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홍해

아빠와 함께 2025. 7. 30. 09:57

홍해 

2025년 7월 2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29

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제시한 믿음과 합치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일단 인간은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자연적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믿음으로 무장되게 됩니다. 인간은 안정감을 원합니다. 요란한 세상 변화에도 자기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홍해’, 혹은 ‘십자가’라는 용어가 나오더라도 쉽게 잊어버리면 자기가 만든 삶에 몰입하고 그것을 충실히 지키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자기에게 함몰되는 삶이 되는데 있어서 마음 아래가 강하게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에서 인간은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한결같이, “나만 챙기만 돼”에 전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존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존재와 나라는 존재의 이질성을 띠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인간에게 물으십니다. “너 나에게 감사하고 있어?” 인간으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충실한 존재이니 오로지 자신에게만 감사하고 있을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은 자기 외에 다른 이에게 감사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봉사하고 되어 있고 희생하게 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세계에 합류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더나아가서 분과 한 몸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자아가 점차 이별하게 됩니다. 자신의 계획, 자신의 목표, 자신의 기대와 예상과도 멀어지게 됩니다.

홍해 사건을 준비하신 쪽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쪽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요구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예상하는 경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사는데 집중하기에 살기 위한 경로를 예상합니다. 그런데 홍해는 바로 그 인간들의 기대를 좌절시킵니다.

‘거기로 가면 길이 없어요. 우리 다 죽어요’라는 바로 그 길이 홍해 바다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로 이스라엘을 통과시키므로서 하나님깨서 받아줄 수 있는 일단의 무리의 성격을 일방적으로 지정해주십니다. ‘홍해의 의미를 믿으라’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홍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산 사람들은 결코 그 ‘살아 있다는 의식’으로 인해 도저히 들어설 수 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단순히 죄를 지는 자가 아니라 죄 뿐인 존재입니다. 저주 이외에 다른 대우는 성립될 수 없는 자가 바로 인간이 본질입니다. 이런 사실이 곧 하나님의 인식입니다.

과연 이 하나님의 인식에 부합되는 인식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라는 장벽을 통해 친히 생산하시려는 겁니다. 애굽 군대의 인식은 이러합니다. “저들 히브리인들이 홍해 바다를 걸어서 갔으니 자신들도 똑같은 인간으로서 통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홍해를 건너갈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을 망하게 한 겁니다.

마치 교회에 와서 남들이 천국갈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천국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자신들으로 지옥가게 하는 망할 의식인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홍해 바다에 선 이스라엘들은 이런 희망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모세를 대하여 항의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항의했고 모세에게 항의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니고 있었던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한시도 살아 있는 자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생각이 나와 본 적이 없습니다. 온통 자신은 마땅히 살아야 합당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홍해가 맞이하는 시간과 공간은 이 세상과는 철저히 절단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이 홍해 안의 세계는 미래가 마중 나오는 세계며 ‘어제가 없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그 홍해 안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이 여호와께서는 철저하게 유월절 정신을 실행에 옮기시는 분이십니다. ‘유월절 정신’이란 인간의 무기력과 무능성을 전제로 해서 일하시는 정신입니다. 이 유월절 정신이 담겨 있는 절기가 바로 안식일입니다. 절기가 ‘중지 요소’를 품고 있습니다. “인간 STOP!”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노동이 전면적으로 금지가 되는 날입니다. 즉 인간에 애쓰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 대신 인간이 끼우는 가축에 대해서는 일을 시키지 않더라도 먹을 것은 주어야하는 날입니다. 즉 어느 한쪽이 친히 길러주시고 다른 쪽이 그분에 의해서 길러냄을 받는 관계를 분명히 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을 일곱 차례나 반복하고 추가적으로 하루가 지키면 오순절됩니다. 그리고 7년 마다 찾아오는 안식년을 일곱차례 반복하고 난 뒤 그 다음해가 희년입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아 주므로서 그동안 개입된 인간의 모든 노동을 무효화하는 해가 희년입니다. “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8-10)

이처럼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오거나 통과해야 하는 민족이 아니라 홍해가 제공한 시간과 공간을 짊어져야 하는 민족입니다. 즉 ‘친히 용사가 되시는 여호와’와 동행해야 하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슨 수로 자기 위주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즉 홍해 취지 그대로, 새로운 시공간에 계시는 분이 먼저 찾아와 주시는 공간이 발생합니다. 어제 없던 미래가 친히 마중에 나오는 세계, 이것이 바로 성도가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천국길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께서 생산해낸 성도로 인해 새로 나타난 길이 곧 천국의 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십자가 사건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7강-히브리서 11장 29절(홍해)250727-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29절입니다.

