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전지적 관점

아빠와 함께 2026. 6. 28. 22:42

전지적 관점

2026년 6월 28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3:13-16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선행’이라는 말, 그리고 여러 가지 지시와 명령이 나오게 되면 사람들은 이것에 자극이 되어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흩어진 12지파’즉 이스라엘의 체계를 준해서 복음을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시작하는 민족은 온 세상의 이방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외의 민족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믿는 것은 자신의 존재성입니다. 즉 어떻게하든 우리들은 살아남아야겠다는 야심의 뭉치들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시작은 인간 존재가 아니라 없는데 생긴 존재, 곧 언약궤입니다.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19-22)

이는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문이요 길이 언약궤 뚜껑의 두 천사 형상 사이에서 생겨납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거기에 기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인간 세계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여분의 곳입니다. 천국은 철저하게 인간 세계로서는 막혀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존의 인간 말고 다른 인간을 맞이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이로되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요 마지막 아담입니다. 마치 기존의 아담과 쌍둥이같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유일하게 받아들여지는 아담입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 10:11-13)

심지어 율법을 숭상하는 유대인들마저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게 거부당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를 통해서 더 이상 인간 존재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음을 확연히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시편 104: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바람이란 인간 눈에는 우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존재가 바람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신약에 와서 이 사실을 과격하게 나타난 일이 마가복음 5:4-9에 나옵니다. “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면서도 인간의 내부 정신을 누가 쥐고 있는가를 제대로 드러내어주게 됩니다. 이 사람은 귀신에 약하게 들린 것이 아닙니다. 군대 귀신입니다. 숫자로 2,000이나 되는 귀신에 들어 있는 자입니다. 쇠고랑으로 묶어놓아도 거침없이 끊어낼 정도의 힘을 발휘합니다.

이 사람의 경우를 통해서 모든 아담에 속한 자들이 악마와 어떤 관계로 묶여있는가가 드러납니다. 즉 인간은 악마의 힘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군대 귀신들이 사람의 몸의 대체물로 자신들이 피신할 수 있는 짐승으로 돼지를 원했다는 점입니다.

돼지는 레위기 11:7에 의하면 언약궤가 있는 그 성소의 제물에 적절치 않는 짐승입니다. 유일하게 천국으로 통하는 그 노선에 가담될 수 없는 짐승이 돼지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레 11:7) 귀신들이 돼지로 이동하므로서 이 사람은 온전한 차림으로 그 자리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악마로 사로잡힌 인간의 인식말고 다른 온전한 인식과 관점을 제공하려 오셨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성경 전체에서 온전한 전지적 관점, 즉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관점’은 요한복음 5:39에 나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즉 모든 말씀은 예수님 홀로 행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온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온전한 존재로 인해 거짓된 존재가 누구인지도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 유다만이 십자가 사건에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7)

다른 제자들의 존재는 십자가 사건과 관련없습니다. 도리어 예수님 존재만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 22:31-34)

인간들의 존재성은 철저하게 악마에 의해서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유일하게 성령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11제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므로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 행위를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2:23에 대한 생명나무 차원에서의 고백입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즉 성도는 ‘내가 누구다’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시는 겁니다. “저희는 나의 신부왜 내 살이요 내 피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육의 노선을 알고 그 육의 노선에 대해 차이 나는 전지적 노선인 영에 속하면서 반복해서 감사가 튀어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야고보서 3장 13-16절(전지적 관점) 26062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3장 13-16절입니다.

야고보서 3:13-16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야고보서에서 이렇게 명령조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갑자기 성경의 핵심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명령이 오면, ‘그러면 이 명령을 지키면 구원받습니까?’라는 생각이 후딱 들죠. 그러면 성경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원리가 삐걱거리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는 성경 전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돼요. 그걸 ‘전지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지적 관점’이라는 것은 한꺼번에 모든 걸 아는 거예요. 부럽지 않습니까?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안다.

그러면 인간들은 대번에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미래에 대해 알겠네요? 주식의 변동이라든지, 누가 월드컵 32강에 들어가는지, 누가 우승하는지, 우리 애가 나중에 어디에 취직할 것인지, 나중에 내가 지옥 가는지 천국 가는지 그것도 안단 말입니까?’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원리로서 ‘전지적 관점’, ‘한꺼번에 다 알고 있어.’ 하는 대목은 요한복음 5장 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끝. 모든 성경, 어떤 지시와 어떤 명령,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까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명령하고 지시하고 “똑바로 살아. 안 그러면 지옥이야.” 하는 그 모든 명령과 지시가 실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다 예수님 본인에게 향하는 지시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지시를 내리고, 그걸 하나님이 실천하는 거예요. 이게 ‘전지적 관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눈치채고 거기 끼어들게 된 거예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 향하게 되어 있고,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룰 게 없습니다. 이게 ‘전지적 관점’이에요.

