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60717a 에스겔 16장 63절(아기 나심)-이 근호 목사
『신구약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67페이지, [36. 아기 생산과 관련된 창세기의 약속]. 질문입니다. [질문> ‘아기 생산’과 관련된 창세기의 약속이라는 말이 조금 생소한 표현인 것 같아서 질문합니다.…]
상당히 제대로 지적을 했어요. 왜 지적을 했느냐 하면, ‘이미 있는 조상 아담이 계속해서 약속을 줬고, 아담의 후손들에게 약속을 전달, 전달해서 나중에 예수님까지 이어온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게 맞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특수하게 아기 생산이 필요 없어요.
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그 육적인 능력으로 부인하고 결혼해서 애 낳으면 되지, 굳이 아기 생산에 대해서 딱 집어서 마치 새치기하듯이, 줄 쫙 서 있는데, 지금 애기 낳고, 애기 낳고, 애기 낳고 있는데, ‘그거 말고 이 애기!’하고 중간에 난입한다? 뛰어든다? 그렇게 쑥 들어와 버리면 기존의 아담 노선이 끊어지죠. 끊어집니다. 그 이야기죠.
아기 생산에 대해서 굉장히 할 말이 많아요. 기존에 아담의 후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왜 인정하지 않는가? ‘조금 생소한 표현’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생소한 표현이 어떻게 생소한지 이사야 9장 6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우리 인간에게 난 아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없어요. 우리에게 나게 하신 특수한 아이가 따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자식을 낳고, 낳고, 낳고, 낳는 그 방식 말고, 아담이 후손을 낳는 그 방식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 아담의 노선에다가 하나님이 특별한 아기를 줄 때 그 주시는 방식이 기존의 아담, 보통 인간들의 자식 낳는 방식과 어떻게 다른가? 그냥 주신 바 되는 거죠. 주신 바 되죠.
그럼 인간이 인간의 자식을 낳는 것은 어디에 해당이 안돼요? 주신 바에 해당이 안 되겠죠. 기존의 모든 인간을 한꺼번에 부정하는, 전체로 부정하는 것이 ‘너희들이 생산하는 아기 말고 다른 아기’라고 쑥 들어오죠. ‘아기 생산’과 대비되는 것은 ‘기존의 자식 낳기’에요. 이렇게 둘로 구분됩니다.
그럼 기존의 자식 낳기는 뭐가 되는가? 몽땅 저주 대상이에요. 몽땅 저주의 대상이 돼요, 기존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다 같이 육은 육이다. 육은 어디에 못 간다? 따로 설정된 복의 나라에 못가요. ‘복의 나라에 못가면 안가면 되지.’ 문제는 못가면 저주라는 거예요.
복이 없으면요, 복이란 게 없으면 우리는 우리끼리 열심히 살면 돼요, 그냥. 애 낳고 잘 키우고. 그런데 복의 나라가 등장해버리면 이거는 아주 자동적으로 저주받는 동네가 되고 맙니다. 자동적으로 저주받는 동네가 되죠.
처음부터 다시. 아기 생산의 특이성에 대해서 지금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아기를 집어넣지 않더라도 인간의 남녀가 있으면 아기가 생긴다고 그렇게 알고 있죠.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자식, 그거 말고 다른 특별한 자식의 등장은 ‘약속을 짊어지고 왔다’고 보면 돼요. 약속을. 그럼 그 외의 사람은 약속의 궁극적인 대상자가 아니죠. 약속의 궁극적인 대상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아기 생산과 관련된 창세기의 약속’이라는 말이 좀 생소한 것 같다는 말을 하신 이 분이 창세기의 어느 대목에서 이렇게 자식 생산에 대해서 생소하다는 느낌을 받는가? 그것은 쉽게 알 수 있어요.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서 아기 못 낳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밤중인데 “밖에 나가봐라. 하늘을 봐라. 뭐가 많지?” “별이 많습니다.” “이제부터 저 별처럼 많은 숱한 자식의 아비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하나님의 지시를 보면서 뭘 처음 느꼈겠어요? 이걸 느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낳은 자식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실지 않는가? 왜 인간이 낳을 수 있는 자식은 안 되는가?’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을 못 낳는 입장에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 거예요.
굳이 자식을 원하지 않았어요. 아기를 못 낳으니까. ‘하나님께서 아기를 주시지 않는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이 많도록 아기를 주시지 않는구나.’ 아기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이것은 결국 뭐로 이어지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주를 주시지 않을 작정이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주를 안 주실 모양이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 약속이잖아요. 이 약속이 과연 내 대(代)를 이어서 유효하냐, 아니면 유효하지 않느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약속이 자식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차단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아버리면 그것은 약속도 아브라함의 자식에게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준 거예요. ‘네 몸으로 낳은 자식은 약속 수용자로서 적절치 않다.’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이해하려면, 자식이 없는데 그게 복이 되고, ‘자식이 있다, 많다’ 그것은 저주가 되는 거죠.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잉태한 사람들은 저주받고 잉태치 못한 자는 복을 받고.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7절)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내막을 이해하려면, 이걸 일단 지우시고요. 아까 이사야 9장 6절은 우리에게 굳이 한 아기를 주었다는 취지에 대해서 이 본문에 나온 겁니다. 아시겠죠?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셨으니” 우리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는데 왜 줘요? 말이 안 되잖아요. 아기를 낳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아기 말고, 네가 낳을 수 있는 아기 말고, 아기를 하나 주겠다는 거예요.
이런 의식의 전환을 위해서 제가 한 문장을 쓰겠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위해서 살고,
왜 어떤 사람들은 지옥을 위해서 사는가?’
이 문장을 제가 쓰는 이유는, 우리 기존의 안일한 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쓴 거예요. ‘왜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위해서 사는가?’ 이것은 우리가 평생 동안 많이 들었던 이야기에요. 참 많이 들었어요. ‘너 교회 열심히 다녀서 천국을 위해 살아라.’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잖아요.
그런데, 그 아래 문장을 보세요. ‘왜 어떤 사람들은 지옥을 위해서 사는가?’ 이런 감을 우리가 평소에 느낍니까? 혹시 감 떨어진 거 아니에요? 세상 사람을 볼 때에, 저 사람은 그냥 ‘교회에 관심 없는 모양이다. 천국 관심 없다.’ 이 정도로 천국이 결핍된 정도로만 보지, 적극적으로 지옥을 위해서 지옥가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간다는 인식을 여러분들이 가집니까? 가지겠어요?
어떤 남자가 결혼을 하는데, 남자는 교회 다니고 이미 주님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인물보고 또는 남자의 재력보고 저 남자와 살면 행복하겠다 싶어서 그냥 교회 관계없이 연애해서 결혼했다. 그럴 때 하객으로 온 우리들이 ‘저 여자는 왜 지옥을 위해서 사나?’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저 여자는 언젠가 같이 따라 교회 가겠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저는 이 인식이 잘못됐다고 보는 거예요. 한쪽이 천국을 위해서 산다면, 반드시 그 외의 사람은 어디를 위해 살아요? 지옥가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써요, 매일 삶이. 지옥에 안 넣어 줄까봐, 지옥 못 갈까 싶어 환장한 거예요. 열심히도 살아요. 지옥가기 위해서 열심히 삽니다.
