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2강b 1002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1. 20:30

대전100218b마태복음2강b

2010-11-23 00:27:29 녹취 : 송재원


자,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 후서에 보면, 복음은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가 되고, 구원받는 자에게는 향기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하면요. 똑같은 말을 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악취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예 기정 사실화 하는 겁니다. "내가 이야기 했는데 안 먹혀, 내가 이야기 했는데 안믿어줘" 이렇게 나온다면요.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 보면요.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이것을 보게되면요.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분류 시키는거죠. 분류 작업. 분류 작업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양과 염소에요. 항상 분류작업입니다. 양과 염소. 오른편과 왼편. 알곡과 가라지. 항상 이렇게 분류작업을 하죠. 그런데 인간의 동지애, 인간의 인류애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간을 누가 만들었죠?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럼 모든 인간은 누구의 자녀가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지요. 그럼 하나님의 자녀라면요. 만약에 여러분이 자식이 많으면 부모가 그것을 분류를 하겠습니까? 어림없지요? 자식이 아홉명이든, 백명이 되든 다 건사 하고 싶지요. 그런데 자비가 많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분류를 해서 지옥을 만들어놓고, 어떤 사람을 지옥에 보내서 채운다. 지옥은 비어있으면 안되거든요. 지옥은 채워야 맛이 난다는 겁니다.

이 말이 로마서에도 나오고, 여호수아에도 나옵니다. 여호수아 11장 20절봅시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분류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 분류작업에는 일체 실수나 오류가 있을 수 없어요.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요. 이것이 로마서 10장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의 속성이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공의와 하나는 자비가 있습니다. 공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을 만들어놓고, 자비를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을 만들어 놓았어요. 이 속성을 채우기 위해서 피조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지요. 모든 만물이 누구를 위하여 만들어졌다? "주를 위하여" 만들어 진 거에요. 주님의 속성. 하나님은 이렇게 저주하실 수 있는 분이고, 우리 주님은 이렇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분이다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적인 자존심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상을 거부할 겁니다. 그것은 심한 칼빈주의라고, 예정론이라고 말하며 거부 할거에요. 그런데 자기가 상한 심령이며, 죄인중에 괴수라고 생각 한다면 주님이 어떤 조치를 취하든지, 심지어 내가 지옥 갈지라도 주님께 감사하다는 말이 나와요. 그게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심지어 내가 지옥 갈지라도 주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하신다면 그게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요. 그것은 보통 고백이 아니지요. 그게 뭐냐? 사적 구원을 깨는거에요. 나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깨버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니까, 그당시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것이 딱 한개 있어요. 뭐냐 하면은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더 짓게 한다 이렇게 나오니까 반대합니다. 유대인들이 상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잖아요. 유대인들이 딱 하는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그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죄를 더욱 더 많이 지을 필요가 있겠네?" 라며 나오는 거에요. 로마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바로 그렇게 이야기 하는 너! "너 자신이 너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이것을 이야기해요. 너 안에 너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데. 그게 로마서 7장에 보면 그게 뭡니까? 바로 죄가 너를 지배하고 있는데! 왜 죄가 너를 지배한다는 것을 자꾸 인정하지 않고, 마치 네가 죄를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오해하고 있느냐 이말이지요.

그러니 주님은 죄를 보고 이야기하는데, 꼭 중간에 지가 나서요. "내가 잘하면 될거 아닙니까? 내가 죄를 다스리면 될거 아닙니까? 저 앞으로 신앙 생활 잘하면 되잖아요". 지가 꼭 나서! 그럼 이야기 하시지요. "비켜줄래~". 그게 세간살이 구원하는 것하고 마찬가지잖아요. 하늘나라라는 것은 집주인을 묶어 놓고 그 다음에 세간살이를 들고 나오는 것처럼요. 세간살이-냉장고, 지가 알아서 기어 나오는 것 아니잖아요. 그처럼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걸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 안에 우리보다 지독한 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요. 그게 바로 죄가 우리를, 아담의 후손을 지배한다는 겁니다.  

자 이제, 마태복음을 보지요. 구약에 있어서, 방금 제가 여호수아 이야기 했잖아요. 다시 해볼까요?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사람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이건 바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퍅해서, 그들은 본의 아니게 뭘 공격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백성,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저주 받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겁니다. 이 전쟁을 가지고 구약에서 '붙이심의 전쟁'이라고 나옵니다. 이 붙이심이 여호수아, 사사기, 신명기에도 많이 나옵니다. 붙여준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데 저쪽에서 박는거에요. 박고서 튕겨나가지요. 그렇다면 왜 그런 방식으로 승리를 하느냐? 그렇게 될때 승리는 누가 승리를 합니까? 이스라엘이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올 때, 누구의 힘으로 건너왔지요? 여호와의 이름이지요? 그것이 약속의 땅에 가서도 계속해서 여호와의 승리로 올려져야 그들은 약속의 백성으로써 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여호와께서 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이 좀 편하면, 다 지 잘된 탓으로 돌려요. 인간이 그래요. 그래서 이스라엘 주변에 뭐가 있느냐하면, 이방인들이 독사견처럼 세파트처럼 이렇게 배치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편하다 싶어서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싶으면 누가 처들어옵니까? 모압, 암몬, 블레셋같은 주위의 나라가 쳐들어오는 겁니다. 쳐들어오게 되면, 이들은 자기 힘으로 견디질 못하니까 누구한테 호소합니까? 여호와겠지요. 이것을 역사지평에서 자기의 힘으로 살다가 누굴 쳐다보느냐하면, 바로 주님을 쳐다보는 겁니다.

