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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언약의 그물망

아빠와 함께 2026. 8. 1. 20:59

2026 여름수련회 창세기 강해 제7강 : 언약의 그물망 - 이 근호 목사

7강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실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교재 1페이지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를 했다고 하는데 창조를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현실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관찰되는 이 현실은 ‘끈끈한 공간이 주름 잡히게 되면 거기서 질량을 가진 물질이 생긴다.’는 거예요. 이것이 관찰했던 지금까지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현실이라고 하는 거예요. 현실을 창조했던 거기 있잖아요. 자연이, 해와 달이 거기 있잖아요. 거기 있으니까 그걸 보고 인간이 내린 결론은, ‘현실(창조세계)은 이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창조? 잊어라. 창조 잊어버려라.’ 인간이 창조에 대한 언급을 하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되는 거죠. 하나님이 이 창조된 세계에 덧붙여준 게 있어요. 보태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언약’입니다. 언약이 있으니까 이 언약이 내부 인테리어 했어요. 그래서 범죄한 인간이 창조? 거짓말 하지 마.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것은 언약의 내부 인테리어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언약은 뭐로 되어 있는가? 창조는 ‘거기 있음’이 되지만 언약은 뭐냐? ‘누가 축복이고 누가 저주냐’. 이렇게 축복과 저주로 확정된 것이 이 현실로 나타난 거예요. 언약이 현실로 펄럭인다고 할까요? 펼쳐지는 겁니다. 펼쳐져요.

그래서 과학에서는 노아 홍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아 홍수는 언약이기 때문에 노아 홍수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언약이 인테리어 했다는 이 사실을 인간의 눈으로 간파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언약은.

언약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은, 언약 자체가 기호인데 기호는 항상 이자(二者)관계에요. 두 사람의 관계인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 모든 1을 차단하니까 인간에서 추적해 들어오는 모든 1을 차단하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이 창조세계에서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등장해서 인간이 그 사건을 미리 예측한다든지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어요. 사건이니까. 지난 사건을 무슨 수로 쥐고 있습니까. 없는 사건이니까요.

그래서 기호? 인간에게는 없음. 사건? 없음. 그다음에, 존재? 있음. 존재에서 현실로 바로 가는 거예요. 존재에서 현실을 바로 규명하는 겁니다. 어떻게? 차근차근히 법칙을 따라서 현실은 이렇다 하고 결론을 내리고, 언약을 몰라도 결국 인간들이 만드는 언어로 설득해 들어가면 모두가 고개 끄떡이면서 동의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교과서에 쫙 펼쳐져 있죠.

교과서 내용과 틀리면 100점은 못 맞지만 지옥은 안 가잖아요. 그렇죠? 빵점 맞아도, 빵점 맞았기 때문에 지옥 가라, 이런 수능 없죠? 그런 시험 없죠. 참, 이런 게 어려운데요. 지옥이냐 천국이냐 하는 것은 이미 결과로 나온 거예요.

인간이 ‘잘했다/ 못했다’는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반성하고 회개하고 수정하면 돼요. 그러나 누구는 복 받고 누구는 저주 받는 것은 언약적 관점에서 수정이 불가해요. 그 사람 팔자에요. ‘축복받을 자/저주받을 자’가 개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이렇게 결정되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세계 내부 인테리어로 자리 잡고 있어요, 인간에게.

그런데 ‘언약을 모른다. 나는 언약을 이해 못 하겠다.’하는 것은, 언약 제키고 나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이 존재에서 파악해서 신의 나라에 들어가 보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언약을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본인이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언약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언약 만들 때 조건이 뭐냐? 나는 반드시 천국 간다는 내용을 기정사실화해서 언약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각자 모든 인간은 해석을 가지고 항쟁에 나서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성경적으로 옳아, 아니면 네가 옳아.

그러면 인간들과 인간들의 해석 투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없을 때, 창세전에 인간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인간 배제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이미 확정지어놨기 때문이에요. 그게 바로 새 언약입니다. 그것이 사건으로 주어지죠. “그러면 이 사실을 근거해서 어떤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물으면 제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자 관계에 대해서 동의하면 그 사람이 누가 됐든 천국 갑니다.

