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천국 만들기

아빠와 함께 2026. 5. 24. 08:52

광주강의20260522a 사무엘상 13장 9절(천국 만들기)-이 근호 목사


『신구약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42페이지, 오늘 좀 수월하게 시작해봅시다. [20. 시편에 나오는 명령어]. [질문> 요즈음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는 새벽예배 때 시편을 강해하고 계십니다. 오늘 새벽에는 시편 15편을 강해하셨는데, 주 내용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신자라면 10가지의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돌아오는 제 발걸음이 무척 무겁기만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지 못한 저의 책임이 큽니다만, 이곳에서 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면 이 본문이 윤리적인(~하라, ~하지 말라) 문제로 끝날 것 같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말씀에 대한 해설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시편의 중심점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 예배란, 오직 메시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메시아가 없으면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마지막 때에 영을 주시는 분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행 2:31-33).…]

요한복음 4장에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데(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성령, 그 영은 오순절 성령이 오셔야 가능하거든요. 그러니 바른 예배란 인간에게는 없지요.

[만약 인간들의 모임으로만 예배가 된다고 한다면, 사마리아 여인의 오해와 같은 차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하나요, 그리심 산에서 드려야 하나요? 일요일에 드려야 하나요, 수요일에 드려야 예배를 받나요? 주일날은 11시에 드려야 하나요, 오후 2시에 드려야 하나요? 본당에서 드려야 하나요? 교육관에서 드려야 하나요? 집에서 드려야 하나요?’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시편(15편)에 나오는 의인은, 여호와의 관계성 안에 놓인 자입니다. 그런데 온전한 관계는 장차 오실 예수님과의 관계뿐입니다. 따라서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장악하고 관리하고 인도하시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시편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공간적이지만 신약에서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편은 공간적’이라는 말은 시편 시대에는 특정한 장소, 또는 특정한 장소를 향하여 그렇게 예배를 드렸어요. 예루살렘이죠. 그래서 공간적이지만 신약에서는 ‘예루살렘입니까, 그리심 산입니까’ 하는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난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런데 성령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오직 예수님의 의와 공로만을 증거하는 데 모든 활동을 집중하십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그럼 예배하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그럼 예배하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이걸 생각해야 돼요. ‘내가 굳이 인간일 필요가 있는가?’ 이 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굳이 인간일 필요가 있을까? 방금 질문한 이 분의 허점은 뭐냐? 출발점이 뭡니까? 내가 인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문제점이 되죠.

“내가 인간이다. 인간인데 하나님이 계시니까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네가 인간이냐? 너 인간 맞아? 네가 뭘 보고 스스로 인간이라고 자부하느냐?” ‘인간이다’, 또는 ‘인간이 아니다’의 결정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뭐 모양새가 인간 모양을 하고 있으니까 인간 같아 보이죠.

신약에는, 예배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신약에는 예배를 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내가 인간이라고 할 때는 ‘내가 인간이다’라는 것을 증명할, 또는 증빙할 조건, 이유를 누가 동원합니까? 누가 동원하죠? 내가 동원합니다. 이게 문제잖아요.

지금 율법에 의해서 인간이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되는데 자기가 인간답다, 나는 인간처럼 제대로 살아왔다는 조건을 누가 제시해요? 본인이 제시하는 거예요. 누구한테? 타인에게. 타인에게 제시하다가 이제는 하나님도 자기에게는 타인이잖아요. 타인에게 ‘나 인간입니다. 내 경배를 받으시고 내 기도를 받으소서.’ 이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그럼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뭐가 불필요하게 되었습니까? 율법 자체가 아무 소용없게 되었죠. 본인이 본인을 인간답다고 일단 그걸 전제로 깔고 ‘신이시여, 내 기도와 찬양을 받으소서.’ 하는데 그러면 율법은 왜 낍니까?

율법은 무슨 언약이라 하죠? 율법은 무슨 언약입니까? 모세언약이죠. 언약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땅입니까, 하늘입니까? 하늘이죠, 출처가. 그럼 인간은 언약에 대해서 알았다, 몰랐다? 전혀 몰랐죠. 인간은 본인에 대한 조건과 이유를 본인이 알고 있는 걸로 제시하면서 ‘저 인간 맞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굳이 인간일 필요가 있을까?’ 이걸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그럼 신약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까? 그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성도죠. 성도입니다. 인간이 아니무니다. 그들은 성도에요, 성도. 인간은 그냥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는 자이고,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재창조된 자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존재죠. 이 인간은 하나님께서 전혀 받지도 않는 더러운 존재입니다. 자체가 더러운데, 그 더러운 인간이 드리는 예배, 찬양, 기도를 받겠습니까? 안 받지요. 이 더러운 인간 배후에 누가 있어요? 악령이 있죠. 악마가 있어요. 만약에 이 인간이 천국 간다면 그 뒤에 누가 따라 들어옵니까, 천국까지? 악마가 같이 따라 들어오죠.

그래서 여기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은 누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이것은 인간이 못합니다. 인간이 못하고 누구만 할 수 있어요? 인간은 못하니까 누가 하게 하십니까? ‘성령 안’이니까 성령이 하게 하셔요. 성령이.

[…성령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오직 예수님의 의와 공로만을 증거하는 데 모든 활동을 집중하십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다음 계속 봅시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배란, 시편을 펴든로마서를 펴든 오직 예수님의 복음과 은혜성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한데 모여 하나님과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에요, 성도들.

[물론 어느 장소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쉽게 말해서 교회란 고정된 장소 개념으로 보지 마시고, 예수님 복음 중심으로 모여드는 성도들과의 모임과 교제 관계로 보면 됩니다.] 결과적으로 모인 성도들의 모임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는 예수님 중심이라야 하지 결코 교회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끝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 다음 44페이지에 [21. 재질문]. [질문> 목사님의 답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이렇게 어리석은 자들의 글을 보고 계시노라면 답답도 하시련만 늘 성의 있게 말씀해 주시니 말이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는데 지금… 뭐 인간일 경우에 ‘어리석다’ 이게 되는데, 인간 자체가 아닌데요.

[어리석은 질문 하나 더 하겠습니다. 첫째, 시편 15편 1절에서 시인(다윗 - 다윗이 어떻게 또 시를 지었는지… 시를 많이 짓기는 솔로몬이 많이 지었죠.)이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란 구절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오는 자는 어떠한 자입니까’라는 의미입니까? 그렇다면 다윗은 그만큼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 있다는 건가요?

둘째, 마지막 5절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얼핏 보기에도 앞에서 말하는 10가지의 규범들을 지킨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성도의 윤리적인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요? 목사님의 글이 이해되었는데 5절의 이 마지막 말씀이 안 풀리네요. 1절의 시인의 질문도 그렇고요. 부탁드립니다.]

