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60327a 창세기 1장 28절(우연의 폭력)-이 근호 목사
오늘은『신구약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28페이지 [11. 창세기 1장 28절에 대해서]부터 하겠습니다. [질문> 바쁘신데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거 다 헛말이죠. 죄송하면 질문 안하면 되는데… 예의상 하는 거죠. [창세기 1장 28절과 창세기 9장 1절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이 대목에서 아까 질문한 것과 이어서 해볼게요. 사람 안에는 그냥 괜히 즐겁고 괜히 신나고 괜히 쾌감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어요. 제가 ‘괜히’라는 말을 하는 것은 나중에 내가 의도한 게 아니고, 처음부터 자기 즐거움, 자기 쾌락 또는 자기 쾌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붙잡을 수가 없어요.
끝도 없는 쾌락. 이것이 바로 ‘에덴’이에요, 에덴. 에덴의 삶을 인간은 그리워하지만 그때 그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에요. 이 쾌락과 쾌감이 먼저기 때문에… 여기 뒤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잖아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 말이 나왔죠. 말이 먹히지 않는 거예요, 쾌락, 즐거움에 푹 젖어들었기 때문에.
악마는 이 쾌락에다가 누락된 것 하나 더 추가시키라고 독촉하죠. 모든 걸 이렇게 마음껏 즐기지만 아직 하나 남았다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 그거 하나 남았잖아. 그런데 그 과실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다(창 3:6). ‘탐스럽다, 먹음직하다, 보암직하다’ 이것은 전부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관련되어 있어요. ‘에덴동산의 삶은 욕망이 그냥 폭발하는 공간이다’. 욕망이 그냥 폭발하는 공간이에요. 여긴 말이 필요 없죠.
어린애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한 몸으로 분리되잖아요. 분리되는데, 분리되면서 어린애 안에 포함된 게 뭐냐는 거예요. 어린애가 머리는 크고 몸 있고 팔다리는 있으나마나 있는데, 이 몸 안에 뭐가 있느냐? 이 안에 쾌락이 들어있어요.
쾌락을 다른 말로 하면 ‘대만족’. 어느 정도로 대만족이냐 하면 설명할 수 없을 지경으로 대만족. 설명을 한다는 것은 이미 온전한 만족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설명할 수 없는 만족이면 입을 다물죠. 입을 다물어요.
대만족이 들어있습니다. 방금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본인이 할 게 있어요, 없어요? 본인이 할 게 없어요. 그냥 다 주어지니까요. 일종의 ‘은혜’ 상태죠. 몽땅 다 제공된 것. 모든 환경 자체가 선물(환경=선물). 거저 주시는 선물, 은사가 되죠, 어린아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따라서 이 아이가 나오면서 어머니 몸의 확장이 되겠죠. 어머니 몸속에 있었으니까.
그러면 여기서는 고통이 없는 것이 정상이에요. 순풍 순풍, 아이를 낳을 때도 고통 없이 낳고, 태어난 아이도 고통 없어야 돼요. 왜냐하면 환경 자체가 에덴이니까. 에덴은 뭐라 했습니까? 낙원. 우리말로 하면 ‘희락’이죠. 희락은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의 열매에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희락,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대의 기쁨과 즐거움, 이런 거예요.
인간이 악마의 말을 들었어요. 악마의 말을 왜 들었느냐? 악마가 들을 만한, 꼬실 수 있는 내용을 인간에게 넌지시 넘겨줬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금지한 거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이거에요. ‘금지한 것은 금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너는 무한의 희락이 있다.’ 이건데, 악마는 ‘금지한 것까지 마저 네 것 되면 지금보다 더 나은 희락이 있다’는 거예요.
지금보다 더 나은 희락이 있다는 말은, 지금 희락은 온전치 않고 그만큼 결핍된 희락이라는 식으로 악마가 인간을 유혹한 겁니다. 금지마저 인간 손에 들어가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희락인데, 하나님은 제공하고 인간은 제공받는 쪽이라는 이 구분 자체가 없어지고 이제는 내가 제공하는 하나님의 희락, 기쁨의 경지에 이른다.’라는 식으로 악마는 유혹을 했습니다.
악마가 왜 그런 소리하느냐 하면, 자기는 그걸 누렸잖아요. 자기는 하늘나라에서 천사로, 그것도 하나님 옆에 있는 천사로서 최고로 누릴 걸 누렸기 때문에 자기는 알죠. 그런데 반란을 일으켜서 악마가 날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락해요. 사바사바~ 천사의 추락.
그래서 ‘타락’이라는 말을 인간에게 쓰는 것은 적절치 않아요. 타락이라는 말은 악마한테 써야 돼요. 왜? 최고 자리에서 추락했으니까. 인간은 최고 자리에 있어본 적도 없으니까 추락할 것도 없어요. 그냥 변경된 거죠.
악마가 이 사실을 알고 인간을 유혹하면서 하나님의 악마에 대한 저주의 연장선으로써 인간에게 저주를 줬는데, 그 저주가 바로 ‘고통’입니다. 영원한 고통의 대상자가 악마잖아요. 이미 그것은 확정됐어요. 확정됐기 때문에 그 악마와 관련된 자에게 ‘이 고통을 통해서 너는 악마의 입장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으로 연결을 시켜줄 수 있는 고통이 주어집니다. 이 고통은 ‘저주’가 되죠. 네가 누구와 결탁했느냐? 네가 결탁한 자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저주와 관련된 존재가 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고통과 저주를 주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악마는 최고의 기쁨을 알잖아요. 하늘에 속한 자니까. 그 희락이 추락됐죠. 희락 대신 영원한 저주와 고통을 부여받잖아요. 하나님의 저주가 여자에게, 그다음에 남자에게 주어졌을 때 뭐가 주어지는가? 고통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주어지는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그냥 고통이 주어져버리면 이것은 마귀를 다루는 것과 똑같이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마귀와 결탁되었음을 알려주는 그러한 낌새로서 고통과 저주를 줘버리면, 이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고 우리와 결탁된 그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간은 낌새로 알아채야 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인간하고 싸우는 게 아니고 누구하고 싸워요? 뱀의 후손하고 싸워요. 뱀의 후손은 누구하고 싸워요? 인간하고 안 싸워요. 여자의 후손과 싸운다고요, 여자의 후손과.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거기서 빠져버려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된단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상당히 난해하지만 꼭 알아야 될 일이, 결국 세상 전체가 에덴동산이 사달 난 그 사건이 파급되고 확장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세계입니다. 그 사건, 선악과 따먹은 사건이 ‘파급’되었다는 말은 뭐냐? 연못에 돌멩이 던지면… 지난 수요일에는 호수라 했는데, 호수에 돌멩이 던지면 퐁당!하고 돌멩이가 들어가서 멈춥니까? 멈춰있어요? 아니죠. (물결을 일으키면서) 파급되죠.
파급된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액체 같은 파동적인 입자’라는 거예요. 사회적으로 흔히 쓰는 단어로 하면 ‘인간은 영향(력)을 받는 존재’ 이렇게 표현됩니다. 영향력이니까 이것은 힘이죠. 인간은 외부의 힘을 감지해서 그 외부의 힘에 자신의 자아까지, 자신의 인격까지, 정신세계까지 영향을 입는 거예요.
내가 지우개를 던져서 지우개가 오 목사님 신체에 닿았다면, 이게 많이 아프겠습니까? 별로 안 아프죠. 던져서 맞아도 별로 안 아프잖아요. 그런데 뭐가 아프냐 하면 ‘던질까?’ 이게 더 아픈 거예요. 이게 더 아파요. 왜냐하면 입자, 우리의 물질 껍데기는 파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영향력이, 하나님에 의해서 악마에게 주어진 저주의 연장선으로서 우리 모든 인간에게 그 저주가 파급을 일으켜서 그 영향력 속에 우리가 놓여 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환경’이죠, 환경. 영향력 속.
