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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죽은 자의 힘

아빠와 함께 2026. 8. 1. 08:27

2026 여름수련회 창세기 강해 제4강 : 죽은 자의 힘 - 이 근호 목사

네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대립성’이 가미된다고 했어요. 축복과 저주, 축복과 저주를 구분함으로써 개체화시킨, 이 개체적인 대립, –개인의 자격, 나지요, 나, 개인의 자격으로서 나를 빼놓고는 다 나보다 소중하지 않다. 최종적으로 준결승 결승까지 중요한 것은 내가 제일 중요하고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 개체적 입장에서의 대립성을, 이 개체성을 하나님께서는 보편적으로 바꿔버려요.

어떤 집단이 최고다, 어떤 집단이 최고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시작했던 그것이 나중에는 ‘아브라함 자손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라는 쪽으로 주님께서 계속해서 이끌어 나가시는 거예요. 하나의 덩어리, 집합을 만들고 개체와 개체가 모여 있으면서 그것을 테두리 쳐버리는 거예요. 하나의 세트로 바구니에 담는 거예요.

이 자체에서 복이 되는데 조건은 뭐냐?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아, 이거 어려워요. 아브라함의 자손.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누가,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아브라함의 자손과 그 외 자손의 대립성, 이 대립성이 되거든요. 이스라엘 자손이 되었다고 칩시다. 이 집합 안에서 개체가 각자 있으니까, 그러면 그 각자의 고집, 각자의 개성은 여기서 살아남을까요, 없어질까요?

계속 살아남게 되죠. 살아남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꿈을 꿨을 때 형들이 “요셉아 네가 꿈을 꿨구나.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이제 일어서겠네. 고맙다, 요셉아. 그 꿈대로 잘 간직해라.” 형들이 그렇게 나왔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나왔습니까? 시기와 질투를 했죠. 꿈의 내용이 또 시기와 질투를 유발할 내용이에요. 형들이 나에게 꿇어서 절을 하더라, 이런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말한 거예요.

“요셉아, 네 꿈에서 내 위치는 뭐냐?” “나에게 절하는 위치입니다.” 이걸 이 철없는 요셉이 그냥 발설했어요. “전부 날 둘러싸고, 엄마 아빠까지도 다 나에게 절을 하더이다”(창 37:9). 그런데 꿈이 누구한테 왔느냐 하면, 아버지한테 칭찬받고 사랑을 받는 요셉에게 왔다는 말이죠. 안 그래도 편애에 차별받는 것이 기분 나쁜데, 그게 왜 기분이 나쁩니까?

기분 나쁘다. 기분이 나쁘니까 이건 감정이죠. 이 감정이라 하는 것은 존재에서 나왔고, 이 존재에서 ‘기분 나쁨’이 나왔으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최종적 1, 1은 누구다? 나만이 최종적인 1이어야 한다는, 이걸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미 기호학으로 확정된 상태에서 유발된 여러 가지 감정…, 아까 1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다수가 나오지요, 다수. 일자(一字)에서 다수(多數)가 나오는 것으로 확장되는 거예요.

다수에서 나온 그것을 가지고 ‘내가 누구냐’를 규명하기 위해서 찾아나가면서 ‘나는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까 그랬죠. ‘나는 가인이다.’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거예요. 찾아나갈 때 내가 아는 여러 가지 감성을 내가 분석해서 나라는 것을 알 때, 여기서 뭐가 빠져있느냐면 ‘대립 요소’가 빠져있어요, 대립 요소가.

‘내 안에 내 세계가 있는데 뭐. 뭘 해도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이니까 힘들거나 어려워도 참고…’, 이러한 어떤 과정 속에서도 ‘너의 적은 너야. 너 때문에 내가 못 살겠어.’ 이런 소리는, 이런 감정은 안 나온다 이 말이죠.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아야 돼. 힘내야 돼. 이때는 용기 내야 돼. 이때가 위기니까 위기를 잘 돌파하면 나중에 빛나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야.’