어떤 천국 결핍 요소가 아니고 그 내용이 충실해요. 무슨 내용으로? 지옥에 합당한 삶에 아주 자기가 충실하고 열심히도 살아요, 지옥가기 위해서. 그 관점이 우리 주님의 관점입니다. 우리 주님의 관점.
인간 제3자가 보는 관점, 그것을 바꾸세요. 관점을 주님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천국을 위해 사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 보지 말고, ‘저거 우리 편이다’ 생각하지 말고 다른 편도 좀 봅시다. 저 사람은 그냥 못 가는 자가 아니라 갈 곳이 있어요. 그것도 마음먹고 갈 곳이 있어요. 어디입니까? 지옥입니다. 한시라도 지옥과 무관한 일은 그 사람이 행한 적이 없어요. 지옥과 상관있는 일만 따박따박 평생토록 집요하게 해오고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차이를 알아야 되겠죠. 어떤 사람이 천국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사람이 지옥을 위해 사는가. 차이를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어요.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어떤 관점이 있는가? 관점을 적을 테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동의하는가 속으로 생각해보세요. 속으로. 겉으로는 내가 안 묻습니다. 속으로 생각하세요.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은 ‘인간은 죽지 않는다.’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이 차이점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죽음 자체가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왜? 안 죽으니까. 안 죽으니까 그래요. 그러나 지옥 가는 사람은 한시도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아침 8시 반부터 12시까지 모든 TV 각 채널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의사들 나와서 건강 상담 이야기 나와요. 거기에 맞춰서 홈쇼핑도 건강식품 말해주는 프로그램이에요. 연세 많은 사람들은 교회와도 마찬가지에요. 건강 이야기해요. 건강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제가 뭡니까? 우리가 몸 아프면 죽는다,잖아요. ‘죽는다. 언젠가는 죽겠지.’ 이게 단순히 몰라도 되는 정보입니까, 삶에 뿌리처럼 박혀있는 거예요? 뿌리처럼 박혀있죠.
광주에 어떤 경찰 간부 아들이 여고생을 ‘죽였다’ 하잖아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 인간은 안 죽는데?’ 언젠가는 주께서 무덤에 있을 때 불러내잖아요. 요한복음 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주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반복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그동안 상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지금 내가 한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내가 끄집어낼게, 할 때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했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그러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그들이 죽어 있어야 돼요, 살아 있어야 돼요? 살아 있어야 음성을 듣죠, 살아 있어야.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그다음에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했죠. 29절의 이 대목은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잘 들으세요, 어려워요.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죽지 못하는 거예요.
아, 참. 주님 지독하죠? “내가 말한 게 장난인 줄 알았지?” 내가 말한 게 장난이 아니라 이 말이죠. 장난이 아니잖아요. 장난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계속 유지되려면, 죽어서 “저보고 이야기하지 마세요!”하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는 거예요. 없어요. 살아있을 때 주의 말씀 들을래, 죽고 난 뒤에 들을래? 그 이야기란 말이죠.
하나님이 얼마나 집요하고 지독합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 하나라도 허비가 없어요. 허비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느 대형 마트에서 세일하는 광고지를 아르바이트하는 아주머니한테 주면서 “이거 100장인데 다 붙이고 오면 일당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아주머니가 100장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립니까? 어떻게 합니까? 안되죠. 그 동네 다 아니까. 다 벽에 붙이겠죠. ‘세일합니다’ 100장 다 붙일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붙였던 포스터, 광고지 떼면 뭐 나오죠? 벽돌 나오고 때로는 나무 나오고 또는 가로수, 전봇대 나오고 하겠죠? 그렇죠.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광고지에 해당됩니다. 얇은 광고지. 코카콜라 광고지 있죠? 그거 확 떼면 뭐가 나오는가? 이거 나와요. 돌벽 나와요.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하나의 라벨처럼 붙어있는 거예요.
주의 말씀을, 뗄 수 없지만 잠시 떼고 봤다 하면 우리는 어디에 붙어 있는가? 흙이에요. 흙에다가 흙 플러스 말씀을 보태니까 이게 인생이고 인간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얇은 비닐막 같아요. 아주 얇은 비닐막. 두께도 얇아요. 100년 살아도 얇아요. 10살 살아도 얇아요. 껍데기인 것은 마찬가지에요. 100년을 사나 50년을 사나 나자마자 죽으나 껍질은 껍질이에요, 그냥. 껍질은 껍질이라고요. 폭이 없어요. 내 인생이라는 폭이 없다고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른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이런 말은 아마 예상 못했을 걸? 하는 차원에서 아멘, 아멘. 진실로 진실로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내가 하는데 너희들은 결국 죽는다, 안 죽는다? 그 누구도 안 죽는 거예요.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은, 죽기 전에 호강하자 이런 식이죠. 죽기 전에 호강하자. 죽기 전에 호강하자니까 자기가 돌벽에 지나지 않고 흙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해버리죠. 그러니까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붙어있는 이쪽 반대편에서 저항하는 힘이 나와요. 주의 말씀에 대해서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저항하는 힘이 나올 때 그것은 악한 자의 부활로, 지옥 가기 위해서 영원토록 주의 말씀에 후회하는 식으로 굴복해야 될 자들입니다. 그 자들의 운명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과 반대가 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천국을 위해서 또는 천국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인 줄 저는 믿습니다! 믿는다면 뭘 반드시 알아야 돼요? 지옥을 기어이 가겠다고 애쓰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기어이 지옥에 가고 말리라’ 하는 야무진 야심, 의욕으로 지옥을 한번 가보겠다는 그런 인생 목표를 정해놓고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분별해야 되고 발견할 수 있어야 되겠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첫 번째, 두 번째가 있어요. 한자 쓰겠습니다. 제가 쓰면 한자 아닌 것 같아요. 이거 완전히 그림이에요. 첫 번째 그림의 호칭은, 개(個). 개인, 개별. 모든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자기를 뭐로 보느냐? 출발점을 개인으로 잡습니다.
이것이 아주 노골화된 것이 뭐냐? 국가, 왕 제도가 날아가고 난 뒤에 민주주의 제도가 되면서 노골적으로 이렇게 된 거예요. 민주주의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자본을 취득해서 거기서부터 나가 되는 거예요. 노동해서 자본 비축하고 거기서부터 내 것이 생기죠, 내 것.
내 것이 생기는데 이 내 것은 개인이죠. 이 내 것을 가지고 어디에 가느냐? 시장에 가요. 장터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냥 시장이에요. ‘나 쓸 만합니까?’하고 취업문을 두드리고. 내 것을 가지고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자본은 거침없어요. 어떤 철학자는 자본주의에서 빠져나올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살했어요. 자본주의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럼 자본주의에서 못 빠져나와가지고 ‘이게 인간사는 세상이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런 사람이 만약에 자본주의 전에 있던 국가주의 또는 왕 제도에 갔다면 왜 자살 안하겠습니까? 잘 들으셔야 돼요. 왕 제도에서는 죽으시면 조상 계열에 등록돼요. 이게 모든 민족 가운데 조상 제사가 있는 이유에요. 조상 계열에 등록이 돼요. 죽은 자들을 집합하는 거예요.