그러면 아기 이야기해봅시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자기 희락이 진짜 만땅이죠. 포근한 공간이거든요. 외부의 어떤 것도 다 막아주니까. 그 안에서 영양도 공급되죠, 거기서 농사짓는 것도 아니겠고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나왔을 때, 엄마가 취했던 에덴동산과 똑같은 데서 만약에 순풍 순풍 순산이 되어버리면 역시 아기도 아빠나 엄마만큼 희락의 동산에 살 거예요.
그런데 아담이 결혼해서 아이 낳기 전에 그만 사달이 났으니까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저주가 어디를 딱 지목하겠습니까? 너는 죄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의 운명이 아니라, 에덴동산에 살 때 그때 운명이나 상황이 아니고, 그때 환경이 아니고, 그때 영향력이 아니라, 아빠 엄마가 죄짓고 난 뒤에 네가 태어나버린 거예요. 죄짓고 난 뒤에.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1.에덴동산에 있을 때 아기, 자손이 없다.
맞죠? 쫓겨나고 난 뒤에 생겼으니까 에덴동산에서는 아기가 없죠.
2.창세기 4장에서 아들은 없다.
왜? 가인 있고 아벨 있는데,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동생은 죽고 없는 거예요. 자식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등장으로 싸워서 악마로부터 주어지고 있는 그 저주를 어떻게 차단시킬 것인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겨야 이게 차단되거든요.
물어봅시다. 1.죄 사함을 요청하면 죄 사함 받습니까? 벌써 묻는 본새가 이게 아닌 걸 알겠죠? 그러면 두 번째 질문하겠습니다. 2.자기 십자가를 지고가면 영생을 얻습니까? 구원을 얻습니까? 두 번째 본새도 영 아니라는 걸 알겠죠? 성경 그대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나오잖아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했잖아요.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안 지게 될 열두 제자보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럼 뭐냐? 3.주님의 십자가에 내가 진 십자가가 짓눌려야 영생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십자가 무게가 68kg 나간다는 것은 멜깁슨이 만든 영화 <그리스도의 고난(The Passion of Christ)>(2004)에서 실제로 주인공이 졌던 십자가를 멜깁슨이 일부러 생나무로 만들었는데 68kg 나간다는 거예요. 주연 배우는 죽어났어요. 실제로 엎어지고 자빠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내 십자가가 주님의 십자가에 짓눌려야 돼요. 그럼 1번 답 나왔죠. ‘죄 사함을 요청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 답변은, 주님의 이미 죄 사함에 죄 사함을 열망하는 내가 사정없이 군화발로 짓밟힐 때 죄 사함이 부각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아담의 자손이잖아요.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 마귀와 결탁한 인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서 다른 아담, 마지막 아담을 준비해서 그 마지막 아담부터 거꾸로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한쪽은 ‘갈 때까지 가보자’고, 주님은 ‘갈 때까지 가볼 것 없어. 벌써 다 알아!’하고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들어와요. 양쪽에서 터널 파고 들어오듯이 반대편에서 파고 들어와서 ‘내가 죄 사했단 말이야!’하고 들어오고 있고, 다른 반대편에서는 ‘내 죄를 사해주세요.’하고 들어오고 있고. 그래서 둘이 만날 때 죄 사함이 성취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아를 얼마나 개무시 하시는지 아시겠지요? 우리의 자아와 우리의 행위, 행동, 생각. 뭐 우리가 이렇게 좀 하게 되면 사자성어로 ‘놀고 있네.’ 그거 뭐 어쩌라고? 뭐? 의미 있어? 없어! 마귀하고 결탁된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마귀하고 결탁되었는데.
‘이 마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고 이제 마귀와 관계를 끊어서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요청하잖아요. 아까 죄 사함을 요청하잖아요. 요청한다고 해서 그 요청을 받아주는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요청하는 그 요청의 이야기도, 우리는 몰라서 그러는데 배후의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써먹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아벨 죽인 가인이 하나님을 무시했습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렸습니까? 제사 드린다는 말은 오늘날 무신론자를 뛰어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인정하고 더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 거예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단 말이죠. 야고보서 2장에 나오잖아요. 귀신들도 누구를 안다고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죠(19절). 그런데 귀신들, 마귀들은 왜 구원받지 못합니까?
이게 바로 무신론자의 최고 딜레마에요.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을 안 존재가 누굽니까? 마귀잖아요. 마귀, 지옥 갔는데요? 결국 하나님이 누구고 기독교가 뭐고 예수님이 누구냐 연구한다는 것은 백날 연구해봤자 그건 뭡니까? 지옥으로 확정된 그 운명은 바뀌어지지 않죠.
그냥 해보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느냐? 이미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저주가 관여했죠. 그러면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환경 자체가 에덴동산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저주가 바탕인 이 세상, 근본 된 토지에 이미 태어났어요. 태어났으니까 희락이어야 하는 존재가 희락에 결핍이 발생된 거예요.
슬픔이 찾아온 거예요, 슬픔이. 슬픔뿐만 아니죠. 공포와 두려움과 염려와 결핍, 상실, 상실감 다 찾아온 거예요. 다 찾아오니까 그다음부터는 뭘 합니까? 엄마하고 헤어질 때 ‘나는 어떻게 살았다’ 그게 논리적으로 언어적으로 정립되는 게 아니에요. 몸은 그냥 껍데기고 그 안에 희락의 파동이 가득 차 있으니까 그걸 잊을 수가 없어요.
잊을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하느냐? 뭐 말로 설명 안 되지만 자꾸만 최고의 즐거움과 최고의 희락과 최고의 기쁨을 희구(希求)-희구라는 말 알죠? desire, 바라고 구하는 것, 갈망하는 것- 끊임없이 갈망해요. 결혼하고 애 안 낳고 개 두 마리 키우는 것, 이거 뭡니까? 구구절절 무슨 변명을 해도 그건 뭐냐 하면 최고의 희락과 기쁨을 나는 쟁취해야만 내 성이 풀린다는 그 행동 모습인 거예요.
1950년, 60년대, 70년대 장로님 살았던 시절에 그때 장로님이 커나가시면서 같은 또래의 국민학교, 중학교 걔들이 가정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인간의 자아가 무엇이냐?’ 뭐 ‘휴대폰 사 주세요.’ 그런 거 있었어요? 없죠. 뭐만 줘도 만족했어요? 남의 집은 두 끼 먹을 때 우리는 세 끼 먹는 것만 해도 복 받은 줄 알아라, 이것들아. 그게 얼마나 호사스러운 생활인지.
어디 학교 갔다 와서 뜨신 물에 목욕을 해요? 수돗물 나오는 것만 해도…. 다른 집엔 수돗물 없어요. 마중물 부어서 펌프질해야 물 나왔어요. 수도꼭지 틀면 어디 물이 나와요? 이렇게 신기한 게 어디 있어요? 얼마나 신기해요, 상하수도 설치가. 그때 애들의 희락은 뭐였습니까? 부모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부모 곁을 떠나면.
요즘은 네 살 때부터 부모 곁을 떠나요. 휴대폰 사 주세요. 다섯 살 때부터 ‘다른 친구들 다 휴대폰 있는데 휴대폰 사 주세요.’ 제가 알아보니까 어린이 휴대폰이 22만원에서 30만원 사이에요. 휴대폰 사는 순간 아빠, 엄마하고는 빠이빠이에요. 이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대화고 뭐고 없어요.