‘이자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자기 끼어들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 전에 결정한 것은 전부다 결정 그대로 밀어붙인 것이 오늘날 현실세계입니다. 내가 그것을 믿든 안 믿든 거기에 끼어들 위치가 못됩니다. 결정한 대로 될 뿐입니다.’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 전에”. ‘피조물 인간이나 천사가 끼어들기 전에,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만 있던 그 세계에서 땅! 땅! 땅! 결정된 사항이 언약의 줄기를 타고 지금은 이 창조된, 그리고 인간이 범죄한 이 세계에 언약으로 더 구체적으로 확립해버렸습니다.’라는 거예요. 그것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을 좀 더 친밀하게 인간의 현실세계 속에, 특히나 우리의 혈육이라든지 가족관계에 그것을 적용하게 되면 갈라디아서 4장이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21-27절까지가 아닌가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중에는 모르지만.

거기에 뭐가 어려우냐 하면, 바로 27절이 어려운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이 대목이에요. 자식도 못 낳는데 자식이 많다는 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우리를 아브라함의 입장으로 소환시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었잖아.” 없지요. 혈육적으로 없습니다. “잉태하지 못했잖아.” 맞습니다.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잉태하지 못했는데 창세기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하갈을 통해서 자기 자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효.” 잉태치 못한 자가 잉태치 못해야 되는데, 잉태치 못한 것을 알고 억지로 하나님 약속을 위해서 잉태하겠다고 나타난 그 결과물이 뭐냐? 나가리 된 자식들이 나온 거예요. 잉태를 못했으면 끝까지 잉태를 못해야 되잖아요. 네가 왜 걱정해서 억지로라도 종을 통해서 잉태하느냐 이 말이죠.

한번 대비해볼까? 비교해볼까? 네가 하는 사고방식과, 창세기 3장에 범죄한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네가 있기 전에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이자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벌이는지 내가 한번 대비해봐? 보여줘? 그래서 나타난 것이 내년 이맘 즈음에 네가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아주 우습게 만들어버려요. “네가 창세기 3장의 일을,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한 걸 따먹은 일을 네가 잊었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었던 사건을 너라는 존재에 입히겠다는 거죠. 그래서 이 존재를 창세기 3장으로 끌어당기고 그다음에 이자 관계, 생명나무와 선악과 관계의 이(二)의 관계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일입니다.

문제는 그 일이 단순히 일이 아니라 그게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의 관계망으로 꽉 찼다는 거예요. 꽉 찼지만 그 흐름은 두 결밖에 없어요. 하나는 잉태되었음을 긍정하는 쪽과 잉태되지 못한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두 가지의 견해. 사실은 같은 이야기지만. 잉태한 것을 긍정하기 때문에 잉태하지 못한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잉태한 자들의 견해, 해석.

잉태된 것에 대해서, ‘언약으로 보기에는 그건 하갈 쪽이다.’라고 단정 짓고, 잉태된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이자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잉태되어서는 안 되는 내가 여기 잉태되었다는 측면에서 이자 관계와 엮어지는 그러한 안목. 이렇게 단 두 가지 안목밖에 없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주 건방지지만 말씀드립니다. 누구든지 이자 관계에 동의하면 구원받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그 사랑의 관계에 동의하면 구원 받습니다. 구원 받는데 조건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잉태되기 위해서 두 분의 언약이 있는 게 아니고, 잉태되더라도 잉태치 못한 것을 전제로 깔고 우리는 이 땅에 만들어진 거예요. 말을 해도 어렵다, 정말.

창세기 3장에 범죄한 것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걸 난 안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잊어버렸지만 나는 안 놓친다는 거예요. 동일한 아버지잖아요. 동일한 엄마잖아요. 그런데 축복받을 노선과 저주받을 노선이 같이 출몰한 겁니다. 출몰한 그러한 일이 내부 현실세계에 파생된 언약 관계망으로 완전히 도배를 해버린 거예요. 촘촘히. 촘촘한 정보망이에요. 와이파이 통신망처럼 축복과 저주의 얽히고설킨 통신망이 꽉 차있는 겁니다.

이자 관계를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현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게 아니고 언약망을 경유해서 성경과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자 관계의 언약망이 눈에 들어온다는 말은 본인이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거기에 걸려들었다는 거예요. 접선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자 관계에.