성경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 말씀은 주께서 다 이뤄낸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지시와 명령이에요. 우리의 잘남을 나타내기 위한 성경 말씀이 아닙니다. ‘이거 지켜서 구원받겠다’라는 그것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것은 우리 혼자만의 착각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게 다 초점을 맞추고, 모든 완성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과 인간은 쌍둥이기 때문이에요, 쌍둥이. 같은 아담이에요.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아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갑자기 아담이 두 종류가 됐어요.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물려받았기 때문에 뭐가 장착되어 있느냐 하면, 마귀의 마음이 장착되어 있어요. “선과 악을 아는 네가 바로 신이다.” 마귀가 우리한테 이야기했어요.

이것은 마귀가 우리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선에 대해서 알고 악에 대해서 알면, 이제는 하나님만이 아는 것을 네가 같이 알았으니까 너도 신이다. 네가 신이야! 신을 믿지 마. 네가 신인데 무슨 신을 믿어?” 그다음부터 하나님한테서 어떤 지시가 오니까 ‘이것은 내가 신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지시를 내렸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쌍둥이 아담을 준비할 줄은 상상도 못 했죠. 마귀는 알고 있었어요.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마귀는 알았는데 인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인간은, ‘천국이 있어서 천국을 가고 지옥이 있어서 지옥을 가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왜? 아담은 자기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요.

그런데 오실 분이 아담이에요. 두 번째 아담이고 마지막 아담이에요. 하나님은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과 상대하고 우리하고는 상대를 안 합니다. 왜 괜히 우리가 분산 떨고 왜 난리예요? 어떤 지시 명령이 오게 되면 우리하고는 상대를 안 하는데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에서 야고보가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약 3:13)라고 이야기하면서 14절에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라고 되어 있어요.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든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예수님이 제대로 된 아담이거든요, 인간이거든요.

우리는 가짜란 말이죠. 하나님 보기에 이미 버려놓은 인간이에요. 우리끼리는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취급을 안 해요. 천국도 못 가는 게 무슨 인간이에요. 아버지와 만나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인간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제껴놨는데 제껴놓은 인간 안에 뭐가 남아있느냐? 선과 악에 대해 알고 있다는 그 자체가, ‘우리 하기 나름으로서 신도 될 수 있고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그런 악마의 마음이 아직도 우리 속에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미래 나의 운명은 누가 하기 나름이다? 내가 하기 나름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누구다? 나다. 왜? 내가 헛짓하면 내 미래가 작살나니까. ‘그런 바보짓을 내가 해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뭐 ‘교회 가서 천국 가야 되겠다.’ 그 행위도 내가 결정 내린 거잖아요.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 5장 39절의 그 ‘전지적 관점’이라는 것,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다 이루도록 왔다는 그 관점을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자꾸 미래에 대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거예요. 그러나 ‘전지적 관점’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과거에 대한 ‘전지적 관점’이에요.

백날 우리가 살아봤자 그게 다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과거로, 과거로 다 집합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미래는 없고요, 우리는 과거만 남기는 존재인데 그 과거에 남긴 나의 존재는 뭐냐? 죄인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도 죄다’라는 것이 바로 ‘전지적 관점’이에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 관점이에요, 이게.

어떤 분이 이야기할 거예요. ‘앞으로 내일이나 모레, 두 달 뒤에, 2년 뒤에 내가 어떻게 착하게 살게 될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왜 죄인이라고 하느냐?’ 이런 반박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전지적 관점’이 나오는데 1장 17-18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반짝 떠서, 그다음에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시작한 일이 우리에게 덮친다는 사실을,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의 눈이 바짝 뜨여가지고 그 미래상을 다 안다는 거예요.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을 아는 게 아니고, 주께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거-현재-미래에서 성령이 오는 순간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그 노선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계속 과거의 제자리 뛰기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미래는 어느 노선, 우리 노선이 아니라 우리 아담 노선이 아니고 새로운 노선, 새로운 예수님의 노선에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흔히 아는 말로 육에서 영이 된 거예요. 육에서는 죄밖에 나오지 않죠. 이게 ‘전지적 관점’이에요.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죄를 짓는 육에 대해서 반복될 뿐입니다. 죄를 짓는 육에 대해서. 그게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다는 그 사실이, 내가 가짜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는 바로 그 사실, 우리로 하여금 나를 대체하신 다른 아담이 하신 일이 우리의 미래라는 거죠. 이걸 하나님의 계시, 성경 말씀을 통해 다 알아버렸어요.