죽은 자들을 집합하는 조상 계열에 등록이 되는데, 이것은 죽으면 그렇잖아요. 죽으면 조상 계열에 등록되는 이것으로 옛날부터 종교가 있었어요. 여러 가지 종교가 있지만 힌두교 같은 경우에도 그렇고 불교에도 다 있어요.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뭘 없앴어요? 왕을 없앴죠. 또 자본주의는 뭘 없앴습니까? 뭘 없앴어요? 종교를 없앤 거예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종교 없애고 왕을 없애면 남는 것은 뭡니까? 개(個). ‘나’가 남아요. 모든 교육은 나를 강화하는 데에 필요한 교육이에요. 그래서 출발을 나부터 합니다. 나부터 출발해서 두 번째는 가산(可算)이에요.
가산을 영어로 하면 count한다. 저 사람 내편, 이 사람도 내편, 저 사람은 내편 안 할래, 빼기. 1+1-1, 저 집단은 한꺼번에 왔으면 좋겠어, ×2. 저 사람은 탈퇴할 거야, ÷3. 그래놓고 돌아서서 +2, 저 사람은 마음에 들어. 우리 친구할까? 친구 같이 따라와, 그럼 +2명. 친구인데 같이 놀러가서 삐쳤어, -1. 이게 뭐에요? 내가 카운트, 계산하는 거예요, 계산하는 것. 끊임없이 계산해요. 끊임없이 계산해요.
개인으로부터 출발했던 이 사회, 그리고 이러한 개인이 집단화한 시장, 자본의 시장. 이것의 근거는? ‘사람은 죽는다. 사람에게는 죽음이 있다. 그러니까 살아생전에 죽음을 피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 이게 바로 지옥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특징은 뭐냐? 이 안에 뭐가 빠졌어요? 약속이 빠졌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지 안 궁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궁금하다 치고, 궁금한 것은 천국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이것이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이라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끝에 해답을 말씀드렸는데. 여기엔 뭐가 없다고 했어요? 약속이 없죠. 그럼 천국 가는 사람은 뭐가 있겠어요? 약속을 드러내면서 살아가죠. 약속을 나타내며 살아가죠.
자,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 알았죠? 개인부터 출발해서 가산합니다. 돈 계산도 마찬가지고 사람 계산도 마찬가지고요. 계속 카운트하는 거예요. ‘저 사람 놀지 마라, 저 사람 좋은 사람이다. 받아들여라.’ 누구 중심으로? 여기 내가 있으면 나를 둘러친 나의 둘레를 만드는 거예요. 달무리라는 말이 있죠? 달이 있으면 달 주변에 둥그런 아우라 같은 거요. 전부다 개체적 의식입니다.
가운데 핵이 있으면 주변에 구름처럼 전자가 활동하고 있다.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확률적으로 있다. 이게 원자구조 아닙니까. 핵과 전자를 큰 범주로 해서 ‘입자’라고 해요. 핵 주변의 전자는 사실 확률이기 때문에 전부 파동 확률이에요.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개인이니까 개별자의 입장에서 이걸 입자라 보죠.
왜냐하면 측정하는 내가 측정하는 나에게 의미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이걸 연구해서 박사가 되든지 내가 이 시장에서 취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관측 자체가 즐거우면 안 되겠죠. 나한테 돈이 들어와야 되겠죠. 취직을 하고, 학위를 따고. 관측 자체가 나로 하여금 개별자가 되고 개인이 되는 의미로 돌아올 때, 지옥 가는 사람은 이것이 나를 향한 약속이 되는 거예요.
나홍진 감독의 영화제목이 ‘HOPE’이에요. 지난 수요일에 개봉했잖아요. 호포 항이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벌어진 외계인의 분노와 인간 분노의 격돌, 이게 주제에요. 네가 날 쳤어? 너 한번 쳐보자. 이 영화가 2시간 35분 동안 계속 돼요. 분노와 분노의 격돌, 개별자와 개별자의 대결. 분노에 입각해서 서로 잡아 죽이겠다고 추적하는 그 영화가 ‘HOPE’라는 영화에요.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의 삶은 뭐냐? 아까 인생이란 얇은 비닐막이라 했죠. 안 그러면 코카콜라 포스터처럼, 벗겨버리면 안에 돌벽 나오는데 그것도 모르고 앞에 뭘 치장했잖아요. 얇은 인생이에요. 인생의 낙(보람)은 뭐냐? 보람은 복수하는 즐거움이에요. 지금 복수 못하면 죽어서는 복수가 안 되니까. 죽음이 있으니까.
죽음이 없는 사람은 복수할 위치에 본인이 있지 않겠죠. 말이 자꾸 어렵게 되는 것 같은데… 죽지 않는 세계에 사는 사람은 복수할 게 없다니까요! 왜냐하면 본인이 안 죽었잖아요. 세월호고 뭐고 간에 이태원이고 뭐고 간에 누가 내 딸을 성폭행해서 죽이든 간에 안 죽잖아요. 고함지르면 안 되는데… 너무 중요해서 그래요. 사람이 안 죽는데 복수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유일하게 죽으신 분은 누구에요? 약속대로 죽으신, 약속-“정녕 죽으리라”의 죽음은 누구 몫이에요? 예수님 몫이잖아요, 예수님.
다른 자식은 자식도 아니에요! 약속을 발현하지 못한 자식은 자식도 아니에요. 진짜 한 아기를 주실 때는 진짜 약속의 내막이 유일하게 응집된, 모든 것이 응집된 아기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었다.” 이게 얼마나… “너는 자식도 아니야. 치워. 진짜 자식은 하나님 내가 너희에게 준 아기야.”라고 제공했단 말이죠.
그 아기 이야기가 이사야 9장 6절이잖아요. 이사야 7장 14절에서 그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요? “처녀가 잉태하여” 이거 뭐 장난치는 겁니까? 왜 멀쩡한 여자 놔두고 처녀를 통해서 아기를 낳죠? 다른 여자는 여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파고 파도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요. 이왕 어려운 거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이어갑니다.
사건 → 정지 → 공백
사건이 찾아오게 되면 모든 것은 STOP!, 정지가 돼요. 여러분, 강물이 정지됩니까? 안되죠. 강물은 정지가 안 되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건 정지가 안돼요. 그러나 주님께서 언약을 개입해버리면 지금의 모든 흐름이 정지, STOP 하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흘러 내려와야 했던 그 흐름들이었던 거예요. 주께서 그 흐름을, 지난 번 언약에서 이번 언약, 이번 언약과 그다음 언약 사이에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는 겁니다. 코스를 바꿔가면서.
건물이 있는데 4층에서 계단타고 내려오면서 4층에서 3층으로 뛰어내릴 수 없지 않습니까. 계단으로 내려오잖아요. 그러나 흐름들, 4층 사건, 3층 사건, 2층 사건, 1층 사건들이 계속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 흐름들이 언약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사건화시키는 거예요. 사건, 언약 사건입니다, 언약이 주어지고 사건이 오게 되면 이게 정지가 되고 스톱이 돼요. 흐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의미가 없고 그다음에 공백, 빈자리가 마련돼요.
