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2강c 1002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1. 20:33

대전100218c마태복음2강c  

2010-12-02 00:08:10  녹취 : 송재원


기도 같은 경우에, 예수님의 기도가 있다면요. 예수님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면 나옵니다. 아버지하고 나하고 약속한데로 합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건지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를 제게 주셨지요. 이제는 그 권세를 제가 사용할 랍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아 이거 중요하지요.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라고 말함으로써요. 그 유명한 말씀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의 대상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깨버리는 겁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내게 속한 사람'을 위해서라는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이것을 제대로 모르지요. 그냥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주님께서 쭉 하면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요. 바로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 바깥으로 절대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절대로 일하시지 않아요. 여러분 교회에서 흔히 강단에서 간증 집회 할때에, 요한복음 17장을 꺼내 놓고 비교해보라 이 말이지요. 왜냐하면 요한복음17장의 내용대로만 주님께서 일하시는데, 그 간증집회에서 나오는 내용과 요한복음17장의 내용을 한번 비교해보세요. 같지 않다면, 그것은 마귀의 간증입니다.

그만큼 말씀의 세계에 들어온다는 것이 중요한 거에요. 사람이 말씀의 세계에 안 들어오면, 자기의 주체가 살아 있어요. 자꾸 어떤 성경구절이라고 해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부 다 끌어 땅겨서 해석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 버리면, 말씀의 세계가 침대밑의 스프링(매트릭스)처럼되요. 매트릭스의 특징은 중심이 없다는 거에요. 어떤 중심이 없고, 서로 서로 교류 하게 되어 있어요. 매트리스 자체가 이 피조물, 피조 세계입니다. 피조 세계에서는 누구 하나 돌출이 되어 버리면, 중심이 되어버리죠.

그런데 내가 만약에 우리교회 목사인데, 우리교회 목사가 돌출 되어 버리면 그러면 결국 매트리스 자체가 예수님의 세계인데 예수님의 세계의 주체가 예수님이여야 할텐데, 여기에 만약 그 교회 목사가 돌출 되어 버리면 그 교회는 누구 교회가 됩니까?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고 누구 교회에요? 내 교회가 되지요. 그러면 나는 맨날 설교하면 "제가 기도했더니만, 누가 구원 받았습니다. 제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만, 설교가 잘됩니다".

설교시간에 자기가 행한 것을 집어 넣어 버리면, 교인들은 무슨 증거를 받습니까? 주님의 증거를 가로막는 이근호 지 행함의 증거를 받겠지요? 그런데 이근호란 목사는 뭐라고 핑계를 대느냐 하면요. 나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나를 본 받아서 구원 받으라는 거에요. 그것은 바로 요한1서 2장 28절의 말씀 "누가 너희를 가르치느냐? 성령께서 직접 가르치는 것을 누가 중간에 가로막고 나서서 가르치느냐? 너희는 그런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교회에서 추방해야한다". 그런식으로 추방할 것 같으면 한국교회 목사는 다 추방해야겠지요.

질문자: 아까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라고 하셨는데요.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렇지요. 예수님이 기도를 그렇게 하셨잖아요. 근데 우리 기도는 따로 남아있지요. 우리 기도는 뭐냐하면, 제가 예를 들어볼게요. "하나님 아버지 이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저를 주님의 증인으로 쓰여지게 하옵소서" 이게 우리의 기도 잖아요. 우리의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가 부숴 버리겠지요. 아주 고상하고, 그야 말로 완벽한 기도 아닙니까? 그야말로 로마서 8장에서 나온 것처럼 성령안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한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그러나 그것조차도 뭐로 돌리느냐 하면은, 하나의 그 시간의 나의 주체층이 살아난겁니다.

질문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되요? 고상하게 하는 기도 같은데, 그런 기도도 하나님의 중심의 기도가 아닌거네요? 주체가 자기 주체이기 때문에요?

왜냐하면, 내가 하기 때문에요. 그런데 그런 기도를 그냥 하는거에요. 내 기도가 잘못된 기도라고 판단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 순간에 나는 성령 안에서 기도한 것이라고 맡기면, 그 다음에 주님께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지켜보게 되면요. 아~ 이런 고상한 기도에도 내가 미처 모르는 이런 수가 있구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식으로 할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같은 팔이기 때문에요. 그런데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놀라움.

아까 이야기 한 내가 하지 못했는데 주께서 하시는 것이 새롭게 드러 나지요. 그렇다면 아까 그 못난 기도조차 하게 하신 것이 누구입니까? 그 혓바닥을 주시고, 그 힘을 주신 것은 누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되지요. 못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누구의 영광이다? 주님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나한테 그런 기도를 시켰었군요.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기대를 갖게 되어 있어요. 기대를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예상 하는 기대이거든요. 그런데 주께서는 이 기대를 무사시키면서 주께서 예상 못한 기대를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은혜속에-장충체육관 속의 바퀴벌레처럼 이미 주님의 은혜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다시한번 깨닳게 하는 기회가 되는거지요.

그러니까 제가 기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과 우리는 기도를 하는데 주님의 기도는 항상 은닉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 원대로 하라 이 말이지요. 예를들면, 갑자기 남편이 차 사고가 났다. 그러면 우리는 꿇어 앉을 새도 없이, 울컥 나오는게 뭡니까? 간단하게 길게 할것도 없이, "하나님 어쨋든 살려주시옵소서. 남편 바가지 긁은 것 죄송합니다. 그저 살려만 주시옵소서"라고 하지요. 그 문장 이리저리 따져서 기복신앙이니 하면서 따질 필요 없다는거죠. 그런 외침을 누가 하게 하는가? 성도이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에게 울컥하면서 터져나오게 하시는거에요.

