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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존재의 한계

아빠와 함께 2026. 8. 1. 08:25

2026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2강-그리스도 안의 창세기: 존재의 한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창조가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피조물은 그 창조에 대해서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아야지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이렇게 만들어달라고 할 수 없는 이치처럼 인간세계에 인간 자체가 어떤 속성으로 대를 잇든 인간이 거기에 대놓고 ‘하나님, 인간 잘못 만들었습니다. 하자 있는 걸 왜 만듭니까’ 하고 대들 수 있는 그런 권한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대들 수 없다.’ 이것이 구약에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요령껏 살면 되지, 이렇게 정리가 돼요. 신약에 오면 이 말이 이렇게 달라져요. 인간은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할 수 없다, 이렇게 돼요. 그래서 이 말은 더 나아가게 되면 내가 당한 고통이 나의 고통인가, 아니면 주님의 고통인가, 이렇게 나가요.

예를 들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해서 해산할 때 고통이 있겠지요. 그 고통이 마리아의 고통입니까, 예수님의 고통입니까, 묻는 거예요. 마리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겠지요.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고통을 예수님의 고통으로 전환시키게 됩니다. 전환시키면 너로 인한 고통은 일체 없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아픔에서 유발된 고통이란 것을 알려줘요.

이게 로마서에 보면 그 절차가 나와 있어요. 로마서 8장 20절에,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이 땅에 살면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은, 본인이 잘못해서 그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본인이 잘못해서 고생한다면 그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어놓은 하나님이 잘못이잖아요.

그러니까 피조물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고통스럽고 하는 것은 본인 뜻이 아닌 거예요. 하늘의 뜻입니다. 퍽이나 위로가 됩니까, 이 말이? 되게 위로가 돼요? 취직을 십 년째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 뜻이다, 이게 취직 못한 사십 넘은 백수가 된 사람에게 정말 참으로 위로 되겠다, 그죠?

그건 뭐냐 하면 이게 예수님의 고통을 통해서 현재 피조물 나와 고통을 당하는 주님 사이에서 나는 창조주고 너는 피조물이라는 이런 연관성이 수립되었다는 말이에요. 넌 나하고 따로 놀고 남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 인생이 나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거예요. 네 인생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나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마리아의 임신 같은 거죠.

그러면 단지 피조물이란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은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울었다는데, 단지 피조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을 힘들게 굳이 살아야 됩니까,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요한복음 16장 20절에 보게 되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반대로 누가 좋아하느냐 하면 세상은 지옥 가는 인간들은 아주 기뻐한다는 거예요.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그 이유가 뭐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21절) 그다음에 뭡니까?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니까 너희들의 고통이 산고가 예수님이 너희를 통해서 등장하는 그러한 절차에 네가 끼어들었다는 거예요.

뭐 마리아가 한두 명이 아니고 여럿, 성도는 모두가 마리아에 대한 운명의 재탕, 반복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몇 명이야? 백 명의 사람이면 백이나 되잖아요. 근데 그게 그것으로 창세기를, 우리가 창세기 하니까 해석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그리스도 쪽으로 향하는 식으로 또 자식을 낳게 될 것이다. 자식 생산의 연쇄사슬, 연쇄 고리가 형성되는 겁니다.

자식을 낳은 쪽도 아프고 그렇게 낳은 자식도 딴에 잘 자란다고 보지만 본인들에게 물어보면 세상사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공부도 잘하고 칭찬도 많고 친구도 많고 도대체 너는 걱정거리가 없네. 그러면 “엄마, 내가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짊어지고 있어. 도대체 나는 내가 고민하는 이 고민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디서 왔느냐고 말하지 말고 어디와 이어지는가를 이야기해줄게.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이어져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해석, 남자/여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그 해석에 대해서 제가 참고로 도표 하나 분명히 교재에 넣었는데 교재에 그게 도표라서 안 나와 있어요. 아쉽습니다. 그래서 그리겠습니다. 남자, 여자의 차이점. 이거는 여자라고 해서 여자를 아는 게 아니고 남자라서 남자를 아는 게 아니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자, 남자가 뭐냐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 때 그냥 사람 만들면 되지 왜 여자를 따로 만들었느냐? 이제부터 어려운 것 하기 때문에 크게 쓰겠습니다. ‘기호’에요, 기호. 생명나무, 선악과 둘이죠. 천지를 창조할 때 며칠? 7일. 전부 다 기호입니다. 기호라 하는 것은 먼저 사건이 있고 사건에서, 순서가 바뀌었다. 기호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사건이 생기고, 사건에서 존재가 생긴다(기호 → 사건 → 존재). 기호가 먼저 있는 거예요.