지금 이게 마태복음에서 이야기 할 족보 이야기와 무관한 게 아닙니다. 이것을 피라미드라고 합시다. 역사로 가다가 자기 몸이 편하다 싶으면, 다시 자기의 미래를 봐요. 우리 어려울 때 새벽기도 나오잖아요. 보통 사람들이 뭔가 일이 좀 잘 풀리고 나면 새벽기도를 건성으로 나온다든지 소홀한다든지 하지요. 그러다가 집안에 무슨일이라도 나면 부리나게 또 새벽기도 나오잖아요.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때, 새벽기도를 10년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했어요. 그때 새벽기도 하면서, 제일 걱정되는 사람이 새벽기도 늘 나오던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나온사람이에요. 분명히 문제 있습니다. 한 일주일 하다가 그 다음부턴 안나와요. 아 문제 해결됬구나. 이렇게 안심이 되지요. 늘 나온 사람은 새벽잠 없는 할머니들 밖에 없어요.

지금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00에게서'라는 말이 나와요. 그런데 그 앞에 반드시 여자의 이름이 나와요. 여자 이름인 '00에게서'가 모두 5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00에게서'가 나온다는 이말은 뭐냐하면요. 족보노선이 이 '00에게서'의 영향을 받을 때마다 세상적인 족보로 가고 있다가 방향을 틀게되요. 피라미드의 수직으로 잘 갈때마다, 이 '00에게서'가 방향을 틀어주는 거에요.

첫번째 '00에게서'가 뭔가 봅시다. '다말에게서'입니다. 다말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여자지요. 어제 이상화라는 여자 스케이터가 금메달 땃잖아요. 이 여성이 남성들 족보에 들어가는 경우는 뭐냐하면, 이 남성으로 된 혈육적인 것을 영적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어느나라에 못간다? 하늘나라에 못간다. 그러니 목사자식이라고 구원받는게 아니에요. 장로 권사 자식이라고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이지만요. 도킨스라는 사람이 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에 보면, 인간은 껍데기고. 인간 내부에 진짜 인간은 DNA입니다. DNA의 움직임이 우리의 움직임이에요. 인간의 성질이 다르다? DNA가 달라서 그래요. 그 사람이 당뇨다? 족보가 당뇨DNA를 가진 족보라 그래요. 그래서 앞으로 의학은 DNA부터 조작해서, 아예 당뇨를 미연에 방지하는 그런 대책을 세울 거에요.

DNA라는 말을 왜하느냐면, 인간이라는 것은 결코, 인간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나'라는 자체가 없어요. 내가 없다니까요. 여러분 수제비 만들때 뭐부터 먼저합니까? 반죽부터 먼저하지요. 옛날 어머니들은 뜨거운 국물에다가 멸치넣고 수제비를 뚝뚝 뜯으면서 넣잖아요. 그 아무 못생긴 수제비 어디서 나온 겁니까? 한덩어리에서 나왔잖아요. 그 떨어진 한 조각이 우리라니까요? 이걸 성경은 간단하게, 우리는 모두 아담안에 있다고 말해요. 아담안이에요. 항아리 있잖아요. 항아리 안에 쥐가 두마리 있다고 합시다. 그 쥐가 백날 번식해도, 그 항아리를 탈출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지요. 이 두마리의 쥐가, 아담과 하와에요. 그리고 하와는 또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담에게서 나왔어요. 여자란 남자없이는 여자가 없기 때문에요. 라캉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여자는 없고 여자는 남자의 흔적, 빈자리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남자없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요.

그래서 여자가 필요 없다는 말이냐?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필요 했던 겁니다. 아담을 설명하는데 여자가 필요했던 이유는 뭔가 하면요. 교회가 없이는 예수님이 설명이 안되요. 예수님은 누구 역할 이냐면 남자역할 이고요. 교회는 여자역할을 하는겁니다. 여자가 있는 이유는 여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부흥' 이러면 안되요. 교회라하는 것은 '속죄양의 표지'를 가진 사람인 것처럼요. 남편의 표시, 다른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이지, 교회를 이야기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절'이에요. 그건 사찰이죠.

교회를 키운다던지, 교회가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교회의 할일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간판 그거 십만원만 주면 달수 있어요. 근데 그게 교회가 아니에요. "우리 교회는 이렇습니다"라고 말하실때, 제가 묻고싶어요. "그럼 교회가 뭡니까?" 성경에서는 교회가 이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성경에 입각해서 우리 교회는 교회 맞습니다라고 이야기 할때 교회이지. 우리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교 통합측에 있고. 장로교 교단이고.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 없어요. 그것은 성경에 안나옵니다.

