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여름수련회 창세기 강해 제5강 : 우상숭배자 - 이 근호 목사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대립구조’가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과연 그 대립구조를 좋아했을까요? 인간은 자기가 복된 사람이라는 것을 자꾸 증명하고 싶은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나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나를 건드리면 저주받는다’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용했을 때 여러분 기분 좋겠습니까?
사람의 기본 양심이라는 게 있어요. 나 건드려서 남이 저주받는다면 양심상 우리는 못 견딥니다. 저 사람을 어떻게든 내가 책임지고 싶은 생각이 들죠. 그래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대립구조보다도 그냥 한 쪽, 복과 저주 가운데 그냥 복된 사람으로, 같이 복과 더불어서 있고 싶고 저주는 빼내고 싶은 거예요.
‘날 건드리면 저주받는다.’ 남남들끼리 별로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일부러 복수한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고통이 되겠죠. 그래서 그게 싫은 거예요. 대립구조가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고 그냥 자기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을 사는 방법은 바로 대화를 해나가는 거예요.
창세기 21장에 보면, 대화를 하는데 누구하고 하는가? 아비멜렉, 그 당시 블레셋 지역의 추장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좋은 게 좋다고, 대화한다는 것은 서로 호의를 베풀고 또 협의해서 우호적인 상관관계를 기대하죠. 대화한다는 것은 악수하는 것과 같아요. 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호적인 새로운 상관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대화에 나섭니다.
아브라함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약자거든요. 자기 땅이 없어요. 땅이 없는데 본인이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살던 고향에서 강제로 가라고 했고 갈 때 그냥 가는 게 아니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한다’라는 그러한 조건하에 이렇게 왔단 말이죠. 그러나 그 조건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식대로 하시고 나는 내 식대로 그냥 살래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 보면, 아브라함 ‘나’가 있잖아요. 대화를 한다는 것은 타인과 대화를 하는 거죠. 타인은 ‘나’의 입장에서 ‘나 아님’이 돼요, 나 아님. 내가 아니니까 타인이 되겠죠. ‘나 아님’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 아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숨깁니다. 어떻게 하느냐? ‘내 아내는 내 아내가 아니다.’ 그래서 ‘그냥 당신을 여동생으로 하자.’
‘아내를 여동생으로 하고 그냥 목숨을 부지하는 측면에서 본토 사람들과 좋게 지내자.’ 아브라함이 무슨 사명이 있고 그런 건 하나도 없어요. 그냥 나 하나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자기 속에 있는, 내가 원치 않는 ‘나 아님’을 숨기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 ‘나 아님’을 숨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뭐로 바꿨습니까? ‘아브라함’으로 바꾸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인생에 침투했고, 그리고 개입한 거예요. 자꾸 뭔가 아브라함을 몰아넣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내가 원치 않는 타인의 정신을 가지고 타인의 입장에서, 나는 ‘아브람’으로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고집을 부려서 ‘아브라함’이 되게 하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자꾸 후달리고, 점령당하는, 장악당하는 모습을 아브라함이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 아님’을 숨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꼭 여러분들의 모습 아닙니까? 뭐 예수도 귀찮고 하나님도 귀찮아요, 그냥. 나는 내 몸 하나 보존하는 게 목적이에요, 나와 내 가족을. 우리가 뭐 스타도 아니고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아요.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런 포부도 없어요. 그런 것은 슈퍼맨 보고 하라고 하세요. 세상을 건지고…, 건지는 것도 귀찮아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데 이 ‘나 아님’이 불쑥불쑥 우발적으로 내가 만나는 우호적인 상대에게 공격을 가해요. 이 ‘나 아님’이, 하나님의 법칙이. 아비멜렉 추장이 “같이 계신 여자분이 여동생? 그러면 내가 동침하면 되겠네.” 했는데 아브라함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 집안이 난리 났어요, 난리 났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창 20:3).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정식으로 따지죠. “누굽니까? 진짜 당신 동생 맞습니까?” “동생 맞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내 잠자리가 왜 그렇게 됐습니까? 우리 집안 당신 때문에 저주받았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날 건드리면 저주받는다’를 아브라함 쪽에서 무기로 실시한 게 아니에요. 그냥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고 싶은데 거기 다른 요소가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라는 그것이 마치 찐드기처럼 달라붙은 거예요. 떼려야 떼 낼 수가 없어요. “왜 그래요, 하나님?” 이런 식이에요. “나 좀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나로 하여금 축복의 중심이 되는 거? 오케이. 그런데 저주의 중심이 된다? ‘이건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남들이 피해 보는 그것을 양심상 어떻게 견뎌 냅니까? 아, 지긋지긋하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앞장세워서 ‘아브람’식이 아니라 ‘아브라함’ 되게 하는 겁니다. ‘아브람’은 복과 저주의 기준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이 복과 저주의 기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너 가는 곳에 하나님의 조건과 아브라함의 조건도 같이 따라간다.’ 그래서 그 조건이 이겁니다.