히브리서 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홍해라는 바다를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 진짜 믿는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이냐?’ 하는 것은 홍해의 존재, 홍해 바다에서 일어났던 일, 홍해 사건을 적용할 때 ‘건너는 자는 믿음이 있는 자, 건너지 못하는 자는 믿음 없는 자’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정했습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에 홍해 바다를 설정한 것처럼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홍해 바다 같은 기능을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똑같이 설정했습니다. 홍해 사건도 사건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도 사건이고, 그 특별한 사건을 준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믿음, 예수님의 믿음과 일치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있느냐?”라고 하면서 홍해 사건을 일으켰는데 인간들은 “하나님 믿습니다.” 이렇게 나왔을 때 “그러면 너는 왜 하나님이 친히 홍해(사건)라는 걸 준비해 놨는지 그 이유를 알아?”라고 하면 “그건 모르지만 그냥 믿습니다.” 이렇게 억지를 부리면 홍해 사건을 설정한 취지가 빠져버리잖아요.

“하나님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럼 십자가 사건은 무엇입니까?” “모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지 안 믿는지’ 하나님 쪽에서는 그렇게 제시하고자 하는데 인간은 십자가 사건을 모른다고 해버리면 “십자가 사건은 모르겠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믿음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낸 믿음인지, 누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믿음인지 그것에 대해서는 모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이 홍해라는 것을, 왜 홍해 사건을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굳이 만들어냈는지 그걸 파악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은 그런 본성이 강해요. 그래서 성경에서 ‘홍해를 못 건너서 물에 빠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왔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 말은 ‘오늘날 성도 마음속에 홍해라는 사건이 주도적으로 계속해서 살아 있어야 된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주저앉아요. 마음이 자꾸 가라앉아요. 그래서 홍해 사건이라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걸 생각하지 않고, 오늘 본문도 모르겠고, 다 빼놓고, 그걸 빼고 이야기하면 인간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인간 마음의 본성은 주저앉고 가라앉는 것, 아래쪽으로 안정성을 취하는 겁니다.

그저 삶이라는 것은 고요하고 정숙하면 된다는 거예요. ‘아무 일도, 별일도 일어날 일이 없다, 그런 요란함은 딱 질색이다. 그냥 나는 이대로 조용하게 살래.’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자꾸 가라앉게 만들어요. 조금 더 이야기한다면 ‘인생이라는 게 굳이 꼭 그렇게 어려워야 돼? 안 어려운 게 사는 거잖아.’라는 생각이죠.

‘뭐든지 과하지 않고, 뭐든지 말썽의 소지가 없이 그런 식으로 그냥 살다가 죽는 것, 그러면 OK 아니냐, 그게 사는 거 아니냐? 용서며 기도할 필요도 없고, 무리하게 성경 지식을 더 확보할 필요도 없고, 적당하게 지키면서 그냥 평온하게 문제나 말썽 안 일으키고 살면 그게 사는 거 아닌가?’ 이렇게 무게가 아래쪽으로 내려앉는, 중력이 있는 쪽으로 자꾸 가라앉아요.

홍해도 귀찮고, 십자가도 귀찮고, 성경도 귀찮고, 교회 다니는 것도 다 귀찮은 거예요, 그냥. ‘좀 놔둬.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을래!’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 중력이 굉장히 강하게 잡아당겨요. ‘그냥 날 가만두면 안 돼? 좀 건들지 말고. 뭐 하라, 뭐 하라고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갈 테니까, 그냥 죽을 테니까 편한 대로 살게 놔두면 안 돼?’ 그러한 강한 욕구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안 없어져요.

히브리서 11장 29절에서 홍해니 뭐니 무슨 이야기를 해도 ‘홍해고 뭐고 나는 그거 몰라도 돼. 편하게 살고 싶어.’ 하고 밀쳐내는 그 욕구, 그냥 안정되게 조용하게 살고 싶은 욕구. 문제는 이거에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문제입니다. 이 모든 문제가 뒤엎어지는 것은 “너만 존재하냐? 나도 존재한다. 너는 네 존재에 대해 그런 식으로 인생 정리를 해나갔지? ‘안 건드려진 채로 조용하게 그냥 살고 싶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존재는 어떤 계획이 없는 줄 알아? 난 뜻이 없는 줄 알아? 넌 네 뜻만 전부지? 내 뜻은 전혀 고려하질 않아?”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가 딱 출현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출현하면서 함께 일을 벌여요. 일을 벌이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믿음과 합치된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믿음으로 인정을 해주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충돌을 일으킨다면, 그게 일치되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인간을 받아줄 리가 없죠. 안 받아주죠.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 하는 대로 사시고 난 나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간에 하나님이 있음을 존중해 줄 테니까 나는 내 존재를 존중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은 자꾸 그렇게 정리하고 싶은 쪽으로 내부에서 강한 힘이 잡아당깁니다. 굉장히 잡아당겨요. 그 힘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너대로 사세요. 난 나대로 살 테니까.’ 이 강력한 힘이 무슨 수로 변경이 돼요? 변경이 안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묻는 것은 “네가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라고 물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붙드는 것만 평생토록 배우고 살아왔지 자기 말고 타인에게 “고맙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거예요.

