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전쟁
2025년 8월 1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33-34
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사람들은 전쟁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할려고 합니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에너지를 쏟고 난 뒤에 나타나는 후유증은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립니다. 그냥 조용히 혼자만의 삶을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전쟁에 환장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 앞에 낯선 현실이 닥치게 됩니다. 이 낯선 현실 속에서 들은 낯선 죽음을 접하게 됩니다. 더는 나를 살리기 위한 삶 자체를 거짓된 것으로 만드는 죽음입니다. 이런 경우의 말씀은 모두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을 통해서 제공되는 새로운 낯선 현실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주어진 말씀은 천국 백성들로 하여금 ‘낯선 죽음’을 경험토록 합니다. 그냔 살다 늙어죽는 죽음말고, ‘이대로 계속 살면 지옥에 들어간다’는 체험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쟁에서 그들은 단순히 혈과 육의 전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치 않는 전쟁에 그들이 불러 나온 겁니다.
믿음의 세계에 말씀으로 호출당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죽어 마땅한 세계 속에서 죽어 마땅한 몸으로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형편에 대해서 표적과 기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기적’이 나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무려 5000명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런데 이 표적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본성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썩는 양식에 몰두하면서 살고 있구나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6-27)
즉 예수님은 지금 홀로 영적전쟁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전쟁은 예수님처럼 성령을 받은 자에게 다 해당될 일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성령을 받은 자들의 특징은 ‘낯선 죽음’으로 끌어들아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기본 마음이 마귀의 집으로 그동안 쓰여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
이는 인간은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영향력’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지옥과 직결되어 있는 요소들로 차고 넘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지옥의 전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 자신들이 열심히 하는 일들을 통해서 열심히 지옥가고 있는 중입니다.
도중에 자기 마음을 돌이켜 천국갈 수 있는 역량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방법은 인간의 자아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구약의 전쟁의 특징은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에 ‘칼 없는 칼’이요 ‘무장없는 무장’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이런 모습을 띱니다. 벌거벗은 외면을 드러내는데 마치 벌거벗은 예수님의 몸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벗기고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면밀히 살펴보지만, 예수님의 자신의 발언 외에는 달리 전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언약궤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봐도 거기서 특별한 구원의 능력이 나올 수 없는 형체입니다. 하지만 언약궤 안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저주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뚜껑에는 온 백성의 죄를 씻기 위한 희생제물의 피가 묻힙니다. 즉 자체적으로 언약궤는 자기 안의 저주가 해소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온 믿음이란 이처럼 안에 들어 있는 저주는 저주로 충분히 드러내시고 그 저주가 무엇에 의해서 사함을 받는지도 같이 알리십니다. 어차피 태어나는 조용히 살아봤자 기다리는 것은 지옥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신을 받아 전쟁을 하는 이들은 희생 제물의 피를 드러내기 위해 유발된 낯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영향력입니다. 이미 전쟁에 승리한 채로 벌리는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에스겔 37장의 어느 골짜기는 전쟁에서 전사한 이스라엘 군대들의 시신이 뼈로 한 가득 한체 골짜기를 메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본인들도 몰랐던 지옥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그리고 난 뒤 에스겔 37:11-13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37: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즉 패배해서 전멸한 이스라엘 군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시 되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영향력입니다. 이스라엘 전쟁의 영웅들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최종적으로 자기에게 담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인격화된 하나님의 언약궤가 되는 겁니다. 이런 전쟁의 원리는 시편 8:2-4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아무 것도 꾸미지 않고 순수한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젖먹이와 어린 아이와 비교해 볼 때, 자신이 믿는 힘에 의해서 생업에 좋사하고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을 굳이 생각해 줄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지옥의 전조에 해당되는 그 감옥에서 죄사함 받고 벗어날 것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죽는 순간이 있음이 그렇게 설레고 반가운 희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님에게 다 성공이 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0강-히브리서 11장 33-34절(낯선 전쟁)25081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33-34절입니다.
히브리서 11:33-34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앞에서 나왔던 그 사사들과 선지자들의 활동 사항이 전쟁 가운데서 이런저런 식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의를 행했다.’ 바른 의를 행했다는 것은 솔로몬부터 해서 ‘말씀에 의해 바른 재판, 바른 판결을 했다’라는 뜻이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다’라는 것은 바로 다니엘 이야기고요, ‘불의 세력’은 역시 다니엘의 세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칼날을 피했다’라는 것은 다윗 그리고 엘리야, 아합왕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또는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을 때 다 피해 갔던 겁니다. 그다음에 ‘연약한 가운데 강했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이 앗수르에 완전히 봉쇄되어서 먹을 것도 없을 때 이사야의 기도, 예언대로 물리치기도 하고 천사가 와서 하루아침에 18만 5천 명의 군대를 죽이기도 했습니다(왕하 19:35).