아비멜렉과의 일이 있어서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아비멜렉의 종족과 거주하게 되었는데 함께 거주하면서 우물을 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1장에 나와요. 우물을 파는데 우물 이름이 브엘세바에요. 남의 땅에 부동산 계약하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돈 준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이 나와 거래가 가능할 정도로 호의적인 관계에서만 계약이 성립됩니다.
31절,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이제는 아브라함 당신의 가축과 가족이 우리 땅을 점유하는 것을 우리가 용납하겠습니다.’ 물론 돈 주고 땅을 계약한 거죠. 이게 누가 호시탐탐 노리는 점이냐 하면, ‘아브람’이 노리는 점이 아니고 ‘아브라함’,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받은 숨어있는 ‘나 아님’이, 아브람 나와 함께 있는 ‘나 아님’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그쪽에서 아비멜렉 족장의 블레셋 땅을 점유하게 되었습니다. 계약에 의해서 ‘브엘세바’가 돼요.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브엘세바 그 땅을 점유하는데 왜 땅을 점유하느냐 하면, 이게 매장지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땅에 아브라함의 자손, 약속의 자손들이 한 곳에 죽어서 집결하는 장소를 만들었어요. 막벨라 굴이에요. 죽어서 왜 만나죠? 인생이라는 것은 사는 게 전부 아닙니까?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매장지로 숨어들어 가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매장지로 숨어들어 가고, 아브라함은 남하고 좋게 좋게 지내고. 자기 신상을 지켜야 하니까요. 쓸데없이 말썽을 일으켜서 자기 생존이 위태로우면 자기만 손해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생존 의지, 자기밖에 모르는 그 생존 의지를 이용해서 약속이 따라붙으면서, 약속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살아있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느냐’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그 죽음의 힘이 어떻게 이 평면 세계, 인간의 세계, 약속이 없는 세계를 뒤집어 버리는지, 그걸 발휘하게 하는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에게만 있는 게 아니에요. 창세기 26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다가 들통나서 결국은 그들과 함께 사는데 이 브엘세바 그 장소에 또 계약을 맺어요.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창 26:27-28).
그렇다면 그냥 약속만 받았는데, 실제로 실증적인 땅은 없었는데 아브람에서 ‘나 아님’ 요소가 그 땅에다가 어떤 부동산을 매입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부동산의 초점은 뭐냐? 살아있을 때 뭘 해보겠다는 게 아니고 죽을 때 이 막벨라 굴에 모조리 다 집결하라는 겁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그다음에 아브라함, 그다음에 이삭, 그다음에 레아, 그다음에 야곱, 이 노선의 전부가 바로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의 창세기, 50장까지의 창세기 내용입니다. 그게 흐름이에요. 진짜 창세기 약속의 주인공들은 그들 자신 말고 자기 안에 있는 ‘나 아님’, ‘나 아님’이 그들의 나를 철저하게 사용해서 그들로 하여금 다른 세계, 죽음의 매장지 막벨라 굴에 모이게 했고, 땅속에 있는 그 죽음의 힘이 응축되어서 때를 노리는데 그때가 바로 죽음이 산 자를 이기는 사건이 돼요.
