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진지함

아빠와 함께 2026. 6. 28. 12:54

광주강의20260626a 이사야 29장 10절(진지함)-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신구약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63페이지, [33.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 어떤 분이 질문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하나님과 아들 사이,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 이것이 언약으로 구성된다는데 보다 자세한 설명은… 하나님이 언약을 설명하면서 말로 ‘언약한다’ 이러면 끝날 문제를 왜 등장인물을 자꾸 등장시키느냔 말이죠.

그것은 말씀이 장차 육신이 되어야 되기 때문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주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임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지 아니하면 이 모임은 아무 소용없어요. 인간 대 인간이 계모임해서 뭐하려고요. 월드컵해서 1대 0, 그게 뭐 대단하다고. 그것은 생명이 아니에요.

생명은 어디 있느냐 하면요, 언약이 출현할 때 있어요. 생명은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언약이 출현하면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이라는 것이 인간이 조정하는 게 아니에요. 언약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언약을 정해놓고 창세전에 “아들, 네가 해라.” 아들에게 모든 걸 다 맡겼단 말이죠.

그럼 아들이 오기 전에 언약은 누구 이름으로 오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으로 언약이 왔고 -그전에 노아 언약 있지만- 그다음에 모세 언약, 다윗 언약,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모든 걸 다 마감할 때 예수님이 마지막 언약, 또는 새 언약으로 오신 겁니다.

인간들 모임에는 죽음밖에 없어요.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의 모임에 언약이 끼어들게 되면 여기서… 기존에 인간 대 인간의 모임, 또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인간과 인간의 혈육적 관계가 안에 베이스로 깔려 있어요. 기본이에요. 이걸 두 자로 하면 ‘가족’ 관계 아닙니까. 친구는 만났다 헤어지면 되지만, 친구 만나고 그다음에 어디로 가요? 자기 집으로 가죠. 집에 가면 누가 있습니까? 가족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가족은 떠나질 못하죠. 가족은 떠나지를 못해요.

그래서 언약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해야 되겠어요? 인간은 친구 만났다가 헤어지면 남이지만, 가족은 헤어질 수가 없어요. 그 가족에 뭐가 끼어들겠습니까? 언약이 끼어들게 되면 인간의 가족 관계를 능가하는… 인간은 혈육, 가족을 못 떠납니다. 못 떠나니까 평생 동안 가족한테 매여 살잖아요. 발목 잡혀 산다 이 말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데 그것을 능가하는 관계, 가족 관계 말고 능가하는 관계에서 생명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가족 관계를 능가 못한다는 말은 무엇이 없다는 뜻이에요? 생명이 없고 죽음 그대로 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인 마리아와 요셉이 그 뒤에 자식을 낳아요. 우리 생각하기에는 ‘예수님 떠나보내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일을 하러 보내고 허전하니까 마리아와 요셉도 이제 자기 가족을 일구려고 애를 줄줄이 낳았겠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생각을 당연히 해야 되죠.

그런데 마태복음 12장에서 그들 가족, 예수님 떠나보내고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나온 혈육적 가족과 예수님이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관련성 있느냐? 없어요. 없고, 어떤 때에 활용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으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가족 왔습니다. 어머니도 왔고 동생들도 왔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아주 섭섭한 이야기를 해요. 듣는 동생, 듣는 부모가 기분 나쁘게 들을 수도 있는데요. ‘그것도 가족이지만 하늘나라 가족이 있습니다.’하고 좋게 좋게, 좋게 가면 안 됩니까? 말을 해도. 이렇게 해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46-50절)

모친이 있는데. 모친이 뒤에 있어요. “누가 내 형제고 누가 내 모친인데?” ‘누가 구라를 떨고 있어?’ 이런 뜻이란 말이죠.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가족이고 누가 내 형젠데? 아니라는 거예요. 나를 통해서 주어진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가족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주러 온 것이지, 현재 죽어가고 있는 걸 생명이라고 그걸 인정하러 오신 게 아니에요. 인간은 뭔가 오해하고 있어요. 살아있으니까 생명이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거부당하는 생명이에요.

인간이 살아있어 친구 만났다. 카페에서 만날 수 있죠. “오? 살아있네!” “너도 살아있네!”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어있는 거예요, 둘 다. 집에 가면 가족들 있지만 다 죽어있는 가족들이에요. 인간의 모임에서는 언약이 없으면 인간끼리 아무리 같이 살아도 거기엔 생명이 없습니다. 교회 모임도 마찬가지고. 소소한 모임도 마찬가지고.

언약이 현실화처럼 드러날 때 그것은 생명이 주어지는 모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언약만 외치면 생명이 주어지느냐? 아닙니다. 어떻게 주어지느냐? ‘우연’이에요. 우연의 반대말이 필연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육들은 자기가 행한 것을 필연이라고 간주해요.

수요 설교에서, 자기의 선왕을 죽이기 위해서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셨잖아요.(왕하 8:15) 그 행위를 생각해봅시다. 이불 있다. 이불 가져왔다. 그다음에 물 준비해야죠. 물 준비했다. 이불을 물에 집어넣었다. 솜이 물에 젖어 촉촉하다. 이걸 영차 영차 들고 선왕이 자고 있는데 가서 “잘 주무십니까?” 안부 전하고는 자고 있구나, 하고 이불 덮어서 죽였다.

이것은 누가 봐도 필연이죠. 왜? 내가 했으니까. 그런데 그 필연적이라는 인식 때문에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내가 하는 일이 우연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거예요. 가정주부들 평생 동안 자식 키우고 돈벌이하고 살림한다고 애먹잖아요. 그런데 그거 하면서 ‘이거는 우연이야, 이거는 우연이야, 이거는 우연이야.’ 그렇게 생각합니까? ‘내가 야무지게 밥 먹여줘야 애들이 공부를 잘해서 나중에 살지.’

이게 뭐에요? 전부다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이거는 야무지게,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거는 내가 해야 된다는 그 야무짐. 모든 원인은 나에게서 출발한다는 그 야무짐. 이거는 우연이 아니고 뭐에요? 항상 필연적 사고방식에 있죠. 그런데 생명은 우연으로 옵니다. 우연.

그것을 수요일에 ‘사후 효과’라 했어요. 일 터지고 나니까, 이건 벌써 사전에 예약됐었던 거예요. 일 터지고 나니까. ‘없는 데서 일하면 생긴다.’는 것은 우리 인간 생각이고, 일 터지고 난 뒤에 나중에 보니까 ‘이것은 내가 이래야만 했구나. 이렇게 되어야만 했구나.’ 어떤 것 하나 필연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게 우연이었다. 내가 속 쓰려서 밥도 못 먹었다, 그것도 우연이었다. 모든 건 우연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발걸음도 주께서 세시고 머리카락도 헤아린다 했잖아요. 참새도 주께서 그렇게 다 지켜보는데 하물며 너희를 안 지켜줄까. 우연적으로 자꾸 지켜준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왜 모르는가? 본인의 행함을 필연으로 간주하니까 자꾸 우연이 막히는 거예요, 우연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자꾸 막히는 거예요. 인간은 그렇게 막히겠지만 그럼에도 우연은 인간의 필연적 생각에 막힘이 없이 그냥 쳐들어오는 거죠. 쳐들어와서 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생명 주세요.’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우리에게도 영생 주세요.’ 하잖아요. 언약은 그렇게 주는 게 아니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언약이 이동하기 때문에 우리를 죽음에 보냅니다. 죽음 자리에. 혈육의 한계성, 소용없음의 자리.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분명히 우연으로 준 거거든요. 이스마엘은 관계해서 낳았지만 이삭은 천사의 약속 때문에 낳았잖아요. 이삭을 그렇게 낳았지만 이미 하나의 애가 생긴 이상은 한 가족처럼 그렇게 생각했죠. 하나님께서 주신 가족으로 생각했다 이 말입니다.

과연 아브라함 본인이 이것은 혈육으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의 약속이 우리 가정에 생명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지 주께서 시험하기 위해서 혈육관계, 아버지와 아들 관계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시험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 좀 난해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어디가 어려우냐 하면, 생명이 어렵다고 여겨지는데 의외로 이 죽음의 자리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본인이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살아있는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내가, 애들 잘 키우고 있는 내가 일찌감치 죽었다니 앞뒤가 안 맞아요. 이게 말이 안돼요.

