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260721 예수님의 그림자 A
강의 : 이근호 목사님
오늘은 사도행전 11장 전체를 해보겠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그 이방인이 말씀을 받는 게 왜 그렇게 생겨서는 안 되는 현상처럼 그렇게 간주를 했느냐 이거죠. 이방인들도 다 같은 인간인데 유대인 말고 다른 사람들은 왜 하나님 말씀을 왜 받으면 안 되는가?
그들은 유대인들은 어떤 코스가 있어요. 그 코스가 하나님이 율법을 줬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있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고 거기서 이스라엘이 성립됐다.
이런 코스, 이 코스를 통해서 떨어져 나간 것들이 있습니다. 개 같은 것들이라고 하죠. 이게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떨어져 나가요. 이방인들이.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된다는 말은 이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아서 온전한 이스라엘 되는 하나님의 과정 속에서 필수적으로 이방인들은 어떻게 해요? 하나님 말씀에서 배제돼야 되죠.
그러면 이들이 배제되면 이들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이들이 하나님이 지금 직통으로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줬잖아요.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구원받냐 하면 이미 여기 마련된 이스라엘에 합류 또는 귀속 또는 뭐 예속되는 식으로 그들은 구원을 받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되게 했다는 말은 여기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율법대로 오신 메시아로 인하여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받았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원의 본부입니다. 이게 본부가 되면서 이방인들은 그 다음부터는 이스라엘이 전도하거나 선교 전도하거나 선교를 함으로써 이방인들은 일단은 어디에 들어왔냐 하면 이스라엘에 여기에 합류돼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그 직통에 대한 그동안 하나님께서 했던 그 실적이 그 의미가 살아 유지되고 살아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이스라엘 배제하고 직접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받는 법은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노선은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니까 이것은 어떻게 돼요? 노선에서 이탈했잖아요. 다시 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준 이스라엘을 집중해서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필히 이방인들은 배제 대상이 돼야 된다. 배제. 그냥 너 줄게가 아니라 너는 안 줄게가 돼요.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뭐가 주어지지 않는다? 구원은 없다가 돼요.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시고 그 다음에 율법대로 복음에 오셔서 그래서 구원받는 것이 율법 없는 이방에게 율법 경로를 통하지 않고 바로 구원 준다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에게 주는 이 전통적인 노선과 모순이 된다. 이 말이죠. 맞지를 않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죠? 이방인이죠. 그러면 이방인이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이스라엘의 유대인 형제들로부터 선교나 전도받는 식으로 해야 돼요. 선교나 전도받는 식으로 해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요.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지 이방인의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지켜줘야 구약에서 하나님의 모든 일이 일관성을 갖추게 돼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딱 우리가 납득될 수 있도록 일관성 있게 일을 하시는구나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인도 합류시킨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가오도 살고 자존심도 살고 이방인들 개같은 이방들은 고맙습니다. 하고 이렇게 들어와서 다 우리 덕분인 줄 알아, 알았어? 동생들아? 예 잘 알죠? 뭐 이런 식으로 질서도 잡히고 이런 것을 생각한 거죠.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이방인 있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예수님 께서 내가 온 것은 이방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고 흩어진 내 잃어버린 양를 찾으러 왔지. 라는 말씀을 마태복은 10장에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 10장에 나온 그 말씀에 준해서 이방인 선교, 유대 이스라엘이 이방인 선교하면 되는데, 이방인이 이방인을 선교하는 것은 이것은 안 되지요.
누구 제가와 허락 누구한테 심사를 받아야 돼요. 예루살렘에 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터주대감들, 유대인 대감들에게 이게 하늘의 뜻 맞습니까? 아닙니까를 재가를 받아, 그래? 그렇다면 우리 허락하에 전도 계속해. 이 허락이 떨어져야 그 다음부터는 전도하는 이것이 전체적으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바른 선교다. 틀 잡힌 선교다. 그렇게 생각을 예루살렘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상한 이야기를 예루살렘에서 하고 있습니다.
(행11:2)2절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 때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너가 무할례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거 진짜야? 라고 베드로에게 따지는 거예요. 따집니다. 하나님의 우리 유대인에게 주신 율법의 그 가치와 그 의미를 그렇게 니가 함부로 짓밟고 무시하고 훼손할 수 있어? 이런거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을 구원할 때 조건을 달았어요. 뭐냐 하면, 예수 믿는 건 좋은데 할례도 함께 받아야 된다.
왜냐하면, 할례받았다는 말은 율법 안에 있는 모든 정신이 이스라엘이 할례받았잖아요. 형님들이 할례받았잖아요. 형님들이 하는 그 절차에 우리는 부록으로 그냥 뛰어들어가니까 일단 형님 받은 것도 하고 할례도 받고 그 다음에 예수님도 믿고 이렇게 하는 것이 전체적인 그림이 맞다는 거예요.
여러분 레고 있죠? 레고. 레고 쌓는 거. 애들 레고 쌓는 것 있잖아요. 레고 쌓는것. 어린 애들 레고 쌓아가지고, 어떤 장난감 집을 만든다든지 가구를 만들 때 거기 딱딱 아구가 맞죠. 그러면 레고 하나하나가 옳다면 레고 12개가 동원되고 20개가 동원돼서 지은 집은 어때요? 하자가 없죠. 아구가 딱 맞으니까. 그 밑에 레고가 뭐냐?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인 거예요.
유대인에서 하나님의 뜻에 딱 합당한다면, 고 합당한 원칙대로 다른 조각 레고 조각. 이방인 조각을 거기다가 걸치면 밑이 튼튼하고 밑이 안전빵이니까. 그거는 안전하게 하나님께서 보장한 분이 된다.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역사와 전통을 이렇게 하나의 기초가 되어서 위에 뭐가 섰든지 간에 바닥은 단단해서 믿을 만한, 신뢰할 만한 것이 돼야 된다. 그렇게 된 겁니다. 이들이 맞아요? 안 맞아요. 이들의 말이 주장이 둘 중에 하나라도 맞습니까? 또 시간 간다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맞아요. 이들의 주장이 100% 맞아요. 왜냐하면, 구원받는 이방인은 애시당초 없어야 됩니다. 율법에 의하면 율법의 취지를 높입시다. 그걸 분명히 드러냅시다.
그러면 이방인을 배제하잖아요. 구원받는 이방인은 없애야 된다. 구원받는 이방인은 없애야 됩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몸에 할례죠. 그다음에 예수 믿든 율법을 믿든 들어온다면 유대인 입장에서는 이방이라고 간주를 하지 않고 이게 바로 유대교의 완성으로서의 구원받은 사람으로 그렇게 인식하는 거예요. 이해하는 거예요. 이미 너는 비록 헬라인이지만 우리 유대인 되었어. 왜냐하면, 유대인이 순수 혈통이 아니거든요. 온갖 잡종이 다 있잖아요.
그런데 유대 지도자 입장에서는 유대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도들은 하나님의 할례, 몸의 할례와 그리고 율법의 완성, 단단한 레고, 레고의 원칙을 굳이 부술 이유가 없어요. 이걸 거부할 걷어낼 이유가 없다니깐요. 걷어낼 이유가 없어요.
만약에 칼빈주의 정통 개혁, 신학 칼빈이나 이런 합동측, 통합측 이런 칼빈주의 따르는 고신측 따르는 사람에게, 예 나는 그 뭐고 칼빈의 예정론 안 믿습니다. 나는 삼위일체 안 믿습니다.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100% 뭐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단이야.
우리 그 칼빈주의 정통은 뭐냐? 바로 삼위일체. 예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 단단한 레고죠. 단단한 원칙로 하고 거기서 사실 삼위일체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이론 십자가라든지 언약이든 거기서 파생된 그것을 믿되, 기본은 뭐냐?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봉하느냐?
니케아 회의 때 했잖아요. 니케아 회의. 그러면 물어봅시다. 니케아 회의. 그거 동의하면 구원 받습니까? 그거는 아니죠. 십자가로 구원받잖아요. 성경에 니케아 회의 성명서 내는 거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뜸들일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이방인을 없는 없다고 해서 이방인은 없어요. 구원이 안됩니다.) 없는 이방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을 구원을 시켜가지고, 이거는 유대인에게는 없어요. 없는데 시켜가지고 뭘 공격하느냐 하면 구원받은 유대인을 공격해버리는 겁니다. 우리 편에 합류해. 이게 이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거든요. 우리도 우리 구원받은 것은 기본이고 내 너희들 선별해서 넣어줄게. 영광인 줄 알아 이것들아. 그 다음부터 율법 존중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도 믿고 메시아로 믿고 이러면 너희도 같이 구원받는 사람 해줄게.