그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그 사건이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유월절 사건은 애굽을 상대로 해요. 그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실제로 현실을 살았던 요셉의 꿈이 누굴 상대하느냐? 애굽을 상대했어요. 그러면 블레셋 땅과, 그 블레셋뿐만이 아니고 애굽까지, 약속의 가나안 땅뿐만이 아니고 가나안 땅 저쪽 이집트까지 양쪽을 아우르면서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편히 사는 모든 세계는 약속에 의해서 렌탈된 겁니다. 빌린 거예요.
하나님은, 이사야 45장 15절, 하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입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으면서 경상도 말로, 디비뿌는 거예요. 인간이 살아있다는 모든 것을 디비버려요. 산 자의 모아놓은 힘보다 죽은 자의 힘이 더 센 거예요. 어린 양의 죽음의 힘이 모든 살아있는 자들을 무효로 돌려버리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 그 내용이 창세기 내용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 막벨라 굴, 이 매장지에 있던 자들이 뭘 품고 있느냐 하면, ‘나 아님’의 결과로서 매장지에 있기 때문에 이 매장지, 이 무덤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 세계 밑에서 숨 쉬고 있는 거예요. 그래야 디비뿌는 게 성립이 되니까. 그래서 요셉이 뭐라고 예언하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내 해골 단디해라.’ 경상도 말로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경상도에 와 있습니다.
‘단단히 해라. 너희들은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내 해골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까지 어떻게 앞장서서 이끄는지’, 해골 뒤로 야곱의 모든 족속들은 총출동해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입니다, 창세기에요. 왜냐하면 ‘나’와 ‘나 아님’이 충돌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는 곱게 살고 싶어요. 조용히 살고 싶어요.
‘나를 믿지 않으면 저주받는다고? 아, 짜증 나. 내가 그만한 위인도 못 되고 그런 존재도 못 되고,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지 왜 나한테 들러붙어서 나를 사용합니까?’ 주께서는 ‘그냥 너대로 살아. 너대로 살게 되면 널 통해서 너에게 들러붙어 있는 나 아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대로 축복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가름하는지, 네가 그 증인으로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게 바로 대립구조죠. 이 대립구조를 통해서 ‘나’와 ‘나 아님’의 이것이 우리 자아 안에서, ‘나’ 안에서, 언약의 사람 안에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까 A4용지 가지고 여러 번 설명 했습니다만, 같은 한 장의 종이인데 앞면과 뒷면의 차이가 없어요. 차이가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나와 나 사이에, -하나님이 타자(他者)잖아요, 타자가 외부에서 왔잖아요- 나에서 나로 그냥 산 채로 건너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절단해 버립니다.
‘나’가 ‘나 아님’을 다룰 수 있다든지, 내가 나 아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그것은 있을 수 없어요. 나는 철저하게 나만 있습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나만 믿는 것을, 나만 주장하는 그것을, 그러니까 내 안에 ‘나’와 ‘나다움’과 어떤 차이를 우리 자신은 지워버리려고 해요. 만약에 이 차이가 생겨 버리면 나는 분열된 자아가 돼서 힘들어요, 힘들다고요. 갱년기 돼서 잠도 못 자요. ‘나’와 ‘나’ 사이가 분열되게 되면.
그냥 나는 ‘나’이고 싶어요, 그냥 나. 내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다른 골치 아픈 생각은 없어요. 뭐 성경이고 뭐고 다 치우고 나는 그냥 ‘나’이고 싶은 거예요. 그것도 잘난 ‘나’이고 싶은 거예요. 다른 욕심은 없어요, 그냥 평범하게. 남을 해코지 하는 거 그것도 싫어요. 나는 그냥 나대로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나한테 찾아온 하나님의 계시가 날 가만두지 않는단 말이죠.