자기가 끊임없이 자기를 격려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내부에 대립 요소가 빠져있는 겁니다. 아무리 고생하고 아무리 여러 가지 직업을 가져도 그 직업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은 변한 적이 없어요, 한결같이. 1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 물어볼게요. 1이 둘로 쪼개져서 2가 되는 거예요, 2가 1로 변하는 거예요?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죠. 1이 2개로 쪼개지면 후딱 어디로 모입니까? 안 돼, 안 돼, 안 돼, 하면서 어디로 가야 돼요? 다시 1로 가야 되죠. 이게 연세 많은 부모님들의 사고방식 아닙니까?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가족들은 내 유산 때문에 싸워서는 안 된다. 너희 형제들아! 우리는 다 한 식구인 것을 잊지 말아라.”

자식들이 “아니요!” 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예!” 지금 부모는 뭘 착각하느냐 하면, 식구가 네 형제라면 네 형제가 한 가족으로 마음이 똘똘 뭉쳐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네 형제는 숫자가 4잖아요. 4지만 한 가족이라는 입장에서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돈 앞에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없지요.

2는 1이 되는 데 있어서 대립 요소가 없어요.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2는 이 땅에서 1로 나타나면서 여기서 대립 요소를 나타냈습니다. 그게 뭐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분리에 성공하신 거예요, 십자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자로 주께서 성공한 거예요. 예수님이 저주받은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은 것은 아버지로부터의 저주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를 믿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자를 믿는 겁니다.

보통 남들이 친구 사귀거나 어떤 유튜버가 아는 척을 할 때, 또는 선을 보거나 ‘솔로’라는 프로 나가서 자기소개 할 때 “저 광수인데 난 하나님께 저주받았어!” 섬돌에 올라 앉아가지고 그런 이야기 합니까? 그렇게 해놓고 “날 선택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여자들에게 물어보면 여자들은 “선택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다 집에 돌아가요. 영수고, 순자고, 다 집에 돌아가고 없지요.

저주받는 것을 왜 싫어해야 되지요? ‘우산꽂이’어야 되는데, 저주가 꽂히면, 저주가 꽂히면 되고, 또 복이 꽂히면 복이 꽂히면 되는데 왜 주제넘게 내가 “아, 복은 받는데 저주는 사양합니다.” 그러할 권한이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어요, 없습니다. 선악을 알았잖아요? 선악을 알았으니까 ‘선과 악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기 전에 나무가 기호로 한 나무였어요, 두 나무였어요? 중앙에 있는 나무,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중앙 지점의 나무는 딱 두 종류에요. 뭡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몇입니까? 둘이죠. 이미 악마와 한패가 되고 하나가 된 인간은 선악 전체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없어요.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치워버렸어요. 손 못 대게 하려고.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어이, 천사! 두루 도는 화염검 가지고 생명나무에 못 오게 하라.’ 그러면 인간은 계속 신이 된 채…, 어떤 신인데요?

영원히 저주받는 신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된 거예요. 꼴좋아요. 소원대로 신이 됐어요. 악도 알고 선도 알아요. 그런데 저주받는 팔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뭐가 없기 때문에, 뭐가 누락되었기 때문에? 나무 하나가 없어요. 생명나무가 없어요. 소용없죠. 인생 헛발질한 거지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이런 대립 요소를 굉장히 거부해요.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합니다. “여러분, 죽고 난 뒤 부활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합니다. 결국 여러분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다 십자가 안에서 없어질 겁니다.”

조용~해요. No Men, Nothing Men,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내가 원하는 열매를 얻고자 하는 거예요. 교회 왔다는 그 노동 있잖아요, 그 노동의 대가를 교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가 종교단체니까요. 헌금하고 애쓴 만큼 뭔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복 받은 증거물이라도 뭔가 획득해야 이 장사가 남는 장사 아닙니까? 고객이 있어야 교회가 사업이 되죠. 십자가를 빼고.