남에게 감사할 사람이 없으면 자기 지키는 것이 공포스럽고 불안해요. 자기는 그냥 산속에서 혼자 살면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혼자 사는 게 편한 게 아니고 감사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이게 인간 최대의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빠져나왔다는 뜻이거든요.

평생동안 내가 노력해서 나 혼자 내 힘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감사할 사람이 없다는 말은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켜야 되기 때문에 심적인 중압감이 대단한 거예요. 딸이 엄마한테 감사합니까? 딸이 엄마한테 감사해요? 고맙습니까? 고맙다면 그다음부터는 자기로부터 탈출이 가능합니다.

그게 뭐냐? 고마운 분에게 봉사를 하게 되고, 그다음에 뭐냐? 봉사한 다음에는 고마운 분에게 기꺼이 희생하게 되고, 희생하게 되면 그분의 나라에 합류하게 되고, 합류하게 되면 그분과 일체성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지금 그 코스를 하나님께서 준비를 해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 출발점, 자기로부터 자기를 떼어 내는 출발점을 “고맙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큰일날 뻔했습니다.”하는 이 감사가 나오는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홍해 사건이에요. 홍해는 바다입니다. 바다는 사람이 들어가면 물에 빠져 죽게 되어 있어요. 물에 빠져 죽게 되어 있다는 그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로 끄집어내서 어디로 인도하느냐? 바닷길이 아닌 육지로 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바닷길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 유월절로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나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애굽의 압제에서 못 벗어날 뻔했습니다.”

여러 가지 고맙고 감사함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상상했던 하나님의 존재가 이스라엘의 길 가운데 실제적으로 어떤 펜스, 어떤 장애물을 설치할 줄은 생각도 못 했죠. 그냥 하나님께 “고맙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바라보는 건 뭐와 같으냐?

마치 밤에 별을 바라보고 달을 바라보고, 낮에 해를 바라보는 거예요. 햇빛 없으면 못 산다, 달빛 있으면 좋다고 하지만 그냥 좋고 고마운 거지 해와 달과 별이 내 인생의 앞길을 가로막을 일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살길을 가로막지 않는 한 나머지는 전부다 허상이고 상상의 나래, 상상의 리스트에 해당되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내 앞길을 안 막을 때.

그런데 주님의 존재는 이스라엘의 길을 막아버립니다. 환장하죠, 인간은 환장합니다. “하나님에게 고맙다고 하잖아요. 내가 감사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내 앞길을 망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네 감사, 네 고마움 그거? 그거 가짜야. 그거 속임수야. 내가 그 속임수에 넘어갈 것 같아? 네 앞길을 막아서…” 막는 정도가 아니에요. “…너 자신을 죽이는 쪽으로 나가지 않으면 끝까지 넌 너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죽을 때 “저를 잘 죽였습니다.”라는 소리 나올 때까지 그건 믿음이 아닌 거예요. 왜? 인간 속에는 가짜 믿음이 계속 살아있기 때문에요. 자기를 챙기는 가짜 믿음이 계속 살아있는 이상은 그 가짜 믿음을 처리하지 않으면 진짜 믿음이 나올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렇게 일으킨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홍해 사건이에요.

홍해 사건은 정말 이것은 인간들 입장에서 난데없는 돌발적 사태입니다. 모세도 예상 못 했어요. 유월절 건너서 애굽 탈출할 때 희희낙락 하면서 이제는 앞길이 창창하게 행복한 길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죠. 탈출 하자마자, 애굽 경계선 넘자마자…, 애굽의 군사야 뭐 이렇게 말해서 떼 놓을 수 있다 하지만 바다는, 바다하고 무슨 대화가 됩니까?

출렁이는 바다하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협상이 가능합니까? 인간과 협상 대상도 안 되는 홍해 바다를 딱 앞에 놓고 그 속에 들어가라고 할 때 어느 누가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절망하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을 거예요.

홍해의 존재는 이렇습니다. 음속으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하늘에 하얀 선하나 남기듯이 공중에 난데없이 선하나 남기는 거예요. 홍해가 있고 그쪽으로 갔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홍해가 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로 인도한다는 말도 되지만,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의도적으로 홍해의 의미를 맞닥뜨리도록 바다가 없는 쪽이 아니라 바다가 있는 쪽으로 주께서 몰아세운 거예요.

