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십자가의 진동

아빠와 함께 2026. 4. 25. 09:00

강남20260317a사도행전8장20절(십자가의진동)-이 근호 목사

그 질문의 연장선에 의해서 시편 124편 7절. 집사님이 한번 읽어보세요.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아멘. 여기 새처럼 나오죠, 새장. 새장이 나오고 새가 새장 밖에 있습니까 처음에? 처음에 밖에 있었습니까 안에 있었습니까? 안에 있었죠. 그러니까 새가 바라보는 세계는 뭡니까? 저게 새장이라고 갇혀있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어요. 내가 담당해야 되고 내가 책임져야 되고 내가 어찌어찌 해야 될 나의 업무, 임무라는 것을 같은 새장에 갇혀있는 다른 인간들한테 그렇게 전염되어서 같이 공감하고 있었던거에요. 공유하고 있었던거에요. 이 인간 자체가 새장에 갇혀있다는 것, 악마의 힘에 갇혀있다는 것을 어느 인간도 그것을 몰라요. 모르는데 새장에 갇혀있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새장에서 풀려난 혼, 새장에서 풀려났을 때 '내가 새장에 갇혀 있었구나'를 아는거에요. 내가 자식한테 갇혀있고 남편한테 갇혀있고 엄마한테 갇혀있고 더욱더 누구한테 갇혀있느냐 하면 내가 내 의와 내 자존심에 내가 갇혀있었던 거에요, 내가.

그러니까 이 대목에 가스펠 노래에 가사가 나와요. 새장에 갇혀있다가 나는 뭘 얻었다? 새장에 갇혀있다가 나는 거기서 새장에서 풀려난거에요. 얼마나 감사 곱하기 감사, 감사 제곱에 감사. 기뻐하고 기쁨이에요. 기쁨인데 그것도 인간의 정서상 감정상 오래 못가고 다시 또 집에가서 또 분란이 일어나고 난리도 아니죠. 그러면 거기서 또다시 시편 124편 7절의 말씀이 작동을 해서 다시 찾아오게 되면, "내가 참 이 동네에서 풀어났지? 여기서 벗어났잖아." 벗어났으니까 어떻게 해야돼요? 가벼워야 되죠? 나를 옥죄던 모든 존재의 무게에서 내가 풀려났잖아요.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뭔가 벗어난 그 기분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벗어났다는데. "어디서 벗어났는데요?" "난 저기서." "저기가 뭔데?" 그동안 내가 몰랐던 내가 몰랐는데 알았다고 우기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전혀 몰랐던 세계에서 옴팍 우리는 갇혀있었던 겁니다. 거기서 벗어난 것. 구출? 다른 말로하면 구원받았다.

사냥꾼은 세요. 나보다 더 세다고요. 나를 잡던 사냥꾼은... 마귀는 나보다도 세요. 그래서 자녀 문제라든지 어떤 가정 문제에 있을 때 사람은 전제가 뭐냐? 마귀가 존재하고 활동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렇게 생각해야 되요. 나의 존재뿐만 아니고 마귀의 존재를 먼저 생각해야 돼요. 상정해야되고, 마귀 존재를 상정한다면, 창세기 3장 15절. 뱀의 후손은 누구하고 싸웁니까? 여자의 후손과 싸우죠. 우리하고 안 싸워요. 그렇다면 마귀의 존재와 더불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다 이루었는가를 함께 고려한다면, 이러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거죠 우리는. 영적 싸움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목표를 정한다는 것은 이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하는 짓이에요. 우리가 왜 목표를 합니까? "나 내일에 어디 도시에 가서 이렇게 장사해서 일을 보려하는 자들아." 그게 뭐에요.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이 말씀이 뭡니까? 니 주제는 뭐다? 소멸되는 물방울이라고 되어있죠? 이걸 더 심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냥 우리는 뭐냐? 습기에요. 최 습기 박 습기 이 습기 권 습기 공 습기.

그냥 촉촉한 습기. 실체 없음. 실체도 없는데 왜 화를 내고 분노하고 따지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이게 왜 있는가? 출처도 없는데 이게 뱀의 후손, 악마가 자식을 낳았으면 부모 책임 다해야지 라는게 자꾸 살아오는 수 십년 동안, 집사님 지금 나이가 40이 약간 더 되었죠? 40여년 동안 계속해서 습기에 불과한, 이 습기라 하는 것은 성경책에만 나오고 다른데는 안나와요. 그러나 세상은 뭐냐? "니가 인간이면 인간의 도리를 해야 니가 짐승이 아니지" 지금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서 하고 있다고요 이런 이야기를. "니가 그렇게 해놓고 니가 어미가?" 뭐 이런 식으로 빚 독촉하듯이 하니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결국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누가 갖다 얹은겁니까? 택배기사에요 누구에요? 악마가 하죠.

악마가 나를 하나의 실체로 봐서 자꾸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라는 아주 선악적인 차원에서 옳은 소리만 하는거에요. 옳은 소리. 나쁜 소리 하나도 안해요. 선악적으로. 왜? 악마가 선악을 아니까. 우리의 양심이 어떤 식으로 체제를 갖고 있는지 아니까. 나쁜 것은 싫어하고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아니까. 이게 계속 오는거에요. 이걸 사도바울 같으면 어떻게 이겨냈는가? 사도바울은 단번에 이겨냈죠. 어떻게? "내 속에는" 뭐만 있다? "죄만 있다." 로마서 7장에 내 속에는 죄만 있다. 다시 말해서 내 문제지만 내가 해결 할려고 해서는 안된다. 죄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그 나라 의,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 속에 죄가 박혀있으니, "오호라 감사합니다. 나를 이 죄에서 건져내주신 주 예수님께 찬양합니다." 이렇게 되는거에요.

뭐든지 문제를 심각하게 본다면, 점점 자식 문제 심각하게 본다면, 그것은 나의 의를 심각하게 지키려는 하나의 태도입니다. 내가 전적으로 내 속에 죄가 있고 죄 뿐이라면 그 자식이 하는 그것은 또 다른 유형의 죄를 발산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입장바꿔서 나의 친정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고치라고할 때 기분 되게 나쁘잖아요.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는, 정신의학 말고,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볼 때 정신병이라 하는 것은 세상이 걱정하는 것 보다도 본인이 더 걱정한다. 따라서 남들한테 그 정신병있는 것 고치라고 잔소리좀 하지마라. 본인은 오죽 답답하겠는가? 왜? 본인이 손댈 수 없는 그것을 본인이 어떻게 해결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한 그 결과가 정신병이라는 결과가 나타난 거에요.

자기 속에 규정할 수 없는 자기가 어쩔 수 없는 어떤 뭔가 발작이 일어날 때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폭력적으로 나타나고 문 닫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누가 미워서가 아니라 밉다는건 그냥 핑계고, 누가 미워서가 아니라 본인이 본인을 감당 못 하는 것에 대해 본인이 미워하는 거에요. 그때는 타인이 그래서 정신분석학의 결론은 이거에요. "남의 정신병에 타인이 끼어들지 마세요." 이게 치료에요. 그럼 정신의학에서는? 그냥 약물주사 하는거에요. 프로포폴있죠 뭐 그거 하면 강제로 잠 오죠. 마취제니까. 그게 치룝니까? 강제로 재우는 것이지 치료는 아니지요.

정신의학에서 남한테 피해주지 않기 위해서 강제로 그 육체를 화학적 작용으로 사물화시키는 거에요. 하나의 물성화시킨다, 어려운 말로. 물체로 만드는거에요.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물체로 만들어버려요. 그러나 정신분석학에서는 그냥 사람으로 보되 차이점이 뭐냐? 그냥 귀신들린 사람으로 보자 뭐 이거죠. 그런데 나는 약간 귀신들린 증세가 약간 약한거고, 저기는 좀 센거고, 귀신들리기는 무의식이란 귀신은 누구나 다 갖고있다는게 정신분석학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줄까요? 정신분석학에서 내린 결론은 인간이 왜 자기 정신병을 통제 못하는가? 그 안에 어른이 없어서 그래요. 내 모든 것을 강제로 통제하거나 강제적인 어른이 없어요 어른이. 그걸 S1이라 합니다. 대표 기표. 대표하는 기표. 이걸 다른 말로 아버지의 이름이에요. 아버지는 뭐든지 명령자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나보다 선제된 존재에요. 아버지 없이는 내가 없었으니까 내가 태어났으면 그다음부터는 누구한테 굴종해야되고 무조건 복종해야 돼요? 아버지가 없으면 내가 없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존재에 확장된 거에요.

풍선을 불면 풍선이 커지잖아요. 아버지 몸에다가 훅 불면 그 안에 내가 한 파트를 맡고있어요. 정신적으로 아버지가 살아있든 돌아가시든 정신적으로 아버지가 지주가 되어있어요. 무슨 아쉬운 것이 있으면 어디 가느냐? 아버지의 무덤에 가죠. 오징어하고 소주하고 들고가죠. 그래서 나는 궁금한게 그 오징어를 굽은 오징어인지 새 오징어인지 그게 좀 궁금해요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 아버지 묘소에다가 해놓고 거기서 펑펑 울면서 성공했다고 울고, 주로 성공했다고 울어요. 그리고 또 실패했으면 아버지한테 부끄러워서 안 와요. 자랑스러운게 있을 때 울고 아니면 극단적으로 뭐냐? 곧 이거 먹고 자살할 때 찾아와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래서 내 인생 마감하겠습니다. 아버지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누구 마음대로 하늘나라가?