예수님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을 다 알게 되면, 예수님이 하는 그 일이 뭐냐 하면, 우리에게 들이닥칠 우리의 일이에요. 개인적으로 하는 일은 죄밖에 안 나오고요, 그것은 과거에 속한 겁니다. 모든 것이 이미 주님의 노선을 탔으니까, 주께서 하시는 일이 나의 미래가 되었으니까, 기도하신 집사님 말씀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감사하는 것 외엔 없죠.

그런데 감사가, 내가 잘된 걸 감사하면 이것은 얼마 못 가요. 감사가 되려면 이게 두 개로 벌어져야 돼요. 육에 관한 것, 내가 하는 것과 주님이 하시는 일 사이에 틈이 생겨야 해요. 틈이 생겨서 날마다 육에서부터 영으로 옮겨 가면서 예상 못 한 감사가 여기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 사이가 벌어져야 됩니다.

주보 요약에 나와 있지만 처음에 인간이 만들어질 때는 위아래가 없었어요. 그냥 낙원이 전부였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는 인간이 사는 동네를 무슨 동네라고 하느냐 하면, 아랫동네에요. 그 아랫동네에서는 인간들이 서로 이해하는 의미만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 인간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모든 인간에 예외 없이 악마가 집어넣어 준 선악 지식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선악 지식이 들어 있으니까, 인간들이 그걸 가지고 뭘 만들어 내느냐 하면, 천국도 만들어 내고 지옥도 만들어 내요.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나쁜 사람이 가는 곳이다. 따라서 회계 장부 계산해서 착한 것보다 나쁜 것이 많다 싶으면 앞으로 남은 인생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빨리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 줘야, 선에서 악을 빼기해서 약간 플러스(+)는 되어야, 남는 게 있을 때나 천국 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들의 기본적인 사조고 교육 철학의 기본 사조입니다. 그게 교육 철학은 기본적으로 도덕심이에요.

도덕심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선악 체계가 있다는 걸 기본으로 했고, 그걸 사람들은 양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런 짓은 못 하지”라는 말이 모든 인간에게 통용된다는 말은, 모든 인간에게 악마가 심어준 악마의 심성이 골고루 퍼져 있다는 거예요. ‘네가 착하게 살아야 죽어서 좋은 데 간다.’ 그 좋은 데를 누가 만들어 내느냐 하면, 마귀가 만들어 내는 거예요. 천국 지옥을 마귀가 만들어 내는 거예요.

천국 지옥을 마귀가 만들었으니까 종교도 누가 만든다? 마귀가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만든 그 천국 지옥의 관점에, 심지어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대인들도 거기에 완전히 다 장악당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모든 걸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전지적 관점’이라고 했죠.

‘전지적 관점’이 뭐냐? 모든 지식은 누가 가져갔느냐 하면, 예수님이 혼자 가져갔어요. ‘모든 말씀은 다 내게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가물가물 기억나죠?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다 독점해서 가져가 버렸어요. 여기에 대해서 누가 화가 났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화가 난 거예요. 우리도 얼추 안다는 거예요. 우리가 선이 뭐고 악이 뭔지 얼추 알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요한복음 5장 39절, 이 복음 이야기하면 교회 바깥에 사는 사람이 화를 내겠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 화를 내겠습니까? 교회 40년, 50년 다닌 사람이 화를 내요. 특히 목사가 화를 내요. ‘굳이 예수님을 거론해서 인간인 내 성질을 건드릴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뤘다면 그러면 나는? 50년, 60년 교회 생활하면서 내가 한 건 뭐가 되느냐?’ 그 말이죠. 죄에요. 죄짓기 위해서 교회 다닌 거예요. 그게 교회에서 사람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지 몰라요. 착한 일 하는 보람으로 교회 나오잖아요, 착한 일 하는 보람으로! 그런데 이건 뭐 해도 죄인 되어 버리면 ‘교회 봉사할 사람 아무도 없고, 헌금할 사람도 없고, 교회 꼬라지 참 잘 되겠다!’ 이런 절망감에 푹 빠질 겁니다.

여러분, ‘전지적 관점’이라는 게 선과 악인데, 선과 악을 악마에 의해 주장하는 데 그게 어디에 꽂히느냐 하면, 예수님께 꽂히는 게 아니고 나한테 꽂히는 거예요. 고추를 키우는 사람의 관점은 고추에 꽂혀 있습니다. 마늘 키우는 사람은 마늘에 꽂혀 있어요. 양파는 양파 재배하는 데 꽂혀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양파에 대해서 전지적 관점을 갖고 있어요.