아브라함이 아기를 못 낳는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나이가 구십이 넘었다. 아기를 못 낳는다. 딱 들어오는 뉘앙스는 뭡니까? 그 집에는 자식이 없다. ‘없다’가 있죠. 없다,가 돼요. ‘없다’가 만들어져요, 언약이 오게 되면. 왜 ‘없다’가 되어야 되느냐? ‘없다’가 될 때, 없는 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없는 데서 창조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뭐 때문에 저런 소리하는지?’ 여러분들이 비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거 무시하고 계속 갑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스톱! 됐습니다. 만지지 말라.
아니, 눈에 보이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보니까 예수님이 계셔요. 그럼 막달라 마리아 기억 속에 조금 전까지 살아계셨다가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그 예수님이잖아요. 자기 기억 속에 예수님이란 기억이 있잖아요. 그 예수님이 그 예수님인 거예요. 그래서 반가워서 만지려 했다 이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만질 만해서 만지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만지지 말라. 다시 말해서, 인간의 육에서 천국 가는 길은 애시당초 없다. 없는 거예요. 천국 가는 길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없어요.
한 아이를 줬지만, 그 한 아이에게 접근할 수 있는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이만 붕 뜨는 거죠. “만지지 말라. 내가 아버지께로 갈 때가 되지 않았다.” 이게 바로 ‘STOP’이에요. 내가 알던, 내 기억 속에 알던 예수님이 스톱이 된 거예요.
아, 내가 못 가는구나. 왜 내가 못 갈까? 왜 못가긴? 육이니까. 육이니까 못 가는 거예요. 그 육은 뿌리가 아담이죠. 아담 노선에 있는 자는 어떤 자도 천국에 접근이 안돼요. 천국에 접근이 안 된다고요. 죽는다는 것을 당연한 걸로 여기고, 죽는다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다고 여기는 그 인간이, 죽지 않는 세계에 자기가 죽음이 있다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기 생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한 아기를 줄 때에, 약속을 가지고 주시잖아요. 우리는 약속이 없고, 아담 노선에는 약속이 없고. 한 아기가 거기에 침투하고 삽입되고 개입해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아기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그 증거가 시편 2편 12절에 나옵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했죠.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거 없이 ‘여호와께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다.’ 이렇게 하면 왜 안 됩니까? 이렇게 하면 왜 안 되죠?
‘하나님, 저 인간입니다. 저 우리 아버지 엄마 다 있어요. 저도 자식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자식이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하나님 믿고 나도 하나님 믿었으니까 우리 이대로 좋은 게 좋다고 여호와 잘 의지하는 걸로 그만 복을 주시고 천국 가게 해주세요.’ 우리가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죠.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아기와 자기라는 존재를 비교할 기회가 없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아들과 그리고 ‘하나님 잘 믿고 의지하니까 구원해주세요.’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비교를 한번 시켜보자는 거예요.
비교시켜보니까 우리는 뭐가 없어요? 나는 하나님 잘 의지하니까 나한테는 복이 있고 저주가 없을 것이라고 아예 저주가 없다고 생각하죠. 저주라 하는 것은 나쁜 일했을 때 저주받는 것이지, 선택을 잘못했을 때 저주받는 것이지, 태어난 자체가 저주의 세계에서 태어났다는 생각, 인식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 진짜 태어난 게 저주라면 죽을 때까지 저주고 죽고 난 뒤에도 저주고 영원히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조치라는 것을 흔쾌히 받아줘야 되는데, 우리는 그런 생각 없어요. ‘지금 살아있을 동안에 하나님 잘 믿다가 언젠가 죽으면, 살아있을 때 옳은 선택으로 인하여 우리가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간다.’ 이런 의식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이죠.
이건 뭐냐? 내가 나를 수습하는 거예요. 내가 나의 마음자세를 교정한다고요. 교화시키고 교정하고 잘 다듬어서 하나님이든 누가 오든 뭘 해도 나는 이렇게 의지했습니다.라고 내놓을 어떤 건덕지 같은 것을 내 쪽에서 마련해두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한자로 개(個). 개별자 의식이라니까요. 나쁜 사람은 쫓아냈습니다. 카운트, 가산하는 것.
그런데 시편 2편에 보면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낸다는 거예요. 한 아기를 우리에게 줬다 이 말이죠. 그 아기를 주면서 어떻게 하느냐? 아까 스톱,이라 했죠. 사건 주었다. 그다음에 우리는 정지, 또는 중지되었죠. 그다음에 뭡니까? 공백. 공백을 뭐로 채웁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채우죠. 아들로 채우는데 그냥 아들만 온 게 아니고 뭘 몰고 와요? 저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는 인식,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본다는 인식을 동반해서 아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은 태어나서 어떻게 살든지 일체 그런 것 상관없이 너희는 이미 저주의 세계다.” 그 말을 이렇게 해요. “나한테 입맞추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 너희들이 단독적으로 하나님을 상대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으나 상관없이 저주받는 거예요.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신을 인정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무조건 저주에요.
모든 인간은 처녀에서 태어나지 않아요. 아빠, 엄마에서 태어나잖아요. 처녀에서 태어나신 분. 그 아들이 오게 되면 비로소 이 세상이 어떤 하나 예외 없이 몽땅 다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밝혀져요. 그 밝히는 내용과 약속과 동반해서 아기가 우리에게 오죠. 그 아기에게 입맞출 수 있을까요? 자진해서?
사건이 오게 되면 기존에 인간이 알던 것은 중지가 되고 정지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공백이라는 빈칸으로, 건너올래야 건너올 수 없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강의를 잘 들었는지 시험할게요. 그럼 아들에게 입맞추면 저주가 풀리고 복 받습니까? 아니면 아들에게 입 안 맞추면 그냥 저주받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아까운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 질문은 중요해서… 어때요? 둘 중에 하난데,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세요?
역시 제 질문에 객관식 자체는 답이 없어요. 뭐가 복을 받고 천국 가느냐?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저주 받는다.’는 그 말씀이 나의 라벨이 될 때, 내 앞에 붙어있는 광고지가 될 때, 이게 바로 복 받은 사람이에요.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누구든지 저주받는다는 것을 달고 사는 사람.
그러니까 말씀이 와서 풀로 붙었잖아요. 풀로 붙인 주의 말씀, 약속이란 광고지를 내 힘으로 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떼죠. 그게 바로 복 받은 사람이에요.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은 나이 백 살까지 애 못 낳았어요. “네 자식 말고. 약속은 네 자식하고 관계없어. 내가 준 자식이 약속을 동반해서 올 거야.” 그걸 위해서 아브라함은 그렇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말씀 지키란 이야기입니까? 아니죠. 구약에서 ‘말씀 지켜라 순종하라’는 말은 “네가 저주받는 자라는 것을 내가 너한테 들추어낼 거야.” 그런 뜻이에요. 지옥 가는 사람은 개별자니까 “하나님, 하나님” 혼자 바빠. “어떻게 무슨 말씀 지키고 어떤 말씀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설친다고요. 주님 보시기에는 같잖죠. 아들을 일부러 보내준 의미와 취지가 다 없어요. “예수님, 잠깐 비켜보세요. 아버지하고 내가 직접 상대할 테니까.” 이런 식이라고요.
