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51226a 창세기 6장 4절(하나님의 적)-이 근호 목사
『신구약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22페이지 7번 질문입니다. [질문> 목사님, 성막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합니다. 명쾌한 해답 부탁드리며,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로 다 성취되었는데 다시 이를 풀이하여 지루하게 강해하고 설명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기 명쾌하게 해 달라 해놓고 갑자기… 다 설명을 하게 되면 지루해지는 것이 마땅한데, 명쾌하다는 건 짧게 하란 뜻이거든요. 짧게 하겠습니다. 성막에 대해서 성경 출애굽기 25장부터 26장에 쭉 나와 있는데요. 성막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여기에 집사님 아들 분이 왔으니까 이것부터 출발하죠.
칠판에 ‘돈이 좋다(10억이 좋다)’ 이렇게 써놨는데, 은행에 10억 있다고 내가 좋은 게 아니죠. ‘좋다’할 때는 반드시 그 10억이 내 것이 될 때 좋은 거예요. 내 것이 될 때 좋다 이 말이죠. ‘내가 좋다’는 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유쾌’라 합니다, 유쾌.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하면 기분대로 살아요. 어떤 기분대로 사느냐? 유쾌하기 위해서 살고 불쾌한 것은 기피하고 피해버리는 식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유쾌와 불쾌로 나눠져 있다.
그러면 10억 있는 것이 왜 이렇게 나한테 기분 좋고 유쾌하냐?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에너지가 분출할 때 유쾌해져요. 그러면 자아(나)=에너지 덩어리. 나는 에너지 덩어리입니다. 에너지 덩어리이니까 갖고 있는 에너지가 폭발할 때 기분 좋죠.
전형적으로 폭발할 때가 파티 할 때. 크리스마스 파티, 연말 모임 파티 할 때 기분이 좋아요. 특히 파티 할 때 기분이 더 좋은 것은 남의 돈 가지고 파티 할 때, 자기 돈 안 쓸 때 그 때 아주 기분이 좋고요. 또 어떤 사람은 기부하는 데서 에너지가 발산돼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어요. 수천억을 기부한 미국 배우도 있고 수십억을 기부한 우리나라의 가수도 있고. 김장훈 같은 가수도 자기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기분이 좋죠.
그래서 한번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내가 남한테 간섭받지 않고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다 이게 기분 좋아요. 그런데 반대로 불쾌한 게 뭐냐? 남이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 ‘수련회 가자.’ 이런 거. 내 의사, 내 자율성이 아니고 외부에서 관여할 때 기분 나쁜 이유가…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외부인은 내 바깥에 있잖아요. 신체가 다르죠. 신체가 다른데 그 신체에서 명령이 나오고 지시가 나오고 언어가 나오죠. 훈계가 나오고 요구사항이 들어오죠. 이것은 외부인에게서 분출되는 에너지에요. 남이 기쁜 것, 남이 유쾌한 것이 나한테는 불쾌가 된다. 남이 유쾌한 것이 나한테 불쾌가 되는 거예요.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이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너는 너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는 거지, 남의 인생에 왜 관여하느냐?’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도, 진리라 할지라도 반드시 말을 할 때는 이것을 넣어야 돼요. ‘please’. ‘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해서 결정을 누구한테 맡겨요? ‘나는 이러한 제안이 있는데 그 제안의 최종 결정과 판단은 누가 하라? 내 말을 듣는 당신에게 결정권이 있으니까 당신이 결정하세요.’
그러면 그쪽에서 ‘No’라고 할 때 뭐가 돼요? 내가 ‘No’라고 한다면 나한테 기쁨이 되고 ‘예’라고 하는 것도 기쁨이 되겠죠. 결국은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최종 판단과 결정을 누가 내릴 때 기쁘다? 내가 내릴 때 내가 기쁜 거예요. 내가 내릴 때.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평생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가요. 은행에 있는 10억은 별로 안 좋아요. 이게 내게 들어올 때 나의 일부에 합세돼요, 돈이. 합세되면서 내가 돈이 10만원 있을 때 쓸 수 있는 선택의 여지보다 10억 있을 때 선택의 여지 범위가 넓어지죠? 그럼 내가 결정할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면서 나의 다양성은 기쁨을 통해서 유쾌하게 선택의 폭을 많이 넓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맨날 아버지 품에 있다가 독립한 사람이 있죠. 누굽니까? 누가복음 15장에 이름은 안 나와 있고 뭐라고 합니까? 탕자. 탕자가 집 나가면 나가지, 그냥 안 나갔죠.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여, 아버지가 장차 나에게 줄 유산을 미리 앞당겨서 나한테 주세요. 이제부터 난 독립하겠습니다.” 이럴 때 그 탕자의 기쁨, 즐거움, 희망, 장래의 모든 소망, 이것들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에게 에너지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돈이 생겼다는 데에 있어요.
그래서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렇게 지금 결론 내렸습니다. ‘돈이 좋다’가 아니고 ‘돈을 가진 내가 좋다.’ 여기서 더 나가면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자, 여기서 더 나가봅시다.
그런데 내가 돈 한 푼이 없어요. 누가복음 15장에 탕자가 돈 다 떨어졌잖아요. 돈 있을 때 친구 많았는데 돈 없을 때 친구 다 떨어졌죠. 돈이 없을 때, 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여겼었는데 있었어요. 뭡니까? 나보다 더 귀한 것은 뭐다? 한 자로 뭡니까? ‘돈’이죠. 나보다 더 귀한 것은 돈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에너지 덩어리니까요. 에너지라 하면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하니까.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거든요. 60조 개의 세포로 되어 있으니까 세포 하나하나마다 에너지가 다 있어요. 그 에너지를 채우면 상추가 되고 고추가 되고 오이가 되고. 스마트 팜에서 물주고 양식주고 유기물, 무기물 집어넣어서 대규모 사업체를 하는 것, 그것은 식물을 자라게 하기 위함이죠. 왜 식물을 자라게 합니까? 뭐 되기 때문에? 돈이 되기 때문에. 이 사회는 돈 없는 나는 인정을 안 해줍니다. 나보다 뭐가 중요하다? ‘너 얼마 가졌는데?’ 내가 가진 돈을 요구하게 되죠.
그러면 이게 1번(돈이 좋다), 2번(돈을 가진 내가 좋다), 3번(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4번(나보다 더 귀한 것은 돈)이죠. 5번, 6번 계속 나옵니다. 이게 어렵지 않아요. 굉장히 쉬워요, 사회라는 게. 4번, 나보다 돈이 귀하다. 나<돈. 그럼 나는 뭐냐? 나는 돈을 얻어야 되겠죠. 여기서 인간에게 나오는 것으로, 에너지를 즐기기 위해서 기존 에너지를 소비해야 될 그것을 노동이라 하는 겁니다, 노동.
노동을 하게 되면 나를 즐겁게 할 돈이, 나를 가치 있게 의미 있게 하는 돈이 제공되겠죠. 그런데 노동을 하게 될 때 이 세상은 돈 주기 전에 집단 체제, 집단 권력이 있거든요. 집단 권력에는 규율이 있어요. 또는 전략이 있고. 이 때 전략은 집단 전략이에요. 집단 전략에 개인적인 노동을 집어넣으면 여기에 대한 돈은 내 노동의 값으로 지불됩니까, 아니면 집단 전략에 필요한 만큼 돈이 지불될까요?
이 집단 전략의 대표적인 것을 쿠팡이라 합시다. 내가 쿠팡에 취직했을 때, 내 노동의 가치를 줍니까, 쿠팡이라는 조직체를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주는 거예요? 둘 중 어느 쪽입니까? ‘노동해서 돈 번다’, 5번. 6번은 ‘집단 전략에 의해서 돈이 주어진다’에요. 이 둘 중 어느 게 더 맞아요? 6번이 맞죠.
1.돈이 좋다.
2.돈을 가진 내가 좋다.
3.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4.나보다 더 귀한 것은 돈.
5.노동해서 돈 번다.
6.집단 전략에 의해서 돈이 주어진다.
아니, 노동한다고 내가 원하는 만큼 줍니까? “너 한 달 월급 얼마 받고 싶나?” “300만원 원합니다.” 300만원 줍니까? 안 주죠. 그럼 내 노동은 누가 정하는 거예요? 내가 취직한 그 회사에서 정하잖아요. 이게 나 말고 집단이 정해서 나한테 임금과 급료를 일방적으로 정해버린단 말이죠. 이거 싫거든 자영업 하든지. 자영업해서 간판 건지 두 달 만에 망하든지 뭐 마음대로 해. 이거 싫거든 그냥 자영업 하든지. 이거 싫지 않으면 집단에 소속되든지. 그렇게 해야죠.
