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11/1-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의만 증거하라

아빠와 함께 2025. 11. 1. 09:11

열왕기상19장

19: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him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behold, [there came] a voice unto him,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가 그 로뎀나무 아래서 그만 죽으려고 했는데, 이것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기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수치스럽다, 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서 여전히 제거되지 않고 있는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일에 이르는 그 모든 과정에서 ‘자기 하는 일이 정당하고, 옳고, 의롭다’라는 그것을 자기 몫으로 챙기려고 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들이 짐작하고 인간들이 뭔가 낌새를 가지려고 애쓰는 그 자체와 단절된 그러한 새로운 영역에 하나님의 계시가 따로 계시는 거예요.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는 옷 없는 채로 이야기했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인간들이 스스로, self, 스스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옷이 만들어진 상태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온 거예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온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  

엘리야의 한계를 겪게 함으로써 이제 제대로 선지자 노릇을 하게 하는 겁니다.  
지금 엘리야가 저쪽과 자기와의 싸움이 아니고, 나 엘리야에게마저도 지적해 주시는, 엘리야가 속한 세계 그 한계 넘어 절단된 세계, 그 너머에 있는 분이 나 엘리야를 보내서 이제는 북이스라엘에게 남은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이제 엘리야가 보여줄 수 있는 사명은 뭐로 나타나는가? 옷입니다. 옷, 그 부끄러운 옷,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그 속에 자기를 숨겼던 자기의 나약함, 자기의 상처, 자기의 자기 자존심, 그걸로 자기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여기게 했던 그 요소가 바로 옷과 더불어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시를 전하는 그 현장에 재현하는, 하나님과 엘리야가 만난 그 현장, 세미한 소리에서 만난 그 현장을 재현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엘리야가 계속하게 됩니다.
그 옷은 뭐냐?
진짜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성도에게, 자기 백성에게 최종적으로 주시려고 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로 옷 입는 거예요, 죄인인 너를 앞장세워서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겠다.” 이것이 신약 시대에 오게 되면 자연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때 엘리야는 자연을 다루시는 하나님, 비가 오게 하고, 가뭄 들게 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산이 깨어지는 일들, 바람, 지진, 불같은 그런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했는데 신약에 오니까 그게 아니고 생각도 못 한, 어떤 일을 해도 정신적으로 허리 펴고 가슴 펼 수 있을 만한 하나님의 의를 바로 복음으로, 최종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약에 주께서 단단히 준비해 주셨습니다.
실컷 주의 일을 했는데 세상에서는 경찰 보내서 “그 아무개 목사를 체포해라. 죽인다.” 할 때 교회에 있지도 못하고 저 제주도 어디 굴에 숨어서 “주여, 그동안 주의 일을 얼마나 했습니까? 강의도 하고 책도 냈습니다.” 주께서는 “이리 와. 너 그동안 주의 일 한 거 네 잘남이고 네 의였어. 뭐 하나님이 네 편 돼 가지고 같이 하나님이 오냐오냐, 해 줄 줄 알았지? 이게 네 한계잖아.”

‘이렇게 적들한테 지다니,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존심이 상할 것 같으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이런 일이 지금 얼마나 허다하게 일어납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피로 씻은 그리스도의 옷, 하나님이 그것만 주시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깜빡 잊어버리고 놓친 겁니다. 주께서 우리의 옷 벗기고, 가죽옷으로 입힌 그 일관된 하나님의 복음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의’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의 덩어리’가 되게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그 십자가 앞에서 이제는 스스로 움츠리지 마시고, 얼마든지 당당해도 괜찮아요.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자존심 경쟁에서 졌다고 좌절하지 말고, 그동안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왜 하나님이 안 도와주냐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 못난 인간이라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옷으로 입혀주신 그것으로 인하여 이제는 그 누구 앞에서도 허리 펴고, 가슴 펴고, 정신적으로 당당하게 그리스도 의만 증거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