라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방인을 가지고 구원받았다는 유대인들을 그냥 처버립니다. 유대인들 처버려요. 어떻게? 나 이방이 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되는 사람 아무도 없다. 이방인처럼 되지 않으면 그건 구원받은 사람 아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 생긴 이방인, 유대인들이 말하는 이방인 말고 새로 생긴 하나님의 성령이 오심으로써 새로 생긴 이방인들의 특징은 둘 중에 하나예요.
둘 중에 1번과 2번 둘 중에 하나입니다.
1. 내가 여기 없다가 되느냐 아니면
2. 여기에 내가 없다가 되느냐.
말 장난감처럼 보이지만 이게 차이가 있어요. 앞에 주어가 있어요.
주어가 뭡니까? 나죠. 나. 나 구원 받았을까? 나가 앞에 붙으면 뒤에 무어가 되요? 네모난 데 여러 가지 붙어요. 내가 구원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내가 죽으면 천국 갈까? 앞에 요지부동처럼 버티고 있는 게 뭡니까? 나가 있죠.
그런데 2번 문장에 보세요. 여기 주인은 어디입니까? 여기에 여기에 아니고 여기에 여기에 내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여기에 내가 있느냐 없느냐가. 여기를 사도바울은 이걸 뭐라 하느냐, 이게 바로 예수안이에요. 예수 안에 내가 없는 자. 여기 앞에 내가 없는 자 앞에 붙입시다. 여기에 예수 안에 살아있는 내가 없는 자가 바로 성령받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상당히 어렵죠 상당히 어려워요 여기에 여기에가 주어예요. 여기를 그 다음에 객체의 다른 걸로 채우는데 살아있는 자로 예수안이라는 성령안이라는 여기를 채우는 것. 채우는 것은 주께서 거부해요. 그러면 어떤 자가 적정하냐? 하면 여기에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채우는 것은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예요. 죽은자. 고인이에요.
고인. 이미 죽은 자. 죽은 자로 쳐요. 그러면 죽었다고 해서 전부 다 예수 안에 들어가는 건 아니고요. 그러면 죽은 자의 모델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죽은 자의 모델.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만 했던 그 표준 모델이 있죠. 여러분 잘 아시죠?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인간 세계에서 이미 뭐가 되냐면 고인이 되었어요. 이미 죽은 자가 되었어요.
따라서 예수님에게 영이 온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누가 봐도 살아있는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뭐라고 하면 이미 죽은 자 고인으로 주께서 만들어 버렸어요. 바로 이 죽은 자와 죽은 자의 집합. 이게 뭐냐 하면 이 마지막 때에 이 신약 마지막 때에, 이게 바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구원받은 집단이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집단. 그러니까 교인과 교인들이 만날 때 성령받은 교인들이 만날 때는 전부 다 어떻게 만나느냐 하면 전부 다 영정 사진, 움직이는 영정 사진으로서의 만나는 거예요. 왜냐면 주님께서 이미 죽은 자거든요.
여기에서 대전강의 했는거 한번 여기서 같이 간단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전강의에서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로마서 11장 36절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고 분명히 했어요. 그런데 이 주님이 누구냐 하면은,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이미 죽임을 당했어요. 죽은 분이에요. 이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죽였잖아요.
죽였던 주님으로부터 죽었던 주님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이 노선 절차 주로부터 해서 이 절차에 이미 모든 인간들, 이 땅에 태어난 인간,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여기에 끼어들 수가 있어요? 없어요? 못 끼어들죠.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요. 살아있을 때 있다는 말은 다른 말. 아까 우리가 공부한 거 생각하면 반드시 자기가 뭐가 된다? 자기가 주어가 되는 거예요. 내가. 그 다음에 여기에 있다. 떠나버리면 나는 여기에 없다가 되죠. 여기라는 것은 여기 내가 아는 시간과 공간에 예속된 나예요. 여기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여기예요.
그런데 이 주께서는 주께서 성령으로 올 때는 주님만이 아는 이미 인간 세대로부터 고인이 된 분이 나름대로의 갖고 계시던 시간과 공간을 이끌고 성령이 오실 때 이끌고 여기에 같이 와버려요. 시간과 공간을. 죽은 자들만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성령을 통해서 이렇게 오니까 성령 받은 이 사람은 이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어요. 성령 받은 이 사람은 내가 곧 옛날에 율법에서 배제된 이방인, 바로 그 이방이었다. 내가 배제되어야 마땅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요. 율법에 대한 성령의 입장에서 새로운 해석이 나온 거예요.
아까 율법의 해석에 보면 유대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 그리고 몸에 할례 행했으면 아브라함의 약속대로 너희가 할례를 행하라 그러면 대대로 너희께 거룩한 민족이 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구원받으리라는 창세기 15장에 나온 그 약속을 그들은 자기가 주어가 되어서 그걸 받아들인 거예요. 그걸 받아들이면서 뭐였습니까? 이방인들은 뭐가 없다? 약속이 없죠. 약속 없으니까 여호와 없죠. 여호와 없으니까 율법 없죠. 율법 없으니까 성전 없죠. 그런데 유대인들 성전 있죠? 율법 있죠? 여호와 계시죠? 그러니까 뭡니까?
이방인들 개 같은 사람들이죠. 완전히 배제되죠. 거기다가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을 찾아왔지. 나는 이방인들의 고을로 가지 마라. 나는 이방인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하니까 그러니까 그 말씀을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그대로 자기 현재 있음을 자기 것으로 합류시킨 거죠. 받아들인 거죠.
그러니까 아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뭐든지 성령이 오시든 누가 오든 간에 일단은 유대인을 배제하고 이방에게 가는 법은 없다. 없는 거예요. 일관된 원칙이 있어야 되니까. 율법 주고 율법에서 유대인 만들고 유대인 구원하고 혹시 빈자리 있으면 이방인들 채우고 그 때문에 유대인들을 선교했고 너들 이방인 이제 포기하고 이제 어디 오라 우리 유대인인이 되어서 합류하라.
조건은 할례행하고 율법 존중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 믿고 이렇게 하라 한 거예요. 성령 받지 않는 유대인, 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특징이 뭐겠습니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죠. 성령은 안 받았는데 예수 믿는다고 나온 사람. 유대인들. 그들에게는 본인이 안 죽었죠. 본인이 안 죽었으니까 본인이 지켜야 될 율법이 있어요? 없어요? 있겠죠. 율법이 있겠죠.
그런데 율법이 있으면서 누가 도와준다? 우리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도록 도와 주시는 방식이 옛날 다윗 때, 모세 때 하나님이 우리 조상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방식과 일치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라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된 사람은 지금의 튀르키예나 지금 그리스 다니면서 선교를 할 때 주로 어디 가서 선교했어요? 장소가 어디입니까? 유대인 회당이죠.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를 했어요.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연히 배치가 되겠죠. 맞지를 않겠죠. 맞지를 않는다는 그것에 대해서 분노를 한 유대인들이 사도바울 잡아라 하고 로마 사람이 사도바울을 공격한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핍박 받은 것은 누구 한테 핍박 받냐 하면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메시아를 인정한다는 그들 유대인 성령 받지 않은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데 공격받을 때 그 공격의 내용이 뭐냐 하면은 사도 바울은 이제 율법이 필요 없다고 전파했다. 이거는 정통성의 위배가 된다. 똑같은 비난을 누가 받았냐 하면 예수님이 받았어요. 요한복음 7장이었는데. 요왕복음 12장도 그렇고.
왜 당신은 뭔데? 율법을 그렇게 무시하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 내가 너희들을 고소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들이 그렇게 신봉하는 모세가 너희들을 공격할 것이다. 쉽게 말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 보고 너는 왜 기존의 율법 해석과 다른 해석을 내놓느냐. 다른 해석.
그 다른 해석이 예수님이 내놓은 다른 해석이 뭐겠어요? 요한복음 8장 같은 경우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브라함의 자손? 내가 아브라함을 만났는데 이런 식이에요. 이런 식이에요.
내 만났는데? 너 같은 인간들은 아브라함 자손 아니라고 아브라함도 동의할 걸 왜? 그럼 누구 자손? 너는 마귀 자식이지? 예수님의 해석이 이런 식이에요.
그들이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존중하고 모세를 존중해서 나한테 체계를 세웠는데 그 체계가 헛발질이었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이게 가짜 목자들은 특징이 뭐냐 가짜 목자들은 자기가 안 죽으려고 하는 반면에, 진짜 선한 목자인 나는 양을 위해서 어떻게 한다했어요? 죽는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그들한테 왜 너는 산 채로 구원을 받으려 하느냐 그 문제예요.