“십자가 여기 있습니다. 믿으세요!” 하지만 그것은 잠시, 잠시 거쳐 가는 것. 중요한 것은 “여러분에게 부활의 새생명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제가 아까 세 번째 시간 끝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수직층과 수평층으로 이미 나뉘어졌죠? 창세기 4장 이후에 이게 이미 대립되는 거예요, 대립 요소로서.

교재 5페이지, 본론 바로 위에 뭐라고 되어 있든가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죠. 마태복음 6장 10절의 말씀 다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지금 성경을 보는 사람의 전제가 첫 번째, 하늘이 있어야 돼요. 하늘이 있어야 되고, 그 하늘과 땅 사이에 하늘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게 있어 줘야 해요.

수직이, 하늘이 주도권을 쥐고 땅은 그 하늘에 종속되어야 해요. 그런 인식이 있는 사람만 이 주기도문에 대해 동의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땅에 포함된 사람이 누구죠? 땅에 예속된 사람이 누구죠? 본인이잖아요. 그러면 본인은 뭡니까? 땅이라는 이러한 보편성, 땅에서 나는 단독적으로 개체지만 땅이라는 보편성에서 우리는 못 빠져나오죠.

여기서 어려운 용어 하나 첨가합니다. 많이 어렵지는 않아요.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 이 안에서 등장하는 것은 뭐냐? 동질화입니다, 등질화(等質化). 모든 질을 차이 없게 균등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과거에 알았던 삶의 태도, 기억, 추억, 얼마나 팔로워가 많냐, 키가 몇 센티냐, 현재 수입이 얼마냐, 그런 것을 일체 묻지 않고 똑같이 동질화 시키는 겁니다.

포도원이 있는데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있죠. 포도원 주인이 나중에 임금을 주는데 하루 품삯을 줘요. 그것도 똑같이. 이거 노동청에 고발해야 하나? 고발이 안 되는 이유가, 분명히 하루 일당을 준다고 했기 때문에 고발할 게 없어요. 아침에 온 사람도 하루 일당이잖아요.

그런데 삐졌어요. 일찍 온 사람이 삐졌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한 시간 일 하고 하루치 일당 받은 오후 5시에 온 사람, 그 한 사람밖에 없어요. 왜 삐졌습니까?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하면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은 인간이 갖고 있던 기본적인 모든 개체에서 나오는 차이를 등질화 시켜버리는 겁니다.

그 등질화시키는 요소요소, 물감을 확 뿌려서 똑같은 색으로 만드는 그 물감의 색깔이 붉은색 피에요. 예수님 피로 똑같이 만들었어요, 예수님 피로. 그 피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의. 자기의 포기하고 무슨 의로? 주의 의로 들어가는 곳이 뭐다? 천국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 뿌려지는 예수님의 피를 서문시장에서 파는 어떤 천이라고 봅시다. 안 그러면 텐트 만들 때 그 천, 그 천을 가지고 바닷가에 어부가 그물 던지듯이 하나님께서 확 던져버려요. 그러면 개개인이 일하다가 뭔가 위에 천막 같은 것이 덮이잖아요. 덮일 때 개체성은 그 덮임으로 인해 소실되고요, 그 천막을 매개로 해서 위에서 볼 때 천막에 덮인 자들은 전부다 등질화, 똑같은 성질의 존재로서 드러나겠죠.

천막을 위에서부터 쳤는데 그게 답답하다고 가위 가지고 오려서 동그라미로 파서 자기 얼굴 내밀고 자기 개성 살리고…, 예수님의 피가 숭숭숭, 구멍이 다 났어요. “너만 자랑하냐? 나도 자랑하자.” 예수님 피를 믿는데 전부다 모가지를 빼놓고 있는 거예요. 상상을 해보세요.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그 웃긴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벌어졌어요, 이스라엘 역사에.

뭐가 잘못이냐? ‘아브라함의 자손이 뭐냐’에 대해 오해한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조건이 있어요. 창세기 17장에, 할례를 행해야 해요. 이 할례와 관련해서 우리 봉사하시는 목사님과 권사님께서 그 귀한 쉬는 시간에 쉬지를 못하고 도표를 하나 복사해 왔습니다. 기호입니다! 기호라는 것은 인간 각자의 해석을 배제하고 어느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기호를 표시해요.

