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교회
2026년 6월 14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12-17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의 형편에 대해서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6-20) 우리는 여기에 왜 성도들이 괴로움을 당해야 하느냐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과거 삶의 습성이 그대로 우리 몸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권력자들로 하여금 성도를 핍박하도록 방치하듯이 하시는 이유는 구원받은 자로 하여금 자신의 요령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예수님 때문에 구원되었다면 그 예수님에 의해 허락된 고난에 기꺼이 감사함과 고마움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곧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는 방식을 세상의 악한 권세의 압제를 통해서 포기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지키는 식으로 세상을 빠져 나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증인 노릇에 최적화된 분이 등장합니다. ‘안디바’입니다.
이 분의 이름은 ‘모든 것을 반대함’입니다. 신나지 않습니까? 세상 권력을 입고 명령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겁니다. 즉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권력 체제에서 떠나 있습니다”를 드러내면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 예가 바로 악마의 권좌에 있는 자의 정체에 대해서 주저없이 드러낸 사람입니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떠나버린 이 세상은 결코 권력의 진공 상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항상 세상의 어두운 권력망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성도가 스스로 구원을 갖추기 위해 이 말씀, 저 말씀 듣고자 한다면 내부적으로 파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칭찬을 받을 때는 자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면 책망을 받게 되면 자신은 이제 영원한 탈락인가 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 어떻게 세상 삶에 안정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북한을 탈출한 어느 탈북인은 남편은 북한에 있고 아이는 중국에 있고 자신을 한국으로 이끌도록 정보를 언니는 캐나다가 살고 있습니다.
이때 탈북자는 단순히 외로운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자신을 구성했던 과거 기억이 이러저리 분산되어 있기에 진정한 자아로 통합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모든 과거 기억을 어떤 식으로 처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 때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살려달라고 대담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의 소원대로 15년을 더 연장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살겠다’는 히스기야의 소망이 현실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평가가 나오는지 알려주시면서 더 살게하셨습니다.
그 표징이 바로 해시계의 그림자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이사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서 왕에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 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 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 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 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왕하 20:8-11) 히스기야는 죽임에 직면서 지나온 자신의 모든 과거가 한꺼번에 다 날아가버린 것에 애석해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로의 의식이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는 의식입니다. 마치 해가 거꾸로 가는 것처럼 시간을 되돌리는 생각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15년 간 살면서 자신의 무기 창고를 바벨론 사실에게 다 공개했습니다. 그것은 앗수르에서 해방된 결과에 대해서 히스기야왕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한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칭찬과 책망을 대하면서 자기 힘으로 자신의 구원을 얻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예언하신 대로 진행되는 당연한 귀결들이었으니까요. 주님 입에서 나온 검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세상 권세를 작살내기 위한 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원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의 위상과 위치를 본인의 과거 기억을 통해서 정리정돈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미 촛대 안에 놓여 있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되었다고 기뻐할 수 있지만 때로는 세상의 즐거움과 신나는 경우를 상상하면 그리워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옛날 발람 선지자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모압 이방여인들의 현혹되어 우상을 섬긴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민 25장)
성도가 이러한 육신의 본성이 자극받더라도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세상이 어떤 식으로 물결치면서 성도를 유혹하는지 파악토록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빌립보서를 통해서 나타내면 이러합니다. 빌립보서 3:18-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즉 성도는 세상 것에 대해서 굳이 탐을 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은 형편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앞으로 기도한 것은 안디바처럼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이 험한 세상 가운데 제대로 해달라는 이것 뿐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경우에서라도 우리가 해야될 주의 증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요한계시록 2장 12~17절(반대함)26061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2~17절입니다. 신약성경 376페이지입니다.
“서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아멘.