그리고 예레미아나 에스겔에 '이근호'의 이름이 안 나와요. 여러분 이름이 안나옵니다. 이말은 우리는 아담에 속했기때문에 아담의 이름 외에 우리의 이름이 필요치 않아요. 그러면 목사님 다윗,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왜 있습니까?. 다윗과 예레미야 이런 사람은 계시를 받은 사람인데요. 이 사람은 이름이 두개입니다. 그걸 '탄력적 주체'라고 이야기 하는데요. 이건 제가 논문에 발표를 하는데요.

다니엘 같은 경우에는, 다니엘 따로있고 인자라는 이름이 있지요. 다니엘을 하나님이 뭐라고 부릅니까? '인자야'라고 부르지요. 이 말은 다니엘은 의미 없어요. 다니엘의 모든 행동은 장차오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행하는 연기자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람이 있고, 아브라함이 있지요. 또는 야곱이 있고,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이렇게 이름이 두개가 있어요. 야곱은 육의 이름인데, 이스라엘은 영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누가 이루느냐? 야곱이 이루는게 아닙니다. 야곱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루시는겁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에 합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동행해서 이루시는 거에요.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보면 '흰돌'나오지요? 한자로 뭐라고 하지요? 백석이지요. 그래서 백석대학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그 흰돌에 누구의 이름이 있어요? 새 이름이 있지요. 그 새이름이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여러분 기도 마지막에 누구 이름 부릅니까? 기도는 우리가 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이름 부릅니까? 제가 하지 않고 누가 했습니다? "주님이 했습니다"하고, 주 예수의 이름을 붙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죽은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죽은 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말라 이말이지요. 저 이근호같으면요. 이근호는 성경에 안 나오는 이름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근호에 대해서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은 두사람 밖에 없어요. 마지막 아담되시는 예수님과 그리고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뭐? 아담이에요. 아담이 둘로 나눠지면, 지옥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둘로 나눠지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성경 자체가 말입니다. 그야말로 '인간 무시'입니다. 성경의 컨셉이 뭐냐하면. '인간모독'입니다. '00에게서'라는 말을 집어 넣는 것은 뭐냐? 여자가 들어간다는 것은요.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기 때문에, 남자에게 나둬버리면 이것이 육으로 빠져버려요. 그때 예수님과 관련된 여성이 등장 되어서, 새로운 핏줄을 만들어요. 아까 이야기한 '주체층'. 새로운 주체층이 형성됩니다. '00에게서'를 집어 넣어 버리면요. 그런데 여성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들이 계획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발적이고, 우연적이에요. 두 말이 사실 다른 말이지만, 일단 같다고 봅시다.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이 개입되 버리면, 이 족보의 방향이 틀어져 버립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불교집안인데 우연히 예수믿는 며느리가 들어 갔다고 봅시다. 근데 그 집안이 불교 보살집이다. 그래서 얼마나 반대를 하겠습니까? "너 시집 온 이상 교회 못간다.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의 종손이기 때문에 제사는 한달에 두번씩 드려야된다!". 여러분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머님 못합니다 이렇게 해야겠어요? 어떻게 하겠어요?

질문자:"예수믿으세요"라고 해야할것 같은데요.

그 사람들은 예수라고 해도, 개나 돼지한테 거룩한 말을 던진 격이기 때문에 소용이 없지요. 개나 돼지한테는 아예 거룩한 말을 던지지 말라 했으니까요. 들어 봐도 그 사람들은 밟을 뿐이니까요. 모독할 사람이니까요. 아무튼 그 상황이 오면, 딴 소리 할 필요 없어요. "예~" 하면 되요.

우리가 사람에게 순종하는게 낫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게 옳습니까?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낫잖아요. 그럼 말씀대로 생각하면 되요. 뭐냐하면요. 시집 간 며느리는, 그러한 보살환경을 적으로 보지 말고, 그냥 하나님이 주신 환경으로 보자 이 말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요. 본인도 예수믿기 전에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 내가 예수믿겠다고 손들은 그 의지로, 나의 노력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 아니잖아요. 나도 주님의 성령이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냥 육에서 나서 육으로 돌아갈 사람일 뿐이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부처믿고 일년에 24번 제사하는 그것을, 내가 만약에 성령이 없다면 나도 못된 시누이로써 합세해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을 충분히 이해 해야되지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구원만 해놓고 손 털어버리셨습니까? "구원했다. 니 알아서 잘해라. 말씀대로 잘 살면 내가 후원은 해줄께" 이렇게 손 털어 버리셨습니까? 어떻게 된 거에요? 성경에 보면, 주도권이 나의 주도권이 아니라, 주도권이 바뀌어 버렸어요. 이제는 나는 주님의 도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도구가 된다는 말은 그 환경도 주께서 의도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환경이기 때문에요. 일종의 그 여자는 뭐가 되느냐하면, 그 가정에 들어간 '선교사'가 되는 겁니다. 선교라하는 것은 땅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땅끝'입니다. 나 있는 자리가 땅끝이에요. 이 땅끝이라는 말을 요한 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하면요, 성령이 있는 곳을 전부 다 땅끝이라고 보았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마지막때 오는 영이기 때문에요. 공간적인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적인 끝은 성령이 있는 곳이 전부 다 끝이 되는 겁니다. 하늘과 땅이 접촉되는 장소.