아버지 귀신이 떠난 적이 없어요. 그 아버지 귀신을 교회 오면 그걸 뭐냐?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자기부인이 안 돼요. 자기부인이. 교회 수십년 다녀도 자기부인이 안돼요. 그냥 아버지를, 더 센 아버지 더 완전한 아버지 전지전능하신 아버지로 대체하지 아버지를 안 떠나고 있는 거에요. 근데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는데요. 희한하죠. 그래서 인간이 만든 신은 다 가짜인거에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은 구원의 자리가 아버지를 소유하는데 구원의 자리가 있는게 아니고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다는 인식의 자리가 곧 그 지점이 무슨 자리다? 바로 강도처럼 구원의 자리에요.

구원의 자리에요.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았을 때가 버림받은 그 순간이 비로소 주께서 나의 구원의 자리로 이끌었다라는데에 대한 고마움이 와요. 이끌었다. 중풍병걸린 사람에게 병 하나 걸린 사람에게 "니는 죄인이었다. 이제 니 죄를 사해준다." 그 죄인의 자리에 까지 올 때 중풍병 낫고 지옥가는 인간을 중풍병 낫고 말고 상관없이 천국으로 오는 방법은 병이아니고 병을 뭐로 바꿔야 돼요? 죄로 바꾸게 되는 그 지점에 주께서 끌어당길 때 비로소 그 죄에서 십자가가 처음으로 십자가가 보입니다. 내가 죄인일 때. 내가 죄인일 때 정도가 아니라 내가 죄 자체일 때 비로소 십자가에 대한 고마움, 그 피흘림의 대단함. 우주와도 같은 만물 보다도 센 창조보다 더 센 힘. 힘이 바로 그 피에 있다는 거에요.

유월절에 위력이 그거에요. 양의 위력이. 피 없는 쪽과 피 발린 쪽과 없는 쪽이 세상이 두 분류로 나누어진다는 거에요. 이건 하나의 창조의 세계가 두 조각 날 정도로 대단한 거에요. 창조 자체가 두 조각 나니까 창조가 무효가 되어버리죠. 창조가. 여기 혹시 베이글은 없어도 빵은 있습니까? 없어요? 빵. 베이글 아니라도 돼요 그냥 빵. 요새 실감나는게 재미가 들어가지고. 오늘 빵 없으면 강의 안 될 뻔했네요. 감사합니다.

이런 빵이 다 간식이 아니라 이때를 위함이라. 자, 이 빵이 자식 때문에 고민하는 나잖아요. 근데 이걸 주께서는 자식을 통해서 두 조각내요. 피 있는 너 될래 피 없는 너 될래? 이것은 물론 팥 앙꼬가 들어있지만 피가 있는 쪽과 피 없는 쪽 너는 어느 쪽에 설래?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해요 주님께서는. "자식은 어떻게 정상 됩니까?" 지금 이 문제를 던지는게 아니에요. 자식이 났다고 해서 피가 자동적으로 발리는게 아니거든요. 피가 있으면 어떤 자식의 고민거리도 이 피의 기쁨을 무효화 시킬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썽꾸러기 자식을 붙여주는거에요. 어떤 자식이 어떻게 애먹이고 도박해서 다 날린다 할지라도 뭐는 무효가 안된다? 근원적인 예수님의 피는 무효가 안되니까 이게 피안에 다 이루었다가 들어 있으니까 십자가만 자랑하라는 하나님의 절차를 지금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문제는 이 빵은 못 먹고 내가 가져가야된다는 거죠.

다시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시편 124편 7절,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라고 했어요. 올무라고 하는 것은요 기도하고 뭐 교회 다닌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게 아니에요. 사냥꾼의 올무는 어떤 노력을 해도 못 빠져나와요. 못 빠져나오는 이 불가능성을 신약에 오게 되면 뭐했다? 주님이 마지막 언약 피로서 그 올무 바깥에서 빠져나와서 내가 있던 올무 안의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이 여유. 그 여유로움으로 자식을 대했습니까? 문제는 바로 내한테 문제있는거에요. 초조와 막 걱정과 염려. 여유가 아니고 반대로 벌벌 떨면서 자식에게 다가가니 자식 안에 있는 귀신이 도사가 돼서 엄마는 나보다 더 못하다는 생각을 엄마한테 얻을 게 없고 존경할 게 없다는 이런 판단이 막 거기서 함부로 나오죠. 자식이 잘했다는 말은 아니고요.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말씀이 와서 돌아가지 말고 말씀이 깊숙이 집어넣을 때 주사 놓을 때 아프잖아요. 지금은 그렇게 아프지 않습니다만은 주사는 아파요.

아픔을 동반해서 말씀이 주는 예수님의 아픔과 동반해서 같이 말씀이 우리 내부까지 침투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확정된 우리의 미래 모습입니다. 확정된 미래의 모습. 이제 사도행전 한번 봅시다. 사도행전 8장 13절부터 보겠습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이렇게 되어있죠.

이 내용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미래에 속한 사람과 과거에서 못 벗어난 사람과 대화가 안 된다는 내용이에요. 지금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육으로서는 과거가 자꾸 누적될 뿐이죠. 과거가 누적된 것을 현재라고 봅니다. 현재 안에는 과거가 층층이 이렇게 밑에 있어요. 현재라는 이 시점은 밑에 과거 A 과거 B 과거 C 쫙 있어요. 과거 사진과 동영상 이렇게 누적 되어있듯이, 인간의 기억 속에 과거가 누적되어 있지 미래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아요 미래는. 인간은 현재에서 난 것을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시간이라는 조건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간이란 의식을 인간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천체의 일정한 질서를 줬고 인간은 그 질서를 부여받아서 시간을 의식하게 된 거에요. 정확하게 돌아올 때 1분 1초 한 시간 하루 일 년 이게 전부 다 천체의 운행가지고 측정이 되거든요. 인간은 시간을 느끼게 된거에요. 시간을 느꼈다는 말은 인간은 현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미래는 계속 앞으로 오겠지. 미래는 없는거에요. 그런데 사도들은 뭐냐하면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을 받았다고요. 성령을 받아버리면 성령은 뭐냐 하면 현재 다음에 미래가 아니라 현재 위에 미래, 현재 위에 미래가 되면서 미래에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을 현재 과거가 하나의 미래를 위한 결과를 미리 던진 셈이 돼요. 이 원리는 뭐냐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을 위해서 옛 언약 율법을 모형과 그림자로서 구약에 미리 뿌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씨를 뿌리면 뭐가 맺힙니까? 열매죠. 씨뿌리는 비유가 그거잖아요. 씨를 뿌리면 열매가 맺히잖아요 그죠? 그러면 씨앗 안에 뭐가 들어있냐 이 말이죠. 씨앗 안에 뭐가 이미 포함되어있어요? 열매가 포함된 상태에요 씨앗 안에. ‘다 이루었다’ 안에 미완성들이 가득 들어있는 거에요. 미완성의 모습이지만 그 미완성의 모습 안에는 완성을 위한 미완성이었다.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미완성의 절차가 필요한가를 포함시킨 내용을 구약의 옛 언약, 율법이라고 합니다. 또는 선지자의 예언. 이 전부다 옛 언약에 속합니다.

새 언약은 선지자고 뭐고 새 언약은 단독자에요. 예수님과 아버지의 창세전에 있었던 그걸로 새 언약이 끝나지 중간에 다른 인간이 끼어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자식 때문에 힘들어하는 내가 그 새 언약에 끼어듭니까 못 듭니까? 끼어들 수가 없어요. 끼어들 수가 없는데 내한테 일어나는 이 어려움도 사실은 새 언약을 반영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그안에 뭐가 들어있다? 이미 새 언약에 의해서 피로 말미암아 천국 백성이라는 확정된 신분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먼저 우리에게 이러한 현상, 세상이 뿌려져있는거에요.

그래서 특징은 그 뒤에 시몬 나오잖아요. 시몬. 시몬이 여러분 본문에 나오죠. 시몬이 사도들보고 능력봐가지고 "돈 줄테니까 그 능력 나한테 좀 넘겨라" 그런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왜냐하면 그 능력을 행하면 귀신을 쫓아내고 나가고 그리고 안수하니까 성령이오고 이렇게 하니까 능력도 행하니까 그게 부러워 가지고 "내 돈 줄테니까 나도 좀 해줘라"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뜻이에요. 이 사도, 미래에 속한 사도, 성령 받은 사도는 누구하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오직 주님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속한, 여기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시몬이죠. 시몬은 여기에 8장 13절에보니까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시몬이 세례를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세례를 받았죠.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랬죠.

그런데 세례를 받았는데 이 세례에 대해서 16절에 보면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는거하고 성령을 받는 것 하고 이거는 다르다 이말이에요. 이 말은 뭐냐?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는 것은 얼마든지 인간으로 인간이 폼잡고 할 수 있는 문제고 성령받는 문제는 인간이 달라고 해서 주는게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다는 말은 성령을 원해도 성령은 원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니다라는거에요. 그럼 사도가 안수할 때 성령받은건 뭐냐? 이건 사도는 누구하고 하느냐하면 사도는 하나님하고만 상대하는 분이에요. 하나님하고.

