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죄의 분리
2025년 7월 2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27-28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보이지 않는 분’이 나옵니다. 이는 모든 ‘보이는 것’들과 대비됩니다. 보이는 인간들은 거대한 문명 세계를 건설했습니다. 기어이 보이는 인간들끼리 뭉쳐서 살아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이 일방적으로 하신 것은 ‘유월절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유월절 사건에 대해서 인간들은 단호히 거부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와 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거절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애쓰고 노력하고 행했던 취지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유월절 취지에 대해서 인간들은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투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이지 않는 분의 취지가 아닙니다. 모든 자들이 천사에 의해서 멸망당함을 분명히 함에도 불구하고 왜 일단 사람들에 대해서 ‘건들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사람들은 못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간은 기껏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만 수집해 놓은 지혜를 의지하며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한 지혜와 비밀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마련된 것이고 그리고 인간이 죽고 난 뒤에도 그 의미가 본격화되고 확장되게 됩니다. 인간이 모르는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따라서 이 ‘보이지 않는 분’의 설계에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짧은 인생이란 계란 흰자에 폭 둘러싸인 계란 노른자 처지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태어나서 행했던 모든 것들은 이미 악마의 권세 아래 놀아나는 그런 행함입니다. 즉 인간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악마로부터 명령받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장에서 이 악마로부터 시험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면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버림받은 우리는 사람 취급해 주고 용기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은 사단입니다. 눈에 보이는 너를 어떻게든 죽어서 천국에 가야하지 않느냐고 닦달냅니다. 악마에는 출생 전과 죽음 이후에도 확장되는 복음의 비밀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추슬러야 함을 독촉하게 합니다. 즉 인간은 매일같이 자신을 고소하고, 자신을 추궁하고 그런 가운데서 그 고소에 맞서 자신이 그 고소에 대해 무죄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고소에 대해서 처벌을 면하게 위해 인간들은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처벌부터 먼저 하시고 죄는 서서히 알게 하십니다. 각자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복수극에 말려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본인들이 갖고 있는 악마를 내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악마는 끝까지 ‘자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독려합니다.
하지만 모든 불안과 공포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을 버리고 못하고 움켜 쥐고 죽을 때까지 끌고 갑니다. 인간 자체가 ‘버림받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기껏 ‘보이지 않는 분’께서 일방적인 일을 하시는 ‘흔적’임을 알지 못합니다.
모세의 시체를 놓고 미가엘 천사와 사단이 대결하는 장면도 그 중의 한 예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 1:9) 왜 사단은 모세의 시체를 달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모세의 시신이 모세 이후의 이스라엘에게 쓸모있다고 여기는 것이 사단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모세는 자신의 시신에 대해서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세는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생각할 자격이나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생각한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반면에 악마와 인간들은 ‘흔적’에 집중합니다. 영웅적으로 대단히 지도자 모세의 시신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신앙이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 사단의 의도였던 겁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사단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유월절 사건의 취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유월절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 담겨 그 사건의 향하여 이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궤의 존재입니다. 민수기 28:3에는 유월절 양은 매일같이 언약궤 앞에서 반복되게 됩니다. “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이 일에 종사하는 자들은 오직 레위지파 뿐입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관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인 자들입니다. 언약궤를 이동시키는 자들이 이들입니다. 만약에 다른 이가 언약궤를 건드리면 죽습니다. (삼하 6:6-7) 이처럼 ‘죽음 너머에서 날아오는 의미’가 담긴 상자입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행함이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된 사항을 그냥 펼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0-21)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의 특이성은 보이는 세계에서는 도저히 접근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의미를 강하게 밀어냅니다.
인간은 이미 죄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을 중간이 집어넣으시고 그의 희생 피를 통해서 이 죄를 처리하시고 새로운 ‘나’를 죄와 상관없이 생산해내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그 누구와는 견주거나 경쟁할 필요없는 ‘어린아이’같은 마음을 천국의 심성이 발휘됩니다. (마 18:3)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해서 더는 주눅들지 않기 위해 늘 십자가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6강-히브리서 11장 27-28절(나와 죄의 분리)25072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27-28절입니다.