여러분 먹구름의 끝이 어딥니까? 땅과 접촉되는 그곳 이잖아요. 성령의 끝이 어디지요? 바로 이 자리 아닙니까? 우리 육체는 땅에 있지요. 성령이 우리한테 있다면, 우리는 뭡니까? 피뢰침이지요. 피뢰침의 의미를 알겠지요? 피뢰침은 뭘 매게 한다? 번개와 땅의 접촉을 매게 하지요. 우리가 움직이는 피뢰침이 되는거에요. 성령의 번개가 쳐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빠방!" 하고 쳐야 되요. 마치 사도바울처럼요. 모든 논리와 합리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거에요. 그야말로 "주여,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군요. 예전의 종교적인 형식, 예배 참석 이런것들이 의미없군요. 성령께서 와야 육에서 벗어나는 군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모든 종교적인 것이 뭐로 번역되느냐하면, 모두 육적인 행함으로 다 번역될꺼 아닙니까? 그런데 성령이 되어버리면, 같은 일을 해도 이거 누가 시킨거냐하면은 성령의 은사, 은혜로 말미암아.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식으로,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저를 통해서 하게 하시는 거죠. 남들 보기에는 마치 지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 뱅이 나왔지요.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했을때, 주변사람들이 다같이 뭐라 생각 했느냐면, "당신의 경험과 당신의 신앙심으로 낫게했다"고 모두 베드로와 요한에게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왜이러십니까? 제가 한게 아니고, 저 사람과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불과하고요. 우리는 단지 목격자에 불과합니다". 목격자. 이것을 두자로 뭐라고 합니까? '증인'.

그렇다면 며느리가 그 집에 시집온 것은 선교사라고 하지만, 다른말로 증인, 목격자이지요. 주님께서 우리 시어머니를 어떻게 다루고, 주님께서 우리 시아버지와 시누이라는 불도를 어떻게 다루는가 한번 보자 이겁니다. 보게되면, 그 가정이 구원받을까요? 구원 안 받을까요?. 그거는 며느리 소관이 아니지요! 아까 여호수아 봤잖아요. 어떤 사람이 더욱 더 며느리를 핍박한다면, 그것은 주께서 저주 받게 하기 위해서 강퍅하게 하신다는 걸로 그 모습이 확인되지요. 어제 성경말씀이 어제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서 확인되겠지요. 왜? 나는 피뢰침이니까. 이 피뢰침 안에는 모든 성경말씀이 다 담겨서, 나를 통해서 매게 되니까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을 향하여 완성된 모습으로 이것이 바깥에 퍼지니까요.

라합의 직업이 뭐지요? 기생이지요? 라합 같은 경우에, 야고보서에 나오는데요. 라합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라합의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고, 라합 안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담겨서 나오다고 보니까, 라합식으로 우리에게 계시가 전달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다말을 봅시다. 다말은 잠시 직업이 뭐였습니까? 창녀였지요? 전문 창녀가 아니라, 창녀짓을 잠시 했던 겁니다. 그러면 창녀짓을 했으니까, 창녀=나쁜여자 잖아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유다가 나중에 일의 결과를 보고, 다말을 보고 "네가 나보다 의롭다"라고 했습니다. "나보다 의롭다". 그러면 갑자기 창녀가 성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외부인들은 어리둥절 하겠지요. 아무리 뭔가 신앙의 이름으로 하지만, 시아버지하고 잠자리를 하느냐?하는 이것이 만약 신앙이라면요.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어떤 시아버지와의 정절치 못한 모든 관계도 성경의 문자를 거론해서 그것을 정당화 시킨다고 나올텐데요. 다말은 되지만 너는 해서는 안된다고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준을 어디서 찾지요? 다말은 시아버지하고 관계가 되는데, "너는 무조건 안되"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기준이 어떤게 있느냐 이말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계시의 단회성 때문입니다. 홍해가 몇번 일어났지요? 요단강이 몇번 갈라졌습니까? 여리고성이 몇번 무너졌지요? 다 한번이지요. 우리 생각에는 홍해나 여리고성 사건이 한 열댓번정도 일어나면 이것은 믿지 말래도 사람들이 다 믿을 것 같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몇번 일어 났습니까? 한번이죠. 우리 같으면 예수님이 여기 아파트로 오셔가지고, 도마처럼 내 창자국 만져라하면서 사람들에게 쫙 보여주시고 그러면 지금처럼 성경공부 할 필요 없지요. "주여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되겠는데요.