오랫동안 고기 잡은 어부는 자기 딴에는 고기 잡는 데는 도사였습니다. 전지적 관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 만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눅 5:8) 했지요. 고기 잡는 전문가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안 잡혔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아랫동네의 관점이 ‘악마가 심어준 전지적 관점’이라는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악마가 심어준 전지적 관점에 뭐가 있느냐 하면, 천국도 지옥도 다 포함되어 있고, 종교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거기서 빼기를 못해요. 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야고보서, 제가 설교할 때마다 거론하는 게 있어요. 야고보서는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준 거예요. 그 열두 지파가 옛날에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징이 있어요. 다른 수많은 민족들이 있잖아요. 이번에 월드컵 예선전에 나온 국가들이 200개가 넘어요. 얼마나 많은 민족이 있어요? 그 많은 민족 가운데 율법을 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하나의 민족밖에 없어요. 여러분,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 같이 선악 체제 있고, 다 같이 악마의 마음을 갖고, 다 같이 똑똑하고, 그중에도 아이큐 높은 사람들이 많은데 유독 이스라엘은 유일함, 유니크, 아주 독창적인 것을 왜 그렇게 주장하느냐?

너희들에게는 하나님과 독대한 모세로부터의 율법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에겐 율법이 있는 거예요. 제대로 ‘하나님과 같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거예요. 인간을 내쫓은 그 하나님이 쫓아낸 인간을 따라서 유일하게 찾아온 분이에요.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고 다른 민족에게는 오질 않았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전지적 관점’의 시작은 뭐냐? 언약궤입니다. 아, 이게…, 다른 민족은 이런 게 없어요. 청와대가 아닙니다. 백악관이 아니에요.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가로 114cm, 세로 68cm, 높이 68cm의 그 나무 상자, 아카시아 나무에 금박을 입혔던 상자, 온전한 금을 두드려서 금덩어리로 입혀놓은 언약궤의 뚜껑 위에 두 개의 천사 형상이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통로가 열리는 겁니다. 천국 게이트, 문이 만들어져요.

이 세상에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문, 야곱에게 이야기한 벧엘, ‘이곳이 하늘의 문’(창 28:17)이라는 것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그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 가운데 언약궤를 만든 이스라엘, 제대로 만들어진 언약궤를 갖고 있던 이스라엘의 언약궤 뚜껑 위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만난다는 거예요.

출애굽기 25장 22절,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그 그룹 사이에서, 그 갭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이 말은 뭐냐? 천국과 이 땅의 인간 세계 사이에는 문이 없다는 겁니다. 막혀 있다는 거예요. 막혀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에 신이 있고, 그 신들은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고…, 특히 이집트 종교 보면 그런 게 많이 나와 있어요. 세상 모든 민속과 전설과 신화에 ‘죽으면 하늘나라에 사람들이 모인다’라는 전설이 다 있어요. 조물주 이야기도 있고 다 있다고요. 다 구라입니다. 마귀가 만든 거예요. 어떻게 장담하느냐? 출발이 언약궤가 아니고요, 선악 지식이거든요. ‘착한 일 많이 하는 사람은 천국 가고 나쁜 일 하면 지옥 간다.’ 선악 지식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것은 전부 다 악마가 만든 거예요. 마귀가 만든 겁니다.

아직도 교회 나오면서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게 향하여 쏠려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교회 나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 나와도 지옥 가는 거예요. 그 언약궤가 유일한 길인데 ‘거기 들어가서 하나님 만나면 되지 않겠느냐?’ 만날 사람이 없어요. 만날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대제사장에게 복장을 새로 만들어서, 그것도 아무 때나 들락날락하지 말고, 1년에 한 차례만 그 언약궤 앞에서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은 구원받았네요? 아니, 그것도 아니에요. 그것도 아니고, 그 대제사장은 폼 낸 거예요. 그냥 실제가 아니고 역할, 연기한 것이고 진짜 언약궤에서 만날 분은 율법에서 예언한 대로 기다려야 돼요. 언젠가 율법이 완성될 때, 모든 말씀과 모든 지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를 향하여 만들어졌다는 그것이 완성될 때, 히브리서 10장 11-14절이 완성될 때 진짜 제사장이 오셔서 예수님만이 참된 인간으로서 아버지와 만남으로서 천국의 길이 열리는 겁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1-14).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그러면 예수님은 좋겠다. 혼자 하나님 만나서. 우리는 별 볼 일 없네? 우리는 예수가 아니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그런 말들이 나오는데 그렇게 믿으면 구원받는 게 아니냐?’ 안 돼요. 믿는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전지적 관점’을 제대로 압시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고, 10년 뒤에 예수 잘 믿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죄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게 죄라고요.

