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있는 몸
2026년 6월 14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2:19-26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영혼 있는 몸’이란 하나님이랑 연락이 되는 몸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혼 있는 몸’은 원래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영혼 없는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영혼’이라는 개념과 상관없이 자연적인 에너지의 교환이요 흐름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 이래 살다가 그냥 줄을래”이게 인간들이 속에 있는 본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연락이 될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늘의 천사들이 ‘영혼 없는 몸’을 안 받아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악마 군단이 하늘에 기대 걸지 못하게 합니다. 그냥 땅만 바라보며 살게 합니다.
영혼없는 몸인 인간들은 영혼의 자리에 자신이 끌어 모은 세상 정보들로 그 자리를 꽉꽉 채웁니다. 더 정확한 정보, 더 철저하고 완벽한 최신의 정보가 나를 살린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정보와 자신이 일체성을 갖는데 늘 실패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늘 바른 소리한 여자 교수가 자살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내뱉은 말과 자신이 일치되지 않는데서 오는 좌절감 때문입니다. 즉 항상 자신이 내뱉은 말은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성공할 수 있는 행위는 자살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점은 가룟 유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이 일치되지 않았던 겁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메시야임을 인정하고 예수님과 동일한 생각으로 살고 싶어 있지만 예수님쪽에서 늘 새롭게 발생시키는 사태 진전으로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음을 간파하게 될 때, 예수님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동안 자신이 끌어당긴 각종 세상 정보와 항상 일치되는 삶이 될 수 없었던 겁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세상 정보의 화산재를 뒤집어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지켜주겠다는 자신의 의지에 영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즉 자신이 ‘영혼없는 몸’인 것을 가려줄 적절한 거짓을 위해 바깥으로 정보들을 끌어당시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에 대한 지식, 성경 내용에 관한 정보입니다.
거짓된 자신을 감추어주는 거짓된 것들 중에 가장 그럴사 해보는 내용을 성경으로 차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시도해 온 자살을 향한 빌더-엎 build-up입니다. 차근차근 자살을 향한 삶에 충실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영혼 없는 값’을 하는 겁니다.
사도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의 반대 사례를 둘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요 다른 하나는 기생 라합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점으로 하나님이 세운 자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단순한 과거에 살던 한 인물이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의 조상’입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4:11) 즉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질성을 갖추지 못한 자는 믿음의 대열에 들어서지 못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음과 없음’의 기준점으로 사용하기 위한 경우를 의도적으로 만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보고 모리아 산에 번제를 드리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자,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디서 ‘영혼없는 몸의 믿음’고 ‘영혼있는 몸의 믿음’이 구분될까요? 모리아산으로 가는 도중에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번제 드릴 제물이 안 보이네요” 아브라함이 답변합니다. “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그러나 실은 “모르겠다”를 둘러서 이야기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일은 아브라함 자신이 벌린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벌어진 일에서 아브라함은 바로 등신이 됩니다. 그동안 자신이 축적한 정보가 아무짝도 소용없는 일을 맞이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를 자백합니다. 아브라함을 살리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찾아든 하나님의 정보입니다.
아브라함 끝까지 자신의 무지를 밀어붙입니다. 아들 이삭을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멈춰!”할 때까지 말입니다. 이삭의 대체물로 근처 수풀에 잡혀 있는 양이 들어섭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자기를 위한 하나님’은 애초부터 존재한 적이 없이 드러납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이 이삭은, 그리고 믿음의 후손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을 위해 부름받은 자들이라는 사실로 묶어집니다.
곧 “나는 없음이요 나는 죽음”임을 고백하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곧 ‘영혼 있는 자들입니다. 그 다음의 예는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기생 라합의 경우입니다.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수 2:21)
이러한 자신들의 근원지, 태생지를 포기하기 위해 정탐꾼 둘과 헤어지고 난 즉시 기생 라합은 창에 붉은 줄을 겁니다. 이러한 자기 붕괴를 위해 기생라합은 현 권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수 2:4-5)
영혼 있는 몸, 곧 약속에 와서 자신을 둘로 쪼개버리는 일이 연속적인 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나‘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나’로 구분됩니다. 자기에 대한 정보의 누락을 반기고 감사하게 됩니다. 성도는 늘 움직입니다. 약속을 위해, 주님을 위해 움직입니다. 더는 자신을 위한 인생을 없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수시로 주님으로부터 연락이 주어져서 내가 알던 나를 늘 버리도록 요청받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야고보서 2장 19-26절(영혼 있는 몸) 26061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2장 19-26절입니다.
