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여름수련회 창세기 강해 제6강 : 이자(二者)관계 - 이 근호 목사
여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무슨 내용인지, 무슨 역사적 흐름인지를 대충 감은 잡는데 하나님이 강조한 것에 대해서 같이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십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출 20:2). 그냥 하나님을 섬기면 왜 안 됩니까? 왜 다른 신을 배제해야 되지요?
십계명의 제2 계명이 그렇잖아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직접적으로 ‘나를 섬기라’ 하면 왜 안 되느냐? 여호와를 섬기면 되지요. 십계명의 제2 계명에 “나를 섬기라.” “섬기겠습니다.” “아니야, 내 뜻은 그 뜻이 아니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니까!” 부정형을 동원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도출하는 식으로 계명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아주 머리를 붕 띄워서 결론을 딱 맺으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적그리스도다.’ 요한일서 2장에 보면요, 적그리스도가 한두 명이 아니에요.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요, 많은 적그리스도(요일 2:22).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으니까 이 세상에 예수님 안 믿는 사람 가운데서 일부는 그냥 안 믿는 사람, 그 나머지 유난 떠는 인간들은 적그리스도, 이렇게 구분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모두 다 잠복되어 있지요. 적그리스도 티를 안 냈을 뿐이지 적그리스도의 잠재적인 자질들을 다 갖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뭐냐 하면, 중보자잖아요, 중보자. 중보자, 연락책이에요, 연락책. 하늘과 땅의 연락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따로 그리스도를 마지막 때에 주시거든요. 주시는데 사람들이 성질이 급한 거예요. 내가 선지자고 내가 연락책 다 하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따로 보낸 중보자를 안 믿어도 되잖아요. 괜찮은 내가 중보자 역할 한다는 말은, 다른 중보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은연중에 잠복되어 있는 십계명 제1계명이 뭐냐 하면, 이거예요.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내가 너에게 명하노라.” 이런 요소가 사람에게 다 들어 있어요.
나 외에…, 곧 “친구야, 나만 믿고 다른 사람은 믿지 마.”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거예요. ‘너는 나만 믿어야 돼. 죽자 하고 나만 믿어야 네가 잘 되는거야.’ 성경을 보면서 우상 섬기지 말라 할 때 우리는 절에 가는 것, 불상 섬기는 것, 갓바위에서 비는 것, 어떤 형상 믿는 것, 거기에 대해서 그걸 피하면 우리는 우상 섬김이 안되는 줄로 이해해요, 안되는 줄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좁은지-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본인들은 우상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했습니다. 소용없어요. 소용없습니다. 자, 왕이 우상을 섬겼다 합시다. 요시아 왕이 우상을 섬겼다 칩시다. 그런데 왕이 우상을 깨트리는 것은 완력으로 할 수 있지요. 경찰 동원해서 부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왕이 백성들의 마음에 호응을 얻을 수가 없어요.
민중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권력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백성을 통치한다.’ 맞습니다만 왕도 백성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된 관계예요. 그러니까 눈치를 보는 거예요. 누가? 왕이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다. 이 권력이 다음 대선에서도 될 수 있는지 눈치를 보는 거예요. 그래서 맨날 여론조사 하잖아요, 여론조사.
그러면 여론조사를 하는 이유가, 누가 지금 주인공이에요? 권력 가진 자가 자기가 주인공이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은 타고난 적그리스도고, 타고난 우상 숭배자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고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요. 우상을 만들지 말라. 또 다른 십계명도 마찬가지고요.
