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육의 한계

아빠와 함께 2026. 5. 24. 20:20

강남강의 육의 한계A
사도행전 9:40, 260519 이근호 목사님

오늘은 사도행전 9장 26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라.여기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이 나오죠. 그러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이게 예루살렘이고 다메섹에서 나오고 이러니까, 사도행전 9장에서 또는 성경에서 지명이 나오면 이 동네에 살지 않는 우리들은 좀 약간 골치 아프게 되죠.

거기가 어딘데? 그곳이 어딘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여기 지중해가 있고 지중해 여기 바다가 하나 있네 갈릴리 바다 여기 쭉 갈릴바다가 여기서 헤르몬산에서 물이 내려와서 갈릴리바다 1차 저수지처럼 여기서 고이다가 빠져나와서 여기 이제 갈릴보다 4배나 더 큰 사해바다라는 게 있어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지중해에서 요단강 그 사이가 이스라엘 지역이라고 보면 됩니다. 예루살렘 어디냐? 예루살렘은 이 사해 꼭대기하고 나란히 뒤에 여기 바로 예루살렘이에요. 이쪽이 예루살렘입니다.

이 8km 떨어진 곳에 이거 이렇게 하면 이게 베들레헴 전부 다 이거 높은 산이 되겠어요. 높은 산맥이 격격하게 강으로 떨어지겠죠. 전부 다 이거 산 정상 등산하면 등산에 높은 봉우리끼리 가는 길이 있죠.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바로 그 길을 다녔어요. 옛날부터 나온 길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어디를 가냐? 갈릴리를 거쳐서 여기는 너무 멀어서 안 나오는데 다메섹 다마스쿠스 아람나라의 수도로 갑니다. 가다가 걸렸죠. 가다가 걸려가지고, 이 길을 따라서 이렇게 예루살렘 다시 옵니다. 그 다음에 이 예루살렘하고 비슷한 약간 위에 있는 욥바, 텔아비브 현재 텔아비브 욥바, 욥바의 근처, 여기에 룻다라는 지역이 있고, 룻다(이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해서 룻다) 가는데 저 위에도 이제 우리 가이사라, 큰 도시예요.

그 다음에 시돈 저 위에 두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걸려 가지고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룻다 갔다가 룻다에서 욥바로, 욥바에서 가이사랴, 가이사랴에서 배타고 다소, 현재 튀르키에 있는 섬인 바로 여기 다소라는데 이거 이렇게 빠져요.

그런데 이 다메섹에 어떤 일이 있냐 하면 23절에 보면 다메섹 왕이 있어요. 왕이. 유대인하고 결속을 해서 사울을 아예 체포하기로 체포해서 죽이기로 공모가 돼 있습니다. 그게 23절, 24절, 25절 되어 있어요. 공모되어 있는데,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달아 성에서 내려 가지고 탈출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게 그 고후11장 3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는 거 11장 32줄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고후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걸 한마디로 식겁 했다. 이거예요. 식겁한 거예요. 그래서 다소에 가서 그 다음에 사도는 어떻게 되는가?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어요. 갈1장 16절(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에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돼 있죠. 야 이제 여기서 갈림길이 벌어지는 거예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까. 육이 기대하고 육의 행함에 대해서 계속 그것을 지탱한다면, 사도 바울이 가는 길과는 못 따라갑니다. 사도 바울로 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니까. 지옥 가는 거죠. 그런데 17절에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가 아라비아에 간 게 몇 년? 3년 동안 아라비아에 갔어요. 3년 동안 다소에서 그냥 노는 게 아니고 3년 동안 있었다는 거예요. 3년 동안 있으면서 뭘 받았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거예요.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사도와 의논하지 않고

갈 1장 12절에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여기서 정리가 돼야 돼요. 사도바울은 누구를 만날 때? 사람을 상대합니까? 아니면 그 사람 속에 자기와 똑같이 들어있는 성령이 있느냐 없느냐 성령 있는 사람인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만나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저 사람 잘 말 잘해서 구원받게 해주겠다. 그런 마음으로 만난 거예요?

아니면 나한테 온 성령을 혹시 저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해서 다가가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성령을 보고 가죠. 사람 보고 가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지식이 어떠냐, 학식이 어떠냐, 인물이 어떠냐 보지 않고 나한테 찾아온 성령을 저 사람에게도 제공될 수가 있다. 그것을 확인하고 파악하기 위해서, 왜? 섬겨야 되니까. 자기는 계시를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만 받은 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계시가 오니까, 주어진 계시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아직 성경이 확정이 안 됐잖아요. 계시가 사도인지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 주어진 그것을 성령 받은 사람에게 제공하고 또 제공하고 또 퍼주고 퍼주기 위해서 누구를 만나는 거예요. 따라서 사도바울은 누구하고만 관계하냐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관계하지 않아요.

왜,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니까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람과 상대하면 그만이겠지만, 사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주님으로부터 하늘나라의 정보를 받아서 그것을 전해보면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인지 아니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에요? 육적이 되겠죠. 말씀을 알아먹는 사람인지 아니면 육적으로 그냥 태어난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그것을 구분하는 업무를 사도바울이 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 들어보니까, 의외로 사도바울의 업무가 별로 복잡하지 않죠. 복잡하지 않아요. 진짜야 가짜야 이것만 따지면 돼요. 이거는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사도베드로도 마찬가지예요. 사도 베드로도 교회가 있다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요. 교회는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니에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을 내쫓기 위해서 교회를 만들었죠.

사람을 구제하고 도와주고 하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소문이 좋게 났겠습니까? 이 교회는 어려운 사람 많이 도와준대 배려한대 어려울 때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교회에 와서 얻어먹자 이런 싸움하잖아요. 교회 가면 그 구제하는 사람도 많고 헌금하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 같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한테 이렇게 받아주는 것도 그 사람의 빛을 빛내게 하는 그런 좋은 일을 하니까 우리가 거기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거저 준다는 소문 듣고 많이 왔다 이 말이죠.

사도가 어떻겠습니까? 야 이거 부흥되니까. 기부하는 사람이라든지. 헌금한 사람, 이 사람들만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되면 사도 베드로도 사람과 상대하는 거예요. 사람과 상대해서 교회라는 좋은 인상을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단체에 어서 오시옵소서 이런 거죠. 어서 오세요. 그래서 단체를 키우고, 단체를 키운 것은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 역사하시고 일하신다는 증거로서 또 대외적으로 홍보를 하면 교회는 더욱 커진다 이거죠.

교회커서 뭐합니까? 여러분들 오늘 본문에 사도행전 9장

(행9:36~40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9장에 보면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죠. 여기 욥바 텔아비브 거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는데,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어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선행과 구제가 영적입니까? 육적입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못하는 거예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봉사 많이 했는데 이 다비다 생각하면 꼭 그거 생각나요? 오드리 햅번 생각나요?

아프리카 가 가지고 많은 재산을 아프리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거예요. 거기서 그 병으로 돌아가셨는가 되죠. 그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는데 죽어버렸어요. 그 주위 사람들이 혜택 입은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참 아까운 분 죽었다고 애도할 거잖아요. 애도했을 때 그 근처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룻다에 있음을 알고, 제자가 룻다 여기 있는 걸 알고, 욥바에서 데리러 가요. 한 10km 되는가 모르겠어요. 여기서 데리고 가가지고, 도로가 또 이름이 두 개예요. 다비다 또는 도로가 이 사람을 놓고 기도해서 시체 보고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 보고 일어나 앉은지라 이래 있어요.

여기서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다비다가 죽었어요.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육입니까? 영입니까? 죽을 때 육으로 죽었잖아요. 그럼 살아난 것은 육일까요? 영일까요? 육이죠. 육입니다. 이 소문 듣고도 사람들이 또 몰려오죠. 야 이제 죽은 자도 살아나더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고 물위를 걷고 오병이어 줄 때 엄청 많은 사람이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제자들 다 도망갔죠. 그게 절차고 순서입니다. 육이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면서 육은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는가를 보여줘요. 육이 종교 신앙 영적이라는 표현을 하면서 결국은 육의 소행에 불과한 그 극한의 그 한계점이 어딘가를 말씀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사도행전에서 어떤 죽은 자를 살리고 뭐 이렇게 하는데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막 일어났잖아요. 그건 예수님에게도 그렇게 일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그거예요. 한결같이. 죽은 자가 살아나고 구제를 하고 선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육에서 영으로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바뀌어지지 않아요. 괜히 인간이 육적인 인간이 기대감을 업되고, 부풀리게된 부분입니다. 도와준대, 병고쳐 준대, 해결책 준대. 그것도 어디에 속한 겁니까? 육 안에 육이라는 그 인식 안에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베드로 같은 경우에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까 지금 다비다 같은 경우는 베드로가 예, 바보를 죽은 데 살려줬잖아요. 그런데 사도행전 5장을 한번 봅시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거의 베드로가 등장하는데

(행5:5 ~10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5장 8절에서 보면 5장 5절에서 보면 아나니아가 이 말 듣고 엎드려고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그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3시간쯤에 아내가 그 생긴 것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 땅값이 그것뿐이냐 말하자. 이것뿐입니다. 예 하니 그때 장사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너도 메어 가리라.