학교 급식 조리원들이 얼마 전에 뭐했습니까? 데모했죠. 왜 데모했습니까? 근로조건 개선하라고 데모했잖아요. 혼자 했습니까, 집단적으로 했습니까? 집단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하는 거예요. 집단적으로 하면 여기서 마지막 7번, 인간은 개인이다, 아니면 소속되어야 된다? 어느 쪽입니까? 소속이죠. 그럼 다시 한번 묻습니다. 개인보다 어느 것이 우선됩니까? 개인보다 인간은 소속이 우선되죠. 이 소속을 더욱 더 큰 소속으로 만드는 이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
이게 인간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기 전에 전제로 무엇부터 알아야 돼요? 내 가치가 어느 정도며, 앞으로 어떤 일이 나에게 들이닥칠 것이며, 나는 어떤 사회 속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이미 나를 반기는 사회가 어떤 식으로 움직여 나가는지를, 그걸 알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렇죠?
남자는 군에 가봐야 인간이 된다는 말이 있고, 오늘 <인간극장>에 보면 여자는 아이를 낳아봐야 철든다는 거예요.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남자는 군에 가봐야 인간이 된다, 여자는 애 낳아봐야 여자가 된다는 그 둘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나의 자율성이 박살나는 거예요. 군대는 물론이고. 애 낳으면 애가 밤새도록 새벽 2시고 3시고 울어재끼면서 젖 달라하는데 내 과거의 모든 것은 거기서 파괴되고 해체되죠.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나보다 더 중요시된 그 무엇이 나이 들면 들수록 계속해서 나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나는 살아있다. 그런데 나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나가면 뭐가 살아있어요? 조직이 살아있고, 군대가 살아있고, 직장이 살아있고.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직장이 살아있다, 사회가 살아있다. 이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에 뭐가 들어오겠어요? 내가 살아있다<사회가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사회(직장)가 살아있다<죽음이 살아있다
죽음이 살아있다는 말이 이상한데 이게 맞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조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내가 왜 삽니까? 즐거움 때문에 살죠. 왜 즐겁다 했죠? 내 안에 들어있는 에너지 덩어리를 내가 자율적으로,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안 가고 내 마음대로 활용할 때 이게 나한테 뭐가 된다? 옳고 그름이 아니고 나한테는 이게 진리고 나한테는 이게 즐거움이고 사는 보람은 여기에 있어요. 인생은 내 인생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이것이 절대적이고 이게 자유다 이 말이죠.
아까 한 것 다시 해보겠습니다. 나보다 뭐가 더 셌습니까? 뭐가 더 센 거예요? 돈이거든요. 나<돈. 돈은 에너지 교환수단이에요. 돈이 있어야 에너지를 계속해서 얻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돈은 어디서 나옵니까? 돈은 그냥 주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아끼는 에너지를 소비해줘야 거기서 돈이 오는 거예요.
퇴직을 했다. 정신적으로 무너졌다. 왜? 나는 분명히 가치 있는데 내 가치는 즐거운데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찾지 못하면 사람이 먹먹해지죠. ‘나 뭐지? 도대체 나 뭐야? 나란 존재는 뭐야?’ 갑자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내 노동을 필요로 하고 나를 쓸 때 비로소 나는 업 돼요. 내 기분이 좋다고요. 내가 원했던 바니까.
‘당신은 가치 있는 인간입니다’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원하는 바인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그쪽에서 나를 튕길 때 유일하게 내가 자체적으로 그나마도 내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내 쪽에서 차버리는 경우에요. 그걸 유명한 말로 ‘까이기 전에 깐다’고 하죠.
그러나 군대라든지, 애를 낳았는데 새벽 2시에 애가 운다. 이게 내 마음대로 ‘까이기 전에 깐다’가 돼요? ‘네가 젖 달라고 해도 나 젖 안줘.’ 이게 돼요, 안 돼요? 안되죠. 이미 인간은 개인 이전에 뭐가 더 큽니까? 사회가 더 큰 거예요. 사회가 더 큰 겁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사회에 이미 잠식당했다.’ 완전히 삼킴을 당한 상태에요. 나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사회에 삼킴을 당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중에 가장 안 되는 것이 뭐냐? 내가 늙어 죽는다는 것이 내 마음대로 안돼요. 그렇죠, 장로님? 인생 많이 사셨으니까.
늙어 죽는다는 것. 아니, 죽음까지 안 가도 늙는다는 것. 귀가 안 들린다든지 관절이 안 좋아져서 계단을 못 올라간다든지 이게 내 마음대로 됩니까? 운동 좀 한다면 노화가 지연되고 그런 건 있겠지만 안 죽고 그런 게 있겠어요? 무술할 때 옛날에는 다리가 저 높이 올라갔는데 지금은 올라가지도 못하고. ‘선생님, 시범 보여주세요.’하면 ‘나 시범 안 해.’ 뭐든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세계에서 내 마음대로 되려고 하니까, 사회가 억지입니까? 내 고집이 억지에요? 내 고집이 억지고 망상이겠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 뭐를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 죽음이라는 것이 왜 나보다 더 세냐?’ 그 다음에, ‘사회라는 것이 왜 나보다 더 세냐?’ 이걸 공부를 해야 돼요, 오늘 이 시간에. ‘왜 나는 죽음한테 벌벌 떠느냐?’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왜 나는 이 사회의 권력에 대해서 아무 소리 못하고 나는 그 권력 앞에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그걸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보자 이 말이죠.
그래서 혼자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범위를 넓혀보자는 거죠.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 세월 간다고 그냥 나이만 먹으면 안 되고요. 내가 생각했던 내 손전등이 있다고 합시다. 제가 질문을 할 테니 알아맞혀 보세요. 4살 아이가 손전등으로 비춰서 발견하는 것과 14살 먹은 애가 손전등을 비춰서 발견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많겠어요?
동일한 손전등이라고 할 때, 똑같은 성령의 손전등으로 비춰도 4살 먹은 애는 자기가 필요한 것만 알고 나머지는 전부다 배제시켜요.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빠뜨린 게 많다고요. 4살 먹은 애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한테 요청한 선물은 뭐겠습니까? 핑핑 하는 거, 요새 애들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있잖아요, 그걸 원하는 거예요.
심지어 2살 먹은 애에게 손전등 가지고 비춰서 네가 원하는 것 가지라 하면? 만약에 5만원 짜리 지폐가 하나 있고 그 옆에 작은 인형이 하나 있다면? 그 애가 둘 중 어느 걸 선택하겠습니까? 인형 원하죠. 5만원의 가치를 몰라요. 10억의 가치를 모른다고요, 2살 먹은 애는. 그러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같은 손전등이라도 비추는 범위가 넓어지겠죠.
똑같은 공간이고 똑같은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아의 성장 따라서 세상 보는 눈이 커지면서 선택 범위가 더 넓어지겠죠. 더 넓어진다고요. 적겠습니다. 동일한 세상이에요, 동일한 세상. ‘동일한 세상에서 나의 정신 성장 비례에 따라서 세상이 더 넓고 깊어 보인다.’ 이거에요. 맨 그 세상이에요. 달라진 것 없어요. 달라진 게 없다고요. 없는데 세상이 더 깊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나이 먹는다고 해서 세상을 더 깊게 보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나이 많다고 해서? 나이 많다고 넓어지는 게 아니에요. 자신이 죽는다는 자기의 죽음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전에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점점 더 소중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이 말이죠.
자기가 죽어가고 있고, 내가 살아있다는 이 자체 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다. 따라서 죽어가는 입장에서 ‘나는 살아있다’는 이것은 억지고 고집이다. 이것은 내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야. 점점 죽어가고 있으면서 살아있다고 큰 소리 쳐봐.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 점점 깊이 느껴지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감사와 고마움이 되겠죠. 우울증이 싹 없어지겠죠.
남편이 어디 가자 하는데 남편도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다면 “내가 생각해볼게.”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어디 가자 하는 남편이 갑자기 오늘 밤에 급성 맹장염이 걸려 죽어가고 있을 때, “내 마지막 소원은…” 이러면서 “내 마지막 소원은 수련회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좀더 깊게 생각할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하면 범위를 최대한도로 넓혀보는 거예요. ‘네가 현재 이미 죽었다고 치고 세상을 한꺼번에 볼 마음이 없겠느냐?’ 이게 성경입니다. 이미 죽었다고 치고. 죽었다고 치고,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이 세상에 왔을 때 나는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갈 수 있느냐?