출애굽기 32장 8절에 보면,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었다는 평가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짜 내려가 보니까 자기를 위해서 송아지를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송아지를 만들었느냐 하면,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송아지를 만들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교회 만들어 놨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너의 우상을 예수라는 이미지로 포장하고 있다’고 책망한다면 거기에 대한 인간들의 방어대책이 없어요. 변명할 여지가 변변치 않아요. “너는 원래부터, 날 때부터 너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가 없어서 그게 네 안에 잠복되어 있고, 그게 대대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속성인데 우상을 부순다고 해서 네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네가 지금 나한테 위장하고 있는 거야.” 이런 평을 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존재가 자기 존재를 하나님이 원하는 존재로 바꿀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나를 다른 존재로 바꿀 수가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합시다. 나는 바뀌지 않는다. 그냥 말씀을 당하면 그러려니 하고 그냥 말씀 앞에 당하시면 되는 겁니다. 믿습니까! ‘너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적그리스도고, 네가 중보자 노릇했기 때문에 너는 망한다’라는 겁니다. ‘망하게 해주옵소서.’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요게 안되는 거예요. “주의 뜻이 그러하다면 망하겠습니다.” 이 마지막 마무리가 안 되는 겁니다. 바둑에 보면 초반전 포석, 중반전 전투, 끝날 때 마지막 끝내기가 있어요, 끝내기. 주께서 지금 끝내기를 하고 있어요. 이미 패배로 우리는 확정 났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바둑 도사라면 여러분이 끝내기까지 가야 합니까, 안 그러면 돌 던져 버리고 ‘졌다!’ 해야 합니까?
주의 말씀 앞에 어떻게 하면 돼요? 갑자기 고요해 지는데요? ‘주님, 졌나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마 16:21). ‘주여, 졌습니다. 말씀이 이겼습니다.’ 이러면 천하에 속 편한 것을 가지고 ‘주여, 우상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절에 가지 않겠습니다. 향불 피우지 않겠습니다. 천주교처럼 마리아상에 절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찌질이 변명을 늘어놓을 하등의 필요가 없어요.
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탓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우리 조상을 탓하기 때문에 조상의 우상숭배 요소가 네 안에 삽입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출애굽기 32장에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다, 사실은 여호와를 만들었는데 우상을 만들었다고 일방적으로 평가를 하면서 내려칠 때 이 출애굽기 이야기의 그 뿌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창세기에 있을 거잖아요.
그러면 창세기의 우상숭배가 어떤 게 우상숭배인지 찾아보면 되지요. 그 뿌리를 알아야 그 밑의 지하수 흐름이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오늘날 우리에까지 지하수로 오는 거예요. 성경이 아니면 예수님 잘 믿는 우리가 우상숭배자고, 중보자 흉내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면 우상숭배의 흔적이 어디에 나오는가? 놀랍게도 우상숭배의 당사자가 라헬입니다, 라헬. 창세기 31장, 얼마 전 설교 시간에 이 대목을 한 느낌이 드는데, 31장 35절에,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헬이 아버지로부터 독립했어요. 독립할 때 라헬에게는 아버지보다 내가 더 중요한 거예요. 속 시원하게 독립하는데 하나님이 개입했지요. 그리고 라헬도 알아요. 아버지는 노동을 무임금으로 시켰어요. 야곱에게 딸 하나 주면서 20년 동안을 그냥 머슴살이시켰어요(창 31:38). 그걸 누가 지켜봤는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남편이 죽도록 고생하는 것을 봤습니다.
중소기업에서 이건 노예계약도 아니고 퇴직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20년 동안을 고생했는데 아버지가 다 가져간 것을 알고 라헬은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학수고대했었습니다. 독립하면 그냥 독립해요. 퇴직금도 받았겠다, 하나님이 개입해서 실한 양과 염소, 소를 받았으면 굿굿바이, 바이, 바이, 하고 헤어지면 돼요. 오늘 슬리퍼를 안 가져왔습니다만. “바이야이야~”
‘굿바이!’하면 되잖아요, 속시원하게. 굿바이, 하면 되는데 아버지의 드라빔은 왜 가져옵니까? 드라빔이라는 우상은 아버지의 노리개인데 그걸 왜 가져와요, 자기가? 이것은 뭐냐? 복수의 일종이에요. 아버지 엿먹이는 거예요. 라반의 가정, 이 우상의 가정에서 여호와 믿는다고 백날 해도 오직 여호와는 내 바깥 환경을 내가 힘들지 않은 행복한 인생으로 지켜주는 용도로 마감해야 돼요.