왜 중앙에 나무가 딱 두 개밖에 없습니까? 왜 셋은 안 되고 하나는 안 되고 나무가 두 개입니까? 이것은 존재가 기호를 되물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라 하는 것은 기호 이후에 등장하기 때문에 왜 그렇게 했습니까, 물을 수 없어요. 그리고 존재라 하는 것은 기호에서 나온 사건이 터져야 존재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존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건에서 여파로 튀어나온 존재라서 항상 운명의 기호에 우선권을 갖고 있습니다. 기호1번 이런 기호 말고.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이미 숫자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존재가 숫자를 왜 그렇게 했습니까, 물을 자격은 애초에 박탈합니다. 그러면 남자/여자,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은 왜 없느냐? 이제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요새 남자와 여자 밖에 왜 없느냐? 아니 그보다도 남자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한데 왜 여자를 따로 만든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현실세계를 이렇게 실선으로 그려보겠어요. 이것도 여자니까 실선으로 그립니다. 또 여자, 남자를 동그라미로 그리게 되면 여기서 남성이 이해하는 현실이 있고, 여기 여성이 이해하는 현실이 따로 생겨요. 어렵습니다. 남성, 여성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왜 다른가, 하는 거예요. 왜 남성과 여성이 똑같지 않고 다른가? 신체적으로 다른 것은 눈으로 보니까 다 아는 거고. 그것 말고 신체 빼놓고도 남성과 여성이 왜 다른가 하는 거예요. 우선 여성부터 할게요. 모든 책임을 남성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가 여성이에요. 모든 일을 남성에게 다 떠넘기고 그러니까 문제없어요. 문제없으니까 본격적으로 뭐냐?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해요. 취미로 했고 쇼핑도 돼 있고 뭐든지 다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게 뭐냐? 여성은 남성을 찾아다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떠넘길 수 있는 남성을 찾아요. 이게 걸렸다 하면 남성을 조져놓는 거죠. 그러면 남성은 뭐냐 하면 여성이 어떻든 신경 안 쓰고 처음부터 자기 일만 해요. 아귀가 맞을 턱이 있나. 아귀가 안 맞지요. 이게 교재에 나오는 그림이 있는데, 이걸 라캉이란 사람이 복잡하게 그려놨어요. 이 이야기를.

남성은 자기 일을 하는 일부가 여성이에요. 여성에 대한 취득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의 일부가. 근데 여성은 뭐냐? 순서가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다 지킬 수 있고 내가 내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든든한 보호자가 먼저 그게 마련되고 그다음에 2단계로 자기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런데 그걸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남성은 자기 일에 몰두하죠. 이게 현실이에요. 남성이 있다면 보이는 게 현실입니다. 이 남성의 현실에서 남성이 하는 일을 다 체크할 수 없는 뭔가 밀고 들어와요. 뭔가 다른 세력이 밀고 들어옵니다. 우연, 또는 우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예상 못한 것이 올 때 남성은 여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공략,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남성은 이 현실을 이루는데 자기의 땀과 노력을 다 소모해서 이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연적인 이런 것들이 오게 되면 남성의 현실을 파괴하기 때문에 힘으로 이걸 밀어내요.

대표적인 예는 가룟 유다잖아요. 나는 저 예수님을 믿으면 장차 천국도 가고 나는 구원받겠다, 했는데 뭐가 밀려오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예수님이 맥없이 체포되었어요. 그러면 내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모든 노동에 대한 보상이 하나도 없어요. 헛다리짚은 거예요. 내가 그동안 뭐했지? 내가 그동안 본 손실을 저분이 무책임하게 이 땅에서 사라져버리면 나는 그동안 분명히 나는 이런 인생이 되겠다는 내 작업에 어떤 도움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자긍심, 자존심 많이 상해요. 따라서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서 나머지라도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팔아넘긴 그 죄책에 대해서 내가 떠안고 자살하는 방법으로 나는 의리 지켰다는 것을 스스로 갖고 싶은 거예요. 남성은. 왜냐? 이 모든 것이 내 일이니까.