시체 정리하는 사람 그날 좀 바쁘게 생겼어요. 남편 죽은 시체 옮기고 다시 교회 오니까 또 이번 누가 죽느냐, 사이좋게 그 아내가 또 죽어가지고 이 일을 한꺼번에 죽었으면 한꺼번에 할 건데 차례차례로 일을 두 번 하게 됐어요. 왔는데 또 가서 또 여자 시체를 가져갔습니다. 베드로가 사람 살리는 일을 했어요.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죽이는 일. 죽이는 일을 하죠. 죽지 아니하면 말씀을 몰라요.

“죽지 아니하면 말씀을 모른다”
죽지 아니하면 말씀을 몰라요.

육이 죽지 아니하면 영의 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나 예수님 따른 사람들은 그들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조건을 부여받게 되었어요. 이걸 주일날 제가 청부살인이라고 했는데, 원하지 않는 조건이 뭐냐 하면은, 산상설교를 그들은 무조건 들었어야 한다. 산상설교를. 산상설교를 듣고 산상설교 그 마지막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누구든지 내가 전하는 산상설교대로 지키지 아니하면 죽는다. 죽는다. 그러면 산상설교는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내용이 그 중에서 한 개라도 있어요? 없어요. 단 하나도 없어요. 산상설교는 단 하나도 인간이 지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산상설교에 의하면 죽었다 죽었다가 돼요. 가만히 있으면 늙어 죽는 걸 주님께서 왜 말씀을 줘서 죽는다?

이거 못 지키면 니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왜 하느냐. 그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를 알아야 돼요. 산상설교를 주는 것은 인간의 인간이 자기 내부에 욕망이 있다는 것. 그것도 추잡은 욕망이죠. 천국 못 가게 만드는 욕망입니다. 마귀의 욕망이죠. 욕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과 맞닥뜨릴 때 비로소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 안에 욕망이 나의 주인이었던 거예요. 이걸 다른것으로 표현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병든 것이 아니고 불균형이고 무질서예요.”

인간은. 균형 잡히지 못하고 무질서한 게 이게 병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균형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거기에 인간이 피조물이니까. 호응해야 되잖아요. 이게 호응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인간 내부의 말씀에 대적하는 속성이 이미 악마로부터 부여됐기 때문에, 균형이 이게 맞지를 않아요. 이 병들었다 하지 마세요. 내 속이 무질서하다고 보세요. 이 무질서한데 이 무질서가 인간이 어떻게 손댈 수 없는 무질서예요. 여기서 잠깐 제가 한번 정리해 드리겠어요. 뭘 정리하느냐 하면은
1) 상상계 - 거울단계
2) 상징계
3) 실재계
이걸 제가 한번 짧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번, 2번, 3번이라면 1번으로도 우리 인간에 의해서 다 설명이 가능해요.
2번으로도 설명이 가능해요. 상징계
3번으로도 다 설명이 가능해요. 그런데 이 3개가 다 필요한 겁니다. 상상계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거울단계. 거울단계라고 합니다. 상상계. 거울 단계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거울을 보면서 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비로소 자아를 안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거고요. 그건 정신분석에서 잘못 이해한 거고요. 거울을 보게 되면 그 대화 상대가 거기 나타나요.

너 누구야? 거울 보면 거울이 비치잖아요. 너 누구야? 그럼 거울은 말을 하지 않겠죠? 지가 알아듣겠죠? 아 저거는 나잖아. 그런 단계는 뭐냐 하면 나는 누구하고만 이야기한다? 나는 나하고만 이야기한다. 자기의 상대를 자기라고 확정 지은 세계가 상상계입니다. 어릴 때부터 발생된 이 상상계가 나이가 80이 넘어도.

죄송합니다마는 80이 넘어도 80이 혹시 만입니까? 80이 넘어도 이거는 요지부동이야. 예 요지부동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엄마 아빠 싸우는 걸 봤다면 아빠가 엄마 막 때리니까 아빠 엄마 때리지 마. 엄마 때리지 마. 그러면 이 말 듣고 누구도 아이는 누구 편이라고 생각됩니까? 엄마 편을 엄마 이제 매 맞고 있는 가련한 엄마 편이라 생각되죠? 그런데 맞던 엄마가 이제는 잔소리를 해댑니다. 아빠한테. 그러니까 엄마 너무 아빠 힘들게 잔소리 많이 하지 마. 이렇게 나온단 말이에요. 자 그러면 아이는 누구 편이에요? 자기 편이죠. 그게 한계니까.

내 아빠 내 엄마니까 앞에 아빠 엄마에다가 뭘 붙인다? 나를 집어넣는 게, 내 엄마니까 아빠한테 얻어 맞은 엄마가 불쌍하고, 잔소리 듣고 있으니까 이번에 내 아빠가 불쌍한 거예요. 누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를 물으면 정답은 뭐냐? 나는 내가 좋다가 정답이겠죠. 나는 내가 좋아. 한결 같아요. 예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80이 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 나머지는 80 아래니까. 자동적으로 포함됩니다.

항상 내 편이에요. 이것을 나라는 셀프 자아가 이걸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상상계예요. 상상계입니다. 어린 왕자에 보면 자기가 떠나온 고향에, 그 행성에 장미꽃 심었다고 그 장미꽃 구경하러 돌아 가야 된다고 하잖아요. 인간은 어느 자리에 어떻게 성공을 하든, 어떤 실패하든 또는 어느 미국에 이민을 가든, 항상 인간이 머물게 되는 것은 나와 나 사이에 상상계의 세계입니다. 샌드위치처럼 나와 나 사이에 끼어 있어요.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걸로 이 상상계로서 인간의 모든 관계, 인간의 생각, 행동을 다 설명하는 것. 이게 상상계입니다. 이게 상상계적 설명이에요. 안 되는 게 없어요. 다 돼요. 모든 게. 그러면 사람을 만날 때 (그냥 만나지 않고 이걸 응용하기 위해서) 사람 만날 때 자기가 자기한테 물었잖아요. 자기가 자기가 물었던 그 거울 있잖아요. 거울을 상대방에게 던지는 거예요. 전부 다, 만난 사람마다. 던지면 그 사람하고 전화할 때는 누구하고 대화하는 겁니까?

그 사람 속에 던져진 그 사람에 있는 나하고 대화하는 거, 나하고 정말 3시간 동안 하면서. 막 따지고 따지려고 너 왜 그랬어? 막 이렇게 따지는 거. 그래서 전화하면서 뭐냐 하면 남들은 대화한다. 하잖아요. 각자 자기 혼자만 하고 있는 거에요. 양쪽 다. 그것도 사이좋을 때 그렇게 대화가 되지. 사이 안 좋으면 입 다물고, 더 이상 저거는 내 요소가 찾을 게 없으면, 우리 말하지 말자.

우리 다음에 보지 말자. 내가 원하는 건 나의 나됨을 찾는 것이지, 못한 것은 대화를 끊어버리죠. 나는 내가 그리운 거예요. 내가 내가 그리운 거예요. 그러면 나는 누구? 그럼 그리워하는 니는 누군데?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무질서가 들어 있어요. 무질서. 무질서에 불균형이 들어있어요. 불균형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율법과 말씀은 이걸 원하는데 그것과 서로 사맛디 아니할 때 이게 일치되지 않는 오히려 말씀에 대해서 토달고 틱틱거리고 나한테 간섭하지 말라고 대드는 그런 요소가 내 안에 불균형이고, 항상 불균형이라는 것은 주님의 어떤 조치라도 나는 항상 거기서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일이죠. 그게 뭡니까? 무질서예요.

무질서. 이게 무질서가 되죠. 무질서 이유가 없어요. 싫으니까 싫은 거예요. 왜 하나님을 안 믿습니까? 싫으니까. 예수를 안 믿습니까. 싫으니까. 싫다는 말을 빙빙 돌려 가지고 바쁘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그래도 4대 신앙가족이다. (어떻게 어떻게 말들을 하는데)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인간은 자기 말을 하고 있지 않고, 안에 괴물이 이런 괴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23장 34절 한번 찾아 찾아서 말씀해 주세요.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23장 34절 예,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시더라 자기가 하는 말을 본인도 알지 못한 것만 입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것도 주님 쪽에서 일방적인 사건이잖아요. 말씀을 주시는 것도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사건이잖아요.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인간에게 쏟아지는 주어지는 모든 것은 우리를 상대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괴물이 있어서 인간은 자기 괴물을 처치 못하고 어떻게 관리를 못하고 있음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걸 육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육을 하나의 매개로 보는 거예요. 영적 존재. 악마가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해서 악마가 자기 의사, 자기 표현, 자기의 뜻을 이 땅에 이미 펼친 거예요. 이게 두 번째입니다. 상징계.

