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00204a마태복음1강a
2010-11-04 00:36:30 녹취 : 송재원
질문자: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전부다 돈을 더 끄집어내기 위한 장삿속으로 설교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은 자기입장으로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제가 듣기에는 저것도 장삿속이 아닌가.. 교인들의 헌금을 유도해서 끄집어내려는 수법이 아닌가라고 의심이 들때가 있는데요. 순수한 목사님의 의도를 외곡하는 내가 잘못인지, 아니면 정말 큰교회 목사님들이 정말로 그런 방식으로 하시는지?
여기 말씀의 책, 성경이 있는데. 성경이 여기있으면 이 성경에서 두가지를 끄집어 낼 수 있어요. 하나는 생존의 차원. 하나는 생명의 차원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생존의 차원을 끄집어 내는 것은 뭐냐하면, 이 땅이라하는 것은 창세기3장 이후에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이후에 저주가 뿜어져 나오죠. '저주'. 저주가 뿜어져 올라온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남자들은 이마에서 물과 땀을 흘려야되고, 여자들은 애기 낳을때 고통을 수반해서 해산하게 된다는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원리 원칙이 있다는 말이죠. 그럼 이 저주가 올라오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폴짝폴짝 뛰면서 살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산속에 들어가려고 해도 그것도 비정상적이고요. 어쨌든 땅과 더불어서 살아야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생존'이라고 하는거에요. 그럼 이땅에선 저주가 올라오고 본인은 살고싶어하고요. 자연적으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고생’이지요. '고생'. 고생이다 이말입니다.
자, 사는게 고생이지요. 사는게 고생스러우니까.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하면, 은혜를 기대하겠지요. 사는 게 고생스러우니까요. 은혜라는 말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있는 뉘앙스가 뭐냐면, ‘공짜로 주시는 것’. ‘공짜’. 공짜로 주시는 것을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은혜 받았더라" 이 말을 딱 들어보면 뭐냐하면, “야 이것은 공짜로 얻었데”. 또는 약간의 기도,약간의 간구,약간의 도고(다같은 기도의 다른 표현들을 말합니다. 간절히 하는 것을 간구,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을 중보기도 즉 도고. 모두 기도의 일종입니다). 이런 "약간의 기도하는 수고, 금식하는 수고만 하게되면 하나님께서 내 노동한 것보다 더 분에 넘치도록 30배,60배,100배 공짜로 주시더라"라고 기대를 하고 교회 문을 열게 되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들이 무슨 차원인가 하면, 이것이 ‘생존’의 차원이지요. 아쉬운 게 있어서 내힘으론 안되서 힘들때 교회 마룻바닥에 새볔마다 제단을 쌓고 빌면 생존차원에서의 혜택을 주는데, 이것을 교회에서 뭐라고 부르냐면 ‘축복’이라고 또는 ‘복’이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준다는 겁니다. 이럴때 이 사람들은 교회를 가도 관심이 뭐냐하면 ‘고생스러운 나’를 가지고 교회 가지요. 고생스러운 내가 기도하고, 내가 두손 모아도 고생스럽게 타터버린 발과 손 가지고 기도한다고요. 그러면 교회를 가도 관심사가 누구냐하면은 주님이나 하나님이 관심사가 아니고, '고생스럽게 너무나 힘들게 살아가는 나'가 관심사가 되겠지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모일때 강대상위에서 설교하는 목사들은 이미 온 고객들 (고객들 하면 약간 어폐가 있습니다만 고객들 맞아요). 이미 온 손님들이 관심사가 이미 '자기 생존'에 관심이 있더라 이말이지요. 자기 생존에 관심이 있다보니까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면 나는 잘사는데 옆사람 못살면 화가 더나요. 참 인간의 심리가 재밌는 것이요. 공짜를 주되 또 골고루 공짜로 주면 기분 나빠해요. 여기 아파트를 예를 들어보면, 고3학생이 10명 있다고 합시다. 그 학생 10명 다 서울대학가면 싫어해요. 다 떨어져야 하고 나만 되야해요. 그럴때 우리는 축복이 더욱더 축복값을 한다고 쳐주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고생스럽다는 것에 관심이 가있어요. 관심사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육체적인 고생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세끼 해결 못해서 고생스러운 것도 있지만, 또 상대적인 박탈감이란 것이 있습니다. 심리적인 것인데 ‘박탈감’. 남들은 공부 그렇게 잘하는데 왜 우리애는 공부 못냐하고하는. 항상 남하고 비교하는데서 오는 ‘박탈감’이지요. 그것이 여전히 생존의 차원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뭐라고 이야기 하시는가 하면, 기도하는 자에게만 특별하게 여러분들이 원하는 '박탈감 없는 혜택'이 주어집니다라고 말합니다. 단,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 헌금 열심히 하는 사람, 교회 충성하는 사람에게만 줍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교회를 나올때 교회에 와도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인 경쟁심이 유발되겠지요.