[답변> 언약이란 일종의 노아의 방주와 같아서 그 안에 들어가면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다른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방주의 특징이 ‘폐쇄 공간’이라는 거예요, 폐쇄 공간. 언약 안에 있다는 말은 바깥에, 바깥 세상에서 어떤 기억을 갖고 있든 간에 이미 그것은 끝난 문제에요. 왜? 지금 방주 안 노아 가족 입장에서 바깥은 난리도 아니죠. 바깥에 산 생물이 있어요, 없어요? 다 죽었죠.

지난 낮 설교할 때 노아홍수 이야기했잖아요. 노아홍수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 율법의 그 촘촘함이 어느 정도냐? 소낙비 쏟아질 때 논리상은 빗방울이 위에서 내려오는데 한꺼번에 물 붓듯 쏟아지지는 않잖아요. 빗방울이 시차를 두고 여기 내리고 저기 내리니까 그 중간지점으로 빠져나갈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하는데, 한번 빠져나가보죠. 집에 오면 전부 축축하게 다 젖어 있잖아요.

소낙비 오는 것도 우리가 그 사이사이로 비 안 맞고 못 빠져나가잖아요. 그런데 노아홍수 같은 경우에는 소낙비 오기는 오는데 쏟아지듯이 오기 때문에 못 빠져나가죠. 율법은 이처럼 빈틈이 없다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되는 거예요(2:10). 빈틈이 없어요.

그렇다면 노아홍수 때 심판에 빈틈이 없죠.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물어볼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노아홍수 때 사람들이 뭐 했느냐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죠. 여섯 가지입니다. 그럼 안 먹고 안 마시고 시집 안가고 장가 안가고 장사 안한 사람은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아요?

어떤 조항을 줄 때 열 가지나 스무 가지라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가짓수가 의미가 없어요. 이게 한 가지든 백 가지든 천 가지든 빠질 구석은 없어요.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일곱 번 용서하면 용서로 끝나는 겁니까?” 할 때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일흔 번에 일곱 번.” 사백구십 번 용서하라 하죠. 그럼 사백구십 번 용서하면 끝납니까? 일흔 번에 일곱 번에 일곱 번에 일곱 번 용서하라 하죠.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하나의 인간으로 본다는 것은 개체로 본다는 거예요. 율법을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그러한 조항이라고 보는 겁니다. 율법은 예수님한테 향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어디를 걸려도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구하는 청구서의 빚이 인간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엄청나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 하나 공짜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의 대가로 주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와 살의 대가로 이렇게 목숨이 유지되고 있죠. 그것을 청구할 때 감당 못합니다. 그래서 지옥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이건 참고로 알아두시면 됩니다. 지옥은 뭐로 만들어지느냐 하면 ‘잔’으로 만들어져요, 잔. 그 잔은 무슨 잔이냐 하면 ‘쓴잔’입니다. 이 쓴잔에 뭐가 가득하냐 하면 ‘저주’.

예수님의 쓴잔을 마심으로써 그 취지, 갚아주심의 의미를 모르는 자에게는 쓴잔 안에 있는 예수님이 받았던 영원한 저주가 고스란히 거기에 지옥의 본질로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그 이유가, 지옥이든 천국이든 예수님이 어디든지 주가 되게 하심이라.

지옥은 예수를 우리가 안 믿어서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쓴잔의 부정적 결과물 때문에 지옥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쓴잔, 아버지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했잖아요, 그 저주를 마실 때 이미 지옥은 성사됩니다. 이유는 뭐냐? 내 쓴잔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왜 그들은 쓴잔의 의미를 몰랐는가?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온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은 예수님 빼놓고 어떤 자도 대표자가 될 수 없어요. 피조물은 창조자와 거래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피조물의 형상으로 오셔서 아버지와의 계약, 언약이 체결되면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축복한 자는 복을 받고 예수님이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자는 저주받고. 영원토록. 그게 바로 지옥이잖아요.

이게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한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예수님에게 성취가 되면서 지옥이 마련되어지고 천국이 마련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굳이 인간이 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인간이라고 그런 걸 이야기 안 해도 이미 천국을 가면 되잖아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성도의 기쁨은 다시는 나의 행위와 나의 행동으로 안 돌아와도 된다는 점이에요. Do you understand? 내 행동과 내 행위에 대해서 내가 굳이 안 따져도 나의 운명은 이미 패스(통과)되었고 확정되어 있어요. 세상에, 이런 복이 다 있어요, 이런 복이.

주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결정되었다는 것. 이게 바로 모든 모텔의 문을 다 열 수 있는 마스터 키. 이 방은 천국, 이 방은 지옥. 모든 키는 누가 갖고 있는가? 예수님이 갖고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수준, 위상이 나와 협의하거나 의논할 것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협의에서 끝나버린 그 위상이에요. 그 원칙으로 지금도 성도를 붙잡아주십니다.

그 위상을 여러분들이 내 생각과 내 행동으로 막지 마시고 우리는 그 위상으로만 버텨야 돼요. 평생. 인생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잘할 걸. 그때 그렇게 하면 안됐는데, 앞으로 고쳐야 돼.’ 이러한 식으로 다시 나한테 행동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돌아오는 경우는, 없나이다.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뭐라고 했어요? “없나이다.” 용서를 주님이 하셨잖아요, 일방적으로.

참, 이 복을 시기, 질투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게 누구에요? 마귀. 그 마귀 앞잡이들이 누구입니까? 인간들이죠. 인간들이 시편 15편에서 열 가지 끄집어내는 이유가 뭡니까? 네가 너를 관찰하고 네가 너를 잘 관리하라 이 말이잖아요. 이게 바로 복음에 대들었다는 마귀 종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20번, 21번 질문을 하는데 이 질문한 본인도 마찬가지에요. ‘야, 나 이거 믿기만 하면 이제 구원받겠구나.’가 아니라, 그 사람도 이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인간취급 안한다는 데서 기쁨을 가져야 되겠죠.

자, 율법 나왔으니까 법에 대해서 잠시 보겠습니다. 지난 낮 설교(약 2:10-11, <율법이라는 톱날> 260517)도 법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언급했죠. 율법이 뭐냐? 그때 반드시 ‘율법이 아닌 것이 뭐냐?’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율법이 아닌 것이 뭔지 생각해봅시다.

사무엘상 13장 9-10절, 사무엘상 14장 25절, 그리고 사무엘상 28장 3절, 이 세 구절을 찾아봅시다. 사무엘상 13장 8절부터 보면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 제물을 이리로 가져 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죠. 전쟁할 때 사울이 뭐부터 드립니까? 제사 드리죠.

이거 율법입니까, 율법 아닙니까? 사울이 율법을 왜곡했죠. 전쟁할 때 제사 드린다, 율법처럼 보이죠. 율법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게 율법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율법을 주시고 난 뒤에 그 의미를 인간이 어떤 식으로 터치하고 관련짓고 그걸 이해할 때 동일한 문자로 된, 동일한 자국으로 되어있는 율법이라도 인간을 경유하면 율법이 안돼요.