말이 안 되니까 ‘나 살았다’ 해버리면, 생명에서 생명으로 가는 이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이건 교회에서 하는 짓이에요. “여러분, 살아있죠? 살아있으면 기도하고 열심히 뭐하세요. 살아있는 피를 통해서 여러분 영생 얻습니다.” 이것은 언약 밖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마귀가 그런 짓을 하게 하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니까요, 죽음에서! 예수님도 죽었다가 사흘 만에 생명 얻었잖아요. 부활됐죠. 그렇죠? 언약은 우리를 죽여 놓고 그다음에 죽은 우리를 언약을 위하여 살려줍니다. 그래놓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해요. 수식어도 없어요, 그냥.

“어떻게 이게 됩니까?”
“믿어라.” 무미건조하게, “그냥 믿어.”
“어떻게?”
“‘어떻게’ 빼고 믿어.”
“어떻게 알고 믿으면 안 됩니까?”
“아니. 그건 믿음이 아니야.”
“‘어떻게’를 빼고 믿는 믿음, 그런 일은 주여, 못합니다.”

사후 효과. 그런데, 어? 믿게 되었네요. 전에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하고 따졌었는데, 이제 믿고 난 뒤에는 누가 따지느냐 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따져요.

“네가 그게 믿어져?”
“믿어져.”
“어떻게?”
“‘어떻게’ 빼고 이야기해.”

이사야 29장 10절을 읽어보세요. 다 같이 읽어볼까요.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주께서 너희에게 잠드  보내셔서, 너희   빠지게 하셨다. 너희 예언자로 너희  구실 못하게 하셨으니, 너희  멀게 하신 것이요, 너희 선견자로  내다보지 못하게 하셨으니, 너희 얼굴 가려서   보게 하신 것이다.

For the Lord has poured over you a spirit of deep sleep, He has shut your eyes?the prophets; And He has covered your heads?the seers.

 

너희가 선지자가 되어야 되고 선지자 같은 눈을 가지고 선견자 같은 머리를 가져야 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했어요? 깊이 잠들게 해버리니까 너희 눈은 선지자도 아니고 선견자도 아니고. 선지자, 선견자 아니면 뭐 그대로 그냥 장사하며 살지. 안돼요. 왜냐 하면 그렇게 되면 11절,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간들로 하여금, 죽은 자로 하여금 철저하게 “쫌 죽어있어!” 여기 ‘쫌’ 들어가야 됩니다. “쫌 죽어있어! 쫌 아는 척 하지 말고.” 하나님의 신이 너희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는 과정 속에 너희를 놓이게 할 거다.

AI한테 물었어요. 신구약 성경을 다 읽게 하고 이 핵심이 뭔지 이야기하라 하니까, AI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이렇게 무식한 소리를 해요.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 한 자로. AI를 누가 만들었겠어요? 인간이 만들었죠. 인간이 AI한테 신약, 구약 성경을 다 읽게 할 때, 여러 가지의 사본들 있잖아요, 사본부터 해서 원문, 인간의 신학체계까지 다 집어넣어서 읽게 했어요. 나오는 결론은 ‘사랑’이라는 거예요.

결국 AI도 육의 한계를 못 벗어납니다. 성경을 신구약 다 읽었으면 나오는 정답은 딱 하나 뭐밖에 없느냐 하면 ‘언약’입니다. 이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언약의 취지는 이사야 29장 10절, 마태복음 13장 14절,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 사도행전 28장,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

하나님 쪽에서는 갈 수 있어도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왔다는 그런 인간은 천국에 절대로 단 한 명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요. 내 힘으로 천국 갔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못하게 만들어요. AI한테 이런 실험을 한 것은 참 고마운 일이에요.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신학자가 아니고, 내가 신학교 출신이 아니라서, 원어를 잘 몰라서 지금은 희미하지만, 원어 공부 하고 열심히 더 복음 공부하면 뭔가 알 거다.’ 이런 기대를 갖잖아요. 그런 기대 자체를 누가 앞당겨서 쫙, 빨리 그걸 해버렸습니까? AI가 했잖아요. 내린 결론은 뭡니까? 사랑이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사랑이죠. 저는 이걸 국어시간이라고 봅니다. 성경의 언약에 대해 모르고 성경이 문자로 되어 있으니까, 문자를 아는 인간이 같은 문자로 된 인간의 작품인 성경에 대해서 그 핵심부분에 도전할 만하다고 여기는 그러한 자들이 옛날부터 생겨났었습니다. 들어나 봤습니까? 그걸 ‘철학’이라 해요, 철학.

여기 튀르키예가 있고 지중해 섬들이 있는데, 튀르키예 에베소 밑에 밀레토스(Μίλητος)라는 도시가 있어요. 밀레토스라는 도시에서 B.C. 6-5세기 경에 신화에 대해서 독립을 선언하고 해방을 선언하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리스 문명이니까 그리스 지역의 신화라 하는 것은 신이 있고, 신이 한 둘이 아니에요, 많은 신이 있는데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 이 대자연이 제물 바친 인간을 특별히 잘 살게 해준다는 그 시대가 ‘신화시대’에요, 신화.

지금은 신화라고 부르지만 그들에겐 무슨 시대겠습니까? 신들의 시대죠, 신들의 시대. 신들의 시대에요.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었어요. 안 믿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신을 믿었어요. 그런데 다신을 안 믿어서 죽었어요. 독배마시고 죽었어요.

‘제사 드리고 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식으로 해서 우리가 혜택 입는다.’ 바벨론부터 해서 인류 역사상 지금껏 쭉 그렇게 해왔는데, 그러지 말고 우리 속에 논증, 또는 논리, 또는 합리성, 이성 이렇게 따질 수 있는 것을 사용해서 신 때려치우고 자연을 통해서 어떻게 연결, 연결이 되는가를 따져보자 하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에 의하면 그 최초의 인물이 탈레스(B.C. 625-547년 경)라는 거예요.

탈레스가 말하길 ‘이 세상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여기서 만물은 자연세계를 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영혼까지 그리고 신까지 포함해서 모든 근원은 물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자연 철학자로서 이 사람이 최초에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이 사람은 상당히 모험적인 사람이고, 대단한 발상이죠. 이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양 잡고 소 잡고, 아휴 그거 돈도 많이 들고 귀찮아. 인간을 완전히 바보로 만드는 것 같아요. 인간 내부에서 따지면 되지 않느냐, 이 자연세계 변화를 통해서. ‘물’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물질이 물질을 만든다는 이런 뜻이죠. 있음이 있음을 만든다, 이렇게 한 겁니다.

그 후에 아낙시만드로스(B.C.610-546)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동의했어요. 그러나 근본재료는 물이 아니고 경계가 없는, 무한에서 모든 게 나왔다고 이야기해요. 신에게 예배드리고 제사 드리고 뭐 향 피우고 무당 여자들 하는 거 딱 보기 싫어. 깨달으면 될 건데. 자기 머리, 이성이 있으니까 이성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이성은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아까 육이라 했죠, 가족 간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예의바름과 배려가 무엇이고 돌봐주는 게 무엇인지 다 알아요. 그걸 아는 윤리적 감각을 계속 키우게 되면 온 우주도 파악이 된다는 거예요. 자기 속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게 있으니까 그걸 썩히면 안 된다는 거죠.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이 무한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경계, 한도를 뜻하는 ‘peras’ 앞에 접두어 ‘a-’(부정의 의미, not, without)를 붙여서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불렀어요. 경계가 없음, 무한, 무제한, 무정량. 이 세상에는 경계가 없는 것이 원형이다. 경계가 없는데 경계가 서서히 생겨서, 너는 코끼리고 너는 낙타고, 이렇게 생겼다는 거예요.

지금 어느 것이 맞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에 정기적으로 조상에게 제사 드리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귀찮습니까. 거기서 탈피하게 된 것은 어느 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신들이 설쳐대는 이 세상에서 감히 인간이 인간의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 철학의 시작이에요. 좀 컸다 이 말이죠. ‘아이구, 좀 컸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너 신이 무섭지 않느냐?’ 이렇게 되잖아요. 신이 안 무섭다는 거예요. 애도 좀 크면 어떻게 됩니까? 막 대들잖아요. 개도 마찬가지겠죠.