야고보서 2:19-26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영혼 없는 몸’이라고 이러한 단정, 규정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는 욕설에 가까운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네 몸은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영혼이 없다. 영혼 없는 몸은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몸이 아니다”라고 거절하죠. ‘영혼 없는 몸’이라고 할 때 이 ‘영혼’은 하나님과 연결할 수 있는 창구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되니까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식과 계시가 주어지지 않는 몸이니 설쳐도 혼자 설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국에 못 오게 하기 위해서 하늘나라에서는 두루 도는 천사가 천국을 막고 있고, 땅에서는 마귀가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차단에 대해 인간이 상당히 섭섭하게 생각하는데, 천국 갈 수가 없는 몸을 가지고 뭐 어쩔 건데요? 몸 자체가 영혼 없는 몸으로 태어난 걸 뭐 어떡하란 말입니까? 받지를 않는데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는 영혼 없는 몸이다”라고 했을 때 인간은 반발이 일어나죠. “내 몸은 내가 잘 압니다, 하나님. 이 몸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천국 따내겠습니다, 천국 가겠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인데 거기다가 성경 공부를 하고 말씀을 보고 이래요. 자신이 누군지를 잘 모르고 ‘지식으로 추구하면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겠죠.
그런데 인간이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듣는 것은 자신의 몸을 가릴만한 어떤 적절한 거짓말을 찾고 있지는 않은지. 진짜 자기의 영혼 없는 몸을 감추기 위해서, 하나님과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성경 많이 보고 어떤 사람은 백 독을 했다, 어떤 사람은 히브리어 헬라어 가지고 분석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거짓말이 필요한 거예요. 자기가 믿음 없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거짓말이 필요하니까 고상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 이 말씀 가지고 챙길 대로 챙기는 노력을 하는 겁니다. 안 들킬까 싶지만, 야고보 사도한테는 이걸 다 들키는 거예요. “네 몸부터 생각해라. 자꾸 공부나 할 생각하지 말고 네 몸이 영혼이 없는 몸이야.” 하나님과 아무 연락이 안 돼요.
정전됐는데 자꾸 코드 꼽아봐야 밥솥이 안 돌아가거든요. 벌써 인간은 이 세상 정보를 완전히 화산재처럼 뒤집어쓰고 살아가요. 세상 정보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자신을 숨길대로 숨길 수 있는 재료가 돼요. 굉장히 바쁘고 혼자 분주해요. 바쁘고 분주하고, 또 얼마나 성경 좋아하는지 부지런하다고요. 그런데 영혼 없는 몸은 한결같이, 똑같이 영혼 없는 몸이에요. 하나님의 믿음이 도달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그런 이야기를 딱 했을 때 단박에 인간들은 어떤 쪽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하면, “그러면 영혼 있는 몸이 되면 되잖아요?” 이렇게 나오죠. 그런데 타고난 게 영혼 없는 몸이에요. 어떤 분이 자살했습니다. 그 여자분이 대학교수예요. 대학교수로서 자살했단 말이죠. 주변에서는 우울증이 걸렸다, 이렇게 하는데 자살 분석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분석했어요.
자기가 내뱉는 말과 자기와의 일치성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유일한 성공, 자기가 자진해서 자기를 없애버리는 것이 유일한 성공이었다. 내가 대학교수인데, 미국에 유학도 다녀왔어요, 자기가 평생 공부했던 그 모든 지식, 자기가 말하는 모든 것이, 그것을 무화(無化)라고 하는데, 내가 되고 싶은 그것에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나다운 나’에 실패하고 있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평소에 내질러놓은 말발이 있잖아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친절하게 하고, 훌륭한 교수님 소리 듣고 그 모든 것이, 그 말과 자기 자신이 일치가 되질 않아요. 하나가 되지 않아요. 하나가 되려고 애를 썼는데…, ‘여러분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저렇게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좋은 소리를 많이 했겠어요? 영문학 전공이니까 얼마나 철학적으로 이야기를 했겠어요?
그러나 본인은 일치가 안 되니까 그 실패를 견디지 못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공은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는 것’, 그래서 자살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이야기하지만, 복음적으로 볼 때 그 사람들은 자살 이유를 찾지 못해요. 복음적으로 이야기해서 그 자살한 사람은 평생동안 뭘 끌어모았느냐 하면, 나를 위한 정보들을 끌어모았어요.