성경계시 다 모두 한번씩이에요 한번. 다니엘에 보면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다가 글씨를 후벼 쓰지요? 그거 몇번 일어났습니까? 한번이죠. 우리 같으면, 그러지말고 어떤 창공에서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비행기 뒤에 구름이 손가락처럼 나타나서 십계명을 쫙 쓰면, 여기 반포2동 사람들 한번에 쫙 몰려갈거에요. "저 봐라 십계명 맞잖아, 하나님 계시 맞잖아!". 그런데 성경에 문자로 이렇게 쓰여있는 것은 우리에게 잠만 오게 만들잖아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거에요.

그게 뭐냐? 바로 '은닉성'때문 이에요. 계속 비밀이여야 되요. '비밀'. 육의 사람은 절대로 이 비밀을 캐내지 못하도록 은닉성을 유지해야 되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해야 되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고'. 그래서 그걸 또 노려가지고, 미리 어린아이 되면 안되요. 미리 어린아이가 되려는 그건 뭡니까? 어린아이가 되면 주께서 나타나신다는 또 하나의 지혜가 되기 때문에요. 사람들이 꼼수가 대단해요. 사람들이 구원받을라고 무슨짓을 못해~. 우리는 이런 수단을 부리는게요. 우리 자체가 바리새인 기질이 많아가지고요. 성경 말씀을 모방함으로 말미암아, 남들보다 성령을 더 땡길 수 있는 능력과 동기부여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티베이션(?)'같은 것이 작용하는거에요. 그래서 그게 아까 이야기한 주체층이 날마다 자기가 변한다는 사실을 모르고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생각안하고, 자꾸 그 은혜를 내 힘으로 반복시킬 수 있는 어떤 작동 기계같은 것을 장착하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강해요.

그러니 이 단회성으로 된 사건이 여러번 되어버리면, 그게 우상이 되지요.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후대사람들은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그리고 법궤 또 싹난 지팡이. 전부 다 우상시 되었습니다. 그거 다 부서져야되요. 인디아나존스라는 영화에 보면요. 그게 뭐 찾는 이야기입니까? 잃어버린 법궤를 찾는 영화지요. 그 법궤?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그림자이고, 실체는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어떤 형상으로 나타났다면, 사람들은 그 형상을 또 다시 되풀이 할거에요. 키 180에, 허연 수염나고 이런 것. 이게 되풀이 되면, 우상 되는겁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런것을 되풀이 하죠.

질문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타 나셔서도 계속해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제자들과 따로 계실때 그 비유를 풀어서 말씀해주시는 그런 것들이 바로 은닉성을 말하는 것인가요?

이것은 본인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못하게하고, 끝까지 계속해서 성령에 의해서만 이해되도록 하는 겁니다. 인간의 육이 개입이 안되도록 하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 동상에서 뭐가 흐릅니까? 눈물하고 피가 흐르지요? 바로 그것을 진짜 복음아는 신부같은 경우라면, 깨부수던지,  그것을 거부해야되요. 왜? 주님은 자꾸 사람 손에 잡히시지 않습니다. 가까히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라~. 베드로가 언제 예수님을 세번씩 부인 했습니까? 예수님을 안 볼때입니까? 가장 가까히 갔을 때 예수님을 부인했지요? 주님께서 보고 있는 가운데, 세번씩 부인하잖아요. 그건 아까 이야기한 베드로 개인의 계시로 이해했지. 주변계시로 이해를 안해서 그런거에요. 예수님을 마주 보면서도, 거기서 세번씩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한다고 했거든요. 전에는 물위를 걷게 해줬지, 자기 장모님 병도 낫게 해줬지요, 오병이어 행했지요, 거기다가 물고기 아가리 벌려서 동전까지 꺼내 줬지요, 심지어 12제자 모두가 귀신과 병을 쫒아내는 권능을 행사 했잖아요. 그야 말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쫒아내고, 복음 전하고 다 했단 말이지요. 권능이 나타나면 하고요. 얼마나 제자들이 좋았으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주여주여!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주의해라, 주의해라, 마귀가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지말고, 네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이렇게 얘기하셨단 말이지요.

그게 뭐냐하면요. 계속해서 주님께서 보이지않는, 인간이 볼 수 없는것. 주님께서 보여줘야 비로소 다가오는 것. 그건 바로 주도권 싸움입니다. 성도가 주도권을 자기의 주체에 가지고 있으면 안되고요. 주체는 주님한테 이미 양도 되어 있어야되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겁니다. 주님의 공로로 구원 받는거고요. 그것이 계속 끝까지 가야해요. 심지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해놓고 나도 버림받을까 두렵다고 했어요.

