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복의 근원이 되겠다.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참 어렵죠. 아브라함의 자손은 없습니다. 없는데 복의 근원은 있잖아요. 그게 1이에요. 모든 다수를 제로(0)로 만드는 그 하나, 그 하나가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이 알파요 오메가요, 그 근원이 마지막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복의 자손이 되는 거예요. 즉 관찰자로서의 우리의 무능성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내가 복의 근원을 알아서 누가 복의 근원인지, 내가 그걸 믿을 거야.’ 이 자세가 무슨 자세입니까? 측정하고 관찰하고 ‘내가 잘 살펴서 누굴 믿으면 되겠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죠.
아브라함의 혈육에서 나온 자식은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이건 하나님이 안 받아주는 인간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내 육을 버리겠다는 것도 뭐에요? 육이에요. 이것도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천국 못가. 그러니까 뭔가 조치를 해야 돼. 내가 나를 포기하겠어.’ 이것도 육이에요.
어제 오후 설교 때 제가 한 부분을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타인에게 우리가 복수할 수 없는 이유는, 복수를 할 수 있는 근거를 주님만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타인을 우리가 복수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남을 욕할 수 없는 이유는? 또는, 우리가 남을 저주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남에게 복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는?
복과 저주의 근원은 우리 말고 다른 분이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닌 거예요. 사기 당했다고 ‘저주 받아라’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그런 권한 자체가 우리한테 성립 안 됩니다. 예수님한테만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았어요. 따라서 우리 인간들 내부에서 남을 욕하거나 비난하거나 남을 평가하거나 측정할 수 있는 어떤 자격도 없는 이유가, 예수님을 우리 모든 인간이 전부 다 합세해서 밀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없애버렸잖아요. 그러니 우리 가운데 남에게 복수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새로운 출생을 이야기해요. 새로운 출생이 되려면 우리가 아는 어머니 말고 다른 어머니가 있어야 되죠. 우리에게 죄를 넘겨준 어머니 말고 죄가 없는 어머니에 의해서 우리가 새롭게 출생되어야 되죠.
우리가 주님을 임신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주님을 임신하게 만듭니다. 죄인 안에 주님이 잉태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죄인된 것처럼 우리 안에 잉태된 것도 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오히려 죄를 더 짓게 만드는 결과를 낳잖아요. 그 방법,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체가 오히려 추가적인 죄를 더 짓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이 사실을 하나님은 충실하게 이용합니다. 구원받아놓고 나 잘했다고 될 수가 없게 만들어요. 구원된 것도 잘한 짓이 아니에요. 구원된 것도.
빌립보서 3장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예수님이 죽었던 그 십자가에 참여하려고 애를 쓴다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는 게 십자가에요. 나를 미워하는 것. ‘하나님, 결코 나의 의가 생성되지 않고 나의 의가 족족 파괴되는 상황만 주시옵소서.’ 이 말이에요.
이게 정말 인간으로서 가능합니까? 이게 가능하지 않은데 성경에 나타나 있어요.
‘믿지 않으니 행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믿지 않기 때문에 행하는 행동들이에요. 모든 행동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가만있어봐. 성질이 나서 뭔가 해야 돼.’ 믿지 않기 때문에 행동하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나라도 행동에 나서는 겁니다. 그냥 터져 나온 거예요. 터져 나왔는데 해석은 누가 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 행동에 대한 관찰자가 아니에요. 평가자도 아닙니다. 평가자는 따로 있어요. 주님이 따로 관찰하시되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저 여자의 행동은 사랑이다.”라는 거예요. 추가적으로 주님의 해석이 그 여자에게 덧붙여져서 여자는 예수님의 행함에 합류되는 매개 존재가 돼요. 주님이 주님 일을 하는데 곁들여서 같이 움직이는 주님의 말씀의 전달자로 현장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주님께서 그 순서를 바꿔요. 내가 미워서 사랑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미워진다.’라고 순서를 바꾸는데, 그 순서에 대해서 여자 본인이 그것을 사전에 받아들인 적이 없죠. 자기는 미울 수밖에 없는데 주께서 일방적인 해석으로 “너는 나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해석을 붙여버린 겁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뭘 아느냐 하면,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삽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하지 않아요.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동은 자기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로 귀속이 돼요. 자기가 믿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의 일부가 현재 자기의 삶으로서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걸 확인할 뿐이죠.
그런데 빌립보서 3장 8절 같은 데에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빌립보서 3장 8절에. 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한 일이 뭐로 해석되어야 옳으냐 하면, 그리스도를 해롭게 하는 일인 줄 모르고 나는 하나님 일을 하는 줄 알고 했다는 거예요.
사도가 되기 전에 순결과 순수를 추구하면서 ‘인간으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의로운 의가 뭐냐?’ 그걸 했는데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짓거리들의 시리즈였다는 거예요. 연속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8절에 이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뭐로 여겼느냐 하면 “배설물로 여김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바로 버려져야 될 쓰레기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쓰레기라는 사실을 새롭게 주님의 안목으로 측정 당하게 되기 위함이다.’ 이렇게 돼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럼 남은 것은 뭡니까? 이 쓰레기 같은 나를 사용하실 주님의 그다음 절차가 뭐냐? 그다음 절차가 아까 빌립보서 3장 10-11절, 내가 다 이루려함도 아니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주께서 나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서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게 하려 한다는 겁니다.