그러면 전에는 ‘이건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 아, 저건 날 유쾌하게 하네.’ 하는 이 모든 판단 기준이 이제는 없어지고 어떤 것 하나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게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고, 다 고맙고 고마운 상황들이었다 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죠.
그러면 아까 나라는 것은 무슨 덩어리? 에너지 덩어리. 에너지 덩어리인데 죽고 난 뒤에 다시 오니까 나는 무슨 덩어리? 하나님의 선물 덩어리다. 크리스마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나한테 선물을 주는 게 선물이 아니고, 내 자체가 바로 남들에게 선물이 된다는 그런 개념이에요. 내 자체가 선물이 되는 거예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애한테 전화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너 아직도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있다고 믿느냐?’라고 아이에게 동심 파괴 전화를 했답니다. 물론 영어로 했겠죠. 그런데 이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생성형 AI한테 엄마가 부탁을 했어요. 엄마가 사진을 찍었어요. 자기 집 아파트 베란다 사진을 딱 찍어놓고 AI한테 부탁했습니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밤중에 이 베란다를 열고 들어와서 자고 있는 내 아이에게 선물 주고, 자고 있는 내 아이를 쓰다듬는 동영상을 만들어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뭐 한 10분도 안돼서 동영상이 나왔어요. 그다음 날 아침에 AI가 만들어준 동영상에 나온 박스 있잖아요, 그 상자와 똑같은 선물 상자를 준비한 엄마가, 물론 선물 상자도 미리 사진 찍어서 AI한테 부탁했겠죠, 그 동영상을 3살 먹은 애한테 그대로 보여준 거예요. 보여줬을 때, 그 3살 먹은 애가 실제로 어젯밤에 자고 있는 내 모습이고 자고 있는 나를 쓰다듬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그 밤중에 다시 문 열고 아파트 15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려서 루돌프 자가용 타고 공중에 날아가는 걸 봤을 때, 3살 먹은 그 아이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동영상 봤잖아요. 증거가 있잖아요, 증거가. 그러니까 걔는 트럼프가 아니고 누가 와도… 안 보이는 걸 ‘믿자.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 내가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데, 어젯밤에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왔다간 동영상이 있다니까요. 거기 그 박스도 있고. 어떻게 부정하겠어요? 부정 못하죠. 부정할 수 없죠.
그게 바로 뭐냐? AI가 생성한 그 동영상, 그게 ‘성막’이에요. 이게 성막입니다. 주님이 인간한테 장난을 친 거예요. 주님이. 하나님이. 인간은, 소망이 뭐냐?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마치 어린 아이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믿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해요.
그런데 인간이 몰랐던 게 있습니다. 여러분, 둘 중 맞혀보세요.
1.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인간의 뜻이다.
2.하나님에게는 적이 있다.
둘 중 어느 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하는 것은 최고의, 최고의, 최고의, 그보다 더, 더, 더, 더 높은 곳에 누가 계시고, 지금 이 하늘 너머 다른 세계에는 뭐가 있을까? 인간은 계속 그걸 궁금해하고 그걸 신기해하고 그걸 마음속으로 소원하고 염원하는 거예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도 그런 종류에요. 성 크로스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됐어요.
그런데 그 스페인 신부가 살았고 죽었고 선물 줬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내가 나라는 에너지 덩어리가 앞으로는 잘 될 거고 앞으로는 희망 있다는 이 희망 자체를 내 이 에너지가 원하고 있다니까요. 이 에너지 덩어리가 원하고 있어요. ‘나는 이걸로 족합니다’ 이게 난 싫어. 나는 불쾌해. 앞으로 잘 될 거라는 희망이 지금 내 삶의 에너지를 준다니까요. 기쁨을 준다니까요.
20대 신혼부부의 소망은 뭐냐? 우리가 10년 간 실컷 돈 벌어서 그다음에 애 낳고 같이 여행이나 다니자. 20대 부부가 그렇게 마음먹고 결혼을 했어요. 둘 다 헬스클럽을 운영하고 종사하는 사람이었는데 남자가 두뇌에 종양이 생겼어요. 그래서 수술을 했어요. 이게 지금 이번 주 <인간극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남자 서른 셋, 여자가 서른 다섯인데 본인이 이야기해요. 20대에 실컷 돈 벌어서, 뭐 한 10억이라 합시다, 원 없이 쓰는 거, 여행 다니면서 쓰는 거,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쓰자 했는데 여기에 뭐가 왔어요? 그 젊은 남편이 뇌수술해서 심지어 몸을 떨고 있어요. 손가락 떨고 있습니다. 약 계속 먹어야 되고. 애 하나 생겼었고 또 임신했어요. 애 둘이에요, 이제. 여자 혼자 벌어서 키워야 돼요. 이게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럼 그들의 꿈은 어떻게 됩니까? 자, 꿈은 행복한데 현실은 그래요. 질문, 그 여자가 그 꿈을 포기했겠어요, 포기 안했겠습니까? 포기했겠어요, 포기 안했겠어요? 인간은 희망 없이는 못 살아요. 또 질문 들어갑니다.
‧ 인간은 사랑 없이는 못 산다.
‧ 인간은 희망 없이는 못 산다.
어느 쪽이 우세합니까?
인간은 사랑 없이는 못 산다, 이것은 현재에요. 희망 없이는 못 산다는 이것은 미래입니다. 인간은 현재에 족할까요, 미래를 내다보며 살까요? 미래라는 자아상에서 인간은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인간은 희망 없이는 못 살아요, 희망 없이는.
‘인간은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은 모모가 이야기한 거고요. ‘인간은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만중이 부른 노래죠. 인간은 사랑 없이 못 산다는 것은 현재고, 희망을 포기할 때 사랑으로 족해야 돼요. 인간은 사랑 없이는 못 산다 해서 결혼해놓고는 그다음부터 뭡니까? 사랑보다도 자신의 희망을 위해서 살아요.
희망을 하는데 희망은 미래잖아요. 희망은 누가 쥐고 있습니까? 인간의 미래를 누가 쥐고 있어요? 자기는 아니잖아요. 자기는 현재에 있으니까 미래에 누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인간은 하나님 또는 신이라 하죠.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신을 포기할까요, 포기하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관계없어요. 절에 다니나 안 다니나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나보다 더 대단하고 행운을 가져다 줄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보낼 산타크로스보다 더 센 분, 그 하나님을 인간은 갖고 있어요, 이미.
그런데 아까 그게 어디에 해당됩니까? ‘1.하나님은 존재하신다.’입니다. 여기서 생긴 것이 바로 종교라는 거예요, 종교. 종교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뭘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를 말해주는 게 아니고, 성경은. 성경은, 2.하나님에게 적이 있다. 이 적이 누굴까~요? 이 하나님의 적, 원수가 누굴까요? 나. 그래서 나에게 뭐가 옵니까? 죽음이 오는 거예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죽는 겁니다.
이 사실, 인간은 신을 원한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은 ‘신을 원하는 네가 나의 적이다’라는 내용을 같이 중첩해서 보여주는 그 만남의 장소가 성막입니다. 성막 설명하는데 이렇게 많이 길어요. 왜 길어야 되냐 하면, 우리가 신을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원한다기보다 더 솔직히 말해서 뭡니까? 인간은 희망 없이는 안돼요.
내가 앞으로 잘 될 거라는 것, 절대로 망하거나 내가 남보다 뒤처지는 이런 일은 없고, 나한테 항상 좋은 일만 있기를 원하는 나 자체가 신과 흥정하고, 신과 거래하고. 신에게 기도하면 소원 들어줄 거죠? 그렇죠? 신 자리에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집어넣어도 마찬가지 똑같아요.