성경에서 공짜라고 나오는 것이 있는데. ‘만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나를 먹고 사람들이 기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한 사람이나 안한 사람이나, 교회 봉사 한 사람이나 안한 사람이나, 십일조 한 사람이나 안한 사람이나 매일 아침에 나가기만 하면 그대로 만나가 주어지니까요. 이것은 영 자기 심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거에요. 상대적으로 자기가 우세함을 얻어야 할텐데요.
그래서 교회에서의 은혜라 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느냐 하면, '그냥 주십니다'가 아니라 반드시 '조건'이 붙게 되었지요. "이렇게 이렇게 하신 사람에게만 이러한 혜택이 있었습니다"하는 간증거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하면, 간증에서 시작해서 간증으로 끝나버립니다. 이 간증하는 와중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생스러운 나 자신’이 점점 더 부각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간증거리가 되어서 저 간증거리 될만한 그것에 합세하고 싶다는 것. 나도 그 노선에 참여하고 싶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고 싶다는 것. 남들은 그렇게 못했는데 나는 그렇게 했다고 할때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요. “신앙생활 어떻게 했기에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까?”하고 줄줄이 와서 나에게 물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존재가치가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그것. 역시 다른 교회서는 안되는데 이 교회 와서 되었다는, 내 교회를 부각시키는 소속감. 이런 것.
이런 것이 바로 고생스러운 내가 교회 가더라도 머리 되신 예수님이 어떻게 고생했느냐는 마음에 안들어오고, 스데반 집사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하는 그런 것은 생각도 안나고 다만 교회를 가도 여전히 최종 관심사는 '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이 옛날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불교가 들어왔을 때에도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무속신앙이란 바탕위에, 자기만 아는 신앙위에 불교가 들어오든 기독교가 들어오든 천주교가 들어오든 아무런 의미없는 거에요. 반드시 남은 손해보아도 자신과 자기 가족만큼은 손해 보아서는 안된다는 그런 투철한 자기방어. 이런 것을 가득 안고 교회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아무리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도 '군중속의 고독'. 군중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자기자신에 대한 노림수는 절대로 잊지 못하지요. 절대로 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존의 차원에 목사가 같이 협상이 되고 거래가 되고 흥정이 되어 있어야, 장사가 되고 이익이 되요. 그런데 생존의 차원말고, 그 위에 무슨 차원이 있는가 하면은 '생명'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차원이라는 것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봅시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따 먹으라고 허락했을까요? 아니면 못 따먹게 했을까요?. 못따먹게 했지요. 우리 인간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고생을 그만큼 했으면 우리 '인간적으로'. 죽이지 말고. 인간적으로!
우리가 지금 땀흘리고 고생하는게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살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교회 가서 비는 것을 왜 하는 겁니까? 죽으려고 비는 것 아니잖아요. 사는데 좀 더 편하게 살고 싶잖아요. 편하게. 일단은 좀 편하게 살고 싶고. 더 나아가서 남의 부러움을 사면서 살고싶고. "아이고 저 집안 부러워 죽겠다" 이런 것. 뭔가 돌출되는 그 기쁨말입니다.
사법고시 만약에 200만명 뽑아버리면 사법고시가 의미 없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다 판사된다고 한다면 판사라는 것이 의미가 없지요. 뭔가 수십대 일 수백대 일 이렇게 떨어져야 의미가 있다구요. 참 이렇게 인간의 심리가 못되요. 아주 못됬어요. 누가 울어줘야 내가 웃을수가 있어요. "누가 울어줘야". 준이 아빠가 삼성 라이온즈 좋아한답니다. 삼성 라이온즈가 맨날 지면 준이 아빠 집에 오면 기분 나빠요. 왜냐하면 삼성 라이온즈와 나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철학적으로 하면 '주체의 확대'라고 해요). 내몸이 주체인데 삼성라이온즈를 좋아하면 삼성 라이온즈 팀의 움직임이 내 움직임과 똑같애. 2002년 월드컵때 꿈은 이루어진다 했잖아요. 한국 대표팀하고 한국 사람들하고 뭐가 되었습니까? '주체의 확대'가 되었어요. 홍명보가 골 넣으니까 자기가 넣은 것 같아요. 기분 좋지요. 이것이 주체의 확대 아닙니까? 그러니 이것은 하나가 모이든 둘이 모이든 인간은 자기 세포가 있고 육체가 있는한 생존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못 벗어납니까? 못벗어나지요.