여기에 교회 사자한테 온 편지 내용, 교회 사자라 하는 것은 천사를 말합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답게 지키기 위해서인데, 촛대는 하나예요. 가지가 7개 나와 있거든요. 이렇게 그냥 보게 되면, 분명히 가지가 7개니까 따로따로, 가지 7개가 따로 구분돼 있는데, 그 몸체와 밑에 그걸 받쳐주는 몸체는 한 둥지에서 나왔던 일곱 가지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있다면, 이거는 서머나 교회 교인끼리 통하는 그 이야기가 자기한테 적용되고, 오늘은 버가모 교회 이야기는 오늘날 에베소, 서머나 교회에도 해당하고,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 시대를 떠나서 지역을 떠나서 모든 성도에게 다 공통으로 해당합니다. 해당되는 그 내용은 하나같이 통일돼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어떤 책망을 받든지, 어떤 지식을 받든지, 너는 그리스도의 몸통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한 가지들이라는 이 점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선 우리의 자리를 내 개인적인 개별적 자리에 두지 마시고, 주님의 손에 잡힌 몸통 자리에 우리를 두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몸통 자리에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그 몸통 자리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 걸 소개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2~16절에 보면,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한마디로 말해서 이 지상의 어떠한 형편과 무관하게, 초월적인 영광스러움으로 지금 사도 요한 앞에 나타난 거예요. 이 사도 요한 자리에 오늘날 우리를 여기다 세워봅시다. 세워보게 되면 주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데, 그러면 영광스럽게 해같이 빛나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머리털 이야기, 눈 이야기, 입에서 날 선 검(劍)이 나오는 이야기, 이런 가슴에 금띠를 한 이런 이야기가 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기서 기능들이 나와요.
그 기능 중 하나가, 오늘 버가모 교회 기능 중 하나가, 바로 16절에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劍)이 나오고”라고 했어요. 이걸 삽화로 그린 그림을 여러분들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모양새가 좀 이상해요.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거예요. 날 선 검이 나오면, ‘모양이 좀 이상해. 흉측한 것 같아’라고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 검, 그 칼을 가지고 하실 그 용도가 뭔지, 어디에 써먹을지에 관점을 두시면 되는 겁니다.
그 용도는 이 세상의 권세자를 쳐부수기 위해서 칼이 활용되고요. 그 권세자가 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교회에 속한 성도에 대해서 압박과 압제와 핍박을 하는 기능이 바로 권세자입니다. 그래서 간추려 보면 이렇습니다. 세상에 눈에 보이는 권세자들은 성도를 노리고 핍박해야 하고, 그다음에 주님의 날 선 검은 핍박했다는 이유로 세상 권세자를 작살내는 기능으로 일하십니다.
그렇게 이 세상은 그런 일들을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 권세자가 핍박 없이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가면 되지 않겠는가.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다가옵니다. 진짜 너무 조용해요. 물론 내가 앞앞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부산스럽고 난리도 아닌 걸 내가 모르죠.
모르니까 외부에 드러난 것만 언뜻 보기에는 참 조용하게 사는 듯이 이렇게 느끼지만, 또 여러분들 개인적으로, ‘목사님, 그 모르는 소리 하지도 마세요. 지금 난리도 아닙니다. 자식 때문에 난리도 아닙니다. 하여튼 여러 가지 사정이 이거는 복잡합니다. 지금 해결 안 됩니다’라고 하겠지만, 어쨌든 간에 그 복잡한 게 어디서 오느냐 하면,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로부터 주어지는 거예요.
마치 그 바닷가에 물결 밀려오는 것 같아요. 좀 쉰다 싶으면 또 밀려오고, 쉰다 싶으면 또 밀려와요. 왜 자꾸 세상 권세가 우리를 못살게 굴고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그거는 바로 여기 2장 13절에 보면 그 내용이 간접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위’라고 하는 것은 자리죠. 악마의 자리가 이제 짐승의 자리고 권세자의 자리 자리입니다.
