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그리스도 안의 창세기: 대립구조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둘째 시간의 주제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1장, 2장의 주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가 아니고 내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작을 인간들은 창세기 2장에서 만들어져서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1장을 건드릴 때 문제점이 나와요. 내가 없는데 인간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인간의 입에서 나왔을 때 그 인간의 고백을 하나님께서 받아주겠느냐? 받아주지 않습니다.
처음에 창세기 1장에서 ‘내가 없다’에요. 그다음에 나가서 내가 없어도 된다. 여러분, 이걸 받아줘야 돼요. 어떤 사람은 이야기해요. 내 안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라고 말을 할 때 문제가 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의 관점은 성령이 있잖아, 이쪽에 악센트가 있고요. 그런데 너는 걱정이 뭐냐 하면 내 안에 성령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걱정거리가 되면 안 되지요. 이게 바로 인간이 오염된 거예요.
또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계시다.’ 이게 아까 봤지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4절까지, 5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주님이 계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오염된 인간들의 집합은 뭐냐? 나는 주님을 안 믿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여기서 네 주장에 왜 나오느냐? 나라는 것이 왜 튀어나오느냐? 나가 튀어나오면 어디에 어긋나요? 1장에서 뭐가 없습니까? 내가 없다는 것부터 출발하는 이 출발점과 안 맞는 거예요.
1장에선 내가 없지요. 2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등장합니다. 3장은 뭐냐 하면 장난꾸러기. 장난꾸러기 아니죠. 말썽꾸러기죠. 말썽꾸러기 밴드가 누구냐 하면 악마를 우두머리로 해서 뒤에 여자 따라 나오고, 그다음에 남자 따라 나오고 이게 하나의 보컬밴드가 형성된 거예요.
4장은 뭐냐 하면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형한테 맞아죽은 아벨이 꾸역꾸역 죽었는데, 죽어서 대를 잇지 못해요. 죽어서 대가 종결되어야 되는데 셋이란 이름이 다시 등장해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분명히 죽었는데 안 죽어.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다른 씨를 연속시킨 거예요. 죽은 자가 살아났다.
5장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와 동행.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데, 이것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했지요. 이것이 노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5장은 죽었다가 동행하고.
6장에서 8장까지는 대청소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물로 확 대청소를 해버리는 거예요. 그다음에 9장에서는 물 있음을 물 빼는 거예요. 물 빼고 그걸 무지개로 달아놓고 밑에는 비어있는 것. 노아홍수 이후에 무지개가 피지요. 무지개가 핌으로서 하나님께서 약속하기를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미국의 대저택에 수영장 있잖아요. 그 수영장에 보통 부자들이 수영하는데 물을 다 빼는 거예요. 물을 다 빼고 그 위에 뭘 하느냐 하면 이 집에서 말썽꾸러기, 3장에서 말썽꾸러기 밴드 물에 빠뜨려서 혼냈다는 그러한 표시를 현관에 걸어놓은 것처럼 무지개를 했다는 것은 다시는 물로서는 혼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렇게 무지개언약이 피어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물이 없지요. 물이 없으니까 다시 인간은 헤헤거리면서 말썽꾸러기들이 거기서 살려고 하겠지요. 그게 창세기 4장도 마찬가지고, 그다음에 9장, 10장, 11장에서 빈 곳에 인간의 도시와 문명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비어있는 수영장, 물 없는 수영장에 위에 무지개가 떠있는 건 생각 안 하고 비어있는 수영장에 인간이 레고블록, 아주 정확한, 아주 확실한 것들만 골라서 도시와 문명을 건설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기호라는 말을 왜 사용하느냐? 그 질문이 상시 나왔어야 되지요. 기호란 말했기 때문에. 기호라는 말을 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호에서 그다음에 사건에서 그다음에 존재가 되잖아요(기호 → 사건 → 존재). 그런데 이미 인간의 존재는 언어가 통용된다고요.
