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2강a 1002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1. 20:28

마태복음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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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IP:220.♡.41.203) 10-11-12 13:40 
대전100218a마태복음2강a

2010-11-12 00:55:42  녹취 : 송재원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마태복음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는데요. 이 마태복음이 구약에 속한 것이 아니고, 신약에 속한 것이지요. 그러면 이 마태복음이 위에 있다면, 밑에 구약이 있지요. 마태복음부터 신약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신약 밑에 구약이 있다는 것은, 신약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이라는 기초 또는 바탕이 전제되어야 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태복음이라고 하기때문에, 마태라는 복음이 구약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성경에는 마태뿐만 아니고, 마가도 있고, 누가도 있고, 요한 복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이 구태여 마태에게만 다 집중될 것이 아니고, 구약이 마가,누가,요한에 연결될 수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 사람들이 생각에는 구약이 있고 마태복음이라는 복음서가 하나만 있으면 혼돈이 덜 될텐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렇게 따로 있으니까요. 우리가 복음서를 알기 위해서는 이 네가지 모두를 MIX(섞음)를 할 필요가 있는겁니다. MIX를 하는데, 이 섞는 작업을 하다가 서로 의견이 충돌되고 안 맞는 경우가 있다면, 우리 읽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난처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춘향전이라는 책이 한권만 있다면, 영화를 만들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대로 만들면 되거든요. 그런데 춘향전에 대한 책이 한 200가지 된다면, 어느 것이 진짜 원본인지가 헷깔리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 문제때문에 많이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거리에요.

왜냐하면, 구약을 신약이 받는다고 생각하지말고요. 구약 전체가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에 각각 나눠져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요. 전체가 다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면, "구약이라는 것의 엄청난 분량을 신약성경이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마태가 다 받아야되는 것도 아니고요. 마가도 아니고요. 많은 신약성경들이 구약의 본뜻을 수용하는데요. 이 수용이 각권에 넘치도록 다 수용이 되는 거에요. 이 말은 마태에 들어가서 구약을 생각하나, 마가에 들어가서 구약을 생각하나요. 누가에서나, 요한에서든 상관없이, 각각의 신약성경이 구약의 모든 것들이 담긴 항상 같은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지요.

마치 풀장이 A,B,C,D 이렇게 4개의 풀장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각각의 풀장에 모두 빨간 잉크를 탔다고 가정해보면요. 어느 풀장이든간에 다 이 빨간 잉크의 맛을 다 볼수가 있겠지요. 그렇기에 어느 신약 성경을 따로따로 보아도, 구약전체가 전부 다 그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마태복음에다가 또 마가복음을 더하기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고요. 마태안에 구약전부가 들어있고, 마가안에 구약전부가 들어있어서요. 여러가지 책들이 있더라도 결국은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이야기가 어디서 모이느냐 하면요. 실제로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을 이렇게 보게 되면, 한곳에 모이게 됩니다. 이 모이는 곳이 어디냐하면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 이후에 나오는 부활로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는 그러한 각가지 일들을 모아놓은 것이지요. 십자가와 부활.

그렇다면 이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을 어떻게 해석하냐 하면은. 그들이 집중해서 촛점을 맞추는 이 십자가에 의미를 가지고 마태의 족보나 마가의 모든 내용들이 설명이 가능한 겁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무엇을 이야기하느냐하면, 이 십자가를 가지고 구약성경에서 예언했던 모든 것을 다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도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에 다 녹아져 있다고 제가 이야기 했기때문에요. 그럼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그 십자가가 무슨 뜻이냐하면요. 구약전체가 이야기 했던 것이 다 십자가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뒤에 보면 부활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자,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되겠는데요.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부활'이라고 하지 않고, '부활의 세계'라고 이야기 했지요? 제가 그 의미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방금 십자가에다 더하기 부활이라고 알고 계시는데요. 그런데 저는 방금 '부활의 세계'라고 했지요. '부활의 세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생을 생각한다면, 십자가를 무엇으로 봅니까? '죽음'으로 보고요. 부활을 무엇으로 보냐하면, 죽은지 사흘만에 '소생'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하면 사적인 인생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사적인 것 같으면, 예수님만 구원되고 다른 사람들은 구원 안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구원이 우리 구원이 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뭐가 포함되어야 하느냐면요. 모든 사람들의 죽음. 이 모든사람이라는 것은 택한자에 한한 모든입니다. 천국 갈 사람들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결합 되어있는 죽음이어야 됩니다. 그것을 부활 했을때,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할 자들이 같이 죽은 죽음이라는 그 의미를 부활이라는 것을 통해서 설명이 되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을 없다고 본다면 어떨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때,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고 합시다.