정작 내 인생을 꾸리고, 돈을 모으고, 그래서 내 인생을 자립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노동이라는 거예요, 나의 노동. 다만 하나님께서 내가 내 인생 지키는데 지장되지 않도록 철벽수비만 해주면 돼요. 김민재. 철벽수비로 해서 든든하게 지켜주면 그걸 우리 계약은 오케이,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믿고 건질 것은 건지고, 이런 계산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 집을 떠나는 라헬 입장에서는 성이 안 차는 거예요. 아버지가 스스로 그동안 자기 집안에 행운을 가져오게 했던 그 부적 같은 것을 내가 원천적으로 완전히 거덜 내는 거예요, 그 알맹이를. 계란을 흰자만 먹으면 되는데 흰자 가지고는 속이 안 차요. 노른자까지 다 털어먹는 거예요. 계란의 노른자까지를 자기가 들고 온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라반이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다른 것은 잡신이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아이고 철없는 것, 둘째 딸 라헬이 아무것도 아닌 그것 그냥 노리개인데, 그냥 우상덩어리인데 나에게 복수하겠다고 그걸 또 가져갔구나. 그 심정 내가 이해하지. 잘 가거라, 굿바이!’ 이러면 되는데 아버지가 다른 것은 화를 안 내요.
자기가 아끼던 그 신 드라빔을 가져갔을 때 7일 동안을 따라갔어요. 일주일 동안 추격전을 가동시켜요, 추격전을. 창세기 31장 23절에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잡아라. 내가 딸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 내 것 가져간 것을 돌려받아야 하겠다. 드라빔 없으면 나는 전부를 잃는 것이다.’
왜? 왜 그런 생각을 라반이 했지요? 그리고 아버지의 그 딸이 누구냐? 라헬이에요. 둘 다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라헬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그 아버지의 그 딸자식이에요. 아버지와 라헬이 내심 통하는 것은 뭐냐 하면, 드라빔의 효과입니다, 드라빔의 효과. 여호와는 추상적이고요, 관념적이에요. 여호와를 버리겠다는 게 아니에요.
“오, 하나님이시여! 도와주소서.” 이것은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내 인생을 의지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내가 굳게굳게 의지하는 행운은 내가 갖고 있는 그 드라빔에서 나오는 효과라는 겁니다. 긴소리 할 것도 없어요. 드라빔의 신은 어떤 신이냐? 인간의 소유 가능한 신이에요. 내가 부를 때마다, 내가 점칠 때마다, –드라빔은 점치는 기계에요- 점칠 때마다 항상 좋은 쪽으로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부적 같은 신, 소유가 가능한 신이 드라빔입니다.
그러니까 라반이나 라헬에게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여호와가 아니고 드라빔이라는 그 신, 사적소유의 대상이 되는 그 신이 이만큼 아버지를 거부, 부자로 만들었다는 사실. 그 드라빔의 효과를 라헬이 알아요. 아버지가 부자 된 이상으로 아버지 보란 듯이 우리 집안도 일으키겠다는 뜻에서 아버지의 그 신기한 신을 자기 소유로 가져왔습니다.
도로 빼앗겼을까요, 아니면 자기 것 만드는 데 성공했을까요? 성공했어요. 아버지가 “한번 찾아보자.” 마지막 남은 곳이 한 곳 있었는데 라헬이 깔고 앉았습니다. “좀 비켜볼래?” “경수가 나서 못 비킵니다.” “그래? 할 수 없지.” 수색영장을 가지고 왔는데 못 찾았거든요. 누가 화가 났겠어요? 야곱이, 아무 사정도 모르는 야곱이 화를 냅니다.