언어가 통용되면 각 사람들이 같은 말을 같은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각자 개인의 지난 경험과 그리고 기억과 그리고 이런 것들로 인해서 조성된 선입관으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개인의 취향 같은 것이 계속 섞여 들어가게 되면 이거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각자도생이 돼요. 하나로 통합이 안 된다고요. 물 빠진 빈 곳에다가 인간들이 도시와 문명을 이루면서 여기서 혼선이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각자하는 그것을 인간들은 뭐냐 하면 그 레고블록 이야기했지만, 가장 간단하고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당신 경험 말고 누구나 오케이 하고 다 고개 끄덕이며 동의할 수 있는 마지막 극단적인 은밀한 언어, 그거는 바로 뭐냐? 수학입니다. 기호. 수학은 기호로 돼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은밀함의 극단이 뭘 담보하느냐, 보장할 수 있느냐?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이 은밀한 극단의 객관성을 보장하는데 이 도시와 문명 건설에 특히 영향을 주는 두 계급이 있어요. 하나는 과학이고, 한쪽은 바로 법률을 다루는 사람이에요. 법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가 치밀하게 판사가 판결할 때 누가 봐도 이거는 개인적인 의견이 들어갔다는 소리를 못하도록 엄밀하게 법을 다루게 돼 있어요.
과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카운트에 있어요. 수를 헤아리는 거예요. 카운트, 수를 헤아리는 사람이 누구냐? 왕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가 융성할 때 사탄에 추동 받아서 뭘 했는지 알아요? 이스라엘의 수를 카운트했습니다. 카운트한다는 말은 유일하게 계산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을 왕이 갖는 거예요.
카운트한다는 말은 숫자를 헤아리는 거예요. 숫자를 헤아리면 백성들이 개인 사정으로 어떤 사람은 얼마나 어려움이 있고, 어떤 사람은 풍성하고, 어떤 사람은 화목하고 행복하더라도 왕의 입장에서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랄지 그런 건 다 배제하고 너는 내 앞에서 무조건 숫자여야 돼. 인간? 내 앞에서는 인간이 아니야. 그냥 수의 대상일 뿐이야. 그래야 객관적이고 엄밀하고 통치가 가능해요. 뭐 봐주세요, 그런 것 없습니다.
그래서 왕이 보좌하고 또는 왕이 있는 통치하는 행정기구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일은 뭐냐 하면 통계 작성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몇 명 태어났고, 몇 명 죽었고, 세금은 얼마나 때려야 되고, 군사력은 숫자가 얼마냐? 그것 하는 거예요. 수를 셀 수 있다는 것은, 내 주관은 유지하면서 어떤 타인을 그 사람의 주관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내 손에서 숫자로만 다가오는 대상일 뿐일 때 권한을 가졌다, 권력을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목사들이 만나서 이야기하죠. “목사님 교회 교인이 몇 명이에요?” 이게 뭡니까? 교인들의 우두머리는 목사 당신이잖아, 란 뜻이에요. 당신은 거기에서 카운트할 권한이 있잖아, 라고 하는 겁니다. 당신이 오야봉이잖아. 대장이잖아. 헌금 얼마 나옵니까, 이런 이야기. 기업하는 사람에게 연 매출이 얼마입니까? 순이익이 얼마입니까? 그런 이야기.
지금 왕이 카운트할 수 있는데 물 없는 수영장에 국가가 발전하게 되면 자본주의가 마지막 최후의 제국이 되거든요. 자본주의가 되게 되면 왕이 했던 카운트를 어디까지 파급이 되느냐 하면 서민들까지 확장이 돼요. 그게 ETF(Exchange Traded Fund)에요. ETF 아시죠? 상장지수펀드. 펀드를 주식처럼 사고팔 수 있는 제도.
그러면 ETF하거나 직접 주식에 투자한 직장인이나 젊은 사람은 하루 일과가 뭡니까? 카운트하는 거예요. SK하이닉스가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삼성이 어디까지 내려앉았는지 그것 하는 거예요. 그 숫자를 헤아릴 때 그 순간 본인은 뭐가 되나? I am king! 이 순간만은 내가 왕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무슨 주의?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학생들 학교 졸업하면 자본주의로 변해야 됩니다. 뭐 배제학교? 빨리 졸업이나 해서 자본주의가 돼버려. 자꾸 그런 것 하지 말고. 이 카운트, 숫자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 주관성은 주관성대로 왕의 입지로서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뭐냐? 하나의 기호로 다가서기 때문에, 돈 자체가 기호 아닙니까. 돈 종이에 뭐 쓰여 있어요? 숫자 쓰여 있잖아요. 장날에 할머니들이 돈이 막 넘어갈 때 뭐 봅니까? 숫자 보는 거예요. 자식이 와서 가져가면 안 되는데. 장날에 돈 번 것 알면 안 되는데. 그 순간 자기는 자본세계에 푹 빠진 하나의 작은 왕이 되는.