좀 더 계속 진도 나가면서 한 문장을 쓰겠습니다. ‘없는데 나타난 존재는 새로운 시공간을 동반해서 나타난다.’ 새로운 시공간이니까, 기존에 아담에게 만들어주고 아담에 의해 만들어진 시공간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아담이 있으니까 시공간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현재 눈에 보이는 시공간. 인간들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시공간.
예수님이 짊어지고 온 시공간은 기존의 시공간을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걸 다 제거하겠죠. 물로써 제거하든지 불로써 제거하든지 결국은 제거하겠죠. 없애버린다 이 말이죠. 그러면 기존에 인간들이 아는 시공간 속에서 뭐를 구성해내느냐? 신학과 사상과 이념과 철학과 과학 이런 걸 했잖아요. 기존에 시공간을 없애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신학과 철학과 과학과 이념과 사상, 자기의 인간성 이런 것 같이 다 휩쓸려 날아가잖아요.
광고지를 뜯어낸다는 게 바로 그런 뜻이에요. 기존의 광고지에 낙서를 하면 낙서된 것은 안 받죠. 주께서 새로 붙인 광고지가 있다면 기존에 아담이라는 자기의 육신,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니고 누구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육신에다가 인간은 온갖 호작질을 다 한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아담의 아내는 하와다.’라는 이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이거 잘못된 거예요. 아담의 아내는 하와가 아니에요. 하와의 남편은 하나님입니다. 그럼 아담은 뭐냐? 엑스트라에요. 땜빵 출연자. 잠시 등장했다 없어지는 단역 배우에요, 배우. 남편은 배우라고요. 역할을 하는 배우. 남편은 불쌍해죽겠어.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데, 저 여자의 남편이 왜 내가 안 되는데? 왜 탈락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 이어지는 게 있습니다. 그게 새 계명이에요.
시간이 어떻게 되나? 하도 여러분들이 집중을 잘해주니까… 아이고,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57분이다. 이건 있을 수 없어.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60717b 에스겔 16장 63절(아기 나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남편으로 탈락입니다. 흙인 주제에 감히 생명의 남편이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자신의 아내를 자신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아담이 혼자 있을 때, 아담이 하나님보고 아내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적 있어요? 없어요.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누구 의견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죠.
아담 있는 자리에 하나님 자신이 교체로 들어가시는 겁니다. 들어가실 때 어떤 걸 노리시고 어떤 걸 구성하기 위해서 아담으로 족하지 않고 옆에 여자를 만들었는가? 하와가 아담의 엄마입니까? 답변해보세요. 엄마에요? 아니죠. 아담의 딸입니까? 어때요? 아니죠. 결국은 창조 때 엄마 필요 없고 딸 필요 없는 거예요. 그럼 뭐만 필요해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의 아내 또는 아담의 신부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다음 아담의 고백이 나와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럼 아담 입장에서 자기 말고 다른 인간이 등장했습니까? 질문하는 거예요, 제가. 아담 자기 말고 다른 인간이 등장했습니까? 엄마나 딸이 있었어요? 없죠. 그래서 아담의 고백이 뭐냐 하면,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기 때문에 우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지칭하는 단독이에요. 하나의 개별자, 유일자. 오직 하나가 되는 거예요. 카운트를 할 필요가 없어요. 2나 3이 될 필요가 없어요. 오직 하나에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내가 너희와 하나가 되고 성령이 하나가 되고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그 원칙, 둘인데 하나가 되는 원리를 여기서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기존의 아담은 아내를 사랑하는 데에 탈락했어요. 아내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따먹었을 때, 아담이 아내를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저 여자가 따먹으라 해서 내가 따먹었다고 했죠. 그 여자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저 여자가 따먹으라 해서 내가 따먹었다고, 그것도 그냥 여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여자가 따먹으라 해서 애가 따먹었습니다. 벌써 아담이 그런 소리했다는 말은, 드디어 하나가 아니고 벌써 둘이 된 거예요, 둘이.
그러면, 사랑이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단독자인 나를 단독자 나로 붙들 수 없게 하는 게 사랑이에요. 이 사랑에 대해서 요한복음 13장 33-35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했어요.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참 이게 어려운 말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나 예수님이 누구에게? 너희에게. 너희는 하나가 아니고 다수, 여럿이죠. 여럿에게 내가 새 계명을 주는데 새 계명이 뭐냐 하면 “서로 사랑하라”죠. 사랑. 둘이 있다는 것은 난 모르겠고, 사랑만 나오면 돼. 둘이 있든 셋이 있든 열두 명이 됐든 천명이 됐든 십사만사천이 됐든 난 모르겠고, 거기서 다만 내가 바라고 뽑아내는 것은 뭐냐? 사랑뿐이에요. 사랑만 끄집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만 자기 사람을 자기가 용납할 수 있어요.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만을 용납하는 그 사랑처럼 그 사랑에 너희들이 들어와야 그게 복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에요.
그럼 새 계명과 한 아기를 주신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게 관련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가서 또는 가나안 땅에 전쟁을 하지 않습니까? 그때 움직임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개인행동으로 주신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 집단을 하나로 생각해서 준 말씀이에요? 집단을 하나로 보죠.
아간 같은 경우에는 한 사람이 잘못해도 집단이 책임지게 되어 있죠. 그래서 레위기 19장 18절에 보면 집단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을 계명으로 설명했어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게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만.
왜냐하면 이스라엘 내부에 개별적 의식을 갖고 있잖아요. 자기들끼리 돈 문제나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원한관계에 있잖아요. ‘쟤는 내 원수야.’ 아니야. 이스라엘 속에는 원수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여호와의 이름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계명이 들어오려면 같이 계신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키고 사건을 일으키면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인간의 생각은 정지가 되어야 되고, 정지가 되면 빈자리가 형성되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이름이 수확물을 가지고 그들에게 농사 잘되고 적에게 이기게 하는 거저 주시는 혜택이 그 빈자리를 채워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순서가 그런 순서에요.
오늘 이야기가 두 노선이 접합하는 과정이에요. 그 과정에 여러분들은 참여된 거예요. ‘①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셨다.’ 이 단서하고, 두 번째 ‘②개인들의 집합체 속에 하나님께서 계명(율법)을 주셨다.’ 구약이죠. 개인들의 집합체, 이스라엘 아닙니까.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께서 율법과 율례를 주셨잖아요.
이 두 노선이 어떻게 만나는가? 아래 기차(②)가 칙칙폭폭 가는데 위쪽에서 비행기(①), 한 아기가 여기 기차 가는 데에 투입되는 거예요. 그런 영화 있죠. 전직 해군 특수부대원이 같이 탄 기차에서 납치된 자기 조카를 구하는 영화, <언더 시즈(Under siege)2: 다크 테리토리(Dark territory)>(1995). 기차 위로 뛰어내려서 안에 있는 적들을 물리치고 자기 조카를 구원하는 그런 영화 있어요.