그런데 여기에 대비해서 시몬은 뭡니까? 시몬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뭘 안 받았어요? 성령을 안 받았죠. 성령을 안 받은 상태가 어떤 상태냐하면 이거에요. 성령 안 받았으면 가능성 속에서 움직여요. 내가 어떻게하면 자식이 잘되고 어떻게 하면 기도하고 어떻게하면... 항상 출발점이 뭐냐? 내가 어떻게 행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그러면 결과 속에 본인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이에요. 결과가 들어있지 아니하면 주께서는 성령이 찾아올 리가 없죠. 왜? 성령 안에서는 이 미래가 현재를 뭐가 덮치고있습니까? 현재 뒤에 미래가 아니고 현재 위에 미래가 있기 때문에 현재라는 것은 미래를 반영해주는거에요. 다 이루었다.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아니 인간은 조금도 끼어들지 않았는데 주께서 홀로 다 이루었다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현재 상황은 인간들이 뭐 해볼라고 노력을 하고 난리도 아니다 이말이죠. 그러면 사도는 누구하고 상대 안 합니까? 인간하고 상대 안 해요. 상대 안 합니다. 성령 받은 저와 여러분같이. 말이 좀 건방져요. 안 만난다는게 아니고 산속에 자연인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어떤 결과를.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 이말이죠. 내한테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 내 자존심을 키우기 위해서 나는 이 정도야 라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자랑거리를 위해서 굳이 사람을 상대할 필요가 있다 없다? 없는거에요. 왜? 죄인이기때문에.

죄인인 주제에 무슨 낙을 보겠습니까? 무슨 낙을 보겠어요? 하여튼 어디 놀러갈 때 계획 잡아가지고 가가지고 갈 때부터 싸워서 올 때까지 싸워버려요. 그 계획을 왜 잡아요? 계획을 안 잡았으면 여행할 때 싸움이 안 일어납니다. 아예 계획이 없어야 돼요. 두바이 갈려고하니까 두바이 못가고 중국을 갔다. 이건 계획에 없는 거에요. 그냥. 전쟁이 날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몰랐죠. 하여튼 인생에 계획 좀 세우지 마세요. 인생에 계획 세우지 마세요. 우리는 계획 세울 권리가 없어요. 우리는 기껏 알아야 과거에요. 미래에 대해서 아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미래는 누가 장악합니까? 주께서 혼자 장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가능한 세계거든요 미래는. 불가능한데 주제넘게 뭐 착한 일 했으니까 좀 이렇게 컨닝 해가지고 알려주세요. 주님이 점쟁입니까? 시몬이 마술사에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았는데 마술사는 직업은 안 놨어요. 뭐 그럴수도 있죠 자신의 밥벌이니까. 이 마술하는 것도 죄다 이러면 되는 거에요. 문제는 마술사가 성령을 이용해서 자기의 가능성, 내가 전적으로 모든 일에 불가능한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이 정도까지 가능했으니까 앞으로 내가 원하는 가능성을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주님의 힘으로 더 확장하고 키울 수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 거에요. 이게 문제인 거에요.

22절에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그냥 나쁜짓 했다는게 아니고 불의에 매인바 된거에요. 자 그러면 사도가 하나님과 상대하는 이 성령 받은 사도가 너 말이야 너 불의에 꽁꽁 묶였다, 불의에서 못 빠져나와요, 불의에 묶였다면 그 불의에 왜 그런 도대체 시몬이 어떤 주장을 하길래 "너 지금 불의함에 갇혀 있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거에요. 도대체 시몬이 뭘 요구했기에 그렇게 됐는가?

18절에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이 말을 했다고요. 지금 시몬이 사적으로 사도에게 말하기를 내가 성령 받아서 돈이나 벌고 장사하려고 이렇게 하는게 아니고 뭐 한다? 사도들이 하는 그 일에 같이 협력해서 나도 성령 받아서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성령을 받게 해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체제 하나님 나라가 나라 다운 그 형태를 키우고 형태를 보여주는데 제가 좀 협조하면 안되겠습니까? 그 이야기하는거에요. 쉽게 말해서 신학교 가서 빡시게 성경공부하고 기도원에가서 여름이나 겨울에 기도원에 가서 빡시게 이렇게 또 열심히 철야기도 해가지고 성령받으면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왜? 성령없이는 주의 일 못하니까 성령받아서 주의 일 하겠다면, "니가 내 일에 협조하는구나. 착하고 충실한 종아"하고 칭찬받고 성령을 막 주시면 그 때려 넣은 성령가지고 예수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갈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 이런 계획이 이런 프로젝트가 생각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신학교 들어간다면. 하겠죠? 계획을 왜 세워요? 계획을 왜 세웁니까? 하늘나라에 뭐 일꾼이 모지래서 나를 택해요? 주님 혼자 일 못해서 나를 택했습니까? 열두 사도도 도망갔어요. 여러분 아시죠? 도망간 사람들이에요. 근데 아까 제가 얘기한 신학생은 도망갔어요 안갔어요? 도망 안갔어요. 악착스럽게 자기 머리 들이밀고있습니다. 능력의 종 될려고. 능력의 종. 능력의 종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능력의 종이 되면 뭘한다? 악착같이 기도하면 된다. 주께서 부르짖는 자를 거부하지 않는다. 지금 시몬이나 그런 신학생들은 근본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은요 사도 니는 되는데 나는 왜 안되냐 지금 이 문제 잖아요. 이 사람들 항상 주님하고 상대하는게 아니고 누구하고 상대하는가 하면 같은 인간에 대한 질투심 인간에 대한 비교에서 시작하는거에요. 나도 너처럼 노력하면 되잖아. 나도 성령 받아서 너처럼 하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는거에요. 예화를 한번 들겠습니다. 실제로 있는 예화니까.

그 김태원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나이 60좀 넘은. 부활의 설립자죠 밴드. 그사람의 딸이 미국 사람하고 결혼해서 미국에 뉴욕에 살고 있는데 그 뉴욕에서 결혼해서 살려고 하면 비자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비자 받아야 되는데 비자가 안 나와요. 왜냐하면 40년 전에 대마초 피우다 걸려가지고. 40년 전이에요. 그 뒤에 계속 피운게 아니에요. 그래서 광화문 앞에 미국 대사관에 가서 그 젊은 영사한테 오랫동안 상담을 하고 면접을 봤는데 또 거절당했어요. reject 당했어요. 리젝트 거절당했습니다. 이 리젝트 하. 진짜 무서운 이야기에요. reject 이게 뭡니까? 내가 노력하고 내가 간절함과 내가 갈급함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 거절은. 구원받고 구원 안 받고의 조건은요 우리의 행함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가 없는 자는 거절이에요. 하나님의 의.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은 하나님의 의를 따내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 의를 포장하는 능력이에요. 겸손과 낮아짐과 낮아짐과 나 죄인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세요. 전부다 자기가 꾸며내서 하나님의 의처럼 보이게 위장하는 자기의. 그게 한계에요. 그거 아무소용없어요.

거절당했습니다. 거절당했는데 사람들은 이 거절을 이렇게 대응합니다. retire. 이게 뭐냐하면 은퇴에요 은퇴. 류현진이 요번 3회에 강판 당하고. 야구. 도미니카 공화국. 모르죠 그거? 권사님. 지고 난 뒤에 강판하고 난 뒤에 뭐냐? 은퇴 선언합니다. "나 이제 야구안한다." 류현진이 은퇴 선언을 했어요. 사람은요 거절당하면 오기가 받혀서 은퇴를 선언해요. 일방적 거절이 너무 부끄러워서 자기 자존심 상해서 일방적 거절이 자존심 상하는 이유가 인간 안에 뭐가 있었다? 자기 의가 있는 상태에서 감히 어딜 들어갈려고? 천국 들어갈려고 시도를 한거에요. 근데 이게 안 된다는 것을 본인이 못 받아들이는거에요. 나한테 천국 갈만한 노력을 다했다는 것을 그걸 거부하고 부정하고 부인할 재주가 없는 거에요. 천국 갈 재주가 없다는 말은 뭐냐? 내 속에 있는 내가 의롭게 되는 노력을 스스로 포기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에요. 시몬이 그 사람이에요.

그래서 시몬을 하나님이 등장시킨 이유는 하나의 교육 재료가 돼요. 교육 재료가. 취지는 좋아요. 성령 받아서 사도처럼 같이 협조해서 자기도, 빌립은 사도가 아닙니다 집사인데 집사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받았잖아요. 누구는 받고 누구는 안주고 이거는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사람은 화 나겠어요 화 안 나겠어요? 이 거절, 리젝트. 거절이라는 단어보다 영어로하는게 훨씬 더 멋있어요. 리젝트. 젝트 저리가.

거절. 거절에 대해서 인간이 한 거죠. 반항이 뭐냐? "나 이제 예수 안 믿을래. 나도 할만큼 했다. 복음 들을만큼 들었고 마이 들었다 고마해라. 하와이 니가 가라. 천국 니가 가라 나 안 간다." 들여보내주지 않아서 못가는데 그런 말이 그런 그걸 못 받아들여서 내가 안 가서 안 간걸로. 까이기 싫어서 지가 까는 쪽으로 정리하는거에요. 참 마귀가 세죠. 마귀가 정말 세요. 주님의 십자가로 기뻐하라 하면 성경에 나오잖아요. 시몬이라는 사람이 뭐 했다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았죠.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는 것이 자기가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이 말은 뭐냐하면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라가 가능성있는 구절로 이해한거에요.