야곱이 자기 사정을 말하면서 “끝까지 이럴 거예요? 정말 이렇게 섭섭하게 할 거예요?” 이렇게 달려듭니다. 라헬은 그 우상 버렸습니까? “에이, 재수 없어.” 그렇게 버렸습니까? 라헬은 고이고이 간직했습니다. 고이고이 우상을 간직한 그 라헬이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 드라빔을 갖고 있던 라헬은 남편 사랑 따내는 언니와의 경쟁에서 먼저 죽습니다.
언니는 살아 있는데 라헬은 먼저 죽어요. 베들레헴에서 죽습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 35:16-18).
베노니가 뭐냐 하면, ‘자기의 슬픔을 반영한 자식이다. 내가 결국 패배자로서 이렇게 슬프게 인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하니까 야곱이 ‘아니다. 이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네가 바로 하나님을 낳았다. 오른손의 아들, 하나님의 능력의 아들을 낳았다.’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타나려면 조건이 있어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날아갈 때 비로소 그전부터 하나님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출몰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누가 하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일을 덮고자 했느냐 하면, 사적으로 내가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원망과 불평과 짜증을 냈는지 몰라요.
‘왜 나는 저 경쟁자에게 패배하게 만듭니까?’ 하는 원망, 그 원망은 ‘나는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기 보다는 내가 따로 나의 성공과 나의 가치를 북돋아줄 신, 그 신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남 말고 나를 위해서만 집중해서, 나를 주목해서 집중해서 타인보다 나를 더 좋게 만드는 그러한 능력의 신, 내가 그 이름을 예수라 부르든, 여호와라 부르든 무조건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우상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올 때 죽음을 앞장세워서 오시는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아무도 안 죽거든요. 신을 빙자해서 더 살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에 죽을래.’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 그렇다면 나를 위해 주세요.’ 그런 거래 같은 게 형성되어 있어요. ‘나를 위한 하나님,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룻 보세요. “우리 시어머니 작살낸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난 그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 안 믿습니다. 그다음 차례는 내 차례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만 살아계시면 난 안 살아 있어도 괜찮아요.’ 하는 그런 태도, 그런 태도를 왜 이방 여인을 통해서 그렇게 알려주느냐?
소위 여호와가 뭐로 넘어갔어요? 여호와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위한 우상으로 여호와 이름이 활용되고 사용 돼왔던 겁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망하게 하신 겁니다. 너희가 아는 여호와 말고 내가 아는 여호와라는 겁니다.
그래서 라헬이 죽었잖아요. 라헬이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자식을 안 낳습니다. 그래서 숫자, 기호가 12로 마감돼요. 자식 낳을 여자가 없으니까, 라이벌이 없으니까. 그런데 야곱은 누굴 사랑했느냐? 언니 레아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끝까지 누굴 사랑하느냐? 드라빔을 훔치던 애 낳다 죽었든 간에 야곱은 한결같이 누굴 사랑하느냐? 라헬을 사랑합니다.
20년 동안 돈 한 푼 안 받고 일한 것도 오직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견딜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라헬이 죽었는데 고맙게도 라헬의 대체물이 라헬을 통해서 출산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나의 하나님’이에요.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안에서만 비로소 잉태되는 하나님.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여자가 죽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지, 안 그러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나를 죽이겠다고 작정하신 그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는지?’ 창세기에서는 그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서를 봅시다. 에서를 보게 되면 창세기 36장 16절, “고라 족장, 가담 족장…” 그다음 나오는 명칭이 뭡니까? “아멜렉 족장.”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야곱과 더불어 쌍둥이로 태어나야 할 그 에서로부터 나와서 죽자 하고 이스라엘을 아무 연고 없이 달려들어서 공격했던 그 아멜렉 족속, 심지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힘이 없어 기진맥진할 때 뒤에서 비겁하게 뒤통수를 치면서 달려든 그 아멜렉(신 25:17-19),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올려서 승리했던 그 아멜렉(출 17:12-14), 그 이후에도 사울 왕 때 등장했던 그 아말렉(삼상 15:5), 그 민족이에요.