가만두지 않으니까 내 쪽에서도 가만두지 않아요. ‘저리 가세요, 저리 가세요. 싫습니다. 저리 가세요.’ 밀어냅니다. 그런데 밀어내는데도 밀리질 않는 이유가, 다시 이야기하면 지난번에 한 것, 기호…, 그다음에 뭡니까? 이야기하세요. 기호-사건-존재, 사건이 안 일어나면 이렇게 존재가 될 수 없어요. 존재가 됐잖아요? 창세기 1장, 2장, 3장에서. 그런데 이 존재가 버린 존재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버린 이 존재를 기호에 합당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존재를 사건을 거쳐서 어디에 도달하게 합니까? 기호에 도달됩니다(존재-사건-기호). 기호, 원자아,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원자아. 그런데 이 기호적인 요소가 아브라함에게는 미리, 그러니까 ‘아브람’에 대해서 ‘아브라함’으로 ‘나 아님’으로 와 있단 말이죠.
거기서 손자 되는 야곱을 한 번 봅시다. 야곱도 역시 자기밖에 몰라요. 욕심쟁이고,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맨 그렇습니다. 누구 닮았겠어요? 아브라함 닮았지요. 이삭 닮고. 그런데 야곱에게 대립구조라는 사건을 일으켜요. 그게 뭐냐 하면, 태어날 때부터 에서 형과 쌍둥이로 태어나게 합니다.
창세기 27장 41절,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이것은 마치 가인이 아벨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립구조입니다. 대립구조인데 이것을 누가 유발했는가?
이것은 누가 유발한 게 아니고 야곱 안에 들어있는 야곱이 아닌 다른 분의 작전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 이룰 분에 의해서 이렇게 야곱은 형한테 맞아 죽기 직전에 있습니다. 그러면 형이 되는 에서 역할이 뭐냐? 창세기 27장에 보면, 완전히 99% 축복이 에서 자기한테 다 넘어왔어요. 아버지가 “사냥한 고기를 먹고 싶다.” 이것은 그냥 형식이에요. 이미 아버지 심중이 끝났어요.
‘모든 상속권과 하늘의 축복은 네 거야’라고 이삭은 에서한테 모든 걸 물려주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그때 이삭의 심정이 본심이에요. 왜? 본인이 사냥한 고기 좋아하고, 본인이 야곱보다 형인 맏이가 더 마음에 드니까 이삭 입장에서는 ‘나 아님’의 것 말고, 나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축복을 줄 자에게 저주가 임하고요, 저주가 임할 자에게 복이 임했어요.
그런데 이삭은 이걸 어떻게 봤느냐 하면, ‘이것은 나를 제치고 하나님께서 대립구조를, 나를 통해 형성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이 야곱의 거짓말에 넘어가도록 한 것’이라는 겁니다. ‘배후에 나와 함께 있는 나 아닌 존재,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라는 것을 확정해 버려요. 자기는 쪼다 됐지만, 자기는 바보 등신 됐지만 ‘오케이!’ 바보 등신이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사후적으로, 일이 처리되고 난 뒤에 그대로 수용합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3).
누가 여기서 화가 났는지? 에서가 화가 났겠죠. “아버지. 혹시 남아있는 복은 없습니까?”(창 27:36).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해서 대립구조를, 대립각을 분명히 한다는 차원에서 아버지 이삭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없다”(창27:37). 그러니까 에서가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동생을! 결과적으로 보세요. 저주받잖아요. 결과적으로 에서는 저주받는다고요.
야곱이 그렇게 원했습니까? 야곱은 그렇게 원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형이 오니까 절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창 33:3). 이것은 야곱의 마음이 아니에요. 야곱은 조용히 살고 싶어요. 형하고 대립각 세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로 하여금 주의 종이 되게 만들었어요.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여러분을 삼아버렸습니다. 여기서 ‘여러분’ 속에 여러분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희망 사항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인생인데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나 아님’이, 그 타자(他者)가, 내 속에 들어온 나 아닌 그 타자가 나를 장악하고 쥐고 있지 않은 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이 안 돼요. 언약이 나의 고집보다 세서 승리해야 해요.
누가 요한복음 15장 16절을 한 번 읽어봅시다. 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끝! 끝났어요. 아, 하나님의 고집이죠. 하나님의 고집이에요. 제가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요한복음 6장 65절, 충격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오지 못한다.’ 제가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대책을 한 번 세워봅시다.” 대책이 없죠. 대책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이런 뜻이에요.