삼손도 마찬가지로 마지막 나실인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다음에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하는 것은 다윗 시대에 또 사사 시대 또는 여호수아 시대 때 이방 민족과 전쟁하면서 자연의 놀라운 도움을 받아 가면서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전쟁 중에 있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딱 비춰볼 때 여러분은 무슨 전쟁 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누구하고 전쟁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신앙인은 “믿음으로” 하니까 믿는 자잖아요?
믿는 자는 전쟁하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는 무슨 전쟁을 하고 있습니까? 우크라이나 전쟁하고 있습니까? 어떤 전쟁을 하고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미 언급했어요.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바로 그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들 그렇게 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라니까, 혈과 육의 싸움은 오늘날 성도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혈과 육의 싸움인 생계 싸움, 생존 싸움은 성도라고 할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생존 싸움에 의해서 세상에서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들어와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얼마나 목숨을 길게 끌어가느냐, 그 싸움이 아니고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과 싸우기 때문에 이것은 누구에게만 해당하느냐?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만 이 영적 싸움이 성립이 돼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혈과 육에 속해서 어떤 싸움보다는 협상과 타협, 평화, “그냥 내 인생 좀 조용하게 살게 놔두면 안 돼요?” 이런 거만 신경 쓰고 있지 내가 악마와 싸워야 할 주체자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되지, 굳이 마귀와 싸워야 하나? 대체 난 마귀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마귀가 있는지조차도 인정 못 하겠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영적 싸움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이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신앙인의 리스트, 그 그룹에 포함되지를 못한 사람이죠.
예수님께서는 혈과 육으로 사는 사람과 영으로 사는 사람을 요한복음 6장에서 확실하게 구분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사건’이 나와요.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2 마리 가지고 오천 명을 먹였던 그 일을 할 때 사람들은 혈과 육에 의해 아주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으로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사고에 궁극적인 것, 자기의 목적하는 바에 예수님이 충족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경제 대통령, 충분하다. 저분이 대통령이라면 우리 경제는 활성화된다. 우리도 선진국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 그 생각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말씀과 표적은 인간 자기의 본질을 자극해요. 내가 누군지를 모를 때 말씀이 와 보면 “너 육이잖아. 넌 혈과 육이야. 넌 이미 혈과 육에 속했고 마귀한테 속한 자야. 넌 영적 싸움이라는 걸 생전 처음 들어봤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지? 세상을 지배하는 약한 영들, 그거 너 못 느끼고 있지? 그러니까 넌 철저하게 처음부터 육이야.”
이것을 주의 말씀과 주님의 표적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참 고마운 하나님이에요, 주님이에요. 왜? 주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평생 살다가 지옥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니까 사람들이 임금 삼으려고 따라왔죠.
따라올 때 마태복음 6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끝까지 따라오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너희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은 너희들이 추구하는 육적 생활에 내가, 이 예수가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다’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를 찾으려고 했다는 그 말이죠. 오병이어로 배 불려 주니까 본색이 확 드러난 거예요. 아, 교회 오는 이유, 예수 믿는 이유가 완전히 들통났죠.
마태복음 6장 27절에 보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네가 먹는 모든 양식은 너로 인하여 너를 썩게 만드는 양식이다. 너를 파멸시키는 양식이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신약 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악한 마귀와 영적 싸움을 하는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지금 이 싸움을 예수님만 해서는 안 돼요. 예수님이 받았던 게 성령이거든요. 그러면 성령 받은 우리 성도도 이러한 예수님의 안목과 관점을 가지고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냥 교회 왔다 갔다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영적 싸움을 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가 먹는 양식은 썩은 양식이고 그 썩은 양식을 먹기 때문에 나는 썩을 세상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라는 거예요. 그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썩을 양식의 반대말이 뭐냐? 영생할 양식이죠.
영생할 양식은 썩는 양식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문장 하나를 제시한다면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를 망친다.’ 이 말입니다. 어떤 직업 생업에 종사하든 생업에 종사하는 그 일이 나를 망하게 하는 거예요. 목사가 하는 목사 일, 목사가 하는 그 일로 인하여 목사 본인이 망해요. 왜냐하면 목사가 육이기 때문에, 육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따지면 어떤 인간도 이미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치고 망하지 않을 위인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 망합니다. 다 망하는데 오늘 본문 11장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사람이냐? 인간은 망하게 되어 있거든요.