정보의 화산재를 뒤집어쓴 겁니다. ‘이 정도 알면, 이 정도로 많이 알기 때문에 나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부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계산하에 열심히 공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뭐냐? 제발 좀 진실하게 살고 싶은 거예요. 진실하게 살면 내가 보기에 나는 사랑할 만한 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찬송가 나오죠?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생 라합은 거짓말했는데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로 선택한 가룟 유다가 자살로 끝났잖아요. 이것은, 모든 인간은 자기가 끌어모은 정보, 지식이죠, 돈도 포함되겠지만 자기의 정보와 자기자신의 그 말에 스스로 책임지려고 일치시키려고 하는 순간 태어나면서 자살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자살로 가는 빌드업(build-up) 과정에 속한다는 거예요.
‘빌드업’이라고 하는 것은 축구에서 골키퍼가 공을 잡고 수비진을 통과해서 중앙 미드필드를 지나 공격진까지 차근차근 골을 위해 다지고다지고, 쌓고쌓아나가는 인생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릴 때부터 ‘이렇게 하면 돼, 저렇게 하면 돼?’ 철저한 자기 사랑에 기초해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정보를 모았는데 그 마지막은 가룟 유다가 간 똑같은 장소에 가요, 지옥에 가요. 자살하기 위해 빌드업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영혼 없는 몸’이 노력한다고 해서 ‘영혼 있는 몸’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영혼 없는 몸, 영혼 없는 몸이 갖고 있던 자기 사랑은 뭐냐? 그게 19절에서 뭐냐 하면, 귀신들도 자기 사랑을 해요. 귀신들은 지극한 자기 사랑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저항하죠, 예수님께 시기 질투하고. 이게 얼마나 극단적인 자기 사랑입니까?
극단적인 그 자기 사랑을 아담과 하와에게 물려줬고, 아담 하와가 물려받고 난 뒤에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 중 하나가 가인이었습니다. 가인이 지독한 자기 사랑으로,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나타났을 때 창세기 4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그 전에 가인이 원래 있던 곳, 아담과 하와가 있던 곳은 하나님과 연락이 되는 장소였어요. 그런데 동생을 죽이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내린 벌은 다른 게 아니에요. “너 이제부터 연락 안 된다.” 그게 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는 곳을 떠나서, 하나님 앞을 떠나서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갔을 때 그다음부터 가인이 한 것은, 하나님이 연락했던 그 공간을 인간들의 관계를 꾹꾹 눌러 담으면서 채운 거예요.
이게 세상 정보입니다. 하나님의 정보는 날아가 버리고 세상 정보로 자기를 꽉꽉 채우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야고보에게 들키죠. “이 영혼 없는 몸아! 네 몸의 움직임은 하나의 에너지야.” 영혼이 아니고 하나님의 연락 창구가 없이, 그냥 자연의 에너지로 인한 몸으로 너는 부지런히 열심히 공부하고, 뛰고, 축구하고 난리도 아닌 거예요. 그뿐이죠.
그 뒤에 인간들이 얼마나 종교를 만들어냈습니까? 기독교도 불교도 만들어냈죠. ‘천국 가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 간다’라고 얼마나 교회에서 선전을 해댔습니까? 그런데 본인 당사자는 영혼이 없는데요? 영혼 없는 몸이거든요. 야고보가 아주 질타합니다. 사정없이 지적하죠. ‘숨길 걸 숨겨라. 출생 자체가 영혼 없는 몸으로 태어났는데 종교 생활한다고 네 몸이 바뀔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에서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하면, ‘영혼 없는 몸’에서 ‘영혼이 있는 몸’으로 바뀌면 돼요. 이것은 인간 쪽에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노력해 봐야 아래서는 마귀가 막고, 위에서는 천사가 막고, 들어갈 수가 없죠. 그래서 야고보는 여기서 ‘영혼 있는 몸’을 예시로 제시합니다. ‘영혼 없는 몸’ 말고 ‘영혼 있는 몸’을 하나님이 등장시켰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는 ‘누락’이고 하나는 ‘죽음’이었습니다. 누락이라는 것은, 빠졌다는 뜻이에요. 누락을 보여주는 쪽은 기생 라합 쪽이고, 죽음을 보여주는 쪽은 아브라함 쪽이에요. ‘뭐 아브라함은 옛날 사람’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나 로마서 4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장 16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지금 아브라함을 등장시키고, 이제부터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 이야기를 할 텐데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공통점이 뭐냐? 타인의 요청 앞에서, 남의 요청 앞에서 자기를 누락시켰다는 것, 기생 라합이죠, 그리고 자기를 죽였다는 것,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물론 로마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 자기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덮이니 아브라함이 자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아까 여교수가 자살한 이야기를 했는데, 대학 교수니까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저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내가 알아야 실력 있는 교수가 된다’라는 그 생각을 했겠죠. 자기가 누락된다든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자기한테 어림도 없는 생각이에요. ‘왜 나에게서 내가 빠져? 말도 안 돼. 내가 왜 죽어? 악착같이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야지.’ 이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 말은, 타인의 요청에 대해서 내가 지고 싶진 않은 거예요. 내가 패배하고 싶지도 않고, 타인 앞에 “나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서기도 싫어요. 그리고 타인 앞에 “나 많이 모자라죠? 말도 안 되는 등신 같아.” 이러기는 더욱더 싫어요. 타인의 요청과 내가 동질성, 일치되는 데 실패한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예요. 예수님이 요구한 그 말씀에 가룟 유다는 열심히는 했는데 예수님과 자기가 동질성이 안 되네요, 동질성이! 미칠 지경이에요, 미칠 지경. 다른 제자는 몰라요. 베드로는 뭐 세 번씩 예수님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이랬죠.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가룟 유다는 심각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자기가 일치되는데 나름 노력을 했어요.