왜?
산 채로 산 채로 이것저것 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그게 왜 그것이 지금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는 나와 이게 결이 안 맞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화가 안 되는 거에요. 세계관이 다르고 유대인들은 뭐냐? 살아있다는 것은 주께서 은혜 주셔서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이미 은혜를 받고 복을 받고 있는 증거가 되고, 따라서 우리가 판 인자는 은혜를 알아서 율법을 지키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뭐냐? 니가 보기에 살아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미 넌 죽었어. 이 말이거든요. 죽은 자가 뭘 해? 이미 죽어버렸는데 너는 왜 니가 죽었다는 것을 왜 몰라? 니가 안 죽어. 그럼 율법이 널 죽일 거야. 왜 율법이 우리를 죽이냐? 물으면 너희가 나를 안 믿거든. 예수를 안 믿거든.
지금 이 대화가요. 오늘날 신학계에 똑같이 신학계에도 똑같이 적용돼요. 신학이 뭡니까? 우리는 죽었다. 이런 신학을 본 적 있어요? 본 적 있습니까? 참 신학교 안 갔구나. 신학교 가신 분? 갔다 오신 분? 인간은 바리세인들이 부활을 믿잖아요. 인간은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런 것은 성경에 이런 게 없습니다. 성경 이런 게 없어요. 인간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게 아니에요. 죽었다가 고인이 되어서 살아나죠. 이 죽은 자가 죽은 자로 살아나요.
중요한 것은 내가가 아니라 어디 여기가 어딘가 어디서 살아있는가? 예수 안에서 살아있죠.
예수 안에서 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 와 죽었나니” 그 고인의 노선 있잖아요.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고인의 노선에, 고인의 영을 받아서 그 다음부터 내가 이미 죽은 자로 확정되었기에 더 이상 내가 구원받은 것은 율법에 지키는 행함이 아니고 성령의 은사와 선물로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갈라리아 3장에서. 그 성령이 성령을 보장할 수 있는 근거는 뭐냐? 십자가라는 거예요. 바로 살아있다는 인간이 예수님을 죽였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가 뭡니까? 고인들의 이미 죽은 자들의 만남이에요.
어디에 어디가 아니죠. 여기 새로운 시공간이니까. 공간 시공간이니까. 우발적으로 만나는 우발적으로 뭐 수련회 가야 교회입니까? 안 가고 살아 있으면서 우발적으로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음을 더 이상 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여기에 내가 없다는 말은 같은 말로 여기에 누가 계시다? 누가 계시다? 주님이 계시다.
딩동댕 전국 노래자랑 한번 봅시다. 송해 딩동댕. 여기에 주님이 계시다.
그런데 그 주님은 세상에서 이미 돌아가신 고인이다. 고인이 계시다. 그 주님이 계시면 그 주님이 계신 그곳에 누가 있어요? 그동안 인간들한테 철저하게 막혀있던 아버지도 바로 주님과 함께 계시다. 성전은 두 개인데 아버지 성전, 아들 성전 요한계시록 나와요. 그리고 나머지 예수와 함께 고인이 된 자는 그 앞에 이십사 장로부터 시작해서 흰옷을 입고 그들은 이 땅이 아니고 거기에 살아 있습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예 그게 그게 부럽지 않습니까?
사람이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은 그냥 살아있는 게 내가 주인공이 돼서 살아있다는 것은 항상 계산해요. 어느 게 내 이익이냐 손해냐. 얼마나 이 인간들이 어리석은지 목숨을 갈아 넣어. 목숨을 갈아 넣어. 대패 삼겹살 백종원이가 처음에 했다는 그러한 주장을 해가 그게 아니고 그전에 부산에서 일이 있었다는 거. 목숨 갈아 넣어서 목숨 부지하려는 시도를 인간이 갖고 있는 시공간 평생토록 이 짓하고 있어요. 이짓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있는 KBS나 뭐 여러 가지 방송들 채널 보세요. 전부 다 건강 이야기. 의사들 가운 입고 나와가지고, 건강 이야기 뭐 약도 정말 새로운 약을 새로운 약을 방송에서 이야기하게 되면 그 채널 바로 밑에 보면 홈쇼핑 비타민이 있어요. 방금 방송했는데 방금 여기에 매진되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느낌들 전부 다 누가 주인공이에요? 누가 살아있는 거예요? 직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지울 길이 없어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교회 다니면서도 교회가 아니에요. 왜? 교회 가봤자 내가 아는 내가 살아있을 때 경험한 시간과 공간 그게 그대로 거기에 다 들어있으니 이게 교회라는 거예요. 심지어 이거는 어린애도 예외가 아니에요.
그래서 노래 하나 가져왔습니다. 한번 봅시다
There is a point of my favorite song. 짝짝 이게 쥴리 앤드류스 가족 선생님이 되어서 애들 트랩 대응 애들 가르칠 때 나오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왜 이 노래를 했느냐 하면은 이제는 내가 노래를 불러야 되겠어.
여기 지금 내가 우울하거든요, 내가 우울해. 아이들이 다 천둥 치니까 가정교사 침대 하나에 다 떠나 가지고 선교사 집으로 다 몰려와서 천둥 친다고 숨어 있다 이 말이죠.내가 우울해, 또는 내가 무서워, 내가 아는 시공간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천둥을 치니까 무지에서 오는, 내가 알지 못하면서 오는 무서움, 공포, 그리고 이게 공간이지만 시간적으로 뭡니까? 앞으로 1개월 뒤에, 2개월 뒤에, 1년 뒤에, 2년 뒤에 혹시나 내가 암이 재발되지 않을까라는 그 무서움.
이게 뭡니까? 계속해서 내가 아는 시공간과 더불어 누가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있고 이것이 내 평생의 나의 주제가 돼요, 테마가 돼요.테마. 그래 놓고 뭘 믿어요? 예수믿는다고요? 그것은 로마서부터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나오는 모든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도바울의 편지. 진짜 요한복음까지. 전혀 이거는 그 세계에 못 들어가요. 내가 주인이 주인공이 된 이상은.
차라리 이제 구약이 더 이해하기 쉬워요. 구약이 구약때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뭐 하는 사람들이 기적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기적만.
그런데 신약은 그 기적을 누가 방해해요? 살아있는 내가 기적을 방해합니다. 그 기적이 뭔데요? 니 사는 걸로 보여. 거울 앞에 보아. 니 까부는 모습이 보이지? 그거 죽은 거야. 니가 움직이는 게 영정사진이 움직이는 거야. 너가 알고 온 시간과 공간은 이것은 세상에서 적용되는 시간과 공간이에요. 예수님을 죽였던 그 세대에 관한 겁니다.
우울해, 무서워. 같은 말 공포.근원적인 공포. 우울함. 뭐 좋다고 하다가도 집에 가면 갑자기 급냉으로 오늘 이렇게 좋았던 행복을 내일까지 유지될까? 유지 안 되면 나는 어떡하지? 이라는 염려 걱정. 이거는 그 쥴리 앤드류 선생님 마리아 선생님 애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에요. 그래서 마리아 선생님이 뭐냐 하면은 시공간적으로 우리죠. 우리에다가 네모를 해다가 여기다가 뭐냐 하면은 심리요법을 합니다. 어떻게 심리요법을 하는데 어떻게 하냐면 언어로 해요. 말로 한다고요.
말이 아이들 인식 속에 말을 알아듣는 의미의 수용체가 있어요. 수용체. 이 수용체. 가수들 뒤에 보면 등짝에 붙어있죠? 노래 마이크 있죠? 수용체잖아요. 수용체가 있는데, 이 언어의 의미의 수용체로 아이들은 그동안 커왔던 거예요. 부룩부룩 자라온 겁니다. 따라서 그들이 무섭다. 예 천둥친다 겁난다 할 때 그들은 하나의 중심 믿음직한 신뢰할 만한 언어를 내뱉을 수 있는 선생님을 찾아서 다 모인 거예요. 선생님이 어떻게 하냐? 하면
너가 아는 기억을 지워버려라. 네 안에. 네 안에 축적된 나쁜 기억들을 제거하는데 그냥 하면 안 지워지잖아요. 여기 뭐를 덮어요? 뭘 덮어서 요 기억을 지워버리면 이건 뭐냐 하면 선생님이 알고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 감정으로 인하여 자기 기억 속에 있는 무섭고 슬픈 자기만의 기억이 일순간 일시적으로만 정지가 되고 덮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쥴리 엔드류 선생님, 마리아 선생님이 제공했던 언어가 어떤 언어가 있는지 한번 봅시다.