예수 피 믿는 것이 내가 바짝 정신차리면 믿을수있는걸로 이해한 거에요. 피 믿었나? 예. 세례받았어? 예. 성령 받았나? 예. 나 거절한다. 이거 미치고 환장할 거에요. 내가 할수있는 것을 다 했는데 하나님은 거절했대요. 시몬은 이 거절을 누가 했느냐 하면 사도가 거절했어요. "니 한테 악독이 있다. 이거는 니가 남보다 악하다는 뜻이 아니고 주께서 너를 안 받아들인데. 그저 니는 예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아." 이게 더 사람 성질나게 만드는 거에요.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는데 아무 소용없는 세례. 덜렁 상표만 있을 뿐이지 안에 포장은 아무것도 없는 것. 폼은 나는데 실속은 하나도 없는거요.

참 이게 정말 화나는 거에요. 어젠가 어떤 유소년 축구 시합하는데 아이들을 화나게 만드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우승팀 준 우승팀이 마지막 붙는 게 결승전이죠. 결승전 두 팀이 남았어요. 두 팀이 붙었어요. 붙었는데 분홍색 유니폼 입은 팀하고 파란색 유니폼 입은 팀이 두 팀이 마지막에 결승전 했어요. 애들이 다 알아요. 22명 애들이 다 알아요. 이것을 이기면 우리가 우승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분홍색 팀이 파란색 팀한테 2:1로 이겼어요. 이제 남은 것은 시상식밖에 없잖아요. 시상하는데 시상주는 사람이 뭐라하는가 하면, 분홍팀이 이겼잖아요 2:1로. 이겼는데 준우승이고. 실제사건입니다. 파란팀이 졌는데 우승했어요. 그러니까 분홍팀에 있는 학부모하고 아이들이 달려들었어요. "왜? 우리가 우승인데요." 그러니까 시상식 하는 사람이 "입 다물라"고 했어요.

우승과 준우승이 바뀌었습니까 아니면 이미 정해진 거에요? 그래서 그 밑에다가 글 올린사람이 하기를 "이건 분명히 준우승 팀에 압력 가했다. 코치한테. 주최 측에 해서 이건 결과 관계없이 무조건 우승 팀은 우승 팀 되게 했다. 그런 의혹이 있다" 이렇게 한거에요. 그 의혹이 있다 해서 준우승 팀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럽니까? 준우승까지 해준 것은 이거는 주최측의 농간이 아니고 일방적인 창세전에 예정된 겁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이렇게 고마워했어요? 안했죠? 안한게 문젠거에요. 안한게. 안한게 이게 리젝트 거절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능력을 초과해야돼요. 초월이 아니고 초과해야 돼요. 인간은 상상도 못한 결과에요 이게.

빌립 집사. 나 시몬. 너 빌립 집사. 니하고 내하고 누가 잘났는데? 왜 니는 성령오고 난 안와? 이러면 안돼요. 니는 합격이고 리젝트를 통과했으니까 뭡니까? 거절이 아니고 수용이죠. 수용. 영어로 하면 뭐냐하면 saving이에요. rescue 건지는 것. escape 또는 get away 빠져나오는 것. 자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구원받으면 어디서 빠져나왔습니까? 누구 답변해보세요. 구원받은 사람은 빠져나왔기 때문에 구원이잖아요. 구원이 탈출이잖아요. 어디서 빠져나왔습니까? 내 혼자 답변하고... 이게 반칙이다. 합리와 불합리를 알고 있는 세계에서 빠져나왔죠. 합리와 불합리. 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뭡니까.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말을 다 찬찬히 듣고 사도바울에게 한 평가가 나옵니다. 뭐냐하면 "너가 미쳤다." 미친 사람은 자식이 아니고 엄마가 미쳤어요. 어디에 미쳤어요? 하나님의 수용하심에 미친거에요. 왜 엄마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잃었다가 얻었음을. 내가 얻고자 노력한게 아니고 마땅히 잃어버렸는데 주의 피로 말미암아 얻었을 때 그걸 설명할 길이 없네요. 사도는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다만 일방적으로 너는 악독하다는 평가 외에 그건 사도의 평가가 아닙니다. 사도는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해요? 주님하고 교제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는게 아니에요. 주님하고 교제하면서 주님의 이야기를 지금 시몬에게 그냥 아주 친절하게 이것도 친절인지 모르겠는데 전달할 뿐이에요. "너는 악독에 매여있다" 끝. 혹시 회개하면 살려줄지 모르겠지만 회개 하고 안하고는 그거는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의 은혜 소관이기 때문에 그거는 사도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시몬이 회개해서 빌립하고 같이 돌아다니면서 복음 전했다 그런 이야기 없어요. 시몬에게 그러한 거절, 리젝트 너는 악독이 가득하다고 평가한 것은 이거는 니는 고소하다 살았다가 아니라 현재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스스로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로서 시몬이라는 인물이 등장한 거에요. 과연 내가 합리적으로 구원받았는지 아니면 불합리적으로 구원받았는지.

김태원은 6개월동안 진짜 인터뷰 전문 변호사한테 찾아가서 돈 주고 예상 문제까지 하면서 6개월 전부터 이 인터뷰 통과하기 위해서 준비를 다했어요. 그리고 대사관에 갔는데 나와서 하는 말이 예상 문제 하나도 안 나왔다는거에요. 돈만 날렸어요. 다른 것 하나도 안 묻고 딱 40년 전에 대마초 한 것 그것만 딱 했어요. 오죽했으면 사위가 영어로 편지 써서 대사관에 보냈어요. 우리 장인어른 보고 싶어서 그런데 지금 아니고 40년 전에 이야기니까 조금 봐줘서 상봉할 수 있도록 국가적인 차원에서 배려해달라고 편지했는데 소용없어요. 이거는 미국의 결정이에요. 지금 어디 갈려고 하는데? 김태원씨가 미국가려 하잖아요. 그러면 결정은 누가 내립니까? 한국이 내리는 것 아니에요. 한국에 사는 본인이 내리는게 아니고 어디서 결정합니까? 미국이 내립니다. 그러면 천국에 누가 들어가고 누가 안 들어가고 그 천국은 누가 결정합니까? 하나님이 인간 눈치 봅니까? 누가 결정합니까? 눈치 봅니까 안봅니까? 안보죠. 누가 결정합니까?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이 결정했어요. 조건이 있어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아니하면 이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 결정이죠.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예, 예수 십자가의 피를 믿습니다."하고 세례받아 버리는거에요.

내가 결정해서 예수 믿는다고 내가 확정하고 내가 피 받을 때 그거는 결국 시몬에서 스톱이 돼요. 멈춰요. 세례받은 것이 성령받은 것을 대신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할 수가 없어요. 진짜 성령 받으면 아까 여러번이야기했는데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성령 받으면 누구하고 이야기를 안 해요 누구하고 이야기해요? 공중전화 부스에가서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주님의 지시를 받아요. 주님의 지시. "아들이 저런데 어떻게 할까요?" 주님의 지시를 받는다고요.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게 있을 수가 없지요. 왜? 내 일이 아니니까. 지시에 따를 뿐이지 내가 구원받는것도 내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라면 그 주님의 뜻에 확장 연장선으로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취지의 연장선으로서 주께서는 우리는 아들에게 다가가고 자식에게 다가가는 거죠. 그냥. 남들이 미쳤다 하든 말든. 그렇게 다가가고 우리는 밥이나 먹고... 10분 쉽시다.

 

 

 

강남20260317b사도행전8장20절(십자가의진동)-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0장 한번 보겠습니다. 좋은 질문 하셨어요. 하여튼 미치지아니하면 좋은 질문이 안 나와요. 미쳐야 좋은 질문이 나와요. 여기보면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하죠. 둘이 엮여있다니까요. 두 개가. 쌍둥이처럼. 에서와 야곱처럼 한쪽은, 그 야곱과 에서가 에서는 창세전에 지옥가고 야곱은 창세전에 뭡니까? 천국가죠. 묶여있어요. 얽혀있다고요. 나무가 두 개의 나무니까요. 정녕죽으리라와 영생은 생명나무. 생명과 정녕 죽으리라가 같이 엮여있는 그것이 피조물의 포지션이에요. 위치라니까요. 됐습니까? 질문한 취지에 맞습니까?

한쪽을 배제 안 해야될 이유가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미움을 배경으로해서 사랑이 나오지 미움 없는 사랑은 허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한쪽을 미워했기 때문에 한쪽이 사랑되는거에요. 기쁘지 않습니까? "아이고 이 자식아" 이렇게 할 것이 아니고 "니는 거절당했지만 나는 합격이야" 이런 기쁨의 마음으로 다가서라 이 말이죠. 지옥은 뭐냐 하면 지옥은요 나쁜 짓해서 악한 짓 해서 가는 게 아니고 거절 당한자의 집합이에요. 거절 당한자. 하나님께서 거절 해놓고 그걸 버리지 않고 딱 따로 모아놓으면 그게 지옥이에요. 참 이게 뭐냐하면 누구 노래처럼 뭡니까? 잔인한. 너무나도 잔인하죠. 사랑이라는건 잔인한 하나님을 경유해야 사랑이 나와요. 잔인한 하나님.