그런데 일치가 안 되네요. 이것은 뭐냐? 주님이 보시기에 자기가 실패자인 거예요. 실패자니까 유일하게 실패하지 않는 방법은 뭐냐? 마지막에 내 몸을 내가 알아서 처리해 버리는 거예요. 나무에 목매 죽어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타인이잖아요.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하셨는지를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에 보면, 예수께서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결론이 8절에 보면,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 하나가 성립됩니다. 큰 나무가 있는데 어떤 것은 5톤이나 나가는 엄청 큰 나무가 있어요. “나무의 그 질량이 땅에서 왔습니까, 다른 데서 왔습니까?” 하는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나무가 땅에 심겨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거니까 사람들이 안일하게 생각해서 ‘나무가 그렇게 큰 질량이 나가는 것은 땅에서 올라온 영양분 때문’이라는 생각을 할 거예요.
그래서 16세기 때 얀 밥티스타 판 헬몬트(Jan Baptista van Helmont, 1579-1644)라는 벨기에 과학자가 실험을 해봤습니다. 당시에는 플랑드르니까 지금의 프랑스죠. 2.3kg의 버드나무를 90kg 화분에 5년을 심어놨어요. 나무가 76kg이 되었습니다. 나무가 76kg의 질량이 나왔다면 그만큼 흙이 홀쭉하게 되어야 하는데 50g밖에 안 줄었어요.
“이것저것 빼고 그 나무의 74kg이라는 질량은 어디서 왔습니까?”라는 질문을 그 과학자가 했어요. 그리고 해답은 몰라요. 모릅니다. 수분 다 합해도 안 돼요. 어떤 참나무는 5톤짜리도 있다는데요. 물기 뽑아봐야 그 수소 가지고도 안 돼요. 그러면 어디서 왔는가? 공기에 0.04%의 탄소가 있는데 나무의 구조를 보면 전부 탄소로 되어 있어요. 그걸 유기체라고 해요. 탄소의 조합으로 되어 있어요. 그 탄소는 바로 공기에서 온 겁니다. 0.04%의 탄소가 있는 그 공기가 나무를 그렇게 큰 덩치로 만든 거예요.
지금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씨를 뿌려요. 씨를 뿌렸는데 많은 열매가 맺혔단 말이죠. 이 씨앗은 어디서 왔는가? 제자들은 모릅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열매가 왔는지 몰라요. ‘농부의 노동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4).
스스로 자체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자체적으로 ‘영혼 없는 몸’이 ‘영혼 있는 몸’이 될 수 있는 길은 아예 차단된 가운데서 말씀의 씨앗을 뿌리면, 그 말씀이 예수님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팽창이 되고 확장이 되면 그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는 ‘예수님 안’에서 바로 하늘나라가 이뤄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기는 보이지 않는 데서 나무가 되듯이 말씀의 활동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영혼 없는 몸’에서 ‘영혼 있는 몸’으로 바꿔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영혼이 없었는데 영혼이 있다’라는 것을 무슨 수로 우리가 알 수 있느냐? 성경에서는 영혼 없는 몸의 결과, 영혼 없는 몸의 작자들, 그 인간들이 했던 행태를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드러내 줍니다.
드러내 주게 되면 비로소 ‘영혼 없는 몸은 이것이다’라는 것을 아는 자는 이미 그 사람 속에 하나님과의 연결 창구가 생겨버린 거예요. 영혼 있는 몸이 된 겁니다. 이제 아브라함 이야기로 돌아와서요, 아브라함이 누구냐 하면,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점이에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지옥 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현상을 인정하면 영혼 있는 몸이 되어 천국 가고,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것을 ‘뭐 지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단지 아브라함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 사람에겐 생전 믿음이라는 게 없어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그 현상, 그 현상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같은 믿음의 동질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왔을 때 아브라함 본인의 존재나 생각이나 자기가 끌어모은 정보는 있으나 마나 한 거예요, 있으나 마나 한 것.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걸 노렸죠. 아브라함의 아내 나이가 벌써 90이었죠. 아기를 못 낳아요. 이것을 아브라함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사라 본인도 알고 다 알고 있어요. 주께서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게 아들이 생길 것이다”(창 18:10. 14). 그때는 부부 사이 정이 아주 좋았어요. 둘 다 피식 웃었습니다. 말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를 해요.