아버지와 아들께서 창세 전에 모든 걸 다 이루었다. 이루었다는 것은 뭐냐? 인간이 뭔가 존재해도 이것은 잉태치 못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잉태되었다는 거예요. 그런 말이 참 어려운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이게 맞다면 ‘나 구원받았다’ 이것만 생각하면 이자 관계가 안 되잖아요. 하늘의 이자 관계가 지상의 이자 관계로 나타나야 되겠죠. 나 구원받았다는 것만 하면 일자 관계이기 때문에 안 되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했다.’ 구원받지 못했다면 ‘누구는 저주받았다.’ 이렇게 되겠죠. 이 두 개를 다 알고 있어야 되겠죠.

왜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을까? 1번-악하다. 2번-나쁘다. ‘악하다’나 ‘나쁘다’나 같은 말이죠. 3번-평생 동안 교회라는 것을 누구한테 전도 받아본 적도 없고 교회 다닌 적이 없다. 4번-저주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왜냐하면 관계망이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이기 때문에요.

그럼 이것을 그대로 구원받은 자기에게 적용시켜 보면, 나는 구원받았다. 왜? 1번-착하기 때문에. 2번-남보다 덜 나쁘기 때문에. 그런데 정답은 뭐냐 하면, ‘언약을 결정하신 분의 언약에 의해서 나는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고 내가 어떤 일에 관여할 자격 없는 죽은 자에 불과하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께서 하신 일을 볼 때, 주님의 결정으로 나는 구원받았다.

구원받지 못한 쪽은, 주님의 결정으로 저는 구원받지 못했다. 찾을 자를 찾으시고 버릴 자를 버리시는 고유 권한은 오직 이자 관계, 아버지와 아들에게만 속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자랑입니까? 이게 자랑이 아니죠. 현실을 현실대로 이야기할 뿐이지, 이게 자랑이 아니죠.

그러면 저쪽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뭐라고 시비 걸겠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며칠 가는지 보자, 이렇게 나올 게 아니겠어요. 1년 뒤에도 그런 소리하는가 한번 보자, 이런 거요.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언약은 시간이 없어요. 언약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몇 년 뒤라는 게 없어요. 빛의 속도로 가는 광자 안에서는 시간이 제로(0)에요.

이 말은 뭐냐? 광자는 시작점과 도착점을 항상 같이 갖고 있어요. 안드로메다까지 200만 광년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는 짓이지, 광자한테 한번 물어봐요. “광자야, 네가 안드로메다 갈 때 얼마나 걸렸느냐? 200만년 걸렸느냐?” 광자가 뭐라고 하겠어요? “이 한심스러운 인간아, 시간은 너희 세계에나 있지. 내 광자세계에는 없어요.” 빛은 지구에서 태양까지 8분. 8분 안 걸립니다. 시간 자체가 없어요.

언약 안에는 알파요 오메가,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이에요. 시간 자체가 있으려면 확정된 언약이 파생되어서 현실을 조성할 때 그때 시간이 매개변수로서 하나의 환경으로서 쫙 펼쳐지는 겁니다. 환경으로서. 빛의 속도에 대해서 시간 공간은 매개변수에요. 고정된 게 아니란 말이죠. 빛의 속도에 따라서, 인간이 관찰하기에.

따라서 우리는 뭘 살피면 되느냐 하면, 언약이 그냥 쉬는 게 아니고 어떤 결과물, 내부 인테리어죠, 어떤 관계망을 촉수로 펼쳐나가는가? 어떻게 많은 촉수가 있어서 현실을 가득 채우는가? 무슨 촉수가 있느냐? 그게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창세기 16장에. 그냥 이삭을 주면 될 텐데,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저주받을 이스마엘이 출생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지켜봐요. 허용해요.

그러면 이스마엘은 어떻게 하느냐? 이스마엘은 번창해야 되죠. 이스마엘도 열두 지파의 조상이에요, 창세기 25장에. 야곱만 열두 지파 있는 줄 알아요? 이스마엘도 열두 지파에요. 그들이 가득한데, 문제는 이스마엘은 저주 쪽으로 갔잖아요. 그러면 나머지는 이삭 계열이잖아요. 이삭 계열이 이스마엘 계열과 접촉되는 지점이 있어요. 접촉되는 지점.