그래서 여러분에게 특별한 비밀을 이야기할게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래서 인간은 다수로 가니까 숫자를 통해서 인간은 최종적인 1로 모든 걸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호와가 대빵이잖아요.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호프> 영화를 찍은 나홍진 감독이 이야기했어요. 영화에다가 왜 히브리서 11장 1절을 집어넣느냐? 다른 종교도 있는데. 여호와가 대빵이거든요. 여호와 하나님이 최종적인 신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의 의식은 신을 하나로 본다는 거예요. 유일신. 하나로 본다는 것은 바로 창세기 3장에 악마로부터 오염된, 2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가짜 인간으로 행세하기 시작한 그 의식이 뭐냐? 모든 것은 신으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일자, 유일자. 최종적인 하나로 온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기호에서 하나님이 대결하는 것은 1을 뭐로 방지하느냐? 2로 방지해요. 2로 막았어요. 2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게 숫자가 2가 돼버립니다.
인간은 기껏 신학을 연구해도 마지막에 하나로 남아요. 삼위일체잖아요. 일체삼위 봤습니까? 일체삼위는 없어요. 삼위일체에요. 성부, 성자 백날 이야기해도 마지막엔 일체라니까. 그 일체가 왜 나오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유일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다신과 싸우는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한분으로 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에 대해서 망해야 되는 거예요. 왜? 여호와 믿었기 때문에 망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한분, 예수님 한 분 이 둘 사이에 갱신, 새로운 창조를 계획하신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빠지고요. 인간이 이 관계 형성에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드님께서 이 땅에 와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다음에 죽은 아들 예수를 살릴까, 말까는 누구 권한이냐 하면 순전히 하나님 권한이거든요. 만약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안 살려주게 되면 예수님을 부활될 수 없어요. 그때까지 성령은 아버지 권한 속에 있었어요. 예수님께 있었던 게 아니고. 성령께서 죽은 예수님을 영으로 살려주지 않으면 예수님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게 로마서 8장 9절에서 11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아버지가 안 살려주게 되면 예수님도 살 수 없다는 것. 그때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겟세마네 기도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 기도할 때 하나님 호칭이 아버지였어요. 아버지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Do you understand? “내 뜻대로 마옵시고”지요. 이 관계가 믿음이에요. 믿음은 반드시 뭐가 기반이 돼야 돼요? 주님이여, 하나님이여 호칭은 뭐든 좋아요. “제발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새벽제단에 가서 기도하면서 기도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여, 중얼중얼. 내가 이런 소원이 있고 기도할 게 많습니다. 그래놓고 이것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는 거예요. 한 세트로 묶어서 주여 이런 궁시렁궁시렁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절대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수련회 올 때 다 그런 기도했지요. 수련회 참석해야 되는데 참석한다는 내 뜻대로 되지 말게 하옵소서. 그런데 참석했다면 주의 뜻이죠. 그러니까 나는 이런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이런 소망을 갖게 하시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이러한 나의 모든 소원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말게 하옵소서.
성경에 보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눈에 딱 띠거든요. 그때부터 내가 주께서 기호 차원으로 다룬다는 생각을 못하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까 경험이나 기억하고 있는 그것에 근거해서 성경말씀을 기호로 보지 않고 하나의 단어로 보니까 행함으로 구원 못 받으니까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겠구나, “주여, 저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하지만 그걸 묶어야 돼요. 내가 믿음을 원한다는 이 뜻을 주께서 이루어지지 말게 하옵소서. 믿겠다는 말인지 하나님을 상대로 깽판 치겠다는 말인지 그런 뜻이 들지 않습니까?
2015년도에 개그콘서트에 나온 코너가 있어요. 깐족거리 잔혹사라고. 거기에 보면 유단잔가? 상대방과 상대를 하는데 폼을 잡거든요. 그러니까 저쪽에서 폼을 잡으니까 천천히, 천천히 다가와. 이러나싶을 정도로 천천히 다가와서 저쪽에서 이런 걸,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게 되면 이렇게 대하고 그다음에 명치를 빡! 끝. 그런데 그 뜻대로 되지 않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래? 하면 이쪽 사람이 당황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돌아가서 바람에 몸을 타듯해서 다시 옆구리를 빡! 끝. 주님께서 때려치우고. 그게 얼마나 인간들이 주님 앞에 깐족거리고 있는 거예요. 교회를 통해서 깐족거리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일자란 기호 가지고 끼어들면 안 돼요. 인간은 자기의 객관성을 담보하면 안 돼요. 자기 객관성을 담보하는 게 의학이고 바로 과학이잖아요. 생물학이고. 나는 누구냐? 현미경으로 봐요. 그럼 뭐 보입니까? 완전히 세포로 분해돼 있잖아요. 나가 없어요. 나는 악마가 붙을 때 나가 나와요. 그걸 가지고 악마밴드에요. 악마가 붙어서 줄줄이 거기 여자 붙었지요. 거기다가 남자까지 붙었지요.