기도 해놓고 나중에 물에서 건져놓으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주님 아예 그때 남편 차사고 안 일어났으면 좋았을걸요~ 말은 남편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만은, 앞으론 아예 그런 기도가 안 나오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생각-보따리 욕심이 나지요. 그게 우리가 평생 가는 마음이에요. 그렇게 주께서 다 이런 걸 아시니까요. 그것 때문에 너무 서러워하며 자책 할 필요는 없는거에요.

질문자: 중보기도는 어떤 문제가 있나요?

중보기도의 문제가 뭐냐하면요. 성경에 분명히 기도라고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다가 인위적으로 '중보'라는 말을 집어 넣은거에요. 그러니 이것을 집어 넣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를 성경적으로 합당한지를 생각 안해 보고 그냥 집어 넣은거에요. 왜냐하면 중보 기도를 집어 넣어 놓으니까, 교인들이 눈을 번쩍하고 뜨더라 이말이죠. "야~ 내 기도가 먹혀 드는구나. 왜 이런 기술을 내가 그동안 발휘를 안했지. 그러면 내 남편과 자식이 교회를 안나오는 것은 내가 그동안 기도만 했지, 중보기도를 안했기 때문에 그렇구나"하는 이런 분리시키는 작업-분위기가 형성 되는거에요.

이래서 진짜 기도의 뒤에 누구의 이름이 붙는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붙는다고 했는데요.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것이 무색할 정도로, 중보의 주체가 누가 됩니까? 남이 하면 중보가 아니고, 내가 해야 중보기도가 되다 보니까요. 앞에 있는 기도의 주체와 뒤에 있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주체가 충돌 되어 버리는거에요. 그래서 이 중보기도를 빼야 되는거지요. 뺀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요.

질문자: 도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냥 도고로 쓰면 되는거네요?

도고, 간구 있잖아요. 문제는 이런 도고와 간구라는 것의 원래 뜻은요. 주님의 기도의 응답은 이미 확정되어 있고, 우리가 기도할 것은 주님의 확정된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해달라해서요. 우리는 관심사가 뭐냐하면 그 뜻-성경을 아는데 집중해야 될 것을, 이렇게 도고-간구라는 말에 액센트가 들어가 버리게 되면 뭐가 안되느냐하면요. "기도함! 기도 열심히 함! 열정적으로 함!". 그러니까 시시하게 하는 것은 간구가 아니고 불성실한 것이고, 성실함에 촛점이 맞추어지는 기도가 되어요.

이것은 비중의 촛점이 또 기도한 주체에 쏠리게 되는 문제가 있어요. 그렇다면 성실함의 정도가 몇시간이 성실이며, 땀을 몇리터 빼야 성실한 것인지의 문제가 또 생기지요. 항상 일반 목사들이 성도의 행함에다가 의미를 두려고 자꾸 이런 것을 만들어 내는 거에요. 그래서 누가 히트쳤다하면, 모든 목사들이 쭉 따라가면서 목회 성공하려고 하지요. 그것을 "신학적으로 아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되요.

 자,이제 마태복음 봅시다. 다윗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고 되어있죠? 그러면 여기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가 맞아요. 그런데 다윗부터 바벨론포로까지 14대가 아니고 15대가 되는겁니다. 마태가 이것을 바보라서 이것을 실수했구나 한 것이 아니거든요. 솔로몬부터 바벨론까지 따지면 14대가 맞는데요. 분명히 17절에 다윗부터 바벨론까지라고 되어있거든요. 다윗부터 바벨론까지 15대라는걸 뻔히 알면서 14대라고 말해놓은거에요.

바로 족보를 해석하는 비밀이 여기 숨어있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분화구라고 표현합니다. 분화구라는 것은 앞이 이렇게 갈라져있지요? 14대의 정상에 다윗이 있으므로 인해서 노선이 바뀌는 역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의 세계'라고 되어있죠. 세계는 'world'가 아니고 '족보'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족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다윗이 먼저 나와있다 이 말이지요. 그것을 역사상 순서로 아브라함을 먼저 둠으로써 번역을 하는데요. 이렇게 번역해도 대충 맞다고 보면 되요. 특별한 번역은 없어요. 그런식으로 빠지면 안되요. 한때 침례교에서 나온 번역-킹제임스가 있었는데요. 그게 성경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큰일 날 소리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어느 성경도 다 비슷하니까 괜찮아요. 여호와의 증인 성경 빼놓고는 다 비슷해요. 그런 것 생각하지 마시고요.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해서요. 다윗을 바로 영적 세계로 통하는 마지막 지점-언약으로 하나님께서 보신 겁니다. '다윗언약'이 되지요. 언약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전문적으로 공부하실 기회가 없었을 거에요. 언약이 뭔지를 말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을 청소년이나 연예인들이 '언약식'한다고 많이 쓰지요. 김종민이라는 가수가 '슬픈 언약식'이라는 그런 노래도 불렀잖아요. 언약이라는 것은 항상 '약혼' 이런 개념이잖아요.