"아이고, 저렇게 까불다가, 권력자한테 당하는구나. 그럼 조용히 지내지. 왜 그렇게 잘났다고 성전을 훼파한다느니 말해서 사형을 자초해. 누군들 사형안시키겠어. 정치범으로 몰아넣지. 그러니 조용하게 지냈으면 엄마하고 잘 죽을껄, 강도하고 같이 죽었잖아. 사람 참 안됐네"하고 끝나버릴거에요.

그런데 사흘만에 부활하실때, 무엇이 개입되냐하면요. 예수님이 살아계실때, "나는 약속대로 부활한다"하셨지요. '약속대로'부활이에요. 그러니 부활은 뭡니까? '약속대로'의 부활이에요. 그렇기때문에 이 부활만 약속이 아니라,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거든요. 죽음없는 부활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라는 것이 사적인 정치범의 죽음이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예언한 바대로 십자가에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부활이 되느냐면요. 십자가에 죽었던 그분의 부활이기때문에, 십자가의 부활도 되지만, 십자가에서 같이 죽어야했던 성도의 부활도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되는 겁니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나오는데요. 그런데 일반교인들에게 이 논리를 설명하려면 힘들어요. 그렇지만 성경 그대로를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혼자의 부활이 아니에요. 감나무의 감이 열리듯이, 첫번째 부활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은 이것이 납득이 안되는 것이요. 그전에 죽었다가 소생한 사람들이 한두사람이 아닙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 많아요. 예를들면, 사렙다 과부의 아들도 죽었다가 살아났지요? 엘리야 때문에요. 그리고 엘리사의 시체에 접촉이 된 시체들도 살아났지요.

자, 그렇다면,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굳이 부활의 첫열매라고 합니까? 시간적으로 보아서는 첫열매가 아니잖아요. 그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첫열매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수평적인 시간의 개념이 아니고, 수직적인 층을 말하기때문입니다. 피라미드같은 수직층이에요. 이 피라미드 전체를 약속으로 본다면요. 이 피라미드같은 층의 꼭대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약속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효력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이라면요. 신약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그 이후에 구원받아야 될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적용될 효력에 대해서 이미 앞당겨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적으로 나눈다면, 그림으로썬 설명이 적당치 않아요. 이것을 수직적으로 세워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꼭대기층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층에는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아담 아브라함 이삭 모세가 있고요. 그리고 더 아래층에는 아직까지 태어나지 않았던, 구원받아야 될 사람들. 2010년도에 태어나지 않았던, 2020년에 태어날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래층에 깔리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사는 시간 이후의 아래층은 그냥 눈에 보이는 역사이고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역사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거에요. 그러면 2013년, 2020년도 되어도, 그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바로 이미 2000년전에 있었던 사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지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하기를요. "아브라함이 나 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수평적인 시간관을 고수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당신이 나이가 오십도 안된 사람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 누구의 말이 상식적으로 옳습니까? 예수님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이 옳은 말이에요, 아니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얼토당토않는 말씀입니까? 우리 상식적으로, 인간적으로 봐서요. 역시 유대인들의 말이 맞지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모든 복음서를 볼때에 말입니다. 제발 우리를 예수님의 편에 서게하지 마시고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의 편에 한번 서보세요. 그들이 하는 말이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게 성경을 보는 관점이에요.

우리는 일방적으로 우리자신을 너무 좋게봐서, 아예 예수님 편에 우리를 세워놓고 보시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해버리면, 모든 복음서에 나오는 그 많은 갈등과 충돌을 충분히 이해를 못해요. 우리는 너무 일방적으로 예수님 편에 서가지고, 바리새인들이 무슨 말만 끄내면 나쁜놈이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는데요. 가만히 보세요. 우리가 그 당시 예수님 앞에 섰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는 그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피라는 책에 나와있어요. "그들은 침착했고, 그들은 나무를 보지않고 숲을 봤으며, 그들은 흥분하지 않았고, 그들은 사리를 분별할 줄 알았으며, 그들은 선배들의 신학적인 전통을 존중할 줄 알았으며, 그리고 그들은 어떤 사례나 어떤 경우를 빠뜨리고 비합리적으로 성경을 보지 않았고, 그들은 항상 성경 전체에 대한 윤곽을 다 살펴서, 어느 것이 가장 진리에 가까우냐를 애써 연구했던 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였습니다"