히브리서 11:27-28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 ‘보이지 않는 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보이잖아요? 이 세상에서는 보이는 인간들끼리 의논해서 결정한다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보이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또 코치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죠.
그런데 성경은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같이 했다’라는 겁니다. ‘지금 보이는 인간들과 보이지 않는 분과의 우열을 논하자. 보이는 인간들이 그렇게 대수냐, 아니면 보이지 않는 분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가?’ 그것을 보자는 겁니다. 그것이 모세 믿음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보다 더 위에 두면서 살아가는 이 자세, 이게 믿음의 자세죠. 보이는 인간들은 발전소도 세우고, 빌딩도 세우고 많은 일을 했잖아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분이 한 일은 뭐냐? 보이지 않는 일이 한 일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아까 논리에 의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분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분이 우위에 있다면, 더 우선적이라면 인간들이 했던 모든 문명 그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무슨 사건이다? 유월절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 유월절 사건의 특징은, 본문에서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유월절 사건을 만드신 보이지 않는 분의 취지가 인간 족보의 전수자, 상속자에 해당하는 맏이를 죽이는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맏이가 있어야 대를 이으니까 인간이 뭘 생각하고 있고 뭘 의도하고 있는지를 간파해서, 자신의 기력의 첫 사람이 되는 맏이를 죽이고자 하는 뜻을 보이지 않는 분이 설계했고 그걸 이미 실시했어요.
이미 실시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건 변경이 안 됩니다. 사람을 죽이겠다는 이 하나님의 취지에 대해서는 어떤 변화도 없어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고집입니다.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반드시 죽이는 거예요. 사람을 그렇게 죽이는 이유는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 나로부터 버림받았어.’ 버림받았다는 것을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시는, 끝부분에 남기신 말이 그겁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버림받았다는 것을 규정하고, 거기부터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버림받았다는 것은 뭐냐?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관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소환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없어진다는 생각보다도 기어이 살아남아야겠다는 고집 같은 것들이 뭉쳐져서 인간 사회를 이룹니다.
‘우리 인간은 누가 뭐래도 단결하여서 버림받지 않도록 애쓰자.’ 이게 인간의 모토지요, 목적입니다. 어떤 인간도 부모 앞에서 “엄마, 아빠! 나 버림받을래.” 이걸 생의 목표로 삼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인간이죠.
그런데 그건 보이는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고, 보이지 않는 분의 이야기는 달라요. 보이지 않는 분은 “이미 너희는 버림받았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너희의 애씀을 꺾어버리고, 기어이 너희들을 버림받게 하고 죽이겠다.” 그 사건이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뜻은 ‘보이지 않는 분과의 관계를 주목하라’라는 거예요. ‘보이는 인간끼리의 관계에 주목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분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거기에 주목해야 그게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의 뜻은 보이지를 않아요, 보이질 않습니다.
인간들은 본인도 보면 보이고, 남들도 눈이 있으니까 보이고, 보이고 보이는 인간과 함께 득세하며 평생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정은 이렇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산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면 보이는 분과 관계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다 죽여야 하는데, 천사가 와서 사람들마다 다 죽이는데, 유월절, 보이지 않는 분이 했던 그 관계, 그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관계성에 주목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람 죽이는 천사들로 하여금 “쟤들은 죽이지 마. 건드리지 마.”라는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건드리지 않으심이 모세와 이스라엘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유효하게 실효성을 보여 주는가, 그 보여 주는 과정으로서의 이스라엘 역사가 광야로부터 개시되는 겁니다. 그 유월절이, 어떤 사람의 장자는 죽이고 어떤 사람의 장자는 천사보고 “건드리지 마.”하고 그들을 따로 뽑아내는 이유가 뭐냐? 무슨 원칙에 의해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죽음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직도 보이지 않는 분에게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분이 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뭐냐? 모든 의미를 죽음 이후까지 확장시키는 거예요. 인간이 이걸 못 해요. 교회 다닌다고 하지만.
