근데 엄마가 다른 남자 만나서 바람피웠다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 새엄마가 들어온다면,새엄마에게는 엄마가 하라 그러면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해버리지요. 그것은 누구한테 상처받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자기의 본 엄마한테 상처 받았기 때문에 반대로 나가는 거에요. 그래놓고 책임을 누구에게 돌린다고요? 집나간 엄마에게 책임을 돌리지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지요.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미리 예언을 하는거에요.

"얘야 니가 나쁜 짓을 해도, 용서해 줄 사람이 있다. 하지만 네가 나쁜 짓 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너를 용서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믿는 것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나쁜짓이야."

"엄마,그분이 누군데?".

"바로 예수님이 너를 용서해주려고 준비했는데, 너는 24시간 우리 상원이 자기밖에 생각 안하고, 예수님 생각 안할때. 그걸 예수님이 싫어한단다. 엄마도 니가 그런거 싫어해"

라고 하면서 엄마하고 예수님하고 한짝이 되세요. 그러면 애들은 엄마 아빠의 말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고요. 엄마 아빠의 행동을 보고, 바로 그것을 모방하게 되어있어요. 모방하지요. 엄마가 예수 안 믿으면서, 애들 보고는 믿으라고 하면 됩니까?

이제 마태복음 진도 나갑시다. 보통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고 성경 읽으라고 하면, 창세기부터 보통 안 읽지요. 마태복음부터 읽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이나 전도하는 사람들이 성질이 급해서, 빨리 예수믿고 빨리 천국가라고 마태복음을 권하시는데요. 마태복음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구약이 있습니다. 구약이 있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이 있는거죠. 마태복음부터 읽으라는 말 자체는 좋아요. 하지만 그 전에 구약은 이렇게 흘러 왔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어야 되지요.

그러면 구약은 뭐냐? 문제에요. 그리고 신약은? 답입니다.

예를 들어볼께요. 수학시험을 치루는데, 학생들이 컨닝을 하는 거에요.

"선생님 오기전에 얘기해줘! 답이 얼마야?"
"8번이야!"
선생님이 오시죠.
"너 왜 8번 이라고 적었느냐"
"답은 그냥 8이잖아요"
"왜 8이라고 적었느냐 이말이야"
"아니 답이 틀립니까?맞잖아요"
"아니,답은 맞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8이 나왔어?"

그렇게 물으시니 학생은 말문이 막혀서 막 지어내는거에요. 답이 8이라도 과정을 모르니까, 그 답은 틀린 답이 되는거에요.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보고 무조건 예수라고 하니까.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들이댑니다. 마치 남녀호랑교같아요. 그 종교에서 뭐하는 줄 아세요? 주술을 외우잖아요. 문장을 외우면 자연적으로 병이 낫는다는 종교에요. 원리가 아주 간단하죠. 우리나라의 원효대사가 창시한 불교가 뭐냐하면요. 나무아미타불하게 되면 어떤 서민이라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종교입니다. 원효대사는 불교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요. 그 당시 신라시대 사람들안에 있는 무속신앙에 대해 감을 잡은 거에요. 이렇게 하면 이데올로기로 전국민을 불교에 가입시킬 수 있겠다는 거에요. 그러니 쉽게 하는거에요. 인간이 쉽게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특정한 문장에다가, 영적인 효과를 준다고 그렇게 하는거에요. 그러면 인간은 입술이 있고, 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되풀이해서 반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하면은, 인간의 자아의식때문인데요. 인간의 모든 교육은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했지요. 그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요. 아리스토텔레스라카는 사람 있어요.하여튼 엄마 이게 뭐야? 안경안경!하면 옳지옳지 합격! 빵하나더줄게. 이것은 개나 다람쥐나 고양이를 키울때도 마찬가지에요. 똑같은 것을 하게하고, 사랑하나 더 주는거에요. 어릴때는 그렇게 키워야지요.

특정한 문장을 반복해서 외워버리면, 그게 두뇌에 정보가 입력이 됩니다. 입력이 되어 버리면, 그것이 시냅스라고해서 두뇌세포가 있어요. 세포사이에 일단 정보가 3차원 이미지로 뜹니다. 이미지가 뜰때 일단 기초로 잡는 것이 주변에 있는 아빠,엄마지요. 주변에 있는 목사라든지요. 목사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교인들에게 심어줘요. "예수님은 무조건 복주십니다"이런 것들. 그런 것들을 교인들에게 심어주면요. 교인들의 이미지에 복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알던 신학적인 그것이 영상화-이미지화되지요.