어릴 때 누구나 산타크로스에 대해서… 2살 먹은 애가 “산타크로스 물러가라!” 이런 애 봤습니까? 없죠. 울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선물 주잖아요. 울지만 않는다면. 평소에 울더라도 그날만큼은 12월 24일 저녁만 안 울면 돼요. 그러면 뭡니까? 산타크로스 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애를 쓰다듬고… 그 영상을 내가 봤다니까요, 오늘 아침 뉴스에서. 베란다 문 열고 선물 놓고 그냥 날아갔어요. 애는 그걸 보면서 내가 믿던 것이 이게 바로 진짜 현실 맞다고 얼마나 자부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그 성막, 성막이 나중에 어떻게 돼요? 불에 타버립니다. 불에 타버려요. 아까 집사님과 같이 아파트 올라오는데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연기가 없으니까 우리는 오작동이라 생각하고 올라왔는데요. 성막이 커져서 성전이 되죠. 성전은 불이 납니다. 성전에 불 지르신 분이 누구십니까? 성전에 불 지른 분이 누구죠?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이스라엘 성전을 불 지르고 하나님이 만든 나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멸망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은 내가 왜 나를 만드신 분의 원수와 적이 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이것이 성경책입니다. 성막 설명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지금 서론 정도밖에 안돼요.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죠. 그럼 아까 그 말을 대입하면, 성막은 하나님과 그 다음 ‘인간’ 자리에 뭘 집어넣어야 돼요? ‘하나님의 적, 하나님의 원수’를 여기다 집어넣으면 그게 성막이 됩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적, 원수의 만남의 장소’.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조건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인정하면 성막에서 하나님과 만날 수가 있어요. ‘너 적이야!’라는 말이 우리의 희망을 끊는 게 아니고, 이젠 내가 생각해 낸 희망 말고 하나님이 준비한 희망으로 바꿔치기, 교체를 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한테 좋은 걸 얻겠다는 것, 그 생각이 바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하나님의 원수 마귀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면 되는 거죠. 하나님이 안 만나겠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하나님은 마귀가 만든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 희망으로 조작된 거거든요.
동영상 봤던 그 애가 나중에 나이가 일곱 살, 열 살 쯤 되어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선물 준 게 아니고 엄마나 아빠가 선물 줬다는 것을 알았을 때-지금 이 이야기를 네 살 아래 애한테는 하지 마세요, 동심 파괴되니까- 걔가 굉장히 실망할까요, 아니면 기뻐할까요? (실망해요.) 아니죠, 기쁘죠.
왜? 어릴 때 내가 몰랐던 것을 이제 알 정도로 그만큼 내가 컸다. 내가 어른 됐구나. 엄마한테 이용당하던 그 때의 피동적인 내가 아니라, 이제는 내가 판단해서 ‘내가 이걸 해야 되겠다, 안 해야 되겠다’ 스스로 결정할 정도로 내가 많이 컸구나 하는 어떤 자기에 대한 자부심? 나는 이제 혼자 살 수 있다는 자립심? 이것을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매료되죠. 흐뭇해하죠. 기분 좋죠. 그럼 어떻게 돼요? 그래서 어디에 들어갑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회에 들어가죠.
아까 인간을 에너지 덩어리라 했잖아요. 에너지 덩어리라 한 것은 인격의 과학화에요. 모든 것이 현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이잖아요. 뭐까지 포함시킵니까? 인간이라는 것도 과학으로 바뀌어요. 인간이 과학으로 분석이 되게 되면 인간은 그냥 에너지 덩어리에요. 에너지 덩어리니까 시중 편의점에 파는 에너지바, 그 에너지바가 인간이죠. 에너지 떨어지면 인간은 그냥 시체가 된다. 바짝 마른 시체, 말라빠진 채소가 된다.
차 안에 냄새 피우라고 모과 놓잖아요. 그런데 제일 보기 싫은 게 모과가 쭈그러질 때, 이것 좀 갖다버리지. 아직도 있나? 이렇게 돼요. 그러나 처음 모과는 그렇게 흉하고 찌그러진 모습이 아닙니다. 탱탱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게 나중에 나이 든 모과, 할아버지도 그렇지만 특히 할머니들, 할머니들 피부에서 물기 빠진 그 모습은 할머니 본인들도 싫어해요. 그래서 치마를 길게 내려서 다리도 안보여주잖아요. 물기만 빠지는 게 아니라 근육도 빠지죠.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모습, 자기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자, 그럼 성막의 구조가 뭐냐? ①산 사람을 죽인다. 산 사람을 죽이는 그 구조가 제단. 제단에서 죽여요. 산 사람을 죽일 때 여기 대체해서 들어가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양이나 소나 염소. 제물을 집어넣어서 하나님은 산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산 사람을 죽여서 상대한다.’ 이렇게 돼요.
제단이 있는데 제단에 뿔이 있어요(출 27:1-2). 뿔이 있는데 양이나 소, 염소의 피를 이 제단 뿔에 바릅니다. 네 모퉁이에 바른다고요(레 8:15, 9:9, 16:18, 출 29:12). 그러면 제단에 뿌린 피, 피, 피가 놋 제단에 있겠죠. 이 모습은 일종의 욕조 모습이에요. 어떤 욕조? 피의 욕조. 대중탕, 목욕탕에 있는 피의 욕조. 피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피 속에. 피 속에 들어가면서 여기서 육체는 태워지는 겁니다.
(제단)
그 피가 제단에만 발리는 게 아니에요. ①산 사람을 죽인다, 이것은 뜰에서. 성막 뜰에서 하는 겁니다. 성막 크기는 동서남북으로 남북 50m(100규빗), 동서 25m(50규빗)에요. 담장은 2.5m(5규빗) 높이의 담장. 폴짝 뛰어도 잘 안 보여요. 이스라엘에 실제 가서 보니까 잘 안 보여요. 2.5m 담장으로 둘러져 있고, 동쪽 길이가 50규빗인데 동쪽으로 가로 20규빗, 세로 5규빗의 문이 나 있고 들어가면 제단 뜰이 돼요.
그다음 양을 잡았잖아요. 양을 누가 잡죠? 제사장이 잡죠. 제사장이 잡으면 양의 피가 제사장 손에 묻죠. 옷에 묻고 발에 묻죠. 여기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돼요. 손과 발을 씻는 세숫대야 비슷한 물두멍이 있어요. 그리고 텐트가 쳐 있어요. 편평한 전체에 텐트가 쳐져 있고 텐트 안에 방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어요. 동쪽(앞)에 있는 것을 성소라 하고 서쪽(뒤)에 있는 것을 지성소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막 전체 그림)
(성막 모형도)
성소에 제사장이 들어갈 때 물로 씻잖아요. 들어갈 때 그냥 못 들어가요. 피를 뿌려요. 피를 여기에 바릅니다. 피를 뿌리고 성소에서 지성소로 가는 휘장에도 피를 뿌려요. 뿌리면서 여기에 향 피우는 향 제단이 있고 북쪽에 테이블이 있는데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으로 만든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위에 금박으로 입혀서 떡 6개, 6개 12개가 놓여있고 남쪽에는 조명기구가 있어요. 팔이 여섯 개 나와 있고 중간에 솟아서 총 7개 가지로 뻗은 촛불을 피우는 등대가 있고요. 그 위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이 있어요. 향 제단에서는 향을 피우는데 매일같이 피워야 돼요. 향 제단도 순금을 입혔고 촛불 피우는 등대는 순금으로 만든 거예요. 이렇게 있어요.
(성막 안 기구들)
①산 사람을 죽인다. (제단 뜰)
②죽음에 거룩함이 입혀진다. (성소)
지성소에는 7월 10일에만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어요. 지성소에 언약궤라는 상자가 있어요(출 25:10-22, 37:1-9). 길이, 너비 2.5, 1.5, 높이도 1.5규빗 크기인 언약궤 뚜껑에 천사 둘의 날개가 교차해서 덮어져 있어요. 교차되어서 날개 틈 사이에 어떤 인간도 여기 끼어들지 못하게 되어 있고, 상자니까 안에 뭐가 들어가야 되잖아요. 세 가지죠. 돌판 들어가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 하나는 만나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이 안에 딱 집어넣습니다(출 25:16, 16:33-34, 민 17:10, 히 9:4). 언약궤에 그렇게 들어가 있고, 세 번째는 하나님과 직접 만남이 이루어져요.
③하나님과 직접 만남이 이루어진다. (지성소)
산 자가 죽음이 되고, 죽음은 양의 피의 형식으로 거룩함이 입혀지고 거룩함이 거기에 삽입되어 들어가고, 이 거룩함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직접 거룩한 존재로서 만나는 것이 바로 세 번째. 첫 번째-제단 뜰, 두 번째-성소, 세 번째-지성소에서 이것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보니까 결국 뭐에요? 지금까지 첫 번째 강의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다. 왜?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원수를 하나님이 만나주신다. 조건이 뭐냐? 나는 하나님의 적이고 죽어 마땅함을 인정할 때 교체해서 제물로, 거룩한 제물로 교체해서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장소가 바로 성막이다.’ 그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으로, 그럼 이 성막이 왜 나중에 성전 되고, 이 성막의 기능이 확대된 게 성전인데, 성전이 왜 하나님에 의해 불태워졌는가? 무슨 요소가 없어졌기에 불태워졌습니까? 아까 진행하는 절차 가운데 조건들이 지켜지지 않으니까 불태운 거예요. 우리 사람은 하나님 앞에 원수라는 사실을, 이걸 놓쳐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렇게 막 나오니까 자기가 잘나서 함께 하는 줄로 곡해한 거예요. 하나님이 양으로 교체한 걸 모르고, 자아의 행복과 자기의 유쾌함과 자기의 소망을 위해서 누구를 동원시켰어요? 하나님을 동원시킨 거예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잘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아까도 집사님이 ‘봉사한 거, 지옥이나 가라’ 이야기했는데.
