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구멍 뚫린 사람

아빠와 함께 2025. 8. 5. 09:05

구멍 뚫린 사람

2025년 8월 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30-31

11: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성경은 이 현실 세계가 두 가지 경우 외에 용납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믿음이 있는 경우는 여리고성에서 탈출이 가능하고 믿음이 없는 경우는 ‘여리고성과 더불어 망한다’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삶을 위하여 세계를 재편하거나 재해석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일단 나를 살리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인간들이 자생적으로 혹은 자체적으로 자기가 살 궁리를 위해서 요리조리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멸망은 인간들이 사전이 미리 요청한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온갖 완벽한 조치를 끌고 옵니다. 이것은 ‘자기 파괴’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생 라합은 ‘현실’에 대해서 제대로 된 안목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여리고성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활동에 의해 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10-11)

즉 기생 라합은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자신에게는 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의 요소가 없음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생존 생각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벌받은 가인은 자기 생존 연명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안 맞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존이 지장이 없기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는 자는 결코 인간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말들을 모아서 현실을 꾸려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생각을 파괴하는 식으로 현실을 꾸려나가십니다. 현실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들이 시도하는 현실 구상은, ‘자기 목숨 연명책’입니다. 즉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사회체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말씀의 세계의 일관성을 적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정신이요 이 유월절 정신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나왔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기도로서 주고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로라성 멸망을 앞두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사정합니다. “의인 50명이 있어도 멸망을 굳히 감행하셔야겠습니까”고 따지듯이 기도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멸망되어야 될 세상은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유월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히브리인들 중에 단 사람의 의인이 있다면 그 사람의 피와 살을 분배해서 천사의 공격을 모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부적으로 개입시킨 것은 바로 ‘어린 양의 피요 살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안목에서 봐서 참으로 분명한 현실은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죽음은 인간에게 죄가 lock이 걸려서 그러합니다. 이 죄가 있는한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죄란 ‘자기 완전함’입니다. 스스로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로 인하여 내가 지켜지고 사수되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내부에 하자가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겁니다. 기생 라합에서 있어 ‘기생’이라는 직업적 표현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다닙니다.

‘기생’이란 ‘창기’를 말합니다. 참으로 남들에게 내세울 게 없음을 말해줍니다. 자기 것으로 남을 까보고 멸시하고 경멸할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반면에 이 ‘기생’이라는 직업과 반대가 되는 직업은 스스로 자기 생존에 유리한 부유함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영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내기 위한 완전한 조건을 스스로 장만했다고 자부했습니다. 즉 ‘스스로 온전함’을 추구한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아무 것도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심’도 생기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말합니다. “너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생 라합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스라엘 정탐꾼을 살려냅니다. 그는 정복자 이스라엘과 한패가 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기능이 기생 라합의 마음을 덮친 겁니다. 기생 라합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외에는 말입니다.

인간의 정신 내부에 구멍이 나와 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구멍이어야 합니다.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습니다.(마 19:24) 인간은 죽어도 천국 못들이가고 살아도 천국 못들어갑니다. 자신 속에 천국 삶에 안 맞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을 경멸하게 보게 만드는 자기 잘남입니다. 이것이 죄요 이 죄가 파괴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파괴시킬까요? 그것은 ‘죄 사함’입니다. 나를 천국에 못가게 만드는 그 죄는 외부에게 손대는 경우에만 해결됩니다. 그 외부가 바로 어린양이요 오늘 본문에서는 기생 라합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영적 전쟁에서 아무 이유는 극히 소수자로 뽑힌 인간 병기입니다. 마치 22,000명이 모집된 기드온 군사 중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제일 작은 수, 300명의 군사들처럼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어떻게 승리할 것이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겁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만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성도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자신을 지켜 나가려고 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78강-히브리서 11장 30-31절(구멍 뚫린 사람)25072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30-31절입니다.