독일동화에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피리를 부니까 동네 아이들 다 따라가는 거예요. 악마가 앞에서 피리를 부는데 그 가사 내용이 뭐냐? “네가 신처럼 되리라, 신처럼 되리라. 네가 기호로 일자가 되리라.” 그렇게 피리를 부니까 사람들이 다 따라가는 거예요.
창세기 10장에서 11장까지 보면 인간들은 뭐냐? 모든 인간들이 기호로, 그러니까 언어의 최종성이 기호입니다. 한 뜻으로 한 마음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1+1=2, 이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지요. 이걸 거부한 되바라진 아이가 있어요. 1+1=2라고 선생님이 가르치니까.
“사과 하나 있잖아. 또 하나 있지. 이게 몇 개인 줄 알아? 둘이야.” 누구나 다른 아이들은 동의하는데 되바라지게 여기에 대든 아이가 있었어요? 이름이 뭐냐? 에디슨이었습니다. 토머스 에디슨 어릴 때. “선생님 어떻게 1+1이 2이 됩니까?” 선생은 넘어가지요. 그럼 네 소원은 3이 되면 좋겠느냐는 이런 식으로. 수학과 그리고 과학만이 모든 주관적인 감정이라든지 이런 걸 배제할 수 있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여기에 이걸 한 장이라고 봅시다. 이쪽이 앞면이죠. 이쪽은 뒷면이고. 그러면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없지요. 차이가 없는데 인간은 무엇을 감당 못하느냐 하면 차이가 없는 앞면, 뒷면 물질로 봐서 종이 한 장뿐인데 모든 걸 물질로 다뤘을 때 거기서 튀어나오는 상상의 세계, 그리고 환상의 세계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또 봤는데 거기는 슬픈 같은 것도 없고 인간의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데 왜 인간의 모든 언어는 그냥 객관성 말고 어떤 감정적인 것이 많이, 감정이란 유령이 어디서 튀어나왔느냐? 설명할 길이 없지요.
어쨌든 간에 바벨탑에서 최종적으로 인간은 의견은 모아서 탑 하나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를 노리고 뭐를 했느냐 하면 거세해버렸어요. 탑을 거세해버렸어요. 탑을 없애버리고 한 것이 뭐냐 하면 할례입니다. 할례가 드디어 아브라함의 창세기 14장, 15장, 특히 17장에 할례를 집어넣어요. 네 육체 속에 남아있는 하나라는 것을 잘라버려요. 가위로 자르든지 칼로 자르든지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뭐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특징은 1을 지향하는 1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0. 옛날에 1이 있었는데 내가 신이 되는 게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그 객관성이 있을 때 믿으면 그 객관적인 것, 누가 봐도 하자 없고 완벽하게 진리라고 여겼던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들을 내가 추구했는데 나중에 그게 뭐가 되느냐? 제로가 돼요. 0이 됐어요. 빈자리가 된 거예요.
주식해서 돈 많이 벌었는데 갑자기 허망해졌어요. 뭐 허망해지더라도 한 번 되고 싶지요. 없어요. 텅 비어있어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버렸어요. 비어있을 때 비어있는 것, 이것이 뭐냐 하면 비어있다는 최종성, 그 최종성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약된 것, 언약된 것이 그 빈자리를 마저 채우는 것이 바로 천국이고 이게 창조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을 때 만약에 그 현장에 누가 같이 있어서 이야기를 들었다면 예수님께 마이크를 대고 인터뷰하고 싶어요. “만약에 아버지가 창세전의 약속 백날 해도 죽었는데 안 살려주면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막 묻고 싶은 거예요. 왜? 본인이 그러하니까. 본인은 어떤 인간이든 마지막 남은 공백에 접근은 되는데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해요.