앞으로 너의 예상과 너의 미래에 ‘이렇게 했으면 참 좋겠다’라는 그 기대와 목표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부수시는 겁니다. 부수시고 밟기를, 인간들이 예상 못 한 다른 인생길을 당기니까 거기서 홍해라는 장벽이 나왔습니다. 홍해는 바다입니다.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인간은 들어가면 죽습니다. 인간은 들어가면 죽어요. 홍해는 건널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뭘 건너요.

그래서 ‘인간이 죽을 자리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준비를 해주셨다’라는 이 말은, 유월절 사건이 그때 지난 사건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연속, 이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홍해가 뭐냐를 알기 위해서는 유월절 사건이 뭐냐를 알아야 됩니다.

유월절 사건은 인간의 무력화, 무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에요. 어린 양이 나 대신 죽었다는 말은, 어느 인간도 자기가 스스로 죽을 수 있다는 데에서 무능하고 무기력하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죽고 싶은 사람이 없고 다 살고 싶어요. 살다가 살다가 안 되니까 자기 자존심 살리려고 죽잖아요, 자살하잖아요. 자기 자존심마저 스스로 뭉개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살고 싶은 거예요. ‘그냥 살고 싶다, 죽음에 들어가기 싫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무능하고 무기력합니다.

그 무능하고 무기력한 그것이 나중에 유월절로 반복이 되는데 그게 절기가 되거든요? 절기라는 것은 그 안에 ‘중지 요소’가 들어있어요. STOP, 모든 요소를 중지하는 것, 그것이 유월절 안에 들어있습니다. 유월절의 양이 죽었다는 그 제사를 하나님이 시간 자체를 재단해서 스케줄을 짜 가지고 안식일을 만들어요.

시내산에서 계명 받을 때 안식일이 나오는데 안식일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유월절을 삽입시킵니다. 유월절 사건을 거기다가 집어넣어요. 집어넣으면 1일부터 6일까지는 노동이 가능하나 제 7일 안식일에는 일체 인간의 모든 노동은 중지가 됩니다. 그날에는 일하면 안 돼요. 일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날만큼은 인간들의 생각, ‘나는 일을 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내가 내 능력으로 일하는 것으로 인하여 여기에 아직까지 사는 의미가 있다.’라는 그것을 안식일로 정지시켜버립니다. 안식일 날도 인간이 살 수 있는데 그 안식일에 인간이 살 수 있다는 말은, 내가 노동하지 않더라도 다른 분에 의해서 살려주는 그 생명의 능력에 의해서 내 노동과 내가 사는 것과의 등식이 중간에 가위로 잘리는 거예요. 끊어져 버리는 겁니다.

내가 일해야 산다는 그 일반적인 상식선이 안식일에는 단절되고 끊어져 버려요.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뭐냐? 일한 것도 없이, 일하지 않더라도 사는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미리 마련해 주신 겁니다. 모세 같은 경우에 40일 동안 시내산에 갔을 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농사를 지었습니까, 장사를 지었습니까, 무역을 했습니까?

아무것도 안 했어요.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고 양식도 먹지 않았어요. 그런데 멀쩡하게 사는 정도가 아니고 얼굴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시내산에서 내려오는데 얼굴에서 빛이, 광채가 막 나는 겁니다. 모세가 알게 된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구현하는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이었죠.

안식일 날 일을 안 하는데, 안식일의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어요. “그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에 대해서 가축 주인인 네가 안식일 날 가축보고 일을 시키지 말고, 농사짓는 데에 동원하지는 않으면서도 사료나 그들의 먹잇감은 주인인 네가 알아서 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안식일의 취지 안에 반드시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해요.

따라서 안식일이라는 것이 뭐냐? “네가 친히 기르는 가축은 안식일이라도 먹여 살려야 된다는 주인과 종의 관계, 기르시는 자와 기르심을 받는 자의 관계가 안식일 날 구축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니까 사람들이 예수께 고소를 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할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12:11). 안식일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고, 나 말고, 나 빼놓고 다른 분이 나를 끊임없이 살려 주고 있었다는 것, 심지어 안식일만 그런 게 아니고 나머지 6일 동안도 계속 살려주고 있었다는 것을 티는 내는 날이 안식일이라, 이 말이죠.

안식일에 그 티를 낼 때 안식일 제사에 뭐가 들어가느냐? 유월절 희생양이 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무능성과 무기력을 표현한 거예요. 인간은 자꾸 자기가 유능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무슨 홍해 바다에 들어가서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다는 인간은 홍해 바다로 가로막으면서 “오지 마! 들어오지 마. 너의 인간적인 생각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들어오지 마. 하나님의 믿음과 일치되지 않는 자는 들어오지 마.”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게 홍해에요.