그런 개념이 아니고, 언약이라는 것은요. 약속이 오기전에, 약속을 비춰주는 그림자를 언약이라고 합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둘 사이에 맺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둘 사이가 아니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해요. 예수님을 약속이라고 합니다. "내가 약속할께!"가 아니고 "내가 약속이다"이 말입니다. 내가 약속이라는 말을 왜 하냐하면은요. 누구하고 약속을 해버리면, 상대가 약속을 안 지키게되면 약속이 지켜 질까요 안 지켜질까요. 못지키지요. 그것을 방비하는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인간이 안 지켜도 약속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이라 하는 것에 인간의 행함이 끼어들어선 안되요. 인간이 안 지켜도 약속은 약속대로 그냥 주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 그림을 달리 이야기해봅시다. 이것은 역사라하고, 이 점선은 언약입니다. 언약에 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언약이 노아언약이 나와요. 그 다음에 모세언약이 나오고, 다윗언약이 나오고, 그 다음에 새언약이 나옵니다.

노아언약 같은 경우에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거 아시죠? 그러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깨끗한 짐승을 잡았습니까? 아니면 더러운 짐승을 잡았습니까? 정결한 짐승을 잡았지요. 그러면 방주에 더러운 짐승은 그대로 있겠지요. 정결한 짐승은 잡았으니까요. 정결한 짐승을 잡으면서 노아가 하는 말이, "하나님,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때문에 이 정결한 짐승을 받으시고 하나님 은혜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노아언약이 뭐냐하면, 노아언약-방주안에 정결한 짐승을 집어넣는 이유가 있어요. 더러운 짐승을 살리기 위해서 정결한 짐승을 집어 넣는거에요. 더러운 짐승 즉 더러운 인간들. 정결한 짐승이 방주 안에 타는 것은 살기위해서 타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것을 용서하려고 대신 죽기위해서 타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노아언약이 방주안에 담긴 의미 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서,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하나님 모든 인간은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날때 부터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주하셔도 마땅 하지만 제가 드린 정결한 제물을 받으시고 그만 용서해주세요. 은혜주세요"말하니까 그 땅이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노아언약의 무지개가 생기지요? 무지개라는 것은 언제 생깁니까? 바로 비 올때 생기지요. 그러니까 무지개가 떳다는 말은 뭐냐하면. 그 당시에 사람들은 비가 온다는 것은 저주로 여기고, 비가 그친 것은 은혜 주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비온 것과 그친 것의 경계선에 뭐가 있습니까? 무지개가 있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무지개를 보면서, "우리는 저 무서운 홍수에서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를 기억케하는 것이 무지개인 것입니다. 지금은 뭐 무지개가 떠도 우리는 그런 것을 다 잊고 살지요.

노아의 자식이 몇명입니까? 함과 야벳과 셈이죠. 노아가 술을 먹고 벌거 벗음으로 수치를 드러 내니까, 함과 아들 가나안이 "얼레리 꼴레리"한 거에요. "아이고 꼴좋다". 이렇게 한거에요. 그런데 셈과 야벳은 뒷 걸음질 하면서 옷으로 덮어 주지요.

이것은 뭐냐하면은, "수치스러운 우리의 죄를 주께서 노아의 언약을 통해서 덮어줌으로써 우리가 지금 축복을 받고있습니다"라는 신앙적 고백이 되는겁니다. 그래서 노아가 깨자마자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거기서 언약의 특징이 나와요.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는 저주가,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축복이"라고 결정됩니다. "함과 가나안은 저주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받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언약을 결정한 것이 새언약인데. 새언약은 내 살과 내 피로 세운다는 십자가이지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어야 피가 생기니까요.

그러면 지옥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까요? 노아 언약에 의해서 저주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수치를 하나님의 것으로 덮어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저주 받았지요? 그렇다면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평생에 지은 모든 죄를 덮어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 갑니까? 지옥에 들어 가고요.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디 갑니까? 천국에 가는 겁니다.

이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바로 '생명나무'에서 나왔다 합니다. 생명나무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못 따먹게 되었지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결국 인간들이 따먹을 수 없는 나무라 이 말이지요. 따먹을 수 없는 나무인데 이것이 생명이 되는거에요. 그런데 "선악과 따 먹으면서 동시에 생명 나무를 따 먹으면 좀 어떠냐? 오래 살고 좋지 않느냐?"말합니다만은. 이미 질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질이에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나쁜 품질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아까 제가 '품질이 바뀌어야 천국간다'라고 말한거에요. 선악적인 것이 사라지고, 생명의 나무의 은혜가 임해야 천국가는 사람이 되는겁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바로 '은혜로만 구원'되는 것이에요. 그 은혜로만 구원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뭐냐하면. "너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창세전에부터 명단이 적혀있기때문에 너를 태어나게했고, 태어나서 그 명단에 적혀있는데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사람 개인의 이름이 사라지고, 흰돌에다 누구의 이름을 새깁니까? 새이름을 새기는데,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지는거에요. 야곱이라는 사람은 야곱의 이름대로 가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이름대로 가듯이요. 사람이 자기 이름이 바뀌면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이 되는거에요. 예수님의 이름이 있으면 우리는 죽으나 사나, 좋으나 안좋으나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길-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어있는거에요. 그래서 주님 가신 천국에 우리는 입성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름 싸움이에요.