그러니까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 수록, 내심에 뭐가 누적이 되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누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애썼는데, 하나님 당신 나에게 해준 것이 뭐냐?" 이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자기 몸이 힘든 것때문에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오기를 부리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당신이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오기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과도한 기도, 과도한 헌금과 과도한 봉사가 들어가지요. 그것을 목사들이 노렸던 겁니다. 아주 즐거워 하지요.
이제 부터 좀 어려운데요. 생명의 차원에 들어가버리면. 무엇을 알아야되느냐 하면은 "고생한다고 해서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 하나님의 이 심정을 니가 아느냐?"이 심정에 일치 되어야 합니다. 야 이거 어렵지요. 고생 했는데도 이 세상에서 죽도록 고생했다는 이유때문에 "너는 고생을 이렇게 심하게 했으니까 죽어서는 편하게 살게 해줄게"라고 거저 넣어줄만도 한데. 그걸 일체 안넣어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없다고 하느냐 하면은 고생한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남이 아니고 내가 고생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옆동의 아파트 406호 사람이 직싸게 고생했는데, 일이 잘 안되더라. 이때 기분 째집니다. 그리고 만약 406호가 교회 열심히 다녔는데 나중에 죽을때 보니까 지옥가더라, 역시 기분 좋아요. 역시 하나님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데 이야기가 406호가 아니고, 이 407호 바로 이 집이 당사자라면, 누가 누구한테 대들겠습니까? 내가! 누구에게 대들겠어요? 하나님께 대들지요. "하나님 저 그만큼 고생하고 교회 헌금하고 십일조 다하고 금식하고 다 했는데 왜 저의 열심 봐서라도 넣어 주시지. 우리 목사님은 간다고 분명히 장담했는데. 왜 하나님은 안 넣어주십니까?"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말씀대로 이야기 하셔요. "선악과 따먹고 애기 낳으면서 해산하면서 고생하고 선악과 따먹고 이마에 땀 흘리면서 추운날에 시장에서 돗자리펴고 귤 하나팔아 애들키우는 그러한 모성의 세월을 보냈다는 이유때문에, 천국의 생명 나무 따먹게 하는 그런 식으로 창세기 3장에서 말씀으로 가르친 적이 없다" 이렇게 나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우리 목사님은 고생하면 들어간다고 하시던데?" 그것은 목사가 당신을 하나의 고객으로 생각해서 팬클럽 차원에서 그렇게 봉사한 것이고요. 실제로 성경에서는 고생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럼 목사님 고생안하고 자기 마음데로 살아도 구원받습니까?" 딩동!. 그렇습니다. 구원받습니다. 교회에서 이 이야기를 못해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1년에 한번 나왔어도 구원받습니다. 2년에 한번 나왔어도 구원받습니다. 십일조같은 거 안해도 됩니다. 전도 하나도 안 했어도 됩니다. 다만 그래도 예수님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이 이야기를 교회에서 왜 못할까요? 그렇게 해버리면 무엇이 안될까요? '교회 장사'가 안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무슨 용어를 썼습니까? '거래'라고 했지요. '거래'. 장사, 거래라는 것은 어떤 용어인가 하면, 내가 상대방과 동등된 상태에서는 거래라는 말이 성립해요. 예를 들어 여기 콩나물을 살때 콩나물 파는 그 아줌마의 노예가 되려고 콩나물 사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내 돈 줄 것은 주고 콩나물을 사면, 이것은 거래고 흥정이잖아요. 이제부터 내가 아줌마의 식모이자 가정부가 되겠습니다. 이러면서 콩나물 사는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줄거 주고,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것 줄게. 십일조를 줄테니까 줄거 주고 받을 것 받겠다 하는 이런것이 뭐에요? '거래'이고 '흥정'이 되지요.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하는 거에요. 왜 이것이 좋냐하면은 하나님을 그렇게 나와 동등되게 만들어버리면 내 주체와 내 자존심이 여전히 살아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하나님께 내 몸을 헌신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까지 내가 나를 키우기 위해 나 하나 훌륭하고 착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 들였던 공들이 어떻게 됩니까? 무엇이 되버립니까? 하루아침에 무의미 하게 되버리죠. 목사님들이 맨날 하는 소리가 "젊은이여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빛과 소금 되기위해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복음을 알고 보니까 빛과 소금이 안되도 구원 받는 거에요. 그렇다면 목사가 평소에 "빛과 소금이 되세요. 빛과 소금이 되려면 우리 교회 오셔서 훈련하셔야 합니다. 