뒤따르는 애굽의 군대는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그대로 빠졌다고 되어 있잖아요? 애굽 군대가 홍해를 건너지 못한 이유는 건널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앞에 가는 히브리인들이 건너가니까 자기들도 홍해를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교회 왔는데 지옥 가는 사람, 교회 왔는데 천국 못 가는 사람은 뭐냐 하면 ‘교회 가면 구원 받는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지옥 가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사람을 천국 보내는 데가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홍해는 건너갈 수 있다’라는 그 생각이 본인을 망하게 한 겁니다.

애굽 군대가 홍해를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히브리인들이 앞서 건너가니까 ‘쟤들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니까 건너가면 건널 수 있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홍해 바다가 갈라져서 길이 나와 있으니까, 바다에서는 헤엄치지는 못 하지만 길은 건너갈 수 있잖아요. 뛰어갈 수도 있잖아요. 마차도 달릴 수 있단 말이죠. 홍해 바다에 아주 고속도로가 났으니까요.

그런데 그 애굽 군인들이 뭘 생각 못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과 본인이 같은 인간 종류라고 생각한 게 결정적 잘못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홍해 바다는 건너지 못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에요. 요즘 말로 하면 누가 성도냐 하면, 교회 나온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성도에요.

교회 나와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저쨌든간에 천국 가는 길은 어떤 인간에게도 해당 사항 없음’ 이걸 믿는 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모세에게 화를 냈던 겁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참, 이 믿음이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얼마나 귀한 믿음이에요!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누가 처음 왔을 때 ‘아, 참! 이 교회는 아예 사람을 지옥 보내려고 작정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대로 설교 말씀을 듣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고 그런 설교가 아니고, 성경 자체가, 말씀 자체가 “오지 마! 들어오지 마!”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편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도 안 하기 때문이에요. 평소에 강하게 중력으로 내 존재를 잡아당기거든요. ‘성경 지식이고 교회고 간에 다 귀찮고 건들지 마. 나 조용히 살래.’ 이것뿐이에요. 남는 게 이것뿐이라고요. 밑으로 자꾸 가라앉아요, 가라앉는다고요.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란 게 뭐냐? 하나님에 대해서 놀란 거예요. 그러니 모세에게 원망했죠. “왜 좋은 길 놔두고 하필 이렇게 우리를 죽는 쪽으로 이끄느냐?” 하는 그 발언, 그런 생각 그게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안 나와요.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그런 사태였던 겁니다.

실제로 천문학자나 물리학자들이 공부하면서 제일 큰 난관에 빠지는 게 ‘블랙홀’에 관한 거예요. 우주에 구멍이 있다는 거예요. 빛도 못 들어가요. 블랙홀을 사진 찍어보면 안에 시꺼먼 것 위에 흰 광선이 모자처럼 씌워져 있는 이유가, 빛도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 하니까 지평선 위에 얼쩡거리는 빛들이 모자처럼 형성되어 있어요. 너무 중력이 강하면 빛도 속도가 느려져요. 곡면 따라 빛이 지나가기 때문에 시간이 느려져요. 너무 강해버리면 시간도 스톱이 돼요. “여기서 STOP, 밀지 마. 더 못 들어가.”

그러니까 물리학자들이 블랙홀을 시간과 공간이 없는 곳, 시간이 없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그게 참 기이하고 이것은 인간의 사고에서 시간이 없는 곳이 있다는 게 상상조차 되지 않는 거예요. 그건 뭘 뜻하느냐? 인간이 기존에 내 힘으로 밥 먹고 사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결부된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시간과 공간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내일은 뭐 하고 살고 모레는 뭐 할까?’ 이렇게 예상하고 기대를 하게 돼요. 살아있는 내가 조금 더 윤택하고 풍성하게 살기 위해서 다음에는 어느 나라에서 돈벌이해서 살아야지, 이게 목표가 되고, 예상이 되고, 기대가 되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온 예상과 기대도 같이 살아있는 겁니다. 이걸 물리학자들은 시간이 살아있고, ‘어디 가서 돈벌이를 하겠다’라는 공간이 살아있고, 즉 ‘시간과 공간이 살아 있고 그 안에 내가 살아있고’ 이것이 인간이 익히 아는 눈에 보이는 믿음의 세계에요.