“맞지? 맞지? 넘어가고.” 또 “맞지? 동의하지? 넘어가자.” 그래서 “맞다+맞다+맞다…, 그 결론은 뭐다? 맞지? 그러니까 진리지, 그렇지? 오케이, 우리는 하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기호가. 그래서 이 기호를 봐요. 시력 1.5 1.0도 괜찮아요. 0.5는 좀 곤란합니다. 하여튼 이걸 눈으로 봐요.


눈으로 보는데 뭔가 작대기가 있고 이런 걸 봐요. 그런데 개인적인 의견과 사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뭐야 이건? 이 그림이 도대체 뭐야, 이게?’ 이게 뭐냐는 말이죠. ‘자기 지식의 자랑인가?’ 그래서 이걸 보면서 내린 결론은 ‘이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렇게 됩니다. 비현실적이래요. 이 그림을 누가 만들었는가?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이라는 프랑스 정신 분석학자가 이 그림을 내놓았거든요. 라캉은 정신 분석을 하면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논리를 전개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신체 구조가 다르지?”
“다르지.”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남자는 애를 못낳지만 여자는 애를 낳는 거 맞지?”
“맞다.”
“그러면 또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들어가요. 이 그림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들어가요. 중간에 삐딱, ‘그건 아니다’라는 것을 전혀 남기지 않는 식으로 해서 이거 남긴 거예요. 이제 기호 설명 들어갑니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왼쪽은 남성, 오른쪽은 여성입니다. ‘∃’ 이것은 적어도 하나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존재한다’라는 뜻의 영어 exist의 E, 여기서 존재한다는 것을 기호화하기 위해 이렇게 뒤집어서 썼어요. 영어하고 혼동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표기한 거예요.

‘∃𝑥’, ‘어떤 𝑥가 존재한다.’ 이렇게 됩니다. 지금 인간 세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평면적이에요. 수직 없습니다, 수직은 없어요. 왜? 수직은 보편적이 아니에요. “하나님 보이지?” “난 안 보이는데?” 이러면 끝나요. 보편적이 아니니까 진리에서 탈락이에요. “너는 예수 믿지? 난 절에 가.” 이러면 안 돼요. 모든 인간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 가지고 하는 거예요.

“너 있어, 없어?” “있어.” “오케이, 그러면 들어간다.” 그런데 아까 한 것 되풀이하는 거지만, 인간에게 ‘있음’, 인간에게는 ‘인간’하고 ‘있다’를 옆에 붙일 수가 없어요. 중간에 대립 요소를 집어넣어야 있어요. 인간은 주님이 허락하는 한, 주님이 계신다는 조건하에 ‘주님이 있음’을 연장해서 ‘있다’라고 해요. 복잡해요.

이걸 가지고 ‘언약 안에서 있다.’ 또는 ‘예수 안에서 있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 ‘있다’라는 말을 인간에게 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없다’도 해당이 안 돼요.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인간은 죽었어요. 죽은 채로 있는데 그 ‘죽은 채’라는 조건은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선언한 거예요.

‘인간은 이미 죽었고 그가 사는 것은 그 안에 내가 사는 조건하에 그는 살아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을지어다.’ 갑자기 또 저주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일러줬던 ‘저주’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7-8).

