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탈출
2025년 8월 2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35-38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히 11:6) 그런데 그 믿음 생활로 인해 야기된 현장은 참으로 처참한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고문할 수 있는 모든 경우들이 ‘믿음’의 결과로서 일어납니다. 자아가 가진 자라면 그 누구도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굳이 믿음의 사람들을 이 지경으로 몰아세우시는 겁니까? 그것은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온갖 변명들을 다 동원해서는 최후로 자신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즉 이미 인간들은 출생할 때부터 믿음의 내용에 최종적으로 ‘자기’를 거기에 가득 채워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만이 지켜내고 싶은 겁니다. 이처럼 ‘나를 지키기’를 평생의 숙원사업으로 지정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천국 시험 요강’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천국 시험의 요강은 이러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고전 2:2)
그런데 이 ‘십자가 알기’가 지식에 머문다면 이 또한 여전히 ‘나 자신’지키기의 일환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금연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은 흡연자가 잘 알고 있으면서 금연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 피우는 담배가 나의 마지막 담배’이기를 소워하기 때문입니다.
즉 담배를 끊느냐 피우냐를 결정하는 바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흡연자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최종 믿는 궁극적으로 확실한 것은 “생각하는 당사자인 나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다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 나오다가 교회와 이별하는 것은 ‘이제 정신 차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즉 사도는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신뢰하는 그 최종의 내용에 대해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절차에 대해서 두 개의 탈출이 필요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구약 역사를 통해서 보면, 하나는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나왔습니다. 그랬던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통해서 많이 이스라엘을 죽였습니다.
이는 ‘자아로부터의 탈출’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은 요단강에서 전면적으로 약속의 땅 진출이 막히게 됩니다. 자기 능력, 자기 믿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20:3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에 본문에 등장하는 참혹한 핍박의 현장들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 즉 자아로부터 탈출을 위해 주님께서 조성하신 환경입니다. 즉 이 세상에 아무리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 목숨을 잃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나에게 덮쳤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두 가지 탈출 절차는 신약에서는 하나의 구원에 대한 두 가지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죽으심과 성령님의 활약상입니다. 즉 ‘내가 모르는 나, 내가 아닌 나’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마치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모르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던 것처럼입니다.
구약 솔로몬 재판에서 어떤 여인은 자기 자식을 옆에 있던 여자에게 빼앗기게 될 판이었습니다.(왕상 3:20-21) 여기에 대해 내린 솔로몬의 판정은 아이 잃을 뻔한 여인으로 하여금 자‘식을 잃음으로서 너의 자아로 잃어라’는 겁니다. 즉 성도는 자기를 해석하거나 해설할 자격없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어떤 소경은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뜹니다. 그런데 그는 눈 뜬 자기를 믿지 자기에게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여전히 안 믿었습니다. 다시 예수님에게 불러나왔을 때 비로소 그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 9:35-38)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소원은 자기 병 고치는데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즉 그들은 그런 자기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모릅니다. 그냥 이용할대로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자기 병을 낫겠다는 것이 바로 죄였던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이라고 자부했으나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의 그의 의식은 아들이 아니라 종이라도 좋다는 겁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은 마땅히 자기에게 주어질 구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만 주신 구원인 것을 압니다. 즉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될 자격이 없음을 자인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혹독한 신앙 환경은 일종에 전체 인간들의 잡초를 이발하는 성령님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종류의 뿌리가 나올 때까지 성령님을 활동하십니다. 하나의 뿌리는 반석이고 다른 하나의 뿌리는 모래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 두 뿌리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온갖 잡초를 키우는데 모든 정력을 쏟고 살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라는 자기를 키우고 지키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드러내는 식으로 성령의 활동성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님께서 조성하신 환경이 우리의 외부감각을 자극하고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81강-히브리서 11장 35-38절(두번의 탈출)25082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35-38절입니다.
