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구원
2025년 8월 1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32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숱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행함으로 구원은 성사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인간이든 구원될 자격도 없고 천국 갈 입장에 있지 않는 겁니다. 천국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막혀 있는 곳입니다. 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나온다는 말은 모조리 다 가짜라는 뜻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천국 구원의 염원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은 죄가 내부적으로 늘 들끓고 있다는 겁니다. 갈 수 없는 곳에 기어이 들어가겠다는 나서는 것은 다음의 말씀을 전면으로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보여주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이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인해 인간들은 오로지 천국 가지 못할 존재임이 더욱 확실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천국 저지 방침이 현실적으로 가동되고 있음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 나타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의 나열입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사무엘 및, 다윗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자신이 관여할 입장에 있다고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 중에 베드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보세요.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베드로가 옆에 있는 사도 요한의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니 주님은 베드로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즉 “너는 너 자신과 상관하지 말라‘는 겁니다.
구원이란 이런 겁니다.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할 게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협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아의 개입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에 방해될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등장된 인물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열된 구약 사람들입니다.
인간들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은 오직 자기 일 뿐입니다. 기드온 이야기가 입다 이야기나 바락 이야기가 궁금해서 어쩔줄 모르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과거사들이 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각가지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여전히 자기 중심에 자아가 단단히 박혀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아 중심을 뽑고 그 자리에 말씀을 집어넣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짐”이 ‘믿음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히 11:3) 그렇다면 그 말씀을 누가 어떻게 정리하신다는 말입니까? 히브리서 1:3에 보면 그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즉 ‘죄를 사해주는 식’으로 말씀의 질서는 잡히게 됩니다. 따라서 말씀의 질서가 중심이 들어오게 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개입되면서 어떻게 자신의 자아가 박살나는지를 보이게 된 자들입니다. 모세의 경우가 전형적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멜렉 민족과 싸움입니다.
“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11-12)
이것은 인간 육신의 나약함과 인간의 불가능함을 드러내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벌리는 전쟁에서 인간이 보여줄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보탬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승리의 나라를 생성하십니다. 이미 천국 국적으로 취득하게 된 자들에게 세상 국적의 무능성을 이들을 통해 보이고자 하는 겁니다.
기드온의 경우, 그는 하나님의 구원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코자 양털을 사용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으로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알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자 기드온의 불신앙적 테스트를 그대로 자기 쪽으로 받아들이시고 용납하시면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구원을 맛보게 하십니다. (삿 6:36-40)
바락의 경우, 그는 수많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공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여자 사사에게 의지합니다. 즉 바락은 믿음 여부가 자신을 구원할 줄로 오해한 겁니다.
삼손의 경우, 그의 구원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구원방식으로 그대로 잘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게 하시는 자’를 통해서 성립합니다. 삼손은 아예 태어날 수 없는 자였습니다. (삿 13:4-5) ‘나실인’이란 언약 매개체로 출생된 자입니다.
입다의 경우, 구원이 참담함으로 찾아듦을 알게 된 자입니다. “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삿 11:35) 그토록 애써도 부셔지지 않는 자아가 주님의 구원으로 참담하게 부셔지는 겁니다.
다윗의 경우, 그는 많은 수의 백성을 갖고 자신의 강대국가의 자만에 빠져서 인구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사흘 동안 7만 명의 백성이 죽어나겠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차라리 나와 내 가족을 죽이시옵소서” 이게 구원받은 자의 고백입니다.(삼하 24:17)
사무엘의 경우, 아무리 본인이 훌륭해도 자식에게 물러주는 것은 죄 뿐임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삼상 8:3)
이런 모든 문제가 신약에 와서 한 번에 풀립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29)
아무도 천국에 들어 올 수 없기에 일단 들어온 자는 아무도 나갈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과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9강-히브리서 11장 32절(일방적 구원)25081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32절입니다.
히브리서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사람이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러한 일들을 보여줬다’라는 겁니다.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본인이 본인과 늘 상관해서 살았는데 믿음이 딱 오니까 나와 내가 상관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에요.
아까 기도한 집사님이 아주 심각한 주제를 던졌습니다. “내가 악인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구약에서 제시된 구절을 이야기했는데(사 55:6-11) 신약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원치 않는다’라는 말은 ‘너는 너하고 상관을 하지 말라’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 구원에 본인이 설명할 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구원과 네가 엮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과 내가 상관이 없는데 구원이 되고 말았어요.