특히 흥분하지 않았고, 그리고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고요. 그것을 유교에서는 중도라고 하지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았으며 항상 정도를 가려고 했고요.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았고요. 심지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도, 예수님의 의견을 청중해서 그냥 무대포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증거들을 확보하려고 애썼고요. 예수님에 대해서 변호하는 사람을 찾았고요. 다 그렇게 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서, 성경에 정통했고, 어려서부터 성경을 외우다시피했고, 어느 성경이든 하나도 빠뜨리는 법이 없이 다 그것을 고려해서 전체 신학에 정통했던 그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누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느냐"고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들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더라면, 결코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나오지요. '깊은 지혜를'.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애를 써도 파악될 수 없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를 우리식으로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려해도, 설명도 안되고, 납득도 안되는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것을 말할 때, 논리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요. 다만 우리는 하나의 고백으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고백의 형식이 될 수 밖에 없어요. "나같은 죄인이 십자가의 피로 구원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묻지요. "어떻게?". 그것은 설명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설명하려고 서구 이천년 역사가 있어요. 신학이 있고, 철학이 있었습니다. '신학과 철학'. 이 두가지가 처음에는 같이 갔어요.

신학과 철학이 뭐냐하면요. 바로 신을 설명하는 거에요. 신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은 뭘로 전환되느냐하면, 교회의 권력을 집중 시키는데 이용될 뿐이였어요. 예를 들면, "우리교회에 나오라. 그러면 구원받는다". 이런식으로요. 자기 집단과 조직에 힘을 모으는데 있어서, 이러한 자기들의 시각들이 다 동원되는 겁니다. 이것은 힘을 모으는 거에요.

여러분들은 목사가 아니시니까, 그 기분을 잘 모르시겠지만요. 목사가 되면요. 교회가 이렇게 나란히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교회에 안오고 다른교회에 가면, 기분 굉장히 더럽지요. 마치 세탁소가 두군데 있는데, 자기 세탁소에 안오고 옆집 세탁소로 가면, 그것을 안봤으면 기분이 안나쁜데 그 장면을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쁘지요.

바로 이러한 것을 바로 뭐라고 하느냐하면, '주체의식'입니다. 주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층을 이룬다'는 겁니다. 층을 이룬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면요. 예를 들면, 성경의 50%를 이해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인간은 나를 가지고 50%짜리 층을 만들어요. 성경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 대한 이해와 자기에 대한 이해가 있을거 아닙니까? 그런데 한 2년 뒤에 70% 알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50% 알았던 주체의 층을 버리고, 70%를 안 상태에서 자신의 주체의 층을 또 형성하게 되있어요.

그래서 후학들이나 후배들이 성경을 모르는 모습을 보면요.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거든!"라고 지금의 시점에서 전에 자신이 50%만 알던 그 시점을 꾸중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 허점을 알지요. 그런데 만약에 90%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70,50%의 층을 부정해야겠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이것을 가지고, '주체의 확장'이라고 해요. 주체의 확장!. 피라는 책에 어렵게 나와있는데요.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착한 일을 하잖아요. 이것은 50%때에는 무조건 착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거에요. 그런데 70%가 되니까 그때 착한 일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너무 철없게 보이는거에요. 가다머는 그것을 지평이라고 했어요. 70%의 시선과 안목으로 보아서는 그때의 일이 너무 철이 없었다는 거에요.

"나는 그사람에게 착한 일이라고 했는것이 오히려 그사람을 교만케했고, 그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는 나를 의지하게 만들었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되는데, 고기를 잡아주는 셈으로 인해서 신앙적인 자존심을 오히려 노화시켰고, 기를 빼서 주저앉게 만들었다. 아~ 그때 나름대로 도와주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겼는데, 지금 70%를 아는 입장에서 보면 그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나의 자존심과 결부된, 내가 뭔가 신앙인답다는 것을 증빙해보고자 하는 그런 시도였구나"하는 회의가 밀려오는 거에요.