히브리서 11: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지금 읽은 이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현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사지(死地)로 보내고, 이 땅에서 더 살지 못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는 그게 바로 믿음에서 오는 능력인가?”라고 말씀하신다면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떤 이는 죽기도 하고, 악형도 받고, 희롱을 당하고 채찍도 맞고, 옥에 갇히거나 돌로 침을 당하고 톱으로 켬을 당하는 것, 시험당하고, 칼에 죽는 것,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는 것, 가난과 환란과 학대를 받고 광야에서 이렇게 험하게 사는 것 등, 만약에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지옥 가느냐 하는 그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게 없으면 우리가 지옥 가야 되느냐? 이런 게 없으면 우리가 지옥 가도 할 수 없죠. 왜냐하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걸로 간주가 되거든요. 천국의 입시요강이 확정되었습니다. 천국 가는 입시요강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문제가 딱 한 문제 나왔어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 십자가만 알고 있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왔어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입시요강이 하나가 아니고 갑자기 출제 범위가 넓어진 게 되지 않느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못 가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또는 기쁨을 드리는 자가 천국 가야 되는데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도 못하는 자가 남의 나라 가서 뭐 할 거예요? 재미없어서 못 살죠.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다른 걸 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도 알아야 하고, 거기다가 추가해서 믿음까지 또 알아야 하는가? 그러면 입시요강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되죠.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또 이런 게 있어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장 9절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로마서 10장 9절, 10절, 11절에 나오는 그 말씀에 의하면 입시요강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내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무엇을 알아야 내가 구원받을지 너무 출제 요강이 많아지다 보니까 이것도 챙겨야 하고 저것도 챙겨야 하고, 사람이 혼란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왜냐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구약 성경에 나왔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구약 성경에서 이미 천국 가는 입시요강이 확정되었으면 구약에서는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구약에서는 두 번의 탈출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첫 번째는 히브리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외 없이 애굽 나라에서 굳이 태어나고 살아야 된다는 그런 요소가 있어요. 애굽 나라 이전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그때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있었지 ‘나라’라는 게 없어요.
구원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는 겁니다. 구원이 되려면 그들이 일단은 애굽 나라에서 살아야 됩니다. 아까 예배 전에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고 법이 많아져서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는 한 이 법을 다 지키게 생겼다. 노란 봉투, 파란 봉투, 초록색 봉투, 빨간 봉투 등등 이제 법을 계속 만들어 낼 건데….”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필리핀에 가시죠. 다들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한국 사람 보면 총으로 쏴 죽이는 필리핀 그 나라 가서 사시죠.” 애굽 나라라는 것을 거치지 않으면 천국 가는 나라가 만들어지지 않아요. 안 만들어진다고요. 그래서 탈출을 두 번 해야 돼요.
하나는, 애굽 나라에서 탈출해야 하는데 애굽 나라에서의 탈출은 주와 함께 탈출합니다. 두 번째 탈출은 뭐냐? 그 애굽 나라에서 탈출할 때 애굽 나라에 길들여진, 애굽 나라가 전부라고 여겼던 나, 그야말로 살기 좋았던 그 나라, 정말 모든 것이 풍요한 나라, 정력에 좋은 부추도 있고, 수박도 있고, 참외도 있고, 짜장면도 있고, 짬뽕도 있는 세계에 거기에 길들여진 나, 그 ‘나’로부터의 탈출, 이게 두 번째 탈출입니다.
첫 번째 탈출은, 무심코 주님에 의해서 강제 탈출 당한 거고, 두 번째 탈출은 뭐냐? 바로 ‘나’로부터의 탈출, 그 두 가지의 탈출이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구성하거든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어떤 이는 악형을 받고, 희롱과 채찍을 받고, 톱으로 켜는 것, 시험받는 것, 칼에 죽는’ 이것은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기어이 탈출시키기 위해서 강제로 우리를 죽이는 고문 기계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스스로는 안 죽어요. 왜 죽어요?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죽기는 죽어야 되는데 우리가 죽을 이유도 없고, 죽을 마음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통해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죽이시는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죽이시는가? 강제로 톱에 켜서 죽이고, 강제로 핍박을 받게 함으로써 탈출이라는 것, 곧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믿음 있는 사람을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에 너는 말려들었어. 네가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는 거야. 따로 있는 그 중요한 일에 네가 꼼짝없이 말려들었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이걸 뭉뚱그려서 묶어서 이야기한다면 그들이 광야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두 개의 장벽을 통과합니다. 첫 번째 장벽으로 홍해를 통과하고, 두 번째 장벽으로 요단강을 통과하는 겁니다. 두 번의 탈출이 있습니다.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단 하나로 묶어져요. 아까 입시요강으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일단은 십자가에 죽게 하고 그걸로 구원은 끝났어요. 구약에서는 탈출이 두 개인데 신약에서는 단 한 번이거든요. 그러면 구약의 두 번의 탈출을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로 이미 죽었다.”