그런데 여성은 어떠냐 하면 예상 밖의 뭔가 오게 되면 이거는 뭐냐 하면 행여 내가 내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머지 모든 어려운 것, 힘든 것을 책임져줄 어떤 남성적인 담보, 바탕, 든든한 뿌리가 나한테 찾아오는 행운으로 여기고 반기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반기는가? 충성과 봉사와 사랑을 다할 테니까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해요, 여성은. 그래서 방향이 여성은 반기는 거고, 남성은 밀어내는 거죠.

그러면 가인 같은 경우에 현실세계에서 남자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단단한 자기 세계, 국가건설입니다. 나라가 건설되는 여기서 법이 동원됩니다. 법, 완력, 힘, 영웅 이런 게 동원되죠. 여성 같은 경우에는 그게 아니고 여성 세계는, 여성은 일단 든든한 것이 와야 자기 일을 하거든요. 근데 늘 뭐냐? 진짜 내 인생을 옴팍 책임질 그야말로 믿고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분을 평생 동안 찾아다니는 거예요. 찾아다니기 때문에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반기는 거예요. 뭐를? 우연을. 우연과 우연성, 우발성을 여성은 가득 채우고 반기는 거예요.

남성은 현실적인 반면에 여성은 현실을 깨는 쪽에, 이걸 보통 실재세계라 하는데 이 단어가 너무 어려워요. 그냥 우연한 세계라 봅시다. 내가 예상하지 않은 우연한 행운이 나를 잠식해서 나를 사로잡을 때 비로소 여성은 내가 세상에서 남성이 찾지 못한 새로운 그러한 세계를 만끽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성 쪽에서 메시아가 나와요. 남성 쪽은 나가리 됐어요. 평생 동안 자기 일 하겠다하는데 이게 무어졌어요. 다시 말해서 여성은 남성을 원하지만 절대로 남성을 믿지 않아요. 성이 안 차니까.

“아이고, 꼬라지하곤. 행여,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남자들이 있다가 “뭘 도와줄까?” “딱 보면 몰라?” “몰라.” “치워라. 나, 주님만 의지할래.” 남성은 여성을 이용하죠. 내 일에 간섭하지 말고 뒤처리나 해 달라. “내가 놀던 백수가 되던 간섭하지 마. 다 강력한 남자의 뜻이 있어서 노는 거야. 뭔가 한 방 있어. 뜻이 있어. 술 가져와. 간섭하지 마,” 내 일에.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다르다는 말은 뭐냐 하면 결코 화합할 수가 없다, 이 땅에서.

여성은 우연을 무서워하지 않고 남성은 우연을 무서워해요. 왜냐하면 자기가 체계를 잡아놨거든. 나의 자존심에 체계를 잡아놨는데 그것이 한 방이 무너지게 디면 남자의 자존심을 찾을 길이 없어 그걸 끝내 참질 못합니다. 바깥에서 일이 잘못되면 안에 있는 애꿎은 집에 살림하는 여자에게 잔소리한다는. 그러나 여성은 우리 남편은 언젠가는 내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지, 그러다가 한 사십 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가 안심 놓고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다 하겠지. 아무 걱정거리 생기지 않게 해주겠지, 이러다가 사오십 년 보냅니다.

그래놓고 남편이 먼저 죽으면 이럴 때 묘한 게 나오는데 “아직까지 내 소원을 안 들어주었는데 네가 뭔데 허락도 없이 먼저 죽었느냐? 이 대장암 걸려서 인간아” 장례식 때 그래 울어요. 그렇게 싸워놓고 운다고요. “이 못난 인간아. 날 두고 그냥 가나.” 뜻이 뭐예요? “날 두고 너는 계속 나한테 실망시킬 수 없는 버팀목이 돼야지 너 혼자 가버리면 나는 지금 이 나이에 어쩌라고?” 그것도 모르고 자식들은 “어머니, 제가 있잖아요.” 돈 유산이나 탐내지 마라.