히브리서 11:30-31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이 등장하고 여기에 ‘멸망’이라는 단어도 등장합니다. 멸망될 자가 누구냐? 여리고 성에 갇혀서 못 나오고 있는 자들이 ‘멸망’이라고 할 수 있고, 여리고 성에서 살았지만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은 멸망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사는 게 이렇게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까? 다른 길은 왜 없는 걸까요? ‘사느냐 죽느냐?’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왜 없는가? 이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만든 기대에 맞춰서 한 200년 살다가 그다음에 한 100년은 죽은 채로 쉬다가 다시 100년 더 살고, 얼마든지 현실을 우리 입맛대로 만들 수가 있는데 이 현실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현실에 입각해서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 그 두 갈래 외에는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 성에서 멸망했는데 기생 라합과 그 가족만 멸망의 도성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기생 라합의 특징이 사람의 말을 듣질 않았어요. 기생 라합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 여호수아 2장에 보면 나옵니다만, 사람의 말은 현실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되어서 같은 사람의 말을 들어야지 무슨 다른 말을 들을 게 뭐가 있느냐? 기생 라합은 다른 말을 들었는데 그게 ‘하나님의 기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해오신 일관된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축적된 기억의 일관성이 자기가 살고 있는 여리고 성에도 덮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어요

기생 라합은 이것을 뭐로 봤느냐? 이것을 말씀의 세계로 본 거예요, 말씀의 세계. 그리고 라합 자기가 대대로 살았던 자기 종족의 여리고 성의 환경은 인위적인 세계, 인간이 살기 위해 만든 조성된 세계 그렇게 기생 라합은 구분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하나님께 벌을 받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벌 받는 대목이 요즘 사람한테는 납득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부터 너를 이곳에서 쫓아낸다.”(창 4:12) ‘이곳’은 뭐냐 하면 가인이 어릴 때부터 살았던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쫓아낸다는 것, 그래서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즉 ‘네가 땅에서 피하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될 것이다.’ 그것으로 가인은 이해했습니다.

가인이 말하기를 “그것은 너무 중한 벌입니다.”하고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4) 그러니까 가인의 사고방식 전체가 ‘어떻게 하면 내 목숨을 내가 지킬 수 있느냐?’에 일평생을 거기에 몰입하고 집착을 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내가 꾸려갈 수 있는가?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모든 사고방식은 ‘내 인생은 내가 지키기. 어쨌든 간에 내 인생은 내가 살아 남기기’, 모든 열정을 거기에 쏟아부었던 겁니다. 누가요? 가인이요. 가인이 누군데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는 자기 힘으로 내가 살 궁리를 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24시간을 다 쏟아부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사느냐는 겁니다.

가인의 세계가 번창했어요. 하나님께서 번창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의 거주민들, 모든 사람들이 그 여리고 성을 이중의 성벽으로 굳건하게 만든 이유가 이런 식으로 해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거예요.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자기의 목숨 연명책이에요, 자기의 목숨 연명책.

이 목숨 연명책을 좀 과도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뒤 호주머니에 권총 하나씩 찬 채로 살고 있다.’ 그래서 누굴 만나도 내 목숨이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지 권총 빼 가지고 그냥 쏴 죽일 수 있는 거예요. 바로 그 세계가 어떤 세계냐? 인위적인 세계, 인공적인 세계, 인간들이 합세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연명하겠다는 일치된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삶, 이게 인위적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인위적인 세계에 어떤 소식이 들려왔는지 여호수아 2장 10절에 나오는 기생 라합의 말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만나서 하는 말이 9-10절에 보면,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이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출애굽과 그 이후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출애굽, 탈출했다. 애굽에서 탈출한 민족이 없었는데 강력한 인위적 세계에서 탈출한 민족이 이스라엘이고, 탈출한 그 내력을 보게 되면 그들 가운데 여호와라는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탈출을 성사시켰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현실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이질적인 요소가 여기 개입된 겁니다. 인간의 모든 환경과 현실은 내 목숨을 내가 연명할 수 있는 방어책으로서 인간들이 구성한 거예요. 거기엔 인간들의 기억들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이렇게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상의 지혜대로 살아남았다’가 늘 충만하고 그것을 교육했던 그 동네에 전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나와서 인간들의 도성과 왕들을 차례차례로 죽여 나가고 멸절시키는 그 작업이 드디어 이 여리고 성까지 덮치게 되었다. 그래서 여리고성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해지면서 어떻게든 자신들을 지켜내기 위해 지금 동분서주 애쓰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기생 라합은 같은 주민이니까 생각을 합치해서 그 여리고 성을 자체적으로 방어하고 향토예비군 정신으로 지켜내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믿음으로”라는 말을 해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믿음으로 졸지에 기생 라합은 정탐군과 한패가 되고 말았어요. 변절자입니다, 배신자예요. 스파이를 숨겨줬습니다. 지금껏 이 성경을 수십 년 보면서 여태껏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게 그동안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기생 라합을 왜 구원하셨는가?’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기생 라합을 왜 구원하시는가?