내가 엮이지도 않았는데 구원이 되었으니까 내가 구원에 대해 설명할 게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왜 구원이 되었지? 이건 있을 수 없는 건데?’ 전에 내가 생각했던 구원은 ‘내가 뭘 하면 구원이 되는가?’ 내가 나와 상관되고 엮였을 경우의 구원인데 정작 주어진 구원은 나와 전혀 상관없이 구원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 예가 이미 구약부터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구원을 위해 전쟁을 하는데 아말렉과의 전장에서 모세가 하는 일은 지팡이를 들고 산 위에 올라가는 거예요. 출애굽기 17장 11장에 보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인간 몸의 나약함을 이야기합니다. ‘지팡이를 들면 이스라엘이 이긴다.’ 그런데 인간의 몸이 나약해서 힘이 빠지면 지팡이가 내려와요. 내려오니까 이스라엘이 지고 아말렉이 이겨요. 다시 옆에서 아론과 훌이 팔을 올려주니까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불가능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놓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우리 구원받은 자들에게 알려줄 것은 뭐냐? 너의 나약함과 너의 불가능성을 추가적으로 알려줍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내가 구원됐다’라는 식인 나의 구원과 나와의 어떤 상관성을 다 끊어버리는 일을 주께서 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이 됐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요한복음 21장 22절에 보면 그 대목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옆에 있는 사도 요한보고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할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주님이 하는 구원에 네가 왜 주제넘게, 네가 뭔데 끼어드느냐?’ 구원에 대해서 심지어 너의 구원에 대해서도 네가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없습니다. 구원은 그냥 결과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시도할 수 있는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애초부터 그럴 자격이 주어지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우리는 “정녕 죽으리라”(17)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한 것을 줄여보면 이렇습니다. ‘말씀과 더불어 함께 살기’ 자꾸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말씀과 더불어 함께 사는 거예요.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천국의 국적을 주었습니다. 천국의 국적을 획득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 국적에 휘말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주어진 국적에 맞춤, 딱 맞는 삶을 살도록 주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그 점을 위해서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하나 뭐 조건을 붙인다면 “네가 나를 믿든 안 믿든, 네가 나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전혀 거기에 상관없이 나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할 작정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또 심술이 나서, 우리의 머리가 작동해서 “그러면 주님이여,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 증거는 어떤 겁니까? 우리의 개입 없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주신 것은 굉장히 고마운데 문제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데 주와 함께했다는 그 증거는 어떤 게 있습니까?”
그 증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 일을 이렇게 실천합니다. 내가 구원되는 데 보탬이 되고 기여될 수 있는 것은 다 뺍니다. 이게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내 구원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쭉쭉 다 빼버려요. 그 어떤 것도 도움이 안 되고, 우리가 주의 일에 협조하려는 그 의도, 협조하는 것이 주님의 구원을 더 빛나게 한다는 그러한 잘못된 발상도 다 빼버려요.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일에 도움을 주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의가 빛날 것’이라는 그러한 망상, 그건 잘못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는 현실에 충실해야 하죠. 현실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내 구원은 전혀 나와 상관없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더욱더 빛나게 되는 겁니다.
제발 여러분, 저도 마찬가지고 현실에 좀 충실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꿈과 현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2강의 내용이 굉장히 지루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이야기했어요. ‘현실도 모르면서 무슨 꿈을 이야기합니까?’
그 책의 2강을 보게 되면 세계사 이야기가 나와요. 세계사 이야기가 굉장히 지루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런데 1강을 보고 2강을 보게 되면 세계사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짐승 이야기에요. ‘짐승이 만든 그 안에서 짐승과 살면서, 짐승이 조성한 현실에 완전히 빠져서 살면서 현실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이 현실에 충실해야 하고 현실 속에서 그 현실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들이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나오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및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하는 일이 그들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의 리스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등장이에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 일에 대해서 인간이 끼어들 때 어떤 훼방과 방해가 벌어졌던가, 인간들의 어떤 오해들을 각양각색으로 드러냈던가?’ 거기에 등장한 인물들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명함들을 정리한 일이 있었어요. ‘진명고향마을 김영구’, ‘사단법인 남부함께살기운동 원효수’, ‘삼성전자서비스 이원동’, ‘페라리 영상 김원재’, ‘백설공주 동성로 가족사진’, ‘김 연구센터’, ‘성주 이씨 사친회 이 도필’, ‘영덕대게 생산자 직판 수양호’, ‘세종 청소년 수련회’, ‘별 부동산’, ‘외갓집 한정식’ 이건 울산이네요, ‘큰 동산 컴퓨터’, ‘대명 독일 안경’, ‘주식회사 진로’까지 나와요. ‘팔공 옷 수선’, ‘소록도 연합 교회’, ‘부산 교육 대학교 교수’, ‘의왕시 사랑채 노인 복지회’, ‘국방부 조사본부’….