상상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짐작을 해요. 아 그래? 잘 알아. 나도 막 상상해. 상상하게 나는 내 혼자 나르시즘에 빠져서 상상해도 되는데 두 번째 상징계 이야기하면 상징이라는 말 자체가 일반인들은 잘 쓰지를 않아요. 그런데 상징이라는 와 닿지가 않아요. 상징이라는 말이. 이거는 정신분석학자들, 신학자들이 어렵게 자기가 돋보이기 위해서 일반인은 잘 안 쓰는 단어를 써서 우리 사람들로 하여금 진입 금지하도록 니가 어디 이런 이런 고상한 계통에 니가 들라꼬 니가 상징을 알아, 몰라! 몰라도 좋잖아. 우리 유식한 사람끼리 하는 거야.

이 상징이란 말을 씀으로써 어떤 계급화, 지적인 계급화를 시도한 것처럼 그거를 그렇게 보이죠. 이 학자들도 상징학 쓸 때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적당한 말이 상징이라는 말 외에는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상징을 쓴 거예요. 그런데 상징 말이 이게 너무 어려워요, 내가 봐도 불만이에요. 이걸 이렇게 상징계라 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돼요. 이게 허상계라고 해요. 허상. 망상계, 망상계 해야 이게 맞아요. 상징이라 하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본래는 허상도 망상인데 이 망상계의 내용이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 그대로의 세계입니다. 이제 학자들이 상징계 쓴 이유를 알겠죠? 망상계 허상에 가면 현실 그대로의 세계 같으면 이게 객관적으로 뭡니까? 객관적으로 실제로 있는 세계잖아요. 실제로 있는데, 이게 왜 망상이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학자들이 고민하다 낸 게 뭐냐? 상징계라고 하는 겁니다.

상징계 소개합니다. 상징계란 뭐냐 하면 아이는 자기밖에 모르죠. 자기밖에 모르는데 아이에게 즐거움이 있어요. 그러면 쉬하고 싶을 때 자기 마음대로 쉬하는 거. 먹고 싶을 때 자기 마음대로 먹는 거. 그러면 몸이 어떻습니까? 굉장히 프리하고 자유로워요. 지 울고 싶을 때 울고, 지 갖고 싶은 장난감 자기가 딱 해야 되고, 안에 욕망이 있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잠자는데 깨워 가지고 젖 달라고 요구하고, 요구하면 애는 고민입니까? 즐겁습니까? 즐겁지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인간이 신체가 갖고 있는 도대체 윤리, 도덕과는 정반대로 그냥 내키는 대로 몸이 마음껏 욕구대로 그것은 욕망이라 하지 않습니다. 욕구대로 펼치는 이걸 쾌락이라고 했어요. 쾌락. 그런데 이 쾌락이 나이 10살, 20살까지 하면 돼요. 오줌 쌀 때 손도 안 대잖아요. 그럴 때부터 뭐야? 배변부터 가르쳐 주지. 개한테도 가르쳐주지.

오줌 눌때 여기서 누지 말고 화장실이 있으면 집에 가라 하죠. 그럼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걸 누가 이야기하죠? 집안의 어른이 이야기 해야 되죠. 어른이 누구죠? 아버지. 아버지 이름으로 뭐가 주어졌느냐? 통제가 이루어져요. 통제. 통제할 때 통제하는 매개가 뭐냐 하면 언어죠. 언어. 땠지? 맞는다. 그럼 혼나볼래? 혼나볼래? 땠지? 다음이 뭐예요? 언어지요. 그 언어가 철없는 아이 깨울 때 여기서 뭐가 생겼느냐? 의미가 생깁니다.

이 의미의 연결망이 바로 상징계예요. 의미의 연결망이 의미 많은 사람들이 말을 주고 받잖아요. 인터넷하고 말 주고 받죠. 말없이 살라카면 지리산 들어가면 되고 지리산 들어가도 말없이 못 살아요. 장날 와 가지고 신발을 하나 살라면 말을 해야 돼요. 그건 안 되잖아요. 말을 한다는 것은 의미를 실어서 상대방에게 내 뜻을 전하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언어의 동물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적당할까? 적당하지 않을까? 고민을 할 때 그 고민을 정하고 이거는 할 말 못할 말을 그걸 누가 정하느냐? 집안에 누가 있어요?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 기성세대 아버지가 훈육했고 양육하면서 내 자아 안에 언어가 담기고 내 안에, 정신에 언어가 담기고 의미가 담기죠.

언어가 담기면 이 상징계에서 제멋대로 했던 내가 의미와 언어로 인하여 어떻게 되느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게 뭐냐면 억압이에요. 억압. 세상 너 혼자 사는 거 아니다. 그렇지?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억압이죠. 억압으로 인하여, 여기서 뭘 하냐면, 억압이 나의 자기 맘대로 하는 그 신체적 쾌락을 억누를 때, 여기서 우울증이 나타나요. 정신병 정신병 또는 도착증, 정신병, 나는 나팔레옹이다. 이런 거죠. 나는 아버지가 없다. 이런 거. 나는 아버지가 아니고. 나는 내가 성인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누구를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나한테 누가 있다? 아버지가 있다는 뜻 아니에요? 아버지가 있으니까 아버지처럼 안 살래. 이래 되잖아요. 아버지 대신 찾는 게 뭐냐면 신을 찾아요. 왜? 신이 아버지니까 새로운 지시와 의미와 명령을 주니까, 그것이 자아 속에 있죠.

그런데 제가 뭐라 했어요? 상징성 속에 있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무질서와 불균형을 뭐로 커버했어요? 사회 타인들이, 남들이 그렇게 사니까 참 가정교육 잘 받았네요. 그렇게 사니까 참 훌륭하십니다. 당신 같으면 어디 가도 어느 회사에도 취업될 거예요. 라는 의미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버지께서 받은 교육, 학교에서 받은 교육대로 내가 조정해야 되죠. 조정하게 되면 뭘 잃어버려? 내 근원적인 올라오는 무질서한 쾌락을 잊어버리죠.

쾌락을 잊어버리니까 억압되고 잊어버리니까 여기서 뭘? 원하느냐 하면은 보상을 원하겠죠. 보상을 원하는데 보상을 원할 때, 그 보상을 원하는 그것을, 아 이건 뭐 해야 돼? (칭얼대는 걸 이거 가지고 증상이라고 해요.) 징후라고 이야기합니다. 징후. 정신병의 증상과 징후에 있는 정신병자들의 집단을 뭐라고 하느냐? 사회라고 해요. 어떤 사회? 현실사회죠. 현실사회. 그러니까, 이게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상징이라고 할 때, 상징은 실체가 없어요. 없는데 의미는 있잖아요. 늘 결핍될 수밖에 없는 의미. 그러니까, 이거는 진짜 보면 뭡니까? 망상의 세계에요.

허상의 세계인데 사람들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한계라고 했어요? 상상계에서? 나로부터 해서 나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나로부터 내 안에 갇혀 있으니까, 나와 나 사이의 상징계에 와서 누가 그게 누가 끼어들었어요? 아버지의 훈육이 끼어들었죠. 그리고 사장님의 훈육이 끼어들었죠. 지가 한 번만 더 하면 내쫓아낸다. 예 그렇게 하면 어디 가도 니 회사 안 받아줘. 그러면 그 사회에서 주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예요?

나의 명령체제로 아버지를 대신하는 아버지를 대신한 명령체제가 있대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에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나중에 돌아가세요. 없잖아요. 하지만 아버지한테 훈육받은 그 빈 그릇이죠. 빈 그릇에 아버지의 이름처럼 누가 지시하고 명령하지 않으면 본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못해서 더욱더 무질서 할때 그때는 뭐냐 하면 누구를 의지 해야 되겠죠. 그렇죠? 누구를 의지? 아버지를 아버지의 대타 아버지를, 어머니의 대타를 찾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사회에서 교회에서 말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신앙이라고 해요.

신앙. 신앙이 얼마나 육적이에요. 육적. 결국 그 신앙은 누구의 안정? 끌어오르는 자기의 본능을 위해서 억압하면서 사회에서 사람다운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기 조정에 나서면서 뭔가 불안한 나를 안정되기 위해서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아버지 같은 대상 그게 바로 상징계입니다. 그래서 회사 이제 힘든 일 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누구한테 보상해야 돼요? 힘든 작업하고 야근하고 누가 보상해야 돼요? 나한테 해야 되죠. 오늘 삼차갈까? 이런 거 있잖아요. 술 먹을까? 이게 뭡니까? 애쓴 나를 내가 달래줘야 할 때 유흥업소가 필요한 거예요. 유흥업소. 유흥업소 아니면 또 어디 가야 됩니까? 한화 한화가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화 롯데 삼성 야구 또는 6월에 열리는 월드컵 그러면 골프 골프 이야기 스스로 나를 달래줘야 이 사회에서 또 내가 기능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으니까, 그거 안 하면 짜증나서 진짜로 미칠 것 같으니까 사회에서 그걸 뭐라? 상징계에서는 자아가 없어요. 뭐냐면 자아가 없는 게 아니라 있는데, 그걸 감춰지고 뭐가 나서지요? 주체가 나서지요. 주체가 사람들에게 팔릴 수 있는 상품화된, 퇴직하고 나면 나중에 상품 가치 또 아무도 사지도 안 해. 그럼 어떻습니까?

