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그리스도 안의 창세기: 해석항쟁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렇게 있게 하고 모이게 하신 주님을 위한 귀한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남겨준 그 말씀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는 유일한 증거가 다가왔으니 증거가 되었으니 저희들 증거를 주님의 존재와 더불어서 인수할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창세기합니다. 창세기에 성경 자체 안에 모순이 담겨있습니다. 어떤 모순이 담겨있냐 하면 창세기 1장, 그다음에 2장, 그다음에 3장, 그다음에 4장 이 자체에서 어떤 모순점이 여기 놓여 있느냐 하면 1장이 이렇다, 2장이 이렇다, 3장이 이렇다 하면 아무 문제없는데 여기 3장에 와서 ‘인간이 범죄 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인간이 범죄를 해버리면 그다음에 범죄한 상태에서 1장, 2장, 3장, 시간이 이렇게 흘렀기 때문에 범죄 된 상태에서 2장, 3장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죄 했기 때문에. 범죄 했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을 한다면 이 해석은 엉터리입니다. 해석이 누가 하느냐 하면 범죄 한 이후에 범죄자가 해석했잖아요.
범죄 했다는 것은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오류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오류인 입장에서 “그래, 천지를 어떻게 창조했지?” 그걸 왜 묻느냐 말이죠. 니 주제나 파악하세요. 너 자신이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에덴동산이 이러니저러니. 이것은 3장에서 2장, 1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3장에 와서 천지창조가 2장에서 궁금하다는 것은 상당히 건방진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범죄 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관찰, 해석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3장에 인간이 범죄 했다는 것은 누구 생각이냐 하면 성경의 생각이고요. 창세기 3장에서 비로소 인간은 눈이 밝아졌다.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이제 좀 정상이다. 이제는 세상을 인간중심으로 내다볼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1장, 3장에 대해서 인간들의 일방적인 이 해석에 대해서 결국은 뭐냐 하면 ‘해석항쟁’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하는 성경 해석과 그다음에 항쟁이니까 대결하는데 인간 해석과 무슨 해석과 대결한다. 문제는 물음표로 돼 있는 이 자리에 없어요. 인간들이 인간들끼리 물어보고 의논하고 해석을 창세기 1장은 이렇고, 2장은 내리면 그만이에요. 인간 해석 이것이 전부에요. 인간으로부터 와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끝나면 끝나는 겁니다.
인간 해석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관찰자 해석인데, 관찰자 해석이 바로 과학이잖아요. 과학의 특징은 뭐가 없어요? 중보자가 없어요. 중보자 그딴 것 왜 필요한데? 우리가 관찰하고 우리가 분석하면 끝나지 중보자가 왜 필요하냐? 여러분, 중보자 필요합니까? 여러분들 라면 끓이는데 중보자가 필요합니까? 라면 끓일 때는 삼양라면이나 신라면, 농심 거기서 제공한 설명서, 레시피대로 하면 돼요. 중보자님 어떻게 라면 끓입니까, 이걸 기도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기도할 필요가 없지요. 내 일 내가 알아서 하면 되지요.
창조과학회라는 게 뭐냐 하면 해와 달을 보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거예요. 저 별과 저 해는 도저히 인간으로선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창조과학회에서 뭐가 빠졌어요? 중보가 빠졌지요. 그러면 저 해와 달과 산천은 하나님께서 만들었다, 이거는 예수님 입장에서 중보자 입장에서 어떻게 돼요? 옳은 해석이에요, 거짓말입니까? 항상 두 개만 이야기하는데 답변해보세요. 천지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말이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에요? 틀렸지요. 틀린 거예요.