10년째 믿었잖아요. 12년째 믿어버리면, 10년째 믿은 것도 죄가 되고, 12년째 믿은 것도 12년째 죄가 돼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전부다 과거 노선에 해당되는 겁니다. 죄에 해당돼요. 그러면 믿어도 소용없는데 뭐 하러 믿느냐? 그 틈 사이에, 새로운 것과 옛것 사이의 그 틈 사이에서 천국의 게이트, 주님의 문이 나와요.

시편 104편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여기 ‘바람’이라는 게 나옵니다, 바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이라는 존재 그 두 존재가 만난 그 사이에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받은 율법이 자기를 향하여 준 거라고 생각했어요,자기를 향하여. ‘우리가 지키면 복이고 안 지키면 저주’라고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구약 성경 보면서 다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세가 십계명을 준 현장에서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숙제 같은 것으로 느끼지 않겠습니까?

숙제로 느낀다는 말은, ‘주신 존재인 하나님이 계시고 그걸 받은 우리 존재가 엄연히 여기 있다.’ 그 두 존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이제는 율법을 제대로 받은 존재가 저주받은 존재로 이미 확정이 났어요. 그래서 거기서부터 열두 지파가 흩어지게 됩니다. ‘흩어진 열두 지파’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대로 하면, 위에서부터 누가 와야 돼요. 위에서부터! 위에서부터 누가 온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먼저 ‘왜 아래에 있는 우리는 안 되는지’ 겸하여 생각할 줄 알아야 돼요. “나의 행함과 나의 믿음은 왜 안 되는데? 내가 예수 믿는 이 믿음으로 왜 구원이 안 되는데?”라는 말을 해야 돼요. 왜 안 되냐 하면, 우리가 뭘 믿을 때, 행할 때 우리의 존재가 부각이 된다니까요? 이것은 우리를 어디로 돌아가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구약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신약은 두 개의 존재,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그 말씀을 받는 인간 두 존재에서, 신약 시대에는 그 말씀을 받는 존재를 날아가게 해버렸어요. 이미 저주받은 것으로 결정해버렸습니다. 마귀에게 속했으니까요. 그러면 존재가 누구만 있느냐? 하나님만 남아요, 하나님만. 아까 집사님이 기도하실 때 분명히 다 들었죠? ‘내가 하는 걸로 감사가 되면 안 된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누구? 하나님이 주시는 걸로 감사하라는 말이죠. 왜 우리 존재는 믿어도 안 되고, 뭘 해도 안 되고, 전도해도 안 되고, 헌금해도 안 되고 왜 다 안 되느냐? 시편 104편 4절에 보면,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천사를 바람같이 다루었다.’ 그렇게 되어 있죠.

신약에 오게 되면 주께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은 ‘바람’(요 3:8)같이 일해요. 성령이 바람같다는 말, 바람이라는 것은 불면 부는 대로 와 닿지, 바람을 내가 꽉 잡고 내 것 만들 순 없지 않습니까? 이게 바람의 특징 아닙니까? 공기인데 어떻게 내 걸로 만들어요. 신약 성경에 예수님이 먼저 성령 받고요, 그 외에는 누구도 성령 받질 않았어요. 세례 요한도 아니고요, 요단강의 예수님밖에 없어요.

하늘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온 그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참된 인간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유일하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분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인간에게 붙잡힌 바 된 게 아니고, 바람이 임하는 대로 성령이 임하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여러분, 지금 잘 이해가 되는지 의구스럽습니다만 이해가 되든 말든 저는 이야기할 걸 해야겠어요.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열한 제자와 가룟 유다를 구분시킵니다. 열한 제자와 한 제자, 한 제자가 가룟 유다인데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3장 27절에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요? 할 게 없죠. 일하는 제자는 가룟 유다밖에 없죠. 왜? 가룟 유다만 사탄의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기 때문에요. 다른 제자들은 그냥 멍청하게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런데 가룟 유다는 사탄이라는 바람…, 인간은 존재가 되면 존재가 아닌 것은 없는 존재로 보잖아요. 없는 존재, 악마에 의해서 가룟 유다라는 존재는 계속해서 밀고 당기고 다뤄져요.