장미꽃잎에 맺힌 빗방울, 어린 고양이의 수염, 반짝이는 주전자, 반짝이는 주전자와 따뜻한 털장갑, 그리고 잘 포장된 택배 꾸러미들. 택배는 뭐가 되는지는 몰라도 택배 왔다 하면 갑자기 기분이 업 되잖아요. 택배 왔다 놀러 갈 때 놀러 못 가는 건 택배 누가 가져갈까 봐 무서워서.
이런 것들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그 다음에 또 애들 그런데 이런 걸 또 했잖아요. 그게 애들 기억 속에 남죠. 남은데 그 말하는 순간에 애들은 그 말하는 순간에 그 시간 시공간이니까. 시간이 요건 몇 초밖에 몰라 뭐죠 이게 산뜻함 예 이 아름다움 그때 어떻게 돼요? 그거에 대한 즉각적으로 새로운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덮어써야 되겠죠.
크림색 조랑말 바삭한 사과가 사과 이래가지고 또 같은 말이 아니고 새로운 어휘를 동원해서 관심사를 더 새로운 조각들로 해서 계속해서 애들의 기억속에다가 기존 기억을 없애기 위해서 덧지르는 거예요. 초인종과 썰매방울. 그러니까 국수와 슈니첼(순이첼이 뭐냐 하면 돈가스예요) 고기를 얇게 썰어서 튀김하는 돈가스 그다음에 달빛에 날개짓하는 거위 여러분들이 애들이 슬퍼요. 고민돼요. 하다가 갑자기 그 달빛에 찬란한 달빛에 밤중에 호수에서 거위가 날개 짓을 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애들이 무슨 자기 화제를 확 바꾸면서 선생님 저거 한번 봐요. 이렇게 되겠죠. 그럴 때 기쁘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이런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또 이만큼 해도 애들은 또 금방 잊어버려. 그래도 슬퍼요. 천둥 한번 쳐요. 꾸르륵 치니까 슬퍼요가 또 소용없어요. 그것도 계속 무서워할까 봐 놓치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하얀 드레스와 푸른 머리띠를 한 소녀들. 소녀들 아름답다. 코와 속눈썹이 내지 않는 눈꽃들. 봄기운에 녹는 봄기운이 살살 녹아가는 겨울 늦겨울에 은빛 풍경 이런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When the dog bite, when the bee stings. when the feels sad. 그렇게 개가 물 때도 벌이 솔 때도 내가 슬플 때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생각한다면, 슬프지 않을 수 있지.
아이들이 대사에 보면 효과 있어요. Does it really work? 그럼 말이야. Of course you try you to sing to like. 너도 해봐. 그 어떤 걸 좋아하니? 애들이 이제부터 선생님이 이야기했잖아요. 이제는 애들이 천둥소리 배제하고 오직 선생님만 바라보면서 대화에 나서는 거에요.
선생님의 의식세계, 시공간 세계 이게 애들이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하는 말이 갯버들이 있어야 어떤 크리스마스, 어떤 토끼, 어떤 뱀 학교 안 가는 학교 안 가는 거 신나죠? 베개삼 전보 오는 거 생일 선물, 아무 선물 다 돈 또 아기 새. 이렇게 해서 갑자기 애들이 혼자 있을 때 쿵쿵거리던 천둥의 모든 시공간이 선생님과 든든한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서 일시적으로 아마 해소되죠.
해소되지만 선생님은 언제까지 애들하고 같이 살 수는 없을 거 아닙니까? 그날 밤은 넘어가겠죠. 결국은 지금 이렇게 선생님이 애들을 잘 달래줬고 자기 각자 기쁜 마음으로 상상하면서 가게 했는데 뭐는 안 빠졌어? 지금 뭐는 안 빠졌어? 애들이 갖고 있는 자아. 자의식 내가 주인공이고 추천한 이 사실은 빠질 턱이 없죠. 안 빠지죠?
읽으면 됩니다. 읽으면 나의 역사가 취미다. 나의 역사가 취미다. 나는 안 빠져요. 나는 항상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릅니다. 그러면 이 나를 빼려면 나를 빼려면 여러분 생각에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죽음의 시공간을 통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죽음의 시공간은 시공간이 무슨 시공간이냐 하면 이게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시공간이에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시공간.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시공간이 이 역사, 나의 역사에 오게 되면 나는 아무리 이 땅에 행복하게 살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게 뭐냐 하면 생명이 없다가 돼요.
죽음에 포위됐다. 할까? 죽음이 주위에 둘러싸서 죽음이 쪼아 예 쪼아요. 바짝 쪼는 거예요. 그래서 나이 많다고 해서 안 무서워하는 게 아니고 나이 많으면 많을수록 뭔가 죽음을 다른 젊은 사람보다 더 생동감 있게 느낍니다. 나이 15살, 20살 이런 나들의 죽음을 잘 느낍니까? 익스트림 스포츠 하면서 막 날고 계단 뛰어다니는 것은 그러면 어른들이 말리죠. 다친다 죽는다. 애들 뭐라 합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이거 한번 해보고 죽고 싶어요. 이런 거예요. 빚내서 주식하지 마라. 죽는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이왕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이런 거예요.
믿을 것은 누구밖에 없다? 내가 확실한 것은 내가 살아있다가 확실하니까 살아있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을 한번 이렇게 쫙 전개해보겠다. 이거는 자기 역사죠. 그래서 인간은 여기서부터 어떻게 그저 벗어나기가 힘들죠. 자 그런데 이게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이 참 고맙게도 인간들로 하여금 나이 10대, 20대 이걸 이 세상이 이걸 저지해버립니다. 이걸 저지해요. 이 세상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법이 있고 규칙이 있어요. 법과 규칙이. 법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자기가 살고 있던 타인과의 관계에서 법이 나와요. 내가 살아있는데, 내 안에 내용을 찾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 내용을 어디서 수입하죠? 어디서 불러오죠? 그럴사해보이는 타인의 것에서부터 가져오는 거예요.
타인에게서 어떤 정신과 의사가 최면을 조사하는데 최면에서 전생체험을 하고 전생체험에서 고백해보라고 하니까 한 100명 정도 해보니까 전부 다 뭐냐 하면은 귀족이고 왕비고 이래요. 무수리도 하나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기억 속에 나온 중에서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기억한 거예요.
자꾸 됐으면 이거 안 됐으면 그건 빼고 자기 되고 싶은 거 사장님이고 옛날에 좀 그런 거예요. 그게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바로 남이 나보다 멋있어 보이고 내가 미혹될 만한 남이 갖고 있는 것을 상상으로다. 내 것 되고 싶은 것들이 나의 주체에 이걸 가득 채운 겁니다. 가득 채우면서 사회에 나가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됩니다. 안됩니까?
그게 제거되죠. 제거될 때 뭐로 제거돼요? 법과 규칙을 가지고 제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걸 감내해내요. 왜? 나름 내심 노리고 있는 어릴 때부터 꿈꾸는 나는 저렇게 되고 싶어. 그걸 참을 때까지 자기가 어떻게 하면 자기가 굴욕적이지만 인내해서 내 목표가 만들 때까지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겠죠. 그러니까 보세요. 이 내가 자기에게 뭐가 돼요? 이게 짐이 되고 공포가 되고 숨을 못 쉬게 만드는 거예요. 이 나가 내 생각과 내 목표와 내 계획이 나를 짓눌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짓눌리기시작해요. 그러면 여기서 이거하고 십분쉽시다.
강남강의 260721
예수님의 그림자B 강의 이근호 목사님
옛날 구약 이스라엘 때 성경에 보면 자주 이스라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이방민족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고백을 하죠. 이방민족, 이방인들, 이방인들 쫓아내지 못하면 우리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못 믿어서 이렇게 굴복당하고 있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죠.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가 십자가를 못 믿는 것은 우리끼리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 구약때의 기적은 뭡니까?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우리가 아는 약속대로 약속의 땅을 우리가 점유하는 것. 우리가 차지하는 거예요. 우리가 차지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 시공간은 여전히 "내가" 엄연히 살아있는 중심의 시공간이 되어 있지요.
아르헨티나 월드컵 지고 난 뒤에 잔디밭에서 지나간 스페인 붙들고 싸움하자.
”니 왜 이겼어? 왜 우리는 너한테 지는 거야?” 거기서 밀고 당기고 싸웠다. 이 말이야. 그때 그 시공간, 그걸 평면적 시공간이라고 평면적 시공간인 거예요. 평면적 시공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없으면 그것도 의미 없다. 내가 없으면 그것도 의미 없다가 되는.우승 트로피는 스페인 가져가고 아르헨티나는 안 가져가요. 없지요?