지금 지상에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밖에 모르는 백성들, 애굽에서 400년 살아서 자기 신상만 챙기는 인간들, 여기에 주의 이름이 함께 있잖아요. 주의 이름이 뭘 일으켜요? 사건을 일으키죠.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그 사건은 인간들의 모든 생각과는 달리 예상 못하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요. 사건이니까. 자기들의 판단과 자기들의 해석이 전혀 먹히지 않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예를 들면 홍해가 갈라질 때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이것은 사전에 인간들이, 모세라도 생각 못한 거예요. 홍해가 앞에 있을 때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1번, 그냥 헤엄쳐 간다. 어떤 사람은 2번, 배 타고 간다, 이런 게 있을 텐데, 중간에 갈라진다, 이건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있을 수 없죠.
그게 인간의 생각, 인간 해석의 중지(中止)에요. 그게 새로움을 줍니다. 중지를 하고 가만있어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 할 것 없어. 그냥 가만있어봐. 주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그것과 지금 한 아기를 연결시켜줘야 돼요. 그게 한 아기의 취지에 나타나니까.
연결하기 전에 밑에 뭐가 있는가? 다수들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에 계명을 주는데, 그 계명의 완성이 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한다고 되어 있죠. 결국 이 계명은 뭡니까? 사랑이죠.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은 뭡니까? 한 아기를 주었을 때 주께서 주시는 이 사랑을 위해서 한 아기가 여기에 직접 침투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지금 이야기 흐름이 이해되시겠지요. 율법을 줘서, 너희는 개인이 아니야. 집단이야. 개인 개인의 의식 있는 자들이 집단 하니까 얼마나 울퉁불퉁 다툼이 많겠어요? 그걸 뭐로 잠재워야 돼요? 율법으로 잠재워야 되잖아요. 율법의 핵심이 뭐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사랑한다.' 이걸로 딱 정리되잖아요. 정리하면 남는 게 뭡니까? 사랑이잖아요, 사랑. 사랑이 남죠.
그런데 이 사랑을 개인들이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할 수 없지요. 없으니까 한 아기가 투입되는 거예요. 할 수 없으니까 한 아기가 투입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사랑에 대해서 분노를 갖고 있으니까 투입되는 거예요. 그냥 ‘없다’가 아니라. 인간에겐 ‘없다’는 없어요. ‘아이고, 실수했네. 좀만 노력하면 되겠네.’ 이거지, ‘아예 못합니다.’ 하는 건 인간에겐 없잖아요.
그러니까 한 아기가 사랑을 주려면 진짜 사랑에 대한 저지선, 또는 반발성을 뚫고 그 반항 아래서, 사랑에 대한 모욕감 아래서 사랑이 사랑으로 거기서 만들어져야 되겠죠. 참 복잡합니다. 그렇죠? 하나님은 사랑 없으면 자기 백성으로 안 받으니까.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한번 정리해봅시다. 사랑은 둘이 있든 셋이 있든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 여럿을 하나로 만드는 그 능력이 바로 사랑의 능력이다 이 말입니다.
그럼 그 사랑의 능력에 대해 아까는 요한복음 13장을 했는데 이번에는 요한복음 15장을 읽어봅시다. 15장 10-13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자, 아까 우리가 배웠던 것 생각해봅시다. 사랑의 원판은 누구와 누구의 관계다? 아버지와 한 아기의 관계죠. 우리의 관계 아닙니다. 아담이 하와를 사랑한 사랑, 아니에요. 이미 둘 다 남남되었는데 사랑 아니죠. 아버지와의 아들 그 관계가 사랑이에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계명이라는 언급을 한 것은, 계명은 여럿을 하나로 만드는 효과가 있죠. 그래서 만약에 지키면 너희는 복을 받고. 지키면 지킨 자만 복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지키면 집단이 복의 집단이 되고, 안 지키면 개인이 저주받는 게 아니고 집단이 저주받아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아간 아닙니까. 아간이 잘못했는데 벌은 전(全)집단이 받았죠. 개별적으로 어떻게 구원 받는가,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다음에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무슨 사랑이 먼저입니까? 주님의 사랑이 먼저고 그다음에 주님의 사랑의 결과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되어 있죠.
아까 했던 질문을 여기서 또 하겠습니다. 약간 걱정이 되지만, 제가 걱정해도 소용없죠. 우리가 서로 사랑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진짜 세 번째 하는 질문인데 이쯤해서 답변 좀 나오면 참 좋겠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런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죠. 그럼 뭡니까? 아시는 분 좀 이야기해주세요. 아시잖아요. 뭡니까?
우리는 주께서 사랑한다는 걸 드러내는 하나의 광고용지로 쓰여지는 거예요. 뭘 지킨다는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잖아요. 뭘 지켜요? 우리는 못 지킵니다! 쓰임 받지요. 사랑이라는 걸 드러내도록 쓰임 받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왜 안 되는가?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우리는 뭐 큰 사랑 말고 대충 작은 사랑할까요? 그걸로 때우고 그걸 사랑으로 대체해서 천국 갈까요? 천국은 그렇게 호락호락 안 받아줍니다. 사랑 없는 걸 왜 받아줍니까? 온전한 사랑? 어느 정도?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죠.
그런데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건 일어났다. 스톱! 중지했다. 비었다. 빈곳에 하나님의 친구 만들기 작업이 개시되는 거예요, 그 빈터에. 말씀으로.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지금 우리가 왜 사랑이 안 되느냐 하면, 친구를 위해서 죽지를 못해요, 우리는. 돈 좀 빌려줄 수는 있지만, 목숨바쳐가면서 죽는 인간은 없는 줄 아시고 한 아기를 주셨잖아요, 한 아기.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잖아요. 수요설교 주제가 뭔 줄 알아요? 우리 어느 누구도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도 아닌데 왜 껄떡거리고 있느냐? 메시아도 아닌 주제에. 성경말씀 뭘 지켜요, 메시아도 아닌 주제에. 좀 비워둬라. 우리는 출발이 뭐다? 저주받은 자다. 여기 노래가사 한번 봅시다. 왜 사랑이 안 되는지에 대해서 이 노래가사를 적어 와봤습니다.
[ If you love me, Let me know ]
Olivia Newton John(1974)
You came when I was happy in your sunshine
당신이 환하게 내게 왔을 때 나는 매우 행복했어요
I grew to love you more each passing day
시간이 지나 당신에 대한 사랑도 커져 갔고
Before too long I built my world around you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And I prayed you’d love enough of me to say
그리고 당신이 내 곁에 머물러 있도록 기도했어요
벌써 초반부터 끝까지 뭡니까? 개별적이죠. 너무나 개별적이죠. 개별적일 때는 내가 마땅히 저주받는다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별자가 저주받는 개별자라는 인식 없이 그냥 개별자에요. ‘잘하면 복 받겠지.’ 이게 개별자에요.
If you love let me know
날 사랑한다면 내가 알게 해줘요
이 노래보세요. 이것 때문에 이 노래를 채택했는데요.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알게 해주세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딱 보면 모르겠나? 지금 이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구나.’하고 나를 설득시키라는 거예요. 이 설득은 100% 실패입니다. 실패에요. 이 여자 주인공이 긴가민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If you don’t let me go
그게 아니라면 날 떠나게 해줘요
날 떠나게 해 달라 하지 말고 지가 떠나면 안 됩니까? 참. 여자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이 정도로 당신한테 몰빵했다 이런 뜻이에요.