담배피고 술먹고 하는 인간을 국가와 사회와 교회를 위해 일하는 훌륭한 선교사로 만들어 내겠습니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야기 하신적이 없다는 말이죠. 나중에 천국 가보니 빛과 소금이 안되도 천국 가더라 이말이지요. 그러면 그 목사님에게 따지기를 "빛과 소금 안되도 구원받는데 왜 당신은 빛과 소금 되라고 했느냐?"라고 하면, 그 목사는 뭐라고 대답 하느냐 하면 "내가 강단에서 당신들에게 빛과 소금되십시요라고 말할때에 당신들 기분 좋았잖아". 이 말이지요. 본인들 기분 좋아놓고 이제와서 왜 따지냐 이 말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빛과 소금되라 했을때 남들은 빛과 소금 안어되도 나는 이 훈련소에서 훈련받으며 저쪽과는 차별되는 빛과 소금같은 훌륭한 일꾼 되었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얼마나 대견해하겠어요?. "아~사람답게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얼마나 자긍심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거래'요 '흥정'이라 이말이지요.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실때에. 새삼스럽게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 보면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죄라는 개념이 뭐냐하면, 생명나무가 없으면, 생명나무와 차단되어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것이 '죄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주'이기 때문에 그래요.하나님의 저주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가 오는 것'이 아니고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저주하는 것'이에요. 방금 이문장은 줄을 그어야 될 정도로 중요한데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요. 자기가 죄를 결정해요. "나는 먹지말라는 술을 마시는 죄를 지었으니, 다음주에 헌금을 두배로 해서 죄를 상쇄시켜 약간의 착한 이미지를 더해야겠다"라든지, 성가대를 일찍 참석한다든지, 주일학교 교사를 한번 더 지원한다던지하는, 내가 화요일날 야동 본 죄를 주일 날 예배 졸지않고 드림으로써 상쇄시킨 다던지 하는 그것으로, 자기 내부에서 '거래'가 형성 되지요. 차변 대변이란 말이 있어요. 차변에는 착한일 써놓고. 대변에는 나쁜일 써놓고 그럽니다. 착한일 51% 나쁜일 49% 착한일을 2퍼센트 더했기때문에 '부끄러운 구원(기존교회에서 이야기하는)'이지만 일단 커트라인 통과 됬잖아요. 그러니까 어릴때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커서 나쁜 짓 해도 괜찮지요? 왜냐면 그만큼 저축을 많이 했기 때문에요. 정기적금같이. 어릴때 더군다나 부모말 잘 듣는 그런 착한일 많이 한 사람.
그런데 커서 취직해보세요. 취직하고 보니 상대방 라이벌 회사의 정보를 빼내야 하는 이런 것. 이번에 뉴스에 하이닉스 관련기사 나오지요? 삼성전자의 기밀을 저쪽에서 빼는 겁니다. 회사에 가보면 회사 자체가 경쟁이니까, 나의 물건 하나 팔기 위해서 상대방 회사를 폄하하고. 그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시기와 질투에 해당되지요. 차라리 갈라디아서와 에배소서를 몰랐으면 그것이 죄인줄 모르겠는데요. 괜히 교회 와가지고 성경하나 더 보니까. 취직하고 보니 말씀에 안 걸리는게 없어요. 집단적 구조적 범죄에 가담 안할수 없게 되는거에요. 성경에 다 걸리게 되니까. 그때 하는 말이 뭐냐하면은 "괜히 성경 봤어. 차라리 안볼껄".하는 거에요.
그때 '삐용~'하고 요술봉이 나타나야 하는겁니다. '피로 구원!'이라는 요술봉. 그렇게 되지요.
지금 여러분이 하신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길어진 이유가 있어요. 먼저 기본 개념을 아셔야 합니다. 차원이 두개있다고 했지요? 하나는 무슨 차원입니까? '생존차원'. 또 하나는 '생명 차원'이 있습니다. 생명은 인간 힘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쉽게말해서 인간의 행함, 종교적인 행함으로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 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따먹는다는 겁니다. 그게 벌써 창세기 3장부터 이미 법으로 굳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생명나무를 친히 '주어야' 먹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공짜'라고 해요. 진짜 공짜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공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존차원에서의 공짜를 원하는데, 진짜 복음에서의 공짜라는 것은 생명나무 과실을 공짜로 주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가 생명수 물이 흐르는 옆에 가로수처럼 쫙 놓여 있는데, 이것을 맘 놓고 따먹어라 이겁니다. 그런데 이 농사를 누가 지었습니까? 하늘나라의 생명나무 가로수. 그 농사 누가 지었어요? 바로 '어린양'이 지었습니다.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물가. 그것이 강이 되고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의 중앙에 강이 4가지 강이 흐릅니다. 그 네 강이 흘러서 에덴동산의 모든 동식물을 살리고, 또 누구를 살리느냐 하면은 에덴동산에 살고있는 아담과 하와를 살리지요.