기생 라합이 어떻게 구원됐느냐는 질문이 아니고 ‘왜 하나님은 기생 라합을 구원하시는가?’ 제가 알게 된 사항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기생 라합을 구원함으로써 기생 라합을 통해 이스라엘이 몰랐던 자신의 본질을 새삼스럽게 드러내기 위해서 기생 라합을 이스라엘에 합류시킨 겁니다. 이스라엘의 본질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있는 게 아니고 기생 라합이라는, 정복되어야 할 그 도성 안쪽에 있는 낯선, 하나밖에 없는 그 여인의 마음이 이스라엘 본인이 몰랐던 마음의 핵심과 같이 만나서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몰랐던, 그 이스라엘이 누구냐를 설명해 줄 자를 이스라엘 바깥 외부에서 들어오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기 위해 기생 라합을 구원하신 거예요. 기생 라합의 이러한 기능에 대해서 제가 확신을 갖는 이유는 마태복음 1장에서 기생 라합이 구원받은 족보 리스트에 합류하게 된다는 데 있어요.

마태복음 1장 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도 이방 여인이거든요. “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쭉 되어 있죠. 5절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그다음에 6절에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야의 아내도 외부 사람이에요. 소위 ‘우리는 구원 받은 본 백성’이라고 우기는 여기에 외부 사람이 개입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본 자손이라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구원받는다’라고 생각한다면 “당신 속에 당신의 뭐가 빠졌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해야 돼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여리고 성 사람 거주민을 이야기해 봅시다. 여리고 성 사람은 대대로 조상의 터전 자기 살던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온전함과 온전함, 완전함과 완벽함을 계속해서 구축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이라는 존재는 뭐냐? 그 여리고 사람의 온전함 외에 하나의 티끌 역할을 해서 기생 라합이 빠져나옴으로써 여리고 성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자신의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체포했다면 그다음 어떤 다른 추가적인 조치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데 있어서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기생 라합이 무사히 빠져나옴으로써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우리 쪽으로 넘겨주신 도성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이제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잠식되도록 확정되어 있다.’ 왜? 빼낼 사람을 미리 빼냈기 때문에요.

기생 라합의 존재는요, 여리고 성 사람으로 하여금 ‘너희에겐 일절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나 용서를 받을 대상자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이 점에서 이스라엘이 몰랐던 자신의 본질을 여리고 성에 있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과 합류하는 그 과정을 통해 다시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때 그 원칙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만나서 언약을 맺을 때의 계약 정신이 그대로 지속되는 결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인 히브리인을 애굽에서 건져냈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 창세기 18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유월절 어린 양과 관련성이 있어요.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기도하는데 그 기도 내용이 쭉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24절부터 32절까지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연이어 기도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자기 조카가 미리 가 있거든요? 하나님의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하늘에 상달해서 멸한다고 하니까 다급해진 것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자기 조카를 살려야하기 때문에. 자기 조카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이고 자기 친척이니까 아브라함 언약의 혜택을 입어야 될 대상인데 그냥 망해버리면 아브라함 언약의 혜택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이 있어도 굳이 멸망시켜야겠습니까? 50인이 같이 날아가는데요?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런 뜻으로 아브라함이 기도해요. 하나님께서는 “의인 50명 없다.” “그러면 45명은요?” “45명도 없다.” “그러면 40명은요?” “40명도 없다.”

계속 하나님께서 ‘없다’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멸망 대상이 아닌 자를 멸망하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거예요. 멸망할 때는 전부다 멸망 대상으로 확정됐기 때문에 멸망시킨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인데 그 외의 사람들은 자기를 멸망 대상으로 보질 않는 겁니다. 왜냐? 모조리 다 가인의 속성으로 살기 때문에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내가 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멸망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둘로 달리 사용할 때 나타납니다. 마르다 마리아 가정에서 전갈을 받은 어떤 사람이 허겁지겁 예수께로 달려와 하는 말이 “예수님이여,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요 11:3) 전령이 전갈을 줬어요.