10절에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올 걸 좀 앞당겨 왔으면 참 좋을 뻔했죠.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이 기다릴 때 왜 제때 안 왔습니까? 사울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진짜 율법을 주신 취지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까발리기 위해 하신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매개로 해서 인간은 율법대로 살고 율법을 지키면 율법대로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이 의식 자체가, 있는 율법의 의미를 완전히 훼손시키는 거예요.

따라서 율법이 뭐냐 하는 것은 반드시 뭐를 거쳐야 되죠? 율법이 아닌 것이 무엇이냐를 거쳐야 율법이 등장합니다. 율법은 반드시 인간이 율법대로 살고 난 뒤에, 행하고 난 뒤에 반드시 뒤에 찾아와요. 그래야 율법이 우리를 지적할 수 있기 때문에.

자, 식사할 때 기도합니다. 율법입니까, 율법 아닙니까? ‘식사하는 게 뭐가 나쁘냐?’ 이렇게 되죠. 식사할 때 기도했습니다. 기도 내용이 뭡니까? ‘이렇게 식사를 줘서 감사합니다.’ 했죠. 기도하고 난 뒤에 국을 먹는데, 짜요. 그럴 때, “오늘 당신 뭐 배고프니까 화가 났어? 화가 나서 나 지금 엿 먹이는 거야? 소금을 왜 이리 많이 넣었어? 응? 화나면 화난다고 이야기해야지, 왜 이렇게 많이 넣었어?”

방금 뭘 냈어요? 화를 냈죠. 그러면 아까 기도내용은 뭡니까? ‘오늘도 귀한 식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죠. 그러면 그 국을 끓였던 아내 자리에 남수단 어린아이가 앉아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지금 굶은 지 일주일 됐는데 짜다는 건 얼마나 포시러운 거예요. 시건방지다는 뜻이겠지요. 지금 우물도 다 말라서 기생충 있든지 말든지 도랑에 고인 빗물 마시는 입장에서 “콩나물국이 좀 짠 것 같아.” 그런 말이 나와요, 안 나와요? 가자 지구에 한번 가봐야 돼. 이스라엘에 잡혀서 가봐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습관상 하는 식사기도 자체가 우리를 지적하기 위함이에요. 그걸 지적할 때, 그것은 율법은 아니고 율법적 기능이 작동한 거죠. 율법적 기능이. 콩나물국을 통해서 우리를 지적하기 위해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어렵게 하지 않고 천천히 하겠습니다. 다시는 나의 행동과 행위로 돌아오지 않게 할 정도로 모든 우리의 미래, 최후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값을 치르고 다 끝났어요. 끝났죠.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뭡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범사에 화 안 내고 감사할 것만 남아있죠.

그런데 콩나물국 하나 짜다고 해서 갑자기 화를 냈죠. 그러면 결국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었던 율법이 복음 안에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용도로 살아있죠. 율법기능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게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이번 주 본문에 나와요. “네가 율법에서 자유로워?” “예.” “그런데 왜 너는 긍휼을 몰라? 불쌍히 여김을 몰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2-13)

그러니 분명히 이것은 인간에게 하는 게 아니고, 성도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도에게. 성도에게 율법적 기능을 발휘해서 그걸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엄청난 가치가 있지만 우리에게 거저 줬잖아요-, 거저 갚아주신 그 갚아주심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진짜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는 것을 또다시 우리에게 일깨워줌으로써 매사에 감사의 폭이 넓어지도록 하죠.

그 다음에 사무엘상 14장 25절, 마찬가지 질문을 할 수 있어요. 14장 24-27절,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으나 요나단은 그 아비가 맹세로 백성에게 명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그 손을 돌이켜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왕이 말하기를 “블레셋 사람이 다 패배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마라. 만약 내 명령을 어긴 자는 저주를 받는다.” 했어요. 이거 율법입니까, 율법 아닙니까? 율법 아니죠. 하여튼 인간에게는 율법이 없어요. 유사 율법이죠, 유사 율법. 유사 율법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 유사 율법, 명령을 내리는 왕의 명령은 하자가 없다는 것을 현실과 억지로 일치되게 하고자 노력하는 거예요.

내가 내린 명령대로 될 때, 그때 주어지는 효과가 뭐다? ‘명령내린 나는 하나님께서 편들어줄 정도로 이게 진짜 현실화되었다.’ 이 말은 ‘나는 그만큼 하나님 편에 서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걸 본인이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도 내 편이다’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아들이 꿀을 먹었어요. “꿀 먹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주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는데, 아들이 꿀을 먹었어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아들 요나단을 죽여야 돼요, 살려야 돼요?

그게 29절에 나오죠. “요나단이 가로되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육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무슨 뜻이냐 하면요. 지금 요나단을 뭐를 보느냐? 블레셋이 하나님 원수잖아요,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럼 결과가 뭐냐?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 블레셋이 망하는 게 하나님이 원하는 거잖아요. 지금 사울 왕은 자기 가오를 세우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어요. 일의 성과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데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오기가 나서 44절에, “사울이 가로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45절에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자, 백성들이, 하나님이 사울 편에 섰다는 말을 합니까, 아니면 요나단 편에 섰다고 말합니까? 요나단 편에 섰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요나단을 공격하는 것은 결국 사울로 하여금 ‘당신은 하나님 편에 애초부터 서지 않았다’는 것을 들키는 셈이 되겠죠.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폼 내다가 아주 우사를 당하는 경우죠.

그 다음에 더 우사스러운 일이 또 있습니다. 사무엘상 28장 3절. 인간에게 나오는 법이 이렇게 한계를 갖고 있어요. 자기의 가오, 자기의 가치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고 항상 그걸 노리고 있죠. 사무엘상 28장 3절,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내었었더라”

쫓아냈는데 블레셋이 쳐들어오니까 7절에 사울이 누구를 찾아갑니까? 엔돌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죠. “무당 굿하는 거 다 죽여라! 쫓아내라!” 해놓고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신접한 여인이 보고 싶어 찾아간 게 아니고, 신접한 여인이 있어줘야 죽은 사무엘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사무엘은 이미 죽어버렸잖아요.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니까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데 사무엘은 죽어버리고, 신접한 여인은 자기가 쫓아내고. 그러니까 답답한 사람이 물 찾는다고, 자기가 신접한 여인한테 가는데 왕이 가오가 있지, 자기가 쫓아내고는 가오가 있으니까 변장을 하고 가요.

변장을 하고 다른 옷을 입고 갈 때, 신접한 여인이 거기에 속아 넘어갑니까, 안속아 넘어갑니까? 안속아 넘어가죠. 9절에, “내가 당신 수법 다 아는데, 점치러 왔다는 핑계대고 나를 체포해서 죽이려고 왔죠?” 그러니까 10절에서 “아니다. 답답해서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도대체 사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요? 자기 구원에 있죠. 자기 위치, 자기 구원, 자기가 잘 되는 데에 있죠. 사무엘상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가 없느냐 하면, 인간 구원은 없어요. 인간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구원이에요. 인간 구원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을 줘도 법을 전부다 자기 위주로 하는 거예요.