자기가 하는 일이 육과 혈통을, 내 몸체를 살리고자 하는 그 일, 그 썩는 양식의 일에 매진하고 있으니 마땅히 망해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들은 이렇게 영적 싸움을 하고 있잖아요. 그럼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왜 우리와 다르죠?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33절에 “저희가 믿음으로” ‘믿음으로’가 들어가다 보니까 육적 싸움이 아니고 영적 싸움이 되는 겁니다. 자, ‘믿음’이 들어가면 그 믿음이 들어간 사람에게는 어떤 구조가 되느냐? 지옥의 영향력과 천국의 영향력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여기에 나오는 신앙인들 중 온전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와 똑같이 벌벌 떨고 도망칠 생각만 하고 전쟁 피할 생각만 하는 것이 똑같아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런 육적인 영향성, 지옥의 영향력만 있는 게 아니고 그들 속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영향력도 같이 겸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영적 군사가 되는 겁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니에요. 천사 같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자 없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모르고 산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 챙기는 데 열중했던 사람인데 그걸 가만두지 않고 믿음이, 천국의 영향력이 힘을 발휘해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을 천국으로 빼돌리는 일에 믿음에서 나오는 힘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지옥의 영향력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일이 불길하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일이 불길해요. 아, 찜찜해요. 세상 사는 게 불안해서 못 살겠어요. 항상 자기방어 태세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불길함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영향력은 모든 게 기쁨이에요. ‘모든 게 기쁨이고 감사고 고맙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2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신약의 성령 받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디모데와 같이 있는 사도 바울이. 19절에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주체가 인간이 아닙니다. 주체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체죠.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Yes! ‘Ok’만 되느니라.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오케이)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주저함이 없을뿐더러, 오류도 없을뿐더러, 실패도 없을뿐더러 중간에 어떤 장애도 주의 일을 막아설 것이 없습니다. 그 결과-결과-결과로 나오는 것이 뭐냐?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순간순간 재편돼요.
인간은 ‘아니오’에요. 불안해서 못 살아요. 인간은 살면 살수록 불안해서 못 살아요.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돈 한 200억 있으면 편할 것 같은데 200억이 있어도 불안해요. 항상 불안하고 불길해요. 그런데 그게 바로 지옥에서 온 영향력입니다. 악의 원천, 지옥의 영향력인데 천국의 영향력은 불길함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그 하나님의 쉬지 않는 활동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오케이’가 되는 결과물이 바로 너다! 예수님이 일 잘했다는 결과물이 바로 너야. 너 자신이야.” “아멘,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오케이!’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언제? 매순간마다 말씀이 불길함을 이겼다는 그런 새로운 환경인 것을 재편해주고, 재편한 그것을 현장에서 우리가 만끽하고 느끼게 만들어요. 우리가 어떤 사건을 예상하게 되면 불길함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와요. 성도에게만 해당됩니다. 그 불길함이 찾아오면서 그때 ‘말을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바르게 하면 나의 잘남이 계속 유지가 될까?’ 하는데 막상 현장이 딱 들이닥치면 현장에서 육적인, 혈과 육밖에 모르는 나에게서 영이 튀어나와요. 저만 느낍니까? 저만 느끼면 안 되는데.
이게 마태복음 10장 19-20절에 나오는 거예요.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어디 잡혀가거나 할 때 무슨 말을 할 것을 미리 예상하지 말라. 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이렇게 중첩되어 있는 사람 성도다, 이 말이죠. 중첩되어 있는 사람이 성도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보, 내가 요새 자꾸 어지러운 것 같아. 어지럽고 몸이 좀 아픈 것 같아.” 할 때 배우자가 이런 말을 해요. “그냥 죽어! 죽어도 상관없잖아. 이제 너 자신에게서 떠나야지. 뭐 큰일 났어? 그거 혈과 육에 관한 이야기잖아.”
이런 조언을 해주는 배우자, 최고예요! 이게 최고라고요. 왜냐하면 그런 조언을 해준다는 말은 배우자가 평소에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마음가짐이냐? 내게 죽는 날이 있다니 너무 설레고 기쁘다는 거예요. 세상에, 내가 이 세상에서 떠날 날이 있다는 것, 이걸 이사야에서는 ‘복역의 때’라고 했어요.