아빠, 엄마 무서워할 줄 알고 ‘아빠가 술 먹고 들어오든 뭘 하든 간에 아빠는 우리 아빠다.’ 생각했던, 지금 애들 보기에는 순진했던 애들이 지금의 60대에요. 그 당시에 아버지가 술 먹고 엄마 패고 때리고 난리쳐도 60대의 딸 마음에는 ‘아버지 어려울 때 다른 자식들이 버리더라도 맏이인 제가 돌보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다고요.
왜? 아버지와 함께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정신적으로. 아버지가 아무리 엉망이고 개판이고 바람피우고 노름하고 도박하고 뭘 해도 정신적으로 아버지와 결속되어 있어요. 말씀 이야기 안하고 자꾸 다른 이야기하는데… 하여튼 계속 갑시다.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60대 된 사람들은 집안 길흉사에 다 찾아가요. 집안 없으면 안 되고 가족 없으면 안 되고. 사람이 사람 도리 하는 게 뭡니까? 형님 돌아가실 때 찾아가야 되고요.
이거는 이유를 물으면 안돼요. 그게 나의 희락이기 때문에. 나를 안정되게 만들어주는 기쁨의 잔여물들이기 때문에. 사람 사는 의미가 뭔데요? 일가친척 챙기면서 서로 안부 묻고 ‘애가 이번에 또 의사됐다면서?’ 이런 거 주고받으면서 소속감을 느끼잖아요. 소속감이에요, 소속감.
소속감 속에 ‘희락의 흔적’이 있습니다. 좀 엉뚱하지만, 흔적 또는 자취. 약간 엉뚱한 표현으로 ‘홍조’, 얼굴이 발그래하니.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일가친척 모일 때 얼굴이 발그래해지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겁니다. 소속감. 이건 뭡니까? 엄마와 같이 공유했던 희락이,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남아있는 친척들 가운데 자기의 과거와 기억이 살아있는 한 그것이 자기에게 영향력을 계속 제공해주는 그러한 희락의 잔존물, 잔여물이죠. 남아있는 거죠.
이 소속감 안에서 ‘나는 인간 같은 인간이다’ 자기 의미 정립이 성립돼요. 그런데 성경은 인간을 뭐로 보느냐? ‘나는 인간 같은 인간이다’ 이건 인간들이 만든 거잖아요. 가인의 후예들이 만든 거예요.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서, 그 희락 자투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긁어모을 대로 다 긁어모아요. 다 긁어모으는데 주님은 이걸 ‘동물’로 봐요. 왜냐하면 뱀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인간이 뱀과 동질의 수준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좀 더 어려운 이야기해볼게요. 여기까지는 쉬운데. 창세기 1장 28절은 좀 기다리세요. 이거 설명되어야 되지, 안 그러면 엉뚱한 소리하고 있다고요. 문화사명이 어떻고 저떻고 다스리라 하니까 이상한 소리해요. 뭐 칼빈의 체계라든지, 총신가면 처음부터 이거 많이 배워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고 전 세계를 기독교화시키는 것이다. 이때 창세기 1장 28절을 근거로 대는 거예요. 다스리고 정복하라. 특히 요새 정복 잘하고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이란 정복 잘하고 있잖아요.
동물 수준에서 인간이 되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이제 없어요. 창세기 1장 28절 나오기 전에 창세기 1장 한번 봅시다.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죠. 그렇잖아요. 그럼 남자와 여자 안에는 뭐가 있어야 돼요? 남자와 여자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이 이야기할 때는 아담과 하와가 뱀, 동물 말을 듣기 전에 이야기입니다. 마귀의 말을 듣기 전의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규정이죠. 인간 규정. ‘이것이 인간이다.’ definition. 이것이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인간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 타락한, 범죄한 인간이 ‘나는 이 정도면 인간 되겠죠?’ 하면 안돼요. 따라서 인간은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뿐 아니고 성경 전체에 대해서 해석할 권한이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은 해석할 권한이 없어요.
이 점을 좀 더 알기 위해서 제가 영화를 하나 소개해드릴게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Hope Gap)> 2022년도에 나온 영화인데요(영국). 오랫동안 나이 들도록 살았던 부부가 부부싸움하고 난 뒤에 남편이 화나서 집 나갔어요. 아주 기가 센 여자가 뒤늦게 후회하고 그걸 아들이 나서서 중재하는 그런 내용의 영화에요.
그런데 그 대사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칠십 가까이 된 나이 많은 아내는 시를 편집하는 일을 하는데요. 남편이 차를 끓여주면서 물어요. “왜 당신은 늘 차를 반만 마실까?” 차를 다 마시고 난 뒤에 달라 하면 되는데, 꼭 반만 마시고 난 뒤에 “여보, 더 채워줘.” 이렇게 한다고요. 그러니까 남편이 물어요. 당신은 왜 컵에 반만 마시고 채우느냐고 질문을 했어요. 그때 여자가 한 대사가 “아마 난 뭔가가 끝나는 것이 싫은가봐.” 내가 끝나는 게 싫은가보네.
이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한 거예요. 인간은 인간인데 알 수 없는 희락의 때는 영 못 미쳐서 반 정도는 남겨두고 열심히 살아왔잖아요, 열심히. 열심히 철저하고 반듯하게 살아왔으니까 지금 자기 자신을 부정해요, 안 해요? 절대로 부정 안 해요. 왜?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빈틈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작 내가 원하는 완벽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은 아닌 거예요. 이게 희망이라는 거예요, 희망. 반을 늘 남겨두는 거예요, 반을. 그 반은 누가 채워야 되는가? 당신이 채우라는 거예요, 남편이. 여자는 결혼한 초반부터 지금까지 가정이든 자식이든 남편이든 모든 것은 자기 중심으로 내게 결핍된 행복을 마저 채워줄 수 있는 공간으로써 ‘설계’를 한 거예요.
이 설계로 29년 동안 남편에게 가스 라이팅 해왔어요. 말이나 모든 것에 기가 세니까 꼼짝 못하게 하면서 ‘내가 하는 말이 맞지? 그치? 틀린 거 없지? 그치? 그러니까 당신이 따라줘야 돼. 그치? 내가 틀렸으면 당신이 거절하지만 내가 하는 말이 맞잖아. 맞으니까 무조건 따라줘야 돼.’ 이 여자는 내 말이 맞았으니까 그 다음 뭡니까? 다른 부속 가족들은 무조건 내 말에 따라줘야 된다는 거예요.
따라줘야 된다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왜 몰랐느냐 하면요, 주변의 환경은 미진한 내 마지막 기쁨, 희락을 채우기 위해서 존재해야 되지, 네 개인적인 희락과 기쁨은 내 알 바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하는 말에 틀린 말 있느냐? 그러니까 토 달지 말란 말이야.’ 이 말이거든요. ‘내가 하는 말이 틀려? 맞잖아. 내가 완벽할 테니까 완벽한 나를 아내로 둔 남편 너는 나 같은 아내와 사는 것을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29년 살았어요. 영광인 줄 알아라.