45페이지 봅시다. [그것도 ‘다윗 언약’에 속합니다. 다윗 언약이란, 왕 한 분의 신앙심에 의해서 소속된 전 백성이 구원을 받게 되는 방주입니다. 다윗의 성산 진입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는 백성들의 장래를 보장하는 길이 됩니다.

쉽게 생각합시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성산에 이르는 길을 제시받았습니다. 그는 기뻤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찬양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다른 백성은 다윗과 ‘왕-백성’이라는 관계 속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다윗에 의해서 열려진 성산의 생활에 그들이 무상으로 합류할 수가 있습니다.…]

중간에 봅시다. 왜냐하면 다윗은 기름 부은 자에요. 기름 부은 자의 사명을 감당한다, 다윗은 기름 부은 자에요. [시편에 나오는 말씀은 다윗 자신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성산에 먼저 시범조로 들어가야 될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까지는 유대교 신학도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다윗 본인이…] 뭐했습니까? [실패했다는 겁니다. … 마치 십계명을 받은 모세가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을 받은 모세가 십계명 지켜서 구원받았습니까? 질문 들어갑니다. 그럼 모세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힌트, 변화산 이야기. 누가복음 9장에 변화산 나오죠. 변화산에서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무슨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그럼 답이 나왔죠. 모세가 십계명을 지켜서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영생입니다. “내 피와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이다.”(요 6:54)

모세가 십계명 들고 온다고 폼 낸다고 그걸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다윗이 다윗 언약 받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럼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시편 50편 보겠습니다. ‘오늘날 성도, 구약의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가 시편 50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14절이 정답입니다. 앞에 50편 1절에서 13절까지는 제물을 들고 와요. 제물을 들고 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서 제물을 들고 오죠. 그런데 시편 50편 1절에서 13절에, 제물을 왜 들고 오느냐? 산에 있다고 안 받고 들고 온다고 받을 줄 아느냐,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8-12절)

그럼 내가 원하는 것은 뭐냐? 14절이죠. 다 같이 해봅시다, 1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 감사함으로. 왜? 산에 있는 양이나 가축을 안 끌고 와도 되니까. 감사로, 감사로 드리는 거예요.

23절 봅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정답 딱 나왔잖아요, 정답. 그렇게 감사, 감사하는 이유가 다 있죠. 감사하려면 내 쪽에서 행한 게 아니고, 나 말고 다른 쪽에서 행동을 하셔서 그 행동을 하나님께서 받은 결과로서 나한테 감사가 올라왔다는 뜻이거든요. ‘엮어져있다.’ 다른 분의 행위가 나와 엮여져있는 거예요. 그분은 행하고 나는 감사하고, 이런 식으로.

그러면 네 할 일은 뭐냐? 그게 시편 51편 16절,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을 원한다는 말은, 상한 심령을 반드시 경유해야 이제는 더 이상 내 행함, 내 율법지킴에 대해서 내가 미련을 두지 않는 거예요. 율법은 나를 상한 심령으로 유도하고 상한 심령을 만들기 위해서 지적하는 기능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의 은혜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주의 은혜로 여호와의 성을 쌓아나간다. (18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제사 드리고 번제 드리고, 율법에 나와요. 출애굽기, 민수기에 나오잖아요. 신명기에. 그런데 그 율법이, 인간들이 접근하게 되면 졸지에 그게 율법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법이 되고 말았어요.

52편 9절에,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주의 이름을 ‘의지한다’.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어린애는 누가 자기 곁에 있어요. 혼자 못 살아요, 어린애는. 좋으면 좋다고 까불기도 하고 찡찡대기도 하고. 어쨌든 어린애의 특징은 뭐냐? 자기 혼자 있다는 의식이 없고 자기 곁에 의지할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마치 참새나 들풀처럼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거죠.

만약에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자기 행위에 대해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주님의 전면적인 행하심에 대한 전면적인 모독입니다. 그게 바로 죄죠. 주님이 뭘 하든 간에 영 자기 성에 안 찬다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여러분들 이걸 통해서 지옥 가는 사람들을 너무 편들지 마세요. 지옥 가는 사람에 대해서 도와주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도와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옥에서 방향 돌릴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 행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6페이지에서 맨 위에 봅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편에서 예수님의 공적을 발견해야 하고, 그 분이 시편의 말씀을 이룬 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산에 들어가 살게 되는 겁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완벽하지도 못하고 늘 불안한 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는지를 통감하게 되겠지요.] 글쎄요. 질문한 사람이 통감하는지 안 하는지… 저는 좀 자신감이 없어지네요. 자신감이 없어요.

십자가에서 십자가 효과를 결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강도가 한 명이 아니고 몇 명 있었어요? 두 명의 강도가 같이 십자가 졌죠. 구원받은 강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모습에서 자기가 그동안 발견 못했던 자기의 최종 본질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진짜 자기 모습을 거기서 발견한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내가 이 땅에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강도는 자기 자신이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그걸 보고 굉장히 기쁘죠. 자기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강도는 자기가 강도질 했다, 혹은 안 했다에 더 이상 신경을 안 쓰죠. 내 본질을 알려줬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래요. 강도 짓한 나 자리에 뭐가 박혔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거기 박혀버린 거예요.

이제 두 번째 시간에는 제가 초반에 ‘힘’에 대해서 언급할 거예요. 아까 얘기했듯이 우리가 굳이 인간 될 필요 없죠. 인간 아니죠. 그럼 주께서, 인간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을 향하여 ‘너 인간이 아니야’라고 없애버리면서 나타나는 것은 뭐냐? 바로 힘, 또는 힘의 장(場)이 나타나요.

그걸 두 번째 시간에 시작하면서 하겠는데 그 전에 46페이지에 [22. 창세기 12장 1-3절에 대해서] 질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질문> 존경하는 목사님,] 그냥 넘어갑시다, 이건. 실체를 알면 존경이고 뭐고 쑥 들어간다. 아, 22번 질문은 두 번째 시간에 하고요. 마태복음 10장을 잠시 설명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1-22절 보겠습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절에,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피하라’는 말이 나와요. 피하라. 왜 피해야 되느냐?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예수님의 복음의 본질을 실고 움직이는 사람이 돼요.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만들면 성령께서 어느 코스로 인도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갔던 코스 있잖아요, 그 코스를 그대로 밟게 해요. 그러면 이건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성령한테 있죠. 성령님에게 있죠. 그러면 이 본문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 됩니까, 아니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떻게 돼요? 될 수밖에 없죠.

그럼 아까 첫째 시간 초반에 이야기한 율법과 관련해서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이 말씀은 “네가 형제하고 싸우지 말고, 부모하고 싸우지 말고, 자식하고도 싸우지 말라. 그리고 네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도록 싸우지 말라. 그리고 사람들 앞에 견디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 성령께 주도권이 있되 성령이 주도권을 갖는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죄인이잖아요. 죄인이니까 우리는 어떻게 돼요? 예를 들어 23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렇게 되죠. 죄인 같으면 피하겠어요, 아니면 맞서 싸워서 순교하겠습니까? 순교하겠죠. 그게 이단이란 말이죠. 복음 전하면서 미움 받고 복음 전하면서 집안끼리 싸우는 것.