그런데 블랙홀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공간도 없어져 버리면, 그래서 공간이 없다는 말은 입자와 입자의 관계만 있다는 뜻이지 공간 자체는 없다는 뜻이거든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자기 자신이 완전히 분해가 되었다, 이 말이거든요, 블랙홀 안에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련하는 이 홍해 사건이라 하는 것은…, 홍해는 있어요. 그러나 거기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시간과 공간은 안 받아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것은 홍해 바다 건너서 약속의 땅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약속의 땅은 홍해 바다 안에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환경과 더불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이게 홍해 바다 막 건너고 난 뒤에 불렀던 찬송 속에 나와요. 여호와가 용사라는 말은 ‘여호와가 유일하게 행동자다. 여호와께서 유일하게 행동의 주체가 된다. 여호와께서 용사가 되어서 홀로 싸우신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찬송을 한다는 말은, 인간이 안식일에 기르시는 양처럼 주께서 친히 희생양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노동하고 용사가 되신 그 결과로 인하여 그 주인집의 가축은 안식일에도 사료를 먹고 먹이를 먹는 것처럼, 주님이 일해서 그 덕으로 우리가 먹고사는 그런 새로운 환경이 홍해 안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깥으로 건너올 수 없다.’ 홍해를 떠안고, 홍해를 짊어지고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왜? 여호와는 용사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짊어지고 가야 되니까요. 홍해는 과거 사건이 아니에요. 과거라는 게 없어요. 홍해에는 시공간이 없기 때문에 과거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함께’에요, 함께!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이런 조로 언급한 대목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할 때 5천 명이 예수님이 주신 축복의 떡을 먹고 고기 먹고 배불렀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공간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앞으로 저 예수라는 분이 우리의 임금이 되면 우리는 앞으로도 경제 문제, 사는 문제에 대해 걱정이 없겠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예상을 했고, 기대를 했고, 목표를 했고 계획을 짠 거예요.

그들의 시공간에서 본인이 만족스러운 행복한 삶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걸 간파해서 “네가 나를 찾고 붙드는 이유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잖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떡이 있다.’ 그것 때문에 그랬잖아. 너희의 목숨을 위해 나를 찾는데 나를 오해했다. 나를 잘못 생각했다. 내가 주는 것은 너희가 원하는 떡이 아니고 하늘의 떡이다.” 하면서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6장 51절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따라서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이 말은 달리 말해서 “너희에게는 진작에 태어날 때부터 생명은 없어!” 생명은 없다는 거예요.

생명도 없는 게 살려고 하니까 이게 잘못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교회 오래 다녀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이 봤어요, “목사님, 우리 인간들에게 참 죄가 많습니다.” 죄가 많은 게 아니고요, 죄가 있는 게 아니고 죄뿐이에요. 죄뿐이기 때문에 죄를 말하면 안 돼요. 뭘 해도 죄인데 달리 거기서 굳이 죄를 찾아내는 자체가, 그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삽니까?”하는 질문도 안 돼요.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는데 뭘 살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면 믿음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의 관점이 아니면 그 관점을 쳐주질 않습니다. 교회 와서 살겠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교회 왔으면 ‘내가 처음부터 죽어있었구나’라는 것을 발견해야지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하는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죄뿐이라는 말은 저주뿐이라는 거예요. 저주뿐인데 이 저주를 저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의 본색, 본질을 드러내는 그런 사건이 필요한데 그 사건이 홍해 사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홍해 바다 앞에 딱 서니까 대번에 나오는 게 모세에 대한 원망이잖아요.

“공동묘지가 없어서 우리를 집단으로 죽이려고 이 홍해 바다까지 와서 우리의 묘지로 만들었느냐? 세상에,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그런 지도자가 어디 있느냐? 세상에 물속에 빠져 죽는 이게 구원의 길이라고 알려주는 그런 인간은 없다!”

“드디어 나왔네, 네 본색! 내가 홍해 사건을 네 앞에 설치하지 않았으면 너는 자꾸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누구한테 감사할 분이 없는 게 죄거든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경유해서 결국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가 감사의 대상이 되는 걸 의미합니다.

홍해 바다라는 것은 구원받은 자에게 그 존재의 의미가 있지 구원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그냥 초음속으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그은 선처럼 슁, 하면 꼬리에 구름이 길게 하나 그어져 있지만 좀 지나면 없어져요.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홍해 사건, 십자가 사건, 교회 올 때는 한 소리 들었지만 지나가면 내 뇌리에서 다 사라져서 없어요.