이 상상계에서는 인간은 누구를 원한다? 내가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원하죠. 대화하는 상대. 나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줄 수 있는 상대. 나의 거울. 이 상상계 이게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이거는 이 상징계는 언제 없어지냐 하면 자연인이 될 때나, 요양병원에 들어가면 지마음대로 오줌 싸고, 지마음대로 자고 싶을 때 잘 때, 이걸 사회에서는 사람으로 봅니까? 시체로 봅니까? 거의 귀신으로 보죠. 귀신이 되게 되면 요게(상징계) 없어져요. 뭐는 남아 있어요? 끝까지 가는가?) 중얼거리면서 자기하고 대화하고 나이 많아서 저러다가 진짜 귀신 됐다. 진짜 죽어버려. 그러니까, 어떻게 봅니까? 이 두 개만 있어도 이 사회에서는 설명을 다 한 거죠. 이 사회에서 설명을 다 한 거죠.

그런데 실재계라고 하는 것은 왜 필요하냐? 실재계는 이 두 개 상상계와 상징계의 나를 자꾸 건드려요. 이 실재계가 건드린다고요. 왜 건드리냐 하면 이유가 이래요. 여러분 해와 달과 별이 내 마음대로 움직입니까? 아니죠. 그렇죠? 들풀이나 참새가 시간 따라서 참새가 나가는 거 아니잖아요. 지 맘대로 하죠.

내가 통제하는 내 세계, 상징계. 현실 세계 그리고 내가 나하고는 항상 자기하고 이야기하는 상상계 이것만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해와 달과 별과 그러니까 갑자기 내려오는 폭우. 오랜만에 가족끼리 화목하게 산에 갔는데 갑자기 예상 밖에 폭우가 내려 가지고 텐트가 차고 다 떠내려가서 털털 빈몸으로 내려올 경우에 그때 어떻습니까?

그 해와 달과 별과 그 바람과 구름을 누가 통제해요? 하나님이 만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면 어느 세계에 속합니까? 이 상징계에 속해요. 상징계는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실재계의 특징은 뭐냐? 이겁니다. 의미 없음. 의미 없음이 누굴 구박한다. 평생. 나를 구박한다. 예측 불가. 우연한 사건이 누구를 구박한다? 악착같이 내가 나로서 살아볼라꼬 그렇게 애쓰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나를 여기 자아와 이 주체를, 의미 없는 것 의미 없으니깐 언어로 표현이 안 돼요. 언어의 표현이 안 되지만 손에 잡힐 수도 없어요.

해와 달을 멱살 쥐고 달 이쪽으로 나와 할 수 없잖아요. 그래 놓고도 내가 없는 건 없는 겁니까? 내가 없다고 해서 해와 달이 없는 거예요? 아니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해 달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평소에 사는 것은 자기 중심으로 살면서, 그러면 자기 중심으로 살면서 모든 것과 자기와 관련돼서 살았거든요. 그게 무슨 세계? 현실 세계잖아요.

이 현실 세계인데 천문학자들이 북극성 연구하는 거하고, 농사짓는 사람이 북극성 연구하고 같아요. 달라요. 다르지요! 다르죠?

북극성이 있다. 그걸 객관적으로 보는 과학자 그리고 첫 번째로, 본 과학자라는 것은 별이라는 별은 실재계에 대해서 뭘 여기다 투사합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수학 공식과 이거 가지고 의미를 투사하죠. 의미를 알아서 박사학위를 논문을 받으면 이 자본주의 현실 세계에서 자기에게 뭐가 돌아와요? 돈이다. 돈 돈이 있으면 자기 세포는 그 돈으로 양식을 사 가지고 세포를 돌리고 자기가 산다 살아있다를 성취할 수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게 주체예요.

자아는 돈 없어도 자아가 될 수 있어. 혼자서 이렇게 돈이 누워. 자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체는 돈 없으면 주체가 될 수가 없지요. understand. 이해돼요?

나 혼자 있으면 나 혼자 있을 수도 있어요. 곧 굶어 죽겠지만, 돈 없지. 하지만 사회에서 나 혼자 있을 경우에 나를 사람 취급을 안 한다니깐요. 당신 신용, 은행에 잔고는 얼마 있는데, 주머니는 얼마 있어? 저리 가 없으면 가. 이게 뭐예요?

눈에 보이는 현실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래요. 돈이 없으면. 여러분 다 주의해야 됩니다. 당당히 챙기세요. 돈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자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에요. 혼자는 궁시렁궁시렁 할 수 있어요. 그냥 현실에서는 안 받아줘요. 왜? 신용이 없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서 의미를 신용을 안 주니까 의미를 줄 수가 없어요. 내가 다음에 갚아줄게. 그 의미는 소용 없어요. 한두 번 떼먹나? 니가.

아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상상계에서는 자기 안에 갇혀 있죠.
자기 안에 갇혀 있는데, 상상계에 있는 아이가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서 아버지한테 교육을 받잖아요. 니가 산다는 것은 쾌감이다. 죽으면 아픈 거야. 감기 들리니까 아픈 거 알지? 그리고 어쨌든 간에 니가 살아나갈 때 건강하게 살아야 돼. 그럼 건강하려면 건강에 뭐가 필요한지 알아? 돈이 필요하지. 아빠는 언제까지 니한테 돈 못 대줘. 니가 나가서 공부 열심히 해 가지고 직장생활을 하면 남들이 니 노동을 대가로 너한테 돈을 줄 거야.

돈 주면 니는 살아 죽어? 살아요. 그러면 니 기분 좋아 기분 나빠? 기분 좋아요. 그게 바로 그게 니 사는 거야. 라고 가르쳐 줬잖아요. 줬는데 실재계에서 뭡니까? 실재계에서 이건 우연한 사건이죠. 이거는 내가 통제 못하죠. 내 마음도 통제 못하지만.

이게 실제로 바깥에 통제 못 하죠. 그리고 갑자기 뭐가 왔는데 거기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아는 의미 사슬의 외적 요소가 내 안에 갑자기 사건으로 벌어졌잖아요. 그리고 나는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지요. 실재계 이게 딱 접하는 순간 갑자기 누가 의미가 없어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자아든 주체든, 나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걸 자극 주는 세계가 무슨 세계입니까? 이게 실재계예요. 실재계.

자 아까 별 북극성 별 이야기 합시다. 과학자는 별을 연구하면서 뭐가 주어져요? 자기에게 돈이 주어지죠. 연구해서 논문 통과하면 자기 교수 자리 고정직이 주어지죠.

그럼 농부가 별 보는 거. 그럼 별 볼 일 없어요. 그럼 별 볼 일 없지요. 이건 뭐냐 하면은 상상계와 상징계에서 인간은 객관적이라고 말을 하지만 모든 인간은 뭐다? 주관적이에요. 자기 주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한테 되돌아오는 의미의 연결망 속에 인간은 오롯이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삽비라 그리고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거 어떻습니까? 그거는 자기가 예상했어요? 예상 못 했어요? 예상 못 했죠. 이 실재계에서는 이 전체를 육으로 봅니다. 니 원대로 사는 것은 니가 좁혀진다. 현실 세계라고 좁은 안목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 그 세계가 뭐냐? 육의 바깥 세계에 영이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고맙게도 친절하게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강남강의 육의 한계B
사도행전 9:40, 260519 이근호 목사님

영적 세계라 하는 것은 성령이 와야 알아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비해서 보이지 않는 걸 영이라 한다는 것은 기꺼해봐야 육의 생각입니다. 거기서 종교가 나오고 신학이 나오고 교회가 나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교회라 하는 것은 사람을 위한 모임이 교회가 아니에요. 남들이 그렇게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하나님은 사람을 위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아나니아 삽비라 죽일 때 죽인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니가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인것이라 합니다. 난데없이 성령을 언급해버렸어요. 니 눈에는 이 교회와 사도들의 활동만 보이지? 그렇게 보이지? 그게 전부 다인 줄 알지? 아니야? 성령이 있어. 성령을 속이기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죠. 그 죽음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그걸 애석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창조를 재편해요. 시편104편에 나옵니다. (시편104편 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성령께서 모든 걸 창조하기 때문에. 오래 살아도 죽고 일찍 죽어도 죽고 태어날 때부터 죽었기 때문에 그다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에요.