그래서 지금 구약에서의 기적, 이스라엘 기적이라 하는 것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약속의 땅을 점유하는 게 기적이죠.
신약의 기적은 뭐냐?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어 있다는 것을 내가 믿어야 그 다음에 나를 통해서 주님이 살아 있어서 십자가의 효과와 능력을 한껏 여기에 그 발휘하고 있고 활동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게 기적이에요. 그게 기적이 그래서 이 기적에 뭐가 방해가 되냐? 내 살아있는 내 행함이 걸그적 거리겠죠.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모든 말씀은 뭡니까? 뭐를 제거하는 거예요? 내 행위를 제거 해버리는 거예요. 내 행위를. 어렵지 않잖아요.
"이게 무슨, 이거 왜 자꾸 니가 죽었는데 산 사람 흉내 내고 있느냐"에 산 사람이니까, 자기가 행동을 하고 싶은 거예요. 산 사람이니까.
그리고 10년 뒤에 어떤 희망을 갖고 싶은 거예요. 왜? 지금도 살아있지만 그때도 살아있고 싶어서.
그럼 중간에 뭐가 없어요? 내가 죽었다는 하나님의 기적이 날아가 버렸죠.
마치, 구약때 이스라엘 나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가가지고 약속의 땅을 살고 싶은데 이방민족이 와가지고 맨날 자기 요령껏 이방민족과 잘 해가지고 같이 살고 싶은데 갈수록 어떻게 됩니까? 이방민족은 더 구박을 하지요. 그럴 때 마지막 하다하다 안 되면 뭐합니까? 여호와 하나님 부르죠. 그때 하나님 도와주잖아요. 그런데 도와줘 봤자 이거는 평면적이에요. 수직적이 아니라 평면적입니다.
하박국 3장 17절 한번 읽어봅시다. 평면. 평면. 평면으로 나가다가 역사 역사. 역사가 나가다가 결국은 선지자 말기에 가서는 이제는 평면의 역사 다 포기해버리죠. 하박국 3장 17절 들으면 딱 압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아멘(하박국3:17)
문제는 아멘인데 문제는 차 빼고 포 빼고 다 뺐는데 무슨 아멘이 되느냐 이래 못 사는데 그러면 주께서 " 땅의 것으로 못 살게 하는 게 기적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니가 믿음이 없어 가지고 옛날 구약에 머물러 있다는 구약 그것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빨리 죽어서 빨리 죽은 내 세계에 합류하라는데 우리는 자꾸 밍기적 부리면서 나이 60대도 아직까지, 70대도 할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알아라 하는 거 있잖아요. 100세 인생 한번 부를까요?
60세. 제가 한번 문제 낼 테니까. 이 문제가 현재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얼마나 효과 있는지 십자가보다 더 생생하게 효과 있는 문제를 다뤄 볼 테니까 문제 한번 내 볼 게요.
연봉 5000만원인 사람이 듀오에 가입 하려면 가입비 얼마 내야 돼? 가입비는 얼마? 1년에 5천만 원 버는 총각 처녀가 듀오 결혼정보회사 정식 가입하려면 가입비가 얼마 되느냐 이 질문하고? 십자가 안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두 문제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한테 실감납니까? 십자가는 몰라도 되는 것 같고, 그래서 수련회 안오나?
이 문제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고요. 중요한 문제예요. 내가 알아봤어요. 연봉 5천에 듀오에 결혼해 주오 하는 거. 듀오에 가입하려면 얼마 드느냐. 500만 원에서 600만 원. 세상에 그러면 500만 원 내고 가입하는 순간 그 사람은 뭐가 생기냐면 이 땅과 계약이 돼요. 계약, 법 법칙 규칙에 살아 있는 내가 꽁꽁 매이게 되는 겁니다. 위반하면 계약 위반이 돼요. 여기서 만약에 옵션 넣으면 천만원까지 넘어간다.
시시한 여자 말고, 약사, 교사, 의사 천만 원 천만원에 되기만 하면, 천만원이 문제겠어요? 이 법칙, 계약 규칙을 통해서 사회가 유지가 되고 돌아가는데, 그 사회는 뭐냐? 죽은 자들을 공동묘지로 내보내는 사회예요. 돌아가셨습니다. 처리해.
그래서 현재 우리가 아는 세계는 뭐냐 하면 아직 목숨이 안 끊어진 살아있는 사람만의 자체적인 규칙과 규약과 법칙으로 그 안에서 내가 누군가를 단정짓는, 내가 누군가를 내가 확보하는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만들어낸 교회와 유대교 종교와 기독교와 교회, 교회는 결국은 어떤 종교여야 그 고객들이 만족하겠어요? 법과 규칙이 있어줄 때 안심을 하겠죠.
그 성공회 같은 경우에 성공회, 영국 성공회도 그렇지만 동방교회 같은 경우에는 서서 예배당에서만 본 예배당에만 서서 두시간입니다. 서서 두 시간인데 거기에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거예요. 왜? 내가 각고의 아픔과 고난을 투자한 만큼 그만큼 나에게 돌아올 안정적인 구원은 보장되겠지.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거기에 투자한 관절과 투자한 내 노력이 내가 보기에도 너무 가상하잖아요. 너무 가상하잖아요. 자기가 보기에도 이걸 두 시간을 견디네 이 되거든요.
처음에 우리나라 기독교의 결혼식이 길었어요. 예배식으로 한다고 길었는데, 갈수록 짧아져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대중적이 대중적이어야 된다. 대중적이기 때문에 교회도 뭐가 되었어요? 대중적인 교회가 되었죠. 문제는 교회가 대중적일 때 누가 떠나느냐? 대중들이 떠나요.
그게 뭐냐 하면 빡시게 투자를 해야 투자금을 회수하는 보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쉽게 가면 쉽게 쉽게 떠나요. 다리 거치다가 쉽게 뺄 수 있어요. 왜? 자기가 투자한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가입비를 500만 원 냈으니까 그 딴 회사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내고 난 뒤에 악착같이 될 때까지 그 주선한 대로 계속 열심으로 할 수 있는게. “돈이 성의을 말하는 거예요.”아이고 오랜만에 좋은 말 했다.
돈이 성의고 그 성의는 돈이라는 신용담보에서 나온 거예요. 은행에 예금했다는 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지 마음대로 살것 같아도 그렇지 않아요. 이 빡빡한 규칙들이 있잖아요.
아파트에 고무총놀이 하지 마세요. 개나 고양이 키울 때는 소리 나지 않도록 울지 않도록 하세요. 학교 올 때는 휴대폰. 핸드폰 학교에서 압수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규칙을 만들죠. 그럼 규칙을 만들면 그 아이든 어른이든 그걸 알아들어요. 알아듣는다고 왜? 자기가 안 죽었으니까 내가 살아있을 때 통용되는 의미는 내가 알아들으니까.
그런데 복음 이야기하면 알아 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도저히 못 알아듣습니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어요. 그래서 못 알아듣기 때문에 계속 교회 나와도 세속적이고, 세상적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아까 유대인들이 아까 맞다. 했죠.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유대인해서 맞다. 했죠. 그 구약의 율법이 유대인들의 식의 해석의 율법이 아니라, 복음적인 이미 인간을 죽은 자로 만들어 놓고 죽은 자 입장에서 율법을 다시 보게 하는 율법의 효능이 이 세상과 대비되면서 동원됩니다. 아까 예를 든거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아파트에서 고무총 놀이하지 마세요. 또 주차할 때 양쪽에 두 칸 차지하지 마세요. 하면 주민들은 okay 예 하죠.
개나 고양이 밤새도록 울게 만들고 들고양이 밤새 울면 온 식구들이 잠을 못 자요. 그런 거 아까 휴대폰에 학교 올 때 휴대폰 갖고 오지 말라는 그런 거 다 동의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신명기 27장을 봅시다. 동의되는지. 율법이 왜 있는지를 제가 설명해 드릴 거예요.
신명기 27장 15절 보면 이제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여섯지파 세워놓고, 한쪽은 축복하기 위해서 그리심산에 서고(12절), 한쪽은 저주하기 위해서 에발산에 섰다.(13절)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맞죠?
12절 13절 됐죠? 문제는 축복하기 위해서 해놓고, 축복에 대해서는 아멘이 하나도 없어요. 아멘 기록이 없어요. 뒤에 나오는 아멘이 어디 나와요? 저주에 대해서 아멘 나와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했을까요? 축복은 쌍수들로 대환영을 하지만 저주는 노맨, 아멘이 노맨 돼버려요.