남는 것은 ‘편하게 살자. 나 편하게 살면 그만이야.’ 그거 하나만 남아요. 그게 굉장히 강력하게 평생 우리를 붙잡고 있고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발 저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제 앞길 가로막지 말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로막을란다, 왜!” 이러면 그 사람은 성도죠. 이러면 성도가 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제가 말씀드렸는데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 이야기, 1장 48절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고, 보면 볼 수록 너무나 가슴 뜁니다. 제 가슴에 너무나도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와요.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곧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당신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무슨 뜻입니까? 평생 나는 나한테 유리하다는 조건하에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 그것을 나의 인생으로 알고 살아왔어요. ‘저 사람이 도움이 될까, 안 될까?’ 따지면서 살아온 거예요. 자기 예상이 있고, 기대가 있고, 목표가 있고, 자기 희망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불쑥 주님께서 자기 앞길을 가로막을 때 비로소 질문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날 아십니까?” 이 말은, 홍해는 미래가 미리 마중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어제가 없던 날이 되는 겁니다. 홍해의 시간엔 어제가 없어요. 미래밖에 없어요. 과거와 현재와 연결되는 미래가 아니고 끊어진 미래, 주님 혼자만의 시공간이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마중 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애굽 군대는 왜 못 갔느냐? 애굽 군대는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빠져 죽어야죠. 하나님의 영생과 이어지지 않는 시공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홍해 앞에 빠져 죽고,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돼요, 저주 받아야 돼요.

십자가 이야기할 때 반드시 두 강도를 경유해서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분류 작업이 일어나니까. 그 대목을 만화 영화로 잘 보여준 것이 <킹 오브 킹스>(The King of Kings, 2025)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당신이 나를 구원하면 내가 당신을 믿겠다’라고 하는 그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간 강도, 그 강도의 논리를 존중해 줘야 돼요. 모든 인간의 타고난 심성이니까요. 중도에 바뀌지 않고 그대로 가면 그렇게 돼요. “당신이 나를 구원한다면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다.”

십자가의 기능과, 유월절의 기능과, 홍해 기능, 십자가 이전에 유월절과의 그 사이에 홍해 바다를 설치한 이유는 그 안에서 홍해의 기능 자체가 분류 작업을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존의 시공간을 유지하는 자와 기존의 시공간이 작살나는 자, 완전히 박살 나는 자들, 죽음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있고 나는 안 살아있다는 것, 애초부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바로 홍해 안에서 홍해가 살아남으로써 나는 계속 죽어있는 자가 된다는 이 존재의 가벼움, ‘내 안에 홍해 사건이 살아있고, 나는 그 홍해 사건을 짊어지면서 그 안에서 나는 계속 무기력하고 무능한 자가 된다.’라는 이 자유함, 홍해 사건이 주는 은혜입니다.

그러면 약속의 땅은 어딨느냐? 홍해 안에 약속의 땅이 있어요, 홍해의 사건 안에. 이게 무슨 말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것이, ‘홍해를 건너왔다’라고 하는데 홍해를 건너오면 안 돼요. 홍해를 건너오면 기존의 시공간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서 본인이 살 장소, 내 몸 하나 건사할 땅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해 사건이 있던 그 사건 체험을 그대로, 홍해를 건너고 난 뒤에도 계속 이어갑니다. 농사하고 싶어도 농사할 재주를 발휘할 수 있는 그 권능 자체가 없어요. 무능해요, 무기력하고. 살려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만약에 그 만나를 배급하지 않았으면 그들이 어디 가서도 양식을 구할 길이 없습니다. 반석이 있는 쪽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어디에 가도 그들은 마실 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하나 놓친 게 있어요. 세상 어디에 가도 모세 같은 지도자는 없습니다. 모세같이 온전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끽, 소리 못 하고 사는 온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모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과 무지를, 그리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함을 절실하게 그대로 다 보여주는 지도자, 그게 최고의 지도자예요. 최고의 지도자 아닙니까, 모세가! 모세는 오직 하나님이 신이 인도하는 대로만 할 뿐이에요.

홍해는 없는 공간에 하나님의 주름, 하나님이 나타낸 주름 같은 겁니다. 그 주름으로 인하여 인류가, 모든 인간이 둘로 분류되고 둘로 나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뭘 생각해야 되느냐? 그 홍해 바다를 껴안고, 다시 말해서 ‘나는 이미 빠져 죽어 마땅한데 여호와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홍해 바다와 똑같은 상황으로 살고 있다’라는 것을 안다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공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희년 사상이에요. 희년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일곱 번 곱하기 하고 거기에 플러스 1을 한 것이 희년이에요. 희년의 특징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원래대로 되돌려 주는 것. 많이 가진 자 그리고 어떤 사람은 너무 없어 굶어 죽는 사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벌이는가?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치르게 해서 어떤 가정의 가장이 전사하게 되면 여자와 어린아이들만 남게 되겠지요. 아버지가 죽으니까 대대로 내려오는 땅 자체도 경작한다든지 할 수가 없어서 일가친척한테 그걸 팔아먹고, 계속해서 남은 자식들을 길러야 할 그런 처지에 있게 됩니다.