여기에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면, 베레스와 세라는 누구의 자손이 되느냐하면요. 유다의 자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유다에게 임한 하나님의 언약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이말이 참 어렵지요? 유다가 둘입니다. '유다1'과 '유다2'. '유다1'이라는 것은 지 잘났다고 했을때가 '유다1'이고요. '유다2'는 뭐냐하면요. 자기 며느리 다말이 잠시 창녀로 변장해서, 자기하고 관계하고 난 뒤에 그래서 "너가 나보다 의롭구나" 할 그때를 '유다2'로 보자 이겁니다. 그때 여기에 누가 나왔느냐, 베레스와 세라가 나왔지요. 이 베레스와 세라 이것은 누구 자식이 되느냐하면요. '유다1'의 자식이 아니고요. '유다2'의 자식이 되면서, 유다2는 탄력적 주체가 됩니다.

'유다2'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유다1'에서 '유다2'를 누가 되게 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하셨지요? 하나님의 언약, 약속-주님이 하셨거든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셨다 할때에, 하나님이 하셨다로 되는 겁니까? 아니면 누굴 보내는 겁니까? 억울한 사람 누구를 보내요? 바로 며느리 '다말'을 보냅니다. 그 억울한 사람을 바로 족보에 집어 넣는거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하면은. 육에서 영으로 개입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간 사람은요.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드는 그런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난 사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했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해했고, 구원에 대해서 여전히 오해하고 있는, 그래서 그 오해가 도리어 구원하는 자를 모독되게 하고요. 마치 유다가 누굴 모독했습니까? 다말을 모독하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잘난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을 우리앞에 등장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되는 것이지, "내가 나한테 작업을 걸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하는 것을 통감케하는 그런 공통점을 낳게 하는 겁니다.

이삭이 누구의 자식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식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는데 그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어 가지고, 이스마엘을 낳았 잖아요.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네 자식이 아니야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를 죽여 버렸지요. 그러면 더이상 아브라함의 자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궁이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죽은 자궁이 열리면서 자식이 태어났다면, 그 자식은 누구 자식입니까? 하나님 자식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보고, 아브라함아 그 자식을 누구에게 바쳐라? 원래 주님에게 바쳐라 이겁니다. 이 바친다는 게 뭐냐하면은,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있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나한테 달려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게 이거에요. 아브라함이 바로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조상.

그러면 애초부터 이삭을 주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지요. 처음에는 이스마엘을 낳게 하지요.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 해보라 이 말이지요.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의 결과는 결국은 불신앙으로 빠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인간조차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시행하다 보니까 너 같은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 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항상 이삭을 보면서, 장차오실 예수님을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무엇을 행합니까?"라고 물으신다면요. 그 답변은 간단해요. 여러분의 모든 행함 가운데서, 내가 행할 수 없는 것만 찾아보세요. "아~이것은 도저히 생각못했다. 이것은 내가 예상못한 것이다. 이것은 우발적이다. 이것은 우연적이다." 라는 것을 찾아보세요. 몇개쯤 나오겠습니까? 정답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다인데요. 신앙의 연륜이 작은 사람은 뭐냐하면은, 서울 대학 간다든지 갑자기 안수하니까 암에서 낳았다든지하는 이런 획기적인 특이한 것들을 뽑아서 간증하고 싶어서 난리에요. "이번에 사업 망했는데 감사헌금 하고 난뒤에 사업 잘됬다" 이런 것 있잖아요. "이번에 목사를 뒤에서 미워했는데, 애가 교통사고 났었다. 그런데 목사님을 사랑하고 난 뒤에는, 아들 다 잘자라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사실은 더 내려가면요. 뭐라고요?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하는 일은요. 만약에 내가 이것을 집어들었다고 합시다. 마치 내가 힘으로 들은 것 같지요? 그런데 이 힘도, 내가 아파보세요. 못 들지요. 작은일에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내가 놓쳐버린 작은 일에요. 내가 이것은 당연하고, 마땅하고, 이것은 당연히 나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여겼던 그 교만함을 부수고요. 작은 것 하나! 세세한 것 하나! 화초에 꽃이 피는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꽃이 핀다는 것을 느끼고요. 심지어 오늘 눈 왔잖아요. 눈 온 것. 그리고 내가 숨쉬는 것까지요. 아파보세요. 숨 쉬는게 그렇게 힘듭니다. 손톱이 안아픈거. 귀가 안 아픈거.