하나님은 나보다 더 잔인해요. 어떤 인간이 잔인해도 하나님만큼 잔인한 분이 없어요. 근데 그 하나님이 감사하고 고마워야 된다니까요. 이게 미친거죠 이게. 이게 또라이잖아요. 그래서 천국 합격한 사람, 거절 말고 합격한 사람 특징은 뭐냐? "나를 함부로 대해주세요." 이걸 같은 성도보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보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하나님 저를 함부로 대해주세요." 같은 성도한테 나를 함부로 대하라 하면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무 존경스러워서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게 성령의 아우라가 있기 때문에. 어떤 성도가 있는데 성도는 홀로 있는게 아니고 아까 여러 번 했습니다. 묻습니다. 사도는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누구하고 상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하고 상대하죠. 하나님하고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시몬에게 잔인하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저 사람하고 좋은관계 하게 되면 우리 모임이 집회가 어떻게 부흥." 이런 계산을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거절하고 수용하는 것은 사도 본인의 몫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도 일방적으로 구원받은거에요. 그래서 이 강의할 때 강의 제목을 미리 한번 생각해봤어요. 뭘 생각했느냐 하면 이래요. "후유..." 큰일 날 뻔했다. 근데 이 '후유'. 간신히 구원됐다는 이야기잖아요 후유. 제목 후유. 후윤데 따지고 보니까 이게 후유가 구원이 어떤 구원이냐 하면 넉넉함이에요 넉넉함.

나는 아슬아슬 후윤데 밑에 나를 받치고 있는 이것은 뭐냐하면 넉넉함이에요. 주께서 죄를 짓게하고 죄는 우리의 죄보다 은혜가 더욱더 넘쳐난다. 넉넉함이에요. 넉넉함. 이 넉넉함을 상실해버리면 "조심스럽게 살아야지" 이게 된다고요. 갑자기 목표가 생기고 계획이 생겨요. "이번일 잘못하면 난 망했다." 망했다 하면 이게 뭐가 모독받는거에요? 주님의 넉넉한 용서가 완전 내 입을 통해서 완전 모독받는거에요. 또 은퇴하려고... 은퇴하지 마세요. "나 이제 그만 믿어." 은퇴하지 마시고 이 은퇴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돼요. "나를 함부로 대해주세요. 나를." 이전부터 함부로 대했지만 그 함부로 대하는게 얼마나 기쁨이냐는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다시 한번 재고백하는거에요.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전체 인생을 가지고 재투자하십니다. 우리 전체 인생을가지고 재투자할 때 더 이상, 재투자, 전 인생으로 우리를 뭐하냐? 복습시킨다. 복습을 시켜요. 우리 인생을. 우리가 아까 현재라 하는 것은 뭐가 누적돼있어요? 과거죠. 과거는 내 기억이잖아요. 성령받고 난 뒤에는 과거에 있던 그 과거가 하나님의 주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야될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복습을 시킵니다. 그래서 나의 프로젝트 나의 계획은 다 실없는 아무 쓸데없는 실없는 짓이에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게 계획을 세우다니 니가 계획 세울수 있는 쨉이 되냐 이 말이죠. 그런 자격이 있느냐 이 말이죠.

사도의 특징은 마태복음 10장에서 나옵니다마는 사도의 특징은 이거에요. 증언을 하기에, 예수님 증거, 소유성이 없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어요. 거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누구 겁니까?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눠주고 이러면 안돼요. 내 것도 아닌데 왜 남한테 나눠줘요. 충실히 간직하면서도 자기 소유의 바탕 위에서 자기의 존재를 적립하지 않습니다. 근데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마술사 보세요. 직업이 마술이죠. 자기의 마술이 어디서 막혔습니까? 어디서 한계가 드러났어요? 다른 마술은 다 하겠는데 성령오는 마술은 자기가 못 하겠다는거에요. 사도는 뭐냐하면 최고의 마술은 뭐냐? 예수님이 니가 죽었다가 부활한게 이거는 인간이 아무리 따라해도 따라할 수 없는 최고의 마술은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겁니다. 자식한테 그런 마술을 보여주세요.

애굽의 마술사가 따라해도 결국은 열가지 재앙까지 못따라갔잖아요. 첫 번째 두 번째 하다가 그다음부터 못했어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는 우리 능력을 뛰어넘습니다. 아예 마술사가 고백해버려요. 근데 마술사가 자기 직업을 계속해서 나도 기도하면 성령받는걸 그런 능력을 나한테 돈줄테니까 달라고 한 것은 자신이 뭐냐? 자기의 마술하는 힘을 힘의 소유성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힘의 소유성. 그런점에서보면 그는 자기 소유의, 어려운말해서 죄송합니다, 의인화. 내가 갖고있는 에너지와 힘의 의인화가 내가되는거에요. 그럼 나는 나라는 인생은 뭐냐? 더 어려운 말로해서 '물성화' 물질화 되어있는 신체인데 그 안에는 내 소유를 의인화 하는 용도로서 물질이 됐고 내 소유, 내가 가진 것 없으면 나도 같이 덩달아 뭐가없다? 내가 없으니까 내가 없어지면 내가 용납이 안된다. 이게 가룟유다의 마지막 고백이죠. 뭐라도 있어야 산다는 것이 되는 세상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뭐라도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이 대표자가 시몬이에요. 마술하는 재주? 나름대로의 에너지가 있어요. 그러나 맞은편에 있는 사도의 세계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내것이 없어요. 내것이 없는 세계는 성령의 세계고 내것이 있다고 그걸 의식하면서 그걸 쥘려고하는 것은 바로 기껏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은 세계지만 성령은 없어요. 그게 악독으로 가득 찬 상태라고 규정해버립니다. 특히 자기가 가진자의 특징은 뭐냐? 가진자의 특징은 자기가 가졌다고 소유성을 의인화시키는 인식이 '나'가 되거든요. "나는 이런 것 갖고 있으니까 '나'가 맞다" 이런 경우의 특징이 뭐냐? 이 문제점은 하나님이 불쌍하게 여기는 그 지점에 이르지를 못한거에요. 로마서 9장한번 봅시다. 로마서 9장 15절.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모세가 몇 년전 인물입니까? 오래전이잖아요 BC1400년전. 1400년 인물이잖아요. 모세에게 이르시되 1400년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일관된 원칙을 계속 줬다는 거에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구원하는 지점이 어디입니까? 구원한 지점이 어때요? 자기 소유자랑하는뎁니까? 내세울게 전혀 없는 자리에 본인이 거기에 도달하고 거기에 딱 놓인거에요. 이거는 다시말해서 '나'라는 인생에게 마지막. 나란 인생의 마지막. 이런 노래가 있답니다 '마지막처럼'. 제목이 마지막처럼. 부른 가수가 블랙핑크에요. 최근에 나온 노래. 마지막처럼.

'가진게 없다'라는 말은 이 땅에 가진것만 인정하는 소유만 인정하고 그 소유에 근거해서 사람하고 인정해주는 이 세상에 자기 좌표가 없어요. x, y 좌표알죠? 수학에서 x, y 좌표가 있어야 존재가 드러나잖아요. x축, y축 점이 있다면 이거는 x에서 7, y에서 5. (7, 5)로 너는 존재가 딱 규정이 되는거에요. 좌표에서. 그런데 소유가 없으면 좌표 찍을 게 없죠. 내가 여기 있노라가 성립이 안되죠. 이건 소유가 없을 때는 그래요. 소유가 없으면요 신용카드 발급이 안 돼요. 신용카드 발급이. 그런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뭐라도 있어야 사는 세계. 그런데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이 에너지 힘의 의인화된 내가 성령을 통해서 박살나야 되겠죠. 그게 바로 사도가 기대하는 뭡니까? 회개에요. 그러면 아무것도 없죠. 박살나서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 없는 장소가 무슨 장소냐하면 긍휼한 장소, 불쌍히 여기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떠날 때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자기 목숨마저 내놨잖아요. 예수님의 기도는 그거에요. 내 목숨마저 내놓고 그냥 아버지에게 맡길 수 있는 그 지점. 그 지점 확보를 할수 있게 해달라 기도한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긍휼은 있지만 하나님이 구원을해주는 긍휼의 자리는 예수님 오시기전에 아무도 그 표준적인 긍휼의 자리를 인간이 설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말씀대로 이 모세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 자리가 유일하게 긍휼을 백프로 긍휼로만 구원되는 자리가 십자가 안의 자리죠. 나는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은 그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을 옴팍 뒤집어쓰는 자리죠. 옴팍.

마술사는 그 긍휼의 자리에서 벗어나있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좌표가 없어야 되는데 있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여러번 이야기합니다. 누구하고 상대했습니까? 사람하고 상대했죠. 사도라는 사람하고 상대했어요. 사도는 말합니다. "이 치유능력, 성령 능력은 이거는 인간끼리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 주고 팔고 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사도에게는 아무것도 자기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것도 그냥 공짜로 하나님께 받은 것 뿐이고 그걸 유지하는 것도 주님의 소관입니다.