이번에 논문 발표할때 이 이야기를 할거에요. 인간의 이름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아담의 이름이 있다. 아담의 이름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받은 DNA. 이것이 우리의 이름이고, 그 이름은 흙이란 이름이다. 그것이 무엇에 밀린다? '예수그리스도'한테 밀리게 되어있어요. 흙으로 지은 육은 살기 위해서 죄를 짓게 되어있어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죄지었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언제 죄지었습니까?".

살아있다는게 죄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요. 이웃사랑? 물건너 간겁니다. 일단 내가 살고 보아야 되요. 이것이 본능입니다. 내 앞 노선에 누가 있으면 안되요. 죽여버립니다. "I kill you". 난 당신을 죽였다. 내 노선을 누가 가로막냐는 겁니다.

제가 수요일에 성경공부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선 위에 내 기차가 달리는데, 선이 하나밖에 없는데 앞에서 어떤 기차가 달려오는 거에요. 얼마전에 벨기에에서 기차가 정면충돌하는 사건이 있었죠? 기차 두개가 부딫히면 찌그러진 중간 접촉 자리가 있게 되지요. 내 노선과 주님의 노선이 박치기가 되어지면, 나도 죽고 주님도 죽고요. 죽음 안에서 비로소 목자는 양을 알아보고, 양은 목자를 알아봐요.

아~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비켜라!"하는 내 길을 주님께서 비키지 않고 그대로 쳐들어와서 나와 정면 충돌을 해버리면. 주님은 내 힘에 의해서 죽어버리고, 나는 주님에 의해서 죽어버리면 둘다 죽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세례'라고 해요. 죽으심에 연합하사. 그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내가 십자가에 죽었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은 것이고, 내가 살았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살은 것이다"이 말이지요.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요. 기차가 중첩된 이 지점. 떡이 되었지요? 떡이 된 자리에서, 주도권이 누구한테로 바뀌었다는거에요?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도권이 주님께 가게 되면서요. 주님의 죽으심에 의해 나는 죽고, 주님의 부활하심에 내가 부활된 거에요.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가 주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주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도 주와 함께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의 증인이 된다.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의롭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전에는 나의 중심이니까 죄의 종이 였다가, 이제는 주님의 종이 되는 거에요. 같은 노선을 달리다가, 주인공이 나에서 주님으로 바뀐거에요.

그러니까 여기 수평노선에서, 지옥과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이제는 십자가로써 결판나는 겁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지 주께서는 방치-묵인했다는거에요. 못본척 했는데, 이제 마지막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자를 보냈어요. 공자나 부처-석가모니가 아니죠. 정하신 자를 보내서 그 정하신 자를 죽이고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마지막때에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를 제시했기때문에. 이제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 받고 예수믿는 자는 구원받는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사도바울의 설교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 내용이 수많은 권면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많이 있잖아요. 많이 있는데, 항상 그 모든 촛점이 어디로 모여 집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한테 무엇을 해주었느냐?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우리 한테 해준게 뭐냐는겁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은 저주받는 그런 비밀을 마지막때에 내주었다 이렇게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 이 사실이 새언약입니다. 노아 언약은 땅에 관한 언약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노아의 자손으로 나와있지 않아요. 여기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다라고 되어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물이고, 노아의 은혜는 땅의 은혜입니다. 뭐냐하면 악인과 선인과 관계 없이 모든 땅이 비를 받아요. 오늘 아침에 눈이 왔지요. 절에 가는 사람들을 백설을 안받고, 예수믿는 사람은 눈 맞고 이런 것 없지요? 이 땅은 선인과 악인 관계하지 않고 이 땅에 대한 은혜이기 때문에 노아언약이 있게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분하는 것. '너는 축복받을 사람','너는 저주 받을 사람'을 정하는 것은 어디부터냐하면은. 아브라함 언약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하고 이렇게 되어있지요? 궁금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 안에 누가 들어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누가 들어있느냐를 뽑아는 작업이 바로 마태복음의 족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분이 누구냐를 뽑아내는 것이 이 아브라함 14대 족보에요. 아브라함이냐? 아니다. 그럼 야곱이냐? 이삭이냐? 아니다. 그럼 누구냐? 야곱 다음에 유다냐? 아니다. 이 '아니다'가 14번 계속 됩니다.

이렇게 아니다로 쭉 가다가 마지막엔 누굽니까? 그럼 다윗이냐는 겁니다. 그래! 다윗이야. 다윗이 메시아야. 다윗이 14대의 정점이지요. 이것이 다윗언약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다윗을 보낸다고 했으니까, 사람들은 다윗인 줄 알지요. 다윗이 다시 온다는 겁니다. 에스겔 37장. "내가 성령을 통해서 다윗을 보낼 테니까 다윗이 너희의 왕이 되어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럼 바리새인같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누가 온다고 보는 겁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오면 안되고, 누가 와야 한다는 겁니까? 다윗이 와야한다는 겁니다 다윗이!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이에요. 성경에 보면 다윗이 오는 것이, 다윗의 자손이여야 하니까 어렵지요. 그것을 한글자로 봅시다. 다윗의 '씨'로 나오죠.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데요. 내가 다윗의 씨를 보낼 테니까 그분이 바로 메시야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다윗의 씨가 될려면, 뭐가 연결 되어야 합니까? 다윗 자손의 족보가 연결 되어야 되는데, 육적인 연결이 아니고 여기서 '방향 틀기'가 개입 되지요. 결국 이 다윗은 육의 자손이 아니고, 약속-언약의 자식으로써의 다윗이 오는 겁니다. 그럼 다윗의 위에 누가 있습니까? 다윗을 있게 한 아버지가 계시겠지요? 다윗은 껍데기요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분은 '?'(퀘스쳔 마크)로 오겠지요. 그런데 다윗이라는 이 혈통마저도, 14대를 통해서 다시 원점으로 내려가 주어야 무엇이 드러나게 됩니까? 바로 죄가 드러납니다.