그때의 개념, 사용한 용어 ‘죽음’이라는 단어는,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가 살기 위해 자기 목숨의 연명책으로 구성한 이 인공적인 현실 세계, 환경 속에서의 죽음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죽으면 절대적으로 비극이고 슬픕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에요.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즉 “나사로는 죽지 않는다. 나사로는 죽을병이 아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진짜 죽었어요. 주님은 움직일 생각을 안 해요. 죽음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이 죽은 자를 깨우는 상황을 전제로 한 죽음은 인간들이 자기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축한 이 현실 세계에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자기 성도가 죽는 것은 주님이 죽은 자도 깨우는 분이라는 것을 그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는 기능을 발휘할 뿐이에요.

따라서 죽는 기능을 주님한테 보여야 될 자는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것이 자기의 목숨을 연명하는 연명 방책으로 거기에 24시간 매진할 수가 없어요. 성도는 말씀의 세계, 말씀의 환경에다가 관심을 둬야지 그 불신자처럼 ‘어떻게 하면 이 현실이 나를 밥 먹여 살릴 것인가?’ 거기에 24시간 목맬 수가 없단 말이죠. 말씀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주님은 말씀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나는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떤 기능을 보여주는지 거기에 관심을 줘야죠.

“깨우러 가노라.” 주님께서 갔습니다. 나사로 죽었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벌써 장례를 치른 지 나흘이 지났어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주님 앞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연명하고자 예수까지 믿고자 했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와 그 유족들 모조리 다 예수님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주님 생각은 이거에요. “지금 예수님이 하는 일을 이해 못 하고도 네가 천국엘 간다고? 천국이 그렇게 만만하냐? 천국이 그렇게 네 생각대로 갈 수 있는 동네냐?” 안 돼요. 주님의 기능이 우리의 본질을 새삼스럽게 재편해줘야 돼요.

마르다, 마리아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죠. “다 치우고 무덤에 가자.” 거기서 직접 주님은 나흘 만에 “돌문 제껴라.”(요 11:39) 제끼고, “나사로야.”(요 11:43) 죽은 사람보고 이야기해요. “나사로야. 나와!” 드디어 “빠바바~ TV는 사랑을 싣고” 거기 나오는 시그널 있죠? 드디어 “반갑다. 나사로!” 예수님의 “나오너라!” 한 그 명령에 의해서 이제 나옵니다.

그럴 때 주께서 마르다에게 미리 이야기한 게 있어요.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가 태어나서 몸 바쳐 살았던 그 환경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환경이 이토록 다른 겁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공적인 도성에서 그걸 현실로 여기는 여리고 성 거주민들의 환경과 기생 라합의 삶의 환경이 달랐습니다.

달랐는데 기생 라합의 생각은요,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까지 완전히 달라지게 만드는 요소로 섞이게 되는 겁니다. 저는 이 기생 라합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은 그냥 이름이 라합인데 왜 기생 라합은 말할 때 꼭 ‘기생’이라는 말이 굳이 붙느냐는 거죠.

야고보서 2장에 보면, 히브리서 바로 뒤에 있어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24-26절에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행함을 ‘기능’이라고 봅시다. 주님이 주신 기능 없는 믿음은 말짱 껍데기, 하늘나라 가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는 말라빠진 껍데기 같은 믿음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들의 환경은 나를 살게 하기 위한 환경이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위한 환경을 아예 묻지도 않아요.

요한계시록 7장 13-14절에 보면 하나님이 “너 누구야?”라고 묻는 게 아니고 “너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 이렇게 물어요.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들어왔잖아요.” 이렇게 답을 다는 거예요. “저 이런 사람입니다.”가 아니라 어떤 기능인데 그 기능이 뭐냐? “어린 양의 피로 씻음 받아서 제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기생이라는 기능이 의미 있게 라합을 덮치고 감추게 되는 거예요. 상세히 이야기해 봅시다. 아까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다시 가봅시다. 단 한 명도 없어요. 단 한 명도 없고 단 한 명도 없는 곳에 하나님의 미사일 핵폭탄이 떨어집니다. 한 명도 없었는데 한 명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곧 삼촌을 생각해서 조카 롯의 가정을 빼돌리고 난 뒤에 완전히 폭파를 했다, 이 말이죠.

안 가려고 하는 걸 천사가 강제로 잡아당겼어요. 같이 멸망 당할 대상이 아니라고 “아브라함 언약의 백이 있잖아. 너희 삼촌 백이 있는데 너희가 여기 밍기적거릴 게 아니다.” 하고 빨리 빠져나오는 거예요. 넌 이 환경에 있을 자가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는 거예요. 그것이 유월절 사건으로 구체화 됐는데 만약에 히브리인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의인이 있으면 지금 천사가 와서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를 다 죽일 때 후딱 한 사람의 의인이 자기 피와 자기 살점을 쪼개 나눠줘서 “나는 의인이니까, 이 의의 피와 살을 너희가 나눠 갖고 먹으면 오늘 밤 죽음의 천사가 올 때 나의 피 나의 살로 그냥 넘어간다.” 이게 성립이 돼요.