내가 감옥 생활에서 떠날 때가 있다는 이사야 40장 2절에 나와요.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복역한다는 것은 죄지어서 교도소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갇혀있는 이유는, 그 교도소가 지옥에 들어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 꽉 차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과 지옥은 직결되어 있거든요.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옥이 어떻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이 세상이란 말이죠. 이 세상에서 온갖 지옥의 그러한 힘들이 꽉꽉 차 있는 곳에 태어나 살려고 하니까 힘들어 죽어요.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여기서 ‘시대의 표적’은 뭐냐? 이 세상이 지옥과 연결되어 있는, 그래서 지옥의 모습이 이미 이 세상에 꽉 차 있는데 이 세상 속에서 지옥의 모습을 왜 볼 줄 모르냐 그 말이죠. “내가 알려줘?”라고 하면서 하시는 말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
지옥에서 태어났으니 지옥의 삶을 살 수밖에 없고요, 구차 없이 이 땅에서 온갖 불길한 걸 온몸으로 휘감고 공포와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여서 어쩔 줄 모르는 이 삶, 이 삶에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이 복역의 때 교도 생활을 끝낼 때가 있다 하니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감금된 사회에서!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배우자가 어디 아프다고 할 때 “잘됐네. 축하합니다! 죽어라, 인간아. 주께서 복을 줘도 감당을 못하고 있네.” 그래서 살면서 화를 낸다는 거는요, 이건 싸가지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도에게 수모라는 것은 성립이 안 돼요. 빨리 죽으라는 것이 주의 뜻이라는 그 말이죠.
듣는 사람도 섭섭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해야 해요. “죽어라. 그런데 병원 가서 죽어라. 갈 때 신분증도 잘 챙기고. 10시에 문 연대. 병원에 가서 죽어라.” 하고 친절하게 안내를 또 해줘야 해요. 수모당한다는 말이요, 얼마나 시건방지고 주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발언이에요?
아까 기도하신 분이 이야기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힌 것 외에는 일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사도 바울이 왜 했겠습니까? 제발 입에서 수모당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무슨 수모를 당해요? 지옥 갈 인간을 천국으로 방향 틀게 해줬는데 무슨 수모를 당합니까? 호강인 줄 알아야 해요. 세상에 이런 호강이 어디 있어요? 지옥 안 가고 천국 가는 게.
이걸 성령 없는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벌써 욕 바가지로 하면서 뛰쳐나갔을 거예요. 성도한테는 두 가지 다가 있어요. 성도한테는 지옥의 영향력과 천국의 영향력 둘이 서로 작용해서 구약에서 바깥에서 하던 혈과 육으로의 싸움이 신약에서는 내부 싸움, 마음의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성도한테는 악의 원천도 들어있어요. 그리고 의의 원천도 성도한테 들어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이걸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7장 20-23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입에 들어간 게 더러운 게 아니고 입에 들어가서 몸이 더러워진 게 아니라, 원래 더러운 게 입을 통해 나온다, 이 말입니다. 21절부터 다시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을 더럽게 한다면 사람이 더럽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내 마음이 원래 그래. 더러우면 내가 알아서 바르게 잘 살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문제 해결이 되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12장 43-44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여기서 ‘내 집’이라고 했어요. 인간의 모든 마음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누구 집이냐 하면 귀신이 살고 마귀가 사는 집이에요. 마태복음 12장 44-45절에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교회 처음 왔을 때 처음 사랑이라고 눈물 흘리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이렇게 손들고 하다가 교회 한 50년 다니고 나서는 전보다 형편이 더 악해졌어요. 목사 되고 난 뒤에 형편이 더 악해졌어요. 왜? 마귀가 자기 집인데요. 자기 집인데 친구 데려온 게 뭐가 문제가 됩니까?