처음에 철학자들의 이러한 사실을 두고 후대 현대 철학하는 사람들은 ‘옛날 철학자들은 열등감을 갖고 있다.’라고 해요. 누구에 대한 열등감이겠어요? 신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고 있다. 열등감을 갖고 있으니까 한번 이겨보겠다고 날씨가 그렇게 더운데 악착같이 축구해서 남아공이 한 골 이겼잖아요.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 열등감에서 나온 거예요. 누구도 한국한테 안 된다 했는데 1대 0으로 이겼잖아요. 이게 열등감에서 나온 거예요.

자, 그러면 후배 철학자들 보기에 옛날 선배들은 열등감 때문에, 우리 보기에는 신이 없는 게 너무나 당연한데 신에게 대든다고 이렇게 시작을 했다 이 말입니다, 처음에. 그럼 오늘날 철학자들은 뭐냐?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이 나온다 했죠. 이 죽음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어렵다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현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해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이 반박을 해보세요.

‘인간은 포유류다.’ 맞죠? 인간은 어미가 자식을 젖 먹여서 키운다. 고래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이걸 포유류라 해요. 따라서 갓난아이는 젖이나 정신적인 모든 것이 어머니에게 종속된다. 갓난아이에게 있어 어머니는 신이다.

어느 날 엄마가 배변, 오줌 싸고 똥 싸는 것에 대해서 지시를 하고 훈계를 한다. 갓난아이의 모든 언어활동은 엄마의 배변 지시에 따르는 용도로 언어 환경이 마련된다. 일방적으로 엄마는 지시를 하고, 그 지시를 말로 알아듣는, 정규교육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의 말을 알아들으면서 언어 환경이 마련된다. 그 언어 환경에서 엄마는 지시자가 되고 아이는 지시에 따르는 자가 된다.

어때요? 반박이 됩니까? 그런데 이 갓난아이가 나중에 아이가 돼요. 아이가 되면서 아이가 뭘 의식하느냐? 전에 엄마가 했던 언어 속에서의 규칙, 규범-엄마의 언어 안에 담겨있는 규칙, 규범을 알아챌 수 있는 그러한 본인의 언어체계가 세팅되어 있게 된다.

반박이 됩니까? 안되죠. 세팅되어 있는 거예요. 세팅되면서 인간이 갖고 있던 근원적인 동물본성이 억압당합니다. 언어가 없으면 애는 그냥 동물이잖아요. 동물에 뭐가 덮쳤어요? 언어가 왔잖아요. 반박 안 되죠? 맞죠, 동물. 언어-지시와 명령 때문에 동물적 충동, 본능은 억압당하죠.

억압당하면서 애는 엄마나 아빠의 눈치를 보게 되죠. 언어적으로 변명할 걸 미리 생각하고 이렇게 하면서 동물본성은 억압당하고, 처음에 동물적인 유쾌함, 육적인 신남, 오토바이 타면서 빠라바라바라 밤~ 하면 얼마나 신납니까, 육적으로 신나는 그것이 억압당하면서 상실감을 느낀다. 억압당하면서 상실감을 느끼죠. 상실감을 느끼니까 상실감을 느낀 그 자리에 보상을 기대하게 돼요.

보상을 기대하는데, 크면서 보상 종류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요. 사랑, 연애하기도 포함되고요, 공부, 법 위반, 범죄, 예술 창작행위, 권력 추구. 권력 추구, 예술 창작행위, 범죄자는 법 위반, 마약을 한다든지 몸에다 문신을 한다든지 하는 것, 그리고 공부, 그리고 아빠 엄마 말고 다른 사람을 열렬히 사랑한다든지. 승진 같은 경우도 어디에 해당합니까? 권력 추구죠.

이것도 안 되면 게임이나 스포츠에 몰두하는 거예요. 월드컵에 마약처럼 빠지는 거죠. 홍명보가 바보 같다는 것을 전 세계 삼백 언론 단체에서 말했다, 이런 거요. 거기에 푹 빠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무엇을 보상하겠다는 거예요? 자기의 상실감을 보상하는 거예요.

특히 이 부분을 한번 보세요. 보상 방법 중에 뭐가 들어있어요? 공부죠. 공부에서 불교는 무슨 공부? 마음공부. 기독교는 무슨 공부? 말씀공부. 이게 뭐에요? 공부를 왜 합니까? 자기의 충동, 그것이 상실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는 거예요. 과학하는 것 역시 공부에 해당되죠.

그래서 인간이 이걸 추구하고 있는 거예요. 육이라는 인간이, 죽음에 속한 인간이 이걸 원하고 있죠. 원하고 있는 소비층이 있으면 뭐가 발생돼요? 공급층이 발생되죠. 그 공급층이 이런 보상들을 채워주고 돈 받고 그것을 만들어주는 ‘사회’.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 사회. 이걸 자본주의 사회라 해요.

그냥 살다가 늙어죽으면 되는데 사람은 건강하고 싶은 거예요. 건강하기 위해서는 헬스클럽이 필요하잖아요. 병원 필요하죠. 간호사 필요하죠, 의사 필요하죠. 이것이 어릴 때 억압되어서 상실된 것을 보상해주는 거예요. 나 건강해,라는 식으로.

그래서 이런 것을 달성할 때 인간들은 이 사회에서 ‘나’를 붙여요, 나. self, 나를 붙인다고요. 이것을 ‘주체’라고 이야기하고, 태어날 때 가족에서 이야기하는 그 나는 ‘ego’라고 이야기해요. ‘자아’라고 이야기하고, 사회에서는 ‘주체’에요. 나 이렇게 보충되었다고 으스대는 거예요. 이게 자본주의 사회인데 자본 빼버리면 이게 바로 인간사회입니다.

자, 제가 묻습니다. 반박해보세요. 이게 오늘날 철학인데 반박해보라고요. 이래서 보충이 제대로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뭘 해야 자기 잃어버린 것을 보충해요? 엄마가 이미 늙어 돌아가셨어요. 그때 그 시절로 못 돌아가요. 못 돌아가니까 그 대체물을 계속 끄집어 당기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철학자는 ‘인간은 모두 다 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전부다 정신병자 환자에요. 어떤 인간도 정신병 환자가 아닌 자가 없어요. 그래서 현대 철학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본인이 환자인 것을 아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특히 여기에 공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철학자들이잖아요, 철학 공부. 철학하는 본인도 정신병자에요. 강박증 환자들인데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연구한 것을 만약에 너희들이 모르면 너희들은 쪼다다. 바보다.’라고 종교적인 선지자 노릇을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선악체제에서 너희들은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자기는 의인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철학자 본인들도.

그러니까 인간들의 어떤 모임에도 생명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제발 나의 갈급함을 그냥 계속 채워줘.’ 정신분석학이나 철학에서 내놓은 해결책이 뭐냐 하면요. 전에는 정신병이 ‘아프다. 좀 도와줘.’ 이런 식이였어요. ‘나 비정상인이야. 나를 좀 동정해줘.’ 이랬잖아요. 지금은 정신병이 그런 게 아니에요. ‘너의 증상을 즐겨라.’입니다.

‘그동안 아빠, 엄마를 네가 그리워했는데, 네가 스스로 엄마를 만들어내면 되잖아. 네가 스스로 아빠를 만들어내면 되잖아.’ 그게 해결책이에요. 누구의 간섭도 받지 말고 만들어내면 된다는 거예요. 만들어내면 그럼 나의 욕구는 다 채워져요? 아니! 인간은 죽을 때까지 욕구가 안 채워져요. 죽을 때까지 욕구는 안 채워진다고요.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다 늙어죽는다. 그게 진리다. 기뻐해라. 진리를 알았으니 기뻐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철학자들의 연구와 그러한 노력이 어떤 점에서 상당히 기여한 바가 있죠. 우리 인간세계에서의 영생은 있다, 없다? 없다,를 규명한 거예요.

‘인간세계에는 천국이 없다.’ 아니, ‘인간세계’ 빼버리고요. 자기가 안 가니까 남도 가면 안 되잖아요. 본인이 안 가니까 남도 가면 안 된다고요. 그러니 아예 없다. 뭐가 없다? 천국 없다. 천국 없으면 뭐도 없어요? 지옥이 없다. 지옥 없으면 뭐도 없다? 심판주가 없다. 이것을 그들은 공부해요.