인간들은 성경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성경에 접근하려고 하면 주께서 “스톱,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생명나무에 함부로 가는 게 아닙니다.” 천사가 막아버려요. “저는 성경 지키려고 찾아왔는데?” “성경 지키지 마세요. 모든 성경은 내가 지키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 모든 성경은 나에게 달려와서 내가 그걸 모아서, 요한복음 19장 30절, 십자가에서 홀로 내가 다 이루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있다’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있다’를 쓰지 인간에게는 ‘있다’가 아닙니다. 있으려면 인간을 바꿔야 해요.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인간을 죄인으로 바꿔요. ‘죄인이 있다’가 돼요, 죄인이 있다. ‘내가 있다’가 아니라 ‘죄인이 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라캉은 그걸 인정 못 하죠. 보편,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𝑥’ 있다. 그다음에 ‘Φ𝑥’, 파이, 그런데 위에 바가 있어요. ‘’ 영어 not, ‘아니다’의 뜻이지요. ‘Φx’ “모든 인간에게 아버지가 있다. 동의해?” 동의하죠. 동의 안 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모든 종교든 민족이든 부모 제사를 지내잖아요.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뿌리는 부모다.’ 그래서 조상 제사가 있는 거예요. 모든 민족과 종교에는 부모 제사가 있어요. ‘Φ𝑥’ 여기에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𝑥 ’, ‘모든 있는 자들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살아있든 돌아가시든 내가 대신하면 되니까요. 아버지 자리를 내가 차지하면 되니까요. 아버지가 없는데 아버지 방을 비워둘 수가 없잖아요. 내가 아버지 방에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렇죠? “동의해?” “동의해.” “또 넘어간다?” 이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x’, 여기서 ‘∀’는 all(모든)을 기호화시킨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기호로 그냥 설명하니까 어려운데, 여기에 어떤 원이 있어요. 이 원안에 𝑥, 또 하나의 𝑥, 𝑥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거예요. 인구가 80억이 넘으니까 그 80억이 있겠지요. 이렇게 점으로 x들이 있을 때 ‘이 안에 뭐가 있다.’

그런데 그 ‘있다’는 것을 끌어모으면 ‘모두’가 되죠. ‘∀𝑥 Φ𝑥’,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거기에 아버지가 있었고,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 있다.’ 이게 바로 왼쪽의 남자 측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칸막이가 있어요. ‘과연 여성도 이 생각을 할까?’ 하는 거예요.

남성의 특징은 뭐냐? 아버지와 같은 신체 구조를 가진 아들, 남성(Φ)이니까, 아들은 그 아버지를 생각하고, ‘나는 그 아버지에 의한 동일한 아들로 있다’라는 것을 생각하지만, 그래서 관심이 거기에 있지만 ‘과연 여자는 그럴까?’ 하는 거예요. 여자는 그럴까. 여자는 시집가면 남이라 하잖아요. 과연 여자는 그럴까?

여자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다는 겁니다. 다른 데 있어요. 여자 쪽을 보면 다 바(—)가 붙어 ‘’, ~(not) 있다. 그다음에 ‘’, ~(not) 아버지가 있다. 그다음에 , ~(not) 모든 게 있다. Φ𝑥, 아버지가 있는 것이 맞다. 여기에만 (—)가 없지요. 그래서 , , , 이 세 가지가 뭐냐 하면, ‘그런 것은 그냥 남자나 생각해라.’

‘없다, 있다’를 떠나서 ‘신경 쓰는 것은 그저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남자가 있다는 것만 신경 쓰지?’라는 거예요. 라캉의 이러한 이야기를 왜 제가 거론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바로 그 생각을 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아버지잖아요. 하나님께서 그걸 이용해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한 거예요. ‘최고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름인 ‘아브람’을 ‘많은 숫자의 아버지’가 된다고, 그래서 ‘아브라함’이 된다고 이름을 바꿔줬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하나의 철학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올 때 수직적인 요소…, 곧 기존의 인간적, 또 개별적인, 흔히 상식적으로 ‘나는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주님께서 무슨 구조를 만든다? 무슨 요소? 대립 요소, 대립 요소를 만드는 거예요. 서로 마주 보고 대칭이 되는 것,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대적 되는 것,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싸움을 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싸움을 하는 겁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은 이미 하늘에서 결정 났어요. 이제 남아있는 것은 비가 쏟아지듯이 하늘의 뜻이…, 옛날 화장실의 변기 줄 잡아당기면 물 쏟아지죠. 이미 고여 있는 물을 잡아당기는 것이 주님 역할이고, 잡아당기면 그 뜻이, 위에 있던 물이 아래로 그냥 쫙 쏟아지죠.