우리는 내 마음이 나에게 속했다고 하는데 나에게 속한 게 아니고 마귀한테 속해있어요. 이 마음은 내가 손댈 수 없습니다! 백날 성경을 백 독해도 인간 마음은 안 바뀌어요. 표적을 봤다고요? 물 위를 걸었다고요? 장모가 병에서 나았다고요? 그랬던 베드로 뭐했습니까? 예수님 배신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안 달라집니다. 왜? 그 집이 마귀 집이거든요. 성질내고 싶지 않다? 그건 내 마음이고 마귀 마음은 다른 마음이에요. 끝까지 싸가지 없고요. “네가 뭔데 나에게 수모를 주느냐?”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은,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안고 있는 육과 혈의 한계를 자극하고 도발시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신앙이 있는, 곧 하나님의 성신 받은 사사들과 많은 사람들, 다윗과 사무엘 등 이 사람들이 다 성신을 받았어요,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 내부가 안고 있는 인간의 육적인 한계, 죄악 된 한계,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악한 귀신들을 믿음의 힘으로 어떻게 물리쳤는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을 통해서 ‘아, 내가 교회 나온다고 해서 인간 되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 교회 왜 나오는데요? 말씀을 통해서 뒤집히는 거예요. 내가 꼬깃꼬깃 감추고 있는 것, ‘사실은 내가 악마를 변호하고 귀신을 변호하면서 귀신과 한패로서 살아가는구나.’ 그 사실을 들춰내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가 파악됐으니까 답이 나와야겠죠? 답은 어떻게 되는가? 역시 ‘믿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귀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마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은 말씀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말씀으로 만들었으니까 주의 말씀이 투입되면 이미 우리 자신이 마귀 편이라는 것을 들춰내는 것 자체가 이미 말씀에 의해 구원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징후입니다, 징후에요.
구약에 있던 그들의 믿음의 전쟁, 영적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본문이 히브리서잖아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3절)라고 하면서 제일 먼저 아벨이 나왔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웅적인 용맹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모두 본의 아니게 낯선 죽음에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낯선 죽음이에요. 우리가 예상하는 죽음 있잖아요? 화장터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 만약 여러분들이 화장터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 여러분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죽을 때 눈 꽉 감고 입 다물고 불길 속에서 ‘그래.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가자.’ 어떤 사람은 수의 입고 어떤 사람은 양복 입은 채로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 입 꽉 다물고 ‘주여, 믿습니다.’ 하고 화장터에 들어가면 됩니까? 그러면 우리의 오기와 의지가 죽음을 이기는 겁니까?
그 방식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신앙이 오게 되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장차 우리가 예상하는 죽음, 불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예상된 죽음 말고 생각도 못 한 낯선 죽음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로 직면하게 만들어요. 그게 바로 아벨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죽으려고 제사 드린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제사 드리고 난 그 효과가 서로 친하게 지내던 형한테 맞아 죽는 거였어요. 이건 자기가 예상 못 했습니다. 인간이 이미 지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옥에서 살면서 인간이 익혔던 모든 지식을 하나님은 일체 다 배제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오게 되면 도저히 아무리 예상해도 예상 못 하는 낯선 죽음을 체험합니다.
인간의 체험은 내가 무너지는 거지만 낯선 체험은 내가 무너지는 것조차 이것도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내 죽음 말고 어떤 다른 분의 죽음에 동참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래서는 설명 안 되니까 설명 조금 더 해볼게요. 아벨의 후손이 누구냐 하면 에녹이에요.
죽는 아벨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 간 에녹의 두 가지 사례를 다 보여줍니다. 곧 에녹은 죽었다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상 못 한, 곧 죽지 않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 감으로써 아벨과 함께 그 두 가지의 사례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겁니다. 죽음과 그리고 생명이 같이 겸하여 있는 자가 바로 신앙을 받은 사람, 말씀에 의해서 신앙을 받은 사람에게 둘 다 겸비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누가 목격하게 하느냐?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지음으로써 육이 살아있는 상태로 방주 안에서 무엇을 목격하게 하느냐? 모든 인간은 어차피 하나님의 저주받는 심판을 다 받는다는 것을 목격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방주에 동승하고 있는 깨끗한 정결한 짐승이 나 대신 죽습니다. 더러운 게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죽을 이유가 없는 그 깨끗함이 죽는 이유를 통해서 그 안에 깨끗함의 생명을 같이 공유하는 체험을 노아가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아는 그로 인하여 무지개가 있는 세상을 보게 됩니다. 무지개는 이 저주받은 세상과 저주가 없는 다른 나라의 경계선상의 철조망이 무지개에요. 에스겔 1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통과해야 무지개가 있는 나라가 나옵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6-28절).
이쪽은 무지개가 없어요. 경계선이니까 이쪽 세계는 저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무지개가 떴다는 말은 ‘너희들은 다 죽어 마땅하다’라는 걸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표적이죠.
그걸 믿는 자를 통해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중첩된 거예요. 그 중첩된 믿음의 사람이 아까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본 것이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 일을 우리보고 하라고 하면 우리가 육으로 이걸 못 해요.
왜냐하면 이게 죽음이거든요. 죽음이 맞닥뜨려지는 전쟁 상태라니까요. 그래서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전쟁 특징이 뭐냐? 칼이 없는데 칼이고 무장되지 않았는데 무장이에요. 혈과 육을 아는 우리 입장, 혈과 육을 보호하는 악마적인 세상의 본성을 갖고 있는 이상 우리가 칼을 버리고 활을 버리고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 되는 겁니다.