또 에스겔 47장에 보면, 새로운 성전이 나오지요. 그 성전의 특징이 무엇이냐면, 물이 흘러나와요. 처음에는 물이 발목까지 오다가, 무릎까지 오다가, 나중에는 물이 차고 넘치지요. 물이 차고 넘치면서 새 성전 주변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살린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이야기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그림자라는 말이 어려우시면 얼마전에 서울에서 불났다는 뉴스 들으셨나요? 모델하우스에 불이 났어요. 모델하우스라 하는 것이 구약에서 나오는 새 성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걸가지고 '그림자'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림자만 알면 찝찝하잖아요. 우리는 설계자가 만들어놓은 설계도만 아니라 실제 아파트를 봐야지요. 그런데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실제 천국이라고요. 근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천국에도 똑같은 구조로 물이 흘러나오고 물이 있어야 생명나무가 자랍니다. 그런데 그 물은 어린양(예수님)이 계신 보좌에서 나오고 생명나무가 자라면 거기는 어린양이 공짜로 주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종합해 봅시다. 종합해보면, 간단하게 나와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죽어도 살리라". 이겁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죽.어.도.산.다.".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죽어도 산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좋아하는 사람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가 있습니다. 아주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 다음에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가 있죠. 평생 고생하다가 이제 제대 하잖아요. 여자들은 모릅니다. 남자들 군대 제대 하는게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군이 얼마나 지독하고 힘들던지. 제대하고 나서 꿈에 군대가 계속 떠올라요. 그래서 군에 갔다온 아버지는 아들들이 "될수 있으면 군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속으른 이런 마음 가지고 있으면서 "아들아, 남자가 됬으면 한번 갔다와야지"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런게 아버지의 이중성이거든요. 남자가 되려면 갔다와야된다라고 말하면서도 부인이 "여보 우리 아들 군대 면제됬어" 이러면 남자들 이래요 "잘됬어!"
'죽어도 산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데반 집사나 거지나사로가 좋아하고, 그 다음에 세리와 창기가 좋아하고요.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 있지요? "주여 저 어떻게 됩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가리라". 그 강도 좋아하고요. 또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서 세 사람이 나오지요. 바리새인,새리와 심판자. 십일조, 금식, 토색 간음 간통한적 없고, 불의나 거짓말 한 적 없는 바리새인 한사람하고. 그리고 또한 사람 새리입니다. 감히 얼굴을 못들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세리. 세금쟁이죠. 그당시 세금쟁이는 직업도 천한 직업에 속했습니다. 요새말하면 조폭 양아치같은 부류입니다. 그리고 또 한분이 등장하는데 그분이 누구냐하면 심판자입니다. 축구로 말하면 부심이 아니라, 주심이죠. 축구에서 주심이 옵사이드라고 하면 옵사이드가 됩니까 안됩니까? 옵사이드가 되죠? 여기 예수님이 이 주심인데,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은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 너는 지옥가고. 새리 너는 축하한다 천국간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본인이 본인의 주심이 아니에요. 내가 내 주심이 아닙니다. 재밌는 것은요. 이쪽에 바리새인이 있고, 여기 새리가 있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주심으로 개입하셔서는, "세리는 천국에 간다 바리새인은 지옥에 간다" 이렇게 판정을 하시면, 그것이 번복이 됩니까 번복 안됩니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한국교회 어느 목사가 여러분 지적하고 이근호가 지적하고 그런 것 무시하세요. 의미없어요. 저나 그들이 심판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합격이라 한다면 아무리 간음을, 간통을 하던, 거짓을 하든, 횡령을 하든, 그것을 생각하지 말고요.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어요 착하게 살아도. 오늘 참 이상한 것 가르치는데. 빛과 소금되도 소용없어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보고 "너는 합격" 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지막 심판주가 합격이라고 선언했기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악마가 아무리 고소하고 정죄해도 합격이 되는 겁니다.
질문자: 그것을 어떻게 받습니까?