그런데 구원받는 히브리인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의인도 없습니다. 어린 양이 추가적으로 외부적으로 들어가야 돼요.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좀 견뎌내셔야 돼요. 제가 어려운 말을 할 겁니다. 수학 이야기할 거예요. 미리 이야기했습니다. 윌리엄 서스턴(William Paul Thurston, 1946-2012)이라는 수학자가 뭘 발견했느냐?

2차원은 3차원을 알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2차원은 3차원을 알 수 없고, 3차원은 4차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단 말이죠. 사람들은 전부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우주 밖에 나가봐야 어떤 공간으로 어떤 형태로 왔는지 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주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우주 안에 있는 우리한테는 영원한 숙제가 돼요. 왜? 우리는 이 환경에서 탈출할 수 없기 때문에,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지구를 벗어나도 목성이 기다리고, 목성을 벗어나도 은하계 나와요. 은하계 벗어나도 안드로메다가 기다리고 있고요.

인간이 우주를 아무리 관찰하려 해도 우주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팽창 중이기 때문에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빛을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시간보다 앞서서 시간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까를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타임머신이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미리 알면 되지 않느냐? 인간은 빛의 속도보다 늦기 때문에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물리학적으로.

그래서 이 문제가 풀리질 않는 거예요.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풀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걸 푼 사람이 있어요. 윌리엄 서스턴“우주 바깥의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우주 바깥에 나가야 안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 3차원 안에서 4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라는 거예요.

어떻게 발견하느냐? 3차원 안에 서로 영원히 만나지 못 하는 두 개의 모양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공 모양이 있고 하나는 도넛처럼 구멍 난 모양 그 두 개밖에 없다는 겁니다. 공 모양이라는 것은 위상 공간이라고 하는데 모든 것을 찌그러트리면 공처럼 돼요. 잡아당기면 공이에요. 멍게처럼 울퉁불퉁해도 어떻게든 동그랗게 돼요.

그것과 도저히 일치될 수 없는 것이 안에 구멍이 있는 도넛은 이리 잡아당기고 저리 잡아 당겨도 동그란 축구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느냐? 공은 공으로 돌아오지만 도넛은 그 안의 구멍 때문에 온전하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없는 현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4차원이라고 할 때 안에 구멍 난 것처럼 3차원에서는 느껴진다는 거예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4차원 세계고 3차원은 온전히 설명이 되는데 4차원에서 보게 되면 설명이 미흡하다는 겁니다.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가 온전하기 위해 애를 썼어요. 4차원이 아닌 3차원이에요. 온전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뭘 모르느냐? 내 방식으로 나를 온전하게 하는 게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자기에게 난 구멍을 몰랐어요. 자기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했어요.

여러분, 화장실에 가서 볼일 볼 때 화장실 문 안 닫은 기분 아시죠? 뭔가 열심히 했는데 찝찝한 거, 라면 끓일 때 뚜껑 안 닫은 채로 끓이다가 물 다 증발되는 거, 뭔가 완전하게 딱 닫아서 마무리 짓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절대로 마무리 지을 수 없는 빈터가 있다는 겁니다.

그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에서 ‘구멍’이라고 했어요. “바늘구멍,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갈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어떻게 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구멍이 막혀있다.” 그 구멍이 막혀있다. 인간이 아는 유일한 3차원의 현실은 뭐냐? 내가 죽는다는 거예요. 죽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럼 산 자는? 산 자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사나 죽으나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신비 체험? 신비 체험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왜? 인간에게는 스스로 마지막 온전할 수 있는 문을 스스로 닫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외부에서 추가되는 그것이 온전해야 된다는 그것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줘야 돼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유일한 민족이 되는 것은 바로 어린 양이라는 제3의 요소가 자신들의 온전함에 구멍을 내기 때문에 그래요. 구멍을 뚫어준 거예요.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노력으로 마저 메꿀 수 없는 영역이 들어 있을 때 이스라엘은 3차원 세계 속에 사는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어떤 민족도 파악될 수 없는 구멍 난 민족이에요.