자,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32절에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나오잖아요. 명함들 이거 보면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오?” 한평생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명함들, 그 명함들을 일일이 쭉 보면서 여기 얼마나 많은 경우들이 있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개입해서 저질러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거론하는데 동원된 사람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 “내가 시간이 부족하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오?”
우리들 사적인 인생이나, 하나님이 구원하는 이스라엘 인생이나 분명히 그 당시에 도움이 되고 필요했다고 여기고 일어난 일들이 지나와보면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고, 오히려 오해했던 경우들의 리스트가 이렇게 쭉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구원되는가?’ 여기 ‘나’가 들어가잖아요? 신약에서는 그 ‘나’를 주께서 빼십니다. 자꾸 ‘나’가 살아있으니까 “나는 어떻게 구원됐습니까?” 이렇게 나가니까 주께서는 그 ‘나’라는 것을 빼고 그 자리에다가 말씀을 집어넣어요. 내가 중심되는 자리에 말씀을 집어넣습니다.
말씀을 집어넣게 되면 말씀과 내가 교체를 당하게 돼요. 교체당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빠져나가면 구멍이 생기겠죠? 그 구멍에다가 하나님께서 말씀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내가 내 뜻대로 나를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 오늘 본문에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선지자들인 이 사람들이 옛날 구약 이스라엘 때 나를 집어넣어서 어떻게 ‘천국 가볼까, 구원 받아볼까?’ 시도했던, 거기에 나를 집어넣었던 사람들의 리스트에요. 우리 선배들이에요.
나를 집어넣어서 나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되겠다고 여겼던 그 사람을 주님께서는 집어넣고 ‘왜 나를 집어넣으면 이게 구원이 안 되고 구원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가?’를 증명하는데 동원된 인물들이 이들이에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 사람들 말씀 좀 들어봐.” 이들은 내가 끼어듦으로서 천국이라는 것은 내가 끼어들 잽이 안 되는, 내가 들어가지 않아야 할 그 나라가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이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들어가면 안 되는 나라에요. 내가 들어가면 안 되는 나라에요.
신약에서 그것을 아주 제대로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까 본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말은 들어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성경 보고 참조해서 “야, 이 성경 말씀 괜찮네. 주여, 오늘부터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넣어주세요.” 해서 우리를 천국에 넣어주는 말로서 이 성경의 모든 구절이 있는 게 아니에요. 모든 성경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들어올 수 없는 세계가 천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의 파괴가 없이는 나의 구원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같은 말로 ‘나 자신이 파괴되는 현장이라면 이미 구원이 실시된 현장’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나를 파괴시키는 방법은 말씀이 우리에게 옴으로써 성립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에요.
산상설교에 나오는 말씀 중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중에서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29-30절에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이 우리 곁에 왔다는 말은 “이래도 네가 천국 갈 사람이라고 자부하느냐?”라고 묻는 겁니다. “네가 이 말씀대로 지킬 것 같으면 천국 넣어주겠는데 네가 이 말씀대로 지킬 성싶으냐? 이래도 네가 천국을 넘보고 싶으냐?” 이 말씀이에요. 마태복음 5장 27-28절에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즉 “이 말씀을 네가 지킬 수 있는 그러한 자신감이 있어?”라고 묻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누구 뭐 남 약 올릴 일 있습니까? 이거 안 되죠.
마태복음 5장 43-44절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게 가능합니까, 인간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철저하게, 우리 자아가 살아있는 채 천국 오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하십니다. 이게 바로 말씀의 능력이에요. 오늘 설교 제목이 이겁니다. <멸망의 많은 사례들>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들을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천국과 우리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다, 나라다.’ 말씀을 통해 이걸 우리에게 사실로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합니다. “천국이 있기는 있잖아요. 간 사람이 있잖아요. 아브라함 갔고, 이삭 갔고, 야곱 갔잖아요.”
그렇게 우리가 따진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은, 야곱은 본인들이 천국과 상관있다고 여겨서 들어간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넣어줬고, 이삭의 하나님이 이삭을 넣어줬고, 야곱의 하나님이 야곱을 넣어준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천국 가려고 노력한 게 아니고, 오히려 노력한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노력했죠.