성령은 율법의 완성이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을 율법화 시켜서 누가 지키려 해요? 내가 이걸 지켜야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아이디어를 내는데,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어요! 구원은 주님의 구원이지, 인간의 구원이 없다고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성령께서 이렇게 하게 하신다는 뜻이지, 이걸 의도적으로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이단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냥 사시면 가족들이 미워하더라도 이것은 내가 노린 게 아니고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감자도 안 삶아주고 강냉이도 안 삶아줄 수 있어요. 혹시 삶아주면 고맙게 먹으면 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60522b 사무엘상 13장 9절(천국 만들기)-이 근호 목사


46페이지에 질문이 있습니다. [22. 창세기 12장 1-3절에 대해서] [질문>…제가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공부하게(창세기 11장부터 시작했습니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목사님께 질문 드립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말씀을 곧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는지요? 즉, 2-3절에 나오는 “너”를 오늘날의 “나”로 바꾸어 볼 수 있는지요? 그렇게 보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 신자들 역시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근원인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12장 1-3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부족한 자를 깨우쳐 주세요.] 부족한 게 아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것 같은데….

[답변> 몇 단계 거쳐야 됩니다. 우선 축복과 저주는 사람 중심이 아니라 복음 중심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구원 중심’이지만 ‘하나님은 천국 중심’이에요.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구원 중심이면, 인간은 ‘좋은 나라에 내가 들어간다.’에 꽂혀있어요. 그 나라에 내가 꿈틀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끝까지 견지하고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그리고 자기의 그러한 집요함에 대해서 하나님도 같이 협조해주고 좀 도와주기를 원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이게 바로 종교 아닙니까. 마귀가 만든 종교.

그러나 성경은 인간 구원 중심이 아니고 천국 중심이에요. ‘천국은 이렇다’에요. “나의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네 구원은 없고, 천국은 이러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와 천국을 절단내죠. 관계를 끊어버리면 천국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잖아요. 사랑의 아들의 나라, 골로새서 1장처럼.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끼면 안 되죠.

내가 들어갔다 하면 무조건 나는 누구 나라가 돼요? 이게 예수님의 나라든 뭐든 내 나라가 되니까. 만약 5월 5일 어린이날 돼서 가족끼리 서울에 에버랜드 놀이공원에 갔다 합시다. 그럼 용인 에버랜드의 주인은 삼성그룹이잖아요. 그런데 그 공원에 가면 삼성그룹 중심으로 삽니까? 내 가족 중심이잖아요. 바로 이 의식, 이 사상이 천국가도 마찬가지에요.

유월절에 사람들 많이 모인 데에 예수님의 가족이 갔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 중심이었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누구 중심이었습니까? ‘내 아들 예수 어디 갔느냐?’하고 사흘 동안 찾아다녔잖아요. 지금 이 유월절에 중심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나중에 자기 아버지를 나무라죠.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습니까?” 몰랐지, 그걸 누가 알아요! 당연히 몰랐죠.

여러분 나중에 자녀 결혼해서 손자 낳아보세요. 어디 마을에 갔는데 애가 없어. 장날 구경 갔다가 없어요. 경찰서에 가보니까 어떻게 찾았어요. 그때 손자가 하는 말이 “할아버지,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습니까?”하고, 교회 가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경우에 “너 찾는다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아느냐?” 이렇게 할 때 진짜 효도하는 자식 같으면 “죄송합니다.” 그거부터 먼저 나와야 되는 거 아니에요? 누가 누굴 나무라야 돼요?

그래서 계속 보게 되면, 여기 답변은 이겁니다. 47페이지 중간에 […성령께서는 오직 말씀만 증거하시고, 그 증거자조차 그 말씀에 저촉이 된다는 사실도 함께 증거해야겠지요.] 말씀을 증거하는조차 자기가 전하는 말씀에 의해서 지적을 받는다는 거예요. 따라서, 아브라함 속에 우리가 끼어든다, 안 끼어든다? 끼어들 수가 없죠.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여럿이 아니고 오직 한 분, 예수님이 아브라함 자손입니다(16절).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예수를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할 때 그 믿음은 안 받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가짜인 것을 밝혀내면서 믿게 하죠.

그래서 신앙은 반드시 신앙이 아닌 것을 들추어내면서 신앙의 주인이 나에서 끊어지고 예수님의 신앙이 나를 점령하는 관계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내 신앙이 아니고 주님의 신앙이 벌써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이 증명해주고 있고 성령이 증명해주고 있는 거예요.

다음 [23. 아브라함의 순종] [질문> 4절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란 말이 있는데, 이는 곧 아브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이 아닌지요?…] 아브람이 이렇게 했고 저렇게 했고 쭉 긴데,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 답변을 24번 질문을 통해서 말씀드릴게요.

[24. 아브라함의 기도] 질문에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했는데 정답은 이거에요.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순종했죠.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순종하죠, 아브라함이. 아브람은 불순종이죠. 불순종을 거쳐야… 아브람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왜 이렇게 중간에 끊어져 있어야 마땅하냐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끊어진 것을 이은 것은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이삭이 아브람과 아브라함을 이어주게 되고, 그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이어지는 데에 있어서 희생이 되는 자가 누구냐? 이삭이에요. 이삭. 이삭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면서 순종해서 내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게 아니고, 희생했던 이삭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전환되면서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손의 생산에 있어서 이삭의 희생이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주입이 되겠죠.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이 점을 제가 생각해봤어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천국은 어떻게 달성되는가?’를 제가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는 이미 있는 인간을 공격함으로써 천국이 이루어져요. 이미 있는 인간을 공격합니다. 공격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는 인간들은 구원을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을 원하게 되면 이들이 원하는 천국은 뭡니까? 구원을 원했던 내가 가담하게 된 천국이죠.

예를 들면 마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이 자기가 천국에 먼저 가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 하면서 그 뒤에 나온 말씀이 “천국에 있는 본 자손들은 자기 자리도 아닌데 뭐 하러 가 있는 거야? 다 나와!”하고 부끄럽게 천국으로부터 다 끄집어내서 어디로 집어넣습니까? 지옥에 보내고, 그 빈자리에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 백부장의 믿음이 있는 자만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본 자손들은 이를 갈며 통곡하리라.’ 지옥 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이미 있는 인간들- 유대인들이죠,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제자들이 의식이 있잖아요. 그 의식으로 ‘약속대로, 율법대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한다고 약속했죠?’ 약속대로 어떻게 이루어지냐에 대해서 그들은 관심이 많고, 그들은 천국가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기에는 그게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주님이 이루는 천국에 전부 다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 같은 경우에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을 줘버려요. x축, y축에서 +(플러스)에 있는 인간들을 전제로 하고, 그들이 “우리 어떻게 천국 갑니까?”하면 주께서 말씀으로 “너희들이 무슨 천국을 가?”하고 이렇게 구박하고 그걸 공격하는 식으로 하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출발이 +(플러스)가 아니고 -(마이너스)에 인간이 있어요.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부터 해서 ‘주님이 어떻게 핍박하는 자를 동원해서 천국을 이루겠는가?’ 그 이야기에요, 사도 바울의 편지가. 좀 뉘앙스가 다르죠?