그것은 요셉이 아버지 집에서 배척받을 때입니다. 창세기 37장 26-27절. 지금부터 약간 복잡합니다, 이자 관계가. 하늘의 창세 전 이자 관계가 어떻게 지상의 이자 관계로 나오느냐? 미리 말씀드리면, 창세기에서 꿈으로 요셉이 팔리고 난 뒤에 이자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요. 야곱과 요셉과의 아버지-아들 관계입니다. 나머지 자식은 자식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이자 관계이기 때문에.

야곱이 끝까지 사랑한 여자는 라헬이었어요. 라헬이 죽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레아와 동침할 이유가 없어요. 그건 덤으로 온 여자이기 때문에. 덤으로 온 여자거든요. 이자 관계가 성립이 안돼요.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레아가 아닙니다. 레아와 결혼하려고 그렇게 14년 동안 일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레아보고 “나 너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야. 네 동생 라헬보고 결혼했어.”라고 했더니 듣는 언니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세일할 때 1+1로 들어간 거예요, 레아가.

정작 사랑한 정식 아내는 라헬밖에 없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까? 있죠. 어디 나옵니까? 마태복음 2장 18절, 베들레헴에서 두 살 밑에 아이들이 다 죽었을 때 나온 애곡입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그다음에 나오는 여자 이름이 뭐냐?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여기 라헬이 나와요. 라헬이 야곱의 본처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데 있어서 바로 ‘야곱의 자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복 받은 이자 관계와 관련된 복 받은 자식이다.’라고 이렇게 성경에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은 창세기에서 애굽으로 팔려갈 때 이스마엘 계열과 정말 우연히 만나게 돼요(창 37:25). 요셉의 형제들이 특별 옷을 입고 아버지의 편애를 입은 요셉에게 기분 나빠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요셉을 죽이려고 했어요.

자, 한번 보겠습니다. 야곱은 누구를 사랑했다? 라헬을 사랑했다. 그런데 라헬의 자식은 누구밖에 없는가? 요셉과 베냐민밖에 없는데, 요셉에게 특별히 채색 옷을 입히며 특별 사랑을 보여줬어요. ‘죽은 엄마 대신 엄마의 빈자리를 요셉 네가 대체하고 채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이 언약적 사랑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는 하나님의 복을 체험하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자 관계입니다.

이자 관계인데 여기서 요셉이 나왔다 이 말이죠. 나머지 열 아들들은 정식 라헬의 자식이 아니에요. 뭐 라헬 종의 자식은 있겠지만 라헬의 자식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이자 관계에서 대표적으로 누가 나서서 말리느냐 하면 유다가 말렸어요, 유다가(창 37:26-27).

그리고 요셉을 죽이는 데에 적극 가담한 아들이 요셉의 형 중에 누가 있는지는 성경에 이름이 안 나와요. 이름이 안 나오는데, 신명기 끝부분에 축복을 할 때 거기에 열두 명 가운데 열한 명만 축복하고 한 명이 빠졌어요.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빠져 있습니다(33장). 안 나와요.

그러면 창세기 49장의 시므온은 뭐냐? 레위 지파와 더불어서 시므온은 부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시므온이 레위와 같이 합치했어요. 세겜-디나 사건 때 세겜 사람 몰살시키는 데에 앞장선 게 두 사람이었어요. 레위와 시므온입니다(창 34:25). 야곱이 축복할 때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요셉이 총무 대신 되어서 있을 때 아버지 야곱과 자기 가운데서 형제들이 왔잖아요. 형제들이 왔을 때 요셉은 아버지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 중간 연락책이 되는 형제들을 못 믿어요. 못 믿기 때문에 하나 인질을 잡는데 형제 중에 제일 만만한 인질이 누구냐 하면 시므온이에요.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요(창 42:24).

아마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잡혀갈 그때 어린 요셉이지만 시므온을 유심히 봤던 모양이죠. 이건 그냥 추측이에요. 유심히 봤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애 가르칠 때 애가 어리다고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함부로 생각하면 안돼요. 다 기억하고 있어요. 나 어릴 때 아버지가 어떻게 나를 구박했는지 나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거요.