두 번째는 뭐냐? ‘우리는 병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병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모든 인간은 다 그러하니까. 당당하고 떳떳해라. 온몸에 문신으로 다 도배를 해도 젊은 사람들 떳떳한 게 뭡니까? 여름 돼서 일부러 다 내놔요. 그거 하는 이유가 뭐에요?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있었지만, 이제는 커서 내가 직접 내 아버지, 어머니를 만들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뭐에요? 우리의 창조주 아닙니까? 창조주를 누가 만들었다? 내가 바로 창조주이고 내가 나를 만들었다.

애 낳을 필요 없어요. 뭐 키우면 돼요? 고양이나 강아지 키우면 되죠. 내가 창조자니까. 고양이, 강아지를 키우는 이유가, 고양이, 강아지는 사료 주는 나를 쳐다보고 있지 다른 쪽은 안 쳐다보잖아요. 그럼 퇴근해서 고양이나 개와 앉아있으면 나는 뭐가 돼요? 신이 되는 거죠. 직장에서 구박받아도 집에 와서는 비로소 천국을 맛보는 거예요. 왜? 내가 신이니까. 시키는 대로 하니까. 신으로서 적당한 보상을 해줘요. 침대에 재워준다든지, 사료를 맛있는 거 준다든지, 더운 날 옷 입혀준다든지.

초등학교 선생님이 청소 중에 애들한테 쓰레기 줍기를 시켜서 애들이 쓰레기를 주웠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어떤 학부모가 그 교사를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뉴스에 댓글이 멋져요.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우리 애가 거지도 아닌데 왜 쓰레기 줍게 하냐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말로 한 게 아니라 고소를 한 거예요.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거예요.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이렇게 행복한 이유가 다 미쳤거든요.

여기서 반박을 해야 돼요. 여기서 지금 이 자체로는 반박이 돼요, 안 돼요? 반박이 안 되죠.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아까 한 이사야 29장 10절,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다? 눈을 감기게 했다. 눈이 감겼다, 떴다의 기준은 뭐냐? 하나님이 성경책을 줬는데 성경책에 대해서 헬라어, 히브리어 아무리 분석해도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인간보다 더 똑똑한 AI는 성경책을 주니까 기껏 하는 소리가 뭐냐? 성경의 중심은 사랑이라는 거예요. 이게 지금 미쳐 돌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교재 63페이지 봅시다. [답변> 제3의 실체가 등장합니다.…] ‘제3의 실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제3의 실체. 분명히 개입했는데… 두 여인이 아들 때문에 논쟁했을 때 제3의 실체가 누구냐? 솔로몬이에요. 그 솔로몬 배후에는 다윗 언약이 있어요. 세상에, 왕이 되어서 백성을 위하는 왕은 어떻게든 신경써가지고 빨리 진짜 주인에게 돌려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멀쩡한 남의 애를 네가 왜 네 애라고 주장하느냐?’ 뭐 이렇게 노력을 해야 되는데, 수사할 생각은 안하고 너무나 무책임하게 “칼 가져와. 두 조각 내.”

이게 뭐냐 하면, 1+1=2잖아요. 언약에서는 2가 아니라는 거예요. 1+1=3이 되게 하는 것이 언약이에요. 사과 한 개 있다. 더하기, 사과 한 개 있다. 사과 몇 개게요? 사과가 2개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 제3의 사과가 왜 등장하는 겁니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 언약은 이렇게 슬그머니 들어와요. 어떻게? 우연으로. 슬그머니 들어와요.

슬그머니 들어와서 ‘선악적으로 누가 옳다, 그르다. 내가 천국 가야되겠다. 나 지옥가면 안 된다.’하는 그 모든 것을 제3의 것이 입을 다물게 만들어요. 입을 다물게 만들죠. 그게 제3의 실체에요. 그걸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면 좀 지루하겠지만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아버지 가죠. 그다음에 이삭 가죠. 몇 사람 올라갑니까? 동네 아저씨들 떼로 다 갑니까? 아니죠. 둘이 가죠. 1+1은 얼마에요? 2죠. 그다음에 이삭이 오해한 게 있어요. 양을 들고 갈 거라 생각했어요, 양. 인간보다 차원이 낮은, 다른 차원의, 육으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양을 들고 가는 줄 알았어요.

인간을 다루는 양이 있다는 생각은 둘 다 못했어요. 도리어 그 분이 인간이고요,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위계급에 속한 양이 되어야 돼요. 언약 구조가 그렇게 위상이, 계급이 그렇게 뒤바뀌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아버지와 아들이 갔는데, 제물은 그냥 제물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이 제사 드리면서 ‘내가 하나님께 인정 받을까, 복 받겠지, 이렇게 잘 하면 얼마나 기뻐하고 내 아들 잘 되겠지.’ 온갖 것 계산하고 있는… 아까 이야기한 것으로 하면 뭡니까? 자신의 결핍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충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이 두 사람에게 양이 등장함으로서 ‘그것이 바로 두 사람 다 죽음의 위치에 있었다.’라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작업이 언약 작업이에요.

생명은 어디한테 있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양한테만 생명이 있었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막벨라 굴에 가서 죽었어야 돼요. 대기하고 있어야 돼요. 죽어야 돼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가.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죠. 하나는 누구 죽음입니까? 인간의 죽음. 수요일에 잠깐 언급했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이죠.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했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자기들과 동급인 줄 알았어요. 인간은 죽으면 죽음인데, 예수님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생명을 얻었다고요, 생명을. 생명을 얻었잖아요. 바로 이 생명은 예수님의 사후 효과로서, 육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될 인간을 예수님의 영으로서 이 죽은 자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이런 이야기할 때마다 늘 그 후에 뒤따르는 생각은 ‘내가 죽어있는데, 나를 안 살려주면 난 어떻게 되느냐?’는 거예요. 항상 그러한 근심, 걱정, 기우. 이것은 아까 정신분석학이나 현대 철학에서 보면 뭡니까? 이것하고 첫째 시간 마칩시다.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다’ 동그라미. 살아있는데 내가 결핍되어 있다, 이것은 (동그라미 중 일부) 점선. 살아있는데 제대로 내 욕망대로 살아있지 못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신을 믿고 언약 믿고 십자가 믿고 복음 믿으면 이 ‘살아있다’에 뭐가 보충되겠죠? 기독교, 종교적인 복음이 보충되겠죠. 그럼 살아있는데 온전한 살아있음이 되겠죠. 이게 바로 철학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유에요. 이게 정신병이라는 거예요, 그들은.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이게 안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오게 되면 살아있다는 것을 마저 죽여요, 마저. 마저 죽일 때 용어가 뭐냐? ‘육’이에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었다. 예수 믿어서 살 생각하지 말고, ‘믿습니다’해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죽어버려!

그럼 전에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습니까?” 질문하다가, 이 질문이 뭐로 바뀌겠어요? “내가 살아있는데, 내 자아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나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합니까?” 그때 주님께서 무미건조하게 뭐라 합니까? “믿어라.” “내가 성령을 보내서 네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 너는 살아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꾸 예수 믿고 이득 보려고 생각하지 말고, 꼼수부리지 말고. 여기에 해당되는 성경구절이 뭐냐 하면, “자기 의를 버려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 모든 말씀을 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 말을 지키게 해주는 거예요. 고넬료에게 성령 찾아오고 베드로에게 성령 찾아오듯이 그렇게 해주시는 거예요.

첫째 시간 마지막으로 이것 해봅시다.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이거에요. 우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얼마나 걱정하겠어요.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는데? 구했는데, 천국 안 보내주면 어떻게 하는데?’ 그 이야기가 맨날 달라붙거든요.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좀 아이큐가 되는 사람은 알 거예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마감하는 일은 내 일이다, 내 일 아니다? 내 일 아니죠.

죽은 인간이 무슨 말씀을 지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10분 쉬겠습니다.

 

 

 

광주강의20260626b 이사야 29장 10절(진지함)-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64페이지에 [34. 다니엘 9장 27절의 그에 대해서]. [질문>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7일)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저는 ‘그’를 적그리스도라 배웠는데 의외로 예수님이라고 해석한 분들도 많더군요. 목사님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질문 자체가 여기서 ‘그’라는 것이 객관식으로 적그리스도냐, 안 그러면 그리스도냐 둘 중에 하나 고르세요,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문맥상 헬라 왕이죠. 에피파네스(신의 나타남)라고 자처하는 안티오쿠스 4세라는 헬라 왕이 B.C. 167년 경에 유대지방을 통치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적그리스도에 해당됩니다.