예수님의 존재는 육신을 받아 존재처럼 보이지만, 성령이 함께하는 유일한 존재가 예수님입니다. 결국 이것은 성령과 악령의 대결, 바람과 바람의 대결, 인간이라는 존재는 거기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고 뭘 해도 소용없는 존재로 분명하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궤를 줄 때 언약궤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 언약궤를 통해서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데 그 백성인 자와 백성이 못 되는 자를 언약궤를 기준으로 구분 작업에 나섭니다. 그냥 빨리빨리 진도 나갑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아주 과격한 광경이 발생합니다. 어떤 청년이 있는데 귀신에 들렸어요. 쇠고랑을 채워도 쇠고랑을 끊어버리고 소용없어요.

마가복음 5장 5절에 보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난리도 아닙니다. 아주 과격하고 특이한 현상이에요. 그런데 그 동네가 어떤 동네냐 하면, 돼지를 많이 키우는 동네에요. 예수님이 오실 때 악령이 먼저 예수님께 말을 걸면서 자기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7). 맞는 말이죠. 상관없죠. 상관없는데 예수님께서는 상관 해야겠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택한 백성을, 이 악마 가운데서 택한 백성을 주께서는 데려가야 하니까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일, 아버지가 택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다 건져내는 것이라고 했어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이번에 베네수엘라에 지진이 났거든요. 뉴스에 보면 “꺼내주세요.” 그다음에 “살려주세요”라고 갇힌 자들이 외치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이 귀신 들린 청년이 참 특이한 현상을 보여준다.’ 보통 이 세상 사람들은요, 자기가 안 갇혀 있어요. 내가 나에게서 끄집어 나갈 이유가 없어요. 나는 나대로 잘난 맛에 살면 돼요. 그게 학교 교육이고 평생 살아온 인생 여정입니다.

나 잘난 맛에 사는 거예요. “살려주세요. 꺼내주세요!” “어디서?” “마귀 들렸어요.” 이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예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려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물으니까 이름이 “군대입니다.” 군대는 보통 한 천 명에서 육천 명 사이 로마군단의 이름이 군대에요.

그러니까 귀신이 한두 마리 들은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들어있으니까 이런 특이한 현상, 마귀 때문에 발광하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요. 귀신이 집단으로 집약되어 있으니까. 그 집단이 흩어져 있으면요, 지 잘난맛에 살아간다고요. ‘평생 나는 하자 없이 살았다. 참 내가 보기에도 마이 웨이, 내 길은 자랑스럽다.’ 그걸로 80, 90까지 계속 갈 거예요.

그런데 청년이거든요, 청년. 아직 인생 많이 살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미칠 지경이에요. 귀신들이 어디로 들어가느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막 5:12). 돼지에 들어가게 해 달라. 바로 이것을 하나님이 기대했던 거예요. 레위기 11장에 보면 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돼지는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제물로 바쳐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천국 가는 사람들이 그쪽으로 분류 돼야 돼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언약궤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그냥 지옥 가는 쪽으로도 따로 분류가 돼야 돼요. 언약궤가 기준이니까 게이트, 문이니까요. 이 귀신들이 가는 곳이 뭐냐? 돼지예요. 돼지들이 어디로 가느냐?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막 5:13). 정신없이 언덕에서 내리 달려서 바다에 빠져 다 몰살됐어요. 그런데 돼지 키우는 목축업자들이 예수님 보고 우리 동네에서 나가달라고 했어요. 이게 자동 분류가 되는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얼마 전까지 2천이 넘는 귀신이 들어있던 그 청년이, 마가복음 5장 15절에 보면,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온전해졌어요. 온전한 것, 바로 ‘이 기적은 인간의 존재를 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전지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전지적 관점은 뭐냐? ‘모든 말씀이 예수님께 속했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인정한 유일한 의미고,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유일한 인간, 아담이다.’ 그러면 그 외에는요? 그 외에는 다 지옥으로 나가리되는 거예요. 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이 안목, 여러분이 눈이 밝아져서 이것을 안다면 여러분들은 감히 천국 합격자입니다.