인간의 혈통-다윗의 혈통은 솔로몬부터 나오지요? 솔로몬이 다윗의 자손입니까? 아닙니까?로 갈라지는 거에요. 다윗의 자손이 영적인 분이냐, 아니면 육적인 솔로몬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육적인 솔로몬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솔로몬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솔로몬을 태어나게 해놓고 아니라는 거에요. 제가 말을 하면서도 상당히 어려운데요. 이것을 쉽게 할 수가 없어요.

지금 솔로몬부터 시작해서 내리막길로 가고 있어요. 그렇게 내려가다가 바벨론으로 가게 되는데. 누가 망합니까? 이스라엘이 망하지요? 원래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한테 주어졌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주었잖아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느냐하면. "이스라엘 속에 우리 메시야가 온다"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것은 착각이였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생각이 아니고, 육적인 생각이였어요.

제가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6대조 할아버지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5대조 할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6대조 전부 다 목사집안이였습니다". 이 얘기만 들으면 그 가정은 무슨 가정 같아요? 마치 구원받은 가정같지요? 아니거든요! 그것은 마치 "이래서 우리는 지옥갑니다"라는 말과 똑같은 소리에요.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오히려 다윗의 자손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육으로 고발하면서 오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야되요. "우리 조상은 6대째 목사이지만, 그것은 죄의 열매입니다. 목사 되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되지요. 그러면 아버지, 할아버지 목사 아니더라도 그 사람은 천국 가는거에요.

다윗의 자손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마저도 멸망당해야 될 민족이라면(실제로 14대만에 멸망 당하지요) 그러면 이방민족은 당연히 개이고, 당연히 멸망 당해야 되는거에요. 그러니 모든 인간이 멸망 당해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이 오시는 겁니다. 여기에 실제로 솔로몬 이후에 바벨론까지 몇대입니까? 14대가 아니고 사실은 18대에요. 4대가 빠집니다. 그런데 왜 14대로 맞추느냐 하면. 이렇게 올라가 보았자, 올라간 그대로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의 위치-위상을 보여주는 거에요. 위상이라 하는 것은 수평이 아니고, 높이를 말해주기 위해서에요. 14대로 올라갔던 것? 꼴아박기 위해서 올라간 거에요. 올라간 이유가요.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윗의 자손이 분명히 오기는 오시지만, 너희들이 예상한 그 혈육적인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상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관이 있지요. 그런 혈육을 기대하는 너희들이 바로 죄의 원천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14대만에 돌아와 가지고 내리막길을 가는거에요.

그러면 중간에 분화구처럼 갈라지는 거지요. 연결이 됩니까, 연결 안됩니까? 연결이 안되지요. 연결의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이 자리에 남자 이름이 들어가지요? 누가 들어갑니까? 아까는 다말에 의해서, 룻에게서, 라합에게서라는 여자이름이 들어가지요? 그럼 이번에도 여자 이름이 들어가야 되잖아요. 밧세바란 여자 이름이 들어가야 되는 것을 다 알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야의 아내'이지요. 아까 말했지만 여자라는 것은 여자 자체적으로는 의미가 없고, 반드시 무엇을 보여주는 여자다? 남자됨을 보여주는 게 여자이거든요. 창세기부터 그랬으니까.

그러면 우리야의 아내이지요. 우리야와 같은 정신이 흘러가기 때문에요. 우리야를 죽인 자가 누구입니까? 다윗의 육적인 거지요. 다윗의 육적인 것을 받은 솔로몬들은 우리야를 죽이는 정신을 이어 받아서 '멸망 당해야'됩니다. 그럼 멸망당한 자리에서 '00에게서'할 것 없이 한꺼번에.
그 다음에 16절을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 '에게서' 앞에 뭐가 붙습니까? 마리아 에게서가 나오지요. 마리아의 남편은 누굽니까? 마리아의 남편은 여기에 '요셉'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뒤에보면 마리아의 남편이 요셉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습니까? 안낳았습니까? 안 낳았지요. 여기가 육과 영이 갈라지는 최후의 지점입니다. 최후의 지점.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아~ 이용했구나. 그동안 이스라엘을 이용한 거에요. 역사를 이용한 거에요. 이용했다는 말도 되고, 일부로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깔아놓은 레드카펫도 되지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뭐라고 되어있어요? '나시니라'. 스스로 알아서 나오신 거에요.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냥 나온거에요. 사실은 이 말이 예수님뿐만 아니고, 보통 아기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산부인과에서 애기를 낳았다고 하는데요. 엄연히 말해서 지가 나온 것일수도 있고, 엄마가 밀어낼 수도 있는데요. 이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기 못났습니다. 엄마 조정해야지요. 아기를 밀어내고, 그만 안에서 놀고 밖에 나와라하고 밀어내지요. 세상에 아기 하나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에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이야기 하시잖아요. "범사에 감사하라"라고요. 너무 특이한 것 찾지 마시고요. 자세히 보면,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손길-손때가 안묻은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주님의 은혜이고, 우리는 그 은혜를 밟고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뢰밭을 밟는 거지요. 툭툭 하면 다 은혜에요. 이것도 주의 은혜인데 내가 감사하지 못하고, 이것도 언제쯤 내가 감사할꼬. 이 소파 살때 처음 2달만 감사하고 그 다음부터 감사를 잊어버렸네. 소파 사고 난뒤에 또 비싸게 주었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보통 남편하고 살고 난 뒤에, 세로토닌의 작용인지는 모르지만 사랑하면 6개월이 간다네요. 그 다음부터는 "아 좀더 골라볼껄"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계약결혼 하잖아요. 사람의 육적인 것이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만족함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무저갱이에요. 무저갱의 뜻이 뭐냐하면 '밑바닥이 없다'는 것입니다. 퍼내도 퍼내도 퉁퉁 소리는 들리는데 밑바닥이 없어요.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고, 한도 없어요. 인간의 욕망이 그래요.