그러면서도 자기는 여전히 미진해요, 모든 게. 완벽에 완벽을 기했는데 여전히 곳곳에 틈이 있고 그 틈은 차의 반잔을 남겨둠으로써 그것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여기서 이제 준비된 남편의 한 마디가 있죠. 보따리 싸서 집 나가버려요. 그러니까 여자가 “당신이 나 떠나서 어디 가겠다고? 가봤자 당신 돌아올 거야. 그동안 나한테 길들여진 존재기 때문에 나 없이는 못살게 되어 있어. 그게 당신이야.” 그러니까 남편 하는 말이 “오래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고 변호사 불러서 사인하고 이혼하자고 하죠. 사인하게 했어요. 여자 입장에서는 “당신의 그런 행동은 내가 시킨 게 아니잖아.” 당신의 그런 결정은 나한테 물어봐야지, 왜 나한테 안 물어보냐 이 말이죠. 결국 별거에 들어갔는데 별거에 들어가면서 아들이 ‘아빠도 사랑하고 다 사랑하니까 그냥 다시 합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여자가 계속 고집을 부려요.
그 영화의 대사 가운데 내게 끝까지 남는 게 있어요. 남는 게 그 다음 대사입니다. “별거해서 떨어져 살아도 우리가 죽는 것보다 낫지 아니하냐.” ‘죽는 것보다 낫지 않냐’ 이거에요. 그러니까 여자에게는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죽으면 안 된다’는 게 있어요. 죽으면 파탄이니까.
히브리서 2장 14-15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음이 죽음이 아니에요. 악마에게 주어졌던 저주와 호스로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악마는 알아요. 악마는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게 영원한 저주라는 것을, 악마도 알고 우리 주님도 알아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게 없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죽음은 뭐냐? 피조물로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이 떠나는 거예요.
그걸 생각해서 창세기 1장 28절을 봐야 됩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은 인간이 정복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복하기 때문에 진짜 형상의 본질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그동안 어떤 식으로 다 이루었으며 어떤 식으로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가, 그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스스로 얻고자 하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그러한 희락 말고 이미 준비된 희락이 따로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형상 안에서 따로 있었던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나? 주님한테 짓밟히면 되죠. 그러면 주님께 짓밟히는 방법은 뭐냐? 바로 동물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저주가 마귀로부터 왔으니까. 뱀과 결탁된 그 자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동물에서 그 다음에 뭐가 오느냐? 공식인데요. 동물에서 율법에서 사람 돼요. ‘동물→ 율법→ 사람’.
공식 되게 쉽죠? 어디서부터 시작한다고요? 짐승, 동물부터 하는 거예요. 짐승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여론은 단일화를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그게 짐승, 곧 국가입니다. 국가가 인간의 모든 단일화를 추구해요. 전에도 이야기했죠. ‘국가는 무조건 옳다’고.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하죠. “하나님이여, 우리의 나쁜 생각이 뭡니까?”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하잖아요. 하나님 답변은 “잘한 생각 자체를 너는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의 방향, 단일화는 뭡니까? 국가를 추구하기 때문에. 짐승, 뱀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잘한 일이 없어요. 잘한 일이 없으면 우리가 살고자 하는 권리가 있어요, 없어요? 잘하지도 못한 주제에 ‘살려 주세요’ 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무슨 말인가 하면, 질문할 테니까 차이점을 답변해보세요. ‘장이 좋지 않다’와 ‘죽는 것’의 차이점? 인간 속에 유익한 세균도 15% 있고, 나쁜 세균도 15%, 중간쯤 되는 세균이 70% 있는데 이 중간쯤이 어중간하게 줏대가 없어서 나쁜 균이 오면 나쁜 균 쪽에 붙고 좋은 균이 오면 좋은 균 쪽에 붙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과가 뭐냐? 장이 좋지 않다는 거예요. 아침에 교수가 나와서 이런 강의할 때, 이게 죽는 거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지금 그 교수는 인간이 장이 좋을 자격과 권한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이 장이 좋을 자격과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인간은 ‘난 장이 좋아야 돼. 장이 안 좋으니까 장을 좋게 해주세요.’ 암 걸렸으니 낫게 해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있어요, 없어요? 권리 자체가 없어요.
죽음보다 더 좋은 게 없기 때문에! 성도는 죽음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이건 사도 바울의 고백이기도 하지만요.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어. “나 지금 진짜 좋은 거 있어.” “뭐?” “내가 죽게 되었다는 거.” 그런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나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걸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죠. 예수님의 평소 말을 그 당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죠.
왜 못 알아듣느냐 하면 세상 자체가 다른 세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이 순간 다른 세계에 있기를 원합니다. 다른 세계. 다른 세계에 있다고 치고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장이 좋지 않다’와 ‘죽는다’의 차이점은?
죽는 것은 진짜 좋은 것이고, 장이 좋지 않은 것은 아직 덜 좋은 거고. 반대로 생각해야 되죠. ‘살려 주세요’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도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셨죠. “쓴 잔 안 마시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까? 아, 안된다고요? 그럼 알았습니다. 마실게요.” 이렇게 되잖아요.
동물에게 율법을 줘요. 그러면 이 동물이 인간인 척해요. 율법의 기능은 사람을 죽이는 기능이에요. 모든 율법은 죽이는 기능입니다. 성경을 안 보니까 하나님이 안 죽인다 하는데 구약성경 신명기나 민수기 여러분 보신 적 있죠? 보게 되면 약속의 땅에 함부로 배설했다고 용변 봤다고 죽여 버리고요. 뭐 걸렸다 하면 다 죽여요. 여성이 월경하고 뒤처리 잘못했다고 죽이고, 오징어 먹었다고 죽이고, 안식일 안 지켰다고 죽이고요. 지금 하나님은 사람 못 죽여서 어쩔 줄을 몰라요.
하나님의 일은 뭐냐? 어떤 사람이 모임에서 ‘주여, 하나님 뜻은 뭡니까?’ 하나님 뜻은 간단해요. 이호선 교수 반대로 가르치는 게 하나님 뜻이에요. 죽이는 거예요, 그냥. 아직도 이게 덜 죽었구나. 죽이는 거예요. 이호선 교수는 뭐냐? 상담해서 사람을 어쨌든 살리려 하잖아요. 남편은 연세대 신학 교수고 목사인데요.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반대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아셔야 돼요. 무엇이 소중하냐 하면 율법이 우리를 죽인다는 이 작업을 진짜 사람이 해주신다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우리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뭐냐? 예수님을 아는 게 제일 소중해요. 예수님이 하나님 뜻이니까.
아버지의 모든 일은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일임했습니까? “나에게 일임했다. 나를 모르면… 너희들은 하나님께 가라, 가. 나는 아버지께 간다.” 여기서 하나님과 아버지가 다른 정도가 아니고 서로 반대방향에 있죠. 하나님의 반대쪽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아버지 계신 곳이죠. 예수님 아버지 계신 곳의 반대쪽이 하나님 믿는 지옥이죠. 하나님 믿는 지옥.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니까. 저쪽은 ‘알라, 알라, 알라’ 이러고 있고 이쪽은 ‘여호와’ 이러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으로 죽임으로써 율법으로 살리시는 거예요. 죽이는 것이 살리는 거예요. 율법이 안 오게 되면 우리는 주께서 준비하신 것은 생각 안하고, 현재 마귀와 결탁된 내가 잃어버린 나의 희락과 어마어마한 그 쾌락과 기쁨을 채우는 데에 허겁지겁 매달리면서 한평생 세월을 다 소모하고 있어요.