그런데 두 번째 탈출을 신약적으로 표현하게 되면 “넌 그것을 모른다. 즉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한 분으로 끝났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두 번째, 이 땅에 살면서 성령과 더불어 살게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그걸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여겼던 느긋한 마음, 그것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애굽의 마음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누구를 구원했다고?” “하나님은 나를 구원했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그래? 이제 구원받았다는 그 ‘나’를 뺄 거야. 완전히 빼 버릴 거야.” 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누구라도 예외가 없어요. 천국 가려면 누구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그 자체가 원수라는 것을 깨달아야, 그게 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예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당시 애굽의 왕이 아멘호테프 2세(Amenhotep II)로 나오는데 그 바로 왕이 히브리인이 낳는 아들은 무조건 다 죽이라고 했어요(출 1:16).
히브리인들이 다산성이 있어서 애를 잘 낳는데 남자들은 나중에 커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낳는 아들마다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그 밤에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이 낳는 아들들은 다 죽이라’라고 한 그 바로의 아들은 물론이고 애굽 나라의 모든 장자까지 다 죽였어요(출 29:12, 13).
하나님께서 ‘탈출’이라는 그 일에 대해서 인간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인이 죽는 것은 괜찮아요. 죽기 전까지는 괴롭지만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살아있으면서 자기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 죽는 것을 목격하는 고통을 바로 왕이 이스라엘에게 안겨 주었고, 이제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통해서 그걸 밝혀내는 겁니다.
‘아, 내가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이 따로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죠. 내가 죽는 것보다 더 아픈 게 있어요. 그것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식을 죽인다는 것, 바로 그걸 겪었을 때 히브리인들은 ‘거 봐, 너희들이 우리 잘못 건드렸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죽인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히브리인들을 건드린 게 아니에요. 히브리인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던 겁니다. 언약을 건드리는 게 왜 안 되느냐? 언약은 내 목숨보다 더 큰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태어나 살아가면서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게 없다고 여기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계속 애굽 사람인 거예요. 천국 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나보다 더 소중한 일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게 발견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채찍에 죽고, 옥에 갇히고, 돌에 쳐 죽임을 당하고, 톱으로 켜는 것, 또 시험을 당하고, 칼에도 죽지만 하나님이 나를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자비고 사랑인지를 알아야 해요.
워낙 내가 고집이 세니까, 내 힘으로 내가 안 되니까 강제로 나를 죽여서라도 두번째 탈출을 실시하시는 이게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이냐는 거예요. “주께서 손대서, 주께서 환경을 움직여서 죽게 하시니 비로소 내 존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이제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이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죠.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안 나와요. 그래서 교회를 안 나오는 사람보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이야기입니다. “이제 정신 차렸군요.” 이제야 정신 차렸어요. 따져 보세요.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가장 소중한 것은 나잖아요. 내가 소중하다고요. 내가 소중한 채로 50년, 60년 교회 다닌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교회 안 나온다는 말은 이제야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거예요. 어떤 정신을 차렸냐? 가장 확실한 것은, 가장 확실한 믿음의 내용은 ‘내가 여기 있다’라는 사실,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생각한다는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거죠.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이걸 안 사람이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인데 이런 말을 해요. “나는 모든 걸 의심할 수 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 마귀가 있느냐, 천국이 있느냐, 지옥이 있느냐, 전부다 의심의 대상이 되지만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것, 이것은 누가 뭐래도 뒷말이 없고 누가 들어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을 믿는다.”