“가만있어. 내가 할 테니까. 가만있어 내가 찾아갈 테니까.” 찾아가면서 우리의 실상은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32절이 한 줄밖에 안 되지만 여기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많은 사례들이 깔려있습니다.
이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 구절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또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은 날 구원하는 하나님’이라는 그런 음흉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 그걸 판정할 수 있는 구절이 시편 136편 7-9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말씀을 딱 보게 되면 “해와 달과 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그 인자함이 쏟아져 나온다, 따라서 감사하라.” ‘감사하지 뭐.’ 해와 달과 별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저 천국 백성 맞죠? 이제 합격 된 거 맞죠?’ 이런 생각을 우리가 쉽게 합니다.
그런데 시편 136편 15절을 한번 봅시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의 군대를 홍해 안에서 몰살시킨 그 하나님의 행위를 보고 “아, 정말 인자하시다! 너무 인자하시다.”라고 받아들일 위인이 인간 중에 누가 있습니까?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애굽의 군대를 바다에 몰살시킨 그 행위를 보면서 ‘야, 이건 깡패다. 폭력적이다, 잔인하고 참혹하다.’ 이런 생각이 들지 ‘와, 왜 이리 인자하셔?’ 이런 생각을 가질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앞에 나와 있는 ‘해와 달과 별을 주신 이에게, 그 인자하심에 감사하라.’ 이것은 누구나 감사해요.
따라서 여기서 인간이 내면적으로 얼마나 수상하냐가 들춰집니다. 자기한테 유리하게 작용하면 인자하다고 느끼고, 자기한테 불리하면 인자라고 느끼지 않는 인간은 천국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자기 입맛대로 성경 보는 사람 천국에 못 넣어줍니다. 할 수가 없어요.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번 수련회 하면서 8강과 9강에서 제가 강조하고 다짐을 좀 해줬으면 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천국을 지키는 천사가 천국 오고자 하는 자에게 물어요. 물을 때 딱 하나만 묻습니다. 장담할게요. 딱 하나만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문제가 딱 한 문제에요.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는지 천사는 그것만 딱 물어요. 어떤 사람이 “당신은 뭔데 그렇게 장담하느냐?” 장담합니다. 왜? 유월절 날 심판하는 천사가 딱 하나만 봤기 때문에. 문에 뭐 Rh-, 그렇게 자기 피 바르는 거 아무 소용 없어요. 자기 공로, 땀 흘린 것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한평생 어떻게 애썼는가를 전혀 묻지를 않아요. 자식 어떻게 키웠나,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딱 하나만 묻습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발렸는지 아니 발렸는지?” KBS, MBC, JTBC 어느 매체에서 그거 방송합니까? 뭐 ‘데몬 헌터스’ 노래 나오는 그거, ‘방탄소년단’ 이야기 나오지 이 짐승의 세계에서 ‘어린 양의 피 여부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라는 이야기를 매스컴을 통해, KBS 아나운서를 통해서, MBC 리포터를 통해서 이게 발설이 됩니까? 안 되잖아요,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알아야 해요. 우리가 푹 잠겨 있는 이 세상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간접적으로 아는 방법을 제가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있거든요.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첫 번째 게임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할 때 움직이면 기관총이 나와서 쏴 죽이는 것.
두 번째 게임이 더 의미 있어요. 두 번째 게임이 뭐냐? ‘달고나’ 찍어 내는데 바늘 하나씩 줍니다. 뚜껑 열어서 나온 달고나 형태 그대로 손상 없이 들춰내면 다음 게임으로 통과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게임이에요. 어떤 사람은 달고나 형틀 딱 여니까 ‘우산’ 모양이 나왔어요. 이거 죽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집’ 모양, 어떤 사람은 운 좋게도 ‘삼각형’ 모양 하나 달랑 나온 사람이 있어요.
침 발라가면서 달고나 사이사이를 바늘로 콕콕 쑤셔서 그 모양이 안 깨지게 하는 게 이 게임인데 이 게임에서 연출자가 요구하는 게 그거예요. ‘인간은 평생 태어나서 자기 하는 일에 몰두하고 집착하는 것 그게 전부다.’ 어떻게 하든지 요 우산 모양을 유지해야 더 큰 돈이 달린 다음 게임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래서 현재 내가 하는 이 일에 몰두하는 거예요.