I can’t take another mimute
한순간이라도 견딜 수 없어요 (그리워서)
Of a day without you in it
당신이 없는 세상이라면
If you love me let it be
날 사랑한다면 내게 말해줘요
If you don’t then set me free
그게 아니하면 날 자유롭게 해줘요
당신이 날 사랑 안 해? 선택 안 한다면 다른 사람 찾아갈 거야, 이런 식이란 말이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뭡니까? 제발 날 사랑하는 만큼 나를 좀 붙들어줘, 이런 뜻이거든요.
Take the chains away that keep me loving you
그렇지 않다면 사슬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 주세요
The arms that open wide to hold me closer
당신은 두 팔을 활짝 벌려 나를 꼭 끌어안아주고
The hands that run their fingers through my hair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The smile that says hello, it’s good to see you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면서 만나서 기쁘다고 말했지요
Anytime I turn around for find you there
그런 당신을 만나기 위해 늘 찾아갔지요
It’s this and so much more that make me love me
그러니 내가 어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정말 사랑해요)
What else can I do to make you see
당신이 볼 수 있도록 내가 뭘 더 할 수 있나요
You know you have whatever’s mine to give you
당신은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요
But a love affair for one can never be
하지만 혼자만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나 혼자 짝사랑해서는 곤란하잖아요. 같이 사랑합시다. 안 비참하도록. 그 다음 같은 이야기에요.
If you love me let me know
날 사랑한다면 내가 알게 해 줘요
If you don’t then let me go
그게 아니라면 날 떠나게 해줘요
I can’t take another mimute
한순간이라도 견딜 수 없어요
Of a day without you in it
당신이 곁에 없는 세상이라면
If you love me let it be
날 사랑한다면 내게 말해줘요
If you don’t then set me free
그게 아니하면 날 자유롭게 해줘요
Take the chains away that keep me loving you
그렇지 않다면 사슬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 주세요
Ah, Take the chains away that keep me loving you
아, 그렇지 않다면 사슬에게 나를 자유롭게 해 주세요
이 노래를 조금만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노래인지 들어보면 여러분 알 거예요. 가사 한 네 줄만 들어봅시다. 올리비아 뉴튼 존의 상당히 유명한 노래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젊었을 때 가사도 모른 채 신나게 춤추며 들었겠지만, 결국 이것은 ‘내가 너를 사랑했는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없더라.’는 거예요. 하나가 될 수 없다. 계속 점검하고, 점검하고. 심지어 결혼하고 애 낳아도 그것도 영 성에 안 차. 또 점검해야 돼요. 언제까지? 점검하는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이 아닌 것으로 들통 나서 영원히 저주받을 때까지 계속 점검해야 되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거에요. 인간은 이 사랑이라는 개념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없는 걸 알고 계명을 줬어요. 그러면 이것이 계명이고 율법이니까 목숨 바쳐서 친구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저주밖에 없어요. 저주가 있으니까 그들 가운데 차이성은 날아갔어요. 너 잘난 것 없어.
율법 앞에서 어떻게 돼요?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었잖아요. 그 아기 앞에서 어떤 인간도 “복 주세요. 저 저주 없지요?”라고 할 수 있는 위인은 줄 세워놓고 봐도 그중에서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계명을 지켰어, 안 지켰어?”를 묻거든요. “내가 너한테 이야기했어, 안 했어? 내가 새 계명을 줬잖아. 새 계명이 뭐였지?” “네. 서로 사랑하라 했습니다.” “지켰어, 안 지켰어?” “서로 좋아하고…”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되죠.
그게 요한일서 3장 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 말씀을 설명하게 되면, 첫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이 없으면 이 새로운 계명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성립되려면 뭐가 와야 돼요? 저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뭘 주십니까? 성령이 와야 되죠. 성령이 오셔야 되죠. 그러면 우리 안에 남는 것은 뭐냐? 내 구원이 아니고 남는 것은 하나 됨이죠. 그 하나 됨을 구원이라 해요.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게 새 계명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구원이 되고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문제가 지금 해결되었어요? 전혀 해결 안 되었죠, 우리 쪽에서는. 우리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성령 안 줬잖아요.’ 지금 우리도 할 말 있다고 이러고 싶잖아요.
그런데 구약에 에스겔 16장 한번 봅시다. 16장 63절, 이것은 어떤 특정 개인이 하면 안돼요. 다 같이 제창하듯이 이 본문을 봅시다. 16장 63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 미친다 미쳐, 정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라요. 열심히 성경지킨다고 지금 자꾸 나대고 있어요. 그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성경 왜 지키려고 하는데?” “안 지키면 저주받잖아요.” 벌써 이 말 자체가 주님을 화나게 만들어요. 지키면 저주에서 면제되는 그런 나로 출발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누가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그러니까 너는 지금 저주도 아니고 축복도 아니고 중간인데, 말씀을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킬 경우에만 저주 받는다고 누가 너한테 그런 이야기해?” 마귀죠. 마귀가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를 만들게 한 거예요, 성경책보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체 묻지 않으시고 풍덩,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 그 사랑을 가지고 인간 속으로 뛰어들어 인간에게 맡겼어요. 하나님 아버지께 의지하는 그 덩어리 채로 예수님은 누구한테 처분을 의지했습니까? 누구한테 처분을 맡겼어요? 인간에게 처분을 맡긴 거예요. 인간에게 처분을 맡기니까 뭐 서로 사랑한다, 우리는 유대인이다, 계명 지킨다, 신사적이다 하는 것들이 예수님께는 아주 가혹해요. 예수님에 대한 처분은 아주 가혹합니다.
방금 16장 63절을 한번 적어볼게요.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죠. 후(後)에. 이게 ‘미래에서 온 편지’가 돼요. 세상에, 인간의 시간 개념과 다르죠. 미래에서 온 편지죠. 네가 행한 일을 용서한 후죠.
그럼 인간에게는 미래 편지가 아니고 과거 편지죠. 인간의 국가는 법을 만듭니다. 인간의 국가가 법을 만드는 이유가 뭐를 안 하기 위해서입니까? 용서를 안 하기 위해서. 보복하기 위해서. 용서 없어요. 인간의 나라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잘한 자에게는 상주고 못한 자에게는 벌 내리지, 용서라는 게 없어요. 용서가 왜 인간에게 있어요? 용서가 왜 있죠? 없어요.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예수님이 갖고 있던, 자기 죄는 아니지만 대속한 죄에 대해서 아버지는 처신하시고 그걸 다시 사흘 만에 부활시켰잖아요. 그렇죠? 그 관계가 사랑 관계거든요, 사랑 관계.
사랑이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도달하게 되면, 사랑 안에는 법이 없어요. ‘너 왜 그렇게 했어? 왜 이런 짓 했어?’ 이게 사랑 안에는 없다고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는 그게 없어요. 예수님은 아버지 뜻만 다 이루었어요.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의 뜻을 다 백점 맞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백점 맞은 사람.
국가는 자꾸 뭘 만들어요? 자꾸 법을 만들고 인간은 그 법을 의식해요. 왜? 죽지 않기 위해서. 사형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아까 처음 강의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천국을 위해 사는 사람은 뭐가 없어요? 죽는 게 없는데?