여러분, 세상에 나가서 누구든지 만나서 이야기하잖아요.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도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야기하게 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어릴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 기쁨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사정하고 때로는 협박하고 공갈치고 위협하고. 때론 혼자서 발광을 하든지 안 그러면 사정을 하고 아부를 하든지 그 모든 행동은 바로 ‘장이 좋지 않다’ 뭐 이 이야기죠. ‘내가 살고 싶은데 의미가 없네. 의미 있으면서 사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의미는 이 분이 갖고 있어요. 예수님의 의미로 쫑났어요. 아담의 영향력을 우리가 받듯이 이제는 예수님의 의미, 예수님의 영향력이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주어지는지 이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광주강의20260327b 창세기 1장 28절(우연의 폭력)-이 근호 목사
아까 공식 다시 한 번 써볼게요. 동물→율법→인간. ‘동물’입니다. 동물인 이유는 배후에 짐승이 있기 때문에. 짐승이라 하는 것은 국가로, 인간이 같은 인간 지도자를 표현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최종적인 평가는 ‘이 짐승아’. 요한계시록에서는 ‘용’ 또는 ‘옛 뱀’.
주님은 끝까지 마귀를 물고 안 놓습니다. 옛 뱀, 용. 뱀으로 자꾸 규정하는 거예요. 인간들의 모든 생각의 집합체가 국가로 모여요, 국가로. ‘네가 대신해라. 당신 일이라면 무조건 옳으니까 우리는 복종해서 우리의 일치된 의견을 현실로 구현해 달라.’ 그래서 전쟁하는 거잖아요.
그다음 ‘율법’이라 했죠, 율법. 율법으로 이스라엘(동물)을 치는 것은 죽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율법이 죽이는 것을 완성하게 되면 생명이 되죠. 그렇다면 이 말은, 동물 같은 인간이 생명에 이르는 것은 아시다시피 단절됐잖아요. 단절, 끊어졌다고요. 끊어짐인데 끊어짐에 다리가 있어요. ‘율법’이라는 다리로 인하여 끊어지니까 이게 생명이 되더라.
그럼 율법 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다 이루었다’. 생명이 포함된 율법이 우리를 패는 거예요. 단절되라고 패는 겁니다. 아까 그 예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했는데 자기 십자가를 질 사람 아무도 없죠. 십자가 질 때 도망갔으니까 없죠. 그런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패는 겁니다. 죽이는 거예요. 죽었을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성취가 제자들에게 임하니까 제자들은 뭘 얻습니까?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위험한 일은 말씀에서 멀어지는 거예요. 말씀을 가까이할 생각이 없을 때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말씀으로 환승’. 말씀으로 갈아타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 근거는 바로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었죠.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이 육신 되는 인간은 이제 뭐로 갈아타야 돼요? 율법, 다른 말로 하면 말씀 아닙니까, 말씀으로 갈아타기를 하는 거예요. 성도의 말씀화.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야구방망이로 만드는 거예요. 주님이 야구방망이로 성도를 때려놓고 죽게 된 그것을 자기의 야구방망이 속에 합류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말씀화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과연 성도에게만 이해되고 알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요. 그전까지 자기가 살아있을 때는 항상 장 건강 생각하면서, 모든 성경을 보는 태도가 일단은 살고보자는 것을 전제로 해서 성경을 봤잖아요.
아까 첫 번째 강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해볼까요? 내가 모든 걸 관찰하고 보는 의도가 뭡니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말할 수 없는 희락, 언어로 설명되지 못할 희락이 그립고 그걸 희구하고 자연적으로 갈망하는 몸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개 패듯이 패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패는 동시에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 품고 있는, 거느리고 있는 희락의 공간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환승으로 바꿔치는 과정이 궁금해요? 바꿔치는 과정이 성경에 나옵니다. 욥기 봅시다. 욥기 38장에서 41장까지. 38, 39, 40, 41장 이 넉 장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었던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이번 강의의 제목으로 삼고 싶어요. ‘우연의 폭력’.
율법으로 자기 백성을 때리십니다. 때리는데 원칙은 아까 첫째 시간에도 했지만 다시 한 번 하면 ‘동물’에서 ‘자기 백성 건지기’ 또는 ‘모집하기’. 동물 같은 세상에서 자기 백성, 참 사람이죠, 진짜 인간, 진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진짜 형상을 건지기 작업하는 데에 하나님께서 주님과 같이 동원해서 일을 실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성령이 있다면 이런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저거 동물 맞는데, 내 자식도 동물인데 어떻게 저걸 제대로 된, 천국에서 인정해주는, 천국에서 reject, 거절이 아니고 받아주는 사람으로 전환되겠느냐?’ 이런 관점이 있어야 돼요.
왜 ‘인간은 다 동물인데…’라는 게 필요하냐 하면, 인간과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에. 동물하고 싸우면 뭐가 돼요? 같은 동물 되잖아요. 싸운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동물은 싸움의 대상도 안 될뿐더러 다툼의 대상도 안돼요. 이기고 지고가 성립 안 되는 겁니다.
본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본성 자체가 인간 류하고 짐승 류하고 달라서 싸움이 안돼요. 그러니까 게임이 안 된다니까요. 다툼의 대상이 안돼요. 대상이 안 되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볼 때 기 죽겠습니까, 기 안 죽겠습니까? 기 안 죽죠. 마동석이 아이 패고 승리했다고 기뻐하겠습니까? ‘드디어 이겼다!’ 뭐 이럽니까? 상대할 걸 상대해야죠.
성도의 상대는 악마지, 인간이 아니에요. 우리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마귀와의 싸움이에요.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2절)
그리고 인간이 싸움의 대상이 안 되니까 무엇의 대상이 안 되느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돼요, 안 돼요? 안되죠. 동서끼리 싸우면서 “형님은 그러는 게 아닙니다!” 명절에 가서 ‘형님은 그러는 게 아니에요!’라고 화 낼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오늘 강의를 잘 들었으니까 자칫 말조심해야 돼요. “짐승은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아이고, 형님 죄송합니다. 내가 본심을 이야기해버렸다. 사람 같지도 않은 걸가지고… 내가 실수했네. 본심이 툭 튀어 나와 버렸네, 갑자기.” 안 믿는 배우자하고 싸울 필요가 없어요.
목적은 주께서 자기 택한 백성을 어떻게 모집하느냐에 있지, ‘너는 내 백성이니까 네 편 들어줄게.’ 이런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안중에 없어요. 그거는 이상한 얘기에요. 자존심이에요, 자존심. 그러니 상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마귀적인지 아시겠죠? 상담하겠다는 말은 ‘그동안 패배했는데 이제는 승리케 해드리겠습니다.’ 이게 상담이잖아요. 상담 목적이 그거잖아요. ‘남 보란 듯이 잘 살면 이기는 겁니다.’ 이런 소리하고 있다고요. 짐승한테 이겨서 뭐할 건데요?
‘우연의 폭력’이라 하는 것은 좀 어려워요. 욥기 38장, 39장, 40장, 41장에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질문을 할 때에, 욥이 평소에 생각한 걸 질문한 게 아니고 전혀 생각을 못했던 파편적인, 조각 조각난 어떤 연관성 없는, 따로 노는 파편적인 기호에 대해서 질문을 한 거예요. 땅의 기초(38:4), 새벽 별(38:7), 그다음 산 염소(39:1), 39장 13절에 타조, 19절에 말, 40장에 하마(15절), 안 그러면 공룡인지 모르겠는데 공룡, 들짐승(20절).
지금 욥이 자기 농사짓고 목축해서 자기 살 생각하지, 이런 걸 언제 생각합니까? 생물학자라도 상식적으로 자기 돈벌이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건데 그것하고 주님의 질문하고 차원이 달라요. 파편적인, 조각 조각 난… 인간의 모든 생각은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이 일단 나에게로 와서 이걸 아는 이것으로 인하여 나한테 존재 의미가 형성되는 목적으로 인간들은 뭘 관찰하고 말하고 따지고 탐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걸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유는 그걸 연구하는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일들 있잖아요. 북극성 빛나는 것하고 산에 염소 태어나는 것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관계없지요. 그게 내 밥벌이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냐는 말이에요. 내 존재의 가치를 그런 걸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인간은. 인간의 목적,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는 잘났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고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거고. 따라서 그러한 정보만 나는 평생 동안 수집해온 거예요.