인간이 죽는 게. 원래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결국 인간의 육의 한도 바깥에서 뭐가 와야 된다는 뜻인가요? 그래요. 육의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고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나와 관련돼 있어요. 나와 나는 배후에 누가 있냐 하면 나라는 게 원래 없는건데 여기 마귀가 관련돼 있어. 마귀가 나라는 것을 만든 거예요. 나를 만들었어요. 나라는 것은 뭐냐?

쉽게 말하면 나라는 것은 뭐냐? “내가 아는 원리로 내가 살아가는 살아가는 것”

이게 나거든요. 내가 알고 있는 원리로 내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거. 그러면 들풀에게 나가 있습니까? 참새도 나가 있어요? 없어? 없지요. 그런데 왜 살지요? 성경에 보면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돼 있잖아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 그게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어린아이 같은 경우에.

그래서 주님께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하늘나라 못 간다 했어요. 지금 사단이 어디서 났냐 하면, 나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사단이 난거죠. 진리를 알고 싶다 하는데, 진리를 누가 알고 싶은데요? 내가 알고 싶잖아요. 거기 진리를 알고 싶다 할때 누가 자꾸 방해 해야 돼요? 나의 존재를 전제로 할 때 방해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비켜서 주께서 일을 일으키면 어떻습니까? 그때는 어떻게? 영이 돌겠어요? 안 돌겠어요? 돌겠지요. 그걸 구약에서 말해줍니다.

구약에서. 내가 가만히 있는데, 주께서 훅, 훅이죠? 훅 들어온 거예요. 오늘 제목을 훅으로 할까? 훅 들어온 거야. 훅. 예. 이삭이 자기 상속권을 줄 때, 축복 줄 때 이미 내정돼 있죠. 누구한테 주기로 했습니까? 큰아들 에서한테 주기로 돼 있죠. 너한테 줄게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먹고 싶은 사냥한 고기를 다오 이거예요.

이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이거는 뭐 이미 축복권은 형식에 불구하고, 이미 다 내정돼 있어요. 내정돼 있다고요. 공천 다 내정돼 있습니다. 다 내정돼 있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것은 그 이삭이 야곱을 에서로 착각했다는 거예요. 자, 이 정답은 이삭이 야곱을 에서로 착각했습니까? 아니면 야곱이 거짓말을 했습니까? 몇 번입니까? 문제 너무 어렵게 냈나? 몇 번이 정답이에요? 착각했어요? 착각했습니다. 왜 착각해? 왜 착각했느냐? 이삭은 자기 할 도리를 다 했어요. 면밀하게 만져봤고, 목소리는 좀 이상한 톤이 이상한 말은, 손 만져봐서 털 있는 것. 이것은 하루아침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별미를 먹었고 약간 일찍 왔다 하는 약간 그 낌새가 이거 수상하다 싶으면 그냥 넘어갔고, 결국 이삭은 이래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본인이 몰랐던 겁니다. 본인이. 그뿐만 아니에요.

어느날 야곱이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습니다. 형한테 맞았어요? 아니면 동네의 불랑배한테 맞았습니까? 안 맞았죠? 야곱이 하룻밤 지나가는데 다리를 절었다. 나는 다리 절고 싶어. 이런 게 있었습니까? 없지요. 어느 사람한테 얻어맞지도 않았지요. 자, 성경 덮고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하룻밤 자고 난 뒤에 다리를 절었다. 다음 중 몇 번이 원인일까요? 1번 불량배한테 맞았다. 2번 잠자다가 자세 꼬여서 아프다. 3번은 어젯밤에 운동 너무 해가지고 지쳤다. 4번은 하나님의 영이 와서 쳤다, 천사가 와 쳤다. 이렇게 할 때 4번이라는 게 왜 끼어들죠? 납득할 만한 원인 결과가 의미가 성립되려면 그 원인도 납득돼야 되고 거기에 절차로 그 모든 mechanism의 원인 결과와(mechanism이 딱 결과와) 둘 다 납득이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4번 같은 경우에는 뭡니까? 어젯밤에 천사가 밤중에 나타나서 야곱에게 씨름했다라는 사실을 야곱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야곱이 처음에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지요? 말씀은 그렇게 오는 거예요.

말씀은 뭔가 차고 얻어 맞은 (멀쩡한 나 되기 위해서 공들이고 있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나를 쪼다로 만드는 예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아이고 내가 인간을 왜 사나 하는 조로) 만들어 주시는 공통점을 가지고 누가 찾아옵니까? 주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사울아 사울아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죠. 왜? 현실 세계의 그게 전부니까 눈에 보이니까.

이게 전부니까 사상적으로 예수 믿는 이단사상을 공격했을 뿐이죠. 이게 오늘날 평소에 우리가 악마의 존재가 자꾸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거는 주님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악마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악마한테 늘 지시를 받고 있으면서 이거는 악마가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악마가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에 대해서 자꾸 악마는 그 이야기를 못 듣게 만들어요. 자꾸 그 자리를 피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다 이뤄버리면 누구 할 게 남아 있지 않아요. 누구 의미가 남아 있지 않잖아요. 상상계 날라가죠. 그다음에 누구 상징계 날라가 버려요. 의미 있게. 무당이에요. 무당. 사도행전의 귀신들린자. 무당 특히 귀신들 특징은 여기에 상징계도 넘어서고 상상계도 넘어선 자에요. 무당이 특이하게. 그런데 무당은 누구한테 매였어요? 이게 악마한테 매였잖아요. 귀신한테.

실재계에 매인 거예요. 그걸가지고 뭐라 하느냐면, 무병. 병이 와도 원인을 모르겠는데 아파, 자꾸 아파요. 딴 걸 못해요. 그런데 무당질하니까 어떻게 돼요? 좀 이렇게 증세가 호전돼요. 정신과 정신의학에서는 딱이죠. 딱입니다. 자기의 춤추고 싶고 허슬어 지고싶은 자기의 쾌락을 삶에서 용인을 안 해주니까 그동안 억눌렀던 데서 오는 예 괴로움을 이제는 눈치 코치 안보고 무당질을 하니까 작두 위에 올라가니까 신바람 이 박사 되어 가지고 병이 치유가 된 거죠. 그래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죠.
(행19: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귀신이 귀신 같아요. 아까 그 사울이 어느 편에 속했냐? 육의 편에 속했냐? 영의 편에 속했어요. 영의 편에 속했죠.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 설교해서 설득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한테 일어난 이 특이 현상이 나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고 이렇게 일어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말씀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원인 없이 그냥 순풍순풍 순하게 (뭐 얻어맞고 이거 없이) 그냥 순하게 그 말이 맞네? 그럼 그 말 맞잖아. 하나님이 자기 아들 보내서 죄값을 치렀다. 그거 하나님이 잘 하셨네. 아무 그냥 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안에 누구가 개입되지 않아요. 자기의 의가 감정과 자기 지식이 개입됐어요, 개입이 안 됐어요. 전혀 개입되지 않은 거예요. 이거는 그 성경에서 찾아보니까 그게 내가 원함이 아니고 누가 원함이다? 주님께서 나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예 그 자연스러운 현상이 난 겁니다.

이 실재계에서는요. 실재계 쪽으로 간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술가들이에요. 예술가들은 그 예술에 미쳐야 돼요. 마약을 하든지 뭘 하든지 미쳐야 새로운 창의성이 나와요. 기존의 상징계에서 나왔던 작품 말고 특이한 작품은 이게 실재계에서 무당한테 얻든지 귀신한테 하든지, 뭔가 특이점이 나와야 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 먹음직하고 그 다음에 보암직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탐스럽기 하죠.

이것을 이 숨어 있는 잠재되어 있는 잠재를 현실로 끌어올리는데 여기 예술이 동원되죠. 예술. 피카소니 누구니? 그 당시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아요. 지나가다 보니까 야 이게 우리의 아름다움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이구나 이래 되죠. 그러면 성경에서 무화과 나무 따먹었기 때문에 이런 사단 난 거예요. 그럼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뭘까요? 여기 로마서에 나옵니다. 로마스 10장 15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롬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아름다운 뭐라 했죠? 아름다움 아름다움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예 아름답도다. 예 뭐가요? 뭐가 아름다워요?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는 자의 뭡니까?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에서 예언된 겁니다. 사도바울은 본인을 포함해서 많은 성도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은 완전히 인간 자신의 자아 주체를 개박살 내는(이거 박살 나면 뭐 얻는다가 아니라) 그냥 나는 개 박살 대상 고걸로 끝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개 박살 나야 돼요.