마태복음 28장 여러분 잘 아시는데 잘 알지만 한번 봅시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되어있죠. 여기 제자들이 홀로있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누구를 상대해야돼요? 세상 끝날까지 함께있는 누구와? 주님과 함께 있죠. 제자들이 주님과 헤어졌습니까 안 헤어졌습니까? 안 헤어졌죠. 근데 이 말씀을 분명히 마태복음 끝에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사도들이 걱정이 늘어져요. "주님 그냥 가시면 안되잖아요." 지금 이게 뭐냐하면 사도가 성령받기 전까지는 지금 계속 자기 소유를 자기 자리를 본인이 자기 좌표를 본인이 좌표를 정하고 있던거에요.

주님이 함께있는 좌표는 하늘에서 내려와야되는데 기존에 있던 자리를 그냥 고수하면서 이게 내 자리라고 여기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선 "떠나지 말고 기도해라, 그러면 성령이 온다는 말은 하늘에서 지정된 새로운 좌표가 너의 영원한 긍휼의 좌표, 구원의 좌표로서 너희에게 덮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 그때부터는 뭐냐?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그 말씀이 그야말로 실현되는 그러한 지점에 사도들이 움직이고 있는겁니다. 그 일을 누가하느냐? 성령이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뭡니까? 성령안에서 함께 있겠죠. 성령이 와야 이것이 이제 가능한겁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간신히 구원받은 것은 맞아요. 후유.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웃기고 있다. 너는 넉넉하게 구원받았다." 니가 좁게 생각한 니 세상에서의 니 중심의 좌표 말고. 그건 간신히 구원받은 것 맞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에는 예수안이라는 넉넉함에서 오는 구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맨날 왔다갔다해요. 박자맞추는거(메트로놈) 있잖아요. 틱 탁 틱 탁 하는 것처럼. 좌로갔다가 우로갔다가. 간신히, 하 넉넉하구나. 또 간신히, 하 넉넉하네! 이게 바로 하늘과 땅 지옥과 천국을 왔다 갔다 하는 그 기능을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복습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어떤 경로로 갔다가 어떤 경로로 왔는지를 복습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무엇의 역사입니까? 전에 했죠? 우리 역사는 나의 역사가 아니고 누구의 무슨 역사? 주님의 역사. 그걸 오늘 어떤 노래 가사로서 그걸 다른 표현으로 사랑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역사라는 그걸 가져왔어요. 한번 듣겠습니다.

사랑의 역산데요 이게 같이 보세요. 역사거든요 역사. 내 것 내 소유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역사라는 말은 내꺼가 아니에요. 역사는 나보다 더 길어요. 시간은 나보다 더 크다고요. 길고 더 크고. 더 넓고. "나는 어떻게 됩니까?"가 아니라 "역사가 시간이 나를 어떻게 다루어 왔습니까" 그 이야기 하는거에요. 그거 하면서 무슨 역사? 사랑의 역사죠. 사랑이라는 것을 드러내기위해서 이 시간이 나에게 어떻게 공작을 하고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이게 뭐냐? 소유의 세계에요. 내 좌표의 세계에요. 소유의 시대는요 항상 뭐냐하면 자꾸 개선의 여지를 찾아요. 지금보다 더 나은 것. 지금보다 더 좋은 것, 더 편하게 사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은 뭐냐? 아는 게 과거밖에 없기 때문에 자꾸 미래에는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를 내가 소망하게 돼요. 소망하게 된다고요. 이게 이제 문제 인게 이게 이런 말이 우리에게 먹힌다는 말은 우리가 메트로놈. 이제 생각난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거에요. 누가 그렇게합니까? 이 방송을 누가 하게 해요?(안내방송중) 지금 주님께서 마귀를... 지금 이게 소유의 세계에서 이런 소리를 다시 안듣는 세계로 옮기는거에요. 길긴 길다 정말...(방송중)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성경공부할땐 성경을 보지만 막상 성경을 덮어버리면요 덮어버리면 메트로놈에 의해서 이 세계에 그냥 속해서 자꾸 자기자신을 지키려고하는거에요. 지킬게 없는데 그다음부터 지키려고하면 초조함 두려움 공포 무서움. "아 내가 오늘 뭐 방송 했는데 무슨 방송했지? 아 맞다 정전. 세상에 아직 가스불 어떻고." 온갖게 생각 난다고요. 이게 무슨 역사? 나의 역사에요. 사랑의 역사가 아니고. 리젝트. 거절 당한자의 집합. 지옥을 미리 우리의 온 인생을 통해서 복습케하기위해서 지금 어제부로 죽었으면 이런 소리 안 들었을건데 살아서 이런 소리 듣는거에요.

그래서 뭐냐하면 내가 어떻게가 아니라 사랑이 나를 사랑이라는 역사가 어떻게 나를 다루느냐의 내용입니다. 이 가사를 보게되면 "당신이 나에게 더 이상 내게 있지 않다." 이게 지금 스페인 노래고 탱고식의 노래이기 때문에 가사 해도 가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의미없어요. "내 영혼은 외로울 뿐" 사랑이 같이 있었는데 사랑이 어떻게 한다? 사랑이 떠나버리니까 어때요? 사랑 아예 몰랐으면 되는데 갑자기 뭐가 찾아왔어요? 고통이 찾아왔죠.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재밌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다음에 뭡니까? 내가 더욱더 뭐해져서? "고통스럽다." 이상하게 복음은 아닌데 복음같이 느껴지죠. "당신은 항상 내 존재의 이유였어." 내 존재 따로 있는데 당신이 옴으로써 내 존재가 누구한테 양보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존재에게 내 존재를 양보해줬죠. 근데 그게 어떻게? 떠나버린거에요.

"당신을 숭배하는 나의 종교의지" 종교, 교회다니는게 아니고 사랑하는사람 붙들고 있는게 자기 종교였다 이 말이죠. "그리고 당신의 그 과거이야기. 키스와 온기와 사랑과 열정" 그것이 뭐였다? 내가 추스린 나의 무슨 역사? "나의 사랑의 역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사랑의 역사 때문에 자기가 고통스럽다 이 말이죠. 둘도 없을 것 같은 모든 좋고 나쁨이 나를 이해? 참, 사랑을 어떻게 이렇게 묘사합니까? 사랑에는 뭐가 없다? "나쁘다 좋다를 묻지 않았던 그 시절이었다. 내가 하는 것은 무조건 그 쪽에서 이해해줬잖아." 다들 그런 사랑 다 받아 봤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쁘다 소리 안들었습니까? 안들었구나.

"그건 내 삶에 무엇을 주었고?" 빛이 옴으로써 나는 그동안 내혼자 살았던 것은 어둠이었단 뜻이에요. 빛이 왔다. 나중에 그 빛이 사랑이 어떻게 돼요? 꺼져버렸다. 꺼지니까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정전되고 가스불 조심하고 엘리베이터 조심해야되고 갑자기 그것이 어두운 삶이죠. 정전돼야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지. 계단 올라가려고 하면. "당신의 사랑 없이는" 그다음 뭡니까? "살 수 없어." 빈자리가 생겼죠? 빈자리는 오늘 유튜브 제 두 번째 강의 들어보세요. 그 어미라는 제목으로 했어요. "당신의 빈자리" 결핍의 자리가 생긴거에요. 결핍의 자리가 뭡니까? 사랑이 안 찾아왔으면 생기지 않았어요. 찾아왔기 때문에 결핍의 빈자리가 생겼고 그게 당신이 와야 채울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이미 그 사람이 종교가 된거에요. "당신은 항상 내 존재의 이유야. 당신을 숭배하는 것은 나의 종교였지" 아까 같은 이야기 했고.

이까지가 내 사랑은 사랑의 역사, 남자가 불러요. 그 다음에 맞은편에 여자가 불러요. "내 불만은 두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 이것 뭐 복음인지, 진짜잖아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두 마음이 뭐가 안 된다? 하나가 안 되는거에요. 하나가. 자식인데 자식이 내 마음 못 알아줘요. 난 자식을 사랑했는데 내 마음을 이해를 못해.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는 많은 소설 당신은 누구일까?" 소설이에요 소설. 그냥 소설속의 인물이지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네"라는 대상이지 진짜 현실로서는 아니다 이말이죠. 그 뒤에 또 멋진 말이 나와요. "여기 다른 곳에 온 사람처럼" 그 다음에 완전히 떨기나무 나옵니다. 그 뭡니까? "타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 차라리 다 탔으면 내가 당신을 잊어버리겠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 불꽃. 그 다음에 더 멋있는 것 뭡니까? "잠들지 않고 꾸는 꿈." 이게 잠자는 건지 꿈꾸는 건지. 아니면 깬것도 아니고. 그다음에 뭡니까? 자기는 인간이 아니에요. 뭐야? 하나의 물체에요. 어떤 물체? "서 있는 나무처럼 빈자리를 채울 다가올 힘과 부드러움." 그걸 그리워하고 있었던. 옛날 그리웠던 힘과 부드러움은 그게 그리워서 찾아야 되는 이게 사랑의 역사였던가? 같은 말이죠. "둘도 없을 것 같은 모든 존재." 그다음에 마지막에 "내 이야기는 아니고" 그다음에 "우리와 함께." 나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우리. 마태복음 28장 20절 "세상 끝날까지 보라 함께 있을 것이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하는 것 똑같이 행동해." "비극적이나 너무 깊은 세상에서 유일한 노래." 여기서 '유일한 노래' 그 노래가 뭐냐? 사랑의 노래.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가사 들어봐야 탱고 때문에 모르는데 어떤 노래인지는 감을 잡기위해서 제가 틀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자세한 것은 여러분이 '사랑의 역사(Historia De Un Amor)' 쳐보고 들어보세요. 혹시 이 가락을 들어본적 있다 하는사람도 있을수 있어요. 탱곤데.