그래서 누가 물었다 하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이래도 내가 잘못했단 말인가!’하고 따질 수 있는 준비된 자료들이 창고에 많은 거예요. ‘형님은 그러는 게 아니에요! 조카 대학 다닐 때 내가 공납금 대줬잖아요.’ 이게 막 나온다니까요. 잊지도 않아요. 모든 행동이 나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툭 건드리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이렇게 반듯하게 살아왔다는 증거자료가 와르르 쏟아져요.
“동서, 오늘 고만하자.” “그만하긴 뭘 그만해요! 안 그래도 오늘 나 벼렸다. 오늘 가지 마시고 밤새도록 이야기해봅시다. 형님은 우리 어머니한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어디서 재산을 노리고… 모시고 있는 내가 집을 차지해야지…” 드디어 본색이 나오죠. “내 이름으로 등기 이전 다 시킬 테니까 형님은 아무소리 마세요. 아플 때 형님은 도망갔잖아.” 결국 돈 문제가지고 그렇게 나오죠.
욥기 38장, 39장, 40장, 41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다룰 때는, 인간이 평소에 얼마나 집중적으로 모든 의미라는 것, 이 세상에 어떤 가치라는 것을 그 안에 담아서 자기가 꼭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박아놓고 세상 모든 것을 관찰하고 탐색하고 자기가 필요한 정보만 쏙쏙 뽑아서 내가 소유해왔는지 그것을 하나님이 들통 내죠. 여기서 ‘나 그렇게 안 살았습니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41장에 보면 1절,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낚시 이야기, 악어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그럴 때 욥이 어떻게 했어요? 욥이 한 것은 뭐냐? ‘내 생각=죄’. 내 생각 자체가 죄가 되고 불의하다는 거예요. 내 생각한다는 자체가. ‘나 바르게 살겠다.’ 아니, 그것도 불의해요. 하여튼 내 생각 자체가 불의한 이유가 뭐냐? 의미 없는 파편 되기를 내가 싫어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면 “들소야, 네가 왜 이렇게 들에서 물 먹고 풀 먹고 사냐?” 그럼 들소가 뭐라고 합니까? “모오오~~” 지금 참새보고 그걸 물으면 안 되고 들풀보고 물으면 안돼요. 참새, 들풀 자체에 어떤 고유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는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마 6:26, 눅 12:24)
주님한테 의미가 다 거기에 크라우드되어 있어요. 모든 의미는 참새를 키우는 분께 있어야지, 의미는 주 되시는 주님한테 다 가있지, 그걸 참새한테 묻고 들소한테 묻고 들풀한테 물으면 안 되잖아요.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냔 말이에요, 왜. 갑자기 나무라서 죄송합니다. 왜 우리는 그게 안 되냐 이 말입니다. 왜?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동물이기 때문에. 동물보다 더 못하죠. 만물보다 부패한 게 인간의 마음(렘 17:9)이라 했는데. 우리는 뭐든지 나 빼고는 생각을 못해요. 이것은 고질병이에요. 장 나쁜 거 그건 문제도 안 된다니까요. 암 걸린 건 문제도 아니에요! 나를 못 뺀다고요. 나에게서 나를 뺄 수가 없어요. 나에게서 나를 뺄 수가 없다고요.
못 빼는 걸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서 빼주잖아요, 욥에게 찾아가서. 어떻게? 질문하는 거예요. “똑바로 살아!” 이런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엉뚱한 것, 욥에게 하는 게 아니고 엉뚱한 것, 조각 조각. 인간 보기에 뭔가 통합될 때는 자기중심으로 통합되는데, 통합되지 못하고 자료에 들어가지도 못한 남겨둔 것 가지고, 조각 조각난 그러한 여러 가지 현상으로 주님께서 욥을 폭격하죠. 이게 유명한 테헤란 폭격이에요. 이스라엘 미사일. 미사일로 욥의 자아를 폭격하는 거예요. 이거 아냐? 이거 알아? 북극성 만들 때 너 어디 있었어? 이거 알아? 네 눈에 보이는 것, 그동안 너는 보이는 게 전부였잖아.
이것은 다 아는 질문이니까 여러분 답변할 수 있을 거예요. 자, 하나님이 욥에게 이렇게 질문할 때, 그때 욥에게 자식이 있었습니까, 있었는데 다 죽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있었는데 다 죽었죠.
그럼 욥이 상담가한테 가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 자식 죽었으니까 위로해달라고 하겠죠. 또는 하나님께 자식 없는데 자식 달라고 하겠죠. 욥이 지금 그러한 말을 할 입장, 주제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아예 안 되죠. 아예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42장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무슨 뜻인지 여러분 이해되시겠죠? 그동안 인간이라는 타자, 인간이라는 남과 너무 결속되어 있었어요. 인간이라는 엄마 뱃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엄마 같은 사람, 또 엄마 같은 환경, 아늑하고 충만했던 환경이 인간으로서 아는 그게 전부라고 알고 있었어요. 사람에게 위로받는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준비된 위로, 하나님의 준비된 죄 사함의 고마움, 십자가의 고마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과 결별했기 때문에 나온 사건이잖아요. 나는 나하고 결별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나는 나만 자꾸 붙들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님 피 믿고 천당 갈게요.’ 맨날 지금 자기 붙들고 있으면서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이 버릴 수 있는 마지막이에요. 버릴 수 있는 마지막이 이거에요.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에요. 자기 믿지 않으면 이제 버릴 것 다 버렸어요, 자기를 믿지 않으면. 문제는 육신의 가시가 또 도진다는 거예요. 또 시작이다. 어제도 버렸는데 오늘 또 튀어나와요. 오늘 또 버려야죠.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고, 자기 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내가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내가 인정한 바가 돼요. 왜? 내가 왜 있어야 되는데? 그걸 하나님께서는 북극성 이야기로 하시는 거예요. “북극성이 왜 있어야 되는데?”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황무지에 왜 비가 와야 되는데?” 그걸 왜 욥에게 질문합니까? 욥은 지금 자식도 없어서 괴로운데. 아내도 자기를 비난하고 난리도 아닌데. 위로해줄 생각은 안하고 왜 엉뚱한 질문을 해요? 그래서 욥기 42장 6절에 보면, 스스로 자기를 한탄한다. 스스로.
‘아이고, 이 쪼다야. 인간도 아닌 게 인간 행세한다고…’ 그렇게 하고 나는 어디에 적당하다? 무기물에 적당해요, 무기물. 생물체가 아니고 티끌과 재. 티끌과 재는 생물체 아니죠? 타다 남은 재잖아요. 재를 뒤집어써요. 재를 뒤집어쓴, 재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일치시키는 그 자리가 자기 자리에 합당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제 일하지 마시고 하나님 하고 싶은 일, 하나님 일부터 처음부터 새로 하시기 바랍니다. 제 일하지 마시고.’ 이게 바로 동물에서 율법 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전 세계는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말씀으로 엮여진 참새, 들소, 악어 하여튼 모든 것이 말씀과 관계있는 그것으로써 욥을 공격했어요.