정신 차린 거죠. 정신 차렸으니까 교회 나올 필요가 없죠. 왜? 교회는 모든 소리가 구라가 되기 때문에요. 가장 확실한 게 있는데 왜 또 다른 확실한 걸 찾아요.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중요하다는 게 확실한데요. 사도 바울이 이걸 몰랐을 성싶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걸 이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가려면 가세요’라는 뜻이에요. “정신 차리시고 가세요.” 내가 믿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나는 바로 나를 믿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탈락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교회 꾸준히 다녀도 안 넣어줄 거 미리 알아서 안 나오시면 됩니다.” 하는 게 사도 바울의 모토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흡연을 하는 사람이 담배를 끊겠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 특히 가족들이 “아빠 담배 끊어.” 합니다. 70가지 이상의 발암 물질이 그 안에 들어있다고 이야기하면 담배 피우는 그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는 그걸 안다는 거예요. “나는 그걸 알고 나도 끊고 싶어.” 그러면서 오늘 피우는 담배가 마지막 담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담배를 못 끊는 그 아버지의 말은, 결정할 권한이 마지막 자기한테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믿고 있어요. “이것만 피우고 더는 안 피울게.”라는 말은 ‘내가 계속 담배를 피울지 그만둘지를 정하는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왜? 나는 나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 결정권은 나한테 있다. 왜? 내가 나에게 가장 확실한 존재니까.’
이 믿음은 고린도전서 2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뜨게 했을 때 요한복음 9장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거기서 어떤 기이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경 본인이 눈을 떴잖아요. 그런데 누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느냐?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소경이 눈을 떴단 말이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6-7) 그렇게 소경을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뭐래도 이 소경만큼은 자기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예수님이라고 본인이 그렇게 믿을 거라고 생각하죠? 소경은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믿지 않았어요. 왜? 자기 눈이 감겼다가 뜨게 되었다는 거기에 치중했어요. 마음이 거기 가 있던 거예요.
성경에 비슷한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어떤 중풍 병자와 일행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병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대기 순번표가 너무 길어요. 그때 네 친구가 용기를 냈는지 그 집 지붕을 뚫었어요. 아마 수리비 많이 나왔을 겁니다. 지붕을 뚫고 그 중풍 병자를 수직으로 위에서부터 내렸어요. 그냥 새치기해서 주님 앞에 온 겁니다.
그 중풍 병자나 그의 친구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은 나의 중풍을 낫게 하기 위함이었어요. 그런데 그 현장에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라고 하는 거예요. ‘중풍 병이 들어서 나답지 않으니까 새롭게 개선된, 보다 나아진 내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 외에 다른 분을 믿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만 믿어야 가능하다.’ 이것이 죄인 줄은 상상도 못 한 겁니다.
‘교회 나와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죄가 된다’라는 생각을 한국 교회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한국 교회 목사 가운데 누가 생각했겠어요? 이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요. 요한복음 9장 36-38절에 보면, 눈을 뜬 소경 당사자 본인이 예수님을 안 믿었어요.
요한복음 9장 36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그리고 37-3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뒤늦게 와서 믿어요.
이 말은, ‘내가 장님이었다. 그런데 눈을 떴다’라는 그 사실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는 별개 문제였다는 겁니다. 그게 별개 문제였어요. 자기로부터 탈출이 어느 인간도 불가능한 거예요.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애굽적인 마음을 갖고 있던 그 지식에 불과한 거예요.
그 지식에 불과한 것은 탈출이 안 된 상태거든요. 그래서 십자가에 들어온 사람은 그다음의 조치가 뭐냐? 성령을 주게 되어 있어요. 성령을 줘버리면 내가 원하는 천국에 간다는 그 내 생각, ‘내가 이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천국 가야지.’ 하는 그 생각 자체에서 탈출이 되어야 구원이 된다는 것, 그것은 성령이 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살게 된 것을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그게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르는 이스라엘이 있었어요.