겨울에 화장실 고장 났을 때 물을 뒤집어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성령의 충만을 받았어요. 하늘의 것으로 왕창 내려와야 돼요.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이 뭘 생각하든, 딸의 입장에서 아들이 뭘 생각하든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다고요. 관심이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아들이 구상하고 설립하고 건립하는 이 아들 중심, 또는 남성 중심의 세계가 여자한테는 통한다, 안 통한다? 통해요, 안 통해요? 안 통해요, 안 통합니다. 느부갓네살의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의 미모에 반해서 나라 영토의 반이나 주겠다고 했지요. 그거 국회 비준도 안 받았어요. 자기 마음대로 줘요, 자기 맘대로. 뿅 가가지고.

왕은 줄 수 있어요, 왜? 왕은 카운트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여성은 남성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관심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여자의 관심, ‘남성 쪽에 여성의 관심이 없다면 여성인 너는 어디 관심이 있는데?’ 여자는 관심 자체가 없어요. 관심 자체가 없는데 관심사가 발생돼요. 그게 뭐냐 하면, 자슥입니다. ‘자식’도 아니에요. 그냥 ‘자슥’이에요.

이거 미치는 거예요, 미치는 거. 산부인과나 조산원에서 애가 태어났잖아요? 1에서 갑자기 뭐가 생겼어요? 있을 수 없는 2가 생겼잖아요. 후딱 떼어내야죠. 그러면 1에서 2가 되고 2에서 1이 됐잖아요. 이 1은 다시 어디로 돌아가야 돼요? 옛날 임신하기 전의 ‘나’로 돌아와야 하잖아요. 그러면 이미 늘어진 뱃살은 누가 보상합니까? 드디어 40대 이후에 점점 불어나는 거, 어디가 허리인지, ‘어디메가 허리뇨?’ 점점 아랫배가 불어나는 건 어떡할 건데요? 누가 책임질 건데요?

여자가 아기를 낳고, 그 애는 결국 엄마를 떠나야 되잖아요? 자식은 떠나도 엄마는 안 떠나요, 자식을. “우리 같이 가자. 죽을 때까지. 아빠 몰래 돈 모아 놨다. 집 사는 데 보탤게. 나는 못살아도 너만 잘 살면 그게 보람이다. 나는 죽어도 좋아.” “엄마, 너무 부담 돼.” “김치도 하지 마. 김치도 내가 다 해줄게.” “엄마, 집에는 들어오지 말고 아파트 입구에서 띵동, 누르고 그냥 집에 가.”

맹목적이에요, 맹목적. 여자는 자식 낳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이렇게 내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고 이성이 없는지. 아기 낳아놓고는 정신이 없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애가 학교에서 말썽 일으킨다? ‘걱정하지 마. 변호사 데리고 가서 내가 해결 해줄게.’ 그러다 변호사한테 돈 떼어서 재판 걸고요.

이게 뭐냐? 여자가 뭘 목적으로 사는지는 모르지만 여자가 아기를 낳고…, 그러니까 창세기 3장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기를 낳았을 때 여기서 고통이 주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은 자식이 잘되는 그것으로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자에게 있어서 남성은 뭐냐?

내 자식을 지키고 키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 금전적 보상부터 해서 내 건강, 그리고 자식에게 해코지하려는 모든 것을 커버해 줄 보디가드…, 여러분 <보디가드> 알지요? “왠 다이아~(and I~)” 그 보디가드 역할을 하는 게 남성이에요. ‘내 자식을 위해서 당신은 모든 책임을 다 져야 한다. 나는 자식에게 몰빵했다. 말리지 마라.’