야곱이 야곱은 그냥 육일 뿐이에요. 육이니까. 내가 육일 뿐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누굴 만났을 때? 영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는 거예요. 영을 만났을 때. 야곱이냐 에서냐 에서냐 야곱이냐 그거 뭐 자체 내에서 혼돈이 나와버리니까 누굴 탓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삭은 야곱을 탓하지 않아요. 자기한테 거짓말한다고 탓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굴 건드렸다? 나를 건드려 내가 착오를 일으키도록 건드린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난데없이 자기 이삭을 바쳐라고 제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이런 것을 신약에 와서는 방금 구약 이야기 했잖아요. 이제는 신약에 본격적으로 됩니다. 그게 마치 폭격할 때 편대가 와서 폭격하듯이 뭐냐? 말씀이 와서 폭격을 해버려요. 말씀이 육에 대해서 영적으로 폭격을 해버린다고요. 그러면 그 절차가 어떻게 되냐 하면은 먹는 거 입는 게 좋다. 몸이 튼튼한 게 좋다. 하는 그 과정을 몸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보다 뭐가 더 중요하냐? 굳이 안 죽어도 굳이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더라도 뭐가 아름다워요? 말씀이 아름다운 거예요. 이걸 쑥 하고 그냥 받아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도 바울과 한 편이다. 같은 편에 속한 사람이에요.

(막 5장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마가복음 5장 40절에서 41절에 보면 예수께서 예 39절에 들어가서 저희께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아까 무슨 우리 뭐 배웠습니까? 상상계 고다음에 상징계 말고 뭐 배웠어요? 아무 의미 없는 상징계에 포함되지 않고 그 외에는 의미는 끝 그 이상 다른 의미 없음 했는데 여기에 주님께서 어떤 단어를 썼나요? 얘는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의미죠. 그러니까 40절에 저희가 비웃더라.

야곱이 천사 만날 때 야곱은 자기를 죽이러 온 자객인 줄 알았지. 천사라는 걸 몰랐어요. 이처럼 주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살아 있으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우리가 살아 있으면. 저희가 비웃더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비웃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와 부모와 함께 있다가 아이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니가 일어나라. 살아났지요. 자 이제 문제 나갑니다. 이 소녀가 살아났을 때 영이 되었어요? 육이 되었어요? 육이 되어있죠.

그러면 영은 어디서 있습니까? 영은 어디있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말한 그게 영이죠. 말한 그게 영이에요. 내가 살아났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죽은 인간을 향하여) 말씀을 전할 때 죽은 인간은 그 말이 뭔 뜻인지를 모릅니다. 심지어 당사자도 뭔 뜻인지를 몰라요. 앉은뱅이를 일어나 걸어 할 때 앉은뱅이도 뭔 뜻인지 몰라요. 그냥 일어났어요. 누가 이렇게 했느냐?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게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우리가 순간적으로 훅 들어온 거예요. 말씀이 나한테 훅 들어온 게 아니고 내가 말씀에 쑥 빨려 들어간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는 말씀의 사람이 되면서 그걸 영의 세계 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나 바울이나 지금 말씀 전파에 있어요. 예 여기에 아까 봤지만 로마서 10장 나오죠. 로마서 10장에서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죽었다 살아나야 구원 됩니까?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게 로마서 10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내 전한 말을 믿으면 믿고 믿으면 니가 구원을 얻으리라 해. 왜냐하면, 그 말씀이, 그 의미가 인간 세계에서 없는 분이 말하거든요. 그게 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를 받아들이면 그러면 우리는 인간 편에 속한 게 아니고 인간에서는 이미 죽었고, 죽어야 사니까, 말씀으로 죽이고 말씀으로 살아 나니깐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거예요. 상상계에서 우리는 나를 못 떠나잖아요. 말씀이 오니까 못 떠난 나를 옴팍 뭐로? 이중 포위해 버렸어요? 나만 아는 나만 챙기고 내 이익만 챙기는 나를 뭘로 포위해 버렸습니까? 말씀으로 완전히 카바해서 포위해 버리니까 죽은 데서 살아나버린 거예요. 나는 죽고 말씀이 그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 다 이루었다. 함이 이렇게 죽은 나를 이렇게 살리시는 거예요. 어디 안에서? 말씀 안에서 주 안에서 살리시는 거예요.

뭐가 아름다운데요? 이 세상에, 뭐가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겁니까? 말씀입니다. 누군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라오라. 이걸 누가 할 수 있는 사람 없어요. 그러나 말씀 안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는 면면을 우리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평소에 하는 말. 나는 뭐 내가 한게 있어야지 이 말이 바로 십자가 지고 죽어가는 예수님의 경로에서나 나올 수 있는 제3의 영역, 상징계, 상상계 아닌 다른 영역에서 오는 주의 말씀이 입을 통해서 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럼 구약의 예를 들게 되면 여러분들을 확실하게 보여줄 겁니다. 예 아 요건 한번 찾아봐야 되겠네 이거는. (역대상 21장 1절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육에서 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예 다윗 경우를 한번 봅시다. 역대상 21장 1절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개수하게 하느라. 여기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숫자를 숫자 개수하는 게 누가 그렇게 시켰습니까? 사탄이죠. 영의 세계에 속한 악마가 그렇게 했던 겁니다. 악마가 다윗이 정신 차려야 돼. 똑똑하게. 이게 소용없어요. 하여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리에 대해서 늘 구멍 뚫렸습니다.
뭐 방어 체제 소용 없어요. 우리 방어 체제 아무 소용 없습니다. 자기를 지키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할 필요도 없어요.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말씀만 우리에게 주어지면 돼요. 인구조사를 했는데 인구조사를 하면서 21장 제일 마지막을 한번 보겠습니다.

(역대하 21:29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성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었으나)

29절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때 기브온 산당에 있었으나, 기브온 산당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지금 다윗 성전짓기에서 기획안을 제시한 자는 누굽니까? 솔로몬이 아니고 누구예요? 다윗이죠.

(역대상 22:1~6, 1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2 다윗이 명령하여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3 다윗이 또 문짝 못과 거멀 못에 쓸 철을 많이 준비하고 또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놋을 준비하고 4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5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 6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

22장에 넘어가면, 다윗이 가로되 이건 여호와의 전이요 이스라엘 번제단이다. 다윗이 명령을 해서 이스라엘 땅에 이방 사람 모으고 속속 모아 가지고 그다음에 뭐합니까? 백향목 준비하고 결국 뭐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5절 6절에 보면 7절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뭘 지어라?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기드원에 있던 언약궤가 언약궤가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언약궤 있으면 그냥 텐트만 치면 그게 성전되는 겁니까? 아닌 거예요? 아니에요. 그 당시 언약궤는 예루살렘에서 8km 떨어진 기브온 산당이 있었어요. 그 산당에는 처음에 솔로몬이 성전 짓기 전에 산당에서 1천번제를 드린 장소가 그 산당입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모셔오는데 예루살렘에 늘 두지는 않았어요. 그걸 기브온 산당에다가 넣은 거예요. 이동시킨 거예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무엘하 6장에 보면 그 언약궤가 에돔의 집에서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오잖아요. 나팔 불고 난리 났지요.

(삼하6장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그래서 그 부인이 사울의 딸 미갈이가 거기서 좀 어떻게 내 남자가 다른 여자들 앞에서 체면 구기고 춤추느냐 질투해서 짜증낼 때 어떻게 돼요? 미갈은 어떻게 돼요? 애기를 못 낳아요. 저주 받았습니다.

잠깐 응용해볼까요? 저 남편은 내 남편이라 할 때 앞에 남편 앞에 뭐가 붙습니까? 나가 붙죠. 그러면 다른 남자, 다른 남자 이 시간 없어요. 내게 내 소유가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는 무슨 계라고 했습니까? 상상계 인간은 내 것과 대화하는 거예요. 내 것과 대화해요. 85살 먹은 할머니가 뒤늦게 미술대학에 가서 졸업했어요. 인간극장 지금 하고 있어요. 자기 어릴 때에 못했는데, 어려울 때마다 거울 보고 하는 말이 힘내라 힘내라. 이렇게 자기가 자기보고 격려하는 거예요. 이 인간은 죽을 때까지 못 벗어나요.