일단 그것의 윤곽이 잡히면, 그것이 구조가 되고요. 거기에 맞춰서 다른 어떤 성경구절이든 집어넣게되요. "할수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않는 일이 없다"이런 것을 집어넣는다고요. 예를들어 큐티를 하면서, 그것을 집어 넣어버리면, 마치 내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가 참 예수님이 되어버려요.

그런 사람에게 이 십자가 복음 이야기를 하면, 단번에 튕겨내지요. "너 사람이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좀 긍정적으로 살면 활성화되는데 왜 자꾸 부정적으로 말해서 자꾸 쪼그라들게 하는거야, 그러면 아무것도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야?" 이렇게 맨날 나오는 질문이 거기서 거기에요. 지금 이 강의 들으시면서 이런 질문이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목사님 기도 할 필요 없네요" 이런 질문은 늘 나와요. 너무 태만하게 만든다던지, 방종하게 만든다던지. 그런식으로 막 들어와요.

그런데 아까 질문한 그 사람은 뭐가 없는 사람이다? 전화번호부안에 뭐가 없어요? 예수님이 안 계시기때문에, 예수도 아닌 나(이근호)한테 물어요. 그 질문을 기도하면서 물어야 될텐데요. 십자가 진 적도 없는 나한테 물어요. 그저 밥먹고 살려고 이짓하는 나한테 묻는거에요.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 없지요. 본인에게 예수가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복음을 들려주어도요. 결국은 "나는 예수님보다도 나의 즐거움으로 살겠다"고 그렇게 나와버리면 뭐 할수 없어요. 어쩔수 없어요.

어쨋든 간에, 이렇게 교육은 모방이고 이 모방이 들어오게되면, 이미 습성화된 상태에서 구약 신약을 보게되는겁니다. 물론 잘못된 것이지요. '가다머'라는 사람 이름 들어보셨어요? 이 사람이 말하는 게 뭐냐하면요. 모든 인간이 언어를 대할때는 그냥 대하지 않고, 선이해, 선견해, 선입관이라는 걸 가지고 본다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본다는 겁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 게슈탈트 이론이라고 해요. 같은 그림을 보아도, 어떤 사람은 노파로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아가씨로 보이는 그런 것. 이게 심리적으로 전경과 배경, 배경과 전경이 수시로 임의로 바뀌는 겁니다. 전경과 배경이 제일 혼동되는 것으로 유명한 사건이 뭐냐하면, 어떤 사람이 중국의 눈덮힌 대륙을 지나가다가, 예수님이 보고싶어서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마침 사진을 찍어놓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사진을 보니 안에 수염 난 예수 형상이 보이는 거에요. 수염 난 예수님은 AD 3세기 경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수염 없어요.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수염난 예수가 보인다고 떡하니 수염난 예수를 밥상 밑에 모셔놓지요. 그리고 그 사진 복사해서 온천지 교인들마다 다 붙여놓구요. 참 기가 차요. 그런 형상을 찾는 방법은 쉽습니다. 무늬 있는 벽지를 두시간동안 보세요. 여기에 예수님도 보이고, 사도바울도 보이고, 다 보입니다. 심지어 남편 얼굴도 보이고요. 군에 간 자식도 가만히 보면 보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싶은 것을 구성하면서, 그걸 자기가 되찾는 방식으로 하는 거에요. 목사가 설교를 20분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5분이라면, 5분만 챙기고 돌아오는 거에요. 그런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어때요? 전화번호부 안에 사도바울처럼 나사렛예수라는 해결자가 들어있는 사람은요? 이미 나를 의롭다하신 분, 아까 얘기한 '주심'이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요. 그 사람은 항상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요.

"회사 짤렸네 주께서 또 뭐 취직하라고 하시는구나"
삼성그룹에 취직하면
"또 주께서 일하라 하셨구나"
"또 구조적인 모순속에 있어봐라 하시는구나"
"주께선 또 요번에 의사되라 하시네 아~귀찮아 죽겟는데"
"아 또 신부가 혼수 5억 해오겠다는데 5억 어떻게 받지".

이런식으로 항상 아무리 받아 챙겨도, 중요한 것은 내안에 있는 예수님이 이 5억보다 더 중요한 거에요. 그런데 이 예수님이 안에 없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난 예수님덕분에 5억받았다!" 이러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은 남들은 몰라요. 그런데 본인은 알아요. 본인은~(전두환 흉내)알아요 그것을요. 본인은 안다고요.