참, 이게 되어야 하는데, 이게 되는 사람을 제가 참 고맙게 여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보통 이렇게 하잖아요. “우리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자.” 보통 세상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죠. “우리의 약속은 무덤까지 가져가는 거야, 알겠지?” 새끼손가락 걸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무덤까지가 아니고 무덤 이후까지 그 의미가 계속 확장이 돼요. 무덤 이후에,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 그리고 인간이 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확장되는 그 의미가, 인간이 살아있는 여기에 그냥 댐 터진 물이 덮치듯이, 합천 시내에 물이 들어오듯이, 산청군 읍내가 물에 온통 잠기듯이…, 죽음이 둑이 아니에요.
죽음 둑 너머에 있는 의미가 살아있는 의미를 덮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의 뜻이 보이는 인간들만이 있는 세계 속을 덮칠 때 이스라엘이 발생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타난 거예요. 의미를 그렇게 확장시키는 겁니다. 인간들 생각은 이래요. ‘사람이 뭐 죽을 때까지만 이런저런 말썽이 있지 죽고 나서는 다 끝이다.’ 하거든요.
끝이 아니에요. 죽고 난 뒤에도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의미가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의미와 같이 만나요. 인간세계가 동그라미의 노른자라면 인간의 생이라고 하는 것은 흰자 안에 폭 둘러싸여 있어요. 포함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 치고 하는 그 모든 의미는 노른자 안에서만 작동하는 의미에요. 흰자까지 번지지를 못하고. 그래서 “일이 잘못되면 칵 죽으면 되잖아!” 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보이는 인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만 의미가 있고 모든 것이 종결되는데, 보이지 않는 분의 의미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죽고 나서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그 의미가 확장이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의미가 어떤 식으로 확장되느냐 하는 거예요. 확장되는 그 이유는, 이 노른자 같은 생활, 보이는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일체 책임지지 않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든 일체 책임지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책임질 행동을 애초부터 부여받은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로마서 16장 25-26절에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이렇게 이야기해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똑바로 해!” 우리보고 똑바로 하라고 책임을 묻는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기껏 노른자에 해당되는 소소한, 사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허수아비 같은 개인이 행한 그 행함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관계거든요?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인간 사이에 흐르는 그 관계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책임지고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야기한 겁니다. 네 인생을 네가 책임질 필요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죄 알고 난 뒤에 처벌받고자 하는데 인간은 죄를 알고 처벌받는 게 아니고 처벌부터 받으면서 죄를 서서히 알아가는 그러한 인생을 보냅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는요, 소송하고, 그 소송에서 판결을 내리고, 그리고 심판이 집행이 되잖아요?
보이는 인간들끼리의 세계에서는 그렇죠.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하면 이미 인간들 속에 인생 자체가 처벌이에요. 왜냐하면 각자 마귀를 품고 있어요, 악마를 품고 있어요. 악마를 품고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분, 곧 모든 말씀은 “각자 품고 있는 마귀를 내어놓아라.” 이거에요. “그걸 내비쳐 봐라.”
그러면 인간 속의 마귀는 어떤 행동을 하는가? 본인이 고소하고, 본인이 그 고소에 맞서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 이게 인간들이 평생 가져가는 정신의 패턴입니다. 본인이 한순간도 본인을 고소하지 않은 적이 없고요, 본인이 고소한 것에 맞서서 스스로를 변호해요.
“나 그렇게 죄 있는 자 아니야. 난 무죄야.”라고 자기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그 세월, 90살까지 살면 90년 동안 그 일 하는 거예요. 80 살면 80년 동안 그 일 합니다. 40년 살아도 40년 동안 그 일을 하고 있어요. 마귀가 인간 속에서 그 짓을 한 거예요, 그 짓을!
‘네가 한 것을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니냐?’ 내가 나보고 그렇게 지적해요. 그러면 내가 나를 변호하기를 ‘나만 쓰레긴가?’ 그건 내가 나쁜 게 아니고 환경이 그렇게 돼서 그런 거라고, 내가 내 고소에 대해 적극 또 변호해요. 인간이라는 게 참 웃기지도 않아요.
이게 인간의 정신병이거든요. 마귀가 준 정신병이에요. 본인이 검사되고, 본인이 변호사 되고, 본인이 판사 되고 다 해요.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요. 그게 패턴입니다. 어떤 패턴?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에, 마귀한테 맨날 들볶이는 버림받은 전형적인 모습, 자기가 자기한테 고소하고, 자기가 자기한테 변명하면서 행동하는 그 모습.