참, 성경은 이런 상황을 굉장히 담담하게 이야기해요. “뭐, 어때서?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요. 시편 8편 2-4절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되어 있어요.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무슨 전쟁을 합니까? 전쟁터에 그 애들이 왜 등장해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예상이 안 되잖아요.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왜 전쟁터에 나가며 왜 그들이 승리합니까?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다시 말해서 젖먹이와 어린아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전쟁에 승리했다는 말은, 칼 들고 활 들고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겠습니다, 하나님!”하고 나서는 그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죠. “네가 젖먹이의 마음가짐을 알아? 어린아이의 마음가짐을 알아? 네가 할 수 있는 힘으로 하는 그런 전쟁인 줄 알아? 네가 해낼 수 있는 전쟁이 아니야. 네가 이겼느니 살았느니 하는 전쟁이 아니고 이것은 낯선 죽음에 관한 문제야.” 낯선 죽음이 우리에게 들이닥쳤다는 거예요.
낯선 죽음에서는 무장되지 않은 무장, 칼 없는 칼이에요. 이게 기드온의 300명이 외쳤던 “여호와의 칼이요,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쳤던 사사기 7장 20절의 말씀과 일치됩니다.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19-20).
횃불 들고 항아리 드는 이게 무슨 칼이에요? 칼 없어요. 없는데 13만 5천 명(삿 8:10)을 이겼습니다. 구약 사람들이 그걸 실제로 역사 속에서 경험했어요.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못했어요. 왜? 믿음이 없어가지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봤지만 그들은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표적 본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나 신기하고 낯선 거예요. 그래서 교회 온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에요, 이게! 말씀을 잘못 전했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안 전하면 교회 오겠죠.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데 교회 온다는 이게, 이게 너무나 신기한 일이에요.
왜? 이건 누가 떠미는 거 같아요. 무장 아닌 무장, 칼 없는 칼, 하나님께서는 뭘 만들었느냐? 언약궤를 만들었습니다. 언약궤의 특징은 발가벗은 몸체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발가벗은 몸체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꼭 그 몸 같아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발가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고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백날 봐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부활의 흔적도 없고, 예수님이 외쳤던 말씀과 일치되거나 합치되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이 얼마나 이성적이고요, 조심스러운 사람들인지 몰라요. 검증에 검증, 또 검증해도 예수님의 벌거벗은 몸에서 어떠한 구원의 능력도 없었습니다. 구원의 흔적도 없었어요. “Anything that’s parts of you”(당신의 흔적이라면 뭐든지 찾겠습니다). 방금 영어 방언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의 노래 제목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보면 “당신의 흔적이라면 memory, 뭐든지 기억하겠습니다” 하는 가사가 나와요.
예수님의 흔적을 사람들이 표본실에 표본으로 해놓고 이렇게 훑어보고 저렇게 훑어보고, 우리는 예수님을 상상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봤어요. 그런데 실제로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고전 2:2) “예수님한테 무슨 구원의 증거를 찾아. 너 찾았어? 없어. 없는데 뭘 찾아.” 젖먹이와 어린 아이한테서 어떻게 승리의 흔적을 찾습니까?
시편 8편 계속 보게 되면 다윗이 이런 예언을 합니다. 3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해와 달을 볼 때 벌거벗었어요. 아무것도 인공적으로 꾸민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주님이 일하심의 모습이었어요. 그렇다면 꾸미고 또 꾸미고, 치마 만들어서 자기를 감추려 했던 인간이 이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해와 달의 그 청명함에 비교해서 추잡하기 그지없는, 자기가 자기 꾸미는 것에 온 몰두를 다하는 이 더러운 인간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이렇게 생각해주십니까?
하나님의 영적 전쟁의 시작은요, 바탕은요, 나 자신을 아는 거예요. 나는 내세울 것이 없다고. 믿음? 믿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 믿음은 받지도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왜 안 받는가? 우리가 믿어버리면 우리는 내 믿음 중심으로 재편돼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 중심으로 재편해요. 그것도 매일 같이 재편합니다. 매일 같이 낯선 죽음에 맞닥뜨리게 하고, 거기서 매일 같이 부활을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에스겔 37장의 이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뼈들만 소복이 있는 곳으로 갔어요. 1-2절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뼈들만 있어요. 이 뼈들이 어떤 뼈들이냐? 전쟁하다 죽은 전사자들의 뼈, 죽은 군인들의 뼈였어요. 지난 수련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인자(人子)는 이 뼈들을 우두둑우두둑 밟으면서 골짜기를 지나갈 수밖에 없어요. 골짜기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뼈들만 있는 뼈 무더기에 무슨 길이 있겠어요? 본인이 지나가면 그게 길이 되겠지요. 그 뼈들을 그냥 밟고 지나가지 않을 수가 없어요. 뼈를 그냥 밟고 가요.