그런 경험들 다들 계실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90%에 도달해서 이렇게 보니까. 70%때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고요. 오히려 50%때 했던 그 일이 맞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러면 95%때 같으면 예측이 가능합니까?,불가능합니까?. 불가능 하지요.

그러면서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뭐냐하면요. 어느 층에 있던 간에 인간의 자기 행위에 대한 자기 정당성. 자기 옹호. 자기 변명. 자기 사수. 이것은 어느 층이던간에, 포기 합니까 안합니까? 어떤 층이든간에 포기 하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이것을 제가 어제 수요 설교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을 무슨 용어로 썼느냐하면, '개인계시'와 '주변계시'를 분간하자고 말했어요. 성경말씀을 나 개인에게 줬다하지요. 보통 목사들이 쉐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것을 너는 들으라" 이런식으로 우리는 해석하거든요.

그러니 이스라엘 자체가 뭐가 됩니까? 이게 '주체층'이 되지요. "이스라엘아 들으라 나는 너의 여호와 하나님이다"하시니까,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요. "말씀을 지키면, 우리는 이스라엘답게 된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구약이거든요. 하지만 사실 구약에 말씀 준 것은 건드리면 터지는 폭탄이에요. 그러니 말씀이라는 것은 안보면 터지지 않는데요. 해석하고 접근했다하면, 접근한 내가 갑자기 시커멓게 죄인으로써 변모되는 그런 능력이 있어요. 성경을 대하기 전까지는 내가 의인이였는데, 성경을 보면 볼수록, 손대면 손이 타고, 발대면 동상걸리는 그런 현상을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번에 백석신학교에서 열리는 한국개혁신학회에서 합니다. 신학교수들 앞에서 논문 발표를 해요. 다니엘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논문으로 제가 발표를 하는데요. 그럼 신학교수들로 이루어진 논평자쪽에서 그 현장에서 비평을 하고, 다른 사람이 듣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논문에다 무엇을 썼느냐 하면요. "변하는 인간이, 변하는 말씀을 포착하는 자체가 어폐가 있고, 그렇게 포착을 하게되면 자신이 변하는 인간이면서도 변하지 않는 아주 확고한 사람인양 착각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썼어요. 논문이라 상당히 어려워요.

말씀이 쭉 흘러가는데요. 우리가 흘러가는 화살을 이렇게 딱 잡아보세요. 그러면 사실은 매일같이, 시간마다 달라지는 내가 말씀을 포착하는 그 순간, 말씀이 내안에서 중지가 되요. 그러면 '중지된 해석'이 나와요. 중지된 해석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하면요. 이 말씀은 변함이 없이 맞다라는게 나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말씀을 붙드는 순간, 변하는 나를 잊어버리고요. 마치 나는 두번다시 변하지 않을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주체를 확고한 주체로 고착시켜버려요. 주체를 아예 확고한 주체로 잡다보니까요. 이 말씀에 대해서 남들이 뭐라 말해도 이 말이 옳다라고 고정해버리면, 이 오류를 누가 지적할것이냐는 겁니까?

쉽게 말하면, 405장 찬송 아시죠? '나같은 죄인'인데요. 그 찬송가가 교회 처음 나왔을때는 그렇게 은혜로웠다 이말이지요. 그런데 그때 그 감정을 기억했는데, 15년뒤에 그 찬송을 다시 불러봤는데요. 그 감정이 안나오더라 이말이지요. 누가 변했어요? 405장 가사가 달라진거에요? 아니죠. 성경이 달라진게 아니잖아요. 누가 달라졌어요? 내가 달라졌잖아요

달라진 나를, 자꾸 우리는 그때 그때마다 고정화를 시키는데요. 그 고정화 시키는 그 잘못을 도대체 누가 지적할 것이냐는 겁니다. 누가? 그것을 내가 그 신학교의 교수들에게 물어볼 거에요. 논문 발표하면서요. "어떻게 할겁니까?" 이렇게요. 마치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기면서 화살 쥐듯이요. 화살이라는 것은 제놈이라는 사람이 말한 거에요. 지나간은 화살은 날라가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고요. 거북이와 마라톤 선수가 달리면 아무리 달려도 마라톤 선수가 거북이를 앞설수 없다라는 이론을 펼친 사람이에요. 제가 그것을 거론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겁니다.