그걸 노려서 주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성경 구절을 세 개 정도 읽어드릴게요. 여러분, 어떤 느낌인지 한번 들어보세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마태 16:27).
행한 대로 갚으리라. 딱 이 말씀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느낌이 오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2장 5-6절에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인간은 이제 죽었어요. 행한 대로 갚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2장 10-12절,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일한대로 갚아준다. 이 말씀을 딱 접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뭐냐? 이 말씀 앞에서 평소에 우리가 했던 그대로의 행세가 우리 본색을 그대로 나타내서 마중을 나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 속에 있는 마귀가 우리를 질질 끌고 그 말씀 앞에 우리를 강제로 세운다, 이 말입니다.
“그거 봐, 하나님이 너 행한 대로 갚는다고 했잖아. 너 똑바로 안 하면 지옥 가는 거야. 너 앞으로 정신 차려. 이제 알겠지?” 하고 마귀가 또다시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는 또다시 변명하고, 또다시 우리는 무죄를 증명하려고 평생토록 애쓰고 있는 거예요.
‘설교 시간에 내가 조는 것은 요새 내가 약기운 때문에…’ 이게 뭐냐? 누가 뭐랬어요? 본인이 무죄를 증명하는 거예요, 본인이. 매 순간 어느 장소든 가리지 않고. 누가 뭐랬어요? 이 무거운 짐, 여러분은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마귀는 날마다 우리를 들쑤시죠. “신앙생활 똑바로 하란 말이야.” 맨날 마귀가 들쑤시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야. 너무 들볶지 마.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구~!” 있다구~! 서울 사투리죠?
요한복음 3장 20-21절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보이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분이,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된 사항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인간의 행함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결정된 사항을 그대로 행함으로 나타내려 함이니라.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고소하리요?’
모든 말씀은, 주님께 모든 일에 어떤 경우라도 감사하라고 하는데 마귀는 이 유월절을 차단시켜요. 유월절 사건을 차단시키고, 십자가를 차단시켜서 감사 대신 뭐가 나오냐 하면 “열심히 하고 있다구~!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구~!.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더는 못 해!”
이게 선악 구조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작용할 때 인간의 의식 자체를 마귀의 의식으로 다 바꿔 놨어요. 한국에도 교회가 있잖아요. 교회를 마귀가 장악했는데 어떻게 장악하느냐 하면 “똑바로 살아야 구원받는다구!” 이런 식으로 장악한 거예요. 선악 체계를 가지고 성경 말씀에 하나의 기조, 하나의 시스템으로, 하나의 틀로서 집어넣는 거예요.
지난 강남 강의 때 그런 이야기 했어요. “성경 해석할 때는 선악, 윤리·도덕을 다 빼고 해석해 주세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도 언급했어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선악, 윤리·도덕을 빼고 성경을 한번 해석해 보라고요. 남는 것은 감사, 고마움밖에 없어요.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할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고.
쉽게 말해서 “네 생각 좀 하지 마라.” 왜냐하면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야지 자꾸 따로 잘라서 내 생각만 한다고요. 그러니까 창세 전의 비밀이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걸 가리죠. 창세 전의 비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그게 나타나지를 않는 거예요.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미 결정된 사항을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것은 창세기 2장 17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똑같은 거예요.
아까 한 말씀 다시 이야기하면, 선악과 심어 놓은 것이 인간들과 의논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심어 놓은 거예요. 그렇다면 유월절은 보이는 인간들에게 물어보지 않고서 한 보이지 않는 분의 일방적 결정이었습니다. 그 결정이 중심을 차지해요. 하나님께서 그 중심의 취지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건들지 말아야 할 자와 천사로 하여금 건드려야 할 자를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했어요. 이스라엘은 그 특이성을 보여 주는 겁니다. 심지어 인간은 자기의 신체에 대해서도 일체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있는 유다 1장 9절에 보면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모세는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었으니 시신이 있을 거잖아요? 예수님처럼 사흘 만에 부활한 것도 아니고. 신명기 34장 6절에 보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가 죽었는데, 그 영웅이 죽었는데, 지도자가 죽었는데 그 묘를 아는 자가 없어요. 김영삼 대통령 죽었죠. 김대중 대통령 죽었죠. ‘리’, 리승만 대통령 죽었죠. 묘가 다 있잖아요. 현충원 가면 묘가 다 있어요. 보이는 세상, 보이는 인간 세상에서는 묘지가 있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40일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돼서 온 모세는 본인의 시체에 대해 본인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모세는 자기 생각이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방해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살까? 어떻게 바르게 할까?’ 이런 생각 자체가, 지금 창세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너는 이렇게 행해야 해.’라는 주님의 일방적 과제에 대해서, 그 작업에 대해서 모세의 존재 자체가 방해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 시체까지.