적그리스도에 해당되는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냐를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고 또 굳이 제사를 파기하려고 덤벼드는 시도는 뭐냐? 남 제사 드리든 뭘 하든 놔두면 될 건데, 의도적으로 제사를 폐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제사 드리는 것도 참 무지몽매하다고 생각 들잖아요. 여러분이 옛날 유교 집안들 하는 것을 커서 보면 참 우습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또 폐지하는 데서 어떤 종교적인 승리감에 뿌듯한 것도 말이 안돼요. 이상해요. 이 모든 것이 아까 이야기한 우연적 발상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제사를 철폐하고 안 철폐하고를 통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인간이 뭘 안다고 할 때 스스로 아는 것은 없어요. 안다는 것은 반드시 ‘타인의 선행적 존재’를 전제로 해요. 나보다 먼저 있었어요. 그때부터 ‘안다’가 됩니다. 나보다 타인이 먼저 있고, 타인이 나에게 요구를 하든지 가르치든지 훈계를 하든지, 타인이 알고 있던 그 지식의 일부로 우리가 끼어드는 거예요, 우리가 안다는 게.

‘너는 부모도 없이, 못 배웠구나!’ 그렇게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부모가 있으면 뭐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하지마라. 이래서는 안 돼. 틀렸다.’라고 할 수 있는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합니까? 타인 역할을 하죠, 타인. 남 역할을 한단 말이죠.

그럼 타인이라 하는 것은, 타인의 몸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몸. 몸이 있고 나는 나대로 또 몸이 있고. 이미 타인이 알고 있는 그러한 훈계 같은 것이 이 몸을 둘러싼 정신작용으로 아우라를 형성하는 거예요. ‘가정교육 잘 받았다.’ 이런 거란 말이죠. 아우라를 제공할 때, 그러면 우리가 집안의 어른들이 아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진리입니까? 동의한다고 진리입니까?

아니죠, 아니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세계에 매여 있을 뿐이에요. 진짜 세상적으로 말해서 알려면, 어른이 이야기한 것도 거부하고 그 어른에 예속되어서 어른 아는 것의 일부를 안다고 까불락대는 나도 없애버리고. 방법은 뭐냐? 유학가면 되죠. 유학을 가면 거기에 스승님이 기다리죠. 스승님은 나에요, 타인이에요? 타인이잖아요.

그 스승님 말 안 들으면 미국 유학가도 나중에 취직 못해요. 안 그래도 지금 미국 본토 애들도 취직 안 되는 판에 외국인들 취직시켜주겠어요? 안돼요. 돈은 1년에 1억이 뭡니까. 1억 5천, 2억을 주면서 4년 끝나고 난 뒤에 도로 back home, 다시 한국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이상한 영어만 배워서 돌아오는 거예요.

타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쪽의 말에 대해 동의하지 아니하면 이 사회에서 살 수 없어요. 나만이 아는 것을 포기해줘야 이 사회생활에서 밥 먹고 살 수가 있어요. 좀 안다고 틱틱거리면요, 아무도 그 사람을 취직 안 시켜줍니다. 회사 취직하라 하지 않아요. 여자가 시집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똑똑하면 나중에 시집에서 부모가 강제로 갈라서게 만들어버리죠.

따라서 에피파네스 헬라 왕 안티오쿠스 4세와 그 당시 유대인과 둘 다 동일한 타인의 의식 속에 각자 나는 더 똑똑하다고 우기는 과정에 있어요, 이 상황이. 인간들과 인간들의 만남에서 안다는 그 앎의 포대기 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도대체 뭔가 행한다는 것, 알아서 행한다는 것이 어떤 굴레에 있는지를 제가 프린트해서 왔습니다.

<소위 ‘성화론’이라는 교리와 인도철학과의 유사성>(십자가 마을 ‘성경신학2’ 게시판 77번 게시글 <성화론과 인도철학> 참고) 이게 지금 6페이지나 돼서 엄청나거든요. 그래서 짧게만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욕망은 대상을 보고 일어난다.] 이게 뭐냐 하면 출애굽기 20장 3절에, 하나님께서 이미 범죄한 인간에게 딱 한 가지 명령을 했죠. “우상 섬기지 말라.”(“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에게 제일 첫 번째 온 시험이 뭐였어요? 하나님께서 함축해서 이 세상을 표현할 때 하나의 거대한 우상 덩어리로 표현했어요. 그다음에 느부갓네살이 우상이고요. 거기에 그 당시 바벨론이 최고의 제국이었으니까, 심지어 유대인들도 거기에 잡혀왔으니까요. 그에게 절하면 살고 절 안하면 죽어요. 다니엘 3장, 5장, 6장 계속 가면서 그 이야기 아닙니까.

세상 자체가 다니엘 보기에 하나의 우상 덩어리에요. 덩치, 우상 덩어리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장차 그 우상은 우상대로 존재하면서 발에 뭔가 돌멩이 하나 날아와서 보니까 그 우상 전체가 자빠지고 그 때린 돌은 태산을 이룬다.’(단 2:31-35) 그 계시잖아요.

‘제사를 드리냐, 안 드리냐, 폐하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 ‘세상을 어떻게 봤고, 네가 안다는 것, 네가 똑똑하다는 것이 어디에서 통용되는 의미로 부여받았느냐’ 하는 거예요.

바벨론 한번 볼게요. 교재 본문은 헬라지만 바벨론이 헬라 짐승의 후손이에요. 후배에요. 바벨론은 모든 종교의 총합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각 민족마다 신이 있잖아요. 신이 있는데 바벨론 마르둑 신이 그 모든 신을 전부 다 이기고 월드컵에서 우승했죠. 월드컵에서 우승한 거예요. 신 중의 신이에요. 신이란 보이지 않잖아요. 신 중의 신인데 거기에 등장한 실체의 나라는 바벨론이라는 제국. 그 제국의 우두머리, 모든 권력은 한 인물에게 집중되었으니까, 그 이름은 느부갓네살. 느부갓네살 왕이죠.

이러한 원리가 여기 헬라도 마찬가지고 계속해서 그것이 점점 더 쌓여서 결국은 바벨론에 와서 모든 게 종결돼요. 바벨론에 나온 제국들 있잖아요. 헬라, 바사, 로마 그것은 하나의 우상에서 나오는 지엽적인 지체에 지나지 않아요. 머리, 어깨, 무릎, 발 쭉 내려가죠. 인간은 바벨론에서 모든 신을 통합했던 그 순간, 다니엘이 표현하기로는 ‘짐승’이에요, 짐승.

인간에게 그동안 알려준 모든 것은 악마에서 나오는 지식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지식이 힘이 되고, 그 힘이 모든 종교를 다 통합해서 하나의 단독 제국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보죠.

그런데 출애굽기 20장에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 72명 내지 75명인데 70명이 갔다고 합시다. 야곱의 자손 70명의 가족이 가서 애굽에서 나올 때는 남자 성인만 몇 명이었어요? 60만 명이었어요. 엄청나게 나왔잖아요. 하나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거죠. ‘언약이 세상 제국을 찢고 부수고 승리함으로써 나왔다.’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애굽이 붙잡을 수 없었다.

창세기에서 요셉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꿈과 현실에 대해서 누가 더 높으냐 하는 거예요. 현실 안에 꿈이 있다, 맞죠. 현실 안에서 꿈을 꾸잖아요. 하나님께서는 현실과 꿈을 대등하게 평등하게 만든 것이 아니고, 꿈 밑에 현실을 놓아서 ‘이 꿈이 실제로 실현되는 모양새가 인간들이 전부라고 알고 있는 현실이다.’ 하는 거예요.

그것이 현실인데, 현실은 이미 ‘좋았다…’, 그냥 좋은 게 아니고 ‘참 좋았다→왕창 망했다’ 이것이 인간세계 현실의 운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처음에 실한 소가 나왔는데 뒤에 나온 이상한 일곱 마리 소는 육식인가, 소가 소를 다 잡아먹었죠. 처음에 실한 곡식이 나왔지만 나중에 바짝 마른 곡식이 와서 완전히 가뭄 들죠.

따라서 현실은 처음에 참 좋았다가 나중에는 결국 망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꿈이 이 현실과정과 반대되는 쪽으로 꿈이 실현되면 이게 진짜 현실입니다. 이것을 ‘실재’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실하고 차이나죠. 꿈속에서 피어나는 현실은 실재고, 이 현실(꿈 밑의 현실)은 망가져야 될, 마땅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 꿈으로 나서질 못하죠. 성화론 하기 전에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왜냐하면 성화론을 보려고 하니까 이렇게 내용이 많아서 엄두가 안 나요. 가사를 한번 봅시다. 제목은 ‘Seven tears'.