애굽에서 탈출했던 이스라엘, 그걸로 탈출이 됐다고 여겼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로부터 탈출이 돼야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모르는 이스라엘, 같은 말로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발달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신약에 오게 되면 내가 모르는 ‘나’, 내가 아닌 ‘나’가 내 안에 성령에 의해서 이미 마련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칼로 치든지, 톱으로 켜든지, 불에 집어넣든 무슨 조치를 하든지 나를 그 구원받은 ‘나’에서 떼어낼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게 성령의 역사지요. 물론 불로 지진다고 떼어내지는 것도 아니고, 톱으로 켠다고 개과천선할 수 있는 인간들이 아니에요.
그러나 성령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천국 가는 그 천국의 문을 내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 구원받은 내가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히브리서의 적절한 휘장이 찢어지는 겁니다(히 10:20).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휘장이 찢어졌어요(마 27:51).
휘장은 눈에 보이는 겁니다. 율법에 있죠.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눈에 보이는 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휘장 있다’에서 ‘휘장 없다’가 돼요. 찢어진 상태니까 휘장이 없는 거예요. 찢어지니까 거기서 천국 가는 길이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내가 저기 보인다’에서 ‘내가 없다?’ 그렇게 되어야 하죠. 지난 광주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성도는 자기를 해석하지 말고 자기를 해설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성도는 자기를 해석하거나 해설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알아서 구원하는 ‘나’는 기존의 내 기억 속의 ‘나’와는 판이한 ‘나’예요. 전혀 다른 ‘나’였습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은 오히려 천국 문을 가로막는 휘장 같은 거예요. 성령께서 날마다 그걸 찢어버립니다. 네가 너의 구원을 지금 방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구약의 예와 신약의 예를 하나씩 들겠습니다. 구약의 예는 바로 솔로몬 재판입니다. 솔로몬 재판 여러분 아시죠? 열왕기상 3장 20-21절에 보면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내 아들 돌려줘.’ 그 재판이죠. 저 옆에 있는 여자가 내 아들을 몰래 가져갔어요. 자기 아들을 체중으로 깔아서 죽여놓고 죽은 그 아들과 나의 산 아들을 바꿔치기 한 겁니다. 애는 말도 못 하니 엄마끼리 싸우는 거요. 살아 있는 아들이 자기 아들이라고.
그래서 현명하고 현명하신 솔로몬 왕에게 와서 재판을 해 달라는 거예요. 재판 결과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아이 빼앗긴 엄마 보고 “너는 네 아들도 잃어버리고, 너도 잃어버려라.” 이게 재판 결과입니다. 내 자식이라고요? 그러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친 건 뭐예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한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게 믿음이잖아요. ‘어디까지나 내 소유는 내 소유다.’ 이것은 애굽이죠.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탈출이 아니에요. ‘내 것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믿었다.’ 이것에서도 탈출해야 돼요. ‘내 것을 잃었다’가 아니라, 내 거라고 여기는 나 자신부터 잃어져야 하지요.
이건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 것’에서부터 일어나는 고민과 염려와 불안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거예요. 우리한테 있는 모든 것은 주님에게로 교체가 되어야 하지 여전히 내 것이라고 여기고 교회 와서 기도하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 것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게 이게 뭡니까?
이게 구약에 나온 예거든요. 그러면 신약의 예는 뭐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비유입니다. 두 번째 아들이 철딱서니가 하나도 없어요. 큰아들은 시건 있는데 둘째 아들은 시건이 없어요. 걔는 세상이 좋은데 그 좋은 세상에서는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유산 줄 것 있거든 미리 당겨 주세요. 나는 내 인생 살겠습니다.” 철딱서니가 하나도 없어요. 유산 받아서 아들이 어디 가느냐? 도시로 가서 흥청망청 돈을 다 썼습니다. 돈이 있을 때만 친구가 오거든요. 돈 떨어지면 친구 없습니다. 친구라는 게 돈 보고 오는 거예요.