‘네가 내 자식을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용서하나 봐라. 내가 복수할거야.’ 이렇게 하잖아요. 벌써 피해자라고 여기는 쪽도 죽음을 의식하고, 피해 입힌 쪽도 죽음을 의식하고. 악마는 그 죽음을 인간 속에다가 조장해서 집어넣고 조정하고.
거기에 대해서 기쁜 소식은 뭐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것이 사도행전에서 말한 기쁜 소식이고. 이 모든 일어난 변화는 사랑이에요, 사랑. 새 계명을 주는 거예요. 사랑이에요.
사랑에 대해서 에스겔 16장 다시 보겠습니다. 여기서 좀 할 말이 있어요.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그다음 뭡니까?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걸 한 마디로 표현하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헉’ 이거거든요. 이게 지금 슬퍼서 이런 겁니까? 기쁘고 감사하고 황공스러워서 이러는 거예요? 기쁘고 놀라고 황공스럽죠.
그래서 제가 부산강의에서 기뻐하는 사람과만 만나라 했죠. 기쁨의 반대가 뭐라 했습니까? 야심. 야심가, 야심 있는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 했죠. 연애할 때는 다 기뻐요. 그때는 자기네들끼리 야심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여자가 반지를 떨어뜨렸다. “어디 어디? 밤중에 어두운데 어디?” “저기.” “걱정 마. 나 남자 아이가?” 설치고 줍다가 계단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여자는 자기 빈 손가락 볼 때마다 뭘 생각하겠어요? 기억하고 놀라고 자기 야심을 부끄러워하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속에 있는 자기 양심, 죄책감이에요. 이게 아직 여전히 남아 있잖아요. 악마가 인간의 죄책감을 얼마나 끈질기게 쥐고 있는지.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고 자살한 이유가 죄책감 때문이에요. 죄책감은 악마가 인간 속에 집어넣어준 거예요.
남 배려하고 운전할 때 조심히 운전해서 먼저 양보 운전하고. 양보 운전하다가 뒤에 차가 열두 대나 밀리고 이런 거. 뒤차는 짜증나가지고 죽여 버릴까, 저거. 자기 의 챙기는 데에 급급해가지고, 이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 서로 엮여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안에 자기 훌륭하고 착하고 존경받으면 그게 다입니까? 그게 이웃사랑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왜 줬느냐? 이거 하라고 준 거예요.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까 첫째 강의가 많이 길었기 때문에 짧게 줄여서 하겠습니다. 주기도문 있잖아요. 주기도문은 원래 주님이 기도한 거예요, 주님이. 주님이 기도하시는데, 주님의 기도 안에는 주님이 해야 될 일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 중에 뭐가 있느냐? 여기 나와요, 68페이지. [37.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란]. 주기도문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되어 있죠.
이 대목에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누가복음 10장에 강도 만난 사람이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누구를 나무랍니까? 강도를 나무라는 게 순서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강도 그거 나쁘네. 왜 그걸 뺏어가지?” 이렇게 강도부터 나무랄 일이지, 강도 만난 사람을 안 도와준다고 나무라면 순서가 지금 바뀐 거죠.
시험에 들지 말라 하면 누구를 언급해야 돼요? 악마를 언급해야 되는데, 우리보고 시험 들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악마에 대해서 언급 없이 너는 시험 안 들면 된다는 거예요. 시험 들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건 모든 인간이 이미, 시험에 들까 말까 들까 말까 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 이미 시험 팍 들었어요.
아까 했죠. 개인이 카운트, 가산(可算)하는 것. 저 사람은 나를 도와줄 사람인지, 해코지할 사람인지 카운트해서 자기 세계, 내 것 세계를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인생의 전부잖아요. 그걸 두껍게 가지니까 자기 인생이 뭐 된 것처럼 여기는데 사실 인생은 그냥 얇은 비닐막 같이 그렇다고 했죠.
69페이지에 답변이 나옵니다. 인간은 살 권리조차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시험 들 권리조차 없는 거예요. 왜? 이미 시험 들었기 때문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그 말씀을 우리가 지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켜서 그걸 우리한테 하나의 라벨처럼 붙이고, 주께서는 자신이 붙인 말씀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금도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 예수님 당사자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기도문을 자신의 기도문으로 여기고 주신 거예요. 문장이 많이 길었죠?
71페이지에 보면 위에서 세 번째 줄에,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선배를 광야에서 죽여서라도) 자신의 언약을 포기하시지 않는다…] 이게 바로 주님의 힘으로 늘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용서했던 언약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놀라고 부끄럽게 만들고 입을 가리게 만드는데, 그걸 반복하려면 우리에게 뭘 해야 돼요? 용서받기 전에 우리의 속성, 육신의 속성이 어떠한 속성인지 날마다 들추어짐을 당해야 되겠죠.
얼마나 친절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 주셔서 이 말씀 보면서 또 우리는 엉뚱한 생각했네. 또 다른 해석했네. 또 이거 지키면 구원해주십니까? 이거 지키면 벌 안 내리실 거죠? 이상한 생각을 했던 그것이 옴팍 시험 든 모습인 거예요.
끝으로 이제 한마디하고 마치겠습니다. 악마는 선악과를 먹게 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네가 어떤 경우라도 살아남아야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자가 지옥을 위해 사는 사람들인데요. ‘지옥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아직 죽지도 않고 오지도 않은 죽음을 자꾸만 꾸며내며 스스로 공포를 조장한다.’
지옥 가는 사람은 지옥 가기 전에 벌써 지옥 연습을 하고 있어요. ‘아, 이러면 나 죽는데.’, ‘아이고, 심장 내려앉겠네.’, ‘깜짝 놀랐다. 이러면 간 떨어져 죽겠네.’ 죽음이 안 왔거든요. 죽음이 안 와서 죽음을 모르는데, 오지도 않은 죽음을 계속 자기가 조장을 해서 자기 스스로 자기 힘으로 착실히 대비하려는 그 삶이 얼마나 긴장된 삶입니까. 그 긴장을 뭐로 풀어요? 타인에 대한 욕설과 복수로 그 긴장을 풀잖아요.
‘어떤 경우라도 이번에 스페인이 이겨야 돼. 아르헨티나 그거 너무 띄워주면 안 돼.’ 이런 거. 그런데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우승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스페인이 욕을 바가지로 하죠. 왜 그러느냐? 본색이 뭐냐? ‘너희들이 뭔데 나로 하여금 죽기 전에 사는 기쁨을 깨냐? 죽기 전에 사는 기쁨을 얻고자 하는데 네가 뭔데 내 인생 하루의 기쁨을 조져놨느냐? 죽어라, 스페인아.’ 또는 이기면, ‘잘했다, 스페인.’ 아, 저는 스페인 편 아니에요. 전혀 관계없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의 매 일과가 이래요. 가상으로 시합 붙여놓고, 내 편 네 편 해놓고 이기면 잘했다, 못하면 죽으라고 하는 것. 이게 뭐냐? 자기 죽음을 전제로 하도록 하는 마귀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합니다. 죽음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믿어야 되는데 우리는 내 경험과 말씀을 엮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한 시도가 마귀의 해석, 지옥 갈 자의 해석인 것을 새삼 기억하고 이미 이런 죄까지 용서해주신 용서에 다시 한번 입을 막고 감격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