“구원해주소서.” “안돼! 그래가지고 천국 안돼. 저리 가!” 이거하고, 사도 바울은 뭡니까? 핍박하는 자인데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고 있는데, “너희 같은 사람을 건져서 천국을 이루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에요.

유대인들이 막 달려들죠, 사도 바울에게. 너 왜 배신 때리느냐? 다시 옛날로 돌아오라 하겠죠. “그들은 율법도 없는 자들인데 무슨 구원을 받아? 천국을 가? 천국은 율법이 완성되어야 되는데 율법 자체에 해당도 안 되는데 무슨 구원을 받아?” 그럼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럼 율법도 없는데 성령 세례는 왜 받느냐?”

아니, 율법도 없는데 성령 세례 받아버리면 유대인 입장에서는 무슨 절차 하나가 빠졌죠. 구약→모세가 율법 줌→ 율법의 완성으로서 신약 대에 자기 백성 건짐, 지금 순서가 그렇게 되는데, 율법 자체가 없는데 갑자기 성령부터, 합격 통지서부터 와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그들은 율법 준 취지가 날아갔으니까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취지를 누락시키게 되면 사도 바울 네가 전하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그건 이단이다, 이렇게 주장하게 되죠.

요한복음은 뭐냐? 요한복음은 아예 사람이 없어요. 마이너스도 없고 플러스도 없고 사람 자체가 없어요. 요한복음에서는 누구만 있어요? 누구만 사람이에요? 예수님만 사람이에요. 예수님만 사람이라서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절,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그 다음 33절 봅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일을 했는데 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하니까, 선한 일을 해서 돌로 치는 게 아니고 무엇 때문에 돌로 치려 합니까?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모독, 신에 대한 모독죄로 그러하다 했어요.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그럼 요한복음 10장 33절을 통해서 요한복음 전체 내용은 뭐냐 하면,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그거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구원받을 인간 자체가 없죠.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그 분만이 인자(人子)니까, 진짜 인간이고 또 하나님이시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에 의해서 진짜 인간이 요단강에서 받은 세례가 있죠, 성령 세례. 그 다음부터 예수님이 받은 성령 세례를 나누어주게 되면, 인간은 없는데, 천국 갈 인간은 없는데 새로운 백성들이 생기죠. 천국 백성이 새로 생기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이에요.

마태복음 27장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에서 언급하고 강조하는 내용이 좀 달라요.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46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이 인간의 입장에서 아버지로부터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의 육신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버림받으시는 겁니다.

마가복음도 마찬가지에요. 마가복음 15장 34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너 구원받지 마.”하고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다 이루었다”(19:30)에요.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밖에 없어요. 인간은 아예 제켜버려요. 다 이루었다.

누가복음에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없지만 역시 인간적인 요소가 있어요.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요한복음에서도 십자가 사건 앞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나와요. 요한이 모친 곁에 선 것과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19:26-27)

그러니까 어쨌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되든 요한복음이 되든 사도 바울 서신이든, 특히 요한복음 뿐 아니고 요한일서, 이서, 삼서도 아예 인간은 없죠.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인간이 죄 없다 하면 아예 그건 가짜(8절)니까 오직 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물로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걸로 되어있어요.

요한일서 전체, 또는 요한복음 이렇게 전체를 바라보게 되면 천국을 이루는 것은 순전히 누구 소관입니까? 아버지와 아들 소관이죠. 여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애초부터 인간 구원은 없어요. 없는데 인간 구원 아이디어는 누가 끄집어낸 거예요? 마귀가 끄집어냈죠. 마귀가. ‘죽고 난 뒤에 좋은 데 가야되지 않겠느냐?’ 마귀가 그렇게 끄집어내는 겁니다.

구약에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야기지만 창세기 32장 야곱 이야기를 찾아보겠습니다. 1절에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누구를 만납니까?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이렇게 되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어요. 그래서 야곱이 만나졌죠. 야곱이 원해서 만난 건 아니니까.

‘야, 이건 하나님의 군대구나.’ 해서 그 땅 이름이 마하나임이에요(2절). 그리고 헤어졌어요. 야곱 생각에는 ‘천사가 왜 나를 만났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2장 끝에 31절을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해가 돋았죠.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밤중에 일이 있었고, 그 일이 뭐냐 하면 야곱으로 살던 나는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죽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인간을 죽여 버린 거예요. 처음에 만났던 천사들을 야곱은 왜 만나야 되는지 몰랐죠. 자기가 야곱 언약을 받았고, 앞으로의 자기 인생도 자기가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누가 잘하면 되겠어요? 멀쩡히 살아있는 내가 내 힘으로 잘하면 되잖아요. 힘으로.

그런데 “브니엘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장애자가 되었어요. 절었어요. 이제 자기 힘을 의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하고 한판 붙어도 이기지도 못해요, 장애인이니까. 약하게 되어버렸죠. 약하게.

그런데 여기 ‘해가 돋았다’ 했어요. 그러면 해가 돋기 전까지는 어두움이었다. 그 어두움에서 천사와 싸웠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에요, 안 그러면 야곱이었습니까? 야곱이었죠. 어두움의 상황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대결상대, 경쟁상대, 도전하는 대상으로 야곱이 있었어요. 그 시기가 어두움의 시기에요.

그런데 다시 해가 돋았잖아요. 해가 돋으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자기 힘의 원천은 망가졌고, 그런데 자기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다른 사람 되었다. 그러면 해가 돋은 새로운 입장에서 나라는 것은 이제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찾아와서 만났던 그 천사의 세계에 자기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 언약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인도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되어 있죠. 나는 약한데 누가 강해요? 나를 약해지게 하신 주님은 강하게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하신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강하게 진행되면 될수록 내가 점점 더 약해져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힘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약해지려면 어디까지 약해져야 되는가? 방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 바울의 계시를 근거로 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성도가 있고,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식을 낳죠. 흔히 부모들이 낳은 자식이 컸을 때 자식을 압박하면서 하는 표현이 있어요. “너는 내가 낳은 핏덩이다.” 맞는 말이죠. 피가 묻혀서 태어났잖아요. 이걸 한마디로 해서 ‘육신’, ‘육체’ 또는 ‘신체’, ‘육’이죠, 육. 이게 인간이잖아요. 명확한 인간이죠.

그런데 성도는 뭐냐?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 바울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인간은 안 받죠. 천국에서 안 받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은 ‘천국 만들기’잖아요. 인간을 안 받으면서 ‘천국 만들기’에 누가 거기서 사느냐? 새로운 인간들이 살겠죠.