아버지가 전사하면 엄마는 과부가 되어 버리고, 엄마도 같이 죽어버리면 남은 자식들은 고아가 되겠죠. 그런 사람들 또는 나그네 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돈이 없으니까 자기 몸을 팔아서 남의 몸값으로 들이고 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희년이 되면…, 희년이라는 뜻은 기쁜 날, 다시 기쁜 날로 돌리기, 그 희년이 되면 그동안 빚진 자, 빚 갚아야 할 사람들이 빚 안 갚아도 되고 주인이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까 제가 했던 것, 어떤 존재가 등장하고 그 존재한테 감사해야 되고, 감사해야 되면, 봉사해야 되고, 봉사하면 희생하게 되고, 희생하게 되면 그다음에 그분의 나라에 하늘나라에 합류하게 되고, 그다음에 어떻게 되냐면 더 나아가서 이제는 합체가 돼요. 그리스도의 몸에 합체가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시공간 자체가 주님의 자아가 되는 거죠. 하나님의 ‘나’가 되어서 그 시공간에 같이 합류가 되는 겁니다. 따로 나를 뽑아낼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아까 불렀던 찬송가 365장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와 있어요. 3절에 “저 수정 같은 길에서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 앞에 바치며 늘 찬송하겠네.”

자기 면류관을 왜 바칩니까? 그 길이 무슨 길이냐? 수정 같은 길이에요. 수정 같은 길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5장 2-3절에 나온 말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홍해라는 게 뭐냐? 유월절 하나님이 어린 양을 제공한 그 믿음에 합치된 믿음, 합류된 믿음이 된 사람들에게만 제공되는 천국 가는 길이에요. 그래서 인간에게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253장에 나오는 가사인데 가사가 설명이 필요해요.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했는데요,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 길 갑시다~” 이 가사가 잘못된 거예요.

인간에게는 천국 가는 길이 아예 없어요. 길은 믿음과 더불어 만들어지고 그 현장에 생겨나는 것이지, 이스라엘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 길이지 이스라엘 없는 길은 없어요. 성도와 더불어 생산되면서 나타나는 게 구원의 길입니다. 자기가 무능하고 무기력해야 되고,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아는 자의 등장과 더불어서 등장하는 것이 영생의 길이에요.

‘우리가 골라잡자. 가만있자. 넓은 길 갈까, 좁은 길 갈까?’ 여러분, 그러면 좁은 길 미어터집니다. 완전히 ‘오픈런’이에요, 오픈런. 백화점 세일하는 날 막 달려가잖아요. 그 시시한 사람들 좁은 길 못 가요, 사람들이 막 미어터지는데. 정부 지원금 받는 것도 미어터지는데요. 그 생명의 길을 왜 놓쳐요?

생명의 길 그리고 이스라엘, 그것은 전부 다 어린 양의 사건이 나오는 그 능력, 사건에서 나오는 그 능력이 없는 데서 만들어낸 존재들이고 환경들이에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일반인들에게 홍해는 없고, 일반인들에게 십자가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성도가 없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네가 들어가는 길 같으면, 그런 바다 같으면 우리도 들어간다.” 이게 바로 애굽 군사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같은 인간이 하는데, 네가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그런데 이스라엘은 들어간 게 아니에요. 열어줬죠. “주여 어찌하여 날 아십니까?” 하면서 주께서 길을 열어요.

홍해는 못 들어가요. 누구나 들어가면 빠져 죽어요. 인간이 오징어도 아닌데 물에 왜 들어갑니까? 인간은 죽는데 주께서 길을 열어줬기 때문에,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렸죠. 그 없는 길이 열리니까 그냥 들어간 것뿐이에요. 그래서 뭐 자기 자랑, 내 솜씨, 기도 솜씨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냥 “주여 제가 뭔데 절 알아 주십니까?” 그 말 되뇌면서, 그 말을 반복하면서 끌려 들어가고 말려 들어가는 거죠. 십자가로!

구원받은 강도가 강도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강도질을 하면서 주님 십자가에 끌려들어가기 위해서 그 강도질을 했었어야 됐어요. 그 구원받은 강도가 길이에요. 세리와 창기가 길이고요. 우리는 그 사람들 개무시하잖아요, 껍데기만 보고.

구원으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아예 이 세상에 준 적이 없어요. 다만 없는 성도, 없는 양을 유월절 양을 투입해서 그 양으로 피를 발랐던 사람을 생산시키고, 그 생산된 길이 그들이 가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바로 천국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길이거든요. 이제 예수님과 한 지체가 된 성도,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성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왜? 우리는 너무나도 무능하기 때문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교회 와서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정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꾸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 그것이 얼마나 애굽 군사들의 생각이고 주의 믿음과 합치되지 않는 가짜 믿음인지를 이제는 기쁨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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