그 질문이 나올줄 알고 있었어요. 그 질문을 마르다와 마리아가 했거든요.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제가 설명해 줘야해요. 마르다 마리아가 이 말씀을 생존차원에서 보았어요. 뭐냐하면, "우리 오빠가 죽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 관심이 어딥니까? 관심이 주님을 보는게 아니고, 누구를 봅니까? 나를 보는 겁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할께요. 여기 앉아계신 000씨는 지금 누구에게 관심 있으십니까? 질문이 어려웠나요? 쉽게 말할게요. 아침에 눈 뜨고 잘때까지 000씨는 누구 생각해요? 그야 당연히 나를 생각하지요? 그게 마르다 마리아에요.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뭐 착한일을 했다? 해도 소용없어요. 부메랑 아시지요? 부메랑을 날리면 어디로 돌아 옵니까? 다 자기에게로 돌아 오는 거에요. 교회란 곳을 가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집이란 장소를 교회로 옮긴거에요. 여기 407호를 교회로 옮긴거에요. 교회 아닙니다. 그거 주님의 몸 아니에요. 407호가 그냥 이동한 것 뿐이에요. 인간은 교회 간다고 할지라도 주님 생각 하지 않습니다. 부메랑처럼 휙휙 돌아서 누구 생각합니까? 자기 생각해요. 그게 누구냐면? 마르다와 마리아에요. 그래서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 믿어도 그것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가 자기생각하는. 생존차원에서 잘되기 위해서 그냥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차원일뿐이에요. 그저 자기 생각 포기 안한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콩나물을 살때 아줌마에게 폭 빠집니까? 아니면 콩나물로 오늘 저녁에 맛있는 국을 끌여줄 자기 가정 생각합니까? 그것을 뭐라고 하죠? 믿음이라고 합니까? 아니죠. '거래'지요. 바로 우리는 교회 가서 '거래'하고 있는거에요. 우리 주님하고. 해줄 것 해줄테니까 내 성의를 봐서라도 내놓으라는 거에요. 그 거래의 매개자가 누굽니까? "자 오만원!오만원! 골라골라~" 이렇게 흥정을 매기는 사람이 누구에요? 두 글자로 뭡니까? 아까 질문한 그 질문의 답이 뭡니까? '목사'에요. 그래서 목사는 '상인'이에요. 목사는 주의 종이 아니고 상인입니다. 주의 종은 스데반집사나 사도바울이 주의 종이고 목사는 그냥 '상인이에요. 목사는 자기의 뒤에 자기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나이 많으면 노후 대책을 걱정해야되요. 그리고 그 교회를 키우면 자기 아들 신학교에 보내서 공부시켜서 목사자리 세습을 시키지요. 콩나물 파는 상인이 손님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습니다. 이거 팔고 돈 벌어서 자기 아들 공납금 대야하는데, 이걸 위해서 찬바람 맞아가면서 그동안 모정의 세월을 보낸 거에요. 그동안. 그 콩나물 파시는 어머니도 모정의 세월이고. 그 콩나물을 사서 아들 공부 잘 하라고 콩나물국 끓여주는 그 어머니도 모정의 세월이에요. 모정의 세월~♬. 전부 다 다 같이 똑같은 거에요.
그것을 '아담의 보편성'이라고 아주 철학적인 용어로 말해요. '아담의 보편성'.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잘난 체 하지만, 너나 나나 다 시시합니다. 교회 목사도 시시하고, 앉아서 목사에게 축복해 달라는 그 사람도 시시하고. 안수해주는 목사도 시시하고요. 시시하지 않으신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 상에서 구름속에서 누구 목소리를 듣느냐?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나지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그 사람을 임원진이라고 할수있죠). 세명의 회개총무와 부회장등. 이렇게 임원진이 올라갔을때, 그때 구름속에서 누구 음성이 들리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따로 들리지요. 그때 들린 음성의 내용이 뭐냐하면요. "너희는 옆에 있는 예수의 말을 들어라. 예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이다". 이 말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하고 이미 흥정과 거래가 끝났다는 겁니다. 끝났다는 거에요. "너가 아무리 해도 안되는 일이 있어". 아무리해도 생존차원에서 인간은 못 벗어납니다. 교회 십년 이십년 다니고, 장로 집사 권사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몸이 있는 한, 200조개의 세포가 있고 못 먹어서 배가 꼬르륵거리는 한은, 지금 몸이 아픈게 중요하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예수나 하나님이라는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내 몸이 아프면 그것은 나중 이야기입니다. 내가 몸 건강해서 교회 갈때에야, 비로소 예수가 관심목록에 있지요. 몸 아프면 정말 만~사가 귀찮아요. 젊은 분들은 그것을 몰라요. 젊은분들이야 몸이 튼튼하니까요. 하지만 연세가 육십되고 칠십되고 팔십쯤 되어보면, 이제는 예수도 귀찮고, 목사가 심방오는 것도 귀찮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니까 과장된 것이 아닌데, 어떤분과 이런 대화도 했어요. "권사님 제가 찬송가 불러줄까요?" "목사님 찬송가 평생 불렀습니다. 그거말고 나훈아에 청춘을 돌려다오 불러주세요." 나는 이제 교회도 징글징글해. 교회 심방, 찬송가, 성경책, 성경귀절, 이런거 모두 징그럽다는 거에요. 교회 권사까지 됬는데 설교 한두번 들었겠습니까? 병석에 가서, "제가 설교할게요"라고 하면, "아픈 내가 설교할께. 나 위로한 답시고 하는데. 그런 설교 내가 할께" 이래요. 아마 죽은 사람은 설교하면 벌떡 일어날 거에요. 내가 설교할 거라고요. "사도신경 내가 외울게. 주기도문 내가 외우고 죽을게" 이렇게요.