천지는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저 하늘과 땅은 하나님이 만들었든지 아니면 우주가 에너지의 변동에 의해서 저절로 생겼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게 정답이죠. 우주를 설명하는 인간이 바로 여기 있다. 유일한 해석자는 누구밖에 없다? 인간밖에 없다. 이게 끝이에요. 인간사에 이게 진리라고요. 인간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면 그 말은 맞다. 왜, 왜 맞습니까? 그거는 인간이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맞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사는 것은 해석을 내리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 해석 중의 하나가 천지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들었으면 기가 찹니다. 이게 지 주제파악도 못하고 어디 내 이름을 거기다 거론하느냐. 하나님께선 그것을 받아주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뭐가 빠졌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중보자가 빠졌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보낸 자, 중보자. 예수님은 이 하늘과 땅을 뭐라고 이해했는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들리는 게 아니고 우선 그걸 들어볼 용의가 돼 있는가?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지 들어볼 용의가 돼 있는가? 들어볼 용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인간의 검증을 먼저 거치고 난 뒤에 “그래 당신은 메시아구나. 당신의 의견을 이야기해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뭐든지 인간에게 검증받지 않은 것은 인간세계에서 용납을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네 글자로 써볼게요. 아까 네 글자가 뭐냐 하면 ‘해석항쟁’이죠. 해석항쟁, 다툰다는 말이죠. 해석항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뭐냐? 인류사인데 인류사에서 ‘재판절차’하는 거예요. 의견에 대해서 해석에 대해서 그냥 “그래, 그래 너 옳다. 내 의견도 반영해 달라” 이 정도가 아니고 우리 재판 걸어보자. 갈 때까지 가보자. 고등법원이고 대법원이고 갈 때까지 가서 만약에 네가 틀릴 경우에는 영원한 심판 받을 각오돼 있나,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9장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심판이 있다(27절). 심판이 있을 경우에는 인간은 이미 거기서 죽었잖아요. 죽었다는 말은 뭐가 죽었다는 말이에요? 해석할 권한을 가진 자가 갔어요. 완전히 죽어버렸어요. 해석자가 없는데, 다시 말해서 피고가 없는데 재판이 열리는 겁니다. Do you understand?
내가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나를 변호할 수 있는 당사자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당사자가 없는데 심판이 이뤄지는 거예요. 그러니 그동안 너무 말이 많았다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범죄 한 주제에 천지는 하나님이 만들었고, 어떻고 뭐 메시아가 오고 그러한 이야기를 감히 입에 담아서 인간이 이게 옳은 성경해석이라고 내놓은 그 자체가 “저 인간 없애버려! 저 인간 없애고 우리 재판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인간 없애놓고 재판하는 거예요.
자꾸 해석항쟁, 재판절차, 네 자지요. 일부러 또 네 자 나옵니다. ‘인간배제’ 사자성어 간단한 거죠. 인간을 철저히 배제한 상태에서 재판해버립니다. 인간배제, 재판절차 이유는 뭐냐? 해석 잘못했음, 이러한 경로를 밟게 됩니다. 자, 인간인데 자신의 운명, 이것도 네 자로 ‘자기운명’에 있어서 본인이 운명에 관여가 안 됩니다. 인간 배제하니까.
자기운명에 인간이 관여를 못하니까 이 사실을 접하고 난 뒤에 인간이 기분이 좋습니까, 아니면 기분이 굉장히 불쾌합니까, 유쾌합니까? 내가 배제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누가 나를 재판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기분이 썩 나쁩니까, 아니면 속 시원합니까? ①기분 나쁘다, ②속 시원하다, 몇 번입니까? 이게 하나님께서 속 시원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궐석, 그러니까 피고가 없는 상태에서 재판을 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그냥 우리가 수용하면 되잖아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어떻게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런데 내 대신 걱정해주겠다고 나서는 존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고소자, 그는 누구냐 하면 악마, 뱀이에요. 뱀이 누구 편을 든다고요? 인간 편을 들어요. 네 운명인데 네가 한 소리해야 될 것 아니냐. 이렇게 해서 어쩔 수 없었다든지, 나는 그 점까지는 고려 못했다든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든지 뭐 그런 걸 해야 되지 않습니까?
내 인생은 뭐 거창한 건 아니고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지키기 위해서 나는 원수 갚는 것보다 딸내미를 지키겠다, 누가 이야기했어요? 김 부장이 이야기했죠. 북한에서 내려온 김 부장이 이야기한 거예요. 원수 갚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딸내미를 지키는 것이 나의 행복이다.