공격했으니까 ‘그럼 목사님, 뭐 욥은 죽었습니까? 그래도 재 속에 있었으니까 살기는 살았잖아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데, 이걸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욥은 말씀으로 갈아타기 했다’. 자기가 미숫가루를 타 먹으려고 하다가 자기가 미숫가루가 되어버린 거예요. 미숫가루가 되어서 먹기는 누가 먹어요? 우리 주님이 “아, 이거 맛있겠다.”하고 욥이 포함된 미숫가루를 주님 입에 탁 털어 넣게 되면, 아버지에서 신약의 주님이 되죠. 주님 안에 욥이 되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이것이 ‘예수 안에 사도 바울’이에요. 예수 안에 사도 바울. 말씀 안에 말씀의 일부로써 욥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욥은 마지막에 7절과 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수요일에 이야기한 촉매 현상이 일어나죠. 욥은 촉매에요. 촉매 기능을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42장 15절,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악마에서 시작해서 저주가 어디로 흘러들어갔습니까? 여자에게로 흘러들어갔죠. 여자에게 흘러들어가서 여자가 생명이 되고 아담은 흙이 됐죠. 저주가 통하는 이 방향(악마→여자→남자)을 통해서 여자가 남자를 살리는 기능을 보여줍니다.
수요일에 제가 말은 안했는데 수넴 여인 아들이 다락방에서 살아났죠. 산 사람 한 사람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산 사람 두 사람이 나왔죠. 그 아들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요?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서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가로되 네 아들을 취하라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왕하 4:36-37)
수넴 여인 이야기에서 이상하게 남편 역할은 아무것도 없어요. ‘초파일도 아닌데 또 절에 가나?’ 하는 것처럼(왕하 4:23) 퉁명스럽게나 등장하지, 남편 역할은 하나도 없어요. 선지자를 모신 것도 여성이에요. 수넴 여인이었어요. 그 여인과 사르밧 여인에게 일어났던 현상을 엘리사에게 그대로 같이 결합시켜서 결국 그 여인은 자기 아들을 안았더라.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자가 안았더라.
항상 모든 일은 처음에 있었던 사건 있잖아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따먹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 사건이 파동을 일으켜요. 물결쳐서 그 물결이 현실을 만들어내요. 모든 현실 가운데 말씀이 끼어들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어요. 북극성에도, 들소가 한가롭게 물을 먹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말씀의 관계망이에요.
성경말씀 외운다고 그게 말씀의 관계망이 아니고, 우리 성도가 살아있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에 저주를 옴팍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저주가 영생이 되는 그 저주받은 자에 합류함으로써 그 저주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생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때부터는 주께서 하시는 일, 짐승 가운데서 자기 백성만 쏙쏙 뽑아서 창세 전에 택한 자만 건져내는 일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여시킨 거예요. 이게 바로 주께서 다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스린다는 창세기 1장 28절의 의미입니다. 이 말씀하는데 좀 많이 길었죠?
그다음 봅시다. [12. 430년 종살이의 이유]. [질문> 아브라함은 예배 중 작은 새의 배를 가르지 않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간 종노릇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창 15:9-17) 자료나 견해 부탁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430년 간 종노릇하는 것하고 제물의 배를 가르는 것하고 무슨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 분은. 무슨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제사에서 가르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간 애굽에서 종노릇한 벌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배 가르듯이 갈라져서 나왔다. ‘구분되어서 나왔으니까 이건 벌에서 해방되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목사님 의견도 제 얘기에 동감합니까?’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런데 답변을 한 번 보세요. [답변>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징벌이 아닙니다.] 징벌이 아니죠. 징벌이 아닙니다. 애굽은 인큐베이터고 배양기에요. 세균 배양기 있죠? 박테리아 배양하는 곳이에요. 70명 들어가서 남자만 70만 명이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세균이 번식하는 번식기 역할을 애굽이 해준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벌 없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은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벌이에요. ‘복역의 때’라 하죠. 사는 것 자체가 징벌이에요. 벌은 죄와 equal이 되어야 돼요. 벌=죄. 따라서 벌을 받을 경우에는 벌을 제대로 분량만큼 다 받으면 죄가 사해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벌을 얼마나 받아야 죄가 사라집니까? 지옥의 징역살이가 몇 년입니까? 끝이 없죠. 끝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벌 받는다고 해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없다? 없지요.
멜깁슨이라는 사람이 1500만 달러라는 자기 재산을 다 바쳐서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영화를 찍은 취지가 뭐냐? 내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했다는 거예요. 멜깁슨이 천주교 신자기 때문에 그래요. 주연 배우도 천주교 신자고. 이거는 불교입니다. 그거는 이방종교와 똑같은 거예요. ‘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이거. ‘부족합니다.’ 이거.
죄 사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한 벌을 혼자 다 독박 쓰신 분만 가능해요. 그 벌이 뭐냐? 아버지로부터 분리되는 거잖아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아무리 이 땅에서 재벌로 살고 좋은 집 살고 가정이 화목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끊어져버리면 그것이 바로 형벌이고 그 벌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아는 이유를 심리적으로 아는 게 아니고요. 심리적으로 알면 안돼요.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뭐와 결속되어 있습니까? 악마와 결속되어 있잖아요. 악마 꼴을 보세요. 악마가 회개한다고 구원 받습니까? 심지어 악마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의 길을 전하는 분입니다.” 한다고 해서 “그래? 네가 참 훌륭하구나. 너는 구원해줄게.” 이게 악마와 귀신한테 해당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아는데 구원이 안돼요. 이거는 정말 최악입니다, 최악. 최악이에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 원하는 걸 다해줘도 인간은 구원되질 못해요. 왜냐하면 마귀가 인간과 한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마귀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인간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인간은 인간 안에서 구원받지 못해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자기가 포행자요, 살인자인데 하나님의 창세전에 정해진 은혜를 받았다 할 때 자기는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삼층천 올라가기도 했고요. 그럼 사도 바울이 구원받은 근거는 뭡니까? 자기는 예수 안에 있다는 거예요. 성령 안, 십자가 안.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나니. 십자가 안, 예수님 안, 성령 안에 있어요.
그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마귀 안에 있다’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마태복음 12장에도 나오지만 본인의 어떤 결심이나 결단, 각오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여기 이 장소에 있던 자가 본인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다른 장소에 옮겨진 게 구원입니다. 지금 430년이 아니고 530년 해도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날 생각이 있다, 없다? 없어요.
우리 집에 숟가락 통, 젓가락 통이 있어요. 그걸 보고 큰 은혜까지는 아니지만 은혜를 받았어요. 큰 은혜까지는 아닌데. 통 가운데가 막혀서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고 아래는 물 빠지도록 철망이 되어 있는데요. 평소에 식사할 때 식구가 둘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파란색, 아내는 분홍색이에요. 숟가락, 젓가락 한 세트씩이요.
나는 상 차리는 걸 도와준다고 여기 통에 있는 걸 그냥 내면 얼마나 빠릅니까, 시간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집사람은 이 통에 애들 것까지 다 넣어버린다고요. 그러고 나서 당신이 상에 숟가락, 젓가락 놓으라 하면 그다음부터 이걸 찾는데 꽤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수시로 파란색, 분홍색 수저만 남기고 나머지는 막힌 데 반대쪽으로 다 옮겨놔요. 파란색, 분홍색이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지금 얼마나 깨끗하냐, 얼마나 참하냐가 아니라 놓여있는 공간 자체가 분리된 공간이에요, 분리된 공간. 공간 자체가 분리되었어요. 분리된 공간은 짐승에서 율법으로 만들었고 율법에서 그다음에 뭐가 돼요? 율법에서 사람이 되는데 이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 혼자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에는 아담의 영향을 받다가 이제는 예수님의 영향을 받는 예수 안의 사람이 되는 거죠.