인간의 축복은 나를 건사할 수 있어요. 내가 나답게 유지되면서 추가적으로 복이 오는 개념이에요. 저주는 어떤 개념입니까? 있는 것도 다 거덜나는 개념이거든요. 복을 안 받으면 안 받았지. 있는 것도 거덜나는 것은 이거는 얼마나 위험한 도박입니까? 그래서 쉽게 아멘이라는 소리를 할 수 없겠지요.
"신명기 27: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그럼 또 온 백성이 응답하기를? 아멘 했지? 어떻게 했지? 아멘 했지요?
제가 하나님 같으면 진짜가? 진짜 진심이야? 진짜 그냥 하고 간다! 진짜 가? 좋아? 오케이? 사람들 뭐라 합니까? 아무소리 못하지요. 왜 아무소리 못할까요? 기존의 나를 지켜주는 세상법으로 완전 무장되기 때문에 완전 무장되기 때문에 나한테 항상 계산하잖아요. 어느 게 나한테 이익이 되느냐. 손에 그걸 항상 쉬지도 않고 계산하기 때문에 완전히 내 자체가 완전히 거듭나서 중요한 것은 내 쪽에서 사양을 하죠. 기겁을 하는 거예요. 기겁을. 강력하게 밀어 부쳐요. 그게 마귀의 종입니다.
마귀의 종:적당히 합시다. 이래 되겠죠. 어떤 자는 복 받을 것이다. 하는 것은 액자도 만들 수 있지만 어떤 것은 저주 받을 자라는 액자를 그 액자를 그 저 기독교 서점에서 팔겠습니까? 팔릴 리가 없지요. 팔릴 리가 지옥의 하나님도 안 팔리는데, 그래요. 천국의 하나님은 팔려도 지옥의 하나님은 안 팔려요. 제목 자체가.
오늘 사도행전 그 11장 한번 봅시다 11장 끝에 28절에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일어나 있어요. 아가보. 아가보 사람 이름입니다. 이 사람이 예언자예요. 성령을 말하는데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린다 이렇게 했어요. 흉년 들린다. 천하가. 왜 성령 받아서 기적을 이야기하면, 좀 사람들에게 호응이 되는 멋진 기적을 안 하고 흉년 든다. 왜 흉년 든다는 것을 내뱉을까요?
이 흉년 전달에 대해서 누가 공포를 느끼고 무서움을 느끼겠습니까?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이 그렇겠죠? 성령 받은 사람은 아, 주께서 오실 때가 됐구나. 기뻐하죠. 주의 때를 위함이군요. 이렇게 되겠죠.
이 아가보라는 사람이 사도행전 21장 10절에서 14절에 보면 이런 예언을 해요. 귀찮지만 한번 찾아봅시다. 귀찮지만. (행21:10) 10절에서 보면 "여러 날 있다가 한 선지자가 아가보라 한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바울의 띠가 자기의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 말씀하시되,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은 띠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 손에 넘겨주리라" 라고 예언을 했어요.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말렸어요.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갔습니까? 안 갔습니다? 갔습니다. 뭐라고 하냐? 하면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내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도 각오 하였노라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도 각오했다. 사도 바울은 그때까지 자기가 로마에 죽는 것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로마에 죽고 그런 것은 또 새로운 예언이 사도 바울에게 주어져야 되니까. 네가 여기서 안 죽는다. 니가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니 시공간 아니야. 나의 시공간이야. 내가 널 살릴 때 살리고 죽일 때 죽이고 그건 내 손에 달려서 니는 로마에 가서 죽어야 돼. 그때는 그렇게 되겠죠. 지금은 몰랐어요. 예루살렘에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러한 태도가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편지를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 빌립보서 1장과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사도바울의 자기의 사적인 소원이 나옵니다. 그 소원이 뭐냐? 후딱 죽는 거예요. 빨리 죽는 거예요. 아니 지금 할 수만 있다면 오늘로 죽는 거예요. 할렐루야.
집에 아내가 있든 누가 남편이 있든 누가 자식이 있든 상관없이 할렐루야. 할렐루야. 진짜 오늘 데려가시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행운을 해주시는 겁니까? 주님께서 사도바울의 이 편지가 왜 이것이 사도바울의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의 계시인지를 나타내요.
이건 이방인 교회의 사도거든요. 사도바울이. 오늘 사도행전 11장에 안디옥 교회 나오잖아요. 안디옥에서 파견된 사도가 누구다? 사도 바울이에요. 안디옥에 처음 세운 교회가 무슨 교회? 예루살렘 교회 아니에요? 처음 교회가 뭡니까? 안디옥 교회예요. 그때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되어 있어요. 여기 26절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행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못 들었어요. 유대인인데 메시아 만났다. 끝. 이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아까 분명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약속의 땅에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이방민족을 쫓아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고백이 계속 나와요. 선지자도 나오고 계속 나와요.
그런데 신약에는 어떻게 바뀐다고요?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뭐를 놓치기 때문에? 고인과 함께 이미 죽은 자로 함께 있는 이러한 시공간에 대해서 믿지 않아서 우리는 내가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착각을 한 것이 이게 바로 잘못이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게 반복돼요. 해결해야 되니까. 분명히 믿는다 했는데 세상적인 아까 있잖아요.
법과 규칙이 딱 들어오니까 갑자기 죽었던 내가 제대로 살아 봐야지 라는 인식이 확 올라오면서 그 다음부터는 걱정 근심 염려가 동반해서 막 이렇게 덮치는 거예요. 사도 바울로 죽겠다는데 주위 사람들이 가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 이러고 있다. 그러면 구약에 있는 신명기 27장. 그걸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바로 로마서 7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해석 하냐면 율법은 우리를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율법이 우리가 캐내지 못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악을 악에서 벗어나게 해서 준 게 아니고 발목 잡힌 채로 발목 잡힌 채로 우리가 악한 죄인라는 것을 공개하는 역할을 율법이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는 예수 믿고 탈출이 되는 게 아니고 예수 믿고 난 뒤에 철두철미하게 율법, 다시 말해 선악 체제 악마에게 같이 묶여 있다는 나를 사후에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대로 표준말로 하면, 제대로 나 자신이 이것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감사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대전강의에서 이런 이야기 했죠. 그러면 목사님 그것도 마귀가 그런 것들도 조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귀가 딴 건 다 해도 못하는 게 있어요. 어떤것도 다 해도 못하는 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창조주께서 죄 많은 피조물을 위해서 희생하셨다. 이 사실을 악마는 기겁을 합니다. 기겁을 해요. 피조물 됐으면 창조자에게 바르게 사는 게 도리잖아요. 이제 술술 수월하게 우리는 납득이 돼요.
그런데 성령이라는 기적, 성령이라는 기적이 오게 되면 뭐가 들어오냐 하면은 우리는 매여 있는데, 악마에게 매여 있는데, 창조주께서 악마에게 매여있는 강도 같은 나를 위해서 이미 희생을 하셨대요. 과거완료, 이미 해버렸어요. 이미 불의한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영화롭다 하는 영광스럽다 하셨대요. 이미 하늘에 앉혔대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대요.
그게 그게 예수와 함께, 여기 오늘 제목은 여기라 해야겠다. 여기에 예수와 함께 있는 여기 예수 안에서 너의 본래적 진짜 본래적 너는 이 안에 모셔져 있다는 거예요. 땅에서 니는 이미 죽었고 하늘에서 니 생명은 하늘에 모셔져 있는 거예요. 그 모시는 생명은 뭐냐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잘났다 믿었다 이게 아니고 너를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이 너 안에 갈아타게 했다는 그 내용이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걸 대전 강의에서 했는데 여기서 한번 더 그려 보겠습니다.
사람이 있는데, 앞에 태양이 빛납니다. 태양이 방긋 빛납니다. 자연적으로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 비추니까 여기 뭐가 생기겠어요? 그림자가 생기겠죠.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놀라운 점은 이 몸을 다수로 보는 게 아니고 하나로 본다는 거에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머리는 주님 태양이고 여기는 우리의 지체로 그리스도의 하나의 몸인데 어떻게 나와요? 이래서 뭐가 나와요? 일에서 다수가 나와요. 다수가 어떤 사람? 재벌 어떤 사람? 빌어먹는 사람 어떤 사람? 백수 어떤 사람? 노가다. 어떤 사람은 여자, 어떤 사람은 남자, 어떤 사람은 아이, 어떤 사람은 어른. 글자가 쭉 나온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 하나 안에서 된 거예요. 어떤 사람? 눈 어떤 사람? 발 어떤 사람? 손톱 어떤 코 어떤 눈 눈이 발 더러 악하다고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몸이. 내 몸 있고 네 몸 있고 이런 게 된 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고 타자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버렸다. 몸으로 만드니까 옛날 율법이 없던 이방인들은 뭐가 되나요? 개가 되죠. 따라서 예수 그린스도의 몸 바깥의 세상이 무슨 세상이냐 하면 생명의 보기에 이게 바로 죽음의 세계예요. 죽음의 세계. 그리스도 몸 밖에 있는 죽음의 세계.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성령 바깥에는 육의 세계. 여기는 살았고 여기는 죽었고, 세상에서 보면 세상은 살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고.