방시혁이 작곡한 노래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총 맞은 것처럼> 지금은 좀 주가 조작 때문에 말썽이 많습니다만 총 맞은 것처럼 사랑이 구멍을 뚫어준다는 거예요. 그 예가 이번 수련회 9강에 나옵니다. 여러분, 수련회 9강까지 다 들으셨죠?

들었다 치고 9강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9강은 사랑으로 끝나요. 그 사랑이 뭐냐? 11절에 보면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멸시하지 마라. 디모데가 너에게 가거든 멸시하지 말라, 멸시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왜 기생 라합에서 ‘기생’이라는 직업을 떨어뜨리지 않느냐? 기생은 창녀에요. 왜 라합에게서 창녀라는 것을 떼내 주지 않느냐? 떼어내 주는 것은 마태복음 1장 5절 밖에는 없어요. 나머지는 다 ‘창녀’ 라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창녀 가정에 정탐군이 들어갔느냐는 거예요.

여호수아 2장 1절에 “기생 라합의 집에 정탐군이 들어가므로” 그 정탐군이 소년들이었어요. 소년들이 들어갔단 말이죠. 이 기생이라는 직업, 창녀라는 직업은 멸시의 대상입니다, 경멸의 대상이에요. 사람이 누가 누구를 경멸한다는 것은 ‘내가 너보다는 온전에 가깝다’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경멸할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더 먼저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31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1장 31절의 말씀에서 창녀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서스턴이라는 그 수학자가 이런 표현을 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은 둘밖에 없는데 하나는 구멍 뚫린 것과 하나는 뚫리지 않은 것밖에 없다. 구멍이 안 뚫린 것은 똑같은 도형이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을 사용한다”라고요. 동일한 이름, 차원, 위상적으로 그게 가능한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천국에 못 들어가요. 천국에 못 들어가는 이름이 바로 인간입니다. 아담이에요. 천국에 못 들어가는 같은 주제에 누가 누구를 경멸해요? 누가 누구를 멸시할 수 있습니까? 이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데 그중에 천국 가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 구멍이 뚫려야 되죠. 자신의 온전함이 애당초 작살이 난 사람, 파괴된 사람, 사람들로부터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사람, 지금껏 이 환경은 나로 온전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님을 미리 앞당겨서 그걸 파악한 사람, 진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여리고 성을 파괴하러 오시는 것을 기꺼이 하나님이 하나님다움에 당연하고 마땅한 조치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 스스로 자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구멍 뚫린 사람이에요.

자신의 온전함을 포기하기 때문에, 내가 흔히 말하는 사람다운 사람을 포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 뒤에는 권총이 없습니다. 왜? 자기를 지킬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지킬 이유가 없어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자기하고 남하고 비교하면서 자기의 온전함을 구축해요. 그게 기호로 남아요.

유치원 졸업반에 있는 어떤 아동이 중학생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형아는 나눗셈을 할 줄 알아?” 가까운 사람 이야기에요. “나 할 줄 아는 데 형아도 할 줄 알아?” 나눗셈이 냄비뚜껑입니까? 그게 온전함입니까? 회사에서 승진하면 온전해진 거예요? 갑자기 보너스 나오면 온전해진 겁니까? 사업이 번창하면 온전한 겁니까?

점점 더 세리와 창기와 멀어지는데요? 자기가 구멍 났다는 사실 구멍이 나 있다는 사실과 점점 멀어지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경멸하고 멸시하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내가 누구냐’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에게 덮쳐져 있는 기능, 외부에서 나를 구멍 낸 그 기능에 관심 있습니다.

“너 어떻게 왔어?” 어린 양이라는 외부 요소 “어린 양이 와서 그 피로 말미암아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제가 노력해서 온 게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자꾸 외부에서 끌어당겨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온전하고 싶은데 그 온전함을 박살 낸 그 기능.