Seven tears
Goombay Dance Band, 1981

Seven tears have flown into the river
눈물이 강물에 떨어집니다

가사가 심오해요. 눈물은 인간이 흘리는 거죠. 강물은 자연에 속합니다. 자연에 인간의 눈물이 섞여서 흡수된다, 떨어진다. 인간이 이 세상을 안다는 것의 한계가 이거에요. ‘자연은 참 좋겠다. 눈물이 없어서.’ 이렇게 되는 거죠. ‘자연아, 너는 내 아픔을 모르지? 별아, 내 아픔을 모르지? 짹짹거리는 참새야, 너는 좋겠다. 개는 좋겠다. 오뉴월 개는 주인이 부도난 것도 모르고 잠 온다고 개처럼 덜렁 누워가지고는… 좋겠다.’

인간이 비교할 것이 자연밖에 없어요. 자연은 느긋하고, 인간은 초조하고. ‘인간은 왜 이렇게 불행해?’ 이런 거요.

Seven tears are run into the sea
눈물이 바다로 흘러갑니다
If one day they reach some distant waters
언젠가 눈물과 강물이 다 흘러가고 나면
Then you'll know it's sent with love from me
내 사랑과 함께 흘러갔음을 알게 될 겁니다

내 사랑도 함께 흘러가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애틋했던 사랑, 행복했던 사랑도 눈물이 되어서, 눈물로 분해되어서 자연에 섞여 흘러 어디로 가느냐? 바다로 떠내려가는 거예요. 손해 봤죠. 남는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Here I stand, Hand in hand
머리를 감싸 쥔 채, 이곳에 서 있네요
Lonely like a stranger on the shore
해변의 길손처럼 외롭게
I can't stand this feeling anymore
이런 기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바닷가인 모양이죠. 자기가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졌으니까 세상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Day by day
세월이 흐르면
This world's all grey
날마다 세상은 점점 더 어둠일 뿐

For the Lord has poured over you a spirit of deep sleep, He has shut your eyes?the prophets; And He has covered your heads?the seers.

이게 오늘 두 번째 하려고 하는 어려운 거예요. 인간이 자기 기분에 따라서 세상에 대한 관점이 이렇게 바뀌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세상을 하나의 욕망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내 기분이 별로 같으면, 세상도 별로에요.

And if dreams were eagles I would fly
만일 독수리라면 그대에게 날아가고 싶지만
But they ain't and that's the reason why
그렇지 못하니 그것이 슬프네요

Seven tears have flown into the river
눈물이 강물에 떨어집니다
Seven tears are run into the sea
눈물이 바다로 흘러갑니다
If one day they reach some distant waters
언젠가 눈물과 강물이 다 흘러가고 나면
Then you'll know it's sent with love from me
내 사랑과 함께 흘러갔음을 알게 될 겁니다

같은 이야기 계속하고 있어요.

Oh my darling, oh my pretty lady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그대여
Golden star that leads to paradise
황금빛 별들이 낙원으로 인도하듯이
Like a river's run into the ocean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I'll come back to you four-thousand miles
나도 언젠가는 당신께 돌아가렵니다

여기서 점점 종교적 색채가 나오죠. 이렇게 떠나가고 헤어져도 내가 사랑하는 너는 저 하늘에 있는 황금빛 별들이 있는 낙원으로 가거라. 거기에 내 사랑이 섞여있다면 나도 언젠가 당신에게 같이 인도받지 않겠느냐, 그 내용이에요. 이 내용이.

이 노래를 제가 선택한 이유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좌절했을 때 인간은 그냥 좌절만 하고 있는 게 아니고 계속 어떤 희망이 되는 쪽으로 새로운 현실을 일방적으로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희망이 되는 쪽으로.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 희망을 만드는 재료가 어디서 나오느냐? 어디서 나오는 것들이에요, 전부 다? 아까 별 나왔죠, 강 나왔죠, 바다 나왔죠. 그리고 그 해변에 서 있는 나 있죠. 내가 있는 것을 주섬주섬 모아서 새로운 희망의 낙원을 형성한다는 것이 인간 앎의 한계이고 이게 지금부터 이야기할, 욕망은 실현되는 맛으로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천국, 지옥 하는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겠죠. 또 계속해서 1페이지 위에서 10번째 줄 보면, [인도철학에서는 욕망을 욕망대로 인정하고 그 욕망을 조절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욕망을 살리는데, 욕망 살린다고 만약에 자기가 손해 본다, 너무 아프다, 너무 힘들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왜? 욕망은 내가 하고, 대상은 내 욕망의 소유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일단 나는 다쳐선 안 되잖아요. 욕망 쫓다가 내가 다쳐버리면, 이건 남는 게 없잖아요. 그게 인도철학이라는 거예요.

인도철학은 자연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자연. 아까 노래가사처럼 자연을 재료 삼아서 구성해서 거기서 자연의 어떤 조화, 평화… 대자연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밤하늘 보세요. 평안하잖아요. 만사 걱정이 없잖아요. 자기가 보기에. 자기는 걱정도 많아요, 많은데 자연은 걱정이 없잖아요. 그게 하나의 희망처럼 보이는 거예요, 인간은.

사람하고 상대하다가 실망했다. 뭐보면 돼요? 밤에 나가서 별 보고서,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 한 대 피우고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은 그냥 음악이나 들으면서 쪼그려 앉아있고 그러죠. 뒷동산 올라가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그게 전부잖아요.

바로 그걸 종교화시키면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욕망이 있고, 욕망이 있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은 반드시 실현되고 달성되어야 내 욕망이 만족하니까. 그런데 이걸 급작스럽게 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이 대자연이 말을 안 들어요. 적당히 대자연을 달래가면서. 대자연을 달래는 방법은 뭐냐? 내 욕심을 적당히 조절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혹은 여력이다.] 쥐었다 놨다, 빨리 했다 천천히 했다, 조절해가죠. 1페이지 밑에서 4번째 줄에, [그것은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인간 내부의 욕망이 자극되어 그 신을 필요로 하고 소유하고 싶어서 욕망 달성의 파트너로 불러주지 아니하면 그 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신이라고 불러줄게. 불러주기에 신은 쪼로록 쫓아와서 “뭘 도와줄꼬?” 이렇게 되죠. 알라딘 램프의 하인처럼.

그다음 문단에 [소의 기독교계의 '성화론'은 인간의 행위를 출발점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윤리관을 도출해 낼 수 있느냐에 관한 탐구이다.] 인간이 바르게 살아야 될 이유가 뭡니까, 이 성화론에서? 기독교 성화론에서 인간이 바르게 살아야 될 이유가 뭐에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은 뭔데요? 하나님께서 약속했다. 뭘?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거 들어준다는 거예요. 인도철학하고 다른 점이 뭐가 있어요?

계속 봅시다. [그런데 인간의 행위란 욕망의 대상이 없으면 발동하지도 않을 뿐더러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익히 아는 맛있는 것, 갖고 있는 것, 그것은 벌써 시시해졌어요. 내 욕망은 ‘거기서 이제 그만해라.’하고 멈출 욕망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말해요. ‘왜 윤석열은 김건희하고 결혼했는가?’ ‘김건희는 왜 윤 대통령하고 결혼했는가?’ 멈추지 못하는 욕망이다.

[더 쉽게 말해서 성취 가능성,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욕망을 내며 행위에 나서려고 하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것을 인간은 욕망하지 않아요. 자기가 딱 보니까 이건 자기가 봐도 말도 안 된다 하는 것을 욕망하지 않아요. 욕망하는 것은 내가 조절하기에 따라서 될 가능성이 있는 걸 가지고 욕망해요. 내 욕심을 낮춘다든지 마음을 착하게 먹는다 하면 얻을 수 있는 것,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것을 욕망합니다.

욕망의 대상이 있고 나는 욕망이 있죠. 아까 노래 가사처럼 불신자 같은 경우는 대자연 속에서 얻고자 하잖아요. 그 점에 대해서 신자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얻고 싶은 것을 대자연속에서 얻는다고요. 그런데 욕망과 욕망의 대상에 성경구절을 집어넣어서 ‘성경구절을 내 행위로 달성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을 내가 얻을 수 있다.’ 이게 성화론이에요.