갈 수 없는 곳이에요. 갈 수 없는 곳인데 갈 수 없는 나라에 합격을 한 거예요.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통하기 때문에? 악령이라는 바람을 통해서 성령이라는 바람속으로 들어가니까 비로소 우리는 ‘전지적 관점’, ‘아, 세상은 두 종류밖에 없구나.’ 한쪽은 지옥 가는 자, 악령에 의해 평생 시달리는 쪽, 귀신에 시달리는 쪽과 또 한쪽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뜻으로 다뤄지는 쪽, 이미 천국에 합격한 합격 통지서를 받은 두 분류로 나눠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전지적 관점’이에요. 모든 걸 다 알아버린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두 분류에요. 외국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이 세상 보는 것이 나의 꿈이죠
(It's my dream to see the world)

새처럼 바람에 실려 하늘을 날고 싶어요
(and fly like a bird on the wind)

(이 세상 근심 걱정 다 털어버리고)
to be free from the cares of the world

다시는 옛날로 안 돌아갈래요
(And never go home again)

바람에 실려, 바람에 실려 날고 싶어요
(saddle the wind, I'd like to saddle the wind)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구약에는 존재가 있지만 신약에는 모든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만 ‘전지적 관점’이 주어져요. 이 노래 제목이 ‘Saddle the wind’(1966, 바람에 실려)라는 노래입니다. 팝송 좀 좋아하는 사람은 너무 좋아하는 노래에요. 이걸 번역해서 하남석이라는 가수가 불렀어요. 바람에 실려’

“이 세상 보는 것이 나의 꿈이죠.” 높은 데로 못 가니까 바람에 실리고 싶다는 거예요, 새처럼. 그리고 다 알고 나니까 다시는 집으로 가기 싫어요. 옛날 살던 동네가 싫어요. 자 그렇다면 이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렇게 바람에 실려서 전지적 관점에서 천국에 합격했어요. 이제는 미쳐도 괜찮아요. 우리가 합격했으니까 이 땅에 어설프게 미치지 마시고 제대로 미쳐야 돼요.

합격했다는 것, 이것은 세상에 나가서, 거리에 나가서 고함 질러도 괜찮아요. 약간의 벌금은 물겠지만 괜찮아요. 놀라운 거예요. 감사,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데 내가 왜 합격을 해?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되는 거지요. 이것만 알아도 기쁘지만 누가 이것을 매사에 방해하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악령이 방해하지요. 마귀가 이걸 방해합니다. 마귀가 이걸 어떻게 방해하느냐 하면, ‘너 있잖아, 너’ 출발은 이거예요. 아까 설교했지만 다시 해봅시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무엇부터 하느냐? 언약궤부터 시작해요.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의 모든 시작은 어디부터 하느냐? 마귀가 딱 장악하고 있는 어디부터, ‘나’부터 시작해요, 나.

나부터 시작하니까 그다음부터 ‘나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해?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해? 나는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해? 모든 미래는 내 손에 달렸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실수 없이 살아야 해, 바르게 해야 해.’ 온갖 것이 나로부터 터져 나오는 거예요, 나로부터. 갑자기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이 다 날아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작업을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어놓고 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 했습니다. 범죄 했고 그다음부터는 마귀하고 한통속이 되었어요. 요 절차를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써먹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악마가 여자와 주고받는 대화가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나 마귀야. 너는 인간이거든, 인간존재거든. 내가 너에게 알려줄게. 나 마귀는 네가 안 따먹을 것이 없게 만들어줄게. 뭐든지 다 따먹어. 이게 내가 너에게 제공하는 정보거든.” 이걸 달리 이야기해서 “내 생각은 이런데 너를 만들었다는 하나님은 너에 대해서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그 생각이 뭐였지?” 하니까 여자가 말려들어서 “다 먹되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 해서 불만 요소가 튀어나오도록 한 거예요.

범사에 감사가 아니고 불만 요소가 튀어나오게 하신 겁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처음에 인간이 만들어질 때는 두 존재가 있다가 한 존재가 돼요. 두 존재가 결합해서 한 존재가 되면서 한 존재가 남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 창세기 2장 23절에,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이 이렇게 했습니다. 여자가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존재가 두 개인데 대표 존재 하나가 아담이 되면서 하나의 존재가 비는 거예요. 백조가 8마리인데 연못이 7개에요. 그러면 백조가 연못에 한 마리씩 들어가면 한 마리가 남는 겁니다. 한 마리가 남으니까 그 남은 한 마리에 대해서 아쉽다, 안됐다,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게 무슨 의식이냐 하면, 존재 의식이에요. ‘나는 A라는 연못에 들어갔는데 너는 너무 행동이 굼떠서 들어갈 연못도 없네.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다행스러운데 너라는 존재는 있을 곳도 없네.’ 베네수엘라에 지진이 나서 집이 없는데 국가에서도 아무 대책이 없어서 바깥에서 잡니다. 바깥에서 찬 이슬 맞으면서 자요. ‘내 집은 지진에 안 무너져서 집이 있는데 너는 집이 없네.’ 상당히 동정적이고 안타까워하지요.