사람이 아파 봐야, 그동안 건강 했던 것이 은혜인 줄 압니다. 사람이 치통이 되어봐야, 평소에 하나님이 얼마나 이 치통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아파봐야 압니다. 유리창이 깨져 봐야, 유리창이 있다는 것을 알듯이요. 평소에 유리창이 있다는 것을 모르잖아요. 그런데 '쨍그랑' 해보세요. "아 유리창 그곳에 있었구나"하고 알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뭐든지 평소에 남편 생각 안하다가, 갑자기 "여보 차박았다" 이러면요. 그때 남편의 존재가 새롭게 확인되는 거에요. 남편 출근하면 남편 잊어버려요. 그런데 남편한테 문자 메세지가 왔을때, 비로소 남편이란 존재가 바로 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면요. 내가 예상 못한 일들을, 감사할 일들을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옆 집에 누가 이사가 왔는데요. 새벽1시만 되면, 그 이사온 아주머니가 고함을 지릅니다. "으악~~". 그렇게 두달이 흘렀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요. 우리집 이야기가 아니고요. 그 집이 이사를 오고 난 뒤에, 비로소 소리 지르는 그 이웃보다 그동안 조용했던 내 주변의 이웃들이 얼마나 고마운 이웃이였는지, 비로소 아는 거에요. 아랫층에서 담배 피워 보세요. 담배 냄새때문에 살림하는 어머니 미칩니다. 베란다에 나가질 못해요. 냄새 때문에. 그러니 그걸 가지고 로마서 1장에서는 불신자들이 지옥가는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은혜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지옥가도 그들은 핑계치를 못한다고 했어요. 주신 은혜의 원천을 모르고, 모든 공로를 누구한테 돌렸다?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거에요.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그 강퍅함.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지만요. 그건 지옥가도 할말 없어요. 그 많은 은혜를, 그 자비를 그들은 자신의 육의 공로로 돌리는거에요.

근데 인간은 원래 태어날때부터 그래요. 자기밖에 몰라요. 그런데 이제 방향을 틀어줍니다. 이 다말로 인해서요. 그 다음에 뭡니까? 다말에게서라고 하니까. 베레스와 세라는 누구의 족보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족보가 되었지요? 이 주체층이 계속 갑니까? 아니에요! 또 방향을 틀어야되요.

쭉 가다보면요. 살몬은 그 다음에 뭡니까? '라합'에게서가 나오지요. 세상에 라합이 또 이방인이에요! 다말도 원래 정통 아브라함의 족보가 아닙니다. 라합도 정통 아브라함의 족보가 아니에요.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 사람입니다. 라합에게서! 이 피라미드의 끝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데, 여기서 개입된 여자가 바로 '라합에게서'입니다.

또 뭐가나와요? '룻에게서'. 여기까지 벌써 세번 나오지요? 룻은 무슨 여자입니까? 모압 여자이지요?  정통 이스라엘 족보 아닙니다. 이방인이라 하는 것은 개입니다. 성경에 나오잖아요. "나는 개같은 이방인을 위해서 온 메시야가 아니다"하시니까 그 스로보니게 여자가 뭐라고 합니까? "맞습니다!"하지요. 이게 어려워요. "너는 개야" 하시니까 하는 말이 "맞습니다"라는 것. 이게 어렵다고요. "개도 주인이 먹다 버린 음식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해요. 야~ 도대체 우리 마음이 언제쯤 이렇게 낮아질 수 있는가요? 목사요? 글렀어요. 목사가 언제쯤 이렇게 되냐하면요. 목회 실패할때에 이런 마음 듭니다. 실패할때에. 그래서 기독교의 허상이라는 제 책에 보면, 이런게 있습니다.

"목회자여 실패의 길로 가라. 그것이 네가 구원받는 길이다". 목회 성공하면 안되요. 목회가 실패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요. 아무도 그 사람을 목사라고 안 알아줍니다. 비로소 그 사람은 목사라는 짐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요. 목사는 평신도가 되야 되요. 목사가 되면 건방지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훼방하게 되어 있어요. 요한1서 2장28절에 보면요. 누가 너희를 가르치리요. 기름부음이, 성령이 너희 속에 있으면 성령이 직접 너희를 가르치는데 누가 너희를 가르친다고 중간에 그것을 가로막느냐 이말입니다.

제가 전에 박사교회에 있을때, 노회에서 시찰 할때에 이것을 가지고 설교했어요. 목사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증인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4장 13절. 논문에 나와있습니다만은 거기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목사가 뭐냐하면. 목사는 '쓰레기'입니다. 쓰레기에요. 이건 지난시간에 얘기했는가 모르겠어요. 쓰레기! 하나님께서 사도를 마지막때에 쓰레기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하셨어요. 쓰레기로 만들어서. 왜냐하면 그 당시에 소위 종교 권력가들. 영적인 힘을 모아서, 종교적인 존경과 권위로 하나의 세력화 시킨 것이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이 사람들을 뭐로 보느냐하면은. 오직 말씀만 전하는 사람으로 보내는 겁니다. 말씀의 증인으로. 아까 증인이라고 했지요? 피뢰침. 목격자.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서 의도적으로 권력체-권력과 그냥 말씀-복음만 아는 사람이 마주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권력자로 하여금 사도바울과 사도를 뭐로 보느냐하면요. 이단으로 보도록 해요. 이단으로요. 그게 고린도 후서 11장에 나와요. 그래서 그들은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은 이단이라고 고린도 교회에다 유포를 시켜놓은거에요. 그래서 교인들이 거기에 다 따라간거에요. 왜냐? 권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권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복종하게 된다고 보는거에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카리스마가 있기때문에 복종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들중에 다른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말은 뭐냐하면은, 그 가짜들이 예수를 증거한다 안한다? 증거 하고 있지요? 복음을 이야기 하고, 성경을 증거하지요? 하지만 앞에 뭐가 붙습니까? '다른'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는거에요. 하지만 사도바울이 말해요. "그들은 양의 탈을 썼다"는 겁니다. '양의 탈'을. 마치 양이신 예수님같은 목자처럼 자처하지만, 사실은 너희들을 멸망 시키러 온 악마의 심부름꾼이다라고 말한거에요. 택배회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구분을 하느냐하면요.