마지막 남은 모든 것에 대해서 최종 진리를 아는데 접근하는 그걸 ‘미분소’라 해요. 뉴턴이 발견했다는 미분, 적분 이야기. 미분소가 모아져서 확률이 됩니다. 확률이 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확률하면 어떤 뉘앙스가 있어요? 대충 맞으면 맞는 걸로 치자, 이게 확률이에요. 대충 맞으면 진리인 걸로 치자. 그래서 이걸 정답으로 내놓습니다.
확률을 따진다는 말은, 확률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날아가 버리거든요.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통계상 많이 있는 곳에 출몰할 그러한 여지가 있다, 할 때 이것이 미시세계에서 이거는 진리라 치고 기계 한 번 만들어보자. 만들어보니 너무 잘 맞는 거예요. 너무 잘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분에다가 그다음에 확률,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 문명을 이루고 도시를 이루는데 이거는 진리 맞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은 마지막 주님께서 했던 최종적인 정답을 알았으니까 갑자기 정답을 아는 순간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제로가 아니고 뭐가 돼요? 우리가 모든 걸 알았구나, 하는 1이 될 거죠. 1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어요. 역시 악마밴드에요. 악마 맞아요. 네가 신처럼 된다는 게 맞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치하느냐 하면 이 1에 대해서 주께서는 아까 2로 대처한다 했지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1 가지고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압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고 확정된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나를 아느냐?”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아브라함을 압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내가 전에 아브라함을 만났는데.”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나이 오십도 안 됐으면서 어떻게 아브라함을 만났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를 모른다. 그래서 너희들은 죄 가운데 죽을 것이다.”
대화 내용을 보세요. 어떤 차원인지, 어떻게 차원이 어긋나는지. 네가 죄 가운데 죽을 것이다, 이렇게 하니까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우리는 이미 죄 용서받아서 죄가 없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너는 죄 안에 그대로 망할 거야.”
죄가 뭐냐 하면 선악을 따져서 악한 쪽이 죄고, 선은 의고, 이게 아니고 전혀 생뚱맞은 거예요. 죄 가운데 죽는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죄를 짓는다는 말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네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네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 존재에서 뭐로 가야 돼요? 존재에서 아까 뭐로 가야 됩니까? 기호.
존재에서 사건을 통해서 그다음에 기호에 도달해야 돼요. 나가 있는데 나는 비어있다. 세상은 있는데 세상은 비어있다. 그 비어있는 곳에 주께서 뭘 보내느냐 하면 불을 보내요. 불을 보내서 그 비어있는 곳을 비어있게 하지 못하고 뭔가 채워 넣은 모든 것을 불질러버립니다. 그걸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불세례라고 했어요.
성경에서 세례란 말은 어떤 환경에 뛰어든 것을 세례라 해요, 물세례는 물이 있는데 물속에 잠기는 걸 물세례. 불세례는 불이 있는데 거기에 뛰어드는 걸 불세례. 불세례가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 함께 뛰어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실 때 아버지께 저주받았거든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버림받음에 같이 뛰어드는 것, 뛰어들 때 그 제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현장에서 같이 뛰어들었습니까? 다 도망갔지요. 깐족거린 제자들. 천하에 예수님 잘 믿는다고 따라다니고 모든 걸 포기했다 하는데 아무리 포기해도 자기 자신을 제로로 만들 수가 없어요. 이미 1에 매료된 나 잘남에 매료된 인간이 나 없음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걸 처리해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자, 그렇다면 남아있는 것은 뭐냐 하면 창세기 12장, 벌써 창세기 12장까지 왔어요. 계속 반복할 겁니다. 뒤에서 초반부터 반복할 겁니다. 창세기 12장, 우산꽂이. 여러분 비 올 때 마트에 가면 입구에 자기 우산을 거기에 꽂지요. 밑에 구멍이 송송 나 있고 우산 꽂는다고요. 아브라함이란 게 뭐냐 하면 일하는 기호를 받아들여서 일하는 그 기호가 꽂혀있는 우산꽂이대로 활용되고 이용당한 것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성경이 꽂혀야 돼요, 우리 속에. 성경이 오면서 우리는 빈자리가 되고 그냥 그것을 성경말씀이 오게 되면 그냥 받아주면 돼요. 그러면 받아주면 뭐가 되겠어요? 1이 되고, 1이 기호의 마지막이고. 꽂히는 것은 뭐가 되고? 아버지와 아들만의 관계니까 이거는 인간은 못 끼어듭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 인간은 없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다시 말씀 안 드려도 되겠지요.