이 형태가 부서지면 안 되니까요. 이 형태가 부서지면 그건 곧 뭐냐? 자아가 부서지는 것이니까요. 자아가 부서지면 이 사회에서 “넌 꺼져!”하고 우리를 강제 도태시키니까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계속 게임을 하려면 한게임 또 한게임, 한발자국 두발자국 거기에 몰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게임에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다음 게임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해 주니까 거기에 몰입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오징어 게임>에 참석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창세기 2장 17절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미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한 죄수들만 끌어모아서 게임한 거예요. 언제 죽어도 마땅한 자들, 진작 사형당해서 이 사회에서 도태되어야 마땅한 인간들 모아놓고 돈 걸고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줄게.”
이게 바로 짐승의 세계가 아닙니까? 이게 짐승의 세계거든요. 짐승 세계의 특징은 뭐냐? 어쨌든 간에 이 자아를 내 식으로 살려내려는 그 생각 외에는 없어요. 참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언제 기드온 이야기가 궁금해서 조바심 내고 환장했습니까?
언제 바락 이야기, 삼손 이야기, 입다 이야기, 사무엘 이야기, 다윗 이야기가 그렇게 궁금해서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그 이야기를 누가 들려주기를 바랐던 사람, 누가 있습니까? 우린 짐승에 속해요. 우리는 기드온 대신 나, 바락 대신 나, 삼손 대신 나, 다윗 대신 나, 입다 대신 나, 내가 우선 중요해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나는 별개의 문제고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면서 살고 있잖아요.
자, 그러면 이 사람들,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나오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개인적인 생각으로 주의 구원, 주의 일을 망친 자들이에요. 믿음으로 그 망친 현장에 구원의 비결과 규칙과 원칙을 세웠던 사람들입니다.
문장이 좀 길죠? 천천히 하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망치기 위해 동원된 사람이고,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방해됨으로써 구원에 진수가 망쳐지는 현장을 드러내는데 동원된 사람,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 나오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은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왜 우리 자아는 하나님께서 상관없이 구원했고 왜 우리 자아는 말씀과 교체해서 들어가야 하는지, 왜 우리 자아를 그냥 갖고 있으면 구원될 수 없는가?’를 이들을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선지자들 이전에 하나님께서 등장시킨 인물이 있었으니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었어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어떤 경우냐? 로마서 4장 17절의 해설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곧 ‘있는 데서 없게 만들고, 없는 데서 있게 만들고, 그다음에 살아있는 데서 죽게 만들고, 죽은 데서 살게 만드는 그러한 절차를 아브라함이 보여주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나와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바꿔치기 된 사람의 샘플, 그런 경우가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삭이었고 야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없애주시는 겁니다. 우리를 파괴시켜 주는 겁니다. 뭐로? 말씀으로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산상설교 들이대고 산상설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들이대면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십니다.
“우리가 살아있지 않다면 내가 왜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죠. 히브리서 1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간단한 말씀이에요. 모든 세계가 말씀으로 지어졌다. 인간의 인공지능으로 만든 게 아니죠? 인간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인간 자리에 말씀이 교체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모든 것은 말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면 저는요?” “너도 말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말씀으로 만든 꼬라지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성경에 관심도 없고, 세상에서 내 몸 하나 살아보자고 ‘오징어 게임’ 같은 지독한 짐승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이 모양 이 꼴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히브리서 1장 3절에 그 답이 나와 있어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말씀으로 만들어진 우리 모습이 전혀 말씀과 너무나도 다른, 짐승 같은 인간이 되는 이유가 이 말씀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이 나 말고 따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질서를 부여하느냐? 죄를 깨끗이 하심으로서 질서를 부여하는 거예요, 죄를 깨끗케 하심으로써! 그러니까 우리는 죄가 있어야 하고, 죄가 나타나야 해요.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죄고,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죄고, “그러면 나 짜증 나서 구원 안 받을래.” 이것도 죄고, 어떤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왜? 정결함이 더 세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죄인 주제에 자꾸 천국에 들어가려는 죄를 지어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로마서 8장 39절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한 번 들어가면, 천국 들어가면 못 나와요. 왜? 끊어지지 않음이, 예수님의 죄 정결케 하는 능력에 의해서 다시 천국 가면 지옥으로 ‘빠꾸’가 안 돼요. 나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지독하게 죄만 짓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주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죄짓는 일이지요. 뭐 가만있어도 죄짓지만 죄짓는 일, 죄 아는 일 그 일을 누가 했느냐? 바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이 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이 본문을 처음 봤을 때 ‘기드온, 바락, 삼손? 좋겠다! 칭찬받으니까. 세상에 이런 영웅이 믿음이 어딨느냐? 그들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이 그냥 멸망할 뻔 했잖아.’ 그래서 또 기도 제목 생겼어요. ‘하나님이여, 이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선지자들의 이 명단에 저도 끼어들어서 구원받게 하옵소서.’ 그런 생각이 들죠.
