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닫힌 하늘과 열린 하늘

아빠와 함께 2025. 12. 17. 12:13

 ‘공간은 시간이 문이 되어 닫아버립니다.’ 공간은 시간 자체가 문이 되어서 폐쇄구조로 만들어버려요, 시간이. 그게 창세기 1장 내용입니다. 8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뭔가 서랍 같은 것, 칸막이 같은 게 시간에 의해 짜여졌습니다. 그럼 그 시간에 의해 칸막이 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만들어진 공간이 곽이 짜여서 각자 하나의 각설탕처럼 택배상자처럼 따로따로 자체적으로 모양을 갖추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늘은 만들어질 때부터 열린 하늘이 아니고 닫힌 하늘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닫힌 하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다섯 째 날에 공중에 독수리가 만들어지잖아요. 독수리가 날다 날다 나중에 열린 하늘까지 납니까, 안 납니까? 못 날아요. 독수리는 닫힌 하늘까지만 날아요.

공간을 곽 짜는 그것은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시간의 칸막이에 의해 이미 확정되고 마는 겁니다. 그 시간의 칸막이가 열리는 순간은 어느 순간이냐? 제7일 순간이에요. 일곱 째 날은 무슨 날이냐? 쉬는 날이에요. 이미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손대지 마라. 손대면 안돼. 왜? 주님께서 그것을 친히 만들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만들어진 것에 대해 ‘그것을 만드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것에 집중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헌신하는 날이 안식일이죠. 그리고 그 날이 몇째 날이라고요? 7. 7은 공간에 속하지 않아요. 1,2,3,4,5,6.   7은 어느 공간에도 그런 공간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에 속하는 거예요. 시간.

그럼 여기서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끝나면, 다른 말로 할게요, 안식일이 완성되면 어떻게 할까요? 그럼 칸막이 진 공간은 뭐로 교체되는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교체가 됩니다. 그러면 기존에 있던, 칸막이 치기위해서 있는 시간, 그리고 칸막이 당했던 공간, 그 공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의해 대체가 돼요. 대체가 됩니다.

그럼 이방민족 같은 경우에는 이런 창세기 중심, 여호와 중심이 아니죠. 안식일 중심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안식일 중심이 아니라면 그들이 1,2,3,4,5,6,7, 7일 째 놀겠어요, 안 놀겠어요? 놀 이유가 없죠. 아니, 내 밭에 내 논에 농사 더 지으면 수확이 더 나는데 내가 왜 놀아요? 누구 눈치보고? 눈치 볼 사람이 없어요. 내 건데. 눈치를 못 보죠.

그러면 1,2,3,4,5,6, 그들에게는 칸막이 친 뭐가 없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칸막이 쳐진 공간도 없죠. 그럼 그들은 공간에 갇힌 존재가 되죠. 그러면 공간 무너지면 어떻게 됩니까? 지하에 사령부를 차려놨던, 본부를 차리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던 하마스를 바깥 위쪽 부분의 이스라엘이 점령해버려서 안에 바닷물을 집어넣던지 폭탄 터트리던지 하면 단단했던 그 지하본부는 어떻게 돼요? 그대로 무너지겠죠.

그럼 이방인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닫힌 하늘, 닫힌 공간 그게 다라고 생각했는데 공간의 궤멸과 더불어서 그대로 저주 안에 폭싹 주저앉습니다. 그 자들이 오늘날 이 시대에 불신자들입니다. 그들의 인식은, 지난 낮 설교의 제목이었습니다, <협소한 관점>. 협소한 관점을 약간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편협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협소하다고 한 것은 그 범위만 잡아서 한 거예요. 협소한 관점.

울고불고 좋아하고 슬퍼하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왜? 이유가 뭔데?’ 맨날 물어요. 어려울 때 묻고 ‘왜 하필 나에게?’ 묻는데 물어봤자 그 질문 자체가 성립 안돼요. 답변을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협소한 갇힌 공간에서 얻고자 하는 답변이나 질문이나 둘다 닫힌 공간 안에 있는 한 그것은 소용없는 질문과 답변이 되겠죠.

그럼 해결점은 뭡니까? 닫힌 공간이 뭐로 바뀌면 됩니까? 열린 공간 되면 되잖아요. 열린 공간. 그 열린 공간을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셨습니다. 그게 창세기 28장 12절에 나와요. 창세기 28장 12절을 여러분이 보면서 무엇이 협소한지, 협소함의 반대말이 광대함인데 무엇이 협소함을 벗어난 넓은 범위의 관점인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여기 누가 등장해요?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하나님의 사자, 천사가 사는 자취방이 어디죠? 그 주거지가 어디입니까? 일산이에요? 파주? 안 그러면 강원도? 대구? 어딥니까? 그들이 만약 미국에 있어도 그것은 협소한 공간이에요. 닫힌 공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어디에서 나와요? 닫힌 공간을 능가합니다. 닫힌 공간을 닫힌 공간이라고 규정하는 데서 하나님의 언약이 오죠. 언약이 주어집니다. 천사가 내려오죠. 사닥다리라 했는데, 사다리가 있다는 게 우리가 상상하는 데에 하나님께서 참 편리하게 해주셨어요. 사닥다리라 하는 것은, 오페라 보면 무대가 있는데 좋은 오페라 보면 아래층만 있는 게 아니죠? 관람료는 약간 싸고 보기엔 힘들지만 위층이 있죠. 위층에서 쌍안경 들고 보는 거 있잖아요. 위층. 아래층 있고 위층 있고. 천사의 지정석은 위층. 인간의 지정석은 아래층. 아래층에서 일어나는 것은 위층에서 착착 이미 확정된 사실만 아래층에서 펼쳐집니다.

그렇다면 지금 언약은 왔다고 했죠. 그럼 언약이 언제까지 올 것인가? 언약의 마지막 도달 순간은 어디냐? 아까 시간이 끝나야 되잖아요. 시간이 끝나야 아래층의 한계가 다 드러날 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마가복음 1장 10절에 나옵니다. 제가 여러 번 했는데 다시 여기서 또 말씀드릴게요. 예수님 세례 받는 대목입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그다음에 “하늘이 갈라”진다고 되어 있죠? 원뜻은 찢어지는 거예요.  

강제로 찢어졌다는 것은 우리 밑에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닫힌 하늘 위에서 강제조치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 강제조치로 갈라지면서 거기서 누가 내려옵니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한 분께 집중해서 내려오죠. 내려오면서 무엇과 같이 겸해서 내려오느냐? 하나님의 음성이 같이 내려옵니다. 그 음성이 11절에 나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협소한 관점, 편협한 관점이 아니게 되려면… 바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수 있는 시시비비를 따질 수 있는 그런 문제는 모조리 협소한 관점에 속하는 문제라는 겁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늘이 찢어져서 뭐가 내려오는가 그게 중요하지, 인간과 인간끼리 너 나한테 잘못했잖아, 이런 것에 인생을 피곤하게 그거 감안하면서 지치듯이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