이 남성과 여성의 불일치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도 계속해서 이것이 이어져서 그 불일치가 계속 내려가요. 내려가면서 이 현실세계는 뭐냐 하면 남성의 세계가 됩니다. 이 남성의 세계에 대해서 여자는 아무것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도움이 안 되는 존재가 누구냐? 여성입니다. 아들 낳으면서 또 아들에게 든든한 남성의 세계를 기대하고, 그 아들이 손자를 낳아서 이 든든한 남성의 세계가 더 확고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남성, 남성, 남성.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남성, 남성, 남성합니다.

그런데 이 연속적 흐름을 절단하는 게 있어요.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마지막에는 마리아에게서, 바로 마태복음 1장 족보의 의미가 그거에요. 이걸 끊어버리는 거예요. 남성의 세계를 끊어버려요. 왜냐하면 끊어질 때마다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 이걸 크게 하면 확보한 존재는 사건의 투입으로 무너진다. 무너지게 되면 그 뒤에 뭐가 나오느냐? 기호가 나오죠. 하나님이 만든 기호가 나옵니다. 기호, 기호하니까 여러분 이해가 안 되지요.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면 이해가 되는데 말씀이라는 것은 너무 두루뭉술한 개념이에요.

어떤 글을 하나 쓸 테니까 이게 무엇에 관한 기호인지 누가 맞춰보세요. ‘흐 헤 리네브 씨는 노프레요 나미아 씨는 인황염이라 카 슘’ 이게 뭐냐 하면 H He Li Be B C N O F Ne Na Mg Al Si P Cl Ar K Ca 이게 원소주기율표 초반에 나오는 중요 원소에 대한 외우는 방법이에요. 지금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이걸 어떻게 외우냔 말이죠. He 기호잖아요. 기호인데 뭐 씨는 뭐요, 뭐는 뭐 씨라.

이게 기호를 뭐로 하느냐? 존재에 나오는 시조로 바꾸는 거예요. 시조는 문화입니다. 인간의 문화는 세상에 박혀있는 하나님의 기호를 인간 쪽 의미로 전부 다 운율로 바꾼 것이 인간의 학문이에요. 이 주기율표 왜 외우는 데요? 이것 못 외우면 공부 못하는 거죠. 이것 못 외우면 AI 못 만들잖아요.

문명이라 하는 것은 남성적이에요. 왜냐하면 남성은 하나님이고 뭐고 자기 일만 해요.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자기 일을 굳히기 위해서 남성은 모든 것을 다 합니다. 하는데 문제는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인간 나름대로 기호화시켜요. 기호화시키면 여기서 해석항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법칙을 이걸 규칙을 기호화해서 그것으로 문명을 이룹니다.

특히 한국말, 영어로 하지 않고 기호라 하는 것은 인간이 바벨탑 이후에 모든 언어는 다 흩어져도 그걸 통합할 수 있는 수학적 기호와 과학적 기호 이것은 숫자 1, 2, 3, 4, 0 인간이 아무리 인종들이 흩어져도 전부 다 똑같이 공통적으로 통용하고 있어요. 인간의 마음은 전부 다 한결같아요. 어떻게 남성적인 문화 속에서 인간은 안전 빵으로 살 수 있느냐? 그게 사는 목적이죠. 그리고 그걸 위해서 힘 있게 교육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이 이야기에서 여러분 뭔가 빠진 게 있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아까 그림과 비교할 때 빠진 게 있어요. 남성, 여성 차별 없이 투입되는 게 있지요. 그게 뭡니까? 점선. 현실세계 있는데 현실세계에 점선으로 와요. 이게 뭐냐 하면 정신병의 증상이에요. 증상인데 증상에 대해서 대응해서 처리하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이 증상을 욕심, 욕망에서 온다고 돼 있어요.

따라서 우연적인 게 오게 되면 안정적인 정서가 흔들리잖아요. 그때 어떻게 돼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워서 있는 것에 족하다면, 이게 불교사상이지만 사실은 그리스 철학에 이런 게 다 있어요. 분수 지키고 자기의 자리를 자족하고 만족하게 되면 인간은 행복해집니다. 에피쿠로스학파죠. 철학에 이런 게 나와요.