부활은 뭡니까? 완전히 쫑난 거죠. 완전히 끝난 거예요, 끝난 것. ‘하나님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게 바로 인간의 육이다.’ 이것을 결정짓는 것이 부활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못 따라갔어요. “내 목숨 바치겠습니다.” 거기까지 엔간히 했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제로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단 한명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바알종교죠.
우상에 대한 주님의 공격입니다. 빌립보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너는 너를 뚫고 지나가라.’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 지라 했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했죠? 마태복음 성경에 나오잖아요. 나를 미워해서 뚫고 지나가는 그 자체를 주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건 온전히 미워하는 게 아니고 꼼수 쓰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휴, 답답해 죽겠네. 정답이 뭡니까?” 이쯤 되면 짜증이 나야 돼요. 이것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 그럼 뭐냐?
정답 말씀 드릴게요, ‘제발 나를 죽여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죽여라 이 말이죠. 왜 그러느냐? 내가 너희에게 찾아왔잖아. 너 대신 내가 왔기 때문에 나를 죽이고 뚫고 지나가라 이 말이죠. 나를 뚫고 지나가게 되면 ‘예수님 빠이빠이’가 아니라 네 손에 죽었던 예수님이 이제부터 너의 새로운 주권자 주도자가 되어서 너를, 나 죽고 난 뒤에 내가 얻은 생명에 너로 하여금 참여되도록 하겠다 이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자기 의로 생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미움이라는 이야기했죠? 내 의가 행여나 나타난다면 그걸 깨부수는 새로운 상황이 나를 덮쳐주옵소서. 우리 머리는 그렇게 돌아가요. 실제로요. 손톱 하나만 문제 있어도 ‘이럴 수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손톱이 이렇게 갈라집니까.’
업 :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
인간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뭐를 한다? 논리가? 행하죠. 그 행함으로 뭐가 생긴다? 자기 의. 자기 의가 생기니까 그다음부터는 자기 가치가 높아졌죠. 가치가 높아지니까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명령을 하나 안 하나 간에 모든 인간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신자든 신자 아니든 성도든 성도 아니든 간에 다 마찬가지에요. 이걸 눈치 챈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성도는 구원받는 거예요.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죽으셨고 주께서 부활하실 때 죽은 나와 함께 하셨다는, 대신 죽으셨다는 그것 때문에 나도 같이 부활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자연적으로 인간은 자기 의라는 것이 나한테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주께서 왜 도마에게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느냐 이 말입니다. (두 팔을 쫙 펼쳐서) “자, 그럼 봐봐. 자, 봐. 이제 믿어?” 이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인간 육의 한계에요. 보고 믿는 육의 한계라고요. 도마한테는 인간 육의 한계를 넘어선 다른 요소로 네가 나의 몸을 볼 때 주목해서 봐야 될 그 지점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 지점이 뭐냐 하면 바로 육과 영을 끊어주는 사건의 지점이에요. 사건의 지점. 이걸 제목으로 할까? 사건의 지점. 무슨 사건이냐? 죽음을 몸 안에 포함시킬 수 있는 새로운 몸의 등장.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하나의 사건화 시켜서 그것을 자기 몸으로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영체의 등장.
부활 같으면 아예 말끔해야 되거든요. 부활인데 뭐가 들어있어요? 자기 죽음 사건을 내포한 부활체에요. 이 부활체는요, 장차 오실 주님의 재림하는 부활체하고 또 달라요. 요한계시록에서 봤던 그 부활체는 창자국, 못자국 없습니다. 뭔가 중간지점, 경계지점을 묘사하고 있어요.
경계지점. 인간 육의 한계와 영의 시작을 영이 되시는 분이 그것을 사건화 시켜서 몸에 담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기다려. 너 봤지? 이제는 누구 차례냐? 너희들의 목숨을 바쳐서,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 너희의 목숨 바쳐서 내 가는 코스대로 너희들도 이제 육 된 인간한테 죽임을 당해야 될 거야.” 요한복음 21장으로 끝나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지금까지 하신 모든 비밀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하고 에베소서를 내놔요. “창세 전의 비밀까지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럼 창세 전의 비밀이 뭐냐? 그게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쭉 편지로 나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가는 사도행전의 사건들이 계시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사도행전보고 갈라디아서, 로마서 보면 이해가 안돼요. 사도행전은 뭐냐? 사건으로 부딪치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 골로새서에서 “너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나라에 있다” 이 말들… 사도 바울 말고 인간들이 똑같은 사건을 일으켜도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없는 내용들이 편지에 있어요. 이 편지는 영원하게 현실화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거예요. 그러니까 매일신문이 아니고, 내일신문이에요. 내일일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를 예수님 몸 안에 새겨진 십자가로 보게 되면 어떻게 돼요? 예수님의 몸은 부활해서 지금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 형식, 머리라는 거예요, 안 보이는 형식으로 이 세상에 사건화 되는 주님의 일이 나타나는데 그 모든 일은 어디로 집중되는가?