이 하나님의 군사,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군인들이 영적 전쟁, 이방 민족과 전쟁하면서 결국 돌아온 것은 뭐냐? 이 뼈가 웬 말이냐? 전부 다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이에요. 이게 그냥 보통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했던 그 전쟁에서 적들이 이겨버리고 누가 졌느냐? 이스라엘이 진 거예요.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이 진 거예요.
여러분, 패배자가 구원합니다. 패배할 때 구원해요. 이 세상은 내기의 세상이고 게임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 인간이 인간답게 대우하는 것은 내기에서 승리했을 때입니다. 자기가 내기에서 승리했을 때 사람답다는 느낌을 가져요.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주식 투자했는데 오르더라.’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어버렸어요. ‘비트코인이 올랐다. 내가 투자 잘했다.’ 나의 정당성, 나의 결정이 이렇게 옳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살 이유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내기고 게임이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더 구원하고는 관계없는 사람이 돼요.
구원은 이 세상에서 벌이는 모든 내기에서 패배할 때, 더 이상 나는 내세울 것이 없고 젖먹이나 어린아이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 때 이미 주님의 구원이 시작된 겁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나를 일체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에요. 주식값 올라도 어차피 죽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몸은 망가지고요.
이사야 1장에 소 이야기 나옵니다.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여기서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세요. 구약에서는 ‘소’ 이야기입니다. “소들은 주인을 아는데 너희는 왜 주인을 몰라?” 이렇게 했는데 만약 우리가 ‘소고기’라면?
어떻습니까? 그냥 ‘소’가 아니고 난도질당한 ‘소고기’라면. 다시 말해서 이미 죽은 자라면 이러한 질책을 받을 이유가 없겠지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죽는 나를 시연(試演)하게 만듭니다. 매일 같이 죽는 날을 시연함으로써 내가 소가 아니고 소고기라면, 내가 소고기로 살고 있다면 내가 살거나 죽거나 구원받는 모든 능력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요.
나로 하여금 죽은 자로 만드는 그 말씀이 죽은 나를 살리는 거예요. 문제 굉장히 간단해요. 나를 사람대우하지 않는 그 말씀이 나를 살리겠다고 그렇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이 말씀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자꾸 말씀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말씀은 찾아와요. 일상을 통해서. 어떻게 매일의 삶이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를 시연해 주는, 그걸 늘 보여주는 삶이에요.
성내고, 화내고, 분노하고, 수모를 언급하고요.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따져보세요. 인생을 살면서요, 나는 나에게 속고요, 남에게 속고, 세상에 속아요. 안 속은 것이 없어요. 전부 다 내 기분에 속았고, 남의 말에 속았고. 그것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세상 전체가 지옥과 직결되어 있기에 지옥에 속은 거예요. 이걸 아는 것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와 성도의 교제는 육에서 영이 나오거든요. 죽음을 시연(試演)하면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어디서 해방되느냐? 날마다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이 ‘복역의 때’ 다시 말해서 이 죄책감에 우리가 못 견딥니다. 사람은 마귀가 되고 난 뒤에 신이 되었거든요. 완벽에 완벽을 늘 추구해요. 완전을 추구하는데 자기 행동이나 생각 남에게 무심코 하는 말들 자체가 나로 하여금 그 완전을 파괴하게 한다고요.
파괴하니까 허겁지겁 내가 더 보다 완전한 사람 되기 위해서 수습한다는 그 죄책감, 그 몸짓이 나로 하여금 세상에 더 짓눌리게 만들어요. ‘아이고, 내가 그런 말 안 하는 건데…, 그런 행동을 왜 했을까, 그런 실수를 안 하는 건데…’ 그 죄책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몰라요. 50년, 60년을 교회 다녀도 수심이 가득해요.
“내가 죽는 날이 오다니 너무 기쁩니다. 막 설레요.”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맨날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무슨 신앙생활을 합니까? 신앙생활 누가 하는데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지요. 신앙생활 할 잽도 못 되는 우리가 왜 신앙생활 합니까? 주께서 알아서 다 해주는데. 우리는 매일 같이 죽기만 하면 되는데요.