그래서 지금 사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해석항쟁을 하는데 첫 번째, 그다음에 재판절차, 세 번째 인간배제에서 해석항쟁에서 내가 배제되지 않고 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이 시발점이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입니다. 나도 좀 안다는 거예요. 지식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무슨 지식?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이런 지식을 내가 확보했으니까 써먹어야 될 것 아니냐, 라는 쪽에서 악마는 인간 편에 서서 계속해서 부추기는 거예요.
부추기기 때문에 인간의 매 행동 하나, 그리고 말씨 하나에 대해서 뭐가 따라오느냐 하면 옳게 했어, 그르게 했어? 바르게 했어, 나쁘게 했어? 이걸 계속해서 악마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면서 제대로 해야지. 이건 잘했네. 앞으로 복 받을 거야. 이거는 못했네. 너 벌 받을 거야. 계속해서 따라붙어요. 이걸 빨간 걸로 쓸까, 안 그러면 까만 걸로 쓸까? 어느 게 낫지요? 이게 선악체계 아닙니까. 이게 마귀가 한 거예요.
뭘 빠뜨렸냐 하면 빨간 걸로 하던 노란 걸로 하던 파란 걸로 하던 간에 재판에 있어서 뭐가 빠져요? 내가 빠진다고요. 내가 빠져요. 내가 빠지는데 빨간 건들 무슨 도움이 되고, 파란 걸로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서 악마는 항상 네 주장을 내세워야 된다. 그게 바로 나의 정당성이죠. 나의 의가 되는 거예요.
너의 의로움과 너의 정당성을 어떤 순간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 그래서 아뢰게 되면 하나님께서 재판하는데 참작해줄 수 있을 것이다. 형을 한 20년 때려야 되는데 10년으로 감형해줘라. 왜? 스스로 자기 잘못을 반성하니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까 선한 티를 내야 되지 않습니까. 근데 문제는 지옥에서 감형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무한이기 때문에. 형벌을 무한히 받기 때문에 무한대에서 15년 감형해도 무한이에요.
무한은 인간이 개입한다. 인간이 끼어들어서 1, 2, 3, 그다음에 쭉쭉 나간다. 인간이 카운트할 수 있다. 카운트가 가능한 것, 이걸 가무한이라 합니다. 끝도 없어요. 7526 다음에 27 또 나오겠지요. 한도 끝도 없어요. 이게 보통 무한할 때는 이것을 무한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야아 인간은 안 돼, 안 돼. 끝이 없어, 아무리 헤아려도 인간의 수로는 모든 걸 헤아릴 수 없어.” 이럴 때 인간은 자기의 한계와 자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데 이런 가무한 말고 실무한이라는 게 있어요.
실무한은 뭐냐 하면 무한 자체를 하나에 인간이 다룰 수 없는 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실수. 실수는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고 수학에서 숫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실수 또는 무한수 전부를 하나에 묶는 집합으로 다룰 때 이 무한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걸 실무한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거에요. “무한? 나와. 나와 한 판 붙자.” “무한? 해석해주겠어.” 이런 거예요.
무한을 다룰 수 있고 해석해버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신은 무한이잖아요. 그 신도 우리 손아귀에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 손아귀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운명이라든지 내 미래에 대해서 신에게 맡기기보다는 우리가 신을 해석해서 정답을 내리게 되면 신도 그 정답에 꼼짝 마라, 해서 “아하 안 되겠네, 안 되겠어. 쟤 천국 보내. 정답을 알아버렸네” 해서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다는 거예요. 어때요? 그런 아이디어가 더 낫지 않습니까?