이 명단에 여러분들이 이미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망쳤는지를 보여주는, 그러한 일상의 삶을 사는 우리의 명단.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하나 이제 기드온부터 짧은 시간 내에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등장한 인물 기드온인데 사사기 6장 36절에서 40절입니다. 여러분, 이 분들이 하는 일을 들어보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를 몰라요. ‘아, 신앙의 영웅들이 이 짓을 했어? 나도 그런 짓은 안 하겠다, 정말!’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사사기 6장 36-40절에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너를 통해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라고 하니까 기드온이 하는 행위가 이거에요. “하나님 못 믿겠습니다. 나는 못 합니다. 문제를 제가 낼 테니까 한 번 알아맞춰 보세요. 양털 한 뭉치를 둘 테니까 다음 날 새벽에 이슬이 양털에만 촉촉하게 있고 그 주변은 바짝 마르게 해주신다면 제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감히 인간 입장에서 자기에게 찾아온 하나님을 배척했어요. “저리 가세요. 난 못 합니다. 나도 자아가 있어요. 하나님만 자아가 있는 게 아니고 나도 자아가 있다고요. 내가 못 하면 난 안 하는 고집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못 합니다. 만약에 정 저를 쓰시려거든 제가 문제를 낼 테니 거기에 부합되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내쫓았어요.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양털만 촉촉하게 이슬이 있게 하고 나머지는 바짝 말라 있게 했어요. 그쯤 했으면 이제는 구차 없이 따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죄송합니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양털은 바짝 마르고 주위 땅만 촉촉하게, 제가 한 번 더 시험할 테니까 하나님이 따라 주시기바랍니다.” 그다음 날 보니까 양털은 바짝 마르고 주위 땅만 축축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기드온 생각은 이래요. ‘나는 평생토록 내 일만 줄창 고집하는 그런 존재가 나입니다. 나는 내 일에서 벗어나는 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당신이 찾아왔잖아요. 나는 안 답답한데 당신이 답답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내 조건에 맞춰서 당신이 내 소원대로 들어준다면 당신에게 협조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게 천국 갈 마음 상태입니까? 신약의 입장에서 볼 때요. 그냥 이건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인간이에요, 신약입장에서는. 신약의 입장에서는 뭐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롬 3:10)다는 게 확정되어 있잖아요.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정녕 죽으리라.’가 계속 지속되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구약 기드온은 주님께서 주고받고, 주고받고 지금 거래하고 있어요. 신약에서는 그게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냥, 그냥 구원받아라, 인간아! 그냥 구원받아! 그냥 이유도 없이 천국 가. 끝!”
오순절 날 성령 왔습니다. 성령 오라고 했습니까? 그냥 하나님의 영이 임했어요. 영이 임하니까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이렇게 돼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네 아버지다. 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그래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너는 내 자식이다.” 끝났어요. 이게 신약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일방적으로 왔어요. 그것이 신약이에요.
신약에서 이미 천국 국적을 갖고 이제 구약을 보는 거예요. “도대체 ‘나’라는 이 종자, 오직 나밖에 모르는 이 고집 센 인간을, 그 나를 주님께서 얼마나 낮아지셔서 떠나지 않고 건졌는지?” 그 첫 번째 등장하는 인물이, 1번 타자가 기드온입니다.
2번 타자는 ‘바락’입니다. 사사기 4장 1절에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라고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전쟁하기를 원했어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전쟁은 이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로 만들어놓고, 전쟁해서 우리가 살았을 때 주님의 공로로 옴팍 돌아가는 방식이 언약방식의 전쟁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무능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바락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자기 힘으로 영적 전쟁을 하는 줄로 오해했습니다. 사사기 4장 3절에 “야빈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가나안 왕 ‘야빈’에게 강력한 군대가 있으니까 군대 장관 바락이 쫄았어요.
국방부 장관이 쫄아버린 이유가 뭐냐? 자신은 이 엄청난 군대와 맞서 싸울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바락을 통해서 우리가 중요한 포인트를 잡아야 해요. 믿음이 없다는 그 말은 말이 안 돼요. 애초부터 주께서는 있는 믿음도 빼낼 판인데 믿음이 없다는 말은 ‘내 믿음을 소유하면 그 믿음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받으니까 믿음을 소유하면 그 소유된 믿음으로 천국 갈 것이 아니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 믿음을 쏙쏙 다 뽑아냅니다. 믿음을 뽑아내고 거기에 주님의 일방적인 긍휼과 사랑을 집어넣어요.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네 인생 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런 뜻이거든요.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은 물어요. “목사님, 성령 받으면 성낼 일이 전혀 없습니까?” 죽을 때까지 성낼 일만 생길 거예요, 성낼 일만.