영혼이 있게 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본인이 영혼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버리는 거예요. ‘네가 이 말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하지, 그렇지? 네가 지금 그 정도야. 너의 본모습이 그래. 네가 성경 공부를 해봐야 소용없어.’ 넌 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왜 못 알아듣는가?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타인의 요청이 필요 없어요. 나는 내가 알아서 내 인생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타고난 거예요. 훈련해서 된 게 아니고 타고난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면서 ‘아브라함이 믿음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다’를 가늠하는 하나의 지시를 내립니다. 타인의 요청이죠. 하나님이라는 타인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합니다. 지시할 때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습니다’에 지시한 줄 알았죠. 실제로 그 지시에 따라서 자기 아들을 번제로 바칠 채비를 해서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지금 야고보는 그걸 딱 주목하는 거예요. “거 봐, 움직였잖아, 움직였잖아!” 세상에 사랑하는 독자, 미운 자식도 아니에요. “진짜 ‘너 없이는 못 산다’ 하고 사랑하는 그 아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아브라함이 움직였잖아!”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행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움직였다는 거예요. 움직이지도 않고 “믿습니다!”라고 하는 그것은 소용없다는 거예요. 주님이 뒤에서 떠미니까 아브라함이 움직인 거예요.
지난 서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게 떠밀 때 야속하게도, 정말 야속하게도 물어요. 아들 이삭이 물어요. “아버지.” “왜?” “땔감도 있고 불쏘시개도 있고, 그리고 제사드릴 아버지도 있고 나도 제사에 같이 참여할 건데, 그런데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번제할 제물을 안 챙겼네요?”
정답은 이거에요. “나도 모르겠다.” 이걸 이제 둘러서 “하나님이 준비하실 거다”라고 했는데 ‘나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라는 타인이 말씀을 줄 때는요, 우리를 무슨 상태로 바꾸느냐 하면, 나는 무지한 상태로 바뀌어요. 나는 몰라요. 모르는 것을 세상에서는 ‘등신’이라고 합니다. 똑똑이가 아니고 바보 등신이에요. 점점 더 자아로부터 느슨해져요. 본인이 본인 인생을 챙기지 않습니다.
등신이 챙겨봐야 뭐 합니까? 그것을 남들은 미쳤다고 하는데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 사도 바울 보고 미쳤다고 하니까 “그래, 미쳤어, 미쳤어. 내가 사랑에 미쳤어. 사랑에 미쳐서 내가 날 추스를 줄도 몰라. 난 바보 등신이니까. 사랑밖에 난 몰라. 난 그 앞에서 등신으로 충분해.” 미래, 내년 계획, 그것을 왜 아는데요? 그것은 당겨서 아는 정보잖아요, 정보.
월드컵 한국팀 32강? 그런 거 몰라, 그런 것은 알 필요 없어요. 지금 내가 끌어모은 나의 미래나 내 정보가 희박해지기 시작했어요. 주님은 이것을 일체 인정을 안 해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나오죠.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우리가 지금 이런 아브라함과 일치성을 갖고 있어야 돼요. 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니까요.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 아니면 하늘나라 천사가 문을 안 열어줘요. 노아도 마찬가지겠지만, 비 온다고 방주 만드는 이런 바보 등신 같은 짓이 어디 있어요? 아무리 봐도 하늘에 구름 한 점 보이질 않는데요. “큰비가 와서 다 죽는데.” 이것은 말 같지도 않은 거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얻어오는 그 정보가 나에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정보로서 주께서 그렇게 처리하는 거예요. 내가 끌어모아서 알았던, 남들에게서 들었던 모든 귀한 지식이 ‘영혼 없는 나’를 ‘영혼 있게’ 만드는 지식과 정보가 아니에요. 신학의 문제점이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통해서 한 단어로 제가 표현하고 싶어요. 나와 나의 분열. 나와의 일치가 아니고 내가 모르는, 내가 알던 나와 내가 모르는 나 사이의 갈라짐, ‘굿, 굿바이! 안녕!’ 걱정하는 나와 걱정조차도 되지 않는 나, 그 새로운 나 사이의 균열, ‘바이바이, 안녕!’ 나와의 작별. 왜 이런 분리, 또는 분열이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천국의 서류를 작성할 때 직업, 묻지 않습니다. 나이, 안 묻습니다.