우리가 매일 같이 죽는 시연(試演)을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우리의 무거운 죄책감이 없어져요. 이걸 세자로 “배 째라!”입니다. 배 째라, 하면서 세상을 보면 세상에 세 가지 법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국가의 법이에요. 두 번째 도덕법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법이에요.
성령의 법부터 먼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에 ‘배 째라’가 나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국어 시간에 잘 배웠기 때문에. 주체가 내가 아니지요. 다시 읽어드릴까요?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여기에 ‘그’가 등장합니다.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이게 성령의 법이에요. 내가 법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성령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골로새서 1장 29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가 수고합니까? 주님이 수고하게 하신다, 그 말입니다. 주님이 수고하게 하신다. 교회 오래 나온다고 신앙 좋은 것이 아니고, 매일 죽는 즐거움에 빠져서 감사하다 그 말이지요. ‘소’에서 ‘소고기’가 되는 거예요. ‘소’에서 ‘소고기’가 되는 그것을 에스겔 37장에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속에 악의 원천이 들어있고 지옥의 영향력이 있으니까 그들로 하여금 패배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스라엘로 지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 뜻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매일 같이 내기에서 지듯이 말이지요. 사업 벌였다가 다 말아먹듯이.
그런데 에스겔 37장 11-13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군대가 되는 겁니다. 영적 전쟁에 필요한 군사가 이렇게 모집되는 겁니다, 부활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죽게 하는 말씀의 힘이 그들을 부활케 하는 힘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신앙의 영웅들이라 하는 것은 그들이 뭘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장차 오실 예수님이 주실 ‘믿음’이 신약 이전에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들을 예상 못 한 죽음에 직면케 했던 거예요.
예상 못 한 죽음에 직면했다는 말, 13만 5천 명과 3백 명이 게임이 됩니까? 이게 말이 되는 거예요? 얼추 싸울 맛이 납니까? 뭐로 싸울까요? 주님의 언약궤는 그 자체로 아무 무장도 없는데 언약궤와 막상 붙어 있으면, 그래서 언약궤가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되면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젖먹이같이 아무것도 없는 언약궤가 승리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언약궤 안에는 이미 저주가 있기 때문에. 이미 언약궤 안에는 저주가 있고, 언약궤 바깥에는 피가 있기 때문에. 저주를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겼다는 겁니다. 피가 이긴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 20-21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 언약궤, 십자가의 피 그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왔다는 말은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시민권이 보장되어 있는 입장에서 부활한 채로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하는 군인으로 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쟁에 관한 말씀이잖아요.
오늘날 우리는 무슨 전쟁 합니까? 영적 전쟁해야지요. 영적 전쟁이라면 적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악한 마귀, 세상 권세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악한 마귀야 나오라!” 하면 우리 말 듣습니까?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지옥의 영향력과 악의 원천이 우리 내부에 있기 때문에. 내 안에 이미 들어있어요.
내 안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 뭐냐? 국가라는 이 짐승의 법, 도덕이라는 법은 하늘나라에서 넣어주지 않습니다. 양심의 법, 이런 것은 넣어주지 않아요. 오직 주님이 와서 성령의 법으로, 주의 성령의 힘으로 매일 같이, ‘이 세상은 내가 있을 곳도 아니고 살 곳도 아니’라는 것을 매일 같이 경험하게 만드는 이 말씀의 현장성을 여러분이 온 몸으로 느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일하는 생업, 직장이든 가정이든 어디에서도 말씀대로 안 되는 구석이 없다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환경 속에서 우리는 죽어 마땅함을 알게 하고, 우리의 힘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도 알게 하고,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십자가 능력으로 이미 죄 사함받은 입장에서 현장에서 주님의 일하심을 목격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도와 성도의 교제를 할 때는요, 상대방에게서 묻어온 낯선 현실, 영적 현실을 찾아야 해요. 벌이 꿀이 없으면 벌통에 못 들어가는 것처럼 벌이 꿀 묻혀 오듯이 낯선 현실, 영적 싸움을 한 그 현실을 묻혀 오면 그것을 여러분이 서로서로 뜯어먹으면서 그렇게 성도는 교제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 전혀 관심도 없고, 그저 돈 벌고 밥 먹고 사는 이것이 다라고 여겼던 저희들. 주여, 말씀의 세계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훨씬 범위가 넓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전체 말씀이 완성된 그것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알려 주셨다는 것을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