‘당신들 안에 당신 아닌 어떤 건전한 유령 같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거 묻는 거예요. ‘당신이 인생을 조정하는 데 그 조정을 방해하면서 기어이 하나님의 복과 저주의 뚜렷한 기준을 들춰내시는 분이 여러분과 현재 함께 살고 있습니까? 동거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에게 점령당했어요?’ 이걸 묻는 거예요.
야곱이 이제 자기 인생 살겠다고 나갔을 때 창세기 32장에서 밤중에 자기를 공격하는 게 나타났어요. 타자(他者)입니다. 타인(他人)이에요.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게 본능이니까 얼마나 열심히 지켰냐 하면 밤새도록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어요. “죽어라, 이 적아. 정체를 밝혀라. 내가 하나님께 복 받은 것을 어딜 함부로 네가 공격하려 하느냐? 하나님의 복 인고로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내 복을, 내 자식들 내 재산과 양과 소를 지키리라. 난 너를 물리치고 말리라.”
이렇게 하는데 점점 더 새벽이 가까워지고 뭔가 밤기운이 사라지게 됐어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하는 말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갈 데 있거든. 나 가야 돼. 우리 씨름 그만하자.” 하고 야곱의 어딜 쳤느냐 하면, 야곱이 스스로 자신을 버텨내는 근간이 되는 그 신체 부위를 쳐버렸어요(창 32:25). 그래서 그때부터 야곱이 힘을 쓸 수 없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은 자의 노동’이라고 해요. 죽은 자의 노동이 됨으로써 앞으로 노동에서 생산된 생산물, 잉여 생산, 노동+생산으로 구축된 지상의 모든 국가를 공격할 수 있는 근거가 돼요. 힘이 없게 되었어요. 내가 나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이 완전히 다 빠졌습니다. 노동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자, 야곱은 스스로 자기를 평가해서 “나는 죽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살릴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으니까요.
이게 뭐냐 하면, 힘의 공제(控除), 힘 빼기, 힘을 빼버리는 거예요. 힘을 뺀 야곱이 이름이 바뀌어요. 뭐가 바뀌느냐 하면, 주인공이 바뀌어요. ‘야곱’에서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의 이름은요, 야곱이 야곱을 지켜야 될 이름인 반면에, 이스라엘 그 이름은, 야곱의 힘을 뺐기 때문에 야곱에게 주어진 타자(他者)의 이름인 이스라엘의 이름은 야곱 말고 야곱에게 찾아온 하나님에 의해서 달성될 목표가 이스라엘 이름으로 함축되어 있어요.
그 이스라엘 이름에 준해서 언약대로 힘없는 노동자를 유지하면서 야곱 이후에 활동에 나선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꿈은 요셉의 힘이 들어가지 않는 꿈으로 현실화됩니다. 그냥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자체적인 방어가 안 돼요. 그러면 요셉은 충실하게 해도 나중에 그게 모함으로 돌아와요. 억울함으로 돌아온다고요.
그러니까 요셉의 운명은 마치 예수님 같아요. 실컷 잘했는데 어디에 갇히느냐? 옥에 갇힙니다. 옥에 갇히니까, 요셉도 자기와 자기 외에 다른 것이 같이 공존해 있으니까 살려달라는 식으로 거기서 꿈을 해몽해 주죠. 꿈을 해몽해 주는데 그 꿈의 해몽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느냐 하면, 존재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거예요. 꿈의 사건성에 말려들었으니까 이 존재, -살아있는 존재죠- 살아있는 존재가 손 쓸 수 없는 단계가 무슨 단계냐 하면, 기호 단계입니다.
기호 단계, 실한 암소 7마리 나왔다가 전부 죽어버린 것, 실한 밀알이 나왔다가 그 밀알이 전부 다 사그라든 것(창 41:1-7), 그게 기호잖아요. 기호라는 것은 “존재들아, 입 다물어. 내가 알아서 이 일을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모든 인류는 멸망하기로 이미 확정되어 있다. 아무리 풍성해 보이고 좋아 보이더라도 인류 마지막은 뭐다?