그런데 그건 40일 동안 하나님과 관계있었던 모세의 관계고, 모세 말고 다른 사람 같은 경우에는 이미 마귀가 각 사람 속을 장악하고 있잖아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생각에 들어가자.’ 이게 마귀 생각입니다. 교회마다 생각이 그거잖아요.
인간 자체가 이미 버림받았는데 인간적인 정신으로 천국 가겠다는 것은, 인간 정신으로 천국마저 버려 놓겠다는 마귀의 앞잡이 생각에 불과한 거죠. 어떤 인간이 천국에 간다면 중간에 인간 정신이 바뀌어져야 돼요. 바뀌지 않으면 천국 버려놔요.
천국은 그런 인간 받지도 않아요. 천국 가기 전에,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자가 죽기 전에 천국이 어떤 세계냐 하는 것은, 천국의 의미가 자기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겁니다. 그 흘러들어오는 게 뭐냐? 일체 내 행위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게 없다는 겁니다.
일단 약간 기분 좋은 느낌 들겠지만 기분 좋은 걸로 끝나면 안 돼요. ‘왜? 그 이유가 뭔데? 굳이 왜 그래야 하는데? 왜 내 행동에 책임을 지지 말아야 하는데? 왜 나는 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가 뭔데?’ 그걸 아셔야 해요.
그게 유월절 사건이에요. 유월절 사건은 인간을 보고 ‘넌 죽이고, 또 넌 살리고…’가 아니라 인간과 상관없이 관계 되시는 다른 분과 관련지어서 천사는 그분의 지시에 따라 살릴 자는 살리고 죽을 자는 죽인 겁니다. 인간과 상대한 게 아니고요.
“전부 피 다 짜내. 다 짜내서 당신들 사는 집 문지방에 발라.” 이랬습니까? 웬 낯선 존재가 끼어들잖아요, 어린 양이라는 낯선 존재가. 그러니까 이 낯선 존재는 소위 구원 받아야 된다는 사람과 대체물로 들어가는 거예요, 대체물로.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5장에 대신 죽으심입니다. 대체물로 개입한다고요.
내가 책임지고자 열심히 살았던 내 인생에 대체물이 끼어드는 거예요. 그 대체물과 보이지 않는 분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하여 살리겠다는 그 계획인데 우리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우리가 죽고 난 뒤, 그게 바로 노른자를 둘러싼 흰자의 세계에서 확장된 의미입니다.
이걸 로마서 16장에서는 감추어진 비밀, 이 감추어진 비밀을 두 자로 ‘복음’이라고 해요.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마귀의 생각은 달라요. 마귀의 생각은, ‘모세는 대단하다’라는 거예요.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악마 자기 손아귀에 엮기 위해서는 ‘모세의 시신을 찾아서 그 시신을 기념하게 되면 하나님을 따르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이스라엘이 생각하게끔 악마가 그 시신을 가져가겠다는 것이 바로 유다서 1장 9절의 생각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미가엘 천사가 억지로 말릴 수는 없고 ‘다만 주께서 널 책망하기를 원한다. 너의 그 짓도 이스라엘 중에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에게 필요하니까 주께서 허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그건 나쁜 짓이야’라고 미가엘은 책망만 했을 뿐이라는 그 내용이 유다서 1장 9절에 나와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을 사람 취급해 주고, 살 가치를 부여 해주는 것은 오직 사탄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탄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네 고유의 가치, 의미 있어. 네가 남한테 지면 안 되잖아.” 보이는 인간과 보이는 인간 사이의 경쟁.