허겁지겁, 헉헉거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못할 주제에 지키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전체를 내가 딱 손아귀에 쥐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마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어떻습니까? 그게 바로 운명이라는 것은, 내가 빠진 상태에서 일방적인 재판 받는 것보다도 내가 한 소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 이것이 나한테 더 안심이 되고 내 미래에 대해서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인간이 신을 어떻게 장악하는가? 그 방법 알려드리겠습니다. 1이죠. 일에서 다수가 나오죠(1 → 다수). 일에서 변화하니까 다수가 나오는 겁니다. 이 다수부터 차곡차곡 들어가는 거예요. 각개전투, 드디어 마지막 진지를 향하여 돌격하는 거예요. 돌격하면 다수에 있는 것을 모아요. 다수를 모아서 多 ‘많다’에요. 많다를 정리하는 겁니다. 정리한 후에 뭘 찾느냐? 패턴을 찾아요. 법칙, 원칙, 패턴을 찾아서 그 패턴을 유발한 최종적인 뭐예요? 영어로 One, 수학으로 하면 일자.
최종적인 것을 딱 도달하면 어떻습니까? 세상은 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다수를 수렴해서 마지막 1에 도달하면 우리는 드디어 신이 갖고 있는 지식을 몽땅 어떻게 돼요? 다 낚아챈 게 되겠지요. 그러면 이 지식을 어디에 담는가? 내 두뇌 된 머리에 담으면 되지요. 그리고 담고 그다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믿습니다, 라고 반복적으로 고백하게 되면 어때요? 신도 우리 손아귀에 쥐잖아요.
그렇다면 인간들의 이러한 해석, 여러 가지 변화를 하나로 묶는데 그리스신화에서는 묶는데 바보같이 실패해서 신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그리스-로마는 일신이 아니고 다신이 돼요. 이거는 한국도 신라시대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힌두교도 마찬가지로 신들이 많아요. 상당히 많습니다. 짜증이 나요. 헷갈리니까. 이걸 하나로 통합을 해보자. 어떻게? 차근차근. 아는 것부터 차근차근.
이걸 얼마 전에 강남강의에서 했지요. 레고블록. 아이들 장난감에 딱딱한 블록이 있지요. 기초를 블록으로 딱딱 두는 거예요. 가장 정확한 것, 가장 명확한 것 두고 그 위에 또 쌓고, 그 위에 또 쌓게 되면 기초부터 하자 없이 완벽, 완벽, 완벽, 완벽a, 완벽b 차근차근 쌓게 되면 그 위층에 있는 건 어떻게 돼요? 완벽에 기초해서 정확하게 완벽, 완벽을 계속 추가시키기 때문에 전체 이론은 어떻게 돼요? 하자 있어요, 하자 없어요? 하자 없지요. 완벽이죠. 그것을 무한으로 늘이는 거예요.
무한으로 늘이게 되면 무한 전체를 하나의 집합으로 잡고 그 무한에 있던 동일한 법칙을 내가 손아귀에 쥐게 되면 나는 뭐가 됩니까? 이제는 신마저 정복한 누가 신이에요? 내가 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신이 되겠지요. 인간들이 이걸 하지 말래도 지금 못 말려요. 이걸 계속 하게 돼요. 신학이나 철학도 마찬가지고. 인간들은 계속해서 탐구해나가면서 이것 하게 돼 있습니다. 이걸 중지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운명과 미래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이걸 모르면 난 무너지니까.
내가 오류가 있다는 말 안 해요. 내가 모자란다, 무지하다, 부족하다 이 말을 해요. 무지하고 모자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내가 잘못되었다’ 이 말 하고 ‘내가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이 말의 차이가 뭐예요?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토대부터 엉터리란 말이고,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말은 지금껏 내가 별 하자 없는데 아직까지 지식이 모자라서 더욱더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 나는 완전한 자가 된다, 이 이야기잖아요.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가 뭐냐? 하나님의 대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오래 기다렸습니다. 우선 오랫동안 기다리고 뭐하고 간에 지금 인간들이 뭘 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이걸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하나님의 일은 이렇습니다. 1장, 2장, 3장 쭉쭉 나가잖아요. 3장에서 사달 났지요. 인간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면 1장, 2장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1장, 2장, 3장, 4장에서 이게 신약에 와요. 신약에 오면 하늘에서 누가 와요. 누가 오겠어요? 예수님이 오시겠지요. 예수님이 올 때까지 1장, 2장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공백이 돼요. 비어있어요. 1장, 2장이. 이걸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걸 누가 주장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주장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장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의견과, 아까 해석항쟁이라 했지요. 해석을 만났는데 유대인들이 누굴 죽이느냐 하면 예수님을 죽였어요. 뜸 드릴 것 없지요. 바로 이야기할게요. 1장, 2장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만들었데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그 말씀이 누구에요? 예수님이죠. 이게 유대인들이 환장할 노릇이에요.