나이 많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나이 적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에요. 나이도 필요 없죠. 직업도 필요 없죠. 나이나 직업은 내가 나다운 나를 뭉치기 위한 정보로 활용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나와 헤어지기 때문에 전에 꽉 붙들고 나의 자존심, 나의 체면 챙기는 그것과 점점 더 손을 놓게 돼요. “안녕~, 잘 가!” 내가 알지 못하는 나와, 내가 꾸준히 알았던 나 사이에 헤어짐이 발생하는 거예요.
로마서 4장에 의하면, 나와 나 사이의 그 틈에 하나님의 약속이 끼어듭니다. 약속이 끼어들어요. 딱딱한 돌을 캐내는 인부들이 쐐기를 만들어서 그걸 망치로 때리면 그 단단한 돌들이 두 조각나듯이 주님께서는 말씀을 우리 속에 집어넣고 말씀의 그 쐐기를 치면 우리는 쪼개지는 거예요. 그 쐐기가 신약 성경에서 누구냐? 영혼 있는 몸. 유일한 영혼이 있는 그 몸이 누구냐? 예수님이죠. 왜? 예수님은 주님과의 연락책이니까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은 구약 사람이에요. 예수님 오시기 전의 사람입니다. 구약을 경유해서 신약을 봐야 하는데 신약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버려요. 그러면 구약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자기에게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구약 그 사람들은 무식해서 그렇고, 우리 신약은 예수님만 알면 됐지.’ 아니에요. 구약 선지자에게 이미 예수님이 그들에게 미리 갔어요. 미리 당겨서 가서 신약에서 일어날 일을 구약 성도들에게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그들을 쪼갰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어요. “아버지,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이삭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정말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제사의 핵심은 제물이에요. 그런데 제물이 없이 제사를 드리려는 아버지의 모습, 그 아버지가 얼마나 낯설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할 말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겠지.” ‘여호와 이레’에요.
그런데 주께서는 끝까지 준비 안 해요. 끝까지 준비 안 합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이렇게 했거든요. 자,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는 말은, ‘네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 그리고 나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그 믿음의 한계가 그대로 있는지, 아니면 네가 알고 있는 그 믿음에서 벗어났는지’를 시험하려고 주께서는 그 일을 지시한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주님의 지시대로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움직였다는 거예요. 뭔가 움직인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데리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였다는 말은, 오늘날 성도가 성령을 받고 난 이후에 그 모든 삶이 바로 하나님의 믿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찾아가는 여정인 겁니다. 내 것을 바보 등신 만드는, 나를 바보 등신 만드는 일의 연속이에요. 성경 지식이 아니고, 성경의 말씀이 내가 아는 나의 모든 것을 쪼개는, 순간순간 쪼가리 내는 쐐기로 작동하는 거예요. 약속이 나를 항상 쪼개기, 쪼개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드디어 갔습니다. 제물도 없어요. “이삭아!” “예!” “누워라.” 이삭은, ‘망했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할 수도 있었겠지요. 반항할까 봐 꽁꽁 묶었겠죠. 아직은 안 죽였으니까. 칼을 들고 ‘이삭아, 미안하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왜 진작에 아버지가 “이삭아. 내가 친절하게 이야기 해줄게. 제물은 사실은 너야.” 왜 말을 미리 안 해줬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을 진짜 몰랐기 때문에 말을 안 한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게 그게 다예요. 그래서 설명할 때 눈에 보이는 내가 아는 정보로서 “이겁니까?” 하는 식으로 “하나님, 이삭이 제물 맞지요?” 하는 식으로 자기가 아는 정보는 다 털어냈어요. “이거죠?”라고 내놨어요. 주께서 멈추라고 이야기합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알고 있던, 평생토록 자기를 키우고 살려온 모든 정보가 그 ‘멈춰라’에 끝장났어요. 이것은 내가 알던 ‘영혼 없는 몸’으로서 열심히 살고 가꿔왔던 내 자신이었습니다.
멈춰라. 그때부터는 뭐냐? ‘영혼 없는 몸’이 ‘영혼 있는 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대체물이 필요합니다. 옆에 있던 양이 마침 발견되어서 양을 가지고 이삭과 바꿔치기했습니다. 바꿔치기했어요. 그래서 제가 서울 강의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전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알았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그 양을 위한 나였구나. 양의 양 됨을 위해서 주께서 나를 그동안 끌어왔구나.’