여기 등장하는 여러 가지의 직장과 직업은 그것은 주님의 시공간에 의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내가 미리 예상한다고 대비한다고 미리 예측한다고 해서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주께서 그냥 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던 사건이에요. 따라서 그 사건을 우리가 잘 처리한 게 아니에요. 처리해버리면 나가 등장하잖아요. 내가 처리했다. 처리한 게 아니고 그냥 그 사건이 나로 하여금 여기에 이미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비가 울산에는 비 한 방울도 안 오고 서울에는 비가 온다. 이런 사건부터 해가지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 그런데 세상적으로 보게 되면 저건 사람이 했다 이래돼요.
1억 판을 기억하고 있는 인공지능 AI. 그야말로 사람은 비교 안 되는 누가 이야기해도 이거는 신진수 9단이 두 점 놓고 진다 상대방 진다 했던 신진수가 오늘 드디어 2대1로 이겼어요. 그래서 상금 3억 5천에 1억 5천에 고급차 제네시스 9 탔어요. 야 천재났네. 천재 보세요. 왜 신인수를 천재라고 하냐? 하면 나와 나가 여기 살아있으니까 나와 비교되는 너와 비교가 되는 거예요. 세상은 그 세상 관점 그게 그러니까 같이 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너는 좋겠다. 이러는 거예요. 전부 다.
사도바울의 편지가 왜 이해 안 되는지 알겠죠? 사도바울의 편지는 그게 바로 성령 바깥에서 하는 그러한 의식이고 마귀의 사고방식이고 그게 마귀의 장난이라는 겁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몸은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너 믿음이 있고 내 믿음이 있는 게 따로가 없어요. 전부 다 한 믿음을 동일한 믿음을 그냥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내 거 아니고 다 누구 믿음입니까? 주의 믿음으로. 사도바울의 편지를 설교한다. 이것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생각이 없으면 설교 못합니다. 자기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그런 마음으로 설교 안하면 이 사도바울에 있는 내용을 끄집어낼 수가 없어요. 못 끄집어냅니다.
만약에 어떤 원칙과 그걸 신학적으로 끄집어내면 이거는 뭐가 되냐면 성령 안 받은 유대교가 되겠죠. 그래서 베드로 전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4:17절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이런 말이 있어요. 심판이 하나님 집부터 심판해 가지고 전부다 심판이 확산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집에 누가 있겠어요? 설교자가 있을 거죠. 감독자가 있겠죠. 한 설교자 감독자가 있으면 교인들께 뭐냐 하면, 마리아 선생님이 되겠죠. 마리아 선생님. 세상 사는 게 힘들어요. 무서워요. 걱정돼요.
어떤 좋은 상담을 원합니다. 상담가가 마귀 들린건 이제 이해되죠? 상담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상담이 끝나면 상담받는 자의 자아가 아이고 철공 철공이 돼요. 철로 만든 공이 돼요. 확 딱딱해져 버려요. 딱딱해져. 동맥경화 정도 이상이에요. 딱딱해져 버려요. 그래 야무지게 버텨야지 야무지게 버텨야지 내가 7번 넘어서 8번 일어나야지" 열번 넘어져도 소용없어요. 또 넘어질 건데 또 넘어질 건데. 나는 실체가 아니고 주님의 그림자다. 왜 그런 말을 못해?
왜 나는 수백 번 이야기 다시 한번 해보겠어요? 내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뭐냐 하면 이거예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세상에 노출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로.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이 사람이 찾는 것은 뭡니까? 그럼 집에서 뭐 집에서 맨날 잠이나 자고 산에 뭐 산에 가서 산속에 파묻혀 살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사건에 호출당한 거예요. 주님의 사건에 호출당한 거예요. 내가 사건을 일으켰다. 니가 일으킨 거 아니야? 내가 일으킨 거야. 산에 올라가다 엎어져 가지고 무릎 다 깨졌다. 마침 토요일이다. 병원도 문 닫았다.
어때? 좀 빨리 보내줄 때 기쁘지 아니하냐? 주여, 이왕이면 이거 말고, 진짜 보내줘야죠. 이 손만 다쳐가지고. ㅋㅋ" 내 힘으로 산을 튼튼하게 그동안 잘 다녔다. 이게 누적됐잖아요. 철공이죠. 갈수록 마음이 자아 중심으로 응축이 돼요. 가득 굳어져요. 굳어지니까. 항상 텐션이 있어요. 스트레스가 긴장이 돼요. 혹시 내가 공들여서 만든 자아에 흠집 낼까 봐. 그러면 막 흠집 낸다. 죽여버릴까요? 죽여버릴까? 욕이 나오죠. 호퍼 영화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욕 나오는 것처럼 죽여버릴까?
못 죽이니까. 욕을 대체하죠. 죽여버릴까? 욕 대신에 스스로 자기의 그 딱딱한 스트레스 받는 자아를 이렇게 감추는 방식이 뭐냐 하면, 개 키우고 고양이 키우는 방식이에요. 얼마나 이때 이게 득도한 것 같아요. 득도한 것 같아요. 우리 나비야 이런 거. 처음에 그 순간만 자기는 어미가 되고 자기는 천사가 되는 순간 아닙니까? 그러면 뭘 잊어버려? 자기의 딱딱한 암덩어리는 마치 녹아진 것처럼 느껴지겠죠. 개 키우는 것도.
그래서 어떤 아줌마는 아파트가 두 채가 있는데, 한 채는 개가 26마리, 한 채는 26마리 아파트에서 개를 키운 게 냄새나서 신고했거든요. 개가 26마리 나왔어요.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겠죠? 강제로 다 끄집어냈어요. 그냥 물어보세요. 왜 키웁니까? 누구? 행복을 위해서 우울증 있는 나의 우울증을 달래기 위해서 개를 키웁니다. 왜? 나의 내가 너무 딱딱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작자가 오면 다 흠집을 내요. 이미 그것을 이미 느꼈기 때문에 개 말고 인간 말고 부드러운 걸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개와 고양이는 나의 타자가 돼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타잔데 그 타자 인간 말고 반려견을 키움으로써 내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내가 아직도 인정 많고 이렇게 배려심이 많고 자비가 넘친다는 걸 선악 체계에서 넘친다는 것을 그렇게 스스로 자기가 위로받고 싶은 거예요. 한마디로 뭡니까? 안 죽고 싶은 거예요. 죽기 싫은 거예요.
죽기 싫은 입장에서 사도바울의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이게 무슨 말인지를 알길이 없어요. 읽기는 100독을 했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이 말이 기껏 덮이는 것은 뭐냐? 사도바울은 왜 이렇게 과격하냐? 이런 식이야. 과격할 수밖에 없지요.
장벽 두고 저쪽 세계, 이쪽 세계니까. 이 사도바울의 편지를 쭉 읽어보세요. 이건 산 사람 보고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니가 죽었는데 좀 몸은 살아 있어. 니가 고생이 많다."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성령께서 반복해서 죽여줄게. 목 졸라줄게." 갈라디아서 5장 같은 경우에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이야기 나오죠. 아니, 욕심 있는 걸 가지고 꼭 못 박힐 지경까지 그 정도로 욕심이 나쁜 건가요?
갈라디아서의 5장 한번 봅시다 그 5장 예 5장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제 여러분들 이제 이 앞에 나온 주어를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이에요. 그리스도 예수님이 고인이잖아요. "고인과 함께 주님의 고인 된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이미 못 박았느니라" 에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 육신은 뭐냐? 기존의 시공간에 머물러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성령이 한번 오고 마는 겁니까? 반복해서 확인 사살 들어가는 거예요. 반복을 하는 거예요. 말씀을.
늘 말씀에서 나온 성령이 육의 세계에 있는 우리를 너는 그쪽 사람이 아니고 이쪽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때 반복할 때마다 우리 마음에서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죠.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말이 절로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 가지고 이 고마운 마음으로 평화를 유지해서 살고 싶은데 주께서 어떻게 해요? 사건을 일으키죠? 심지어 사도바울 안에는 사탄의 가시까지 들어갔어요. 사탄의 가시. 사탄이 아직도 쓸모 짝이 있어요. 하여튼 우리로 하여금 죽어도 상관없다는 인식을 계속해서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게 하는 거예요.