그런데 지금 다윗은 뭘 보고 있습니까? 언약궤를 보고 있죠. 언약궤 앞에서 다윗은 지금 깔끔하게 옷을 차리고 예의를 갖춥니까? 그거는 어디에 해당돼요? 상징계에서 왕은 체신을 지켜야 됩니다의 의미로 통하죠. 그게 남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의미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가치는 인간들이 체면을 가지고 마중 나가면 그 하나님의 가치가 죽어버려요. 나는 그 앞에서 내가 지금 체면을 지키든 안 지키든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진리 그 자체로서 빛나야 되는 거예요. 그게 아름다운 거예요.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고생해도 그게 자기한테 상이라고 했어요. 왜? 진리가 진리답게 나오려면 고난 받아야 되니까. 핍박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고난으로 나타날 때 이게 바로 영이 육에 나타날 때(침투할 때) 징후고 증상이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복음 기뻐하라. 내 이름으로 핍박받고 비난받은 것을 기뻐하라. 하늘나라 상이라 신자들도 이와 같이 고생했다. (마태 5장 12절 13절 말씀 )

(마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지금 성전이 있어요? 없어요? 성전은 없어요. 없는데 지금 다윗이 없는 성전을 만들려고 합니다. 장소가 뭐냐 장소가
(역대상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7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더라
22 다윗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넘기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내게 넘기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제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전염병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하니 25 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27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역대상 21장에 보면 장소가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대표로 천사의 칼을 맡습니다. 천사의 칼을. 천사는 현재 7만 명은 죽는데 7만 명에서 멈출 기세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다 죽여버릴 거예요. 다 죽여버릴 기세로 왔다 이 말이에요. 그때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재단과 화목제를 쌓고 재단과 번제단을 드리면서 할 때, 26절 하나님께서 불로서 응답을 했죠.
(역대상 21:25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26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불로서 응답했다는 말은 다윗이 다윗이 드린 재단의 자리에 상상제, 상징제 다윗이 드린 재단들 자리에서 뭘로 대체되었어요? 그 눈에 보이는 인간의 바친 재물과 재단 재물을 인간이 바쳤잖아요. 바쳤으면 인간의 손때가 묻었겠죠. 손때가 묻은 것을 뭐가 와서 그것을 다 없애버립니까? 하늘의 불이 떨어져서 있음, 인간의 성의가 있음, 인간의 신앙이 있음 있음의 자리가 불이 오니까, 어떻게 돼요? 없음의 자리로 바뀌죠. 성전은 바로 없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성전입니다.

성전. 그게 언약궤의 취지와 맞아요. 왜? 언약궤 있는 곳에 인간이 만약에 한 발짝 들어가면 어떻게 돼요? 인간은 죽어 나옵니다. 없어요. 없애버립니다. 없는 무서운 세계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 세계에 침투했다는 자체가 인간한테는 위기예요. 위기입니다. 현재 세상에 철학사에 많은 실재라고 하는 것은 위기가 아니고 인간에게 많은 실재라고 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쾌락과 흥분 이런 걸 말하거든요. 그러나 성경에서의 실재계라 하는 것은 인간은 죽어 마땅한 세계. 인간은 죽어 마땅하고 인간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대기하고 있는 세계가 실제계예요.

그게 야곱에게 찾아왔고 그게 이삭을 하여금 착오를 이렇게 만들었고, 그게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한 거예요. 그러나 이 철학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안 받았으니까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인간 선에서 생각하다 보니까 인간은 상상한다, 못 벗어난다.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 출세하려고 성공하려고 의미를 찾고 하는데 인간의 모든 과학, 아까 에너지 어땠잖아요. 에너지 전부 다 의미잖아요. 그거 다 어디에 속합니까? 상징계에 속해요. 인간의 허상세계에 속한다고요.

허상세계지만 그들이 몸이 살아있으니까 허상 아니라고 우기죠. 그런데 그 세계 살다 보니까 어떻게 내부적으로 너무 속이 상하죠. 정신 스스로 핍절하고 직장 오래 했다고 정말 60대가 퇴직하고 난 뒤에 그 다음 어디 갑니까? 동남아로 놀러 가죠. 스스로 자기한테 위로를 하는 게 고생 많이 했다. 좀 쉬어도 괜찮다. 해외여행 한 1달 동안 크루즈 여행 갔다 올래? 갔다 와 또 병 걸려가지고. 아니 그건 악담하면 안되죠? 그런데, 역시 인간은 예술이 최고예요.

예술은 뭐냐 하면은 아까 자기가 성깔대로 사는 거야. 주체할 수 없는 성깔자로. 그게 비디오 아트로 유명한 사람 누굽니까? 백남준 그런 사람들. 예술가 다 그래요. 거의 미쳐야 예술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마귀자식아 딱 기다려. 내가 너를 저주하겠다. 이게 실재계입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못 지키니까 말씀이나 언어에 우리가 합치 못하니까 마땅히 죽어. 마땅하죠. 죽여놓고 주께서 문둥병자 어떻게 합니까? 문둥병자가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주께서 그걸 고쳐놓고 어느 쪽으로 보냅니까? 레위기에 있는 말씀 쪽으로 가버리죠.

그 문둥병을 자비로 고쳐놓았을 때는 반드시 레위기 14장, 15장에 나온 그 재물이 있어요. 그 제사를 이루기 위해서 내가 십자가 죽으러 왔다. 이게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다윗이 그 제사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있으면서 자기가 제사장이 돼요. 제사장이 될 때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서 불로 나타냈죠.

그렇다면 이 장소 다윗이 제사장 되어서 재물 드려서 응답받은 이 장소가 어떤 장소입니까?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죽이려고 했던 그 장소잖아요. 죽이려고 했던 그 작업이 육적인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바꾸는 필수적인 절차임을 알죠? 그게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 예수님은 다윗언약을 준수하러 왔고,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으로 오셔 가지고, 죽죠. 그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용서하는 십자가가 되는 그 원리와 합치되죠. 이게 바로 주께서 일관되게 일하는 거거든요.

그럼 다시 사도행전 다시 가 봅시다. 사도행전에서 왜 베드로가 죽은 자를 낫게 하고 그 다음에 초대 교회 때 그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이랬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이거는 핍박 받기 전이죠.

자, 핍박이 시작되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어디로 다 도망을 쳐요? 어떤 사람은 잡혀 죽고 어떤 사람은 전 세계로 퍼지죠. 전 세계로 퍼지면 전세계에 퍼진 그 사람 뒤따라서 누가 따라갑니까? 이방인의 사도가 누구예요? 사도바울이 뒷따라 가는 거예요. 뒷따라 가서 그 당시에 이방인한테 전합니까? 유대인한테 전해요. 회당이 어디 가서 가요? 회당에 들어가죠. 유대인들 회당에 전하는데 듣기는 누가 들어요? 이방인들이 듣죠.

이방인들이. 이 말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몰라도 되고 예수 몰라도 상관없어요.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에게 하늘에서 뭐가 오냐? 성령의 세례가 와요. 성령의 세례가 오니까 누가 부끄러워요? 유대인들이 부끄러운 거예요. 그래서 좀 어려운 대목인데 한번 봅시다. 이 어려운 대목하고 음악 노래 한번 봅시다. 3장 2절에서 3절요. 갈라디아스 3장 2절 3절 좀 어려워요.

(갈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거는 어렵다고 내가 먼저 당부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이거예요. 지금 말씀의 세계가 있잖아요. 말씀의 세계. 이건 말씀이 없지요. 말씀이 있어도 말씀을 추방했잖아요. 예수님을 추방해서 보냈잖아요. 말씀 없는 세계죠. 말씀 없는 세계. 들어올 때는 반드시 뭐냐 하면 핍박으로 와요. 고난으로 말씀이 이 세계를 이런 식으로 왔기 때문에 죽은 자가 살아났다.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핍박이 올라옵니다. 여기 반드시 말씀이 그냥 쓱 하고 들어온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들어왔는데 누가 가만두지 않습니까? 말씀 없는 세계가 예수님을 포위해서 구박했듯이 그리고 유대인들이 스테반을 포위해서 돌로 쳐죽였듯이 이 말씀 없는 세계의 사람들이 성령세례 받은 이 성도를 영의 사람을 육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상징세계에서 또 이해가 안 되죠. 현실 세계에서. 현실 세계에서는 무슨 세계라고 했습니까? 의미, 서로 아는 의미를 통용하는 세계에서 아무 행함도 없이 아무 한 것도 없이 착한일 하지도 않았는데 천국을 갔다. 이들이 가만두겠어요? 안 두겠어요? 안 두고 핍박하겠지요.

오늘 교회도 핍박하는데 그 사람들이 가만두겠어요. 그래 부모한테 효도해야지 맨날 그러잖아요. 이래야만 무슨 소린지 모르는 거예요. 이게 달리다굼하고 똑같아요.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나요? 그런데 살아났잖아요. 어떻게 착한 일도 안 하고 율법도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구원받았잖아요. 그래 어떻게 모르는데? 구원은 받았단 말이죠. 아니 말씀이 말씀대로 들어오는데 어떻게 해요? 아니다. 하는 게 더 어려운데. 주께서 십자가 지고 사흘만에 부활했다. 맞잖아. 저쪽에서는 미쳤어.

니가 그게 왜 맞는데? 한번 따져볼까? 따져볼까가 뭡니까? 무슨 의미 따져볼까가 뭐예요? 이게 상징계 아닙니까? 따져볼까가? 어떻게 몸이 아파서 니가 기도하니까요? 아니야. 그냥 왔다니까. 백날 몸 아파도 교회 다니고 몸 아파도 구원 안 못 받아요. 그냥 성령이 와서 받는 거예요. 내시가 뭡니까? 성령 와서 오니까 이사야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그거 알았잖아요. 주저하지 않고 세례 받았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그 대목에서 이게 어려운 2장 내가 너에게 이걸 알게 하면 너희가 성령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에서냐 이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느껴지죠.