아무튼 인간은 생존차원에서 벗어나지 못 합니다. 아까 이야기 했지만, 그냥 생존 하는 사람은 생존만 유지하는 그것이 마음에 차지 않아요. 더 나아갑니다. 남은 죽고 누구만 잘되라고요? 나와 내 가족만. 나와 내 배아파서 낳은 새끼만 잘될때. 다른 사람은 다 대학 떨어지고 자기만 되야합니다. 형이 미우면 형 대학 떨어지라고 합니다. 형제간에 싸우니까 형 잘되는 꼴을 못봐요. 이것이 무슨 이유냐하면, 신이 누구의 신입니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누가 신이 되었습니까? 각자 각자 모두가 신이에요. 신과 신들의 앙투? 경쟁심? 이런 것뿐입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이렇게 말할때에, 예수님이 기가 차신거에요. 자기가 지금 믿는다고 한 말을 본인 스스로가 몰라요. "나는 예수님을 이용하길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예수님만 원합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야 할텐데요. 그렇지를 않고, 예수님께서 "날 믿는자는 죽어도 산다"라고 하시니까, 자꾸 "믿습니다!"라고 하는거에요. 그것이 처음엔 믿습니다라고 해봐도 안차니까 말을 격앙되게 하는거에요. "믿쒸미다!". 기도를 해도 조용히 하면 영 자기 성에 안차니까, "주여!주여!" 이렇게 삼창을 외치는거에요. "랄랄랄라#&%" 무슨 소리인지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말을 하고요. 이것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의 기도잖아요. 성경에 나옵니다. 자학하는 기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를 찔러 가면서 하는 기도. 이것이 바로 '집단 최면'이라는 것 입니다. '집단최면'. 이것을 할 때에 혼쭐 즉 '혼'이 나가지요. 그럴때에 '엑스터시'라는 상태에 들어 갑니다. 일단 신경 조직을 치면요. 신경조직은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신경조직은 세포로 되어있는데, 이 세포를 활성화 시키게되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 여분의 에너지가 발산되요. 그러면 여기서 평소에 생각했던 이성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서 초이성적인, 무의식적인 것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부흥사가 가르쳐준데로 눈감고 박수를 치면 엑스터시한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절정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죠. 일분 이분 그 순간만큼은 그동안 아팠던 고통이 사라지는 겁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겁니다. '최면효과'죠. 이것은 모든 종교에 다 있는데, 특히 유명한 곳이 단양의 '구인사'라는 곳이 전문입니다. 구인사는 신도가 이만명이 넘어요. 거기는 방언과 병고침이 주특기에요. 사람들을 엑스터시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 그러니 이만명이라는 신도가 모인거에요. 이런 무속신앙을 기독교에든 불교에든 접목 시키는 거에요. 고객만족 시키면 장사가 잘 되는 거에요. 고객은 왕이니까. 목사는 상인이니까요. 생존 차원에서 사람들이 원하니까요.
또한 성경 귀절을 이용해서 간증 집회를 해서, 간증으로 시작해서 간증으로 끝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행하니까 나도 되더라. 안 된다고 말하지 말고 해봐라. 네자로 "하!면!된!다!" 영어로 "I CAN DO IT". 나는 할수 있다. 이것을 계속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자기는 관심사가 예수님과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님과 거래해서 '나는 뭔가 교회가서 챙겼다'는 자기 애착, 자기 집착을 강렬하게 키우게 되는 거지요. 이점을 누가 지적하게되면 설교 듣다가도 뛰쳐 나갑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설교듣다가 뛰쳐나간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벌써 설교를 하면 인상과 안색이 변하고 있어요. 그래서 안색이 변하는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을 향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이래도 안 뛰어나갈겁니까? 이렇게 말해도 당신이 예수를 이용하러 온게 아닙니까? 분명히 그 정체를 드러내라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생존차원에서 생명차원으로 바뀌는 이것이 문제인데요. 바뀌는 이것은 '우리 인간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면 그럼 우리는 때려죽어도 천국 못가겠네?". 잘 들어보세요. 놀라운 것은, 생명차원에 계시는 주님께서(예수님은 생명나무라 하셨죠. 요한복음6장에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생명을 얻고"라고 되어있죠) 생존 차원에 섞이게 되면, 말씀이 육신이 되면, 이 둘은 같은 말입니다. 생명이 생존에 쫒기게 되면. 우리가 무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만 다가와요. 흠모할 것이 없는 그런 모습. 이사야 54장에 보면, 주님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흠모할 것이 없고 부러워 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온다고 나옵니다. "아이구 저렇게 살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할 정도로, 아주 '낮아진 모습'으로 와요. 낮아진 모습으로. 그런데 기장측, 자유주의 진영쪽에서는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낮아졌기때문에 우리도 낮아져야한다라고 말해요. 그래서 "가난한 자를 도와라 아이티에 성금내라"라고 하는데, 그것도 잘못이에요. 주님이 낮아지지 우리가 같이 낮아 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낮아지셔서 오셨다고 해서 우리도 같이 낮아지는 흉내내면 꼴이 무슨 꼴이되나요.