그래도 우리를 이 땅에 그런 식으로 남겨둔 이유가 뭐냐. 그걸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아까 시켜서 사건을 일으키는 이유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만나라고 했잖아요. 그렇죠? 마지막 어려운 거니까 조금 참으세요. 마지막 거니까. 타인의 청원을 촉구하는가?
타인의 청원을 촉구한다는 말은 뭐냐하면, 이게 뭐냐면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오니까 예수님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사건의 반복 되풀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한테 죽었어요? 타인에게 죽었죠. 그 타인의 세계 속에 우리가 예수의 하나의 몸의 지체로서 우리가 남아있잖아요. 그러면 그 타인과 우리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자꾸 불꽃 튀듯이 일어나야 돼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되죠. 십자가 사건.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면 그걸 가지고 선교라고 해요. 선교 전도.
이게 뭐냐 하면 타인의 청원을 타인이 나를 타고 오도록 또는 나를 요구하도록 누가 내 쪽에서 촉구하도록 주께서 일을 시키는 거예요. 나를 좀 건드려 달라고 건드리겠다는 그 일이 제발 좀 나에게서 남아있는 육신 가지고 예수님의 고난의 육신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육신이 될 수 있도록 남들이 날 좀 건드려 달라는 거예요. 그걸 촉구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유도해요. 그리되면 어떻게 돼요?
전도를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 될 사람이 그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전도 될 사람이 나와 우발적으로 항상 부딪치고, 만나는 현상이 십자가 사건의 반복을 위해서 이 땅에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특징이 뭐냐 하면 혼자 쉽게 말해서 인간은 혼자 살도록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누가? 주님이.
자식이 됐든 딸이 됐든 아들이 됐든 남편이 됐든 집에 집안의 어른이 됐든 이젠 90 넘어가지고 고집은 더 세. 고집은 세고 큰아들이 돈 다 대어 가지고 집안에 가업을 일으키고 과수원에 나무 다 심고 농사도 다 했는데, 남편 돌아가시고 남은 엄마가 야야 너 이거 다 동생들에게 1/n해라. 그건 엄마의 자존심이거든요. 엄마의 자존심. 엄마는 누구한테 배웠냐 하면. (하여간 수련회에서 할거를 미리 또 특별히 할게요.) 엄마는 누구한테 배웠냐 하면 아빠의 자리를 엄마가 원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어른 해라. 난 엄마 할게. 당신은 내 남편. 그러면 당신이 이 집안의 기둥으로서 원칙을 세워. 그럼 내가 순순히 따라줌으로써 아내다운 아내가 될게. 그 생각을 여자는 갖게 돼요. 그런데 남편 죽었다 하면 자신이 뭐냐 하면 자기 원칙은 없어요. 옛날에 남편이 했던 행세를 엄마가 본인이 그걸 인수인계 받아 가서 자식들에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집안의 기강이 선다는 거예요. 기강이 서는데 문제는 자기 기분대로 한다는 거예요. n분의 1을 해. 그러면 아들이 돈 없는데요? 돈이 없는데요. 이 과수원 팔면 4천 나오잖아. 4천 안 나옵니다. 이제 시골에 누가 산다고 안 삽니다. 가만히 있어 봐 땅값 오를 거야. 그러면 지금 돈 없는데요. 4천 대출 내. 미쳐서 지옥가려고 이래.
팔아서 동생들 미리 줘라. 지금 땅값은 4천이 뭐고 지금 완전히 안 되는데 엄마 왜 그래? 느그 아버지 살았으면 그랬을 거야. 죽은 아버지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죽은 남편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럼 동생들은 뭐하느냐? 그냥 엄마 뜻만 따를 뿐이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수적이라 하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웠어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에요. 내가 나됨을 포기하고 하나의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예요. 그리고 그 상품화된 빙벽, 쟁반 돌아가는 회초밥 가게 있죠?
쟁반 돌아가잖아요. 그 쟁반에 음식 하나 놓이죠. 그게 어릴 때부터 탐이 났던 거예요. 내 친구는 차가 고급차인데 내 친구는 고급 아파트에 있는데, 그 아파트 차가 뭐냐? 쟁반에 빙빙 돌고 있는 것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저 같은 상품 같으면 얼마나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큰소리 치고 있는 상품이 되겠느냐? 그 상품을 이미 적을 때부터 자본주의 상품화된 시장화된 세계에서 자아가 형성이 된 겁니다.
자아가 형성된 거예요. 그 형성된 이유는 어디서 왔어요? 타인에서 왔죠. 타인에게서 왔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육적인 인간은 뭘 촉구합니까? 남이 요구하는 내가 되어서 내가 촉구해 왔던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이미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고인이 됐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듣지 말고, 이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주와 함께 한 몸이 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나한테 신경 쓸 일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왜? 나를 위한 사건은 주께서 인정 안 하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만 드러내기 위해서 옛날 니 잘했던 게 있잖아. 타인이 와서 너를 건드릴 때 그때 나는 과연 십자가가 나오도록 하는 조치. 그게 바로 주님이 주선하는 선교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못 죽었어. 어디서 죽었어요? 로마에서 죽었어요. 로마가서 죽었어요. 왜냐하면, 세상은 예루살렘이 끝이 아니고 로마가 끝이기 때문에. 네 번째 짐승이거든요. 네 번째 짐승을 코털을 건드려야 되는거에요. 뭐로 복음으로. 어떻게 건드리느냐. 네 세계하고 내가 속한 세계하고 다르다는 것을.
자 사도행전 11장 봅시다. 11장. 이제 그 28절에는 아가보 그 당시 예언자가 있었어요. 아가보. 선지자. 이 사람들이 외칠 때 구약적인 역량을 읽어요. 구약적 역량은 한번 정리하게 되면 구약적인 것은 뭐냐? 약한 우리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으로서 우리를 계속 살려주세요. 이게 기적이죠. 그게 기적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 이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몸 된 만약에 설교자나 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설교나 강의를 누구보고 해야 돼요? 사람보고 해야 됩니까? 주님보고 해야 돼요.
여기 계시는 주님 보고 설교를 하고 강의해야 되죠. 주님보고 설교하게 되면 거기에 촉구되는 타인들이 생길 거예요. 대부분은 욕하죠. 멀쩡한데 죽으란 말인가 이렇게 하게 되고, 위로라도 좀 해야지 이런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게 맞네, 그러면 설교자가 깜짝 놀라요. 미친 거 아니에요? 이걸 믿어 어떻게 이걸 믿어? 아무리 성경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이 있더라도 성경은 내 살기 위해서 편의상 이용하는 것이지. 그걸 죽은 자 하나님이 십자가 죽었다 하니 그걸 어떻게 그걸 믿어? 안 믿어져요. 인간은 못 믿어요. 성령이 와야 믿어진다고요. 성령이 와야. 그래서 성령 안에는 우리를 이미 고인으로 취급하고 다뤄요. 성령 안에서.
그래서 죽은 자들의 집단이 뭐냐. 이게 이방인의 교회고 이방인의 교회가 최종교회예요. 최종교회. 그 안에서 주님이 살아계세요. 그 이방인 교회를 한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한 몸. 거기에서 이방인 교회에는 뭐가 주어지느냐. 계속해서 반복해서 성령이 계속 그 교회에 충만하게 하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성령 없는 자는 그 교회에 의해서 계속해서 알아서 튕겨져 나갈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 일곱교회입니다. 일곱교회. 일곱교회 줘놓고 일곱교회가 다 튕겨져 나갔어요. 그런데 일곱교회가 튕겨 나간 그 빈자리에 숨어있던 일곱교회가 등장한 거예요. 그게 예루살렘이잖아.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그래서 로마서. 또 로마서예요. 사도바울의 편지
롬14장 7절 사나 죽어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내 것은 이미 나한테 내 것은 없다. 주께서 다룰 때까지 이 땅에 다룰 때까지 다루시다가 부르실 때 할렐루야 하고 이제는 편히 쉬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왔다는 것이 죽은 예수님과 만나게 되고 한 몸이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막상 한 몸이 되어 버리고 난 뒤에 우리의 모든 지난 생각이 얼마나 악마적인가가 날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남을 만남을 통해서 들추워지고 들추워져서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쁨으로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뭐가 문제냐? 하면은 본래적으로 나는 부정성을 띠고 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나 이거 뭐 잘못됐어. 내가 이렇게 고생할 위인이 아니잖아. 그런데 왜 세상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남 탓하고 세상 탓 하지만 너는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다, 아니라는 점으로 정리되면서... 십분쉽시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