이 가사를 집에 가서 보시면서 이런 내용으로 있어요.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남녀 간의 사랑하는 그것으로도 인간의 한계,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그 한계. 도저히 이 세상에는 해결점이 있다 없다? 해결점이 없는 것이 무슨 역사? 이게 사랑의 역사라는거에요. 리젝트. 이거는 인간의 사랑을 안 좋아하는게 아니고 좋아해요. 그러나 거절해버리면 끝나는 거에요. 따라서 이 노래가사를 지었던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자기를 함부로 대해서 거절한다 할지라도 그걸 찬양하고 기뻐하면 그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긍휼은 그거는 내쪽에서 나온 긍휼이고 내가 상상하는 거절도 내쪽에서 나온 거절이에요. 진짜 거절당하지 않음. 진짜 하나님께서 긍휼 줬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십자가 죽었다는 잃어버렸다 얻었다는 그것이 하나의 진동을 일으켜서 나라는 지평을 항상 밑에서 들쑤시게 만들어요. 내가 들쑤시는 일은 일체 없어요. 나는 소유성이 없으니까. 주께서 와서 들쑤시게 되면 나는 사랑의 들쑤심에 의해서 항상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함부로 대해도 마땅하다는 사실을 기쁨과 감사함을 동반해서 터져나오죠. 아까 짧다지만 짧은게 그게 보통 행운이 아닙니다. 짧아도 그게 귀한거에요.

돌아서서 내 아스팔트 포장을하지 마시고... 돌아서서 짧은거라도 내가 분열되고 깨지는 그 순간에 나타나는 기쁨은 이거는 더 안살아도 될 정도에요. 내일 걱정 안해도 될 정도로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귀한 보물을 질그릇같은 내 몸에다가 담아서 드러냈다 보시면 됩니다. 내가 어둠이 됨과 동시에 빛은 빛 답게 오는거에요.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왔으되 어둠은 깨닫지 못한다." 그것을 우리 인생을 통해서 그대로 말씀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자 계속 봅시다 사도행전. 이제 빌립 이야기 들어갑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 빌립집사가 성령받았습니다. 이 빌립집사가 성령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한것만 이렇게 나타나 있죠. 반드시 시작을 하나님이 시작하는거에요. "나는 뭐 성령받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전도한다." 이건 안 돼요. 그러면 그거는 자기 의죠.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절하지 않고 이미 수용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건져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고 계속 사용하십니다. 사용하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말씀 드리면 증언하는사람은 자기 소유성이 없습니다. 소유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빌딩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소유성이 없어요. 왜? 이 말은 소유성이 있어버리면 뭐가 방해돼요? 주님이 나와 함께있어서 날마다 지시내린다는 것이 가리워져버립니다. "자식은 내껍니다. 재산은 내껍니다. 내 명예 내껍니다. 내 과거에 모든 훌륭했던 것 내껍니다." 자꾸 소유성 못버리면 증언을 못해요. 이건 자기 자랑밖에 안돼요. 아무리 겸손을 띄고 뭐 십자가 뭐 어떻게해도 성경 도배를 해도 그거는 증언을 하는게 아닙니다.

증언은 반드시 자기 소유성이 날라가버려야 돼요. 그럼 자기 소유성이 날라가버렸다는 말은 나의 목표 나의 목적 나의 기대감 희망 이것 하나님께서 다 날려 보냅니다. 내가 이걸 스스로 없앨 때 증언되는게 아니고 주의 증언이 오게되면 이게 자동적으로 날라가게 돼있어요. 이게 바로 말씀의 좌표가 있는 세계. 말씀의 좌표의 세계의 특징. 말씀의 반대말은 육으로 사는거에요. 육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 그렇게 차이가 나는거에요. 주님이 함께있다라면 주의 다 이뤄진 말씀이 나와 함께있다는거에요.

육의 세계에서 빌립집사 이야기하지만 중국 마카오에서 있엇던 일인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그게 나왔어요. 상당히 내가 오랜만에 웃었어요. 우스운게 뭐냐하면 어떤 70된 아주머니를 뒤에서 뭐가 따라오는거에요. 계속 따라오는거에요. 그러니까 키는 안커요. 작아요. 키가 1미터 32센치 정도 되는데 따라와가지고 휙 돌아보면서 아주머니가 "따라오지 말라했지 왜 따라와 니가 뭔데 따라와?" 막 손가락질하면서 뭐라했어요. 그게 누구냐하면 로봇이에요. 무슨 대목에서 웃었냐면 기계보고 따지는 아주머니도 우습지만 거기에 대응하는 로봇보고 웃었어요. 로봇이 "내가 뭐?" 이러는...

그래서 마지막에 그 로봇이 경찰에 체포됐어요. 경찰에 체포되어갔어요. 지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했죠. 그러면 여기서 주의 사자와 빌립. 성령 받은사람은 누구하고 상대한다? 사람하고 상대 안 하죠. 사람과 안 만난다가 아니고 사람하고 상대를 안 해요. 뭐 상대할게 있어야 상대하죠. 그쪽은 자기 에너지 자랑하는데요. 힘 자랑, 소유자랑하는데. 그거는 자기 증언하는데 바쁜 사람인데 그 자기 증언 들을 시간이 어디있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증언해야되는데. 그런데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했으니까 이것은 누가 로봇이고 누가 주인공입니까? 주님의 사자가 주인공이고 빌립이 로봇이죠. 로봇은 시킨대로 하니까. "내가 뭐?“

가니까 누굴 만났냐 하면 에디오피아 사람 내시를 만났어요. 그러면 에디오피아 내시라는 이 로봇은 누가 그리로 인도했습니까? 주께서 인도했죠. 주께서. 자 이 이야기를 말로 하려니까 너무 힘드니까... 이 평면이 있다고 봅시다 평면. 평면이 있고 평면을 이렇게 밑에 파보면 흙이 있겠죠 자갈도 있고 흙도 있고 뭐 이렇게 있다 이말이죠 잘라보면... 근데 사람들은 이제 내면은 못들어가고 그냥 평면위에 살잖아요. 근데 저쪽에서부터 뭔가 흙이 파지는 낌새가 생기는거에요. 뭐가 드르륵 오는거에요 뭔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진동과 지면이 요동치면서 뭔가이게 밑에 땅속에서 파고들어오는게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게 뭐냐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으로 담요같은 것 이쪽에 군에서 담요털 때 한쪽에 털잖아요. 군에 간 사람은 압니다. 한쪽에 털면 그 파동에 의해서 물결이 이불이나 저 끝까지 미치잖아요. 십자가 사건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중심에서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십자가 사건은 멈출 기색이 없어요. 이 세상을 전부 다 끝까지 물결치게 만들어버립니다.

물결치는데 원리가 뭐냐? 죽은 자를 살린답니다. 이제 그 다음에 부수적인 것 "왜 죽었냐? 누가 죽게했는가? 어디 시험에 빠졌는가? 악마구나." 이거는 이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부수적으로 많이 봤지만 핵심적인 것은 뭐냐하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에요. 그걸 십자가 사건때 누가 먼저 그것을 일으켰습니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예수님이 먼저 죽었다가 살아났죠? 하나님의 뜻을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은 제치고 특정 인간을 따로 이 세상에 없는 존재. 하늘의 있는 불을 일부로 땅까지 보내어서 그 물결과 파동의 진동에 원천을 일부로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세상을 털어버릴 수 있는 원천을. 그러니까 세상은 멈추지 않고 멈출 기색도 없고 이 파동의 여파가 이 세상에 모두 일어나는 이란과 미국 전쟁이고 모든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이 가정사에서 문 닫고 안 나오는 아들이야기 모든 이야기가 그 파동이 원천이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와 부활에서 일어나는거에요. 이게 여러분 신약성경입니다. 어렵지 않죠?

이게 실물이 되고 현실이되고 실제로 일어나고있어요 실제로.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자꾸 소유성 존재만 생각하니까 내한테 이게 이익이냐 손해냐 이것만 따지는데 이거는 자기가 사태의 원천이 되잖아요. 이거는 자기 증언이 돼요. "나 이렇게 제대로 살았다 열심히 살았다. 악착같이 살았다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그러니 너무 욕하지마 나 나무라지마 미워하지마 나 인정해줘." 전부다 이게 각자각자 자기 사건이에요. 이거는 십자가 사건을 망치는거에요. 완전히 무시하는겁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지시했고 거기에 누가 아다리 누가 만납니까? 사막에 열기를 바람을 일으키면서 마차타고 누가와요? 에디오피아 내시가 오잖아요.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래서 이게 하늘나라의 좌표에서 만났는데 아까 하늘나라 좌표가 어떤 좌표라고 했습니까? 유일하게 구원이 되는 좌표가 어떤 좌표입니까? 긍휼이 여기는 좌표잖아요. 긍휼이 여기는 좌표에 누가 그걸 선점했어요? 누가 좌표를 이렇게 만남의 장소를 누가 마련했습니까? 바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는 그 사건 그게 그 이야기잖아요.