결국 무엇이 문제에요? 말씀이 문제가 아니고요. 그 말씀을 해석하는 주체층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거에요. 그럼 이 문제를 목사님은 어떻게 해결하느냐하면요. '개인계시'로 보지 말고요. '주변계시'로 옮겨가야되요.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모종을 할때를 생각해보면요. 삽으로 흙을 풀때, 모종 새싹에다가 집중해서 팝니까, 아니면 주변의 흙을 같이 팝니까? 주변 흙을 파지요? 그럼 모종은 삽이 들어가면, 모종은 가만히 있어도 삽안에 놓이게 됩니까, 안놓이게 됩니까? 놓이게 되지요!

자기 주변에 뭐가 있습니까? 흙이 있잖아요 흙이. 흙 속에 있으니까요. 삽이 자기를 뜨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흙을 떠버리니까, 한꺼번에 흙과 더불어서 당기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인데요. 그러면 이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자기가 삽하고 거래나 흥정을 했습니까? 자기와 관계없이 자기 주변을 하나님의 약속이 와서 떠버리니까, 자기는 약속 안에 놓여있으니까 덩달아 구원이 되버리지요.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모든 성경은 나하고 관련된 것이 아니고, 나를 구원시킬 예수님을 겨냥해서 모든 말씀을 준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된거에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지킬 율법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보니까, 그 율법이 내가 지킬 율법이 아니였고요. 도리어 나는 율법을 줌으로써 더욱더 죄인되게 하고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가입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죄를 더욱더 발생시키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라는 겁니다. 모든 말씀이요. 구약신약의 모든 말씀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된 것은요. 우리가 죄인되게 하는것은, 은혜로 하여금 더욱 더 은혜되기 위해서, 우리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한거에요. 그러니까 말씀은 누구와 누구의 관계냐하면은, 성부하고 성자되시는 예수님사이에 창세전부터 이미 의논한 내용이 바로 신구약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지요.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때는 '슬기롭고 지혜로운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나게 하시죠. 그러니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자기가 먼저 '어린아이'가 되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것은 오해입니다. 자기가 어린아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린아이 되고 어른되고 라는 것은, 나타내심을 당하면, 그게 나이 90이 되어도 어른아이고요. 그게 감추어졌으면 3살 4살이라도 어른이 되는 겁니다. 왜냐면 말씀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에게서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 우리에게로 퍼지기때문에요. 그런데 우리는 말씀이 언어로 되어있으니까, 말씀이 일차적으로 나를 통해서 하나님,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니까요. 자꾸 우리자신이 고정되지 못하고 변하는 이 딜레마를 우리는 해명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고 있는데, 그게 안보이는거에요. 왜냐하면 주님께 갈 말씀을 우리가 땡겨서, 내가 지키려고 가져와버리까요. 주님에게 가야 될 선을 임의적으로 상상해서 자기의가 옹호되고, 자기 행위가 변명되고 정당화되는 쪽으로 자꾸 말씀이 적용되는거에요.

우리에게 말씀을 줌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몰랐던 때에는 깨끗한 사람이였는데, 말씀을 보는 순간 어느구석 하나 선한데가 없고 더럽다. 이렇게 되는게 정상입니다.

시편 50편에 보면요. 다윗이라는 이스라엘 왕은 율법대로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제사를 드리는 일이였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율법대로 산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계시가 자기에게로 집중된다라고 본 겁니다. 성경에 제사법이 있고, 도덕법이라는 것(성경에는 없지만, 사람이 임의로 정했어요),그리고 사회법이라고 구분을 시켜놓았어요. 다윗이 말씀이 자기에게 왔다는 거에요. 그러니 자기는 사회법, 도덕법, 제사법을 다 지키고 있었다고 본겁니다. 왜냐하면 양,염소를 제사로 드렸으니까요.

그런데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난 뒤에, 나단 선지자가 다가왔을때요. 나단 선지자가 말하기를, "주인은 양이 많은데, 종은 양이 한마리밖에 없는데도 양이 아깝다고 해서, 종이 가진 한마리의 그 양을 뺏어서 손님에게 대접했습니다. 이런 무자비한 주인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라고 할때에, 다윗은 법을 잘 알기때문에요. "성경에 의해서 4배나 갚아주고, 그 인간을 용서하지 말고 죽여버려야된다." 이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그때 나단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 사건이 있고 나온 것이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야나 밧세바에게 미안해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그때부터 "내가 하나님께만 죄지었다"는 겁니다. 뭐가 죄이기 때문이냐면, 이런 법을 내가 지킨다고 여겼던 바로 그것이 죄라는 겁니다. 처음으로 자기는 법을 지킨다는 그것이 죄가 되는 줄 처음 알았어요. "주께서 꺾으신 뼈로 내가 구원을 받게 하옵소서". 이 제사법을 누가 지키느냐하면은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지키시는데요. 거기에 희생제물이 된 사람이 누구냐하면은, 우리야에요. 우리야!