앞에 있는 것 다 갉아먹고, 앞에 잘사는 것 다 갉아먹고 나중에는 개털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애굽의 바로 왕이 꿨던 그 꿈이에요. 그 꿈이 요셉의 위력이라고 생각해서 바로 왕은 요셉을 국무총리 자리에 앉혔습니다(창 41:38-41). “형님, 알아서 잘해보세요. 모든 국운은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갑자기 누가 힘을 빼냐 하면, 바로 왕이 힘을 빼요.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었고요, 꿈은 꿈대로 요지부동 흘러가고 있고. 바로 왕은 이 나라가 멸망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애굽 나라가 멸망한다’로 이렇게 오해한 겁니다. 전 인류가 멸망한다는 생각은 못 하고 ‘애굽 나라가 멸망한다.’ 그러니까 이 바로 왕은 뭐가 없느냐 하면, 자기 말고 ‘나 아님’이 없어요. 그냥 꿈 해몽 잘하는 요셉 붙들고 자기 나라를 방어하는 데 몰두한 겁니다.
바로 왕은 생각했어요. ‘너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았다.’ 왜? 풍성하게 되었으니까. 애굽이 멸망한다는 생각은 못 하고 풍성하게 된 그 7, 요셉의 꿈에 보면 7도 나오고 또 3도 나와요. “3일 만에 당신은 복직할 것이다”(창 40:13). “3일 만에 당신은 목이 잘릴 것이다”(창 40:19). 빵 굽는 신하와 술 올리는 신하에 대해서 그 존재가 어떻게 대책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기호가 탁 박혀버렸죠.
요셉이 갖고 있던 요셉의 ‘나 아님’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힘이 되어버렸어요, 재구성하는 힘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게 이제 나와야 해요. 대단히 중요한 게 나옵니다. 대립 구조가 애굽에서 뭐로 나타났느냐 하면, 꿈으로 나타났잖아요. 그래서 애굽에서는 꿈이 무엇보다 우위다? ‘꿈이 현실보다 우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눈에 보이는 현실이 다가 아니라 이 현실은 꿈의 조종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꿈의 조종을 받고 있는 현실. 시편 105편 17-19절에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말씀이 응한다.
그러니까 현실보다 꿈이 위대하게 되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현실은 꿈이 만드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만들어질 뿐입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나를 겨냥하는 하나님의 그 꿈이 현실을 만든다면 여기서 ‘나’와 ‘나 아님’에서 ‘나 아님’이 진짜 현실이 되고 나는 뭐가 되겠어요? ‘나 아님’이 진짜 현실이라면 나는 없고, 내 인생은 뭐가 되겠습니까? 나는 한낱 뭐가 됩니까? 꿈이 되지요. 환상이 돼요. 아직까지 매를 많이 못 맞아서 그래요.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 하나님께서 대립구조를 위해 강제로 하나님의 뜻이 자기 택한 백성에게 찾아들었고,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런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인생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코스로 가면서 ‘어?’ 난 내 세계만 잘 되길 바라는데 내 세계뿐만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이 세계 자체가 내게 찾아온 그 ‘나 아님’으로 인하여 현실 자체가 구조조정을 일으키는 거예요.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신기하겠어요? 이게 언약의 위대함이죠.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러한 진동, 지진, 나로 인하여 세상 현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왜 우리는 그동안 몰랐는가, 하는 거예요. 창세기에는 이런 게 나오는데, 창세기에는 거창하게 엑기스처럼 뽑아서 나와 있는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인생 변화에서 현실이 나로 인하여 달라진다는 것을 왜 우리는 그동안 몰랐는가?’ 하는 겁니다.