욕망 대상은 내 욕망을 달성하는 나 자체가 되겠죠. 이게 구원인 거예요. 성화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거에요. 나 자체에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신이 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게 있을까요? 만약에 브라질이 월드컵 준우승한다면 막 좋아합니까? 안하죠. 우승을 해야 되죠.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악마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최고의 신이 되지 않는 한 아까처럼 자기에게 결핍을 느끼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야고보서 5:13-16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이 구절을 제가 언급한 이유가, 이 구절을 보는 사람이 그냥 ‘아, 나한테 이런 일이 있겠네.’가 아니라, 이게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구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병들 때 앞으로 이렇게 해야지. 내가 병들었을 때 이렇게 기도해야지.’ 그러면 이렇게 기도할 때, 중간에 병에서 낫고 그것도 구원까지 챙길 수 있는 비법이 이 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뭐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그다음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뭐만 하면 죄 사함이 돼요? 병들었을 때 낌새 느끼고, 이것은 내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 생각하고, 그다음에 믿음의 의인, 교회 장로님들을 불러와서 그 분을 통해서 기도발 세우라 해가지고 그럼 우리가 얻는 건 뭐가 있어요? ‘병도 낫고 구원도 받고. 죄 사함도 얻고. 이것을 야고보가 우리에게 이야기했다.’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기 욕망의 대상에서 이 성경구절을 뺄 수가 없죠. 자극이 되는 거예요.

또 계속 봅시다. [또 술을 끊고 싶을 때는 에베소서 5:18를 자기에게 적용시킨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술에서 해방된 자아의 몸을 소유하고 싶을 때, 이런 구절들을 가지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의 목표가 생긴 거죠. 술만 끊으면 뭐가 된다? 답변해보세요. 술 끊으면 뭘 받았다? 성령 받았다. 술을 끊으면 성령 받은 게 되니까요. 아, 이거… 기독교에서 성화론 못 끊겠죠? 술은 끊어도 성화론은 못 끊겠죠.

[간음에서 해방된 몸이고 싶을 때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거론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살전 4:3-6)

또는 전도하고 있는 자아상을 그릴 때는 다음의 성경 구절에 매달린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자, 정리할게요. 성경은 우리에게 목표물을 제시한다. 우리는 여기 있다. 그러면 아까 인도철학에서 욕망은 그냥 욕망이 아니고 뭐를 찾아요? 욕망 대상을 정하죠. 그게 아까 우상이라 했죠, 우상. 그런데 인간은 우상인지 뭔지 모르고. 성경은 우리에게 목표물을 제시하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성경구절을 준 거예요.

그럴 때 우리에게 욕망이 없으면 구절에 대해 신경 쓰겠어요, 안 쓰겠어요? 안 씁니다. 우리에게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 성경구절이 우리의 욕망을 가만두지 않고 자극한다고 생각하겠죠. 자극하지는 않아요. 하여튼 자기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앞으로 목표가 생기죠. 간음 안하고, 술 안 마시고, 몸 건강하고. 목쉬고 이런 것 좀 하지 말고 몸 건강하고, 비실비실하지 말고 소화도 안 되고 위염 걸리지 말고, 전도 일 년에 한 10명하고 싶고.

이게 바로 인도철학입니다. 인도철학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뭐는 손도 안댔어요? 욕망 자체를 손도 안대요. 3페이지 봅시다. [인도철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냥 무시되고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인도철학이 불교철학까지 넘어왔어요. 화엄경 같은 경우에. ‘모든 인간의 행함은 우연이 없다. 연기설(緣起說), 관계망이다.’ 이렇게 돼요.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나타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이것을 ‘카르마의 법칙’이라고 한다. 흔히 ‘업(業)’ 혹은 ‘업보(業報)’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행동을 할 때 그 업보가 중간에 파동이 있으니까 멈추겠어요, 파가 퍼지겠습니까? 당장 나한테는 안 돌아와도 내 자식한테는 나의 선한 업보가 자식에게 주어지죠.

자식이 혹시 나쁜 짓을 했다. 그런데 내가 선한 일을 하게 되면 선한 데서 파장이 퍼져나가니까 그 파장의 업보가 아들 있는 데까지 퍼지겠죠. 퍼지면 아들이 개과천선하든지 안 그러면 경찰이 풀어주든지 그런 효과를 낳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한 원인에 의한 행위는 선한 결과가 있게 마련이고,] 인간이 뭘 따먹어서 인간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생긴 거죠. [나쁜 원인에 의한 행위는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게 선악과죠. 악마가 인간보고 아담보고 선악과 따먹으라고 그렇게 부추긴 이유를 알겠죠? 그리고 하나님이 나무 실과 따먹지 말라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생명이 따로 있어요. 생명은 선악과를 안 따먹는 조건 하에 생명나무를 따먹게 되어 있다고요. 선악과 따먹으면 뭐가 날아가요? 생명이 날아가죠. 생명이 날아간 그 족속이 누구냐? 악마에요. 사탄이에요. 악마는 이 점을 알아요, 몰라요? 알기 때문에 이왕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하나님이 만든 인간에게 악마가 노리고 들어간 거예요, 노리고. 나만 혼자 죽을 수는 없다. 같이 죽자.

그거싱 [자업자득이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식의 말이다.] 문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통이 오면 악이고 행복이 오면 선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법칙이 성사되려면 반드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확연하게 구분지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행복과 고통으로 구분했지만…]

서서히 악마의 정체가 밝혀지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악마의 품성이 이 속에 잠복되어서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죠. 신앙이고 믿음이고 다 생활하다가 조금만 집안에 뭐가 안 좋다 한다든지 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뭔가 일이 잘 안되게 되면 어떻게 돼요? ‘가만있어보자. 내가 무슨 악한 업보를 지었나?’ 그렇게 생각하죠.

그래서 미리 제가 해답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 16, 18절 거기 보면 나와요.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가 뭐죠? 모든 일이죠. 모든 일에 감사가 나와야 된다. 이걸 사도 바울은 선(善)이라 했어요. 선악과가 아니고 은혜로 주신, 은사로 주신 선이 뭐냐? 감사에요, 감사. 찬양이고 감사에요.

그래서 감사에서 눈 돌아가면 뭐가 나오겠어요? 선악이 나오죠. 감사에서 눈 돌아가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감사를 주시되 이 감사가 어디를 경유해서 나오게 합니까? 자기 선악에 미쳐서 완전히 미쳐 돌아갈 때에 주께서 예수님의 탕감, 예수님의 죄 용서와 은혜를 줘버리면 인간은 순간입니다, 우연입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느냐? 주께서 거저 주신 은혜가 많은데!’

나는 왜 이 게임에서 이겨야 되고 지면 안 되고, 나는 이렇게 되어야 되고 저렇게 되어야 되고, 나는 이렇게 훌륭해야 되고 이렇게 나쁜 짓하면 안 되고, 이걸 따지고 있다는 이것이 악마의 술책에 옴팍 빠져 들어간 거예요. 아, 이것은 내가 정말 죽을 때까지 강조해도 모자라요. 이런 문장으로 해볼게요.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만, 성령 안에 사는 사람만 말씀을 진지하게 본다.’
같은 말로, ‘이미 지옥에서 벗어난 사람만 자기와 그리고 세상을 시시하게 본다.’
같은 말로, ‘이미 지옥에 가는 사람만 자기를 진지하게 생각한다.’

매 순간 우리는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해요. ‘참, 내가 그 말 하는 게 아닌데. 그 사람한테 그런 말한 건 내 실수인데, 사과할까, 말까?’ 왜 갑자기 진지해졌어요? 뭐가 진지해졌어요? 자기의 말과 행위가 아주 좋은 말로 호환돼요. ‘내가 그 사람을 배려해야지. 양심이 있다면.’ 이게 뭐에요? 이게 천국 가는 모습입니까, 지옥 가는 모습입니까? 지옥 가는 모습이에요. 지옥 가는 모습이라고요.

‘그 사람이 나하고 느지막이 결혼했는데… 아휴, 복음 전하는 걸 방해하네. 그래도 남자가 되어가지고는 내가 끝까지 보살펴줘야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집사님? 지금 갑자기 누가 진지해졌어요? 주님의 십자가고 피 흘림이고 다 날아가 버리고 본인에게 굉장히 진지해진 거예요. 지금 자기 걱정하고 있어요, 자기 걱정을.