그 부자 청년은 헛살았습니다. 부자인데 헛살았어요. 주님이 자신의 바늘구멍을 뚫어준다는 사실을 모르고 근심하면서 돌아갔어요. ‘모든 것을 팔고 거지가 되어서 나를 따라라’(마 19:21). 부자 청년은 거부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 새삼스럽게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유일한 현실은 우리가 죽는 겁니다. 맞지요? 어떻게 살아도 나이가 몇 살이어도 관계없어요. 유일한 현실은 죽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세계이기에 탈출은 불가합니다. 탈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외부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죄가 락(lock)을 걸어서 너는 탈출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여기서 탈출해서 천국 갑니까?” 주님의 방법은 그 락(lock)이 걸린 죄를 용서해 주면 되지요. 용서해 주면 되는 거예요. 그 죄가 뭐냐? 초반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내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방책을 내 주변에 쌓고, 쌓고, 또 쌓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용서에 관해서 나오는 말씀 세계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점점 더 ‘바이바이’해요. 말씀을 안 듣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기에, 그게 급선무기 때문에. 자식보고 말씀 들으라고, 복음 들으라고 안 합니다. “너도 밥 먹고 살아야지.” 자식한테 그 말밖에 못 해요. “자식아! 너는 나눗셈할 줄 아느냐?” 명절에 가면 “너는 주식투자 할 줄 알아?” 또는 “너는 아파트 대출받는 방법 알아?” 나누는 모든 대화가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는, ‘너도 이제 너보다 못한 자를 경멸할 수 있는 그런 권세를 누려야지. 그러면 인생 성공이야. 누구를 내려다보면서 살아야 그게 남자다운 삶이야.’ 하는 식으로 자녀교육을 해왔잖아요.

사회 모두가요 자기 위세를 떠는 사회에요. 편의점 알바 먼저 왔다는 무시하고요. 그 지옥에서 이제 벗어났다고 합니다만. 왜 이런 이야기 안 합니까? “당신은 죄용서 받아본 적 있습니까? 당신은 사는 게 이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합니까? 죄용서 받는 자가 가는 데가 천국인데 당신은 아직도 여리고 성에 갇혀 살고, 그 여리고 성을 지키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어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의 그 기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기억을 전제로 해서 계속 일을 돌리고, 그 일이 확대되고 있는가, 그걸 곧이들었어요. 기생 라합이 발견한 것은 이겁니다. ‘환경이 전부다. 환경이 운명이다. 환경이 결정이다.’

그러니 기생 라합이 같은 종족인 여리고 성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들의 말은 현실구성에 추가되는 요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현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끌려가고 있지 인간이 많이 모인다고 그게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생 라합은 인간한테 까이기 전에 주님한테 까이기 싫어서 주님의 유월절 이후에 주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인 거예요. 그대로 맞이한 겁니다. 구멍이 뚫리지 않은 것은 자기 개성 발휘를 아무리 해도 구멍이 없다는 그것 때문에 똑같이 그들은 죽는다는 현실에 충돌되어서 그것으로 그들 인생은 끝납니다.

그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식하지요. 그래서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무식한 거예요. 자기 고민을 말을 못 해요. 주님의 용서가 나의 본질에 뻥, 하고 구멍을 뚫어놨다는 거예요. 그걸 모르는 거예요. ‘내가 잘났는데 이제는 주님의 용서까지 받아놨으니 나는 완벽에 완벽을 기했다.’

완벽을 기한다는 그 자체가 나는 용서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에요. 성도의 모든 직업은 이미 창녀로 굳어졌습니다. 창녀입니다, 그냥! 그 당시에 돈 밝히는 것을 세리라고 했거든요. 주님께서 세리와 창녀라는 두 직업군을 가지고 하늘나라 들어가는 대표직업군으로 삼았던 이유가 더 이상 자기가 자랑처럼 내세울 어떤 다른 직업도 없는 막다른 직업이기 때문에 그래요.

“뭣이 중헌디!” <곡성>(2016)이라는 영화에 나온 대사지요. “뭣이 중헌디!”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를 기생 라합은 알았습니다. 기생 라합이 안 것은 뭐냐? ‘파괴 없이는 새로운 환경은 맞이할 수 없다.’ 곧 ‘내 가운데 있는 것이 파괴되지 않고서는 말씀의 자리를 맞이할 수 없다.’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 여름수련회 때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했잖아요. “말씀 들어봐야 다 콩고물”이라고요. 들어봐야 듣는 순간 툴툴 털어버리면 다 흘러내려요. 자력으로 살기, 바르게 살기 그게 바로 저주의 모습이지요. 아하, 내 삶이 여리고 성안에 갇혀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 그 모습이 뭐냐?

나름대로 온전함을 위해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내 힘으로 이만큼 우리 가정 일궜다는 그것을 으스대면서 내세울 것이 그것밖에는 없는, 자기의 생명 연장책만 내세우면서 열심히 살았다는 것, 그것 인생 헛되이 산 겁니다. 인생 아무짝도 소용없이 산 거예요.