불교는 욕망으로 가서 이 다가오는 불안증세와 증상, 그리고 우연,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뭔가 난리나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이러한 불안증세를 욕심과 욕망을 다스리면 이런 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불교입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에서는 이거는 욕망이 아니고 이걸 충동으로 봐요. 충동이라 하는 것은 의식세계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의식세계에서 올라오는 것이 충동이라는 거예요.

충동이 증상에 대해서 이걸 ‘오지 마. 그런 일을 벌이지 마’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어떤 세계기 때문에? 여성 세계가 아니고 무슨 세계? 남성의 세계. 남성의 세계는 자기 하는 일에 흠집나면 용서가 안 돼요. 완벽해야 돼요. 자기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비난 요소가 있으면 참을 수 없어요. 우리 집에 어찌 그런 일이? 그런 거요. 내 인생에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져? 용납을 못해요. 아주 환장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이 필연적인 자기 세계의 특징이 뭐냐? 법과 규칙으로 체계화된 시스템화 된 여기에 우연적이 오는 것에 대해서 이거는 남성적으로 보지 말고 뭐로 보란 말입니까? 여성적으로 이 충동과 증상을 대하라 이 말이죠. 그러면 내 인생을 망가뜨리고 무너지게 한 것에 대해서 감사히 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예상 못한 것.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룻기. 룻이 유대인 남자와 결혼했는데 죽었어요. 죽으니까 나오미 시어머니가, “네 팔자가 그것밖에 안 되네. 나이도 젊고 애도 없겠다 미련 갖지 말고 너는 다른 남자 만나서 새로 인생 시작해라. 나는(나오미) 하나님께 벌 받아서 간다. 그러니까 벌 받은 가문에 뭐 얻을 것 없으니까 그냥 여기서 헤어지자” 하니까 큰 동서는 가버리고, 둘째 동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나라가 내 나라 됩니다.”

이유가 뭐냐? 어머니를 작살냈거든요. 어머니 인생을. 그게 살아 있는 하나님 아닙니까? 그게 살아 있는 하나님이잖아요. 인간이 살아 있지 않잖아요. 인간이 믿을 게 못돼요. 왜? 결혼했는데 죽어버렸으니까. 인간 믿다가는 자기만 믿을 게 없으니까. 그런데 남편이 죽었다? 더 나갑시다. 남편을 죽게 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참 말은 되게 쉽죠. 사고 났다. 내 팔 부러졌다. 수술해야 되겠네. 그러지 말고 사고 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되잖아요. 감사합니다, 하고. 어때요? 여러분의 진짜 의견을 수렴해봅시다. ‘가’하시면 ‘예’하시고.

이게 잘 안 되지요. 왜냐하면 모든 이 세상의 여성은 이미 남성화됐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이 주는 법과 안정된 규칙 여기에 맛이 들어서 이제는, 어느 강의 시간에 그런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주인공이 와 있어서 말하기 곤란하지만 딸이 아빠한테 “아빠, 내 나이가 스물다섯인데 지금까지 여자로서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요. 아빠, 어떻게 생각해요?” 밤새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답니다.

그래서 내가 답변했어요. 여자 나이 스물다섯이면 여자, 남자 아닙니다. 뭐냐 하면 노동자에요. 열아홉 살쯤 돼야 여자지 이미 스물다섯 되면 여자 아닙니다. 너 할 일 뭐야? 세상은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그걸 물어요. 이런 것 할 줄 아는데요. 노동환경 바뀌면 퇴사해야 돼요. 회사가 일도 안 했는데 그냥 의리로 주는 게 아닙니다. 회사는 남성적인 세계에요. 철저하게 회사가 하는 목표와 원칙에 준하지 아니하면 항상 그건 내보내게 돼 있습니다. 왜? 여자라서 내보는 게 아니고 노동자가 제 값을 못하니까 내보내는 거예요. 너무 간단한 거잖아요.

근데 그 딸은 스물다섯까지 아직도 자기가 여자라고 알고 있어요. 노무자입니다. 노동자에요. 엄마, 아빠가 밥 먹여주니 그냥 여자기 때문에 먹여주는 게 아니고 지금 다른데 치울 데가 없어서 그냥 데리고 있는 거지. 네 밥벌이는 네가 해야지. 이 세상에 아직도 여자, 남자 찾고 있냐 말이죠.