창세기 6장에 거인족 나오지요.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4). 똑같은 공식이에요. 그런 자식이 태어났는데 그런 자식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고 육이다. 따라서 내가 홍수로 싹 다 멸절해도 너희는 할 말 없어. 왜? 가인에게 죽은 그 아벨의 노선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가만히 있어라. 내가 다 할게.”
‘걱정도 하지 말고, 성급하게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이 생각하거든.’ 따라서 하나님께서 ‘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은혜를 줬는지 내가 알아서 끄집어내 줄게.’ 그 작업이죠. 그래서 ‘네가 나한테 당할 때는 슬프지만 돌아보면 말할 수 없이 기쁠 것이다. 네가 예상도 못 한, 경험하지도 못한 기쁨을 너에게 허락해 줄게. 그러니까 너는 네 뜻대로 좀 안 되더라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 이거죠.
아까 봤던 창세기 36장 다시 보겠습니다. 아멜렉이 어디서 나왔느냐? 에서에서 나왔어요. 아주 정말 지긋지긋해요. 저주받았으면 저주받은 채로 ‘나 저주받았구나’ 이러면 될 텐데 꼭 복 받은 이스라엘과 복 받은 야곱 노선에게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달려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요구하는 게 딴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요구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형성되는 차이를 내어놓아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사건으로 나타나는 그 차이를 너를 통해서 내보여라.’ 그러면 ‘어떻게 내보입니까?’ 당연히 나오는 질문이지요. 간단해요. 다 같이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나는 우상 숭배자가 맞습니다.”
너무나 간단하지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우상 숭배자가 맞습니다. 어떻게, 토해놓으니까 속이 시원하지요. 주일 날 설교에서 했잖아요. 신앙 없는 것들이 꼭 신앙 있는 척을 하잖아요. 그렇다면 신앙 있는 것들은 신앙 있는 척을 할 수 있다 그 말이지요. I can do,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뭐냐? 신앙 없는 척을. 왜? 여유가 있으니까. 하나님한테 많이 당해봤으니까.
우상 숭배자인데 아닌 척하다가 얼마나 많이 얻어터졌습니까? 얼마나 얻어터졌어요?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를 몰라도 나는 너를 알거든.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십계명이 뭐라고 이야기 했어? ‘너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그게 너한테 해당된다는 말이지요, 너한테!
계명은 결과적이에요. ‘그래, 이제부터 다 끊고 우상숭배 하지 말아야지.’ 이게 아니고 결론은 뭐냐? 나는 우상 숭배자로 들통나도록 주께서 친절과 친절을 다하여서 우리에게 계명을 준 겁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그래, 부모를 공경해야지.’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왜 그래요? 결국 우리는 부모 공경한 적이 없어요. 라헬 보세요. 아버지보다 누굴 챙깁니까? 자기와 자기 자식을 챙기는 게 라헬이에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자식은 부모를 몰라요. 세상 사는 기간이 짧아서 몰라요. 효도한답시고 하는 것이 부모가 보기에는 우스워요, 우습다고요. 우스운데 우습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되지요. 효도마저 끊기면 안 되지요. 그냥 “대견하구나. 기특하구나. 세상에, 1년에 한 번이나 찾아오다니. 어떤 집은 3년 만에 한 번 찾아오는데 너는 얼마나 고마우냐.” 이런 거.
“남들은 한 채밖에 없는 아버지 집 담보 잡혀서 2억 5천을 대출받았는데 너는 기껏 3천만 원만 대출받다니 아이고 기특해라. 부모를 네가 살리는구나.” 이런 거. 자식 생각은 아까 그 노래가 딱입니다. You needed me, ‘내가 부모를 이용하는 것을 아버지가 기뻐하면서 원했잖아요.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서 나는 더욱더 많이 가져가겠습니다.’