시므온을 인질로 잡았어요. 인질로 잡고 난 뒤에 연락하는 형제들이 과연 내 심정과 아버지 심정을 제대로 전달하는지 계속해서 측정하고 시험하는 대목이 창세기 42장부터 계속 많이 나와요. 양식이 떨어지자 애굽으로 갔을 때부터 42장, 43장, 44장 굉장히 길게 나와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이자 관계입니다. 그런데 야곱도 요셉의 뜻을 모르고, 야곱은 요셉이 살아있는 것도 모르고요. 요셉은 아버지가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를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이 나 요셉을 통해 어떻게 실현되는지 아버지가 모르는 상태에서 중간 연락책으로서 지금 형편을 전달하는 것을 형들이 담당하고 있잖아요.

형들이 연락책을 담당할 때, 형들 중에 인질을 잡고 두 번 왔다 갔다 하면서 형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형들이 과연 옛날 나 팔렸을 때부터 자기 입장만 주장하는지 아니면 자기 입장을 철저히 포기하고 이제는 아버지 입장과 요셉 입장을 둘 다 수용해서 제대로 이자 관계를 형성하는데 매개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나갔어요.

거기 보게 되면 르우벤 먼저 나오고 그다음 유다가 나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르우벤 말을 믿지 않아요. 르우벤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42장 37절에 르우벤이 아버지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그럴 때 아버지가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한다.”

그 현장에서 르우벤이 큰소리칠 때 그 큰소리를 야곱은 거부합니다. 르우벤은 이자 관계에서 탈락했어요.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유다가 아버지한테 이야기하고, 유다가 요셉에게 이야기하는 그 말은 양쪽 다에게 먹혔어요. 우리가 유다의 어록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창세기 44장 16절에,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했죠. 44장 30절에는 아버지의 심정을 요셉한테 이야기해요.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시므온을 잡고 난 뒤에 요셉이 연락책을 맡은 형들의 과거 때문에 못 믿겠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중요해요. 요셉이 생각하는 엄마, 죽은 엄마죠, 라헬, 엄마와 나 사이 관계에, 과연 자기 어머니가 아닌 다른 어머니의 형제들이 나와 죽은 엄마 사이의 그 심정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측정하는 거예요.

그것을 누가 간파하느냐? 유다가 간파해요. 44장 19절에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비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고하되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 어미의 끼친 것은 그 뿐이므로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우리 아버지는 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죽은, 요셉과 베냐민 엄마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 사랑을 존중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위해서 나와 내 자식이라도 이제는 당신 국무총리의 종이 될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44장 33절에 보면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 동생도 아니고, 엄마가 다르니까 내 동생도 아니지만 만약 그 아이에게 문제가 있으면 기꺼이 제가 총무대신의 종이 되겠다. 노예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요셉은 그걸 보고 ‘저 유다라는 형은 자기 자리를 떠나서 아버지 야곱과 요셉 사이의 이자 관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있구나.’ 이자 관계에서. 무슨 말이냐 하면, 그때는 요셉인 줄도 모르죠, ‘저 국무총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엄마 말고 죽은 라헬의 자식을 간절히 찾고 그것만 집중해서 안부를 묻는구나.’ 유다는 생각해요. 그 근거가 뭐냐? ‘우리 아버지 야곱은 우리 엄마 레아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죽은 라헬만 사랑한다는 사실을 저 국무총리가 갖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아요. 아직까지 국무총리가 요셉인 줄 모르고요.

44장 30절 보면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여기 아비의 생명은 야곱이죠. 아이의 생명은 뭐냐? 아이의 생명은 요셉을 사랑하니까 요셉인데, 요셉은 죽었으니까 요셉의 빈 공백에 지금 베냐민을 여기다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고 그 사실을 유다가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하는 거예요. “야야, 우리는 이자 관계에서 빠져. 빠져, 빠져. 우리는 아니야. 라헬 저쪽 자식만 계속 노리고 있어. 우리는 기꺼이 종이 되자고 하자.”라고 설득하는 겁니다.