그래서 주님은 그런 인간을 이용한 거에요. 이 다윗에 자손 '에게서'라는 것을 통해서 한꺼번에 '마리아에게서'로부터 14대,14대,14대로 쭉 올라가면서 이 정점에요. '마리아'와 '다윗'이 아니고, '마리아'와 '다윗의 자손'이 만나지요. 그리고 다윗의 자손은 마리아를 통해서 본인이 알아서 성령을 통해서 그냥 나오신거에요. 이렇게 나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는 뭐가 되느냐하면은, 죄의 역사다. 죄의역사. 모든 역사는 죄고, 육이며, 예수님이 구원하지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는 그러한 저주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아.. 여러분 어렵지요. 이 어려운 성경책을 예수님 처음믿는 사람보고, "마태복음부터 읽으세요"라고 하거든요. 처음부터 재미가 없어!.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어쩌구 저쩌구 이건 뭐 종가집 회의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 부분을 빠르게 넘어가지요. 그 다음에 요셉과 마리아한테 천사가 와서, "이름을 예수라 하라"하니까요. "아~ 이제 이해가 되네"하거든요. 그거요. 과연 이해가 될까요? 이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이야기하는 이름이 뭔가하면은, 두글자로 '예수'지요. 근데 그 예수라는 분을 선지자가 예언한 것은 네자로 무엇입니까? 23절을 봅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름을 뭐라합니까? '임마누엘'. 임마누엘이 몇글자입니까? 네글자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몇자인데요? 두자이지요. 두글자가 어디로 날아 갔습니까? 어제 금메달 딴 사람이 '이상화'지요? 근데 그 사람이 '이성화'는 아니잖아요. 이성화는 이상화와는 다르잖아요. 예수하고 임마누엘하고 다르지요. 그런데 어떻게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된거에요? 이름이 다른데. 임마누엘 따로 있고, 예수 따로 있는데 어떻게요. 여기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고하라"해서 이름을 두자로 지었다고요. 그래놓고 여기보면, "보라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었으니 임마누엘이라"하라. 임마누엘 네자인데요. 이것을 목사님들한테 질문해보았습니까? 뭐 자기도 모르는데 해봐야 소용없지만.

이런 것이 주석책에 안 나옵니다. 그냥 그대로 넘어가 버려요. 만약 예수님이 임마누엘같으면 유대인들이 믿습니다. 천사가 알려준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했으면요. 왜? 자기가 알고있는 임마누엘이, 이사야 7장에 "처녀가 잉태하여..임마누엘이라"했으니까요. 임마누엘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막상 오신 분의 이름이 뭐냐하면 '예수'에요~'예수'. 이것은 의미로 풀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름 이니까. 이름이 임마누엘로 온다고 이사야는 말했어요. 그런데 이쪽은 이름이 아예 '예수'고요. 의미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임마누엘은 의미를 말한다. 그 말 하는게 아니고요. 이름이 아예 임마누엘이라고 이사야는 아예 못박았다니까요. 이쪽은 예수고요. 아예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게되면, 구약성경에서 합당한 신약성경 귀절은 한개도 없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지요. 보통 신약성경에 보면, '구약에 이를기를'-'구약의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해서 구약본문을 따 왔잖아요. 한번 따온 것을 비교해 보세요. 보시면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같은것이 없어요.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되있다면, 신약에는 주로 되있고. "다윗의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했다고 신약에 되어 있어요. 그런데 구약에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고 되어 있어요. 여호와와 주가 바뀌어서 나옵니다. 문자적으로 같지를 않아요. 모든 귀절이 다 그래요. 

그래서 신약신학자들은 그것에 대한 책을 쏟아냈습니다. "왜 안맞는가? 왜 같은게 하나도 없는가? 어떻게 해석했기에 이렇게 의도적으로 다르게 하는가?". 그러니 문자적으로 맞지를 않도록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셔요. 사실은 사도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사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에요.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으로 하여금,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의 듣는 귀를 다 막아버리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안맞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 해석의 비법은 어디있느냐 하면은, 21절에 있습니다. 21절을 보면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참 이게 재미있어요. 예수라는 이름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하면은, 자기 백성을 그 다음에 '구원할 자'. 자기 백성-하나, 구원-하나, 구원하심-동사, 구원하실 자-인물. 자, 이 세가지 이름이 다 되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를 아무리 분석해 보세요. 나오는 것은 그냥 '구원자'라는 거에요. 여호수아-구원자. 구원자밖에 안나와요. 원어분석해봐도 소용없어요.