본인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구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바로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는 가장 근접한 지점의 인간을 대표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가지고,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합니다. 오늘 어려운 용어. 유식한 용어 막 나옵니다~

'보편적 단독성'. 무슨 뜻입니까? 재밌지요. 단독성이라는 것은 하나를 말하고, 보편성이라는 것은 그 뒤에 줄줄이 수천 수만이 따라오는 거지요.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대표했다는 점에서, '언약 공동체'라고 해요. '언약 공동체'. 이것도 어려워요. 하나님께서 단군의 자손하고는 언약을 안 맺었고 누구하고 맺었다?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갔지요? 모세가 속한 민족.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와 맺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을 알려면 어디를 가라? 필리핀에 가지를 말고 어디를 가라? 이스라엘. 물론 지금 이스라엘 말고 옛날 이스라엘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다 드러낸 거에요.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두자로 '구약' 세자로 '새언약'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요. 그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그 이스라엘이, 포로된 시간이 무려 90%입니다. 놀랍게도. 제대로 한게 10%도 안되요. 진짜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 민족은, 자기 딴에 열심히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보았지만요. 90%는 남의 종되는 세월이였습니다. 우리나라 일제시대때 몇년 종되었지요? 36년이잖아요. 이스라엘은 전 역사의 몇퍼센트입니까? 90%. 현재 단군의 역사가 몇년입니까? 4500년이라고 하면, 거기에서 90%면 얼마입니까? 거의 4000년이에요. 이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지요. 맨날 남의 나라한테 얻어맞다가 볼일 다보지요.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다른 나라들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왜? 누가 안계시기때문에요? 하나님이 안계시기때문에 자기들은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내비둬요! 내비둬!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압니까? "아~ 하나님은 이처럼 무서운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거에요.

그래서 구약은 하나님과 가까히 있으면, "아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해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잘난체하면서, 춤추는 키다리 풍선인형처럼 까불지만요. 막상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들은 압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두렵고, 거룩한 분인지를요. 인간은 감히 그앞에서 구원받게 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다는 것을 알지요.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되지요. 그들이 보편적 단독성이기때문에요. 그런데 그들이 바로 저주받을 자라면, 우리 이방인들은 뭡니까? 성경에 나오는대로 말한다면 개죠, 개. 이런 개같은 이방인들이야 뭐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죄인. 구약에 의하면 죄인된 우리를,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자기가 대신 구원하기로, 희생하기로 확정된 사람에게는 대신 대속의 피를 흘려주어서, 이 피를 보시고, 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하십니다. 이 새언약의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주가 도리어 의가 되게하고 축복이 되게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우리라는 박스에 의가 차고 넘치게 한다니까요! 죄를 용서해버리면 우리는 죄에서 뭐가되요? 무죄가 되잖아요. 이러면 죄를 다시 지으면 또 죄인되고, 또 더러워 지잖아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아예 의인이 되게 한다니까요! 전화번호부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요? 우리 예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요. 아예 의인되게해요. 그런데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앞에 가면 뭐가된다? 의인되게 해요, 의인되게. 이것을 모르게되면, "아 전에 죄지어놓고, 또 개가 토한것을 먹는 것처럼 또 죄짓는구나" 이렇게 되어서,  "주님이여 이제는 주님 믿을 자격 못됩니다 이제는 바이바이 합시다"하고 낙담할 수가 있어요.

그게 아니고. 아예 우리가 의인되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요. 내 안경으로 나를 보다가, 우리 상원이처럼 맨날 자기를 보다가, 가끔식은 2초 3초 이렇게. 성령께서 "나를 봐도 그만이고 안봐도 그만이다 이미 주께서 다 해결하셨다." 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지요. 믿어지게 된 그사람은 예수님만 증거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누구의 증인입니까? 내 잘난 것의 증인이 아니고요.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 구약이 먼저있는데, 구약은 문제였다. 어떤 문제였습니까? 모든 인간은 죄인이였다.

답은 신약이다. 마태복음의 마태 그 다음에 무슨 글자있습니까? "복음"입니다. 복음 아닙니까? 복음이 뭡니까? 기쁜 소식이잖아요. 죄인에게만 눈에 들어오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만 즐겁기 짝이없는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 복음이 마태복음 입니다. 그 주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이제 달려갑니다. 주께서 태어나자마자, 십자가로 달려가요. 빨리 십자가로 달려가는거에요. 왜? 십자가를 통과해야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피가 발생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이땅에 태어난 것이 우리들 생존하라고 태어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예수님의 성령받고 보니까. 예수님의 피를 담고 예수님의 용서를 담고 사랑을 담고 긍휼을 담고 자비를 담는 그릇이 되라고 태어나게 하신줄 압니다. 이제부터 우리 자랑 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주님만 증거하는 그런 성령받은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2강d 100218 이근호  (0) 2014.05.21
마태복음2강c 100218 이근호  (0) 2014.05.21
마태복음2강b 100218 이근호  (0) 2014.05.21
마태복음2강a 100218 이근호  (0) 2014.05.21
마태복음1강a 100204 이근호  (0) 201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