주님께서 낮아지신 것은 다른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나는 나밖에 모르는 교만한 자'인가를 주께서 낮아지심으로 들추어 내신 거에요. 분명히 해야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더 보탤까요? 병든자라야 의원이 필요하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낮아지셨으면 우리도 낮아져야 합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난척 하며 살아온 그대로 있으면 되요. 제가 이상한 논리를 말합니까? 그렇다면 기존 교회를 이야기 해봅시다. 기존교회는 예수님이 낮아졌기때문에 우리도 낮아져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낮아져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되버립니까? 우리는 의인이 되어버려요. 의인이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생존차원에서 못 벗어나지요. 결국 생존차원에서 못벗어 나면서 의인인 척, 낮아진 척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자로. '위선'이지요. '위선'.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 것. 교인들은 그냥 부족합니다라고 말해도 목사는 더합니다. "나는 쥬의 종입니다. 뷰~죡한 자입니다. 할~렐루야."
그게 진짜 목사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설교하는 것은 우리 가족 밥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이게 맞고 옳은 거에요. "하지만 이렇게 여러분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여러분의 돈을 탐내는 나같은 인간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여러분들도 돈 노리고 왔지요? 축복노리고 왔지요? 하지만 그런 죄도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주님 혼자 낮아 지시도록 좀 놔두세요. 우리가 흉내내서 낮아지려고 하지 마시고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낮아지라는 말이 아니고요. 나는 죽어마땅한 인간입니다라는 그말입니다. 자기의 겸손이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하면 안되요. 이것은 또 하나의 위선을 우리에게 양산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교회에서 겸손해 보세요. 그 다음부터 교회에서 무슨 콘테스트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겸손 콘테스트 벌어져요. 새볔기도 다른 사람이 두시간 하면 오기가 나서 두시간 반동안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왜 목사들이 강단에서 헌금한 액수를 밝히고 이름을 밝히는데요. 못한 인간들 뭐하노 지금? 이쪽에서 헌금 잘 내서 서울대학교 가서 이렇게 감사헌금 냈잖아. 당신들 전문대학 가지말고 헌금내 그러면 벌써 서울대학 합격이야라는 것을 어느정도 압력을 가하는 거에요. 어떤 목사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해요. "줘야 받지. 별미를 받쳐야 복을 받지. 헌금도 안하고 공짜로 복을 원하십니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한다구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것이 아니다. 너희들 가만히 있거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대속물로 내몸을 몽땅 주려함이라. 하나님께서 너하고 계약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 대신 아버지와 새 언약 맺을게".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맺은 그 언약 때문에 아무것도 한것 없고, 그저 죄만 짓던 우리가 공짜로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 간다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이것뿐이에요. 주님 바라 볼 때마다 "참 미안합니다" 라고 나오면 주께서 "니가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그거에요. 그런데 아직 젊은 이들은 이걸 잘 몰라요. 평생 살아보면서, 얼마나 내 속에 위선적인 죄가 폭팔해 나오는지. 우리 준현이 아빠는 잘 알아요. 왜냐면 그만큼 많이 살았고, 직장 생활 하기때문에. 얼마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요. 여기 아가씨는 없지요? 아가씨가 여기 있다 한다면, 시집 가보세요. 시집가기 전까지는 성가대 봉사하고, 또 좋은데 시집보내 줄까싶어서 봉사 열심히 했지만, 막상 시집 가고 나서는 설교도 안들어요. 유아실에 가서 자기 애만 보지요. "김집사님, 애들 피아노학원 어디가 좋아요?" 이런 것에만 관심있지 설교 듣지도 않습니다. 축복이나 받고 집에 가는거에요. 정보교환이에요. 정보교환.
그리고 교회 앞에 가게 세워 보세요. 단골 모으기 위해서 교회에서 감사헌금 봉투에 ‘김약국 개업 감사’ 하면 “김약국, 우리교회 나온다면서…….” 죽 오게 하는 것을 노리고 정수기 하나 더 팔려고 보험 하나 더 넣으려고……. 제가 너무 노골적입니까? 그래서 다 큰 교회 가는 거예요. 시집 못 가는 사람들 아무래도 배필을 건질 수 있는 여지가 많잖아요. 작은 교회 총각 둘하고 큰 교회 총각 백 명하고 이미 2대 1일이고 하나는 100대 1인데 골라잡을 수 있는데 왜 큰 교회 안가겠어요? 만날 “교회 오빠, 교회 오빠” 하면서 행복해 떠들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교회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왜, 어차피 완전한 교회는 없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주께서는 죄인을 원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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