봉사하고 헌신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바로 숨어있던 하나님 원수의 본색, 마귀의 마음이라는 것이 들추어졌기 때문에 마귀에게 내려질 처벌은 뭐냐? 나 너하고 더 이상 안 만난다 하고 빠이빠이해서 성막, 성전이 불태워진 겁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51226b 창세기 6장 4절(하나님의 적)-이 근호 목사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성경을 안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 두 번째 봅시다. [8번, 네피림. 질문> 네피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홍수로 네피림들이 멸망했을 텐데 어떻게 민수기에 네피림의 자손들이 있는지요? 정말 궁금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네피림 자손을 보았다.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한 분파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라고 되어 있습니다.
‘홍수 때, 누가 누가 죽었다’라는 말은 사실은 성립 안돼요. 왜냐하면 다 죽었으니까. 심지어 누구도 죽었어요? 노아도 죽었잖아요, 홍수 때. 물이 이겨요, 사람이 이겨요? 물이 이기죠. 홍수가 온 이유가 사람 죽으라고 왔어요. 죽이기 위해 비가 왔어요. 비 왔는데 비 맞고 살아있었다? 그것은 홍수의 취지에 어긋나죠. 홍수가 주어진 이유가 제발 그만 살라고 온 게 홍수에요. 홍수의 목적이 있다고요.
교수형 할 때 장치가 무슨 장치입니까? 죽을 ‘뻔’하는 장치가 아니고, 진짜 죽이는 장치가 교수형 장치 아닙니까. “사람이냐?” “예.” “그러면 죽어요.” 이게 바로 홍수의 의미입니다. 앞으로는 뭐가 준비되어 있습니까? ‘불났다’가 준비되어 있겠죠. 전에는 물로 심판했지만 불로 심판한다.
그래서 이 홍수라든지 나중에 불 심판은 ‘살아남자’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살아남자’가 성립 안 되고, 하나님께서 이런 홍수와 불 심판 내리신 이유는 ‘왜 너는 죽어 마땅하냐?’ 그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벌이신 일이 홍수 심판이고 불 심판이에요. 살아남자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돼요. 늙으면 다 죽는데 살아남은 자가 어디 있어요?
한 95세 살았다. 95세인 할아버지보고 ‘아이고, 오래 살았습니다.’한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95년 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내가 지난 날 95년 살았다’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 지나간 일인데요.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지금 내가 몸이 아프다’ 이게 중요한 문제지, 95년이나 살았다. 그래서 뭐? 남는 게 뭔데? 95년 살아서 남는 게 지금 몸 아픈 것밖에 안 남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건 앞에서 허약한 거예요. 준비된 사건에 의해서 인간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럼 이제 ‘네피림(Nephilim, 히브리어로 נְּפִלִ֞ים.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자들, 타락한 자들을 의미)’이라는 뜻 자체가 ‘하늘에서 떨어진 자’ 이런 뜻도 있고 ‘인간을 망하게 한다’ 이런 뜻도 있고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어쨌든 네피림이라는 것은 ‘인간 세계의 지배자’ 또는 ‘악마의 육신화’. 악마는 영적 아닙니까. 영적 존재가 육신으로 만들어지면 나오는 것이 네피림이 되어서 거인이니까 인간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그런 존재를 하나님께서 허락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골리앗. 골리앗과 누구와의 싸움입니까? 골리앗과 다윗. 그것도 어른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과의 싸움이에요. 아낙 자손이 살았던 가드 지방의 민족이 블레셋이거든요. 골리앗은 이 블레셋 족속이니까 그러한 유전적 요인이 남아있어서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쓰시는 거예요.
이 골리앗 키가 3m가 넘어요. 하여튼 3m 가까이 돼요. 측량 단위가 지금하고 다르니까. 하여튼 최소한 2m 75cm~3m 5cm, 10cm 이상 돼요. 덩치 자체만 해도 거대합니다.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다윗만 빼놓고 나머지 모두, 사울 왕과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은 쪽도 못 썼죠. 기죽었어요. 덩치가 너무 크니까.
그래서 전쟁을 할 때, 덩치가 에너지바라 했잖아요, 에너지가 나오는 인간 신체 둘이 붙을 때 ‘신체 조건이 이미 승패를 결정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동의하고 있는 겁니다. ‘완력으로 전쟁할 때 힘센 쪽이 힘 약한 쪽을 패배시키고 승리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이 반드시 그렇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믿고 안 믿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거예요.
그럼 소년 다윗은 키가 얼마쯤 되겠습니까? 키 커봐야 160cm. 그것도 막내. 막내 아들이니까 많이 쳐줘야 160. 골리앗은 3m 20cm. 그럼 반이죠, 반. 골리앗 덩치의 1/2. 키가 1/2이니까 3차원 입장에서 에너지 총합을 비교하면 거의 1/8까지 차이나죠. 3차원이니까 복잡한 계산입니다만 표면적도 많고 입체가 되면 단순히 2배가 되는 게 아니고 2의 세제곱이 되니까 8배가 되는 거죠.
힘으로 1/8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싸움에서 둘이 그것도 일대 일로 붙었다. 누가 이기겠어요? 골리앗이 이기겠습니까, 다윗이 이기겠습니까? 골리앗이 이기죠. 게다가 다윗은 무장이 안 되어 있고, 골리앗은 덩치도 클뿐더러 무장을 했죠. 갑옷을 입고 있고 골리앗에게는 큰 칼이 있었고. 다윗은 칼이 없어요. 단번에 상대방의 목숨을 끊어낼 그런 무기가 없습니다.
그 연출을 누가 했느냐? 하나님이 그런 연출을 한 거죠. ‘누가 이기겠느냐?’ 그걸 물으신 게 아니고 ‘이 연출된 전쟁은 누구에 의해 연출된 전쟁이냐?’. 다윗은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했고, 다른 인간들은 하나님 빼놓고 “인간 대 인간의 전쟁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해석 차이였습니다, 결국은. 해석이 잘못된 겁니다. 해석이 잘못됐는데 그럼 제대로 해석을 해봅시다.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 골리앗과 다윗과의 전쟁에서 골리앗은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는, 이해가 되는, 수용이 되는 전쟁의 수단을 동원했다. 인간에게 납득되는 전쟁의 수단을 동원했다는 말은 골리앗에게 있어서 ‘인간 전쟁 외에 하나님 전쟁은 없다’ 이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든 전쟁은 남들과의 전쟁이지, 하나님과의 전쟁은 아니다.’ 이렇게 봤고,
소년 다윗은 ‘이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비-율법과의 전쟁이다. 하나님의 법이 있는 쪽과 없는 쪽의 전쟁이다.’ 다윗은 전쟁을 이렇게 간단하게 봤어요. 다윗이 이 전쟁에 대해서 율법이 있는 쪽과 율법이 없는 쪽의 전쟁이라고 이렇게 가뿐하게 정리된 이유가 다윗은 뭘 믿느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본인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율법 중에 이야기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고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행했던 할례, 이 할례는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에서 나왔죠. 그럼 할례를 장착한 민족과 할례가 빠져있는 민족과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율법이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겁니다. 다윗은 율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종에 불과한 거예요.
그럼 자기 존재가 뭐로 바뀌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현상(現象, phenomenon)’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존재는 현상을 나타내는데 그렇게 되는 것을 어려운 말로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말씀이 문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실제로 구성한다는 것을 ‘재현’, 거기에 나타나는 것을 ‘현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성도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다. 세상사람 보기에는 뭘 찍어요? 성도라는 신체를 찍는 걸로 보이죠. 그런데 성도 본인은 말씀의 열매, 말씀의 결과, 말씀이 만들어낸 현상을 사진이 찍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은 나중에 MRI찍고 단층 촬영할 때 마음가짐을 그렇게 잡수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이거 암인데. 도대체 내가 이거 사나, 죽나?’ 이렇게 걱정할 것이 아니고, 인간들은 그걸 암이라 하는데 주님께서는 암이고 뭐고 간에 인간들이 어떻게 규정했건 관계없이 지금 이 모습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착착 차질 없이 진행되어 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음의 현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게 신앙인이죠. 신앙인이라 하는 것은 뭡니까? 이 현실에 대해서 자기를 자꾸 빼는 거예요. 모든 의미가 자기한테 오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소환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내가 어떻게 정신이 멍하든지 맥이 빠졌든지 이건 문제가 됩니까, 안 됩니까? 문제가 안 되죠.