그럼 새로운 인간의 모형, 핵심, 원형,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이 인자가 되어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서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야 될 사람의 원형을 예수님이 보여줬죠. 이게 바로 ‘아들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 말이죠. 거기까지는 이해되겠죠.

이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게 성도인데 천국의 백성은 예수님의 몸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원형인데 천국에 예수님 혼자 계시는 건 아니잖아요. 혼자 계시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천국에는 하나님 계시고, 성령도 계시고, 예수님 계시고, 주위에 보좌하는 천사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천사들이 지시에 의해 땅에 내려와서 야곱을 만난단 말이죠. 야곱을 왜 만나요, 천사들이? 야곱을 만나서 야곱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바뀔 때 곱게 바뀌었습니까, 한판 싸우고 바뀌었습니까? 대판 싸우고 바뀌었죠.

싸우는데 어느 정도까지 싸웁니까? 대충 혼내주고 살려줬습니까? 아니면 그냥 죽여 버렸어요? ‘브니엘’이라는 뜻이 ‘생명(하나님의 얼굴)’이거든요.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30)

야곱을 그냥 죽여 버린 거예요. 따라서 인간이 죽어야 돼요. 죽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천국에서 안 받아준다는 거예요. 일체 인간 요소는 들어가면 안돼요. 그러면 천국 자체가 이뤄지지 않아요. 죽여 버리죠. 죽여 버렸는데 야곱과 싸웠던 천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약한 데서 강함이라”는 말씀을 성사할 수 있는 분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도 이 땅에 와서 약했고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약했잖아요. 요한복음에서는 아주 작살을 냈지만, 아예 인간은 없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약했어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했잖아요.

그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는데, 야곱은 천사를 만났다고 했어요. 그래서 힘이 빠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빠진 정도의 진짜 본질은 신약에 와서 어떻게 되느냐? 천사하고 야곱하고 싸우다가 천사가 죽었습니까? 천사가 죽지는 않았죠. 하나님 쪽에서 오신 분이 죽었어요, 야곱한테 얻어맞아서? 마지막에 어퍼컷 한방 먹이고 살아서 무사히 새벽녘에 다시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만난 예수님은 죽은 척도 아니고 죽을 뻔도 아니고 진짜 죽었습니다. 진짜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천국에 못 간다.’가 확정되었죠.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그 문제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어요. 잘 알고 있는데 제가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것은 아까 그 ‘만남’입니다, 만남. 야곱이 천사를 만났잖아요. 야곱이 천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왜 만났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천사가 야곱을 만날 때는 만날 대상, 야곱이라는 대상이 있었단 말이죠.

그러면 여기 ‘성도’라는 대상은 없어요. 없고, 성도 이전에 인간은 있죠. 인간이 있을 때 주님이 인간에게 찾아오게 되면 인간은 와락! 하고 멧돼지처럼 주님께 달려들겠죠. 인간은 육이라는 자식을 낳았으니까, 아버지의 품성이 그대로 자식에게 이전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였던 그 품성이 인간의 자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겠죠. 인간이 예수님께 달려들겠죠.

인간은 예수님께 달려들고, 그 인간을 만났던 예수님은 또다시 어떻게 돼요? 죽임을 당하죠. 이 일을 반복하는 거예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는데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어가지고 그다음부터는 어두움이 지나고 해가 떴더라. 힘은 약하지만 구원은 받았더라. 어떻게? 언약에 종속된 사람이 되었더라.

그것을 구약 창세기 32장에서 예시했다면, 마찬가지로 ‘인간이 예수님을 만날 때 인간은 예수님을 공격하는 본성 그대로 살아있고, 그 본성에 의해서 예수님은 수난을 당하면서 죽임을 당한다.’ 이 내용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인간에게 다가가는 겁니다.

상당히 논리가 복잡해요.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계시는데 예수님께 뭐가 나오죠? 영이 나오죠. 예수님의 영은 뭡니까? 성령이죠. 성령이 나오죠. 성령이 특정 인간을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요. 인간은 안 됩니다. 뭐로 바뀌어야 돼요? 성도로 바뀌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성령으로 찾아가게 되면 인간은 와락, 성령에게 자기 본색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겠죠.

그러면 성령은 핍박을 받아요. 핍박이 탄식이 되겠죠. 사울이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께서 하는 말씀이 뭡니까? “사울아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한다.” 핍박하는 거예요. 핍박을 받음으로써 무슨 사건이 재현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되풀이 돼요.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이 오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켜서 성도가 될 인간은 십자가 사건 안으로 끌어당겨버립니다. 십자가 사건 안으로 끌어당겨요.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누굴 보냅니까?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성령 세례 준 것처럼 내가 원하는 자에게 성령 세례를 베푼다. 핍박받았다는 사건을 그에게 넘긴다, 그 현장을 넘기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예수님은 단수죠. 구원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돼요. 단수가 예수 이름의 다수, 또는 복수 현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영을 복수 현상으로, 예수님의 사건 안에 여러 인간이 예수님의 한 몸으로 모집되고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으로.

그래서 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 내가 무슨 표현을 쓰느냐? ‘분사(噴射)’. ‘분사’라는 것은 뿌린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어릴 때 골목에 모기차 와서 모기약 뿌리는 것 경험했죠? 아이들 막 뒤에 따라가고 안 합니까. <기생충>이란 영화 보면 나오잖아요. 그때 모기약을 꽁무니로 뿌리는 보건소 차가 있죠.

그러면 애들이 모기약 뿌린 것을 맞으면 이미 그 아이들은 죽은 아이가 되고, 모기약을 먹었으니까 죽은 아이가 되고, 죽었으니까 그들은 모기약만 흠뻑 젖겠죠. 그걸 저는 ‘분사에 의한 힘의 장이 성립된다.’고 보고 이것을 ‘천국의 공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십자가 안’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주는 힘이 작용하는 공간, 그것을 천국의 장(場)으로 보는 거예요. 이 인간을 저는 ‘기체 인간’이라고 봅니다. 오늘 제목은 <기체 인간>이에요. 모기약 알맹이처럼 기체 인간이 되는 거예요. 액체 인간 정도가 아니에요. 더 나갑시다. 기체 인간이에요.

기체 인간의 특징은 사건화 된 인간 존재에요. ‘뭐를 받았다’가 아니라 ‘누가 계속 부여한다’만 강조되는, 그것만 드러내는 그런 존재가 됩니다. 기체 존재가 돼요, 기체 존재. 기체 인간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사도 바울의 모든 복음이 기체 인간으로 전부다 그 안에 사건화 되어서 통합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뭐라고요? 힘의 장. 끊임없이 죄 사해주고 끊임없이 이미 너의 죄를 용서해주는 힘의 장. 힘의 장이니까 우리가 굳이 입자라고 할 것도 없죠. 만약에 입자가 되어버리면, 여기서 입자에 또 반지름이 생기는 거예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주님의 힘의 장에서 자체적인 입자로서 자기의 장이 따로 생겨버리는 것이고, 그럼 천국이 깨져요.