니가 복음을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알게 된 것은 니가 율법 행위로 얻은 것이냐 (행위로 얻으면 누가 살아 있어요? 상상계가 살아 있죠? 예 그 상징계가 살아 있잖아요. 나는 율법의 흠이 없는 자로다. 이게 상징계 아닙니까?) 남들이 보기에 니는 완전해. 사도바울에게 이게 상징계잖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 이거는 성령 받으면 끝이잖아요. 그런데 뒤에 말이 이상하잖아요. 성령을 받았는데 어떻게 율법의 행위로 빠져들어갈 수가 있어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되게 어렵다 이 말이죠. 이거 왜 그러냐? 성령 안 받았어요. 안 받아놓고 성령 받은 흉내를 내는 거야. 성경 말씀을 복음 말씀을 달달 외우면서 신학까지 공부하면서 늘 감사가 나온 게 아니고 늘 주체가 나오고 자아가 나온 게 좀 더 완벽하게 좀 더 완전하게 누가 봐도 신앙인처럼 해야지

이게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뭐라고? 육체로 끝났죠. 육체로 마감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사도가 뭐였던 사람이에요? 육에서 시작한 사람인데 뭐가 되었어요? 성령이 되었죠. 육에서 해서 성령이 된 이 사람 중심으로 이 사람 근방으로 중심으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빠진 사람들이 포진돼 있다는 뜻이에요. 포진돼 있다. 그래서 교회 나오고 사도바울 핍박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이 육의 한도에 대해서 한번 나눠주세요. 죄송합니다. 육의 한도. 인간의 육이 어떤 한도가 있는지 이것은 팝송인데요. Silver threads among the rest, among the gold인데 영어 가사가 되게 쉬워요. 한번 보겠습니다. Darling, Im growing old. 드디어 내가 늙어가고 있어요. 실버드레스 어몽드 골드 금발 사이로 은빛 머리카락이 보이네요. Shine upon my brow today. 오늘 내 이마 위에 빛나고 있어요. Life is fading fast the way. 인생은 참 빠르게 흘러가네요. 그러나 My darling will be 내 사랑. 당신은 내게 언제나 젊고 아름다울 거예요.

이거 보세요. 늙어가는 것을 부정합니까? 인정하죠. 인정하는데 뭐라? 언제나 젊고.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는 영의 세계에서는 복음은(아는데 복음 벌써 다 알았어) 아니야. 말씀은 내게 부딪히는 이 고난 가운데서 날마다 갱신돼요. 이 말씀이 다 아는 말씀. 좁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이 다 아는 말씀이. 인생을 우리 육신이 살아있는 계속 갱신돼 가지고 새로운 감사와 기쁨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예스 그래요. 내 사랑 당신만은 언제나 젊고 아름다울 거예요. 여기 2절 가사는 안 했는데 2절 가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You have never old grown. 당신은 결코 늙지 않았어요. 늙지 않았어요. 늙은 거 늙다고 분명히 언급해 놓고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늘 젊고 아름다워요. 늙지 않았어요라고 되겠어요. 이 아름다운 노래 예 1절만 잠시 한번 들어봅시다. 또 유튜브 저작권 해대니 신경 쓰여 1절만 한번 들어볼게요. 예 1절만 가서 한번 봅시다.

Darling, I am growing old. 여보, 나 늙어 가고 있소
Silver threads among the gold 이젠 금발 속에 은빛 머리카락들
Shine upon my brow today. 내 이마 위에서 희끗거리고 있소.
Life is fading fast away. 인생은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소.

But my darling, you will be, will be 하지만 내 사랑, 당신은 내게
Always young and fair to me, 언제나 젊고 아름다울 것이오.
Yes, my darling you will be 진정 내 사랑, 당신은 내게
Always young and fair to me. 언제나 젊고 아름다울 것이오

참 이 노래 가락을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중학교 음악 시간에 느티나무가지 위로 초저녁별 하나가 그 노래예요. 옛날에 초저녁별이라는 중학교 음악책에 나오는데 이게 원래 팝송의 노래입니다.

분명히 늙어가고 있는데,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뭔가 사귀면 사귈수록 진국이 나온다는 이야기죠. 진국이, 우리 인생을 이렇게 쓰레기로 박아놓는 이유는 그걸 비교적으로 쓰레기 같은 나를 그 일체 가치를 묻지도 않고 (원래 쓰레기니까) 주님의 엄청난 가치로 인하여 너가 아름다운 사람으로 우리 천국에 입성하게 합격했다는 거예요.

인간치고 정상인 건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이 와야 우리가 망가지게 돼 있어요. 난데없이 야곱에게 난데없이. 난데없이 야곱은 그 환도뼈가 무너짐으로써 더 이상 자기 힘으로 못 살아요. 바로 아까 에너지가 있는 그걸 쳐버려요. 그런데 야곱은 자기 위에 누가 일하느냐? 야곱 언약이 일해버리죠. 야곱 언약. 자기는 활용당하고 지난번에 서울강의에서도 했죠. 우리는 활용당하고 있고 주께서 말씀으로 그냥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재편합니다. 뭘로 재편하느냐? 말씀으로 재편해요. 말씀으로 재편한다. 말씀은 뭐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이 됨으로써 이 세상에 육신이 말씀이 될 수 있다는 그 바탕을 그 재료를 가지고 우주는 우주는 이렇게 재편이 되죠. 재편이 되면서 여기서 뭐가 나오냐?

징후가 나오고 증상이 나오죠. 그 증상 징후가 사도행전입니다. 이거는 사도행전을 우리가 지금 보면서 사도행전에 있던 뭐 병고치고, 귀신나오고 있잖아요.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설명하지 않았지만,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우리가 죽어야 우리를 말씀으로 죽여야 우리가 산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병의 문제가 아니고 신체적인 병의 문제가 아니고 이게 얼마나 훌륭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와요?

로마서 8장 1절이 나옵니다. 결국 오늘은 로마서 8장 1절 하나만 딱 해도 여러분 땡 잡은 거죠. 다 같이 시작!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장소 문제거든요. 장소 문제라고. 주께서 우리에게 뭐냐 우리의 발에게 새로운 공간을 준 거예요. 새로운 공간. 그 공간은 뭐냐 우리를 아예 육신을 죽여버린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 죽은 육체로 돌아갈 게 없도록 말씀으로 항상 우리를 그런 식으로 이끄시고 인도합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마지막에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이제는 내게 있는 것은 생명의 면류관이 남아 있다. 내가 너희들 떠난다고 해서 또 잡혀 죽는다고 해서 너희가 서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우주 재편의 징후와 징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아듣는 인간의 의미와 못 알아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경계선을 이루는 고 지점에 주께서는 불꽃처럼 성도들을 배치를 해 놓은 거예요. 배치를 해 놓으면서 성도는 바보도 아니고 무식한 사람도 아닌데 성령이 이끄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 뭐를 탁탁 내뱉어요? 말씀이 나온다고요.

그게 바로 다윗이 말하는 우리가 성전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주께 하신 일만 툭 나오는 거예요. 너 뭔데? 나 아무것도 아니야. 나 쪼다야. 그것을 늘 일깨우는 거예요. 그런데 지난번에 서울강의 했잖아요. 그렇게 해놓고, 이제 세상에 나가니까 세상은 무슨 세계? 상징계, 의미 있는 세계. 특히 가까운 일가친척 지인들이 뭐라고 해요? 니 요새 어떻게 살아 하고 의미를 요구해요. 의미를. 니 계획을 해봐. 절대로 우리는 목표 같은 게 있으면 안 돼요. 계획이 있으면 안 되거든. 길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자꾸 요구해요. 목표 제시해. 앞으로 어떻게 살 건데 뭐 어떻게 할 건데 하니까 우리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뭡니까? 진짜 경력이 나지. 고난 받아 못 살겠다. 처음부터 그래야 된 게 아니고 갑자기 이런 계획이 있거든. 그거 상상계입니다. 내가 이런 계획이 있거든. 여기 해서 이렇게 있거든.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가 얼마나 그리웠다고 아버지 이름으로 막 튀어 나오고요.

우리는 우리 아는 가족들이 얼마나 기대한 게 많았다고 기대가 막 나오고요. 그게 무슨 겁니까? 상징계 하다가 또 된통으로 말씀한테 걸려가지고 복음에 걸려가지고 저희가 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닌 분수를 못 차렸습니다. 하고 차리는 것 그걸 깨닫게 하시는 게 누굽니까? 그게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주신 특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리를 알아도 그것이 내가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진리가 우리를 이미 장악한 것을 쉬지 않고 감사하고 모든 일에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움직이고 예수님이 움직이고 말씀이 움직인다는 것을 왜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는지 이제는 늘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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