여기서 참고적으로 팁을 이야기 하면요. 보통 목사나 신학교수들이 유치한 척하면서, 원어분석을 많이 하는데요. 원어분석하는 그 자체가 언어의 개념을 몰라서 원어분석하는 거에요. 죄송하지만 어려운 언어학을 언급해야 하는데요. 언어라 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있는 사물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이미 알고있는 논리적 체계의 단어를 사용해서 그것을 포섭하는 의미로써의 언어가 되요. 말을 참 일부로 어렵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달리 표현 할 도리가 없어서 그래요.

쉽게 말하면 옛날에 단어가 한정되어 있을 때에는, 세가지-네가지의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을 전부다 하나로 묶었습니다. 또 반대의 경우가 있어요. 그냥 외국에서는 달콤하다를 뭐라고 합니까? 'Sweet'라고 하지요. 그런데 한국은 뭐라고 합니까? '매콤달콤','달짝지근'. 이렇게 여러가지 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하면요. 언어라하는 것은 그 공동체와 종족에서의 체계(매트릭스)인데요. 논리적 체계인데, 소쉬르 같은 경우에는 차이를 이야기 해 주고요.

여러가지를 뭉뚱 그려서 현재있는 단어가 용량이 한정 되어 있으니까, 여러가지를 묶어서 일괄적으로 설명을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하려 하다가 우발적인 다른 새로운 요소가 발휘 되면, 현재 언어로 사용 할때는 그것을 분화 시키고 분기 시켜서(그것을 파생어라합니다)파생 시켜서, 뚝 떼어서 그쪽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새롭게 적용하는 겁니다.

예를들면, 컴퓨터. 북한에서는 컴퓨터를 뭐라고 합니까? 아무리 그쪽이 한국말을 좋아해도, 재주가 없어서 그냥 '컴퓨터'라고 써요. 그렇게 한국말로 옮기길 좋아해도요. 그처럼 옛날 고대 히브리언어는요. 헬라나 아람어는 그 당시 문화가 발달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의 사건들을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이야기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당시의 언어를 볼때는, 문맥을 봐야되지 원어분석을 해면 안되요. 원어분석을 하면 나중에 남는 것은 '모호한 차이'밖에 없어요.

여러분, 빨간불은 '건너가지 마세요'. 파란불은 '건너가라'는 의미 잖아요. 그런데 빨간불보고 건너가지 마라를 찾아보세요. 어떻게 찾습니까? 아무리 들여다 보세요. 여기 '건너가지 마라'라는 글자가 어디 나옵니까? 안나오지요? 그럼 무엇과 대비될때? 파란불과 대비되서, 파란불은 '건너가세요'. 빨간불은 '건너가지 마세요'. 그 차이-변별성에서 뭐가 생기느냐~ 파란불은 파란불로써의 의미가 생기고, 빨간불은 빨간불로써의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언어는 실체와 같지 않고, '은유'와'환유'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은유라는 것은 '응축'이고, 환유라하는 것은 '대비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 언어학의 은유와 환유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이 은유와 환유가 있다는 말은요. 아무리 언어분석을 해도, 그 내용과 그 의미가 딱 안맞아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냥 평면적이고 대충 어렴풋이(그것을 미분적이라고도 합니다)-대강,대충그냥 넘어가! 그것이 언어에요.

개. 개는 뭐냐? 개라는 것은 없어요. 세파트 있고, 삽살개 있지, 그레이하운드 있지. 개라는 것이 어딨어요? 그런것들을 뭉뚱 그려서 그냥 개라고 하자! 하면 그냥 개가 되는거에요. 근데 개도 아니고, 염소도 아닌 것이 생기면 단어가 어떻게 됩니까? 새로 만들어야지요. 마창진이라는 도시가 있는데요. 마창진 도시가 무슨 도시죠? 마산에 있는 땅인데 앞으로 창원으로 바뀔 땅이에요. 일시적으로 마창진이에요. 그럼 마창진을 언어분석하면 마산,창원,진 나오겠지요. 그런데 나중에 창원으로 바뀌어버리면 아무리 분석해도 그 의미가 안나오겠지요.

그처럼 언어는 하나의 구색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언어분석은 없어요. 그냥 문맥상, 구조상으로 봐야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라는 언어를 아무리 봐도, 이 세가지의 의미가 안 나오지요. 그렇다면 예수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합니까? 예수라는 이름을 누가 붙였느냐하는 문제를 알아야되지요.

아~이제부터 제일 어려운 부분을 하겠는데요. 프라이데이-금요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냐면 로빈슨 크루소라는 사람이 이름없는 흑인토인을 가지고, "어이~ 이름뭐야?"라고 이름을 지어야겠다해서 붙인것인데요. 그 날이 마침 금요일이라서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지었어요. 그렇다면 이 흑인의 이름의 존재가치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가지고 있어요? 이름을 지어준 자에게만 이 '금요일'이라는 이름이 의미가 있지요.

김춘수라는 시인이 출판사 직원으로 있으면서 자기 책상앞의 꽃을 보면서 시를 지었지요. 저 꽃이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그냥 꽃이였는데. 내가 이름을 불러주니까, 그 꽃이 나에게 다가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는 거에요. 꽃이라고 이름 불러줄때요. 그런데 김춘수의 옆 사람은 어때요? 그 사람에겐 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왜? 자기이름을 안 붙여주었기 때문에요.