45장에 보면 이제 베냐민도 잡혔어요. 베냐민도 잡혔는데 아버지가 안 오니까 베냐민 잡아놓고 빨리 아버지를 불러오라고 이야기하죠. ‘점치는 것을 왜 네가 갖고 있는가?’ 뭐 이렇게 터무니없는 모함을 해서 현재 형들이 아버지와 나 사이에 대해 옛날 악감정 말고 그것이 완전히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를 확인 차 그들을 왔다 갔다 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야곱도 못 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야곱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자식을 잃을 것 같으면 나도 잃는 것을 수용하겠다.” 이런 쪽으로 나가요(창 43:14). 44장 27절에 보면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간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라는 이야기를 자기한테 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국무총리 된 요셉이 간파했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엄마를 사랑하듯이 엄마가 낳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알고 45장 1절에 보면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여기서 질문 나갑니다. 요셉이 왜 웁니까? 우는 이유가 뭐냐?

처음부터 냉정하게 했으면 냉정하게 나가야지, 여기서 긴장이 풀렸는지 울컥하고 노골적으로 있는 사실을 다 이야기하고 그냥 울어버려요. 우는 것은 43장 30절에서도 울어요. 29절에 보면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가로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냐 그가 또 가로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절에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 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여기서 또 울어요.

창세기 43장 14절에서는 야곱이 마음의 결정을 내립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의 자기 포기도 거기에 같이 나옵니다.

어쨌든 간에 요셉이 왜 우느냐는 거예요. 요셉이 왜 우느냐? 무엇을 알았기 때문에 감정을 억제 못하고 울었느냐? 그것은 기존에 자기가 생각했던 모든 의심과 불안감과 그리고 형들의 그 방해공작에 대한 악감정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날아가 버리고 이제는 제대로 아버지의 사랑과 내 사랑이 예전처럼 같이 통했다는 것에 대해 감격해서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현실이 뭐냐를 생각해보세요. 현실은 뭐냐? 현실은 이렇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그 이자 관계를 인간들이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울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가로막고 있던 내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주의 작업에 의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그 온전한 사랑에서 내가 기꺼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하는 일을 방해했습니다.’라고 나를 철회해버리는 거예요. 그동안 참 내가 몹쓸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다 완성되고 종결되었어요. 그것도 무(無)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하나 되어서. 그런데 우리는 맨날 ‘내년에 잘할까? 3년 후에는 내가 어떻게 될까?’ 계속해서 우리는 나 중심의 시간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런 나를 걷어내면 뭐도 같이 걷어내질까요? 지나온 내 시간이나 내 미래도 주님을 방해했기 때문에 아낌없이 그걸 포기하는 거예요. 야곱 말대로 나를 잃으면 잃어버리겠다는 겁니다.

주일 낮에 설교했던 한 대목을 써보겠습니다. 간단한 거예요. ‘현재의 나는 지나간 나다.’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결국 이미 예수님 안에서의 내가 볼 때 ‘아, 저런 식으로 또 지나가는구나. 헛짓하면서.’ 그걸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안목. 나에 대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런데 저 인간이 백 살까지 살려 하니까 시간이 도대체 몇 년 남았어? 30년 남았네. 아이고, 헛짓 많이 해라.’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없나요? ‘내년엔 잘할 거야.’ 악착같이 설치는 게 아니고.

시간과 더불어 같이 흐른다는 말은, 아직 아무것도 종료된 게 없어요. 완성된 게 없고 ‘아이고, 갈 때까지 신앙생활 해보지.’ 이런 식이에요. 뭐 주식 투자입니까? 도박입니까? 뭐에요? 갈 때까지 가보자~뭐 강남 스타일이에요? 갈 때까지 가보자. 벌써 10년 전에도 갈 때까지 가보자. 10년 후에도 갈 때까지 가보자. 앞으로 10년 후에도 뭐라고 하겠습니까? 에이, 갈 때까지 가보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러 오거든 아직 할 일 많다고 일러라, 이런 식으로. 나이 칠십 넘어서 팔십 되어가니까 내가 알아서 간다 하고.

이게 뭐냐 하면 계속 뭐를 껴안고 사는 거예요? 그 시간이라는 것, 희망이라는 것, 소망이라는 것을 껴안고 사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님을 슬프게 한다, 근심되게 한다고 했어요.