내가 펄펄 살아있고 건강하고 생기발랄하고, 전에 설교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항상 명랑하고 그것은 내가 명랑하고 생기발랄하고 활기찬 것은 타인을 의식해서 ‘우리 한판 붙을까?’ 이거라니까요. 생기발랄한 젊은 사람들이 눈치만 봐도 ‘너 나한테 시비거나?’ 해가지고 길거리에서 싸움 벌이고 하잖아요. 뭐 붙으면 무조건 시비 걸어서 ‘네가 세나, 내가 세나’ 견주는 것처럼.
그것은 본인이 내 인생을 내가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으스대고 싶은 거예요. 뽐내고 싶은 거예요. 뭘 뽐내는데? 골리앗 되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가 여기 있다, 존재죠. 내가 있다. 그것은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남 앞에 내세우는 거예요. 인간 전쟁은 존재와 나보다 못한 나약한 존재와의 싸움을 통해서 내가 이렇게 승리한다는 자기 가치를 유지하려는 그런 심보, 그 심보가 계속해서 이어져온 겁니다. 인간에게.
다시 홍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홍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물속에 잠기게 했습니다. 심지어 1.은혜를 받았고, 심지어 하나님 보시기에 2.의인이라 하고, 하나님과 함께 3.동행한 이 노아 가족마저 뭐를 떠나야 돼요? 자기가 가꿔왔던 자기의 부동산, 채소밭, 농토를 물에 양도하고 자기는 떠야 되겠죠. 그럼 노아 입장에서는 뭐가 없어요? ‘나를 위한 거주지 상실’이죠. 터전 상실. 내가 여기 있을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겁니다. 있을 곳이 없어요.
그럼 노아는 어디에 있는가? 이게 어려운데요. 그럼 노아는 홍수 때 어디 가 있느냐? 노아+7명=합쳐서 8명이죠, 그 노아 식구는 어디 있는가? 하늘과 땅 사이 어디쯤, 바로 여기에 노아의 거주지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과 땅 사이에. 그러나 인간들은 홍수 이전에는 뭐가 없어요? 하나님은 없고 하늘과 땅 사이는 그냥 접해있다고 본 거죠. 그냥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높은 곳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땅에 살고 있고, 이게 전부에요.
그런데 홍수가 남으로써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중간 거주지가 있다는 거예요. 이 중간 거주지를 뭐라고 하느냐?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젠 아시겠죠? 뭡니까? 방주죠. 방주 안은 미어터졌어요. 짐승까지 울어대고 밤잠도 못 자니까. 방주에 짐승까지 들어가니까 냄새도 나고요.
그러니까 나중에 중간 지점인 방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의 공간인 방주에 있는 것을 방주가 토하듯이 훅 쏟아내죠. 그래서 나중에 땅에 물이 마를 때 방주 속엣 것이 땅의 내용을 채운다. 방주 안에 있던 것이 땅을 채워버리면 방주라는 언약이 방주 형식에서 땅의 형식으로, 언약의 형식으로 바뀌어서 땅의 원칙으로, 이런 홍수 이후 땅의 새로운 불변의 원칙으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죠.
그러면 다시 봅시다. 홍수는 무엇 때문에 생겼습니까? 악마의 신체화. 하늘의 천사와 사람의 딸이 혼인해서 생긴 자식이 네피림이잖아요. 네피림. 영적인 존재가 육체가 될 때 신체화 되죠. 신체화 될 때 신체만 신체가 아니고 정신 안에는 악마의 정신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악마의 정신이 네피림, 네피림은 거인입니다, giant 거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네피림에게 지배받는 모든 인간은 이 정신에 꼼짝 마라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대들 사람도 없어요. 네피림이 제일 위에 있으니까. 여기 이 정신에 그들은 그대로 종속되죠. 지배받는다는 것은 군소리 못하고 끽소리 못하고 그냥 종속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 세계의 진리로 구축되죠. 진리 체제가 되는 겁니다. ‘힘을 가진 자가 승자가 된다. 권력이 바뀌면 역사도 바뀐다.’ 뭐 그런 뜻이죠. 힘을 가진 자가 승자가 된다, 이것은 이 땅에서 만고의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걸로 굳히기 들어간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모든 인간이 납득을 하고 동의를 하고 심지어 학교에서 사회에서 이 원칙이 그대로 완전히 퍼져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이의 걸거나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느냐? 지금껏 나와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힘의 우위에 의해서 질서 잡혀 있다. 그리고 힘을 얻으려면 뭐하면 돼요?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영국의 철학자, 정치인)이 이야기했죠. 무엇이 힘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니까 공부나 좀 해라. 네가 힘없이는 못 사는데 힘 가지려면 뭐하면 돼요? 기술이든 뭐든 배워야 되죠.
그걸 배워야 ‘야, 너 많이 아네. 너 우리 팀장 해라.’ 이러면 벌써 뭘 가졌어요? 힘을 가진 자에요. 이게 바로 세상살이 아닙니까. 세상을 산다면서 세상을 사는 원칙 정도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이미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우리 몸에 배어 있어요. ‘힘. 힘을 모으자. 힘을 모으자.’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사랑 없이는 못 산다 하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얼추 힘을 넉넉히 가졌기 때문에 이제 넉넉하게 힘은 가졌고 뭐가 필요하냐? ‘좀 외롭네. 이럴 때는 말벗이 필요하네.’ 그때 ‘사랑 없이는 못 살아’가 등장하는 경우이고요.
그리고 가질 힘은 안 보이고 힘으로서는 도저히 못 살겠고 뭐 달리 사는 보람 없을까? 힘없어도 나를 좀 예뻐해주고 사랑해주는 그런 힘이 있으면 좋겠다. 그럴 때 나오는 것이 바로 ‘믿습니다’ 종교가 나오는 거예요. 성당, 기독교, 천주교, 불교. ‘나 약합니다. 나 보잘 것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한테 사기 쳐서 나는 완전히 거지 되었습니다. 이제 믿을 것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믿씁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믿습니다. 도와주세요.’ 그게 바로 종교잖아요, 종교. 그게 누구 생각이라고요? 어디서 나온 생각입니까? 바로 네피림에서. 네피림이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마귀가 종교까지 만들었다. 기독교, 천주교를 만들었다. 불교를 만들었고 이슬람교를 만들었어요. 못 빠져나오죠. 어느 인간도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네피림에 대해 설명이 되었겠죠.
그 다음 24페이지 [9번 질문. 요엘서의 예언 성취] 이 요엘서의 예언 성취 9번 문제 다음에 10번 문제로 연거푸 저한테 질문을 한 거예요. 그래서 27페이지까지 질문, 답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요엘서의 예언이 무슨 예언인데 이렇게 궁금해 했고 답변했을까요? 9번 질문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질문>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욜 2:28-30).]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무슨 뜻이냐는 거예요. 어때요? 질문할 만해서 질문한 거예요? ‘뭐 이런 것가지고 질문하나?’ 이런 마음입니까, 어떤 마음입니까? 이건 뭐 질문 안 해도 다 알잖아,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들이 답변해보시든지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딱 한 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좀 이따 많이 길게 하겠지만 먼저 한 마디로 말씀드리겠어요.
‘세상은 은유다’. 같은 말로 ‘세상은 비유다’. 같은 말로 ‘세상은 환상이다’. 같은 말로 ‘모든 세상은 허상이다’. 세상은 허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히브리서 11장 말씀대로 ‘보이는 것은 허상이다’. 히브리서 11장 1-3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조금 더 이야기하면 ‘보이는 허상이라는 것을 디딤돌로 해서 근거로 해서 보이지 않는 실상이 나온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보이는 허상을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라 했죠. 모든 것은 감추어진 것에 대한 나타난 현상이에요.
그런데 방금 질문하신 분도 그렇고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여기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거예요. 불과 연기는 연결이 잘 돼요. 왜? 우리가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불난 뒤에 연기 나잖아요. 그런데 피가 거기에 왜 섞이냐? 불과 피가 과연 섞일 개념이냐? 섞일 개념이 아니잖아요. 불은 연기와 연결되는 것이 이해되는데 피가 거기 왜 끼냐? 낄 자리가 아닌데 왜 끼냐 이 말이죠.