악마의 자리가 있는데, “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권세자 이름을, 그자가 있다는 걸 빤히 보는 거예요. 그렇게 있으면서 보고 있는 이 성도는 주의 이름을 굳게 잡으면서 씨~익 웃는 거 있죠? ‘그래 네가 권세가 있어. 그래그래, 있어’라고 하며, 씨익 웃는 거예요. ‘송파구에 투표용지가 반밖에 없어?’라고 하며 씨익 웃으면 돼요. 늘상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래? 알았어’라고 하면서 뭐 하느냐.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라는 이 말이죠. ‘안디바’라는 이름이 뭐냐 하면, ‘나는 모든 것을 반대한다’라는 뜻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일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누가 나를 네 편이라고 이야기하지 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떤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들이 어떤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나를 꾀려고 한다면, 나는 그 모든 권세에 대해서 반대한다’ 안디바, 상당히 멋있는 사람이죠. 이 멋있는 것은 바로 주의 이름을 충성스럽게 붙들고 있는 주의 증인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면 아마 안디바일 거라는 생각을 안디바가 가진 거예요. 주님이 여기 있다면, 주님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반대했을 겁니다. 신나게. 그렇다면 저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당연하다는 뜻으로, 이상할 게 없다는 뜻으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권세가 작동하는 그 모든 지시와 명령을 나는 반대합니다.
‘이 사람아, 좀 들어보고 이야기해야지’라고 하면, 들어볼 것도 없이 반대합니다. ‘네 성이 뭔데?’ 안 씨입니다. ‘이름은?’ 디바입니다. 디바. 내 이름 자체가 보는 걸 반대한다니까요. 따라서 안디바를 칭찬했다는 말은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 이 버가모 교회는 에베소보다 좀 더 위에 있어요. 에베소 위에 서마나 있고, 서마나 위에 버가모 교회가 있어요.
터키, 지금은 튀르키예 동쪽 끝이에요. 그리스와 마주 보이는, 바닷가에 마주 보는 거기 있어요. 거기에 그 권세자들이 핍박을 많이 했습니다. 핍박을 많이 해서, 예수님 믿는 사람을 이상하게 노리고, 체포하고, 죽이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 안디바의 이런 태도가 이미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했다는 점이 우리한테 참 안심이 돼요.
그 예언한 것이 마태복음 10장 17~20절에 있는데,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네가 핍박을 받거든, 주님께서 그 핍박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예수님의 증인 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네가 핍박받는 사람 되게 한다는 거예요.
따라서 네가 어디 목숨 부지하려는 추잡한 짓은 하지 마라.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이 땅에 호강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살지 마라. 그리고 그때 ‘아이고 내가 이 핍박받으면 무슨 일을 할 건지, 미리 이것 또 내가 알아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알 필요 없다. 19~20절에,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너를 마이크 기능으로 사용해서, 성령께서 네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을 할 것이다. “오케이? 됐지? 그럼 됐지? 그러면 주의 증인이라는 그 자리가 확실하지? 걱정할 거 없지?” 이런 거예요.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을 한 거예요. 그러면 예언 같으면 이제 실현이 돼야 하니까, 그 사도 요한의 이 시대 이후에 드디어 이것이 실연 상태에 돌입됩니다.
과연 권세자들이 핍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핍박받기 위해서 뭐 데모하고 이래야 하느냐. 아닙니다. 이 핍박은 이상하게 일가친척, 가족, 가까운 데서 이 핍박이 일어나요. 서로 아는 사이에서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안디바는 막 즐거워 죽어요. 지금 즐거워서.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을 반대하는 즐거움 때문에 기쁜데, 그러나 이 안디바 말고, 그 교회에 다른 사람들은 권세에 대해서는 항거한 건 맞아요.
하지만 권세 말고 꼬시는 것에 다 넘어갔어요. 꼬시는 것에. 그게 바로 14절에 나옵니다.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라고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회유할 때, 아까 기도 제목에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재미있는 걸 상상하고, 즐거운 것을 상상하고, 신나는 것을 상상하고, 이미 상상할 때부터 본인이 즐거워서 미칠 정도예요. 이것을 상상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현시키려 하니까 진짜 나를 재미있고, 즐겁고, 신나는 일에 자동적으로 현혹된다고 할까요. 거기에 녹아지는 거예요. 거기에 슬슬 끌려가는 거예요.