그들은 권위를 내새워서 교인들의 뺨을 칠지라도 교인들은 "아멘 할렐루야" 이러고 있다 이말이지요. 이말은 뭐냐하면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어야 될텐데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십자가 지신 분을 믿으면 되는데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마음속에 안 믿어 지니까, 그걸 대행자하는 십자가 지지도 않은 목사를 통해서 구원받으려 하는 거에요.

마치 천주교에서 신부를 통해서 신부가 삐딱하게 서가지고 "못된 일 했습니까? 그러면 주기도문 3번씩 외우시고, 성경 몇장씩 외우시고" 이런 것처럼요. 신부를 통해서요. 신부가 영어로 뭐지요? 'Father' 아닙니까? 아버지 아닙니까? 영적 아버지. 이 영적 아버지로 대행하는 신부를 통해서 하는거에요. 왜냐하면 신부는 눈에 보이거든요. 목사가 눈에 보이잖아요. 이처럼 눈에 보이면, 이게 육적으로 안심이 되는거에요.

그런데 진짜 신앙인은 홀라당 교회가 불타 버려야되요. 다니는 교회가 그렇게 되야되요. 우리 교회에서 설교할때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교회가 지금 전기 누전으로 불탔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딨습니까?" 이렇게 제가 물어요. 그러면 제가 답변해줘요. "홀에 불이 났잖아요. 그러면 복도로 빠져나가면서 목사님 복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말씀안에서 교제를 나눌때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 불나도 교회는 끄떡도 없지요. 그래서 교회 헌금이 그만큼 무서운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교회 피아노에 헌금을 안했더라면, 주일학교 유치부아이가 피아노 함부로 쳐도 자기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신경을 안써요. 그런데 자기가 피아노에 헌금해 보세요. 그러면 누가 피아노 그렇게 치면요. 용서가 안됩니다. 꽃꽃이를 하는데, 자기가 꽃꽃이를 안하면 꽃 꺾어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자기가 꽃꽃이를 강단에 해놓으면, 누가 "오늘 꽃꽃이 이상하다" 이렇게 말할 경우에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뿔따구 나서 교회 못나올 지경이 되지요. 목사 설교는 귀에 안들어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바친게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 자리에다가 그냥 투자 한거에요. 사람이 자식한테 피아노 레슨 가르치 잖아요. 그거 자식 위해서 한 것 아닙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거에요. 나는 죽어도 자식 살아있으면 자식안에 내가 살아있잖아요. 그래서 니가 잘되는게 내가 잘되는거에요. 자식하고 내하고는 하나가 되는겁니다. 그러니 자식한테 하는 것은 곧 지한테 잘해주는 거에요.

이게 인간의 뭡니까? 육이잖아요. 이런 육을 가지고, 천국에 가봐야 천국이 누구의 나라가 됩니까? 주님의 나라 아닙니다. 누구의 나라가 되요? 자기 이기주의. 자기가 신이 된 나라에요. 그러면 이거는 지옥이지요.

그러니까 천국가기 전에 뭐가 바뀌어야 되요. 천국 가기 전에 질이 바뀌어야 되지요. 무슨 질로 바뀝니까? 내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으로 바뀌어야 되지요.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 설교 중에 이런 설교가 있어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 못받고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한 글자가 들어갔지요? 뭐가 들어갔어요? '주'예수가 들어갔지요? 사도행전 16장 31절. '주' 예수를 믿어라하는 그것.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 그러면 그때부터 누가 주인이 됩니까?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 미래까지 누가 보장해요? 예수님이 보장하는거에요. 그걸 미리 앞 당겨서 믿어버리니까 그게 바로 질이 바뀐, 완전 인간이 새롭게 질이 바뀐 것을 말하는데.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것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거에요.

완전히 주인이 바뀐 거에요. 질이 바뀐 거에요. 그 다음부터 우리가 관찰할 것은 무엇이냐하면요. 자! 우리 주인께서 이제는 내 인생 어떻게 만들어가는 가를 그야말로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그냥 기다리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코스를요. 맨날 나는 육밖에 모르잖아요. 내 이기주의니까요. 자식도 내자식이고. 내 남편 최고잖아요.

그러니까 이기주의로 그냥 가세요. 가시다 보면 우발적으로 우연적으로, 주께서 이러한 못된 나를 어떻게 방향을 트는가를 화들짝 놀라면서!보는 겁니다. "아~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진짜 나를 나한테 맡겨놓으면 나는 지옥간다." 근데 주께서 이렇게 방향을 트시는 것을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그 틈새를 통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 그게 바로 주님의 복음입니다. 10분 쉬었다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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