어떤 개념을 조합할 때는 연관성이 있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과가 있다고 하면, 사과가 있을 때 인간은 여기서 ‘어, 어.’ 이렇게 말 안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과’라는 말을 해요, 사과. 사과라는 말을 할 때는 여기에 대응되는 사과라는 진짜 빨갛게 생긴 그런 단단한 열매가 실제 있어줘야 이 ‘사과’라는 말 자체에 의미가 생긴다고요. 여기에 대응되는 실제 사과가 있을 때 하는 거죠. 사과가 없는데 ‘사과’라는 말을 해버리면 ‘사과가 뭐고?’ 이렇게 돼요. 실제 없잖아요.
그래서 인간들은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고 있어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런 생각이 사람에 대해서는 안 맞아요. 어떤 사람이 있을 때 영어로 ‘You’, ‘너’라고 하는 거예요. 너가 뭔데? 그리고 이 사람 말고 다른 사람에게 또 ‘너’라고 해요. 영어로 You. 그럼 나는 I. I가 뭔데? I가 어디서 나왔는데요? You가 어디서 나왔어요?
I가 You라고 하는 것은 ‘너’가 있을 때 ‘나’가 규정이 돼요. 혼자 있을 때 I가 없어요. 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타인과 차별화되면서 나라는 것을 나중에 후차적으로 내가 규정한다고요, 후차적으로. 만약에 나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말을 잊어버려요. 이 땅에 자기가 혼자라면 할 말이 없어요.
우선 TV 끄고 휴대폰 다 박살내고 산속에 혼자 있으면서 도 닦는 거예요. 그런데 앞에 뭐가 “짹짹”하고 새가 날아오니까 “새야, 새야, 너는…” 또 ‘너’가 나오는 거예요. 아니, 새 없는 곳으로 가야지. 새 없는 곳으로. 새 있으면 또 ‘너’가 생겨서 안 돼.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해서 티베트 불교나 중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살아야 돼요.
어떤 부처의 제자가 부처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부처님, 고기는 먹지 말라 하면서 식물은 왜 먹습니까?” 이런 질문을 했다고요. 질문을 들은 부처가 난감한 거예요. 식물도 자라나니까 생명이잖아요. 동물은 펄펄 뛰니까 생명이고, 식물은 펄펄 뛰진 않지만 가만히 있으면서 자라나잖아요. 변화가 일어나잖아요. 그것도 생명이 있잖아요. 그럼 생명을 먹으면 안 되죠.
부처가 이런 구차한,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했습니다. 동물은 지가 지 지키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지만 식물은 우리에게 자기를 비워서 ‘잡수세요’하고 자기를 드렸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의 마음으로 받아줘서 맛있게 밀 빻고 보리 빻아 먹는다는 거예요. 아이고 참,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불교에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있어요. 불교에 무아(無我)사상이라는 게 있거든요. 자아가 없다는 사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질문했어요. “자아는 없는데 누가 윤회합니까?” 이런 질문했다고요. 또 답변이 궁한 거예요. 내가 없는데 내가 죽었다가 또 살고,… 내가 없는데 그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답변이 뭐냐 하면 ‘자아가 없다는 게 아니고 너와 나의 경계가 없다는 뜻이야.’ 뭐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답변한 지도 무슨 소린지 몰라요. 하여튼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나와 너의 경계가 없다는 거예요. 나와 너의 경계가 없다면 나와 너의 경계가 없다는 말 자체도 없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 생각을 왜 해요, 그래. 생각해보세요. ‘나와 너의 경계가 없다. 따라서 나를 비운다.’ 나를 비운다 할 때 이미 뭘 챙기겠다는 거예요? 나를 못 놓겠다는 자기 심보를 드러낸 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말씀이 맞아요. 눈에 보이는 것은, 한번 적어볼게요, 일시적이다. 우연적이다. 한시적이다. 전부다 이것은 사건에 불과하다. 필연이 아니고 우연적이고 한시적이고 일시적이고 그냥 사건의 연속이다. 또는 사건의 다발이다. 이걸 합치면 인간은 그냥 ‘변화하는 것’이다.
이걸 양자물리학에서는 뭐라 합니까? ‘입자의 원형은 입자가 아니고 파동이다. 파동이 압축되면 입자가 되고 입자가 늙으면 다시 파동으로 돌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결에 불과하다.’ 이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백날 이야기해봐야 뭐가 안 나옵니까? 실상은 없죠.
아까 골리앗하고 다윗이 싸울 때 골리앗을 어떻게 봤습니까? 골리앗을 여기에 적용시켜봅시다. 일시적 존재다. 우연한 것이다. 한시적이다. 임시적이다. 곧 죽을 인간인데, 뭐. 사건은 누가 일으키고? 하나님이 일으키고. 그다음 같은 말, 이렇게 연결된 것은 사건의 다발이다.
그럼 다윗에게 실상은 뭐가 실상입니까? 이 자체가 하나의 현상이라면 실상은 누가 실상이에요? 누가 살아있다? 하나님이라 하지 말고 아까 이야기한 대로 ‘율법’. 무슨 율법? 할례가 살아있다. 할례를 행하는 율법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예요. 일시적이고 한시적이고 우연적이고 사건인 이 모든 것이 말씀의 세계가 파동 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현재 우리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어린 다윗이지만 그걸 벌써 믿었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힘 조절 잘해서 저 인간을 죽이겠다.’ 이런 게 없고, 그냥 하나님께 맡긴 거예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우연적으로 주신 거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돌팔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할 문제이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걸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성도란 예측함이 소용없고 기대함이 소용없음을 아는 자’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예측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인간은 뭐든 예측하게 되어 있어요. ‘기대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것이 아무런 소용없다는 말이에요. 이게 안 된다는 뜻이 아니고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 허상이니까. 환상이니까.
요셉에 있어서 진짜 어려운 점은 뭐냐 하면 요셉은 현실이 곧 꿈이고 꿈이 바로 현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거예요. 꿈과 현실이 서로 대비되는 세계를, 인간은 잘못 반대로 알고 있다는 걸 보여준 자가 요셉이었어요. 아버지의 언약, 야곱 언약에 이어서 요셉은 이 두 가지 사실이 뒤바뀌어져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현실은 없다’가 아니라 뭐가 있다는 거예요? 숨어있는 현실이 꿈이고 나타난 현실은 현실이다. 숨어있는 꿈을 시편 105편에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했어요. 시편 105편 19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예를 들어서 케이크가 두 종류밖에 없다고 합시다. 치즈케이크가 있고 초코케이크가 있다. 사람들이 많이 먹는 부분은 뭡니까? 겉에 코팅된 거예요, 아니면 빵입니까? 빵이죠. 카스테라 빵이잖아요. 치즈, 초코는 겉에 코팅한 거잖아요.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어디에 집중하느냐 하면 이 코팅 입히는 데에 자기 전력을 다 소비합니다. ‘내가 직장생활 얼마나 했고 이제는 퇴직해서 12월에 회개하자. 지금 놀고 있다.’ 자기 연출하는 것, 꾸미는 것, 여기다가 바짝 신경을 쓰지, 어떤 코팅을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기반이잖아요. 바닥. 케이크는 빵이 맛있어야 되죠. 토핑보다 빵이 맛있어야 되죠.
인간의 기반은 말씀입니다. 인간은 말씀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어야 했고 그리고 죽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태어남의 기쁨도 죽음의 쓸쓸함도 인간이 기분따라 사는 것처럼 인간의 기분에 불과하지, 기분은 마치 꿈과 같아서 허망한 거고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따로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제 요엘서 설명 들어가보겠습니다. 베드로 설교에요. 베드로가 이 설교를 할 때, 베드로는 남들 보기에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이죠. 노아가 혼자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베드로도 오순절 날 성령과 함께 있습니다. 성령은 누구의 영이냐 하면 예수님의 영이에요. 예수님의 영이 성령 되었다는 말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난 게 아니고 죽음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게 성령이에요.
죽어있는 분이 죽음으로 끝난 게 아니고, 죽음을 품고 죽음을 떠안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 인간의 세계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세계, 이 두 개의 세계가 같이 있는 자가 누구냐? 성도에요. 베드로는 성도니까 성령이 함께 있을 때 두 개의 세계가 같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은 이미 죽어서 활동하는 죽음의 대리자로서 증거자로서 베드로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 설교라 하지 말고 베드로와 함께 있는 성령, 죽으신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서 베드로의 몸을 통해서 설교한다고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 이것은 저를 비롯해서 모든 설교자가 다 알아야 돼요. 설교는 하나님께서 할 말이 있을 때만 해야 돼요. 설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을 때만 해야 돼요. 설교는 뭐는 안 된다? 인간 대 인간으로는 설교하면 안돼요. 이것은 백날 해봐야 누구 이야기입니까? 사람을 상대하는 같은 인간인 본인이 설교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주시지 아니하면 설교하면 안 되죠. 주께서 주지도 않는데 설교해버리면 이것은 누구를 나타내요? 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은 안돼요. 왜냐하면 나의 존재는 아직 안 죽었잖아요. 죽으신 분이 살아있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설교여야지, 지금 안 죽고 있는 내가 이야기해버리면 이건 내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나의 서사가 돼요. 나의 내러티브(narrative), 나의 말이 된다고요.