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양만이 영혼 있는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락이 되는 몸이기 때문에 바꿔치기 한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꿔 치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영혼 없는 몸이라도 충실하게 활용했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이것을 버리면 안 됩니다. 영혼 없는 몸, 나밖에 모르는 몸, 자살로 빌드업 해가는 몸, 자기한테 충실한 것을 사는 보람으로 여기는 이 몸, 이 몸이 있어 줘야 해요.
있어 줘야 그 안에서 ‘나를 위한 나’에서 이제는 ‘나를 위하지 않는 나’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타인, ‘예수님을 위한 나’가 돼요. ‘나를 위하지 않는 나’는 그냥 겸손이에요. ‘나 부족하다’로 끝나는 겁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것은 겸손 떠는 거예요. ‘나 못났습니다.’ 그것은 겸손 떠는 것이고, 그게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주께서 나를 평생 이끌고 왔던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알던 나는 어디에 예속되느냐? 주님의 정보에 예속이 되는 겁니다. 지난날 헛짓했던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주님 앞에서 다 고귀한 거였습니다. 그래야만 했던 인생 여정이에요. 과거 후회하지 마세요.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나?’ 그거 후회하지 마세요. 그래야만 했던 겁니다. 그런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거예요.
이제 과거, 그리고 나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이 점점 더 희미해지고 희박해집니다. 별로 뭐 중요하지도 않아요. 앞으로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삽니까?’ 자체가 날아가 버렸어요. 이제는 하루하루가 주님이 주신 그 쐐기의 약속, 그 정보가 나로 하여금 매 순간 옛사람과 새사람 둘 다를 알게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될 거예요.
나를 위한 하나님은 이제 있기, 없기? ‘없기’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없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한 나’일 뿐이에요. 따라서 교회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마지못해 들어보자.’ 이것은 아니지요. 이것은 영혼 없는 몸이고, ‘주여, 오늘도 지적해 주세요. 저를 좀 박살 내 주세요. 그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못난 나를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게 했는지 그 놀라운 일을 더욱더 감사케 하옵소서.’
천국에 있는 천사가 못 들어가게 하고, 지상에 있는 악마가 못 가게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뚫어냈어요? 그것을 어떻게 뚫고 나갑니까? 못 뚫고 나가요? 그런데 그 불가능한 곳에 간다는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서 나밖에 모르는데 여기에다 쐐기를 박아버렸잖아요. 나로 하여금 쪼개짐이 되게 했어요. 나의 쪼개짐.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로마서 4장에서 고백합니다. “주여, 저는 없는 사람이고,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고백이 신앙의 조상으로서의 마땅한 고백이라면 신약에서 십자가 앞에서, – 이게 로마서 4장 끝에 나와요 –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서, 우리가 동일한 고백을 할 때 “너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한통속이다.”
즉 ‘같은 흐름이다. 하나님에게 찾아왔던 아브라함과 오늘날 너희에게 찾아왔던 하나님이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는 동일한 영혼 있는 몸이다.’ ‘영혼 있는 몸’이란 뭐냐? 하나님과 연락이 되는 몸이다. 하나님과 주고받음이 성립이 되는 몸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는 믿는다’라는 소리는 없고 나는 뭘 해야 하느냐? 주님의 믿음으로 인하여 나는 날마다 움직이다, 행한다는 고백밖에는 안 나와요.
오늘도 주께서 행하셨군요, 오늘도 주께서 행하셨군요. 어느 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분명히 주문했는데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서 헷갈렸는지 짬뽕을 내 왔더라. 가게 주인 보고, “와보세요” 하지 말고, 오늘도 주께서 짜장면 못 먹게 하고 짬뽕 먹게 하시는 그 행함을 감사함으로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매사에 내 뜻대로 되는 게 이상해요. 내 뜻대로 되는 게 이상하다고요.
여러분, 내 뜻대로 될 때는요, ‘주여, 좀 지적해 주세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왜 내 뜻대로 됩니까? 나 진짜 버림받은 건가, 왜 내 소원대로 됩니까?’ KBS 축구 해설위원 이영표가 월드컵 시합 전에 이렇게 예언했어요. “한국이 체코전에서 2:1로 이깁니다.” 제가 만약 그렇게 예언했다면 베드로처럼 대성통곡해야 해요. ‘주여, 제 예언이 왜 맞게 해주십니까? 진정 저를 버릴 작정이십니까? 왜 내 소원대로 해주십니까?’