그다음부터 나가지도 않던 교회 열심히 나가서 기도하는 이유가 누구 때문에? 여기서 중요합니다. 여성은 자기를 버려요. 드디어 1에서 뭐가 돼요? 0가 돼요. 제로가 되면서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린 것처럼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버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요, 버리는 것을.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잘되고 자기는 망하는 것을 이걸 아주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지금 인상들 보니까 다들 안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벌써 여성이 남성화됐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남성화돼도 그런 요소는 기반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성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욕망이 발생돼요. 도표에서 이 여성(woman)이 이 남성(Φ) 쪽에 속하는 게 뭐냐 하면, “에헴!” 하는 것, “나는 이 집안의 어른이다.” 그런데 “어른 이리 와!” 이게 화살표에요. ‘woman→Φ’ “어른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어른 이리 와!”


내(여성)가 자식을 위해서 줄이 그이는 것, 영어로 woman인데 여기에 줄이 그이죠(woman). ‘내가 희생하는데 네가 필요하다. 내가 희생할 테니까, 나처럼 너도 희생할 수 있어? 이리 와, 이리 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남성은 뭐냐 하면, 자기가 집안의 왕이잖아요. 그걸 여기서는 전체라 해요, 전체. 이게 ‘전체’인데 여성은 전체에 속하지 않으니까 이걸 ‘비(非)전체’라고 해요.

항상 최종적으로 마감되지 않는, 뭔가 덮여도 다 메꿀 수 없는, 그래서 하늘을 향해 여지를 남겨둔 존재가 여성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한 번 봅시다. 3장 20절에, 아담이 그 아내 이름을 뭐라고 부릅니까?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 생명이라고 해요.

아담이 자기 아내를 하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아담이 이제는 희망을 여성에게 거는 거예요. “여성에게 희망이 있다.” 괴테(Goethe, 1749-1832)의 <파우스트> 마지막 장면에 그게 나와요. 여성한테는 하늘로 뚜껑이 열렸다 그 말이죠. 남성은 이제 끝났어요. 여성에게 희망이 있다. 왜? 여자의 후손이 뱀을 쳐부수면 그게 하나님의 생명, 구원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메시아는 어디로부터 온다? 여성으로부터 오는 거예요. 그래서 마리아가 임신한 거예요. 임신 하는데 조건이 뭐냐? 남성은 배제된 채, 인간을 통합하는 남성 세계 전체를 완전히 제거하고 그 빈자리에서 예수님이 잉태되죠, 여성을 통해서. 그것이 창세기 3장 20절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여성은 ‘하와’, 그 이름이 ‘생명’이에요.

생명나무에서 끊어진 상태에서 그 안에 생명이라는 것이 침투,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이렇게 개입된 거예요, 약속 때문에. 그동안 여성은 남성한테 눌려 사는 괴로움을 당해야 되죠.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남성에게 마저 삼켜지지는 않아요. 마저 삼켜지지는 않습니다. 남성에게 몽땅 다 하지는 않아요. 아까 했지요. “너 이리 와!”

그러면 여기서 남성은 뭐냐? 남성($)은 자기가 하는 일의 배필자, 도와줄 비서가 필요해요. 내가($)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도와줄 자(a)를 찾아요. 남자가 자기 세계를 포기하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포기 안 해요. 남자는 자기 일밖에 몰라요. 여자는 보조적이고 부수적이에요. 그런데 남자가 여성을 그냥 도와주는 게 아니고, 여성이 곧 비전체, 쉽게 말해서 하늘이죠, 하늘과 통하는 존재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손을 내미는 화살표가 바로 a라는 겁니다.
‘$→→→→a’

그런데 S에 죽 긋죠($). 그만큼 여자가 있는 이상은 남자가 아무리 전체라고 우겨도 마저 다가설 수 없는 여자가 비어져 나온 이상, 그걸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은 남성한테 없어요. 철 바뀔 때마다 “옷 사줄까? 뭐 해줄까?” 하면 여자는 “고마워, 고마워!” 하지만 기어이 남성의 소유가 안 되고 빠져나가요, 빠져나갑니다. 이게 a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하나 남은 S(Ⱥ). S는 sign, 의미인데 A(Autre, 대타자)에 금이 그어진다는 것은, 여성도 자기 욕망을 달성하는 목표점이 있는데 그 목표점에서 좌절된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를 다시 설명하면, 분명히 모든 인간이 ‘있음’의 세계에서 ‘존재’라는 속성을 가지고 여기저기 있다. 그래서 이걸 아우르자. 이걸 아울러서 ‘전체’로 하자. 평면적 세계에서 이게 동의가 되잖아요.