모른다면 그것을 찾아내는 방법은 뭐냐? 지금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종이가 있잖아요. 종이에서는 앞뒤가 똑같이 보여요. 종이 한 장의 앞뒤가 차이가 없잖아요. 차이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과연 차이가 없을까? 그 차이를 우리가 무시해 온 것은 아닐까? 복잡하게 안 하고 말을 간단하게,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상된 결과가 동일하다면 과연 그 내용도 일치될까?’ 물음이죠. Yes 아니면 No죠. 어느 쪽입니까? No가 되죠. 우리는 결과만 잘 되면 오케이가 되고, ‘지금 나는 이렇게 산다’라는 결과를 만끽해요. 하지만 그때까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다른 뜻이 이런 결과를 도출했다면 ‘내가 갖고 있는 이 결과에 족하다. 이걸로 오케이다.’ 하지 말고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내 인생과 하나님 말씀의 언약 진행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펴보게 되면, 내가 만족하는 이것이 그냥 한낱 허망한 꿈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 차이를 잠시 보기 위해서 교재의 뒤에 나오는 두 개의 노래를 보겠습니다. 이 노래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게 “복음 들으러 왔는데 팝송만 배우고 갑니까?” 그러한 평단의 비평이 있잖아요, 평단의 비평.
제가 노래를 두 개 준비했는데 왜 두 개를 준비했느냐 하면, 미리 제가 문제를 던진다면 ‘이 두 노래의 차이점이 뭐냐?’ 그 차이, 발견되지 않는 그 차이가 뭔지를 한 번 봅시다.
You Needed Me - Anne Murray
I cried a tear, You wiped it dry.
(내가 슬퍼할 때면 당신은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I was confused,You cleared my mind.
(내가 혼란스러울 때 당신은 내 마음을 달래 주었어요)
I sold my soul, You bought it back for me
(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을 때 당신은 내 열정을 불러일으켰어요)
And held me up and gave me dignity.
(그리고 나를 지지해 주고 존중해 주었어요)
Somehow you needed me.
(그렇게 당신은 나를 필요로 했어요)
You gave me sterength to stand alone again
(다시 홀로 설 수 있도록 내게 용기를 주었어요)
To face the world out on my own again
(내가 다시 세상에 혼자 맞설 수 있는 힘을 줬어요)
You put me high upon a pedestal
(당신은 나를 반석 위에 높이 올려 주었어요)
So high that I could almost see eternity,
(드높은 곳에서 끝없는 미래를 볼 수 있었어요)
You needed me, You needed me.
(당신은 나를 원했어요. 당신은 나를 원했어요)
뭔가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가사의 흐름이 뒤에 가서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결과가 누가 좋다는 거예요? 내가 여자라면, -앤 머레이가 여자잖아요-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나서 이렇게 족한 인생을 살게 돼서 참 고맙습니다.’ 따라서, 따라서 결과가 어떻게 되어야 해요?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돼야 맞잖아요? 노래 제목이 뭐냐? “당신이 나를 필요로 했지요?”(You needed me)
뭐예요, 이게? 이게 뭡니까? ‘나는 당신 때문에 이렇게 좋아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나는 당신이 꼭 필요했어요.’ 이게 순리에 맞잖아요. 그런데 제목 자체가 뒤집어졌어요. ‘내가 당신 좋아하는 것은 내가 알지. 당신이 날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내가 알지.’ 이런 식으로 덤터기를 씌워버린단 말이죠. 그런데 아까 우리가 대립구조, 성경 창세기를 보니까 여기 등장하는 이 타자(他者) 남이라는 것을, 이 여자가 눈치챘죠?
내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필요하다?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한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실은 당신이, 그런 결과가 나타나기를 당신이 먼저 원했잖아요.’ 그런 노래입니다. 너무 복음적이라서 짜릿하죠?
그다음에 뭡니까?
And I can’t believe it’s you, I can’t believe it's true
(이런 현실이 믿기지 않아요)
I needed you and you were there
(난 당신이 필요했고 내 곁에 있어 주었어요)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것은 내가 아니고, 당신이 먼저 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이거 복음이야? 이거 뭐예요? 왜 우리는 주님한테 이런 고백을 못 합니까? 그러면 뭡니까? ‘나 아닌 자’가 안 찾아오면 내 인생이 꿈인 줄도 나는 모르고, 실제인 줄 알고 그렇게 살아왔죠.