‘나는 우상 숭배자 맞습니다.’ 이게 1계명이거든요. 그러면 내가 우상숭배자 일 경우에나 줄줄이 뒤에 나오는 내력들이 나오는데 그게 2계명, 3계명, 4계명…, 마지막이 십계명이에요. 그 본문이 어디에 나옵니까, 물으면 골로새서 3장 5절에 나와요. 다 같이 볼까요? 지금 여러분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상 숭배자예요!
십계명의 마지막은 탐내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골로새서 3장 5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그다음에 다 같이 시작!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부처를 안 섬겼는데, 마리아상 안 섬겼어요. 뭐 성당 다니면서 마리아상 앞에서 가슴에 손으로 막 꽂고 그렇게 안 했어요.
안 했는데 단지, 단지 기껏해서 탐심, 탐심, 탐심을 가졌을 뿐이에요. 그런 비슷한 노래가 있어요.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
단지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 말했을 뿐인데
홍서범의 노래에요. 단지, 단지 나는 그 약간의 탐심, ‘그것도 못합니까, 하나님? 인간으로 태어나서.’ 탐심, ‘우리 애 공부 잘하는 거, 아무것도 아닌 그거, 단지 그거만 원했을 뿐인데 아니 그것까지 지적해버리면 숨이 막혀 못살아요, 숨이 막혀 못삽니다.’ ‘그러면 숨통 한 번 터줘? 너는 하루 일과가 탐심으로 시작해서 탐심으로 끝나. 그게 너야. 그런 네가 있기 때문에 너의 여호와도, 예수도 우상이야.’ 그걸 십계명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에서와 야곱이 같은 부모잖아요. 그런데 신기해요. 같은 부모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대립구조를 형성하는가? 그 솜씨가 누구 솜씨겠어요? 나 말고 나 아닌 주님께서 말씀으로 개입하셔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대로 천국 갈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고, 복 받을 사람은 복 받고 저주받을 사람은 저주받는 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인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지되지 않습니다.
그냥 가는 겁니다. 34장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오버해서 세겜 땅에서 난리를 쳤어요. 칼 들고 사람들을 죽이고 그랬어요. 30절에,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이 ‘이 동네 더 못 살겠다’ 한 거지요. 그러니까 31절에,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정당성을 내세우는데 창세기 35장 2-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러분이 이걸 보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갖고 언약의 축복 안에 놓이게 되었다면 마땅히 자식들 손에 뭐가 들려있지 않아야 해요? 여호와 말고 우상숭배가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상숭배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 그것은, 여호와는 사건으로만 나타나지 눈으로 목격된 모습으로는 안 나타나기 때문에 답답한 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답답하고 그때그때 험난하고 위험한 일이 있을 때 급해서 신을 붙들고 빌든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인간이 호출하면 조르르 와서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서빙 해주는 그런 신이 살가운 거예요, 정겹고. 그리고 돈독한 우애를 갖고. 암 걸렸는데 기도해 나았다. 그러면 그때부터 어떤 신을 못 버려요? 내가 암 걸렸을 때 기도해서 병 낫게 해준 그 신의 그 이름을 여호와라고 짓고 예수님이라 짓고 그 신을 버리겠어요, 안 버리겠어요?
못 버리지요. 그게 우상이에요. 그러면 암 걸렸는데 기도하지 말까요? 이러면 아까 십계명에 또 위반돼요. 타고난 게 우상숭배잖아요. 기도를 안 하겠어요, 급한데? help me, 안 하겠어요? SOS 안 치겠습니까? 그걸 꾹 참는다고요. 며칠 가는데요? 일주일, 대단해요. 더 아픈데? 참다참다 못해 결국은 “도와주세요, 뽀빠이!” 하지요.
“도와주세요, 뽀빠이! 빰빠라빰~” 해서 시금치를 먹든지 하여간 도와달라 하겠지요. 도와달라 하는데 과연 기도응답으로 깨끗이 나았어요.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면 내 탐심과 관련된 그 우상과의 그 관계는 어떻게 되겠어요? 더 돈독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별 할 일이 없다. 그러면 교회마다 돌아다니면서 뭘 하겠어요? 간증해서 차비는 얻겠지요.