다윗을 죄인되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야를 죽여버리신 겁니다. 누구의 손으로? 죄인의 손에 의해서! 그게 십자가와 같아요. 우리가 죽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겁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주님은 죄인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드러나고요.

이것이 아까 이야기 한, 피라미드에서 구약에 모든 말씀의 촛점이 어디 있다? 십자가와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은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구원하기 위함인데요. 그 죄라는 개념을 우리는 몰라요. 지평선에 있는 우리는 몰라요. 아직 우리는 인생을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뭔지를 몰라요. 하지만 계속 들통날 죄는 계속 남아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죄든지 관계없이, 위에 있는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왜 이런식으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느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구원론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고요. 그야말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 모든 것.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는거에요. 우리가 사적으로 봐 버리면요. 구원론 따로 있고, 기독론 따로 있고, 신론 따로 있지만요. 사적이라는 것은 뭐냐? 즉 '주체성'이에요. 주체성에서 보면요. "나는 구원도 일단 건지고, 구원은 건져놓았으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신론 건지고,  그 다음에 성화론 건지고, 전도는 어떻게 하고, 기도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끌어모으게 되면, 이것도 일단 나의 '주체층'이 형성 되지요. 이것은 벌써 사고자체가 '역사적'입장에서 계속 위를 쳐다보는 겁니다. 이것은 변하는 건데, 자기는 안 변한다고 여기는 거에요.

관점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아버리면, '구원론'이고 뭐고 없어요. 에베소서 1장10절처럼,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함이라" 이렇게 되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이땅에 태어나는 모든 것, 만물이 그로 인하여 그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있는데, 그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말이 나온 김에 골로새서 1장 16절 찾아봅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로새서 1장 16절)"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지요. 그런데 거기다가 우리 자신을 집어넣으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강의할때마다, 어떤 사람의 이런 공격을 받아요. "왜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라고 하셨는데 당신은 왜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을 빠뜨립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일변론이 아닙니까?" 자꾸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요. 참 수천번 그런 말 들었어요.

이것이 뭐냐하면요, 하나의 과정이거든요. 주께서 오실때에 우리를 위해서 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오시는데, 여기서 우리를 위해서 오시면서 다시 주께로 돌아갈때는 여기 뭐가 탈락되느냐하면요. '우리를 위하여'가 탈락되어버리고요. 우리를 위한 주님께서 그런 인간을 이제 어디에 사용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는 것이 이게 바로 본래의, 태고적의, 원래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부터 와서 무엇으로 돌아갑니까? 주께로 돌아간다! 주께로 돌아갈때 그냥 돌아가면 안되지요. 우리안에 무슨 마음이 있어야 합니까? "주여, 나를 위한 주님이 아니고 주를 위한 우리로 이렇게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럴때만 면류관 마저도 주님 발에 던지면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주의 은혜이고 공로이고 주의 뜻입니다"라고 반납하지요.

제 말의 뜻은, 그것을 미리 하자는거에요. 어차피 우리가 이땅에서 살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 영원히 살고 싶지 않습니까? 거기서 영원히 살고 싶지요. 그때는 우리 인간의 질이 바뀌어야해요. 헌금 얼마하고, 전도 몇명하고 하는 것은 필요없어요. 우리 사고방식의 질이 달라져야되요. 어떤 질이요?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천사같은 질을 받게되는거에요. 그 천사같은 질은 딴게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우리가 구원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어떤일을 해도 거기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왜 우리는 스스로 나를 변호할 수밖에 없는, 내 정당함을 유지하려는 그런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가를 깨닳는 식으로 달라지겠지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남의 자식 좋은대학 못가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는, 내 자식이 서울 대학 가면 그렇게 신날 수밖에 없어요.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프다는거에요. 우리라는 인간이 원래 그렇다는 말은 상식이고요. 왜 그러느냐를 따지는 것은 성부이시고 그렇죠. 사람이 늘상 그렇잖아 그러는 것은 상식이고요. 우리가 왜 그렇게 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를 말씀 앞에서 따지는 것은, 성부께서 하시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가 이거였어요. "교회가 뭐냐하면은, 세상 사람이 아무리 흉내를 내려해도, 따라할 수 없는 요소가 있어야 그것이 교회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아무리 비슷하게 해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그야말로 성령이 임했기때문에 비로소 생겨버린 현상을 간직하고 있어야 비로소 성도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제 논문에는 이렇게 썼어요. "교회란, 속죄양의 표지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무리이다". 속죄양의 표지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요. 구원받는 것은 죄를 용서하신 속죄양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갖고있는 사람들이에요.