그만큼 창세기 3장의 범죄 이후에 남자, 여자는 남성에게 다 인수인계 받아서 남성이 하는 일에 부속 노동자로서 여성이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남성은 어떤 걸 원하느냐 하면, 일단 대를 이어야 돼요. 애기 낳는 기계에요. 두 번째는 뒤치다꺼리. 그러니까 헐값에 가사일 다 맡길 수 있는 값싼 노동력으로 써먹기 위해서 여자가 있는 겁니다. 이런 현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참 훌륭한 여자라고 평가를 누가 내리느냐? 여자가 자기에 대해서 평가를 내릴 권한이 박탈당했습니다. 남자가 좋은 여자라 하면 그건 좋은 여자고, 남자가 좋은 여자 아니라면 나쁜 여자에요. 그러면 여자는 거기서 왜 데모를 안 일으키느냐? 여자는 데모를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고 나를 든든하게 지켜준다면 그것으로 족한 존재가 그게 여자의 희망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자의 후손을 생산하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여기서 뭐가 끊어져나가느냐 하면 필연적인 남성세계, 국가가 떨어져나가요. 국가라는 것은 아무 짝도 여성이 본래 기능하는데 아무 소용없어요. 떨어져나갑니다. 남성 없이 여자가 기대하는 만큼의 후손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 성경의 예가 누구냐 하면 바로 에스더. 남성세계에서 연약한 여성이 큰일을 내잖아요. 그 에스더 때문에 생긴 여자의 후손은 유대인입니다. 왜? 여자의 후손의 특징이 있어요. 특징이 뭐냐? 필히 남성의 세계에서 죽었다가 그다음에 남성의 힘없이 살아나는 절차를 갖고 있을 때 여자의 후손이 돼요.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고통이 발생돼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 다시 돌아가 봅시다.

세상사는 고생과 고통이 나의 고통이냐, 아니면 주님의 고통이냐? 주님은 여자가 낳은 유일한 남자에요. 주님의 고통이냐, 아니면 나의 고통이냐? 성경은 성도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본인의 고통이 아니고 주님의 고통인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성도에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힘들겠습니까, 악마가 힘들겠습니까? 어느 쪽이 힘들겠어요? 만만치 않겠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6장에 가면 예수님 때문에 악마도 심하게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악마로 사는 게 그렇게 좋은 삶이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9절)

10절, 어느 정도로 아프냐 하면,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어떻게 하고?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어떻게 한다? “회개치 않는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께 감사하는지 봐라. 이게 악마의 고통이에요. 악마의 신음소리고. 거기에 사람들은 같이 합세돼 있고. 그래서 이 세상 전체가 주님도 고통당하고 성도도 고난당하고 악마도 고통당하고 악마에 속한 인간도 고난당하고. 온통 이 세상 자체가 그냥 지옥입니다.

왜 이렇게 고통당하느냐? 고통을 당해야 존재에 대한 모든 기대는 사라지고 이게 어디로 함축되느냐 하면 기호로 함축이 돼요. 거꾸로. 존재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기호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에서 존재가 되잖아요. 7일 만에 창조하자, 기호 아닙니까. 숫자. 기호에서 나와서 창조사건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존재가 될 때 이 존재가 문제가 생긴 거예요. 문제가 생겼으면 어딜 찾아가야 되느냐? 다시 사건을 거쳐서 기호로 들어가서 이 기호에서 새로운 존재가 발생하도록 하나님께서 작업을 하는 거예요.

아담이 자식을 낳았다. 자식은 이렇게 되지요. 자식은 또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게 되지요. 마지막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아담의 자손. 아담의 자손이 누구냐 하면 아담의 주가 되셔요. 이것 거짓말 아니죠. 예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어디서 나왔어요? 아담에서 나왔잖아요. 근데 아담의 주님이 아담의 자손의 모습으로 나온 거예요.