복음 하다가 갑자기 인도철학 되어버렸어요. 여기서 내가 뭔가 착한 일을 추가해야 돼. 왜? 착한 일의 영향력은 계속 유효하니까. 업보라는 말은 불교용어니까 함부로 안 쓰겠지만. 지금 6페이지까지인데 접어요! 할 것도 없어요! 내가 왜 이렇게 세게 쳤을까? 또 진지해지려 하는지….

진짜 아시겠습니까? 정말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회까닥 하는지. 말씀은 주께서 이루시고, 그 말씀은 완성된 입장에서 우리를 지적해줍니다. 너는 한 번도 간음 안 해본 적이 없고, 너는 항상 너만 생각하고, 너는 죄 안 지은 적이 없다 할 때, 범사에 찬양과 감사와 기쁨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게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잊지 말기! 잊지 마세요.

자, 65페이지 [35. 골리앗의 죽음] 봅시다. 비슷한 이야기에요, 골리앗 이야기도. 어떤 분이 질문합니다. 질문하기를, 이 분이 고민했던 모양이에요. [질문>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는 성경말씀을 성도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받아들이면 골리앗에 물매를 던진 다윗의 행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리니 가만있으라 했는데 다윗은 왜 싸웁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순진한 질문은 아니에요. 자기한테 진지한 질문이 아니고, 말씀에 진지한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이잖아요. 가만있으라 했으니까 싸우지 말아야 하는데, 왜 다윗은 오지랖 넓게 나서냐 이 말이죠. 가만있으라 했는데.

제 답변은 이겁니다. 골리앗이 창과 방패를 들고 나왔죠. 그때 다윗이 물매와 돌을 갖고 나왔습니까, 안 나왔습니까? 다윗이 갖고 나왔죠. 물매와 돌을 갖고 나왔잖아요. 그런데 무기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무기로 봤습니까, 다윗이? 아니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이름은 존재할 때 붙이는 거예요. 지금 이 현장에 당신하고 나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3의 인물, 주님이 계시다는 그걸 무기로 삼은 거예요. 아까 인도철학하고 비교해보세요. 인도철학에는 그 주님이 없어요.

그래서 66페이지 중간에 보면 [이와 같은 경우는 시편 8편 1-2절에도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영광을 하늘에 두는데 방법은 뭐냐? [주의 대적을 인하여]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에요?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마태복음 18장에서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 할 때, 예수님께서 누구를 내세웠어요? 어린아이를 내세워서 아주 단호한 말을 했어요. “누구든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제자들은 진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얼마나 고민했겠어요. 니고데모의 고민을 안했겠습니까?

네가 어린아이를 닮아라, 이게 아니고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못 간다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천국은 주의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어린아이 같은 내 이름으로 가는 게 아니고! 어린아이 되는 내가 나의 무기가 아니에요. 우리 무기는 하나님께 일체 반입금지에요. 안 받아줍니다, 우리의 무기는.

사실 이 이야기는 매일같이 우리가 누구보고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 자신보고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 자신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우리보고 가는 게 아니고, 십자가의 예수님의 사후 효과, 주께서 일을 치르시고 일을 치른 효과에서 파장이 나와서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도달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러고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말씀이 왜 그렇게 많은가? 여전히 우리 속에 육신은 악마한테 속아 넘어가 있잖아요. 그걸 같이 겸비해서 그 차이, 주께서 주신 영과 인간의 육의 차이를 통해서 예수님 증거하라고, 예수님의 조수가 되라고, 예수님의 보조가 되라고 이 땅에서 거하게 하신 거예요.

그다음 66페이지 맨 밑에, [그 예 중의 하나가,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어서 승리하는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것보다도 신명기, 사사기 기드온에 나오는 ‘붙이시매’ 전쟁. 여호수아에도 많이 나오고, 신명기에 예언되어 있고 그게 실제로 여호수아, 사사기에서 나오는 게 있어요.

해가 막 멈췄어요. 그때 붙여주시는 전쟁이기 때문에. 붙여주는 전쟁이었어요. 붙여준다는 말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사람하고 싸우는 줄 알고 왔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니까 감히 육이, 죽어야 될, 죽은 시체 좀비가 살아있는 생명, 하나님께 대들다가 시체로 다 환원되어서 노출되죠. ‘아, 원래 시체였구나.’ 그걸 보여주죠.

홍해에 빠져 죽은 애굽의 많은 군사들. 세상적으로 말해서는 군에 갔다고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 많이 했겠어요. 호르무즈 해협에서 우리나라 상선 피격됐잖아요. 피격됐을 때 사람들은 누가 조사하러 가는 줄 모르죠. 그런데 우리 십자가 마을에 늘 ‘아멘’하고 좋게 올리시는 그 분, 이상희 권사님 아들이 국방부에 소속되어서 조사하러 갔을 때, 그 아들의 아들이 걱정을 해서 우리 아버지 왜 거기에 보내냐는 거예요. 좀 국가적으로 생각을 해야 될 텐데 그게 아니고 이 육의, 우리 가족의 안위가 더 걱정되는 거예요. ‘그 위험한 데에 우리 아버지를 왜 보냈나? 우리 아버지 언제 오시나?’ 그런데 그 엄마는 내 아들이 국가의 그런 큰일 하는 걸 아주 자랑스러워하죠.

육으로 볼 때 참 위험해요. 소년 다윗의 그 행동은 경솔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형이 말렸잖아요. “너 평소에 까부는 거 아는데, 너무 나댄다. 까불지 마라. 어른들 가는 데에 네가 왜 끼냐?” 형들이 충분히 충고할 만한 상황이에요. 그런데 소년 다윗은 이게 붙여주는 전쟁이라는 것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물맷돌을 들고 가면서 ‘물맷돌 내가 얼마나 잘 던지는 줄 알아? 나 너보다 어릴 때 사자도 많이 잡았어.’ 이렇게 나왔다면 소용없어요.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벌인 전쟁에 나갔습니다. 다윗은 본인이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인도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이처럼 하나님이 벌인 구원 판에 그냥 들어간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요셉의 꿈 이야기도 그래요. 요셉이 꿈을 꾸고 싶어 그랬습니까? 꿈이 요셉을 갖고 놀았잖아요. 요셉이 때로는 옥에 갇히고 국무총리가 된다 한들 그 모든 공로가 누구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했다는 것을 요셉은 주장하면 안돼요. 야곱 아버지의 언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해야 돼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만을 자랑하라고 우리를 이런 식으로 몰아세우는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몰아세울지는 모르겠지만.

67페이지하고 마치겠습니다. 위에서 8번째 줄에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했으니까 다른 이름 속에 우리 이름을 넣을까요, 말까요? 우리 이름은 들어가더라도 주의 이름으로 삭제시켜줍니다. 삭제를 시켜버려요.

어떻게 삭제하느냐? ‘이름’을 ‘육’으로 바꾸면 이 이름을 육으로 바꾼 전체가 바로 영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항상 이 ‘이름’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진지한 거예요. 뭐든지 나에게 진지해요. ‘아, 이번에 바카스 사줄까, 도라지 사줄까? 목이 안 좋은데 도라지 사주자.’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겠습니까? ‘또 싫다 하면 어쩔까?’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제 좀 잊지 마세요. 자꾸 돌아서지 마요.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항상.

67페이지 마저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젖먹이에 불과합니다. 자력적인 행위나 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하지만] 태어나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못 태어났어요. [오직 ‘주의 이름’을 의지함으로써 구원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십자가 믿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심령이 가난한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아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기도하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삼위일체를 알고 믿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예배나 찬양으로 구원되지 못하며, 은혜를 안다고 해서 구원되지 못하며, 예정론을 안다고 해서 구원되지 못하며, 오직 주의 이름 되시는 예수님 그분의 긍휼로 구원되는 겁니다.]

오직 주의 이름 되시는 예수님 그분의 긍휼하심으로 긍휼에 사로잡혀서 구원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벌어진 일이 다윗이 골리앗을 앞장세운 그 전쟁터에 우리를 이렇게 드러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상 아니면 섬길 마음도 없는 우리의 욕망. 하지만 이런 육을 십자가에서 다 지시고 그 결과로 우리로 하여금 차이나는 세상관을 알게 하시니 주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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