따로 선택되어 분리된 이 공간이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이건 AI 이미지 돌려보면 금방 나올 거예요. 나머지는 분리된 공간 이쪽 말고 저쪽으로 보내. 나머지는 뭐 열 가지도 넘어요. 뭐가 있는지 몰라도 괜찮아요. 손님 오면 여기서 골라서 내겠지만 파란 것, 빨간 것 하면 된다고요. 그런데 또 보면 섞여있어요. 강박증세가 있는지… 또 분리해놓고, 상 차릴 때 ‘이때를 위함이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7장 17절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여기서 ‘참으리요’라고 했죠. 누가 참는가? 주님이 지금 참고 있는 거예요.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거예요.
어떤 세대를 보고? 이미 믿음이 없는 것으로 규정되었고 패역한 세대임을 계속 확인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참으리요’ 이 말은 ‘지금 너희들이 패역하고 믿음이 없지마는 지금 계속 내가 기회를 주고 있는 타이밍에 있다.’는 거예요. 기회를 주는 타이밍에 왔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일하실 때.
그러면 430년 동안 종노릇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이방민족에 대한 ‘참으리요’에 해당되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에요. 중보자 기능이죠. 지금 이스라엘은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 또는 율법이 유일하게 주어진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율법. 동물인데 율법이 주어진다고 아까 했죠. 율법은 왜 주어지는가? 모든 걸 죽이기 위해서. 죽이는 그것이 바로 생명이니까. 만나로 갈아타기 하죠. 음식 찾다가 만나로 갈아타게 해요. 만나를 먹음으로써 네가 마음을 낮추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신명기 8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주께서 율법을 주심으로써 계속 마음을 낮추게 만들면서… 아까 욥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의미를 내가 사는 데에 모으고 ‘주님은 뭐 해줄 건데요? 내가 나 구원받는데 주님은 뭐 해줄 겁니까?’ 자기를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그 본성. 그 본성을 다 들추어내는 겁니다.
‘참으리요’라는 이 말은 사랑을 베푼다는 뜻이 아니고 지금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넌지시 계속해서 언급해주는 거예요. 참는다는 말은 ‘아, 미치겠다, 정말. 패버릴까? 아… 참아야지.’ 이거거든요. 이걸 참는단 말이죠.
마태복음 11장 한번 봅시다. 도대체 뭘 가지고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는지.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이렇게 되어 있죠. 권능을 행했다는 것이 곧 회개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하는 것하고 은혜를 받는 것하고 별개의 문제라는 거죠. 하나님께 도움을 받는 거죠. 당장 안 참았으면 어제부로 우리는 다 죽었어야 돼요.
참아서 산다는 말을 우리는 뭐로 이해합니까? ‘역시 내가 착하니까 하나님이 가치 있어 쓰시는구나.’ 이렇게 자꾸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와, 이거… 아, 이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살 권한도 없고 존재할 이유도 없어요. 없는데 바로 중보자적 기능을 우리를 통해서 해내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주께서 내뱉으신 말씀이 말씀대로 그게 현실로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이렇게 앞장세워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짐승을, 동물을 자기 백성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다음에 21절,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심지어는 24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소돔 땅 같으면 이것은 정말 치가 떨리는 사태잖아요.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져서 다 죽었잖아요.
이 말을 하는 것은 제자들 안목에 예수님의 이러한 안목이 장착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제자들은 누구하고 경쟁한다? 게임 벌인다? 할 필요 없어요. 짐승하고 뭐…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질 건데 누가 잘했니, 누가 착했니, 훌륭하니 그런 논쟁해봐야 무슨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어요.
마태복음 10장 14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너희 발의 ‘먼지’. 그러니까 아까 수저통 소속이 다른데, 옆 동네 먼지가 여기 같이 묻어 들어올 수 없다는 식으로 모션을 취해라. ‘에이, 먼지나 도로 가져가. 먼지도 내가 있는 곳에 못 들어와.’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란 말이죠.
그러니까 430년 종살이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을 통해 배양한 거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너희들은 나라가 유지가 되지, 언약 외에 일체 다른 인간적인 생각은 끼어들면 안 된다. 끼어들면 안 된다 했는데 벌써 끼어들었잖아요. 그다음에 율법을 통해서 끼어든 것은 족족 다 공격, 폭격을 해버리죠.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보자적 기능에 합류시키고 참여케 하기 위해서 말씀이 아닌 것에 대해서 다 폭격을 해버립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말씀이 아닌 게 뭡니까? 끝에서 막히면 큰일 납니다. 말씀이 아닌 게 뭐죠? 말씀에 위반된 게 뭐가 되겠어요? 제가 답변을 돕기 위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장 성립에 말씀으로 되지 않는 현장은 없다.’가 되겠죠. 왜? 현실 자체가 전부 말씀에 입각해서 되니까.
전봇대에 새가 짹짹거리는 것도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죠. 주님이 하셨단 말이죠. 그럼 참새 붙들고 “참새야, 네가 짹짹이는 것은 마태복음 몇 장에 있는 거야?” 이렇게 물어야 돼요, 안 물어야 돼요? 네? 우리가 주의 뜻을 위반했다 하면 자꾸 말씀부터 찾아서 말씀하고 어떻게 연결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지금 핀트가 어긋난 거예요. 말씀대로 살았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전부다 지옥 갔는데요? 마귀 자식인데요?
아까 했잖아요. 말씀이든 뭐든지 항상 우리는 무엇에 모입니까? 나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내가 소유하려는 의식에서 비껴날 수가 없어요. 간 태우지 말고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주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이 말씀대로 되지 않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주님만이 말씀에 대해서 이렇다는 것을 확보하고 그 말씀에 입각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듯이 현재 현실에서 모든 것을 다 할당해놓은 입장이잖아요. 어느 것 하나 아닌 것 없이.
따라서 주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내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내 생각. 이렇게 하면 내가 주의 말씀 잘 지킬까, 저렇게 하면 잘 지킬까. 주의 말씀 잘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주의 지시에 위반되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진짜 마지막. 그럼 주의 지시대로 했으니까 따르면 주의 뜻입니까?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래서 제가 수백 번 이야기했습니다. 답변이 막 나오려고 하니까 빨리 내가 해야 돼요. ‘범사에 감사’. 범사에 감사하는 이유는… 일이 되고 난 뒤에 돌아서서 감사가 나오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성령을 보내셔서 내가 얼마나 모든 말씀과 상황을 내 유리한 쪽으로 사용하는지 그것을 폭격하고 그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그 지적받음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 ‘아, 참. 내 뜻대로 산다는 것이 육신을 갖고 있는 한 이것은 있을 수 없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지적해주시는 것은 살아있는 말씀이 말씀대로 살려는 나를 짓눌러버렸잖아요. 그 상황 속에서. 막 목이 짓눌려가지고 ‘고맙습니다.’
주님한테 늘 은혜로, 주님의 은혜로 사랑의 꽃으로 늘 얻어맞는데… 얻어맞으면 약간 긁히고 그래요, 얻어맞는데서 고마움을 느끼는 거예요. ‘모든 영광은 다 주께로 나서 주께로 돌아갑니다.’라는 고백이 나와 봤자 뭐 몇 초 가지도 않지만, 몇 초 안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게 나왔다는 것이 이것은 나를 초과하는 주님이 살아계신 현상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이 세상에서 종살이하면서도 주와 함께 동행하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사랑한다 하는 그것도 얻어터져봐야 ‘아,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구나.’를 아는 그 기쁨, 그 희락이 에덴동산보다 더 월등한 기쁨이요, 고마움인 것을 저희들은 이제야 발견케 하시고 느끼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