사도행전 8장32절 봅시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그 생명이 빼앗기는 것. 그 생명이 빼앗기는 그 장소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고 구원이 임하는 주께서 거절하지 않고 받아 줄 때 받아주는 그 오직 그 지점. 하나의 지점은 바로 이사야에 나오는 그 예언이 완성된 십자가 사건의 지점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보이거늘" 이 말은 "다들 십자가 사건 안에서 구원받았죠 그죠?"라고 우리에게 되묻는 말씀이죠. 갈라디아서 3장 1절. 십자가와 연계된 생활하고있죠? 십자가로 파생된 십자가 에너지가 여러분 지금 일상생활에 하나하나 다 파열을 일으키고 깨뜨리고 나 중심으로 살겠다는 나는 내 소유 중심으로 살고 내 잘난체하는 이런인생을 여러분 균열 일으킨 것 맞죠? 쪼개지는 것 맞죠?

이 십자가 사건에서 지상에 있는 모든 정돈된 것을 깨니까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파열이 생기고 파열음 들리겠죠? 쭉쭉 갈라지겠죠. 내 인생 쪼가리 나죠. 편승엽이 불렀던 노래가 "찬찬찬" 그 가사에 보면 이런게 있어요. 둘이 술잔을 맞대고 찬찬찬 해놓고 그뒤에 but 그러나 마음만은 줄수없다는거에요. 이게 미치겠다는거에요. "같이 술 한잔할때는 마음 통한 것 아니었어?" "아니었어." 집에가서 가사 한번 보세요. 찬찬찬 편승엽. 나이 62살 한번 들어보세요. 연예인생활 36년 한번 들어보라고요. 찬찬찬할땐 좋았죠. 이젠 나한테 넘어왔다 좋았죠. 마음만은 못주겠다는거에요. 아까 그 가사하고 비슷하잖아요. 진짜 얄미운 사랑이에요. 마음만 주고 떠나가버린 사랑 얄미운 사랑이에요. 그래서 사랑은 헤어지고 난뒤에 그 고통과 더불어서 아는게 사랑이라고 세상에선 그렇게 이야기해요. 세상에선. 주님도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을 자기가 잃었다가 아버지에게 잃었다가 얻었던 그것을 우리 인생을 통해서 총체로 복습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이 세상에 좌표를 원하는 소유가지고 사는 그 세상에서 이렇게 주님이 당했다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올 때 여전히 자기 소유를 겸해서 왔어요. "제가 예수님께 가겠는데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 치르고 가겠습니다." 그 이야기 했거든요. 마태복음 8장에 나와요. 근데 그전에 그다음이야기 여러분 다 아시죠? "죽은자는 죽은자로 장사하고 나를 따르라." 알잖아요. 근데 그전에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제 집이 있지만 인자는 뭐할곳이 없다?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 했어요. 마태복음 8장 20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땅에서는 아무 소유가 없고 오직 주의 말씀만 소유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이 길을 누가 답습하느냐? 사도가 답습하는거에요. 빌립이 가는거에요. 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으니까.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 또 걱정이 늘어졌어요. "어제 또 주식 또 새로 빼가지고 갈아치기 했는데 한국 주식 빼서 미국주식으로 갈아타서" 환율이 1500원 넘어갈때에는 환율의 영향을 적게받는 나라에 우등 주식으로 갈아타야 된다는 것을 경제학에서 가르칩니다. 제가 또 가르치는 것 같네... 금을 사야된다는거에요. 금을 사야되고 부동산 해서는 안된다는거에요. 왜냐 한국의 부채가 실제 부채가 132%이기 때문에... 이게 도대체 왜 환율이 떨어질 기미가 안보인다는거에요. 나라는 망해도 니는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니 소유를 껴안고... 이 이야기가 이세상에 좌표가 있는 사람한테는 이거는 가능성 안의 이야기에요. 납득이 되고 설득이 돼요. 아까 성경구절 뭐 본다고 했습니까? 자꾸 알고리즘이 번져가지고 죄송합니다만... 로마서, 여러분도 자꾸 저처럼 반복해야돼요.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보면 이런말씀이 있거든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이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걱정이 되는게 "그럼 나는 성령 안 받아놓고 나는 또 리젝트. 나는 거절당한다 미치겠다 정말" 이러는데 제가 아까 여러번 했어요. 소유가 아니고 소유성. 글자 한자차이. 소유가 아니고 소유성. 부동산 15만평 있어도 상관없어요. 소유성. "나는 내것가지고 죽을래." 이러면 안된다 이 말입니다. 소유가 나를 살리고 소유없으면 나는 죽는다가 아니라 십자가가 주님이 죽었다 살았다는 그 십자가 사건이 나라는 것을 균열, 쪼가리 내서 이미 너는 죽었고 이미 너는 살았다라는 사건을 유발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기존에 세상 좌표에서 이게 진동이 일어나더라 이 말입니다. 세상 사는게. 한시도 고요할 때가 없어요. 한시도.

또 예를 들면 남편이 직장생활 한 40년 하다가 이제 퇴직해서 집에와서 부인보고 "나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나 좀 위로해줘." "어떻게하는데?" "하루 세끼 밥 차려주고 해도." 이렇게 할 때 이번엔 누가 나가느냐하면 아내가 나가요. 아내가. 왜냐하면 자기 나와바리잖아요. 근데 외부의 침입자가 와서 하루종일 같이 숨이막힐 지경이에요. 그걸 뭐라고하느냐, '남편재택스트레스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병이 생깁니까? 바로 이 집은 내가 사는 내가 아늑하게 내 위주로 꾸몄던 나의 소유된 내 공간이라는 소유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내 좌표라는거에요. 그러니까 그분은 평생을 누굴 증언해요? "나 이렇게 괜찮게 살았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내 인생 지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것 증언하는거에요. 이래가지고 어딜가요? 천국가요? 천국이 어디 뭐 그런사람 넣어주는게 천국입니까? 아니죠.

천국은 어떻게? 또 잊어버렸죠.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간다고요? "주여 저를" 어떻게 대우해 달라? "함부로 대해달라." 또 이 말 하면 "진짜 내가 말로 하는거지 진짜 함부로 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이렇게 나오면 내가 나를 소유하고있는거에요. 내가. 죽었다는 말을 죽어도 못 믿는거에요. 그래서 어떤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그 대사가 너무 오늘 강의하고 딱 맞아서 적어왔어요. 이겁니다.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자기를 조사하는 보건조사관에게 이렇게 합니다. "당신은 정말 나를 믿어요?" 이렇게 하니까 그 조사관이 "이제부터 한번 믿어 보려고요." 이 대사. 천국 있고 십자가 피로 구원받습니다. 정말 이 말 믿습니까? 이제부터 내가 한번 믿어 보려고요." "한번 믿어보는 것은 안됩니다." 이게 어느 드라마냐하면 '세이렌'이라는 드라마에요. 그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는 이상하게 다 죽는 드라마가 있어요. 사이렌. "한번 믿어 보려고요.“

"교회나와서 신앙생활 잘해서 천국가요." "그래요 그렇게 부탁하는데 내가 한번 믿어볼게요." 이런 것. 한번 믿어 본다는 것은 누굴 믿는다는 말이에요? 내가 믿기로 결정했다는 나를 계속 믿음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거에요. 이거는 아닙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나를 함부로 대해주세요"하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죠.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 합시다. 그래 가지고 성경을 보는데 이사야 대목을 봤잖아요. 보니까 참 내시가 하는 말이 진짜 중요한 말 해요. 보기는 봤는데 무슨 뜻인 줄은 모르겠다는거에요. 야 이게... 이 사람은 아직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안 받았어요. 그냥 생판이에요. 보기는 봤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다시말해서 이 사람의 고백은 뭐냐?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뭐하다? 무지하다. 내가 이 말씀 앞에서 나는 지금 문제 있음이 발각됐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빌립은 성령께서 주의 사자가 왜 나를 이사람에게 보낸 그 내력을 주님의 지시의 그 이유를 알게 됐어요. 이거 이야기하라고. 뭐라고 이야기하라고?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사야 한바탕 확 이렇게 풀어버리라고 하필이면 핀 곳이 이사야거든요.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이사야를 해석하라고. 해석하니까 이 사람이 누구냐?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때부터 예수님부터 해서 신약. 이번에는 이사야가 아니고 신약성경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 예수님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어요.

"그때 길에 빌립이 이야기하다가 물 있는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받음이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 제목 할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거리낌이 없다. "주여 저한테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한테 어떻게 해도 저는 거리낌이 없습니다."라는 고백 이거는 뭐 세례를 백번 받아도 괜찮은 자격이죠. 주께서 거리낌을 통해서 나를 거리낌을 통과하지 못하는 나. 이 잘난 내가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그것. 벽을 이 새장을, 몰랐던 존재 자체도 몰랐던 새장을 주께서 말씀을 보내고 빌립 집사 보내고 성령 보내서 나를 이 새장에서 나를 건졌다는 고백이 바로 내시의 고백입니다. 이게 바로 시몬과 대비되면서 하나님이 사람 건질 때 거절당하는 자와 받아주는 자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인력으로 인간의 힘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안다든지 믿음 생활 못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깔아놓은 그 사건이 이 자아를 쪼개고 쪼개고 균열을 일으키고 파동을 일으켜서 이미 죽었고 죽어야 다시 산다는 것. 없어야 산다는 이 사실을 그래야 내 증인이 아니라 주의 증인 된다는 사실을 우리 온 인생을 통해서 다시 복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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