뭘 놓칩니까? 자기가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도 없어요. 주님께서는 7마리 백조에게 8개의 연못을 주신 거예요. 항상 비어 있는 여분의 세계를 주께서 자꾸 흘려버립니다. 이게 구약의 율법에 나옵니다. 이번 수련회에 창세기 합니다. 여러분이 창세기를 보면서 이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며칠 만에 천지를 창조했습니까? 분명히 6일 만에 창조했어요. 창조는 6일로 끝났어요. 그런데 여분의 날이 있어요. 그게 안식일이에요. 그게 나중에 율법에 가면 ‘안식일’이 되고, 그다음에 ‘안식년’이 되고, 그다음에 7×7=49+1, 50년, ‘희년’이 생겨요. 이것은 여분의 숫자가 자꾸 남아있어요. 여분의 숫자입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내가 성경을 보니까 ‘행함이 아니고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할 때, 나라는 존재, ‘존재’라는 말이 어려우니 뺍시다, ‘나는 어떻게 죽어서 천국 갑니까?’라고 할 때 천국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존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넣어줘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선악과가 없는 이상은, 선악과 있을 때 했던 그 아담의 고백을 생명나무가 가져가서 그 생명나무가, 곧 예수님의 존재가 이 땅에 와서 홀로 아담의 고백을 다 이뤄버려요.

“너라는 존재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어. 왜? 너는 내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의 뼈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남편에게 소속되면 되지 따로 내 이름이 필요치 않습니다. 따로 내 이름을 가질 필요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이마에 도장 새기면 되는 겁니다. 그 이름은 내 이름 아니에요. 외부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도장을 박으면 돼요.

이게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성령으로 도장 받았다, 성령으로. 도장이 뭐예요? 계약 체결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천국 합격이에요.

우리가 뭘 했는데? 뭘 한 게 없어요. 주께서 자신의 쌍둥이 아담,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가지고 우리에게 도장을 찍어버려요. 왜 도장을 찍느냐 하면, 언약궤를 통과해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점이 그 점이거든요. 다시 할게요. 모든 민족은 시작점이 자기 존재에요. 내가 어떻게 하고, 내가 어떻게 바르게 생각하고, 어떤 신을 믿고…, 내가 있어야 모든 것이 성립되는 일이 그다음 절차에요.

그러나 언약궤는 빈터에요. 평소에 늘 비어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존재가 살지 않습니다. 존재가 없는데 하나님의 존재에 의해서 부름을 받는, 율법으로 둘러친 대제사장이 올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 대제사장을 1년에 한 차례 만나줍니다. 하지만 그 대제사장도 하나의 폼이고요, 진짜는, 아버지는 아들만 만나요.

따라서 아들이 뿜어내는 바람, 성령,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이름이 굳어졌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내 이름은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움직이고, 주의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름이 나를 장악해요. 그래서 가룟 유다 말고 다른 11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질 때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냥 주님의 성령이 임하니까 사도가 된 겁니다. 그 점 설명하고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0-32절,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 중심으로, 그 나라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31절에 베드로 보고,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악마가 나름 인간에게 애를 썼어요. 선악 지식을 심어줘서 ‘너도 이제 신처럼 만들어줄게. 네가 신이야.’ 얼마나 그렇게 공들여서 인간 정신을 장악해 왔습니까? 그런데 32절에,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내가 뭐 어때서? 나라는 존재가 뭐 어때서? 내가 열심히 하면 되잖아.’ 그래서 33절에,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베드로는 자기 존재가 천국 가는데 아무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인정 못 하고 ‘내가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그다음 34절에,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진짜 베드로 네가 일해? 네가 일할 것 같으면 차라리 닭이 일한다, 닭이!’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닭 같은 존재보다 못한 존재가 우리 존재라는 겁니다. 그리고 ‘네가 악마에 빠지지 않은 것은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나의 신부야. 내 살이고 내 피다.” 창세기 2장 27절의 그 말씀이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선악과를 아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생명나무라서 생명나무에서 아담이 한 고백이 예수님의 고백으로, ‘내 살이고 내 피’라는 것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터져 나올 때마다 우리는 그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육에서 영으로 옮겨 가면서 수시로, 수시로 ‘이것은 예상 못 한 감사, 주의 존재에서 나온 감사’를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좀 안다고, 복음 많이 들었다고, 성경 몇 독했다고, 이제는 구원받았다고 그것으로 안심했던 것이 도리어 주의 일을 방해하는 악령의 짓인 것을 깨닫고,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 속해서 주님의 고백을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직접 외칠 수 있도록 항상 쓰임 받는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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