심지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보면 이 세상에 하늘까지 구멍을 내버립니다. 여호수아 10장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12-13절에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자신이 노력과 열성과 지혜를 총동원하면 해와 달이 감동해서 멈춥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애쓰고 노력하고 자식 키우고 한 것은 기존의 여리고 성 사람들이 자기 거주지를 악착같이 사수하는 부질없는 부자 같은 행위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끝으로, 자, 탈출해야 하겠습니다. 설교 그냥 이렇게 끝내면 안 되잖아요. 뭔가 탈출하는 방법을 제시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처럼 전쟁합니다. 영적 전쟁을 하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사랑 빼놓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말라’라는 거예요.

지금 벌여놓은 사업이든 뭐든 간에 그런 것은 기억할 대상이 안 돼요. 기억할 가치도 없어요. 오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말라. 그래서 이번 수련회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밖에 난 몰라> 그 노래 이야기했잖아요. 사랑밖에 난 몰라. 하도 수련회 참석을 잘 안 하니까 되풀이해야 해요.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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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나는 반딧불>(황가람, 2024) 그 노래 이야기도 했지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반딧불, 그게 현실이잖아요.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시체보관소로 가서 우리가 아예 없어집니다. 있었는데 그래서 90까지 살았는데 없어졌어요. 반딧불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왜 삽니까? 아무것도 아닌걸. 살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살아요?

영적 전쟁에서 마귀가 말씀을 못 듣게 하려고 해요, 말씀을! 말씀을 못 듣게 하기 위해서 자꾸 번잡스런 일이 발생되게 하는 거예요. 말씀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이번에 책 나오는데 머리말 끝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예수님 보고 하는 말이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말을 마귀가 해요. “예수여! 그만 폼잡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십자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려와”

어린양이 살이 찢기고 피가 나오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래요, 인간세계에서는! 그게 돈보다 덜 귀하다는 거예요. 전쟁입니다. 주께서 전쟁을 벌이게 되면 그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구멍이 내 본질에서 단지 뚫리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병기가 돼요. 요게 포인트입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되느냐 하는 것은, 이번 수련회 때 ‘개인 구원’은 없다고 했지요. ‘집단 구원’밖에 없어요. ‘나’라는 것은 없어요. 내 이름은 아예 하나님이 몰라요. 네가 어떻게 천국에 왔느냐가 중요하지 “저 이런 사람인데요” 해도 소용없어요. “네 속에 어떤 기능을 끌고 왔느냐? 어떤 기능이 계속 담기느냐? 너 구멍 뚫렸어, 안 뚫렸어?” 그것만 묻는 거예요.

사사기 7장에 전쟁이 나옵니다. 5-8절에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각각 그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명은 머물러 두니라.”

그래서 그 3백 명이 전쟁했다는 그 이야기지요. 이 3백 명과 나머지 사람들, 2만 2천 명 가운데 3백 명이 남은 거지요. 처음에는 2만 2천에서 먼저 1만 2천 명이 돌아가고 1만 명이 남은 중에서 다시 3백 명이 남겨지지요. 그러면 2만 천칠백 명과 300명의 차이점은 뭐냐?

그 어느 누구도 바늘구멍처럼 처음에 2만 2천 명이 왔는데 설마 고작 3백 명으로 13만 5천 명의 적과 전쟁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심지어 3백 명 본인들도 꿈에도 생각 못 한 거예요. 심지어 기드온도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성도 본인도 꿈에도 생각 못 한, 그래서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온전할 수 있는 어떤 작업도 거기서 멈춰야 할 생각지도 못한 그 요소, 그게 죄용서고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인간 보고 ‘죄용서’라고 하면 인간은 이렇게 합니다. “치우세요! 내 죄용서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갈 것이니 쓸데없이 죄용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네 힘으로 죄용서 받고, 네 힘으로 노력하고, 네 힘으로 천당 가고, 그러니까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의 일군, 하나님의 병기, 무기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생각지도 못한 그것으로 인해서 일체 나에 대해서 생각 안 해버리고 십자가만 생각하고 어린양의 피만 생각하는 주님의 병기가 되셔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을 생각했고, 이것저것 추스를 필요도 없는 것에 관심 뒀습니다. 정작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기능으로 사용하느냐, 그것만 생각하고 그 생각으로 모든 근심 걱정을 덮을 수 있는 그런 현실 속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께서 도우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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