동창회 모이는데 걸어서 왔다. 걸어서 왔고 옷은 남루하다? 아무도 그 친구 안 반겨 줍니다. 적어도 셀토스 정도는 타고 들어가야 ‘차 괜찮네. ’하고 친구로 인정해 주는 거예요. 돈 노리고 친구 만드는 거예요. 있는 돈 노리고 친구 하자는 겁니다. 돈 떨어지면 누가 친구 하자고 하겠습니까? 여자 친구고 남자 친구고 다 떨어지죠.
‘친구하고 사는 재미, 세상 재미가 이런 거구나’ 하고 세상 재미에 빠졌던 그 둘째 아들이 그게 다 돈에 기초한 기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돈을 잃고 난 뒤에 자기도 잃게 되었습니다. ‘이왕에 나는 죽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아들로서의 죽음을 인정합니다.
아들로서의 죽음을 인정한다면 뭐가 되느냐? 종이 되죠.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아들로 인정해줬지만 이스라엘이 아들 되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았습니다. 종으로 삼고 난 뒤에 나중에 신약에 오면 종을 거쳐야 비로소 뭐가 되느냐? 아들이 돼요.
아들의 가치를 아는 종, ‘나는 아들이 되어야 마땅하다.’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종이라도 넘치는 은혜입니다.’를 깨닫는 그 종의 속성, ‘주인 없이는 못 산다’라는 속성이 있을 때 주께서는 아들을 주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4-15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너희들의 자아는 율법의 종일 뿐이고 그건 무시무시한 신분 관계’라는 겁니다. 만약에 종이 종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처벌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어떤 믿음 있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돌로 침을 당하고, 톱으로 켬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고, 칼에 죽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광야를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벌이는 일에 종으로서 마땅하고 감지덕지한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히브리서 11장의 이 대목만 나오면 후딱 넘어가요. ‘난 안 봤다. 난 모른다. 난 이런 본문은 모른다. 이건 믿음 좋은 사람만 해당하지 나처럼 믿음 약한 사람한테 이런 거 적용시키지 마세요.’ 하고 후딱 넘어가요. 마치 못 볼 걸 본 것처럼. 톱으로 켰다는 그 이야기,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톱에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와요.
히브리서 11장 34절에 보면,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다니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니엘 3장에 21-23절 보면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불타는 용광로, 이 불타는 용광로라는 이런 환경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니엘 세 친구에게 준 것은, 다니엘 세 친구가 언약을 믿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 안에서 이 세상의 나중 형편을 함축해서 압축해서 다니엘 세 친구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있는 이 세상이 바로 불타는 용광로 속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지구 온난화 때문에 슬슬 불타고 있죠? 40도 이상까지도 올라갈 수 있어요. 불타는 용광로에 들어간 그 사건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 대목입니다. 22절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그다음에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용광로 불 속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한 사람은 관리, 용광로에 들어갈 죄수들이 너무 뜨거워서 도망칠까 싶어 붙드는 행정 관리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 아마 세 사람쯤이나 그 이상 될 수도 있는데, 용광로 불꽃이 그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불에 태워져 죽는 거예요. 인간의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 있어서 600도 이상 되면 다 타게 되어 있어요. 이게 과학에서 배운 우리 신체의 구조입니다. 세포는 그래요.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애굽의 상식에 의하면 저 불꽃은 생생하다는 것, 불꽃이 알아서 누굴 태우고 안 태우고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신체는 다 타게 되어 있다는 사실, 이건 보편적 지식으로 인정하는 세상이거든요. 과학적 지식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 세 친구는 불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전혀 안 탔습니다. 타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뭐냐? 뿌리가 달랐기 때문이에요. 성경은 뿌리를 위하여 성령을 통해서 이발하는 과정입니다. 잡초를 제거해요. 마태복음 13장에 종들이 와서 “가라지 뽑을까요?” 할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냥 두어라. 언젠가는 그 뿌리가 나오게 되어 있어”(마 13:29).
세상은 몽땅 전부다 잡초의 세계에요. 잡초뿐이에요. 이 잡초의 세계에서 성령을 통해서 뿌리가 나오도록 다 제거를 해나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이니까 또 말씀을 드릴게요. 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성령 안에서 한 번 들어보세요.