이것이 바로 첫번째 유월절 이스라엘의 특징이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 이것때문에, 홍해가 갈라졌어요. 그리고 뒤 따라오는 애굽 군대들은 홍해에 빠졌어요. 그러면 애굽군대들은 왜 홍해에 들어가려고 했을까요? 이것은 쉬운 질문이니까 여러분들이 답변해보세요. 뒤따라온 애굽군대가 왜 홍해에 들어갔습니까? 쉽게 말해서, "너도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가 뭔들 못들어가". 그들은 속죄양의 표시를 무시한 거에요. 왜? 이게 안보이니까요! "교회란 저 집구석은 착각한거야, 지나 나나 똑같은 인간들인데 지가 교회 다닌다고 별거야, 아이고 웃기고 있네, 지들이 홍해 건너가면 우리도 갈수 있다"라고 여겼던겁니다. 그런데 홍해의 자크가 잠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열렸던 자크가 잠겨버리듯이 양쪽에서 물이 덮치니까요. 애굽사람은 한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었잖아요.

이 이야기가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그때는 홍해가 아니고, 유리바다에요. 유리바다에서 어린양의 노래, 모세의 노래를 불러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속죄양으로 구원하시는 원칙을 취소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취소 한 적이 없어요. 방금 한 이 애굽 이야기를 '역사'로 본다면요. 이 모든 것의 역사에 대한 해답은, 바로 십자가에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는 십자가와 부활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으면서, 앞에 있던 역사를 미리 땡겨서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이야기 했고요. 앞으로 올 역사도 마찬가지로, 십자가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거에요. 아무리 흘러가도, 전부 다 이것은 십자가안에 있는거에요. 모든 피조물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살게하려함이라.

그래서 '개인구원-개인계시'에서 벗어나서 '주변계시'로 넘어가면요. 이것이 뭐냐? '모종흙'이 되지요. 주변계시는 바로,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쪽으로 빠져나가면, 우리는 나를 위한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말씀 덕분에 그분이 모든 말씀을 이루었기때문에 우리가 그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채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주변계시로 간 것을 가지고, 다시 내 구원을 위해서 다시 끌어당길 필요가 없지요. 없고. 주변계시라고 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예수님안이라고 합시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나로 인하여 죽은자가 되고, 세상에서 볼때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여러분들이 거울 속에 들어가보았습니까? 제가 묻는 자체가 잘못이지요. 거울속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잖아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는 거울속에 들어가는게 있지만요. 세상사람들은 거울 속에 못들어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힘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들어갑니까? 우리 힘으로 못들어가요. 못 들어가는데 우리는 들어왔어요. 마치 홍해를 건널 수 없는 인간들이 이미 홍해를 건넜어요. 건너오고 난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지요. "주여 제가 안되는 일을 주께서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주의 이름이 함께 계심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손꼽아보세요. 11시에 예배 참석하기 할수 있지요. 그리고 오늘 성경공부 참석하기 할 수 있어요. 그 다음에 기도하기 할수 있어요. 아까운 돈 끌어서 헌금하기 할 수 잇어요. 그리고 전도하기, 선교하기, 찬양하기 다 할 수 있어요. 노래 따라부르는 거 왜 못해요. 찬양 듣기 이것도 할 수 있고요. 목사님 잘 대접하기 이것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못하는게 뭡니까? 모든 기독교에선 다 할 수 있는데 못하는게 뭡니까?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이 고백.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할 수가 없는거에요. 나는 뭘해도, 자식을 훌륭하게 해놓고, 내가 테레사 수녀처럼 살아도 죄인이고요. 얼마전에 뉴스에 보니까, 신부가 의사가 되가지고요. 이디오피아에 가서 의료사업도 하고 그러다가, 48살인데 대장암으로 한국에 와서 죽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보면 기죽습니다. "세상에 그 나이에 서울에 개업하면 한달 수입만해도 천만원이 될텐데 그걸 포기하고 신부가 되어서 대장암으로 죽었구나". 대견해보이지요. 그런데 죄인인 정도가 아니라,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죄인중의 괴수에요. 왜냐하면 제가 그사람의 마음 씀씀이를 나쁘게 보아서 그런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씀씀이를 나쁘게 보는게 아니고요. 원래 인간이 그래서 그래요. 원래.