아담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생각을 안하고. 그냥 "인간이니까 하나님이 책임져"라고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에서 나오는 신은 모두 우상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은 결국 그 의미의 출처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누구 이름을 불렀습니까? 인간이 무엇을 불렀어요? 신을 불렀잖아요. 그러면 이 신은 누구한테 의미가 있어요? 신에게 의미가 잇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의미있는 신'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우상이 된다 이말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반드시 우상 앞에 붙이는 말이 있어요. '나를 위하여'라고요. '나를 위하여'가 반드시 붙어서 나옵니다. 특히 시내산 밑에서 우상숭배 할때 '나를 위하여','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인간을 아담으로 부르실 때는요. 아담의 뜻이 뭐냐 하면 '흙'이지요~흙. 그러면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담~아담" 이렇게 불러 줬다고 한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어쩔수 없이 우리의 몸은 쇄약하고 후패해서 흙이 되어야되는 거에요. 이것을 너무 슬퍼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흙이 되는 것은 억울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몸이 아픈 것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다 흙이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요.

과학에서는 세포 DNA의 끝이 끊어지면 사람의 수명이 단축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요. 환경문제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환경 문제가 좋아도 사람이 천년-만년 사는 건 아니 잖아요. 창세기에 환경좋아서 900년 살았잖아요. 하지만 결국은 죽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왜 죽느냐에 대한 문제는 의학적으로 발견된 바가 없어요. 왜 죽는지는 몰라요. 과학이라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다루는 거에요. 눈에 보이는 구조 안에서만 폐쇠적으로 다루는 겁니다. 그것도 이용하기 위해서에요.

'진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용 가치가 있느냐?' 이거에요. 물이 왜 흐르냐는 의미가 없어요. 물 흐르는 힘으로 어떻게 전기를 일으 키느냐. 그저 이용만 하면 되요 이용만. 우주 바깥에 또 무슨 우주가 있느냐? 아무런 의미 없어요. 다만 그 우주에서 지구에서 고갈된 새로운 금속을 어떻게 캐내느냐만 의미가 있으면 되는겁니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무슨 영화입니까? "아바타" 아닙니까~아바타. 지구에 없는 금속을 캐낸다. 그것 때문에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 자식을 낳잖아요. 자식을 낳을때 여러분이 분명히 신앙인 이니까 고백하기를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낳게했습니다"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낳게 해놓고, 이 아이에 대한 투자 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 나에게서 찾잖아요. 내 자식이니까요. 그래서 잠언서에 나오기를. "자식이 부모에게 공경해야되지만, 그 부모는 육적인 부모가 되지말고, 하나님의 경외가 담겨져 있는 부모를 공경하라" 이말이지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부모에게 공경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낳아준 자식이기 때문에요. 나를 통해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요. 사람이 효도 한다고 해서, 비복음적인 것까지 순종할 필요 없어요. 주안에서 순종해야지 주 밖에서 순종하려는 것은 그건 자기의 심신을 편하게 하려는 자기 이기주의의 결과입니다.

세상에 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어요. 그 뜻이 뭐냐? '나는 아담입니다'라는거에요.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고, 뭡니까? '나는 흙덩어리 입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반드시 나는 아프고 치매 걸려서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운명 입니다. 이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거에요. 이런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라서 흙이 흙한테 투자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왜냐면 내가 내 이름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요. 나에게 이름을 지으신 분은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투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심지어 이웃에 대해서 투자하는 것도, 실은 이웃을 위함이 아니라 이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하고 필요한 존재인가를 따져서 나에게 유용한거에요. 쉽게 말하면, 여러분 택시를 타고 가시다가 버스하고 박치기 했어요. 내가 택시 손님으로 탔기 때문에 택시기사의 손을 듭니다. 그런데 버스 운전사가 만약에 자기 삼촌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역시 택시가 잘못했어 이러지요.

이게 뭐냐하면은, 인간은 죽을때까지 자기의 이름은 하나님에게 부여 받으면서도 항상 투자는 누구에게 합니까? '나에게 투자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나의 죄값으로 나는 흙행세를 하고, 결국 흙이라는 한계를 못벗어나서-흙행세를 하면서, 지독스럽게 죄인답게 사그러져 가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하신 분을-이름 지으신 분을 안다면, 그 이름 지어주신 분이 또 다른 이름을 주신 거에요. 바로 그 '예수'라는 이름을 주신 겁니다. 구원자의 이름을 주신거에요. 이것을 아는 사람이 뭐냐? 바로 그냥 '백성'이 아니고, '자기백성'인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백성인 자'와 '아닌 자'를 마지막때에 구분하는 기준으로써 '예수'라는 이름을 내세우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문자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은 거기서 다 넘어지는 거에요. "예수는 가짜다. 예수는 이단이다" 이러는 겁니다. 문자적 해석 하는 사람은 안 맞으니까 그런거에요. 그런데 안 맞게 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예수되게 하는데, 필연적으로 우리의 모든 해석은 오류다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작업과 병행해서 진행하십니다. 예수님을 더욱 더 예수님 되게하는, 그 이름에 합당한 이름으로 진행되어 나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마지막 강의에 1시간동안 이어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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