천지창조를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아니야. 내가 만들었다”는 거예요. 네가 뭔데? 예수님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나를 봐도 내가 누군지 모르게 돼 있다는 거예요. 왜? 창세기 3장 때문에. 이미 인간에 오류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안다고 우기지만 막상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 왔을 때 그들은 육신만 봤지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럼 몰랐으면 내 쪽에서 잘못됐구나, 이러면 되잖아요. 그게 안 돼요. 인간에게는 자기 잘못이란 게 성립이 안 됩니다.
여기 A4용지가 있거든요. 하얗지요. 이 뒤에는 글자가 있어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이 A4용지의 하얀 부분과 글자 부분 그 차이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이 앞면과 뒷면 사이에 차이에 뭐가 들었어요?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뒤쪽도 앞면이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 앞면, 뒷면이라는 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이 말이에요.
현실 뒷면에 현실이 있다고 본 거죠. A4용지 뒷면에 A4용지의 이면이 있다고 본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뒷면에 아버지 계시니까 “예수님, 잠깐만 뒤돌아보세요.” “뒤에 뭐?” “어, 아버지 계시네?” 이래 볼 수 있어요? 못 보지요. 인간들은 현실에서 추상은 끄집어내도 현실에서 진리는 끄집어낼 수 없어요.
인간은 현실 속에서 추상을 끄집어내는 데 이 추상은 현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느낌에서 이 추상이 나온 겁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것, 슬픔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 진리가 5kg에 얼마씩 합니까, 시세가? 없지요. 손에 없지요. 추상이죠. 심지어 나이라는 게 어디 있어요? 신체가 늙어가는 것은 물질이지만 나이라는 것은 누가 정한 거예요?
인간의 추상적인 의식, 수학에서 나온 거잖아요. 이 추상이 진리라는 것을 인간 말고는 증명할 길이 없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인간이 죽으면 어디 가느냐? 죽으면 흙이 된다. 흙이 된다면 지금까지 흙 되려고 살았나? 아니야. 천국 가려고. 천국이 어디 있는데? 천국 본 사람이 누가 있어요? 없지요. 없는 것은 현실에서는, 수학에서 말하는 없다는 것은 구라라는 뜻이에요. 거짓말이란 뜻이에요.
누가 고린도후서 3장 18절을 읽어보세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육으로 된 신체를 갖고 있는 육의 인간이 예수님의 영광된 부활의 영광된 몸으로 바뀐다는 거예요.
참 기분 되게 좋아요. 교회 나오길 잘했다. 왜? 결국은 우리가 부활의 영광이라는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내가 이 몸이 맛이 간 게 아니고 썩어가는 이 몸이 다가 아니고 뭐가 기다리고 있어요? 부활의 영광된 몸이 있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오는 약속, 이 말을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죽여서라도 뭐는 보게 하겠다? 영광된 부활을 보게 하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해석은 간단해요. 네가 살든 죽든 모르겠고 나는 너를 가지고 예수님 부활의 영광처럼 너희도 부활의 영광을 보게 하겠다, 라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이죠. 그러면 아까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뭐가 철저하게 배제됩니까?