그런데 당신이 오니까, 당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나를 장악하니까 ‘당신 있음에 비로소 내가 차후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 정립되는 거예요. 기호가 먼저 있고 사건을 일으켜서 ‘나는 내 식대로 산다는 그 나를, 존재를 붕괴시켜서 주님의 위치에서 나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번엔 4년 전에 죽었다는 Olivia Newton-John의 노래, Let me be there(거기에 나를 있게 해 주오).
‘You needed me’라는 것은 그 출발점이 당신, 나 아닌 당신으로부터 출발했는데 여기 ‘Let me be there’는 출발점이 뭐냐 하면, 나부터 출발해요. 나부터 출발해서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
Wherever you go, wherever you may wander in your life
(그대가 어딜 가더라도, 그대의 삶 가운데 방황할 때도)
Surely you know, I always wanna be there
(내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꼭 알아두세요)
Holdin' you hand and standin' by to catch you when you fall
(그대 손을 잡을 것이고 그대가 쓰러질 때 잡아줄 수 있도록 곁에 서 있을게요)
Seein' you through in everythin' you do
(그대 하는 일들을 모두 챙겨 보면서 말입니다)
Let me be there in your mornin', let me be there in your night
(아침에도 내가 그대 곁에 있게 해주시고, 저녁에도 내가 그대 곁에 있도록 해주세요)
Let me change whatever's wrong and make it right (make it right)
(잘못된 것은 무엇이든 바꾸어 바로잡게 해주세요)
Let me take you through that wonderland that only two can share
(단둘만 함께 나눌 수 있는 동화의 나라로 그대를 데려가게 해 줘요)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oh, let me be there)
(내가 원하는 것은 그대 곁에 있는 것뿐)
이것은 요청이죠. 타인에 대한 요구죠. 출발점이 뭡니까? 현재 나는 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나 외에 다른 분이 내 허락 없이 미리 들어온 적은 없다.’ 모든 출발점이 ‘나’부터예요. 이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결과는 어때요? ‘둘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고 함께 있다. 좋게 됐다.’ 결과는 같잖아요.
그런데 내용의 순서가 어떻게 돼요? 원인, 결과가 바뀌어 있죠. 그러니까 성도가,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주님이 직접 나에게 성령으로 다가왔을 때 별 게 없어요. 남들한테 삐까번쩍 내놓을 건 없는데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내 인생의 시작은 내가 없을 때부터 시작됐다. 내 존재가 없을 때 하나님의 확정된 기호로부터 출발 됐다. 그 숫자, 택한 자의 숫자부터, 창세 전부터 시작한 그것이 저한테 사건-사건의 연발로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나 혼자 있을 때 내가 상상한 모든 것은 개꿈입니다. 개꿈, 허망합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흑흑 울었잖아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겁니다.’ 하하하 웃죠. 기분 좋게 ‘감사합니다. 내 인생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해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나에게 찾아온 언약의 하나님 덕분입니다.’ 하고 감개무량해하죠.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이 차이점 때문에 노래 두 개를 한 거예요. 여러분 숙제 나갑니다. 이 노래를 들으세요! 이렇게 해서는 성이 안 차요. “I cried a tear, You wiped it dry~” 노래가 이렇게 돼요. 그리고 “Wherever you go, wherever you may wander~” 이건 춤추면서 부르는 노래. 그러니까 실제로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이 가사 내용을 알았으니까 이 가사와 더불어서 자기 자신에게 ‘왜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놓쳤는가, 대체 누가 하나님 십자가 공로를 방해했던가?’
‘아브라함’을 누가 방해했는가? ‘아브람’이 방해하고 ‘사라’를 누가 방해했던가? ‘사래’가 방해했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막벨라 굴에 들어가 있어.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 막벨라 굴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있어!” ‘거기 있으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그 힘, 그 죽음의 힘을 통해서 세상을 디비버릴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불로써 심판함으로써 나타낼 것이다.’ 이것을 바로 구약 창세기로 우리에게 똑똑하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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