이게 마태복음에 22장에 보면 나와요. 예수님께서 물어요. 다윗의 주가 누구냐? 그리스도죠. 오케이.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으로 나오느냐? 이렇게 물어요. 그건 다윗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45절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설명하라. 바리새인들이 신학자들의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아담의 주가 되신 분이 아담의 자손으로 나왔다. 왜 굳이 그렇게 돼야 되는가? 이걸 회수하기 위해서예요. 아담이란 존재를 회수해서 십자가라는 기호, 그리고 예수님과 그 아버지라는 그 기호, 예수님 자신이 인간이 존재로서는 해석할 수 없게 만드는 유일한 기호가 예수님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해석을 못해요. 성령 사건이 와서 존재를 죽일 때 비로소 죽이는 분이 예수님의 영이라는 것을 알지요. 그렇게 아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제 진짜 끝으로 설명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2장, 3장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역사적 흐름에서 한쪽만 생각해요. 창세기 1장 다음에 2장, 2장 다음에 3장, 3장 다음에 4장.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마지막에 주로 오셔서 알파요 오메가로 오셔서 앞에 시작된 이 모든 것을, 호텔에서 카펫을 깔아놓고 나중에 손님 가고 난 뒤에 어떻게 합니까? 거꾸로 말아서 회수하잖아요.

주께서 이 전체를 창세기 1장을 예수님 십자가중심 해석으로 말아버려요. 롤 케이크처럼 말아버립니다. 말아버리면서 그동안 창세기 1장, 2장, 3장을 자기 존재의 출발점으로 해석했던 모든 해석을 무효화시킵니다. 그게 바로 죄로 전락시켜버려요. 너희들은 해석해도 너희 죄만 나왔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근거가 뭐냐? 왜 해석에 네 존재가 왜 들어가느냐? 그거는 관찰자야. 관찰자는 중보자가 없잖아요. 관찰자의 해석은 뭐냐? 나 잘났다, 라는 그걸로 귀결돼요. 모든 해석이. 나 여기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나 안 죽었다. 그거는 남성의 세계죠. 아까 이야기한 남성의 세계. 나는 나 자체적으로 완벽의 완벽으로, 철저의 철저로 기하겠다. 이것이 내 삶의 목표다. 끽소리하지 마라.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 이게 남성의 세계잖아요. 여성이든 관계없이 그게 남성의 세계에요.

남자들이 여성한테 그걸 요구하고 있어요. 살림살이 꼬락서니하고, 이러면서 은근히 집안에서 양보하는 척하지만 대장질하는 것은 정신적 대장질은 남성이 차지하고 있어요. 평소에 여성이 기가 세서 남성을 억압해도 자식이 그걸 본받아서 “우리 집에는 엄마가 대빵이다.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한다면 누가 화를 내요? 여성이 화를 내요.

왜냐하면 여성은 남성 형을 누구한테 배웠느냐? 남편한테 배웠거든요. 내가 아무리 남편을 우습게보고 남편에게 이래야 된다고 주장하는 그것을 누구한테 배웠느냐? 알 수 없는 남성의 그 자리를 자기가 그대로 부러워서 인수인계한 거예요. 여성이 남성화되게 되면 남성의 전체, 현실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그게 그렇게 탐이 나는 거예요.

“아아, 저건 여자라서 차지 못했는데 남자가 그걸 차지하는구나.” 하지만 내 목표가 나도 남자처럼 살아서 한 번 군림하고 싶다는 생각을 여성이 갖고 있는데 그건 누구한테 배웠느냐 하면 자기 남편한테 배운 거예요. 남편이 어떻게 여성에게 어떻게 하라고 시킨 게 아니고 그 자리, 내게 없는데 저쪽에 있는 그 자리가 탐이 나는 거예요. 이미 남성화된 이 세상에서 해석을 내립니다.

우리가 납득되고 우리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세계만이 진짜 현실이다. 여기에 대해서 흠집을 내고 공격한다면 나는 가만두지 않겠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예수 그리스도, 여자의 후손이죠. 남자가 빠진 여자의 후손의 세계를 인간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게 바로 존재를 사건으로 돌리는 거예요.

사건으로 돌리게 되면 여기에 사건이 생길 수밖에 없던 아버지와 아들의 그 근거로 인하여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는데 그게 아까 이야기한 죽여서라도 부활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고린도후서 3장 18절. 너희들 다 나처럼 영광스럽게 될 거야. 조건이 있는데 남성을 버려. 그리고 여성을 받아들여. 다시 말해서 내 세계는 필히 무너져야 되고 망해주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고 원하고 사모해야 된다. 이걸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을 품고 안녕히 주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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