성령 안에서 들어보라는 제 말은 이것이 지식인지 아니면 여러분의 삶인지를 보시라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 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사람은 자기의 뿌리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잡초만 키우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자기의 재산과 건강과 가족관계, 인격과 성품, 온화함 이런 것 가지고 대인관계에 나섰습니다. “네 뿌리 까보자.” 이것은 화투판에서 제일 마지막에 하는 거거든요. “자 다 됐다. 태울 거 다 태웠으면 패를 까자.” 삼칠망통인지 이팔망통인지 하여튼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두 다 허세와 허풍뿐이에요, 이 세상은.
주님께서는 두 가지의 탈출, 신약에서는 하나로 종합된 구원, 곧 탈출. 예수님의 십자가를 주니까 사람들은 자기 것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서 얼쩡거립니다.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천국의 입학 요강은 이거예요. 천국 안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어슬렁거립니다.
‘아, 주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피 흘리셨다. 이게 십자가구나.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대. 아, 이게 부활이구나.’ 지식으로 얼쩡거리는 거예요. ‘이 좋은 지식을 내 기억 속에 담아야지.’ 그래서 구원됩니까? 그래서 구원이 돼요? 어느 인간도 십자가 지식, 부활 지식으로 구원된 위인이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와야 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우리를 분쇄기로 완전히 부숴버립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나’라는 통일성 있는 그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행동할 때 ‘나’로 행동한다고요. ‘나’로 행동하는데 정확히 말해서 ‘나’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기분 따라 행동해요.
외부의 감각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외부감각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발동시킵니다. 발동시키게 되면 ‘나’라는 것은 온데간데없이 우리는 감추어진 나 중심의 본성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뜨거운 불은 몇도 이상이면 화상 입어서 죽는다.’ 백날 해봐야 살아 있는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에요. 죽음에 대해서 아무리 무섭게 묘사해 봐야 내가 안 죽는 이상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알아서 조심 할게’ 이렇게 끝나요. 이게 지식이에요.
“불은 이 온도가 되면 뜨겁습니다.” 불에 대해서 과학 시간에 배워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불을 직접 갖다 대봐야 알아요. “앗 뜨거워라!” 뜨겁지요. 외부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던 그 세상의 불 용광로를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직접 가져다 대는 겁니다.
그러면 톱에 켜지는 순간에도 주님의 뜻에 의하면 내 지식으로 이것을 견디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톱에 켜지는 식으로 천국 길로 가도록, 구출되도록 이끄는 주님의 사랑인 것을 톱에 켜이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어느 누구도 이 말씀을 못 지킵니다. 겁나서 못 지켜요.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줬습니다. 신명기 20장 3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몇 개입니까?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네 개 아닙니까? 이게 4박자 구원이에요? 이런 말씀을 주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겁먹지 말고, 두려워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라는 말씀을 하기 전에 우리에게 겁먹을 일, 두려운 일, 떨 일, 놀랄 일을 아예 안 만들면 되잖아요,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런 일을 아예 만들지 말아서 우리에게 그런 일이 안 생기면 되잖아요.
그런 일이 안 생기면 나로부터 탈출이 안되는데요? 탈출이 안 됩니다. 구원이 안 돼요. 주께서 십자가로 구원하는 것은 자기 아들을 구원하신 거예요.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에 관한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일은 네 일이고 나는 내 일 따로 있다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 사랑이 뭐냐?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의 고독과 함께하는 그것이 사랑이에요. 외로움, 고독의 깊이를 같이 느끼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설움 당했잖아요, 핍박당했고, 죽임당했잖아요. 이것을 예수님의 홀로 체험으로 남겨둬야 하겠어요?