간증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증인이라 했잖아요, 예수님의 증인. 그러면 간증 안에 예수님의 증인 되도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간증은 뭐냐? ‘나는 이런 인간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다’하고 비교해야 제대로 된 간증이지요. 그런데 간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는 이런 인간이었는데 지금 나는 이런 인간이다.’ 이걸 간증해요. 자기가 변화된 것을 간증한다고요.
나는 부정되고 어디로 가야 돼요? 말씀의 세계로 인도해야 될 것을 “나는…” 해놓고 자기가 모델 되니까 사람들이 누구처럼 되려고 합니까? ‘아, 나도 암 걸렸다가 사흘 만에 나았으면 좋겠다.’ 왜? ‘그래야 뭔가 비까번쩍한 훈장같은 것이 달리기 때문에.’ 자꾸 이걸 사모하는 거예요, 이걸. ‘신앙생활 밋밋해서 재미없어. 뭐 없나?’ 이런 거요. ‘뭐 없나? 멋진 것 없나?’
멋진 나가 우상입니다. 신앙에 대단한 나가 우상이에요. 말씀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객이 바뀌어요. “나는 이렇게 기대했는데 말씀에 의하면 그게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때부터 어떻게 하느냐? 말씀이 여러분을 쪼개서 말씀 앞에서 누구나 ‘나’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도록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말씀이 작동하고 활동해서 내가 활동해서 이만큼 살았다는 그 허점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그게 간증이잖아요. 간증하게 되면 사람들이 ‘아멘, 저분은 오직 말씀만 전한다’ 하는 순간 그 모든 칭찬이 나를 어떻게 만듭니까? 우상으로 만들지요. ‘오늘 표가 2 백표 나왔어, 2 백표.’ 그걸 잊지를 못하지요. 우리가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는데 ‘이 조시로 죽 가서 다음에 또 간증해야지.’ 계속 살려고 하는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러면 되네요. ‘간증해서 성공했더라도 나 내일까지 안 살아야지’라고”라는 그러한 생각을 하겠지요. 그게 뭐가 되겠지요? 그게 우상이지요. “그러니까 제발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기는 존재라는 것이 발각된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서울말 쓸 수밖에 없어요. “…제발 그렇게 살 거죠?”
“주의 은혜로 나는 천하의 죄인이며 우상 숭배자로 살 거죠?” 이상하다. 경상도 말하고 서울 말하고 뭔가 이상하게 안 맞는 것 같아요. 우상 숭배자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해요? 칭찬받으면 어떻게 돼요? “나 그 칭찬에 굶주렸습니다. 아, 간만에 칭찬 듣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해요, 안 되어야 해요? 그렇게 되어야지요. 그래야 신앙 없는 척이 되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저 사람이 신앙인인지 아닌지 분간을 못 하지요. 그게 뭐냐?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에요. 본인만 알고 있어야 해요. ‘주님, 이것이 내 본색에 가깝습니다.’ 하면 되지요. 그게 바로 진리가 너희를 뭐한다? 자유케 하는 거예요. 남의 비평,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것도 주의 은혜입니다.
아, 이거 위험한 말이다. 가만 듣고 보니.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그걸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진즉에 우리의 본색, -이스라엘만 망한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망하고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망할 때 우상 숭배하던 그것을 분명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멜렉 족속이 왔을 때 그들은 자기 능력으로 감당을 못했어요.
한가지 하고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창세기 38장 2절에서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했어요. 자, 동침했다. 우리 보기에는 ‘어, 유다가 왜 이방인하고 혼인했지? 가나안 사람은 안 되는데 왜 혼인했지?’ 왜 유다는 가나안 여자와 혼인했을까요?