프리패스를 준 거잖아요. 천국의 합격증을 줬는데, 그 합격증에다가 자기 글씨로 자기 일기장을 써요. ‘내가 옛날에는 뭐했고, 옛날에는 뭐했고,…’ 이걸 왜 거기다가 씁니까? 좀 깨끗하게 보관하지. 자기 잘난 것, 자기 훌륭한 것을 그 프리패스 합격증에 왜 씁니까? 주일 낮 설교에서 예를 들었어요. 대기업 출입증을 목에 걸고 달랑달랑 가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저거는 지옥 갈 출입증이고 저거는 천국 갈 출입증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출입증은 한번 달게 되면 이미 팔자에요. 이것은 변동이 안돼요, 출입증은. 변동이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요. “여러분들이 구원받았으면 구원된 값을 하고 구원된 신분에 맞는 태도, 행동을 보여주세요. 착하게 살지 않으면 언제든지 잘립니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지금 이 말이 잘못된 것은 에베소서 1장 4절을 정면으로 지금 도전하고 있어요. 이미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결정났다는 이 언약의 시간 없음에 대해 인간들이 교회 장사한다고 사람들을 겁박주고 있습니다. 겁박해야 돈이 나오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인간 자체를 하나님께선 배제합니다. 희망은 내게만 있으면 되지, 굳이 네 희망을 네가 가질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내 소망 빼내고 그 빈 공백에다가 주님의 다 이루심을 채워버려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것을 영화롭게 끝냈느니라. 영화롭게 했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냐? 이미 지나간 인간을 통해서 지나간 내 시간적인 요소와 이미 다 끝냈다는 언약 요소와의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축복과 저주, 어느 한쪽을 아는 게 아니고 그 두 개를 다 알면서 세상에서의 남은 시간을 언약을 증거하면서 보낼 수가 있는 겁니다.

저주 쪽은 아직까지 시작 안한 거고, 어떻게 해보자는 거고. 축복 쪽은 끝난 것이고. 축복은 끝난 것이고. 무슨 희망을 가지고 뭐 구원받아볼까, 이런 쪽은 저주받은 쪽이고. 이렇게 성경은 깔끔하게 소개하고 있어요, 깔끔하게.

자, 그러면 여기서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야곱과 요셉이 드디어 아버지와 아들로서 하늘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자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뭐냐? 야곱 입장에서 요셉은 잃어버린 자잖아요. 죽은 자잖아요. 이것은 바로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침으로서 아버지에게 이삭은 잃어버려야 부활이 되는, 잃어버려야 언약의 후계자가 된다는 언약의 일관된 원칙이 야곱에게 있어서 똑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죽어야 사는 거예요. 똑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잊어버려야 주께서는 예수님의 영광을 그 자리에 우리에게 채우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똑바로 하라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현실이라는 거예요. 확정된 그 언약의 관계망에 지지직 감전되고 접속하라는 거예요. 말씀의 관계망에.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걸 확인할 수 있는가? 간단하죠. 성질대로 사는 거죠. 성질대로 살면 돼요. 그러면 주님도 한 성질 하거든요. 두 성질의 만남이에요. 내 성질대로 한다는 것은 진짜 성질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기대사항을 가지고 해요. 기대사항을 가지고 하면 주님께서 그 기대사항 속에 시간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서 그 시간의 흐름이 이미 완성된 언약의 두 관계망과 연결되지 않는 이스마엘 쪽의 요소인 것을, 이스마엘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듯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것은 비(非)언약이야. 그것은 저주받은 노선에서 하는 짓이야.”라는 것을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알려주십니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은 “저는 창세기 16장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데요?” 이러거든요. 아마 창세기 16장 이스마엘 일을 알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창세기 16장 책이 찢어져서 공중에 두 바퀴 반 돌다가 얼굴에 탁 부딪쳐서. 제가 과한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경말씀은 읽고자 해서 읽혀지는 게 아니에요. 사건과 동반해서, 내가 아는 성경지식 말고 똑같은 성경구절이라도 사건을 경유해서 우리에게 새롭게 개입되도록 사건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 말고. 내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거 달달 외우는 것 말고. 수련회 가서 짜장면 먹기 전에 그거 하나 외우고 먹는 그 구절 말고.

살아 생전에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필요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식으로가 아니라 “이미 결과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하고 주셔요. 주실 때 우리는 다시 한번 말씀의 세계에 속했다는 것을 느끼는 그런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자 관계에 대해 10분 쉬고 이어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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