내가 어떻게 빨간 걸로 할까, 파란 걸로 할까? 집에서 뭘 했고, 뭘 했다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과 추상적인 그런 모든 것은 이 말씀 안에 너를 죽여서라도, 죽이는 것은 우리를 완전히 무효로 돌리는 거예요. 죽여서라도 부활의 영광된 것으로 내가 만들어내겠다는 이 선언에 우리가 거기에 보탤 수 있습니까? 우리의 행동이 보탬이 돼요? 택시 안 타고 버스 타고 다닌다고 해서 영광이 빨리 되고 그런 게 있습니까? 답답해 죽겠네. 답변해보세요.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썩어가는 몸을 부활이 될 수 있도록, 심지어 죽여서라도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보탤 게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아니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기뻐요, 안 기뻐요? 기뻐요. 기쁨을 넘어 감격스럽지요. 그 감격스러움의 요소에 누가 빠졌어요? 내 행함이 빠져있지요. 그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금 몇 분 됐어, 도대체? 40분 다 돼가네.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해석을 왜 해요, 해석을. 안 하면 되지. 성경해석을 안 하면 되지. 해도 안 해도 상관이 없잖아요. 괜히 해놓고 지 잘난 척하잖아요. 방금 고린도후서 3장 18절 너무 감격스러워요. 그럼 문제 또 나갑니다. 수학 푸니까 감격스러워요? 생물학 박사가 새로운 논문 쓰니까 감격스럽습니까?
특히 예술이나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무서운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평단의 비평’입니다. 소설 작품을 냈는데 평론계에서 문학계에서 어떻게 평하는가? 이거는 아주 오금이 저릴 정도로 공포스러워요. 어떤 미술작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미술계에서 평판이 어떻게 되는가? 좋게 나오는가, 나쁘게 나오는가? 음악계에서 피아노 연주에 대해서 저 임윤찬은 피아노를 잘 치는 게 아니고 유일무이하다. 뭐 이러한 평을 받았으면 임윤찬과 그 팬들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이게 다 어디서 나왔어요? 평단의 비평이잖아요. 자기가 속한 자기들만의 전문가집단이에요. 전문가집단에 소속된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전문가집단에서 어떻게 평하느냐가 우리가 기분이 업되든지 안 그러면 기분이 완전히 다운되든지 하지요. 그런데 아까 고린도후서 3장 18절, 아예 우리를 죽여 놓고 주님이 부활된 것처럼 너도 부활로 만들겠다는 주님의 선언에 대해서 세상의 평단의 비평이 의미 있습니까? 없지요. 백화점에서 유명하다. 그런다고 부활의 영광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세기 1장, 2장을 공백으로 비어놓는 거예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범죄 한 인간이 주제넘게 하나님이 창조를 했니, 안 했니, 며칠 만에 창조했느냐? 7일은 너무 짧은 것 같아. 적어도 45억년으로 잡자, 52억년으로 잡자 이런 것. 그렇게 어떤 해석을 내놓든지 그거는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에요. 인간이 끼어들면 안 돼요. 창세기 1장, 2장에 대해서.
방금 제가 창세기 1장에 대해서 인간은 끼어들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장에 대해서 하나님께선 그 해석을 비워 놔라 했어요. 왜? 3장에서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다시 과거에 대해서 내 기초가 어떠니 해서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공백, 비어있다.
비어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없다’로 이해해요. 이것 잘못된 거예요. 비어있는 것은 없다가 아니고 그냥 비어있는 거예요. 비어있다는 게 얼마나 쉬운 말입니까. 그런데 사람은 없다로 보는 거예요. 비어있다는 건 뭐가 있느냐 하면 어떤 그릇이 있는데 그릇이 비어있다 이 말이죠. 그릇은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없다로 해석해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지창조는 없는 데서 있게 했다. 이렇게 설명해요. 이거는 어떤 생각이냐 하면 인간들의 생각이죠. 왜? 본인이 있으니까. 본인이 있다, 내가 있다. 그런데 나는 어디서 생겼는가? 내가 없었을 때 있었는데 없었는데 주께서 나에게 말씀으로 있다 해서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는 있다는 이게 설명이 된 겁니까? ‘있다’에서 ‘없다’를 대비시킨 개념을 만들어놓고 없으니까 있는 거다. 이거 뭐예요? 네가 어디서 나왔는데? 없음에서 나왔대.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해서 없는 데서 있었다는 거예요. 내가 묻는 것은, ‘없다’를 거치지 않고 누가 너를 있게 했느냐는 거예요.