1번, 그 여자를 신앙적으로 다룰 자신감이 있다. 2번, 내가 가장이기 때문에 신앙없는 여자가 들어오더라도 내가 이 가정을 신앙적으로 다스릴 자신이 있다. 내가 가르치고 다스리면 되니까. 3번, 예뻐서. 몇 번입니까? 맘에 들어서죠. 3번이죠, 뭐.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신앙적인 것이 왜 개입해요?
37장의 요셉 이야기를 하면서 38장의 유다 이야기가 중간에 끼어드는 이유가 뭐냐? 나중에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 되고서 그의 형제들이 요셉한테 미안해하면서 양식 구하러 오고 가고 할 때 유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제가 양식 못 가져오면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겠습니다.” 유다가 그렇게 한 사람이에요.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으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 번 다녀왔으리이다”(창 43:8-10).
왜 유다는 자신보다 언약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는가? 그게 뭐냐 하면, 자기 며느리 다말한테 작살나서 그래요. 하나님의 언약이, 이미 여호와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린 입장이에요. 자기의 혈육적 관계에서 여호와가 우상화된 입장에서 하나님의 언약보다 자기의 가오…, 남자한테는 이 ‘가오’라는 것이 있잖아요. 남자는 남자 값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가오, 위신, 체면. “잔소리하지 마라. 가정은 내 책임이다.” 이런 것. “못 먹어도 고!” 있잖아요. 그냥 밀어붙이기. 유다는 바로 언약을 우상 숭배하는 것처럼 그렇게 섬겼어요. ‘하나님이 외곽에서 지켜주니 내가 이 가정에서 내 가오대로 내 성격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다. 왜? 복과 저주의 대립구조를 아버지로부터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런데 유다가 몰랐던 것은 대립구조가 현실로 되기 위해서는 본인이 작살나야 한다는 사실, 죽음보다 더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차라리 죽었으면 되는데 ‘내가 낯짝 들고 살아 있으면서, 언약 없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그 이방인이 언약을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그렇게 새롭게 해석해 내지 못하는 못난 인간으로 들춰낸 것으로 인해서 유다는 부끄럽지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상이 아닌 상태로 우리 가정을 침노하고 장악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유다가 알려줍니다.
그래서 유다는 “베냐민 데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저를 바칠게요. 지금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언약이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고백을 한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는 유다가 그 사실을 몰랐어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해서 셋째 아들에게 그의 형수와 혼인을 시켰어야 했는데 뭘 걱정했느냐 하면, ‘아들이 세 명인데 저 여자가 이방 여자라서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이제 나머지 셋째까지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다.’ 왜? 워낙 재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가 재수 없어, 네가! 네가 지금 착각하는 그것이 재수 없어. 네가 언약의 사람이라고? 아니거든!” 네가 가오와 자기의 가치를 준수하는 것, 그게 우상숭배인 줄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다말이 자기가 창녀 짓까지 하면서 자기자신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다 뭉개가면서 기어이 시형제결혼법이라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자식을 낳게 됩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이냐? 창세기 38장 27-30절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산파가 먼저 나오는 아이의 손에 붉은 실을 매었는데 그 손이 도로 쑥 들어가고 2번 타자가 앞질러서 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새치기를 하느냐, 터치고 나오느냐 해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손에 붉은 실 묶어놓은 그 애(세라)는 뒤에 나왔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바로 에서와 야곱의 출생에서 장자와 타자가 육적인 순서, 육적인 한계에서는 끝났어요. 먼저 난 자는 형이고 나중 난 자는 동생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끝났어. 당황하지 말고 끝!’ 끝났어요.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제칩니다. “이게 너희는 다지? 내가 어떻게 이것을 일방적으로 바꾸는지를 보라.” 동생을 장자로 만들고 에서를 저주받는 차자로 내려가게 하는 그 원칙이 야곱의 아들 유다 가정에 동일한 원칙으로 일어났으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벌인 겁니다.
유다는 말해요. “다말아! 네가 나보다 의롭다”(창 38:26). ‘나를 박살 낸 네가 나보다 의롭다.’ 우리 십자가 예수님이 우리의 의보다 낫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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