그런데 주님의 뜻은 마태복음 18장 3절에 보면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뭐 아주 단호해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12:17), “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이렇게 단호한 것처럼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뭐냐? 경쟁이 없어요. ‘네가 이기니, 내가 이기니’가 없어요. 경쟁이 되려면 남하고 견주어서 못지않은 어떤 자기 의로움? 자기 순결? 자기 순수? 이게 있어야 해요. 그런데 자기 순수, 자기 순결을 만들기 위해서 본인이 본인을 고소해요.
본인이 본인을 고소해 놓고 본인이 그걸 심사해요. 판결해서 본인이 무죄인 것을 증명하면서 드디어 자기는 순수에 이릅니다. 이 순수, 이 순결을 가지고 교회 나와서나 다른 세상 만나서 ‘나 이렇게 잘났다.’ 이런 식으로 버티기로 나가니까 누가 괴롭고 누가 피곤하냐 하면 본인만 되게 피곤한 거예요. 사는 게 그렇게도 피곤한 거예요.
직장이라고 나갔는데 구박을 안 하는 날이 없고, CCTV를 툭 하면 열어보지를 않나, 이건 뭐 도대체 세상이라는 이 꼴이 날 못 잡아먹어서 환장한 세상이에요. 날 괴롭게 하려고 환장한 세상이에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버티는데 버틴다고 또 힘들어요.
왜 버티죠? 뭐 잘났다고 버팁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를 알고 처벌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처벌부터 먼저 주고 죄를 알아가게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주님이 벌이는 복수극이기 때문에. 인간은 서서히 마모되어 가면서 마모되어 가는 와중에도 살아보려 애를 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세계인데, 보이지 않는 분이 계시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눈치채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그 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모세로부터 유월절 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민족을 만들어요. 그러면 모세 눈에 보이죠? 그다음에 이스라엘 눈에 보이죠? 유월절 양을 잡거든요. 그때부터는 유월절 양을 잡아요. 매~ 하는 양이 보이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주께서 보이는 것들을 동원시켜요.
오늘날 ‘나’라는 게 보이기 때문에 나까지 동원시키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린애가 자다가 “엄마! 나 배 아파.” 이렇게 하는데 새벽이라 약국도 문을 닫았습니다. 엄마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금방 낫는다. 엄마 손은 약손~!” 이렇게 하죠.
눈에 보이는 것은 아이의 배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 또 눈에 보이는 것은 배꼽 드러낸 어린 아들, 이게 눈에 보이는 거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뭐냐? 사랑이죠, 사랑. 두 사람이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이 새벽에 운동 나간다고 들썩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곤히 잠들어 있는데 혼자 우당탕탕, 나가다가 발치의 물건들에 부딪히고 하지요.
이러면 빠져나감 자체는 눈에 안 보이는데 빠져나가면서 물그릇 발로 차고, 우당탕탕거리면서 이것저것 밟는 건 눈에 보이죠.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걸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전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본인들이 열심히 율법대로 살면 구원되는 줄 알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진정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죽는 것이라는 것을, 그 죽는 것을 통해 죽지 않는 것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겁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짧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짧게 줄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인간은 죽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고’ 이런 뜻이죠.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고, 말씀이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 인간은 상황 따라 움직일 뿐인 하나의 우당탕하는 그릇에 해당되어서 보이는 흔적만 남을 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흔적만 보고 그 관계를 몰라요. 아버지와 예수님이라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주목을 못 해요.
양을 잡았던 유월절은 흔적이에요,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내 아버지고, 난 아들’이라는 이것은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보이지 않는 관계에요. 흔적은 그냥 흔적일 뿐이에요. 흔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관계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나는 그의 아들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이 증거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사람들이 예수님 붙들고 앞뒤를 보면서 “어디를 봐도 사람이지 이게 무슨 어린 양이냐?” 아무리 따져도 소용없어요. 흔적만 보면서 그 흔적이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 안에 말씀이 운동하고 있다는 걸 몰라요. 왜냐? 나마저도 흔적이기 때문에요, 나마저.