그런데 남성도 그렇고 여성도 그렇고 둘 다 미흡함을 가지고 있죠. 둘 다 미흡함을 갖고 있어요. 남성도 ‘저 여자만 내 말 들으면 나는 부족함이 없는데…’ 이러고, 여성은 남성에게서 도움을 받아도 ‘아니야.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부족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남성 여성을 다시 한번 근원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처음에 창조를 할 때 남성을 창조한 게 아니고 인간을 창조했어요.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은 1이죠. 1인데 남성/여성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2가 되죠. 2가 되는데 범죄하기 전까지 어떻게 유지했느냐? 남자가 하는 말이 창세기 2장 22-23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뼈 중의 뼈고 살 중의 살이니까 ‘나 남성은 껍데기고 내 안에는 여성성으로 가득 차서 내가 너무 기분 좋다’는 뜻이에요. 안쪽에는 여성성 바깥쪽에는 남성, 그런데 고마운 것은 둘이 헤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찬양해요. 노래를 합니다.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한 몸을 연합해서 이룬다는 말이지요.

한 몸을 이루는데 범죄하고 난 뒤에는 따로따로 놀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남성과 여성이 분리되었으니까 분리된 것을, 하늘의 남성과 땅 전체에 있는 남성과 여성 중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로운 신부를 여기서 창조해 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천막으로 다 덮어씌웠으니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런 거 다 치우고 이제는 통째로 보편화한 나의 신부가 되는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신랑부터 먼저 하늘에서 옵니다.

그게 ‘하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도 내려오리라,’ 결국 예수님이 찾아온 것은 신랑이 신붓감 찾으러 온 거예요. 그런데 신붓감은 누가 만드는가? 신랑이 만들어 내요. 신붓감 될 수 없는 자들은 제껴버리고 신랑이 만듭니다. 만들 때 특징이 이거예요. 그 특징이 놀랍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처녀, 여성이지요. 여성이 뭘 낳는다고요? 남성을 낳지요. 이걸 그대로 신약의 성도에게 대입하는 거예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어요. 남편 없는 자가 뭘 안는다?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게 요한계시록 12장 1-2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자, 이번 시간 끝으로 이사야 46장 10절을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관점을 우리가 같이 읽으면서 동참해 봅시다. 하나님이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지? 46장 10절,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게 하나님의 관점이에요.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거예요. 내가 알파요 오메가, 이미 된 것을 너희에게 우산꽂이에 집어넣은 것처럼 너희를 통해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어요- 내 뜻을 실시하는데 실시하는 그 내용은 이미 창세기 1장부터, 2장부터, 3장부터 다 줬다는 거예요. 그걸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우산 꽂듯이 그냥 꽂아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열매가 되고, 우리는 주님 말씀이 다 이루어진 하나의 꽃다발이 되는 거예요, 꽃다발! 하나하나 우리는 꽃다발 향기만 숨 쉬면 되죠, 살아가면서. ‘이런 꽃다발도 있구나.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만 이런 꽃다발도 있구나.’ 신부가 신랑에게서 내뺄 수 없는 이유가, 이것도 이사야 62장에 보면 나와요.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쀼ㄹ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4-5).

신랑은 신부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끝까지! 끝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왜? 자기의 신부이기 때문에요. 신부를 버리면 본인이 신랑이 안 돼요. 주님 본인을 위해서 항상 신부를 만드는데 하나님이 철저하게 완벽하게 해서 아담이 했던 고백을 이제는 주님이 합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우리는 ‘한 몸’이 된다. 그 한 몸을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식사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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