팝송에 스무스 오퍼레이터(Smooth Operator)라는 그러한 노래가 있어요. 우리말로 뭐냐 하면, ‘능구렁이 작업 꾼’이라는 말이죠. 능글능글한, 능숙한, 작업 거는 남자라는 노래가 있어요. 옛날에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그 발람 선지자가 이래도 저래도 이스라엘이 꿈쩍도 안 하니까, 발락하고 의논하면서, ‘꼬셔 보세요. 이스라엘 저들도 인간입니다. 인간이라면 자기 몸이 즐겁고 신나고 유쾌한 일을, 그 사람들은 마다할 자들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점에 도달되는 것이 모압의 여인들, 바알을 섬기는 모압의 여인들이 동원돼서, 그 이스라엘 사람들을 꼬셨어요. ‘우리 하나님은 이런 것도 용납하는 하나님입니다. 신나게 먹고 마시고 즐깁시다’라고 이렇게 나왔던 겁니다. 그 민수기 25장 보면 그 내용이 나와요. 그래서 얼마를 죽였느냐 하면, 죽은 자가 염병, 전염병으로 2만 4천 명 죽었습니다.
지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몸에 정욕이 있고, 욕망이 있으니까, ‘이미 구원받았는데 뭐 좀 즐기면 어때?’라는 쪽으로 현혹된 자가 있어요. 이런 말씀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행음하는 니골라당도 마찬가지고 똑같이 바알 섬기고 우상 섬기는데 이제 신났어요. 이럴 때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상당히 불편합니다.
왜 불편하냐 하면, 분명히 칭찬했으면 그 칭찬의 말씀에 우리가 같이 있고 싶어요. 있는데, ‘우리는 이제 칭찬받았으니까 됐어. 이제 이 구원받은 거 됐어’라고 이러고 있는데, 뒤에서 자꾸 이건 뭐 옷을 당긴단 말이죠. 뒤 좀 보라고. 뒤쪽을 보니까 발람, 발락의 그런 우상 제물을 섬기는데, 네가 향락에 빠져 있다는 이 소리를 들어버리면, 도대체 우리는 어느 장단에 나를 통합시킬지를 상당히 난감하고 난처해요.
이 점 이야기하고 오늘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는 칭찬도 하고, 책망도 했을 때, 또 뭐 좌절하고, ‘그래, 나는 안 돼. 안 돼. 나는 뭐 세상 적으로 너무 좋아해. 난 화투를 너무 좋아해.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또 이렇게 좌절된다고요. 그래서 이 혼선이 나는 거예요. 어떤 그 탈북자가 탈북했는데, 형편이 이렇습니다. 남편은 북한에 있고, 아이는 중국에 있고, 자기는 한국에 있고, 자기 언니는 캐나다에 있고요.
그러니 한국에 와서 일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를 않아요. 왜? 통합이 안 돼 있어요. 남이라고 할 수가 없거든요. 나를 구성했던 그 과거의 기억들이, 남편과 아이 다 헤어지고, 정보를 줬던 사랑하는 언니까지, 다 따로 하니, 이게 통합이 안 되니까 한국에 살면서 굉장히 심적으로 안정감을 못 가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복음에서는 어떻게, 성경에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네가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해결합니다. ‘내가 어느 쪽에 서면 나는 이제 안전빵입니까? 구원에 안전빵입니까?’라고 하는 것은, 어느 버릇에서 나왔냐 하면, 과거에 자기 일에 하자 없이 충실하고, 아주 철두철미하게, 자기 자신을 야무지게 붙잡으면, 구원도 야무지게 얻는다는 과거에 자기 옛사람의 습관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걸 말씀으로 흔들어버리는 겁니다. 이 구약의 예를 들면 열왕기하 20장에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열왕기하 20장 8~11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죽을 때가 되니까, 자기가 살고 싶어서 벽을 보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자, 여기서 히스기야의 생각을 한번 봅시다. 내가 살았다, 죽었다는 정보는 무슨 정보? 자기가 현재 수집하는 자기의 정보.