내 시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어떻게 사느냐,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느냐, 책임을 내가 지느냐, 안 지느냐 이것조차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책임질 필요 없는 흔적과 흔적의 연속이에요. 보이지 않는 분을 위한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는 보이는 예수님을 붙들고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럼 뛰어내려 봐. 흔적을 보여 봐, 흔적을! 놀라운 기적을 보여 봐.” 이런 식으로, “배고프지? 저 돌로 떡을 만들어봐.” 계속 흔적의 흔적에 대해 치중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고 살 것이다. 그러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계속 흔적을 쥐고 그게 전부라고 독촉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에 평생 말려들었고, 우리는 그것 가지고 내가 나를 재판했고, 고소하고 있었고요. 좀 잘한다 싶으면 남과 견주어서 게임에서 안 지려고 하고, ‘내가 잘났나, 네가 잘났냐? 내가 성경 더 많이 아나, 네가 더 많이 아나?’ 시합하려고 하고. 인간세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공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이야기했지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나라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나라’가 아니고 ‘공포’에요, 공포. 사람을 의식하고 나를 의식하는 이 자체, 이 공포는 평생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아요.
따라서 하나님의 유월절, 일방적으로 설정한 사건인 유월절,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터뜨려버린 십자가, 거기서 눈 돌리게 되면 그다음부터 우리는 마귀의 시험,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은 것처럼 마귀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옳은가 그른가 그런 것 알아서 뭐 하는데요? 알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말씀대로 행하기 때문에. 이게 바로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나 사이에 주님의 일하심의 하나의 흔적으로서의 내가 존재한다는 그 관계성이, 유월절 관계성, 십자가 관계성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한계선을 유지시켜주는 겁니다.
유월절은 뭐냐? 영적 세계의 한계선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이 유월절 취지가 어떻게 보이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어떤 흔적을 남겼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나타내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라고 한 거기까지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그 연결을 우리가 알아채야 하겠지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사건을 이스라엘 무리 속에 집어넣어서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의 이동과 더불어 함께 이동하는 사건으로 만들었어요. 민수기 28장 3절에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상번제,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또 한 어린양은 해 질때 드리라.’라는 겁니다. 어린양이 이동하는 이스라엘에 장착되는데 그 위치가 어디냐? 바로 어린양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뭡니까? 언약궤가 뭐냐 하는 거예요.
사무엘상 4장에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앞에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을 전쟁시키는데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언약궤와 분리됩니다. 이스라엘은 오해해서 ‘언약궤가 있으니까 우리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생각해서 ‘우리는 안 진다, 이긴다’라고 여겼는데 언약궤 동원했어도 언약궤를 빼앗기고 전쟁에서 졌어요.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하나님께서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나와 죄를 분리시킵니다. 나와 죄를 떼어놔요. 나와 죄를 떼어놓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붙어 있는 나를 죄와 떨어뜨린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언약 관계로 새롭게 생산된 나를 새롭게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옛날에 죄와 더불어, 마귀와 함께 있던 나는 죄가 떠내려갈 때 같이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죄를 처리해 줄 때 옛 자아도 같이 떠내려 가는 거예요. 떠내려간 뒤에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통해서 죄는 따로 처리하고 죄 말고 건드리지 않는 나를 따로 생산해서 그 따로 생산한 것만을 건져서 천국에 집합시킵니다.
이게 떼놓는 작업이에요. 이 떼놓는 작업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첫 번째 했던 조건은 뭐냐? 언약궤 들여다보면 죽는다는 거예요. 사무엘상 6장 19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보면 죽여버려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정녕 죽으리라’(창 2:17)로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죽는 것은 당연하고요, 그 죽는 인간을 하나님의 새로운 하나의 천국 백성의 흔적으로서 지금 활용하려고 하는 가운데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에게 작동해서 나를 천국에 보낼 수 없고요, 나를 천국에서 떼놓는 작업부터 먼저하고 천국과 무관한 나를 천국에 집어넣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집어넣고,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를 집어넣어서 내가 만들지 않은 새로운 나를 만들어서 천국에 집어넣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시는 겁니다.