전부다 십자가의 의미로 집중이 되어 있고, 이 말은 달리해서 앞으로 남아있는 모든 현실세계는 십자가 의미에서 파생되어 사건화 된 자체로서 이 세상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다 십자가에서 출발한 그런 의미에요.
그러면 우리의 존재 의미를 알려면 어디를 밟아나가야 돼요? 십자가까지 가야 비로소 그 의미가 파악이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아들’, 성공했습니다. 그다음 ‘아들과 성도의 만남’, 지금 이 이야기에요. 네 번째 관계, 아들과 성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서 성도를 모집하는 거예요. 성도는 모집책이에요, 성도는 답답한 게 없어요.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모집책이 되었으니까 성도는 자기 일이 있어요, 없어요?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 일이 없다고요. 성령이 아들을 통해서 아들의 영으로서 성도에게 주어져버리면 하나님이 아들에게 한 일이 성도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육에서 어떻게 영이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묻지 말고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십자가 사건의 내막이 뭐냐?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 전달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버렸으니까 우리는 나 몰라라 에요. 우리는 육의 한계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십자가 의미가 뭐냐? 그건 십자가 지신 분의 영이 와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는 십자가지지 않고서는 너는 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 같은 육신을 지니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성사될 때만, 성사되고 확립된 그 해답지만 우리한테 넘겨줄 때 우리는 비로소 아는 거죠.
“목사님, 왜 자꾸 복잡하게 이야기합니까?” 복잡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십자가가 십자가만 증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십자가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가 십자가만 증거하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증거할 수 없어요. 우리가 십자가 증거하면 행함이 되고 행함은 필히 자기 의를 낳는다고요. 그럼 자기 의가 있다는 우리를 우리가 온전히 미워할 수 없고 미워할 수 없으면 우리가 온전한 십자가 졌다고 할 수가 없어요.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 지라 했는데 미워하는 척하고 십자가 지고 이건 안 되거든요.
그럼 갈라디아서 3장의 내용이 뭡니까?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우리를 밟아요. 철저하게. 3장에서. “예수님 왜 죽은 줄 알아?” “저주받아 죽었지.” “너희는 저주받고 싶어, 복 받고 싶어?” “복 받고 싶어!” “그러니까 넌 탈락이야.”
자꾸 예수님과 비교해보세요. 예수님은 저주받았거든요,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사람은 저주를 원하지 않아요. 저주를 원하지 않는다고요. 인간은 사랑을 원하지, 저주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은… 주일 낮 설교하면서 단어 하나만 끄집어내라면 이걸 끄집어내고 싶어요. ‘돌이킬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바르게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십자가 사건 터져버린 이상, 저주가 보편화된 이상 어느 누구도 어떤 영웅이나 거인이 와도 이것은 ‘돌이킬 수 없잖아~’ 돌이킬 수 없어요!
그냥 우리는 이 사태에 밀려갈 뿐이에요. 저주에 밀려. 돌이킬 수 없어요. 나 안 해!? ‘안 해’가 어디 있어요, ‘안 해’가. 갈라디아서, 빌립보서에서는요, ‘나 이제 성도 안 해. 나 천국 안 갈 거야.’ 이게 안 돼요, 이게. ‘삐-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천국 가야 됩니다.’ 이거에요. 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당신 주도가 아니고 성령이 주도권을 쥐어서 좋으나 싫으나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됩니다.’ 이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철저하게 우리를 없애는 게 아니고, 우리를 저주받는 자 되게 하죠. 그런데 저주가 오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저주받는다. 복인 줄 알아라.” ‘주님이 하시는 코스에 같이 참여된 것만 해도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렇게 되는 거죠. 그게 이스라엘의 특징이죠.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버림받았잖아요. 대표로 버림받았잖아요. 버림받은 자리에 예수님 딱 한 분 등장했어요. 제대로 저주받은 분이 딱 등장한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인간들의 믿음은 다 사기였던 겁니다. 믿음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의 믿음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믿음이에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유일한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야기했던 모든 것,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죽은 자를 살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하고 싶으면 그 일을 해내십니다.’라고 받아들이는 믿음이에요. 내게서 난 믿음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해내는 그 행함, 결과로서의 원천인 그 믿음, 이 믿음이 바로 선물로 받은 믿음, 성령을 통해서 받은 믿음이 바로 그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너희들끼리 측정하거나 평가하거나 복수하거나 심지어 너 자신도 너를 평가하지 말라. 잘했다, 못했다 네가 그 입을 뗄 자격이 없다. 주께서 나의 의를 파괴시키는 일을 계속 하신다는 것만 증거하면 돼요. 나의 잘남과 멋있음과 신앙 좋음을 깨부수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오후 때 기도한 것처럼 우리는 엑스트라니까, 엑스트라 임무가 뭡니까? 주인공만 돋보이는 일을 하면 되거든요.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었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 주의 믿음을 받고 보니 지금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 것을 이제는 기쁘게 감사하고 주님이 하신 것만 드러낼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의 잘남과 의가 부서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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