그때 인간은 없었고 그때 하나님이 예수님이 계심의 연장으로서 세상에 생명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게 성령이 있습니까? 이거는 요한복음 1장에서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나만 있으면 되잖아. 네가 왜 굳이 있어야 돼. 예수님만 있으면 창조주만 있으면 오케이라고 이야기해. 기다려. 내가 네 속에 꽂아줄 테니까.
그러면 1에 뭐가 꽂힙니까? 2가 꽂히지요. 만남이죠. 1+2, 더하기 하지 말고 그냥 만남이니까 별표, 1✩2 만나잖아요. 그러면 1은 어떻게 돼요? 1은 뭐로 바뀝니까? 0으로 바뀌지요. 0으로 바뀌면서 이 1이 새로운 자식을 낳아요. 이게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자식은 이삭이 되면서 아버지는 0이 되고 자식은 아버지 속성 따라 1로 돼요. 그렇게 될 수 없었던 0이, 도저히 0이 안 돼요. 그런데 0이 되고 자기 자신은 자식으로 이전돼요. DNA로 이전돼요.
이전되면 이 영향력은 2의 솜씨로 발휘해서 이렇게 된 거예요. 2가 찾아와서. 천사 세 명 찾아온 것 봤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종을 통해서 하갈을 통해서 자식 낳은 걸 뻔히 알면서도 내년 이만쯤에 일 년 뒤에 네가 자식을 가질 것이라고 했어요. 이삭이란 우산이 너한테 꽂힐 것이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1로 유지되던 사라과 아브라함이 텐트 뒤에서 뭐했습니까? ㅋㅋㅋ 웃었어요. 아주 깐족대기는 하여튼. 나이가 구십이 넘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천사가, “잠깐 봅시다. 웃었지요.” 시비 걸걸 걸어야지. 사람이 웃을 수 있잖아요. 이게 기호화되어 객관화돼야 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 과거에 의해서 자기감정이 개입된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일은 너무나 객관화돼요. 인간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네 복은 어디로 이전되는가? 이삭에게 이전돼요. 이제는 네 씨로 말미암지 않고 이삭으로 말미암아 만천하가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삭으로 넘어가는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0이 돼요. 아브라함은 무능한 자가 되죠. 이 무능한 자를 믿음이 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이 많이 아기 못 낳는데 낳았지, 죽은 줄 알았던 이삭이 살아났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주신 믿음의 실내용이에요. 1이 있는 곳에 뭐가 꽂혀요? 2가 꽂히는 거예요. 우리는 뭐다? 비 올 때 마트 앞에 있는 말씀이 탁탁 꽂히는 꽂이 대, 그냥 우산 받아주는 그런 역할, 감당할 수 있을 거죠? 여러분, 이거 감당할 수 있지요.
말씀을 안 지킬 기쁨이 있지요. 말씀을 내가 말씀, 말씀이다. 손 떼, 손 떼. 내가 꽂을 거야. 말씀 손대지 마. 십계명 손대지 마. 십계명 너한테 찾아올 거야. 꽂아버려요. 꽂아버리면 뭐가 됩니까? 마리아처럼 나 임신하지 않았는데 임신했다. 말씀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사 마태복음 7장 봅시다. 마태복음 7장에 굉장히 무서운 말이 등장해요. 무서운 말인데 저는 감히 읽지를 못하겠고 누가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7장 18절에서 19절까지. 크게.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지막에 뭐로 끝납니까? “불에 던지우느니라” 비어있는 재료에 도시와 문명을 왜 그렇게 건설을 많이 했느냐 말이죠. 은밀한 진리가 엄밀한 계산에 의해서 로켓 쏘아올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쓸데없는 짓을.
문제는 그게 악마밴드라는 거예요. 악마는 자꾸 우리한테 일을 강요해요. “중요한 것은 너야. 이 세상에 소중한 것은 너밖에 없어. 정신 차려!” 정신 차려 할 때 손가락을 어디 대야 돼요? 머리에 대잖아요. 내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내가 치는 거예요. “정신 차려, 인간아! 네가 손해 볼 이유 없잖아. 너는 아무리 무너져도 일어서야 돼.” 이걸 우리는 매일같이 악마한테 이러한 잡념을 받습니다.