아니지요. 하나님 쪽에서 서비스를 해줍니다. 서비스 해줄 때 그 근거가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14-16절에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아, 하나님의 뜻 야무지지요. 우리는 애굽이든 뭐든 이 세상의 사람이고 싶어요. 우리는 살던 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저 좋은 대통령 나와서 경제만 부흥된다면 만족하고 싶어요. 우리는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불 용광로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후손, 내 자식이 살아야 할 좋은 세상’이라는 그것이 우리 지식의 한도입니다. 떠날 생각은 1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 남에게 사람 대우받고 싶어요. 그러나 주님은, 인자는 이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없었어요(눅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차이 나도 너무 차이 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아와 나의 자아가 너무 차이 나는 거예요.
구원은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광주강의에서 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말씀을 그렇게 하셨지만 사람들은, 제자들조차 그것을 안 받아들였어요.
인간들이, 내가 안 받아들이는 것을 성령께서 강제로 말씀대로 말씀을 실현시킵니다. 그 말씀이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아무도 안 지킵니다. 알지요. 지식이지요. 지식으로 안다니까요! “이걸 하려고 애를 쓰겠습니다”라는 말을 해요. 내가 담배 해로운 것도 알고 나의 이 자아가 구원에 방해된다는 것을 아는데 ‘언젠가는 내 자아를 부인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내가 담배 끊듯이 나 자신을 끊을게요.’ 백날 해봐야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믿는 것밖에는 안 돼요.
이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가 내 주인인 양 오버하고 착각하고 있어요. 내가 내 주인이 아니에요. 주께서 어떻게 하는가? 겁나고, 두려워하고, 떨고, 놀라워할 만한 일을 우리 주변에 발생시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아, 믿음으로 대처해야지’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해서 외부감각이 발동해서 그냥 ‘이것마저 사랑’이라는 것으로서 빨려 들어가는 식으로 구원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자산이 다들 한 15억은 되잖아요. 그런데 주식값이 내려가서 15억에서 14억 8천5백만 원으로 내려갔어요. 천오백만 원이 빠졌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라면 그것마저 주께서 나를 구출하기 위해서 15억을 주셨던 주님의 환경의 지속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겁니다.
기쁘지가 않으십니까? 천오백만 원보다 더 날아가야 할까요? 모든 일상속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두 번째 탈출을 주께서 기쁨과 감사로 하게 해요. 톱에 켠다는 이사야 같은 예는 아주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막상 톱에 켜는 죽음을 당할 때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여기는 사람한테는…죽을 때는 좀 아파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는 안 아파요. 왜? 죽었으니까.
죽으면 더 이상 안 아프니까 죽으면 되는데 주께서 안 죽이십니다. 산채로 율법의 무서운 저주를 본격적으로 다 받게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이에요. 이것은 우리에게 안 줘도 되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안 줘도 되는 것인데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비스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안 줘도 돼요. 어떤 재래시장에서 감자를 팔아요. 생감자 담아서 5천 원에 팝니다. 감자 5천 원어치 사는 데 옆에 함께 있던 경상도 꼬마에게 서비스라면서 찐 감자 하나 서비스로 줬습니다. 그런 애가 있어요.
서비스입니다. 안 줘도 돼요. 안 줘도 되는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서비스로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기다려봐. 톱으로 켜줄게. 또 기다려봐. 15억 재산 다 털어서 거지꼴로 만들어줄게.” 이게 하나님의 서비스에요. 입시요강에 맞도록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시장에서 고등어를 샀는데 맛이 간 고등어 사버려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얼마나 두려워했겠습니까? 옷 장사하는데 20만 원 받아야 하는데 17만 5천 원 주고 팔았어요. 얼마나 두렵고 놀랐겠습니까? ‘아, 더러워서 세상 못 살겠다. 주여, 이 가게 때려치우고 후딱 가게 하옵소서.’
이게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우리가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왜 나타나셨는가를, 여러분의 온몸을 통해서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거짓이었습니다. 내가 나에게 사기를 쳤습니다. 믿음이 없어야 하는데 있다고 우겼습니다. 이 거짓을 마귀가 우리에게 조종했고 이끌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닫게 해주시고 사나 죽으나 이제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기쁘신 말씀대로 모든 것이 성취되고 있음을 만끽하면서, 외부감각으로 느끼면서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