그래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번제도 아니고요.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무슨 제사입니까? '상한심령'이에요. 상한심령. 상한 심령이 될때, 주께서 꺾으신 뼈가 그렇게 고마워보이는 겁니다. 내가 상한 심령이 될때요. 주께서 꺾으신 뼈. 내가 꺾은 뼈가 아니고요. 주께서 꺾으신 뼈. 보통 제사 할때 뼈를 꺾어요. 근데 보통 제사할 때, 누가 꺾냐하면 제사장이 꺾잖아요. 그게 아니고, 주께서 친히 꺾으신 뼈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내가 영원히 즐거워하게 하소서.
  
우리 시편한번 봅시다. 시편 51편. 제가 읽어볼게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7절)"

이 다윗의 한 말을 보통사람이 들으면요. 다윗의 뺨대기를 때릴거에요. 왜냐하면 방금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간음했잖아요. 부끄러워서 말도 못할 인간이 뭐라고요? 즐거워하리라? 이런 뻣뻣함이 어디있습니까? 천하의 살인자에 다가 간음한 사람이 뭐라고 말하느냐하면은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게 다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요.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나온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와 번제가 아니라, 바로 '상한 심령'이에요. 그래서 19절에 보면, 예수살렘 성을 무엇으로 세운다? 예수살렘 성을 주의 은혜로 인하여 예루살렘성을 세우소서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19절)"

우리가 예수믿고 난 뒤에, 이제부터는 우리들이 즐겁게 할 수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요. 내가 나름대로의 착하다고 여긴 것들이 어떻게 나에게 '내가 악한 자인 것을 드러내는 계기로 사용되는가'를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보는거에요. 아까 이디오피아에 가서 헌신하는, 내가 만약 그렇다면요. 내가 이디오피아에 가서, 내가 의사가 되어서 헌신하고 신부가 되어서 헌신한 그것이, 내가 대장암 걸리는 그것이요. 어떻게 나로 하여금 죄인중의 괴수의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는지를 발견하는 그 재미, 그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성경공부 하잖아요. 이것이 어떻게 나의 숨겨진 죄가 나오는 계기가 된다는 그것을 내가 다시금 아는 그 즐거움이 있어요. 
 
바로 그것이 마태복음 밑의 구약전체를 지배하고 있고요. 마태복음 안에는 피라미드가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십자가와 부활의 의를 담고있고요. 마태복음 1장을 한번 봅시다. 제일 먼저 무엇이 나오는가요? 족보가 나오지요? 이 족보는 구약에서부터 예수님때까지의 족보가 나오지요. 이 족보가 두개로 깨어져요. 여러분은 이 족보가 연결된 것으로 보여집니까? 17절에 봅시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열네 대요...열네 대더라"

이게 연결되있으면, 14대,14대,14대가 안되요. 세보면요. 14대, 그다음에 15대, 14대 이렇게 되요. 이게 둘로 짤라집니다. 이 갈라진 지점에 뭐라고 되어있느냐하면요. 갈라진 지점이 6절에 나옵니다.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

다윗은 다음에 뭐라고 되있죠? 다윗은 밧새바에게서라고 되있지 않고 뭐라고 되어있어요? 우리야의 아내라고 되있지요? 다윗이 남자이름이죠? 우리야가 남자이름이지요. 이렇게 남자이름이 둘이 들어가요. 그러면서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로 보지않고요. 뭐로 보느냐면요. '우리야의 아들'로 보는 거에요. 그러므로 족보의 중간의 한대가 빠져야되요. 14-15-14대가 되지요. 이것은 언급한 주석이 어디에도 없어요. 설마 14대라 말한 성경이 틀릴리가 없고, 이 언급이 맞겠지하면서요. 여러분 10분 쉬시면서, 이것을 읽어보세요. 이게 몇대가 되는지를요.

10분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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