그럼 정답은 뭡니까? 신약의 누가 있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있게 하신 거예요. 없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장에 나와요. 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하다. 말장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장난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요한복음이 먼저 했어요. 요한복음 1장 2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또 속았다는 뒷소리하지 말고.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했지요. 그런데 있다는 누구 소관입니까? 인간 소관입니까, 하나님 소관입니까? 있다, 존재한다는 건 인간에겐 해당이 안 돼요. 이건 원래부터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있다가 붙는 거예요. 그분이 있음으로서 누가 있다? 피조물이 있는 거예요. 여기 없다가 왜 튀어나옵니까?
그 뒤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이 늘 항상 계시잖아요. 예수님이 늘 항상 계신 이상은 뭐가 성립이 안 돼요? ‘없다’라는 개념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네가 지옥에 있느냐, 아니면 천국에 있느냐로 설명해야 되지 ‘내가 없다’로 성립되는 게 아니에요.
니가 죽으면 지옥에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예수님의 자비가 없는 곳에 예수님의 저주가 있는 곳에 있어요. 나? 나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없음이 없습니다. 인간이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얼마나 그걸 강조하는지 뭐든 게 있음에서 있음으로 다가가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있음에서 있음, 있음에서 있음, 파생되어 있음, 있음, 있음 관계망, 복잡한 관계망 이게 뭐냐 하면 아까 한자로 뭐였습니까? 多 많이 있음.
많이 있음을 원칙과 패턴 만들어서 이걸 하나가 어디서 나왔는가? 우주가 어디서 나왔는가? 관찰하면서 우주가 어디서 나왔는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연적으로 중보자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있다’를 인간이하는 게 아니고 있다는 예수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있다’ 이 경우와 ‘예수님이 없는 곳에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없어진 적이 없어요.
태어날 때나 어떨 때나 항상 누가 관여했습니까? 예수님이 관여한 거예요. 그리고 그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을 회수하고 하나는 천국으로, 하나는 지옥으로 할당시키죠. 그러면 지옥 간 사람은 뭐냐 하면 계속 자기가 있다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거지 나사로 맞은편에 있었던 부자. 부자 지옥 가도 말만 잘하더라. “아이고, 목마릅니다.” 내가 거기 있구나. “어,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있네?” 사나죽으나 상관없이 계속 있어요.
한쪽은 악한 부활로, 한쪽은 선한 부활로 계속 있는 거예요. 없어지지 않아요. 없어지지 않는데 지옥 가는 인간들은 지옥가도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옥 가고, 성도는 살아 있어도 내가 있는 것보다도 주님이 있어서 그 결과로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도고. 여러분, 이게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워요? 아주 난해합니까? 난해한 것은 10분 뒤에 두 번째 시간에 할 거예요.
이 세상은 인간 중심으로 보는 것과 주님 예수님 중심으로 보는 것으로 봐야 되지 하나님 중심은 빠지세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겼기 때문에 실제로 이 땅에 오신 어떤 분 인간과 우리가 태어난 인간으로서의 나 사이에 해석에 어떤 차이가 되고, 어떻게 대립되는지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행한 일을 통해서 세상 전체를 다 설명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까 한 것처럼 그 설명한 걸 내가 꽉 쥐면 되겠네. 주께서 그렇게 설명이 돼버리면 우리가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 해석 안에 우리가 말려들어서 쥐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게 바로 감격이죠. 10분 쉽시다.
'so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 4강 죽은 자의 힘 (0) | 2026.08.01 |
|---|---|
| 3강 대립구조 (1) | 2026.08.01 |
| 2강 존재의 한계 (2) | 2026.08.01 |
| Ben 마이클잭슨 싱글 (0) | 2026.04.22 |
| Morning has bloken (0) | 2026.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