왜? 그 사랑이 내가 주님을 사랑한 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으로 이미 끊어지지 아니함’이 성립된 상태에서 우리는 아직도 자기에 대한 연민, 자기에 대한 미련, 자기에 대한 애착 그런 것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구약에 있는 등장 인물을 통해서 우리 모습을 낱낱이 다 까발리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때 사사가 ‘드보라’였어요.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삿 4:6-7).
그런데 바락이라는 그 군대 장관이 자기 역할을 못 하고 야빈 왕을 대적할 믿음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도 막 더듬었을 거예요. 사사기 4장 8절에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이런 식이죠. “나 안돼. 나 이 전쟁 못 해요. 같이 가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럴 때 드보라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사사기 4장 9절입니다.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것임이니라.”
이런 뜻이지요. ‘아무 힘이 없는, 그냥 집에서 살림살이하는 그 여자가 남자인 당신, 국방을 담당하는 군대 장관, 총사령관 역할을 대신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이번 일로 얼마나 무능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가 드러날 겁니다. 그게 당신에게 돌아올 구원의 몫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정말 내가 내 구원에 기여한 바 없다는 것, 내가 하나님께 잘해보고자 한 그것도 쓸데없는 짓이라는 사실, 그걸 보여 줄 것입니다.’
3번 타자는 삼손인데 삼손뿐만 아니고 삼손의 아빠 엄마 세 사람 몽땅 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오해한 사람이에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전쟁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있는 자를 없게 만들고, 살아 있는 자를 죽어있게 만들어서 오직 언약으로만 언약의 적인 악마와 싸우는 전쟁,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나로 하여금 힘을 빼게 하고, 나로 하여금 살았기 때문에 나오는 에너지를 주께서는 금지시키고 죽은 채로 전쟁에 가담케 해서 모든 전쟁의 결과는 우리와 함께 계신 분에 의해서 천국과 승리가 주어졌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 삼기 위한 전쟁이지요.
그걸 염두에 두게 되면 삼손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나님께서 삼손의 힘이 그렇게 세도록 한 것은 ‘언제 네 힘 다 빠질래’ 그때를 기다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힘을 준 것은 ‘너 언제 그 힘을 뺄래?’ 인간은 그 힘을 언제 빼는가? 그 힘을 엉뚱한데, 여자한테 다 썼을 때 그 힘이 빠지지요.
주께서 그 있는 힘을 뺌으로써 주님의 구원이 가까이 온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사사기 13장에 보면 아예 삼손은 없는 존재에요.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삿 13:2). 태어날 수 없었던 인간이에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그 있는 인간의 힘을 쪽 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이는 데 동원된 사람이 삼손입니다.
힘 있다고 사자 모가지 비틀 때 신났지요. 그걸 자랑질하면서 자기 힘을 사용해서 여자 얻고자 한 그런 것도 한때였습니다. 그런데 힘이 빠지니까 여자도 떠나고, 민족도 떠나고, 심지어 예쁜지 안 예쁜지를 보던 눈알도 뽑혔습니다. 뺄 것은 다 뺐어요. 눈, 코, 입 다 빼는 것, 주님의 주특기잖아요.
주님의 승리를 위해서 자기 백성이라도 뺄 것 쪽쪽 빼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아, 이 삼손이 힘을 받았지만 ‘나 삼손 안 할래’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 무섭게 일하시지요? 일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뺍니다.
사사기 16장 28-30절에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결국 삼손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이여, 아무 쓰잘데 없는 이 나의 죽음을 주님의 구원에 동원되게 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이 마지막 나의 죽음을 주를 위해서 바치고자 옆에 있는 기둥을 잡아당기니까 남아 있는 그 힘과 더불어서 블레셋 사람들이 깔려 죽었는데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시 136:15) 그 하나님의 행위가 삼손의 입장에서는 그게 왜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게 왜 인자하심이고, 그게 자비고 긍휼하심인지 본인의 목숨이 끊어질 그때야 안 거예요.