이걸 주일 낮 설교에 유골함 속의 난반사라 했어요. 악마의 소리에요. “너는 잘했잖아. 선악과죠. 잘했잖아. 훌륭했잖아. 착실했잖아. 열심히 했잖아. 자식 넷 잘 키웠잖아. 그만하면 네가 누구한테 흠 잡힐 리 없어. 제대로 밀고나가야지. 언젠가 네가 행복해야지. 그리고 네가 신앙생활 잘해서 천국 가야지.” 악마가 계속 그 소리를 하는 거예요.
네가 소중하니까 네 앞가림은 네가 챙겨야지 누가 챙겨? 자식이 챙겨줘? 없어, 없어. ETF나 넣어라. 마지막 그렇게 돈 놓고 돈 먹는 재미라도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지. 네가 신이고 네가 왕인데 이제부터 네 인생 하나하나를 카운트하는 즐거움으로 살아. 수입 얼마 들어왔지, 이런 것.
인간의 학문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항상 정확한 걸 기대하게 했어요. 정확해야 오류가 없으니까. 계속 무한소를 쪼개고, 쪼개고 더 정밀하게, 정밀하게 완벽한 코스, 절차 이걸 남들이 모르는 더 완벽한 절차,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절차를 향하여 경제적이죠. 경제적이고 과학적인 마인드로 실수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쪽으로 온 정력을 거기다 소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경리부 직원이에요. 자기 계산에 굉장히 민감하고. 부모님 돌아가셔도 부조금 얼마 들어왔는지 계산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결혼식하면서도 한 끼에 이십만 원하는데 십만 원 부조한 인간 누구야, 찾아내고. 인간의 감정, 인간의 정, 인간의 우애 그런 것은 돈으로 대체되는 세계에요. 돈이 말해주는 거예요. 돈은 카운트가 있어요, 숫자가 있어요. 모든 게 숫자화로 일률적으로 돌아가는 세계에 만약에 거기서 숫자 계산 안 하면 밀리고, 밀리고 또 밀리게 돼 있지요. 끝까지.
그렇다면 준비된 창세기 12장이 뭐냐? 대립의 등장이에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받는다는 우산이 꽂혔어요. 이 대립의 등장은 창세기 4장 가인에게 먼저 주어졌어요. 창세기 4장 15절. 동생을 죽인 형에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립니다. 벌을 내릴 때 가인이 하는 말이, 이 벌은 나한테 너무 심합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 벌이 뭐냐 하면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게 벌이었어요.
그 벌이 뭐냐? 대립이 조성된 환경 속에 아무런 낯선 이방인으로서 던져지는 게 벌이었어요. 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15절)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벌을 주시면서 가인을 사용하신 거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과 연락이 가능한 동생을 죽인 죄를 하나님이 기어이 죽이지 않아요. 죽이지 않고 가인을 시조로 해서 교주로 해서 가인의 종교를 이 땅에 확산시킵니다. 확산시키면 그때 가인은 그 도시를 어디 세우느냐? 에덴의 동편에 세우지요. 이게 뭐냐 하면 수직적 구조에서 드디어 평면적 구조로 모든 게 다 바뀌어요.
바벨탑 사건에서 사람을 쫓아낼 때 퍼져버려요. 마치 농부들이 씨앗 뿌리듯이. 평면적 구조에다 씨앗을 뿌려버리죠. 모든 인간을 이 세상에 막 뿌립니다.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뭐냐? 인간들은 수직적 구조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하늘에서 온다는 그 수직적 구조의 민족과 그냥 사람만 다루는 사람만 상대하고 카운트하고 좋은 사람만 만나면 나는 행복하고 성공한다는 평면적 구조와 대결구조로 나갑니다. 대립구조로 나가요.
거기서 많은 인간들이 출생을 하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은 태어나면서 어느 체제에 들어간다? 태어나면서 경쟁체제에 쏙 들어가요. 이미 출발할 때부터 대립구조에요. 이게 뭐냐 하면 가인이 받은 징벌의 연속성이죠. 가만있으면 굶어죽어요. 저 정확하게 돈 버는 절차, 더 쉽게 버는 절차. 어떤 AI가 주식으로 돈 벌게 하는데 더 효과 있더라는 그 연구.
이런 걸 탐구해서 이 평면에서 이 대립구조에서 내가 제대로 좀 더 높은 곳에서 카운트를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그 자리, 위치를 확보하는 것, 그게 바로 우리들이죠. 누구야 너? 가인입니다. 가인의 반복, 되풀이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가 처한 이 세상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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