아니, 천국 가서 뭐할 겁니까? 천국에 은혜의 장에서, 생명의 장에서 그야말로 분사된 가스처럼 되어야지, 거기서 개인적으로 존재가 되어버리면 누구 생각하겠어요? ‘아휴, 나는 여기 천국 왔는데 우리 딸내미는 지금 지옥 가 있을 건데. 편지도 안 되고, 한번 전화해볼까?’ 또 이렇게 걱정된다니까요.

아까 자식은 뭐라 했습니까? 내가 낳은 피투성이 자식이잖아요. 갑자기 그 자식 생각한다는 말은 누구를 잊지 못했다는 겁니까? 내가 내 존재를 계속 거기서 의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디서? 천국에서. 그러나 천국에 존재자는 누구밖에 없어요? 천국의 몸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 몸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 몸이 분사된, 몸에서 나온 몸의 지체일 뿐이에요. 단독적으로 내 지체라는 것은 천국에선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표정들 보니까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에요. 내가 각오했지요. 머리카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세상에서는 머리카락이 있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머리카락이 없어요. 머리만 있죠. 머리카락은 어디서 자라납니까? 몸 안에 있어야 자라나는 털이잖아요. 털이 있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나 털이야.’가 의미가 없다니까요, 천국에서는!

천국에서 의미는 뭐냐? “네 털인 줄 아는데 네 털이 어디에 박힌 털이고?” 이걸 묻지, “난 그래도 털인데요?” “그래, 네 털 굵다.” “털이 난 이유가 뭐냐?”하면 “주님의 머리 됨에서 났습니다.” 이거 하라고 털이 된 거지, “나도 털이야. 날 무시하지 마.” 지금 그 소리하라고 된 게 아니잖아요.

머리카락은 있어요, 없어요? 있어도 없습니다! 이게 사도 바울의 복음이에요. 사도 바울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서로 도와주라.” 했잖아요. 이게 예수님을 경유해서 도와주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그것도 성령 안에서. 또 십자가 안에서. 이미 부활의 영, 성령 안에서.

아까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서로 즐겁고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했죠. 왜 평강입니까? 왜 평안하고 기쁘고 감사합니까? 이게 단독입니까, 아니면 누굴 경유했기 때문에 그래요? 경유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머리에 머리카락이 a, b, c, d 이렇게 있으면 누구끼리 싸워요? a, b, c, d끼리 싸운다고요. 머리카락끼리. 네 머리카락은 뭐 금발이다?

노래 했잖아요. 강남강의에서. ‘머리카락이 은발이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늙지 않았다.’ 아, 머리카락이 은발인데 왜 늙지 않았죠? 당신은 뭐 교회 다니고 난 뒤에 벌써 40년 되었는데 많이 늙었네, 그게 의미가 없다고요. 교회 다니고 40년 되고 50년 되어도 우리가 늙지 않는 이유는 ‘늙었다, 안 늙었다’가 우리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지층이기 때문에,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49페이지. 믿든지 안 믿든지 난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머리카락은 없어요, 그냥. 있더라도 없다고요. 있더라도. [24. 아브라함의 기도]. 중보기도 이야기입니다. 그냥 넘어갑시다. 이건 수십 번 이야기한 거니까 넘어가고요. [25. 시편 16편에 대해서] [질문> 목사님, 자세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시편 16편 질문이 뭐냐?

시편 16편에 나오는 내용이 답변에 보면 나와요. 51페이지에 사도행전 2장 25-30절,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보면 52페이지, 53페이지, 54페이지 굉장히 길게 설명했죠. 길게 설명했고, 이것도 여러 번 설명했거든요. 다윗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다윗은 머리카락이다. 다윗은 머리카락이기 때문에 죽든 살든 의미 없어요, 그냥.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이용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다음 55페이지 봅시다. [26.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의미]. [질문>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그 다음 말인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됩니다.…]

거기 보면 [답변>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창대케 합니다.…] ‘사래’가 아니고 누구 이름? ‘사라’. 의미를 바꿔요.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부다 의미를 바꿔버린다고요. 그 전에 있는 사래, 야곱, 아브람은 천국에서 안 받아줘요. ‘아브람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야곱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사래가 어떻게 구원받는가?’는 하나님의 관심사도 아니에요.

인간 구원은 없어요. ‘천국을 이루는 데 있어서 사래와 야곱과 아브람을 어떤 식으로 주께서 언약으로 활용해서 천국 백성 되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그게 관심사다 이 말입니다. 누구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61페이지, [32. 최초의 인간]. 가인이 만난 사람에 대해서인데, 가인이 하나님한테 벌 받고 쫓겨났잖아요. 그때 가인이 사람들을 만났잖아요. 그 사람들 어디서 생긴 사람들이냐, 그 질문이에요.

[답변> 긴긴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연세가 930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경 시대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그러니까 기원전 약 1만 년 전의 인구를 약 400만 명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1000년마다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기원전 1000년에는 전 세계 인구가 약 5000만 명입니다. 인구는 그 후 약 500년 만에 두 배로 불어납니다. 기원전 500년 경에는 약 1억 명이 됩니다. 중국 한나라와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이루던 서기 200년 경에는 인구가 2억 명으로 늘어납니다.] 지금은 인구가 85억 명이 되죠.

[따라서 처음 농경 시대를 시작했던 시절에는 농경지가 제한되어 있기에 가인이 얼마든지 타 지역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농사지을 터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몇 다리 건너면 다 만나게 되어있고, 가인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역사를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인간 자체에 관심이 없어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떻게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특정 사람을 찾아가고 특정 사람을 배제하느냐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의 관심사의 기본이 뭐냐? ‘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자꾸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고 질문을 해요.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답변을 원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 답변을 원하는 거예요. 그 점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의 사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성경을 보면서 다시 생각케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이 뭔지, 내가 낳은 핏덩어리 살리기 위해서 내 자존심이나 의를 살리기 위해서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밖에 모르는 우리를 주께서 어떻게 천국 백성 되게 하셨는지, 그 중간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그 일로 인하여 우리의 미래가 확정되었음을 늘 기뻐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빠진 내용 

… 그러면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게 되냐면, 예수님은 단수죠. 구원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돼요. ‘예수 이름’ 단수가 ‘예수 이름의 다수 또는 복수’ 다수, 복수 현상이 벌어진다. 예수님의 영을 복수 현상으로, 예수님의 사건 안에 성도 여러 사람이… (동영상2, 끝)

[동영상 2와 3 사이의 빠진 부분…“예수님의 한 몸으로 모집,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몸으로. 그래서 이 상황을 내가 묘사하기 위해서 무슨 표현을 사용할 거냐면”]
…분사, ‘분사’라는 것은 ‘뿌린다’라는 뜻이에요, 뿌린다. 여러분 어릴 때, 골목에 모기차가 와서 모기약 뿌리는 거 기억 나지요. 애들이 막 뒤따라붙지 않습니까. 기생충이라는 영화 보면 나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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