아, 내가 숨이 다 찹니다. 이것도 모르고 교회 나와서 자기 합리화하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대체 쳐다보기를 십자가 쳐다보면 되는데 ‘내 행동이 바른 자세인가?’ 이러고 있다고요. 바른 자세를 해서 뭐 할 건데요? 그런 것 개나 줘버리세요.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그 언약궤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제 모셔 오려고 합니다. 모셔 오는데 또 사달 났어요, 또 사달이 났어! 사무엘하에 보면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 모셔 올 때…, 6장 6-7절입니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지금 소들이 뛰니까 언약궤가 넘어지려 하잖아요. 그러면 본능적으로 ‘어, 언약궤 넘어지네?’ 하고 붙들어야지요. 귀한 거니까요, 귀한 거니까 붙들었는데 붙들었다고 그걸 죽여버린 거예요. 이런 말입니다, 이걸 알기 쉽게 하면.
목사는 교인들을 구원하는 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주님이 직접 하셔요. 그런데 목사가 나서서 누구 구원시켜야 한다고 설쳐대는 것은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마치 십자가 진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똑같아요.
여러분이 오늘날 선지자고 목사예요. 복음을 전파할 뿐이지 남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본인도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뭘 구원해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가거든요. 어린아이 자체가 보이지 않는 분과 연관되어 있어요. 보이는 인간들과 보이는 자기 앞가림이 아니고요.
언약궤의 특징이 뭐냐? 분명히 있어요. 있는데 언약궤 빼놓고 다른 모든 있음은 작살냅니다. “네가 네 있음과 나 있음, 네 존재와 이 존재가 같다고 보이느냐? 너는 보이는 거야. 나는 보이지 않음을 보여 주는 있음이라고”요. 언약궤가! 왜? 이동용 유월절 사건이 계속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같이 아침저녁마다 어린양을 언약궤 앞에서 바치기 때문에.
그래서 민수기 4장에 보면 조건이 있어요. 15-20절에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맡을 것은 등유와 분향할 향품과 항상 드리는 소제물과 관유며 또 장막의 전체와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성소와 그 모든 기구니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말찌니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이같이 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 할 일과 그 멜 것을 지휘할찌니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
이것은 뭐냐? 언약궤를 이동할 때는 반드시 레위지파 특히 고핫자손을 통해서만 이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 역대상 15장에서 그걸 다윗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역대상 15장 14-15절에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케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이렇게 레위지파한테 맡기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해야 할 일은 이겁니다. 산자와 상대하지 않고 죽은 자와 상대하는 거예요. 뭐냐? 죽은 자가 우리를 살리기 때문에. 이게 신자입니다. 오늘날 교회 참석하는 신자의 특징이 뭐냐? 세상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죽은 자가, 없는 자가 살려요. 있는 목사가 살리는 것이 아니고, 있는 장로나 집사가 살리는 게 아니에요. 있는 아버지 엄마가 날 살리는 게 아니에요.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살았습니까? 우리 회사 사장님이 날 살리는 게 아니에요. 편의점 주인이 날 살리는 게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분이 살리고 이미 죽은 분이 살리는 거예요. 우리는 그분의 흔적이니까요. 예수님이 버림받을 때 이미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은 자에게는 아무 책임을 묻지를 않습니다.
책임 묻는 것은 마귀밖에 없어요. 똑바로 하라고, 신앙인답게 살라고, 바르게 살라고. 그 짓 한자가 누구냐?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그 짓한 자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에요. 20절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여러분 속에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어린양도 흔적으로 없어지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직접 어린양이 되어서 다 끝냈어요.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느 영화 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당신의 상처는 어디서 받았어요?” 하니까 “내가 약상자에 받혀서 상처받았다”라는 거예요.
그 대사가 저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게 다가왔어요. “어디에 받혀서 상처가 났느냐?” “약상자에 받혀서 상처가 났다.” 사람을 고치는 그 약상자에 받혀서 상처가 났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딱 듣는 순간 갈라디아서 6장 17절이 생각났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받혀서 십자가가 여러분의 속에 들어와서, 이제는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 십자가의 그 다 이루심이 육신의 죄를 발굴하면서 그 죄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어떻게 관계되고 만나는지, 유월절 사건이 우리를 통해서 어떻게 반복되는지 그 십자가 유월절 사건, “나는 너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그 사건만 드러내면서 평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주목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저 보이는 세상 눈치코치 보면서 평생을 피곤하게 살았습니다.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고민거리고 공포와 불안을 조성했습니다. 이 마귀의 술책에서 그것조차도 다 주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하나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