4번 타자 입다, 진짜 4번 타자에 합당합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사사기 11장에 나옵니다. 당시에 입다라는 이 조폭이 큰소리를 치고, 이런 조폭이 구원자가 된다는 말은, 그 시대가 힘 가지고 겨루는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힘과 용기가 있다고 봐서 입다를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조건부였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뭘 줄 건데요?” “당신 국방부 장관 시켜준다.”(삿 11:6) 이런 식으로 했어요. ‘이 기회에 출세해 보자’ 해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 말고 기존에 이스라엘이나 이방 나라에 통용되는 ‘신’(神)이 있었어요. 암몬와 모압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아스다롯’이니 ‘그모스’니 그런 신들이 있는데 그 신들에 의하면 ‘전쟁에서 돌아올 때 제일 귀한 것을 바침으로써 승리케 한 신을 찬양하여 앞으로 두고두고 신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라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0-31).
제 생각에는요, 아마 입다가 소나 양이나 염소나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여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평소에 집에 들어갈 때 그런 가축들이 줄줄 쫓아 나왔을 테니까. 그런데 사사기 11장 34-35절에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아직 결혼도 한 적이 없어요. 솔로입니다. 결혼도 한 적이 없는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다른 자식도 없었어요.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 구원에 선도적으로 참여한 자기를 참담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깨어지지 않는 자아, 자존심, 나의 가치를 묵사발 만드는 잔인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올 때 누가 그것을 하나님의 잔인함으로 이해합니까? 성도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이해하지요.
“주여, 제가 나를 지키고자 하는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오해케 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내 인생 왜 이렇게 조져놨느냐?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되었느냐? 모든 것은 하나님, 당신 탓이잖아.” 이러한 깨어지지 않는 나의 자아, 이것이 구원이 임하면 우리는 “참담합니다!”라고 하면서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신약 성도라면. “아, 이런 식으로 독하게 이미 저를 구원시켜 놓았군요.” 독하게, 잔인하게 우리를 구원한 거예요. “너 말고 내 아들 사랑 보고 너를 구원한다.”라는 거예요.
두 사람 남았지요. 다섯 번째 타자 다윗, 다윗은 사무엘하 24장에 나옵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요압이 말렸지만 듣지도 않고 인구조사를 해서 사흘동안 7만 명 죽었습니다(삼하 24:15).
사무엘하 24장 16절에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내 백성이 하나님의 처벌 대상이 되는 그 이유가, 중간에 있는 다윗 왕이 그 나라가 내 소유인 줄 알고 내 능력, 왕의 위상을 드높이는 재료로 여기고 인구조사를 실시했던 겁니다. “우리 교인 몇 명이냐?”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 재산이 펀드에 얼마가 들어가 있고 현금이 은행에 얼마가 있다.”와 똑같은 겁니다.
‘내 소유가 나의 위상을 높인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잔인하게 내 것을 몽땅 빼앗아 가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됩니다. 다윗은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서 이렇게 합니다. 사무엘하 24장 17절에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즉 “하나님이여, 저를 치시고 내가 애지중지하는 내 가족을 쳐주세요. 저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나에게 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제사드려라. 네 죄를 아는 네가 백성들의 죽음을 멈출 수 있는 제사를 드려라.”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지요. 죄 없는 분이 죄를 안고 아무도 모르는 아버지 앞에 홀로 서서 어떤 인간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이미 아버지와 계약대로 해결해 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너는 빠져! 너는 빠져라. 다윗 빠지고 입다 빠지고 삼손도 빠져! 우리는 빠져! 내가 너 대신 나서서 너의 천국을 결정지을게. 내가 십자가에 죽은 것 외에 너는 다른 것을 알면 안 돼.” 그렇게 되겠지요.
끝으로 사무엘을 봅시다. 사무엘상 8장 1-3절입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따르지 아니하고. 아버지 사무엘은 그렇게도 위대한데 아버지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아버지 밑에 있는 그 자식이 아버지와 같지 아니해요. 이것은 뭐냐? 자식에게 교회 물려주고, 자식에게 사업 물려주고,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으로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그 생각, 그것은 자기 자식이 나의 죄에서 출생했다는 시편 50편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한 거예요.
자식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내 죄는 자식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대물림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세계에요. 이 세계에서 예수님의 죄사함, 정결케 하는 그 말씀의 질서만이 우리의 자리에 대신 박혀 들어갈 때 못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 믿음으로 인하여, 약속으로 인하여 우리는 천국 백성이 이미 되었음을 잊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언제 말씀 좋아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 빼놓고 말씀에는 관심도 없는 우리, 정말 철딱서니 없는 우리, 지금도 주께서 함께 하사 말씀으로 우리를 파괴시키는 이것이 하나님의 큰 복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