그 정보는 어떤 정보? 과거에 내가 익숙하게 축적된 나의 과거 정보예요. 과거 정보에서 나는 살았다가 됩니다. 근데 지금은 죽을 때가 되니까, 과거 정보가 다 날아가니까, 너무 아까운 거예요. 여러분 옛날 앨범 다 잊어버렸으면, 아깝죠. 옛날 동영상 다 날아가 버리면 아깝잖아요.
죽을 때, 그렇게 아까운 이유가, 내가 알고 있던 나에 관한 모든 정보가 한꺼번에 소용없이 되니까 아까운 거예요.
살려달라 했어요. 살려달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살려주는데, 여기 8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라고 하니까, 여기서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징조가 이렇습니다. 거기에 해시계가 있는데, 해시계가 앞으로 가는 게 아니고, 앞으로 빨리 가는 게 아니고, 해시계가 뒤로 10도, 뒤로 물러가요.
이게 15년 치입니다. 15년 치 뒤로 물러가요. 이건 뭐냐. 히스기야, 네가 지금 실수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살려주는지는, 과거를 청산하라고 살려주기 위해서 죽이는데, 히스기야는 그게 아니고, 자기의 과거 정보가 아까워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시계 한번 봐. 그림자 한번 봐. 앞으로 가, 뒤로 가? 뒤로 가는 그게 네 꼴이야!”
왜 자꾸 과거에 연연해? 왜 과거에 연연하냐고! 히스기야가 과거 15년 더 살아서, 나라를 엉망 만들어 놨어요. 잘난 척한다고, 자기 잘났다고 한다고, 바벨론 외국 사절단에게 다 보여준 거, 그거 바벨론이 몽땅 다 바벨론으로 가져갔어요. 그때 바벨론은 그렇게 융성한 나라가 아니었어요. 그러한 지저분한 거, 자신의 수치와 약점과 자기의 허점을 보여주는데, 15년 세월이 소모가 된 거예요.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죽을 때 그냥 죽으세요. 그냥 죽을 때 그냥 죽으세요” 뭐 자식이 어떻고, 더 보고 싶고, 그러니 더 살려주세요. 왜 자꾸 과거에 얽매이고, 과거에 집착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세상에 해시계가 뒤로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앞으로 가야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그 일곱 교회를 붙잡았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 핍박을 받든, 어떻게 살든, 유혹을 받든, 뭔가 칭찬을 받든 책망을 받든, 이것은 어디까지나 잊어야 할 과거 모습이란 말이죠. 과거 모습.
이것이 버가모 교회뿐만 아니고,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전부 다, 오늘날 우리까지 해당 되는 거예요. 과거에 우리가 이미 버려야 될 인생에서 책망 좀 받으면 고맙게 여기고, 칭찬받으면 그것도 고맙게 여기고, 이래나 저래나 좀 자신만만해야지,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아요. 통계에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 1등이 뭐냐? 이렇게 나와 있어요.
보통은 1등이 뭐냐 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건 줄 알죠? 그게 아니랍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이랍니다. 4장 6절이 뭔가 찾아보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게 기복신앙 아닙니까? 이게 과거 정보 아닙니까? 과거에 연연하잖아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 20절에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좀 주저주저하지 마시고, 이 땅에 살면서 깜짝깜짝 놀라지 마시고, 공포에 눌리지 마시고, 어차피 맛 간 거, 과거 인물 아닙니까? 과거는 편하게, ‘자식을 뭐 어떻게 키워야 했는데, 그건 후회스럽다’라는 후회하지 마시고요. ‘아, 이것도 다 지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리석고 어리석은 우리들, 주께서 십자가로 구원하고 영생을 줬다고 분명히 언급했는데,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서 완벽하지 못했다고 서로가 자기를 치고, 반성하고, 자기를 괴로워하는 쓸데없는 짓은, 이제는 주의 말씀을 통해서 오히려 감사로 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