두 번째, 기생 라합. 기생 라합은 여호수아 2장에 나옵니다. 21절에,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이 쳐들어온다, 할 때 급하게 “붉을 줄 매라. 이스라엘 정탐꾼 숨겨줄 때 약속했다. 붉을 줄 매라.”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붉은 줄을 걸기로 언제 약속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올 그때 붉은 줄을 보고 다른 집은 다 멸망하되 당신 일가친척은 손대지 않겠다고 정탐 두 사람과 약속했거든요. 우리 같으면 이스라엘이 쳐들어올 그 낌새에 후딱 붉은 줄을 매면 되잖아요. 정탐들이 자기 집에서 떠나고 난 뒤에 사흘 동안 산에서 숨어 있었거든요. 아직 이스라엘 본진에 돌아가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아직 이스라엘 본진에 기생 라합의 소식을 이야기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정탐들이 자기 집에서 떠나자마자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우리 집안은, 내가 출생한 이 고향은 이스라엘로 인하여 끝장났다, 아직 전쟁 하지도 않았는데 끝장났다는 것을 선언한 거예요. 그리고 여호수아 2장 2-5절, 약간 길지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고자질 한 거예요.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기생 라합이 숨겼어요.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거짓말 아니지요?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거짓말이지요. 거짓말입니다.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거짓말은 또 거짓말을 낳습니다. 거짓말했습니다. “급히 따라가라…” 이렇게 세 번째 거짓말을 합니다.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라고 했어요.
야고보는, 바로 ‘영혼 있는 몸’이 ‘영혼 없는 몸의 집단’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은 오직 뭐밖에 없다? 거짓말밖에 할 게 없다는 거예요. 왜?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좋게 좋게 말해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심판, 전쟁을 통해서 강제 분리된다면 내 입에서도 강제적인 발언, 거짓말이 딱이다 그 말이에요, 딱이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 마을 사람에게 물었어요.
“당신 예수 믿나?”
“안 믿는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데?”
“지옥 가지 뭐.”
“너는 예수님 사랑하나?”
“천만에, 나 예수님 사랑 안 한다.”
“너 이단이지?”
“오! 나 이단이야. 우리 교회 교인들도 이단이야. 얼마나 듣고 싶은 이야기인지, 아이고, 고마워라! 밥 사야 하겠다.”
우리가 왜 그 말을 못 합니까? 기생 라합은 했는데, 기생 라합은 했어요. 왜 우리는 그 말을 못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영혼 있는 몸이 되니까 주님과 연락이 되거든요. 연락이 되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뭐로 사용하느냐 하면, 기생 라합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지금 기생 라합은 신났어요. 기생 라합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뭐냐?
내가 있는 터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로부터 정탐꾼이 우리 집에 내왕했다는 그 사실에 기생 라합은 나자빠져 버려요. 성경에 보면 라합 앞에 직업이 붙어요. 기생 라합이라고. 매춘부죠. 그런데 하늘나라는 직업과 이름과 나이를 묻지를 않아요. 지금 멸망 당하는 처지에 그것을 알아서 뭐 할 건데요?
기생 라합은 새로운 정보에 훅 갔습니다. 무슨 정보요? 내 터전, 존재의 터전, 있는 나를 없애버리고 살아있는 나를 없애버리는 그 정보, 얼마나 듣고 싶었던 정보인지요?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서 나에게 이야기할 것은 “너는 죽었어. 너는 없어야 해. 왜? 영혼 없는 몸은 살아도 소용없으니까.” 그 이야기가 여러분, 그렇게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누가 그 이야기를 해줬어요? 아무도 안 해줬잖아요, 아무도! 부모님이 이야기 안 해줬잖아요. 커서 훌륭한 사람 되라는 그 이야기나 했지. 이 세상 사람은 진짜만 이야기해요, 진짜만, 진짜만 이야기한다고요. 너는 우리 가정을 빛내야 해, 잘해야 해, 국가와 교회에 충성을 다 해야 해, 훌륭하게 살아야 해, 아들 셋 낳았는데 다들 훌륭하게 살라고 얼마나 응원했습니까?
그런데 자식들에게 한 번이라도 거짓말해봤습니까? 우리 처음부터 신앙 새로 합시다. 그러면 이제 거짓말이나 할까요?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고 움직이면 돼요. ‘행함’이니까, 우리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하게 한 그 ‘나는 바보요 등신’이라는 것,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것이 얼마나 편하고 고마운지,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 ‘나는 무(無)요, 나는 죽었다’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주께서 여러분을 이끄시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고마움과 감사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신앙생활을 그동안 어떻게 했는지, 자기의 위선을 감추는 데 급급하지는 않았는지, 이제는 그딴 귀찮은 일 다 때려치우고 거짓말만 하게 해주시고, 나는 바보 등신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이, 감사함으로 고마워서 터져 나오는 그러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