나의 말이 되면, 이것은 설교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내 세력권을 확보하는 빌미가 돼요. ‘내 말이 먹히는 사람은 몇 명일까? 유튜브 내 설교 듣는 사람이 몇 명일까?’ 이것은 나의 세력권이 되는 거죠. 마땅히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주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있는 인간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살릴 수가 없어요. 할 말도 없는데 설교단에 섰다? 그거 왜 서죠? 자기가 할 말은 6분인데 20분 한다고 채우는 게 아니고 6분만 하고 내려와야죠, 누구처럼.
또 어느 교회 가서 설교하고 왔는데 허리띠 잡아당기더라. 당겨져야죠. ‘우리는 사람 말 듣고 싶지,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을까 지금 그 이야기 듣고 싶지, ‘너는 살아도 소용없어. 넌 죽은 자야!’ 그 이야기는 듣기 싫다. 내려와. 안 내려와?’ 하고는 허리띠 잡은 거죠. 그때 허리띠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바지 내려갈 뻔했겠어요.
설교 들을 때 제일 답답한 게 뭐냐 하면 주님의 말로 느껴지지도 않는데 계속 하는 것, 이거 환장합니다. 안 볼란다. 안 들을란다. 설교를 때우기 위해서 하는 설교. 이러면 안돼요. ‘주께서 할 말이 있답니다.’라는 그런 마음자세로 해야 되죠. 이것도 흉내내서 “자, 이제부터 제가 아니고요, 주께서 할 말이 있답니다. 시작합시다.” 이런다고 주께서 또 속아 넘어갈 분이 아니잖아요. “너 누구고?”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 너 모른다.”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렇다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뭐할 능력이 없습니까? 이것을 해석하거나 설명할 자격이 없습니다. 해석하거나 설명할 자격이 없어요, 말씀에 대해서. 왜냐하면 설교하시는 분인 주님이 그 사람 마음속에 성령을 보내서 그 사람의 형편에 맞도록 알아서 해설할 뿐이지, 본인이 남을 구원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데 본인이 어떻게 한 사람을 건져보겠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주의 일에 방해자 되죠. 방해되는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설교자는 뭐하고 삽니까?” 이렇게 물으면 “네가 언제 산 적이 있어? 벌써 몇 년 전에 넌 죽었어야 돼. 너 몇 년 전에 죽었어야 된다는 걸 몰라? 15년 전에 죽었어야 돼.” “이제 나는 교직에서 퇴직했습니다.” “10년 전에 벌써 교통사고 나서 죽어도 마땅해.” 왜 자꾸 퇴직이라는 자기 서사구조를 아직도 쥐고 있느냔 말이죠.
『밥상머리』라는 책 제목을 약간은 고치고 싶어요. 『무덤 가에서』. 아니면『나의 무덤에서』. 그냥 나에다가 잔디밭을 입히세요, 둥그렇게. 잔디밭. 경주에 가면 그런 유물 많지 않습니까. 토함산 같은 데 가면 있잖아요. 자기 앞에 자기 무덤을 만들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무덤 앞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 안에서 자기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죠. 자기 무덤만 바라보겠어요, 남의 무덤도 바라보겠어요? 남 무덤도 바라보는 거예요.
회사 취직했다. 사장님이 와서 “아이고, 너 몇 살이고?” “18살입니다.” “그래?” “일도 잘하고 얼굴도 잘 생겼네.” 이럴 때 사장님 얼굴이 보인다 하지 말고 무덤 속에 있는 사장님으로 봐요. 자기 무덤을 끌고 있는.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스크루지. 스크루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1843년에 출간된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인데, 그 소설에 보면 스크루지 영감에게 밥이라는 자기 직원이 있어요. 직원이 춥다고 “우리도 난로 피우면 되지 않습니까?” 하니까 스크루지 영감이 바른 소리를 해요. “젊은 것이 이 나이에 춥다고 난로 때? 나 봐. 늙은 나도 견디잖아. 어디서 젊은 것이 그걸 못 참고. 일하기 싫어가지고 난로 피워달라고? 너 집에 가서 푹 쉴래, 그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옛날에 스크루지 이야기가 우리 교과서에 나왔을 때는 무조건 스크루지가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스크루지 말은 다 맞는 말이에요. 어느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 맞는 이야기에요. 심지어 스크루지에게 자선 모금하는 사람이 와서 “크리스마스인데 스크루지 할아버지, 기금 좀 내주세요.” 할 때 스크루지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이거는 나라가 할 문제인데 왜 나보고 이야기하느냐?”라고 했어요. 나라의 복지 기금 있잖아요. 예산이 얼마입니까? 엄청나잖아요. 나라에서 할 것을 왜 개인에게 뒤집어 씌우냔 말이죠. 그 말이 틀려요, 맞아요? 맞아요. 맞잖아요. 나라에서 투표해서 국회의원 세우고 대통령 세울 때는 귀찮게 돈 달라고 손 벌리러 온 어려운 사람 제거하라고, 줄이라고 줬잖아요. 그 말이 맞잖아요.
또 조카 프레드가 와서 “삼촌, 오늘 저녁에는 우리 집에 와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죠.” 스크루지 영감이 하는 말이, “네가 한번 봐라. 이 회사 운영이 놀면서 되는 줄 알아? 크리스마스 놀고 뭐 놀고 다 놀면 다른 경쟁사한테 이길 것 같아? 네가 회사 운영을 안 해보니 내 사정을 몰라서 그래. 지금 남보다 하루 더 쉬면 그만큼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거 몰라? 이게 할 일이 없으니까 파티나 열려고 하고.” 그것도 또 맞는 말이고.
그런데 그 스크루지 영감이 밤에 잠을 자는데 스크루지 동업자 말리가 꿈에 나타났어요. 이미 7년 전에 죽은 동업자가 쇠사슬을 끌고 오니까 스크루지 영감이 또 바른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야, 무거운데 쇠사슬을 왜 끌고 와? 그냥 몸만 와. 쇠사슬을 왜 끌고 와?” 그러니까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내 평생의 짐이 이 쇠사슬이었다. 내가 너하고 동업하면서 벌었던 돈이 나를 더욱 더 짓누르는 쇠사슬일 줄 난 꿈에도 몰랐다. 오늘 밤 너에게 세 명의 유령이 찾아올 것이다.” 하고는 휙 사라졌어요.
보니까 세 명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과거의 자기 모습, 과거의 자기 동영상. 그리고 현재의 자기 모습. 그리고 세 번째는 미래의 자기 모습인데 미래의 모습은 뭐냐? 자기 무덤 앞에 자기가 서 있으면서 누가 또 죽었나 보니까 거기에 ‘스크루지 사망하다’ 비석이 세워져 있더란 말이죠. 그때야 스크루지가 비로소 내가 죽었는데 내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그것에 충격을 받아서 회개했다는 거예요.
내가 보기엔 찰스 디킨스가 거기서 오류를 일으킨 거예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살았으면 죽을 때도 깔끔하게 남자답게 쿨하게 죽지, 이제 와서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쓸쓸해서 나는 이젠 새 사람 될란다.’ 그래서 그 유령 붙들고 하는 말이 “유령님이여, 이제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이렇게 꿈이 끝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개과천선해서 그 다음부턴 잘 알죠? 이웃사람 도와주고 구제헌금 내고 조카 집에 가서 조카와 같이 잘 지내고 직원은 월급도 올려주고 난로 뜨겁게 확 피워주고 잘해줬다는 이야기.
내가 보기엔 끝이 안 좋아요, 끝이! 왜 그렇게… 자기 위주라면 일관되어야죠. 누가 소중해요? 내가 소중하잖아요. 끝까지 가죠, 왜? 끝까지 가지. 유령 그거 뭔데? 껍데기인데. 기껏 해봐야 유령인데.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곧 죽은 유령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살았다, 살았다 하면서도 결국은 모든 사건의 다발이 우리를 나의 죽음 속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이 당연하고 합당한 사실을 이제는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 내 존재 의미는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허상 같은 존재로서 주의 말씀만 드러내는 증인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